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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권. 11장 몽혼지약 (100/228)

11장 몽혼지약

- 초식을 잊었으니 무극의 경지요, 

  도(刀)에 혼이 붙었으니 이는 도신(刀紳)이라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북궁명을 향했다.

"나는 매형을 믿습니다."

북궁명의 말엔 힘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궁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장서서 걷던 야한이 미묘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들은 아직도 권왕을 잘 모르는군. 권왕을 너희들의 잣대로 재 놓고 옳으니 그르니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필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도 어차피 권왕의 마음이다. 그런 것으로 권왕을 옭아매려 한다면 네놈들부터 권왕의 주먹맛을 볼 것이다. 내가 본 권왕은 숙명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라 숙명을 만들어 가는 자다."

금룡단의 상당수가 무슨 뜻인지 의아한 표정으로 야한을 바라보았다.

몽진나한이 조금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미타불, 교두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 이해한 것은 아닙니다. 하신 말에는 어떤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중놈이라 생각이 많군. 괜히 어줍지않은 이유나 명분으로 권왕을 네놈들 뜻대로 움직이려 하다간 맞아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몽진나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슴이 뜨끔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왕구가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당연합니다. 주군이신 권왕 아운님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그 분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이 고금제이충복인 왕구의 벽을 넘어야 할 것입니다."

갑자기 엄숙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몽진나한에게는 조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한 명의 노인이 평원을 걷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가 입은 낡은 옷이 능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루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노인의 모습엔 조금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현기가 가득한 두 눈에서는 밝은 정광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노인은 걸음을 멈추고 멀리 보이는 하나의 거대한 파오를 바라보았다. 

'십 년을 찾아 헤멘 끝에 겨우 여기까지 왔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다.

언제부터인가 중원의 거대한 음모에 대평원의 용사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그 음모의 주축을 찾아서 이십 년을 숨죽이며 살았다. 그 아래 흐르는 거대한 음모의 축을 찾으려 했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겨우 실마리를 찾았을 때, 오히려 절망해야 했다.

음모의 줄기가 너무 커서 함부로 건드릴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십년 전 우연히 얻은 하나의 단서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왔다.

노인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린이는 잘하고 있을까? 너에게 미안하구나. 나 때문에 네가 많은 고난을 겪고 있을 텐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구나."

하나밖에 없는 제자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의 제자를 믿었다. 제자를 믿었기에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노인은 파오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때 한 명의 장년인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둘의 거리는 아득하게 멀었지만 노인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꼇다.

'뛰어난 자다. 저자가 바로 배후의 대전사라 불리는 자일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점차 다가올수록 노인은 나타난 사람의 무공이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대단하다. 대체 누구일까?'

노인은 다가갈수록 상대가 궁금했다.

큰 키에 당당한 덩치의 남자는 몽고 장군의 복장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맹호의 기질이 보이지만 그의 흑백이 뚜렷한 두 눈으로 보아 그가 맹장이면서도 지장의 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광전사 명환이었다.

명환은 나타난 노인을 바라보며 불같이 타오르는 승부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멀리서 노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부터 그는 강자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불타는 시선으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몸에 끓어오르는 전사의 피가 그의 심장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대전사가 그렇게 명령하였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명환은 노인과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추었다.

노인은 상대가 자신을 마중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안색이 굳어진다.

'허허, 저런 자를 심부름꾼으로 쓰는 사람이란 말인가? 대체 얼마나 뛰어난 자이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강한 호기심이 노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명환입니다."

"장문산입니다."

노인의 이름을 들은 명환의 안색이 미미하게 변하였다.

장문산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봉명우사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늙어서 지는 별일 뿐입니다."

"대평원에선 새벽별이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한답니다."

노인이 가볍게 웃었다.

"그건 다행입니다. 나에게도 마지막으로 빛을 발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명환이 마주 웃으면서 말했다.

"봉명의 이름은 언제나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들었습니다."

"말뿐이라 걱정입니다."

명환은 가볍게 웃으면서 장문산을 보았다.

은은하게 드러나는 기세를 보며 다시 한 번 솟구치는 무인의 열정을 자제하게 힘들었다.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늙은이를 기다렸다니, 제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나의 기운을 벌써부터 감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면?'

장문산은 묻고 싶었지만, 눌러참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가볍게 굳어지는 것을 감추진 못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장문산은 묵묵히 명환의 뒤를 따랐다.

곧 만나야 할 사람을 생각하자,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가볍게 긴장이 된다.

한참을 걸어서 거대한 파오 앞에 나타났다.

파오 앞에 도착한 명환이 그 문을 열고 말했다.

"여기부터는 혼자 들어가셔야 합니다."

장문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파오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장문산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꼇다.

한 명의 노인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호랑이 가죽 위에 앉아서 한 자루의 도를 다듬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그저 평범했다. 그러나 신주오기의 한 명인 봉명우사 장문산은 노인의 모습이 파오 안을 꽉 채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직감적으로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였다.

노인은 손질하던 도를 옆으로 놓으면서 장문산을 바라보았다.

장문산은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장문산이 대평원의 기인을 뵙습니다."

노인은 담담한 시선으로 장문산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

순간 봉명우사는 자신의 모든 것이 그대로 발가벗겨진 채 노출 되는 기분을 느꼇다.

자신은 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자신을 알고 자신이 올 것도 알고 있었다.

장문산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놓아햐 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자. 상대가 나보다 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항하려 한다면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패한다.'

장문산이 눈을 떳다.

그의 눈은 어느새 담담해져 있었다.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웃는다.

"중원엔 사람이 많군요. 이리 앉으십시오."

장문산은 노인 앞에 마주 앉았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노인의 시선 속에서 장문산은 그 어던 것도 읽으려 들지 않았다. 굳이 상대의 것을 알려고 하지 않으면 신경 쓸 필요가 없고, 대항하지 않으면 싸울 필요가 없다.

"먼 길을 오셨는데 따로 대접할 것은 없고, 이것은 마유주란 술입니다."

노인이 술을 따른다.

장문산은 그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텁텁하지만 목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노인은 장문산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장문산이 나무로 만든 큰 잔을 내려놓자,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름을 잊은 지 오래라, 그저 도흔(刀魂)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장문산은 노인에 옆에 놓은 환도를 바라보았다.

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러지고 남은 도신의 길이가 겨우 삼 촌에 불과했다. 만약 도신이 남아 있다면 제법 묵직한 환도였으리라.

"초식을 잊었으니 무극의 경지요, 도(刀)에 혼이 붙었으니 능히 도신(刀神)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노인은 장문산을 바라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가고자 하는 길이지만, 아직은 멀었습니다."

장문산은 노인을 보았다.

굳이 상대의 마음을 읽으려 할 필요도 없이 상대의 말에 진심이 담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디까지 도달하려 하십니까?"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중입니다."

장문산의 안색이 굳어졌다.

'절대의 경지에 도달한 후 가고자 하는 길이 뭘까?'

장문산은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그의 생각을 짐작했기 때문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래, 자신은 있습니까?"

갑작스런 노인의 물음이었지만 장문산은 그 질문의 요지를 알고 있었다.

장문산은 고개를 흔들었다.

"오기 전엔 사 할의 자신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입니다."

"그래도 해 보실 생각이십니까?"

"누군가는 먼저 가야 할 길입니다. 내가 죽어서 다음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해야지요. 어차피 죽을 때가 다 된 늙은이입니다."

노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산이 잠시 노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 보십시오."

"이미 끝난 전쟁입니다. 꼭 다시 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강호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전사님답지 않습니다."

노인이 장문산을 바라보았다.

"끝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장문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도저히 상대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장문산은 노인의 깨끗한 시선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한 음모의 주체자로서는 지나치게 강직하고 깊은 눈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 무림맹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은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노인의 입가에 고소가 걸렸다.

"중원에 기인이사 가 많듯이 대평원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겐 나 못지않은 사제 한 명과 제법 괜찮은 제자가 한 명 있습니다. 비록 내 사제이고 내 제자이지만, 각자 자신의 힘으로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나와 다르지만, 그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무림맹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은 나와 별개의 문제입니다."

장문산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아, 참으로 알면 알수록 두렵구나. 그렇다면 이 노인과 같은 자가 대평원에 둘이나 더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중원무림의 일에 관여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럼 또 한 명은?'

의문이 들었다.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면 분명 중원 무림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었다.

무림이 아닌 곳.

정말 그렇다면 무림의 앞날은 물론이고 황궁까지도 위험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황궁도 풍전등화의 상황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문산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전통적인 몽고인의 복장이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원에 침투한 대원의 후예들은 한인의 문화를 그데로 받아들인 상태였다. 그들은 생활방식과 언어, 하다못해 사고방식까지도 한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이름까지도 한인의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중원 무림을 정복했을 때, 한인 무사들의 반발심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노인은 다르다. 이 노인이야말로 대평원의 혼이 느껴진다.

장문산은 도혼을 만나고 얻은 것이 많았다.

실제 장문산도 무림맹을 중심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었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그 안을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하면 그들을 견제하고 싸워야 할 무인들이 모두 몰살을 당할수도 있었다.

그래서 알아도 모르는 척, 궁금해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자, 상대적으로 더 이상 진전이 없었고, 적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봉명우사 장문산은 결국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모든 일의 배후자라 생각했던 대전사는 그저 홀로 고고한 노인일 뿐이었다. 물론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성을 가진 노인이라 할 수 있었지만.

장문산은 노인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무인의 길이요, 무사의 덕이외다. 그걸로 무림과 겨루려 합니다."

노인의 말은 나직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장문산은 가슴이 덜컥 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막상 듣고 보니 새롭다. 문제는 노인이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잘못 오지 않았다. 이 노인이야 말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자다. 진정 무공으로 이 노인을 이기지 못한다면 중원의 미래는 힘들어진다.'

장문산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 역시 장문산을 바라본다.

"장문산이 대전사님께 한 수 가르침을 원합니다."

노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신주오기의 장우사(봉명우사의 약칭)라면 나도 환영하는 바입니다. 마침 근래에 작은 깨우침이 있어서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던 참이었습니다."

봉명우사의 안색이 조금 더 굳어졌다.

작은 깨우침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문산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 또한 무공 대결에서 패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안 되면 동귀어진이라도 하리라.'

모질게 마음을 먹은 장문산이 포권지례를 하였다.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은 그저 밝게 웃을 뿐이었다.

장문산은 자신의 마음을 읽힌 기분이었다.

대평원의 아침은 끝없이 너른 초원으로 조금씩 얼굴을 내미는 태양의 축복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명의 햇살을 받으며 뿔 고동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아침.

대평원의 한적한 장소에 세 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대전사 도혼과 봉명우사 장문산이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광전사 명환이 서 있었다.

도혼은 장문산을 보며 자신의 도를 들어 올렸다.

삼 촌의 길이.

그걸로 무기를 삼을 순 없을 것이다.

도혼은 부러진 도의 면을 쓰다듬으며 장문산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나는 이 도를 들고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자와 겨룬 적이 있습니다. 무려 삼천 초를 겨루고 겨우 이겼지만, 나의 환도는 이렇게 삼 촌을 남기고 부러졌습니다. 이겼지만 힘겨운 싸움이었고, 나의 한계를 알고 대평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부러진 도를 찾고 천하를 이 도 아래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러 하였습니다. 그 길을 찾는데 백 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칠촌을 완성했습니다. 이 도가 완성되면 나는 중원으로 갈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겨루었던 자와 혼의 약속을 지키고 내 뜻을 이룰 것입니다."

노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기가 맴돌았다.

"검혼과 도혼의 약속이지요."

장문산의 눈이 꿈틀하였다.

노인이 말한 검혼이 바로 노인의 도를 자른 중원의 고수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장문산은 그런 별호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대와 그 이전의 대에서도 십사대고수들을 능가하는 고수들은 없었다. 그것이 장문산이 아는 진실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도혼의 말을 들어보면 분명 검혼이란 무사가 있었고, 그는 도혼과 겨룰 수 있었던 유일한 중원의 고수였다는 말이된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노인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장문산의 눈살이 미미하게 떨렸다.

"나를 통해서 검혼이란 분을 찾으려는 것입니까?"

"이제 시작할 때가 된 모양입니다. 기다리는 아이가 지루하겠습니다."

장문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이미 자신의 내공을 극성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노인이 도를 든 손을 늘어트렸다. 그리고 도가 조금씩 길어지더니 일 척을 이룬 후에 멈추엇다. 그것을 본 장문산은 아연한 표정으로 노인의 도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것인가? 도가 그냥 길어진 것도 아니고 도강도 아닌 것 같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기세도 없고 도강의 맹렬함이나 웅장함도 없었다.

그저 칠 촌이 더 늘어난 도.

다시 보아도 그저 도의 길이가 늘어난 정도 이상은 아니었다. 한 데 다시 도를 바라보던 장문산의 얼굴이 부르르 떨렸다.

일 척에 불과한 도가 마치 거대한 산악처럼 자신을 눌러오는 기분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도는 점점 더 무서운 기세로 장문산을 눌러오고있었다. 

장문산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모아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도의 무게는 장문산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벗어나야 한다. ㅂ서어나지 못하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진다.'

장문산은 몸을 움직여 도의 기세가 만든 그물을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다시 멈춘다. 그가 움직이려 하자, 도가 움직인 것이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두 쪽으로 갈라놓을 것 같은 기세였다.

마음을 멈추자, 도의 기세 또한 공격을 멈추엇다.

장문산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독하다. 지독하게 강하다. 아아, 내가 그동안 오만했구나. 내정도의 무공으로는 어림도 없는 경지다. 이자는 내가 마음속으로 완전히 굴복하길 바라고 있다. 으윽, 이대로 있으면 그냥 진다. 지더라도 이렇게 패할 순 없다.'

장문산은 혀를 물었다.

피가 고이면서 화끈한 고통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가라!"

고함과 함께 장문산의 신형이 대전사를 향해 달려왔다.

도혼은 감탄한 듯 공격해 오는 장문산을 바라보았다.

"과연 신주오기의 이름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외다. 능히 검혼 이후 최고의 고수들이라 하더니 그럴 만한 자격이 있소이다."

노인은 도를 들어 장문산을 내리쳤다.

아주 느릿한 동작이었다. 그렇지만 공격해 오는 장문산보다 빠륵 ㅔ도가 허공으로 올라갔다 내려오고 있었다.

장문산이 달려오던 그대로 멈추엇다.

거대한 기운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 오고 있었다.

그 미증유의 힘은 너무도 웅대해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았다.

보법을 펼치면서 중첩장을 한 번에 수십여 번이나 휘두르면서 대항하였다. 거대한 도가 갑자기 미세하게 갈라진다.

번쩍!

섬광이 일 척의 도에서 뿜어졌다가 사라졌다.

"으으으."

장문산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조금씩 그의 몸에서 피가 베어 나오더니 오른팔이 툭!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장문산은 빠르게 팔을 지혈하고는 떨어진 손을 집어들었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과연 세상은 넓고 무의 길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패자 장문산은 비록 지금 돌아서지만, 중원의 혼은 당신을 반드시 이길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내가 먼저 중원으로 들어서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장문산의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어렸다가 사라졌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마중하지 않겠습니다."

장문산이 돌아섰다.

대전사 도혼은 흔들림이 없는 시선으로 장문산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명환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엔 황홀함이 어려 있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끝을 보았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서서 조금 전의 광경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중이었다. 대전사는 그의 그런 모습을 힐끗 바라본 다음 돌아섯다.

아마도 명환의 사색은 몇 시진이 지나야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조금 더 강해진 광전사 한 명이 탄생할 것이다. 명환을 이번 대결의 참관자로 선택한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돌아서서 가는 장문산의 얼굴은 무척 참담해 보였다. 상대와의 실력 차이를 인정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내심은 자꾸만 꿈틀거리는 절망감과 끊임없이 싸우는 중이었다.

'강하다. 중원의 누가 있어 그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불가능하다. 도저히 인간의 강함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몸이 떨려왔다.

더럭 겁이 난다.

비틀거리던 그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검혼, 그렇구나. 검혼이 있구나. 하지만 도혼이 그를 언급한 것은 이미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도 그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방법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망을 본 장문산의 걸음이 빨라졌다.

단 한시라도 빨리 검혼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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