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한상아
-여자의 한은 백 년이 가도 멈추지 않는다.
5-1
설비향의 입가에 차가운 한기가 감돌았다.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권왕은 분명히 중상이다. 그렇다면 금룡단을 제압하고 아운의 시체를 가져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권왕을 잡는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천하제일고수일지도 모른다는 권왕이었다.
설비향은 은근한 시선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호연세가의 숨은 힘 중 일부가 바로 그의 뒤에 있었다.
특히 아운에게 죽은 자들은 이들의 제자들이거나 작,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담담한 표정들이었지만 가슴에 얼마나 무서운 살기를 지니고 있는지 설비향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상아가 안가 근처까지 간 것 같다고 햇엇다. 그렇다면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겠지.'
대충 그 안가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어떤 일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사마무기의 뒤에서 밀영은 전서구를 전해 주었다. 내용을 다 읽은 사마무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미 전서구의 내용을 알고 있는 밀영 일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보충 설명을 했다.
"정룡 어른께선 이미 살수의 안가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연세가 쪽에서 고용한 살수도 그곳을 찾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단은 지켜보기만 하신답니다. 상황을 보아서 행동을 하시겠답니다."
"광정사들 중에서 비록 십 위 안에는 들지 못하지만, 살수 무학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정통하신 분이 정룡님이시다. 당연히 중원 무림의 살수 따위를 놓칠 리 없겠지. 한데 한상아란 살수도 대단하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안가를 찾다니. 과연 중원 무림의 삼대 살수 중 한 명다워. 여긴 이제 정룡 광전사님에게 맡기고 우린 이만 돌아가자."
두 명의 신형이 그곳을 떠났다.
5-2
사찰 밖으로 한 명의 섬세한 인연이 나타낫다.
경장 차림의 옷을 입은 여자였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경장 차림에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얼굴엔 간단한 면사를 쓰고 있었으며 허리엔 짧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전혀 없는 시선으로 사찰을 바라보고 있엇다.
'여기인가? 이 정도의 안가를 둘 정도라면 나와 같은 삼대 살수 중 한 명일 텐데. 누구일까? 설마.'
그녀는 바로 삼대 살수 중 한 명인 무영사 한상아였다.
그녀는 살수의 길을 찾아서 쫓아왔고, 드디어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지금 그녀와 삼십여 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호연세가와 장로원 고수들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신호만 떨어지면 그들은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 이외에 또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다. 너무 은밀해서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서운 자다. 누구일까? 삼대 살수 중 한 명일끼? 그렇지만 느낌상 나를 제외한 삼대 살수 중 한 명은 아닌 것 같다.'
그녀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실제 그녀가 사찰의 안가를 발견하고도 연락하지 못한 이유는 띠로 있었다.
그녀의 직감 때문이었다.
그 직감은 그녀로 하여금 청부자를 조금이지만 배신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칙은 여기까지면 그녀의 청부는 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한상아의 신형이 은밀하게 움직였다.
사찰 안으로 들어온 한상아는 사방을 차찬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조금 미묘하게 변한 채 사찰 안의 한 곳을 바라 보고 있었다.
거대한 불상이 잇는 곳이었다.
돌로 만들어진 불상은 여기저기 깨져서 볼품이 없었는데, 그 아래로는 제법 널찍한 돌로 만들어진 대가 있었다.
평소 어느 절을 가든지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조금 다르다면 나무가 아니라 돌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한상아는 그곳을 완전히 무시하고 불상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불상의 뒤쪽으론 불상과 사찰의 벽이 바싹 붙어 있어서 그 안으로는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상아는 그 벽과 석불의 틈을 유심히 살피고 잇었다.
한동안 그곳을 살피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틈 사이로 몰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몸이 나무 벽 사이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일단 그녀가 벽사이로 들어서자,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나타났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서부터는 제법 넓은 통료였다. 찬찬히 안으로 들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벽에 몸을 붙엿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녀의 몸은 벽으로 변해 버렸다.
누가 보아도 원래 있던 벽 모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상아는 그 상태에서 눈을 감고 마음을 죽였다.
그 다음 심장의 박동을 죽이고 있었다.
일종의 귀식대법과 비슷한 방법이었다.
시선이나 심장의 박동은 상대가 알아채기에 가장 좋은 기감을 준다. 심장이야 소리 때문이라 해도, 눈을 감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눈은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감정을 실어 보낼 수 있고, 내심의 기를 보내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을 보지 못하고 못 느끼게 하려면 자신 역시 상대를 보지 말고 무시해야만 한다.
나도 없고 상대도 없는 무의식의 상태.
이것이 바로 한상아의 은신술이 가지는 최고의 장점이었다.
물론 그 상태의 자신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상대의 실력이라 할수 있었다.
잠시 후.
흑칠랑이 조심스럽게 나타났다.
그는 한상아가 있는 벽 앞으로 천천히 통과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식은땀 한 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른다. 아주 예민하고 보이지 않는 작은 기운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자신의 기세를 죽일 수 있다면 이것은 살수 무예를 극까지 터득한 자다. 설마 무림맹에 살수 무예를 터득한 자가 있었단 말인가. 대체 누꿀끼?"
흑칠랑은 상대의 실력에 놀랐지만, 한상아 역시 놀라서 눈을 떳다. 한 명의 남자가 자신의 시선보다 약간 앞쪽에 서 있었다.
아쉽게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지만, 그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공격을 해올 것이다.
'기다려야 한다. 선제공격을 하려다간 내가 당한다. 그러나 만만한 상대가 아닌다.'
한상아는 자신의 살수 생활 가운데 최강의 적을 만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호를 보내고 청부자들의 고수들과 힘을 함해 공격했었다면 오히려 쉬웠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그러나 상대가 삼대 살수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홀로 행동했었다.
그것이 지금의 위험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흑칠랑은 허리에 찬 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검을 뽑아서 공격하는 순간 상대도 공격을 감행할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엇다. 이미 서로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이젠 상대도 더 이상 자신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흑칠랑으로서도 설마 상대가 벽에 붙은 채로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기가 막힌 위장술이었다.
두 사람은 약 일 각 정도의 시간 동안 그 상태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흑칠랑의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계단의 위쪽에 장치한 작은 종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그 종소리는 너무 작아서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었지만, 흑칠랑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안가를 위해 장치한 침입 경보 장치가 울린 것이다.
'또 누군가가 나타났다.'
나타난 자들은 자신을 쫓아온 자들이고, 모두 살수의 수업을 받은 자들이란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최악이다. 제긴, 복도 없지. 하필이면 죽여야 할 놈을 살리려다가 객사하게 되다니. 씨발, 내가 죽기만 해봐라. 신이 있다면 똥구멍에 말뚝을 박아 버리겟다.'
흑칠랑은 자신을 지금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신을 욕하고 있었다.
'이제 이판사판이다.'
어쩔 수 없었다.
먼저 공격하는 쪽이 불리한 상황이고,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마음이 초조한 자신이 더욱 불리하지만, 벽에 숨은 자를 먼저 처리하고 지금 나타난 자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앞과 옆에서 협공을 당해 죽을 판이었다. 이미 밖의 상대들이 비밀통로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감을 느낀 것이다.
"찾!"
짧은 소리와 함께 흑칠랑은 검을 뽑으며 쾌검으로 한상아를 공격했다.
흑살문의 무공인 암천마검식이 펼쳐진 것이다.
짧고 기세가 없으며, 일 검에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치명적인 검법이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흑칠랑의 검이 벽을 뚫고 들어갔다.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대신 자신의 옆구리를 향해 오는 싸늘한 한기를 느낀 흑칠랑은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서걱!
흑칠랑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져 나왓다. 흑칠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돌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연이어 공격해 올 상대의 초식을 피하거나 마주 공격하려는 자세였다.
처음으로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검을 들고 공격을 하려던 한상아의 동작이 딱 멈춘다.
흑칠랑도 엉거주춤 검을 멈추었다.
한상아가 천천히 자신의 얼굴에 씌어 있는 면사를 벗었다.
제법 아름답고 얼굴에 엷은 자상이 있는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에서 기묘한 한광이 흘러나와 흑칠랑을 노려본다.
흑칠랑은 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점점 눈이 커지고,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한상아의 입가에 서늘한 냉기가 떠올랐다.
흑칠랑이 당황한다. 그녀가 검을 왼손으로 옮겨 쥔 다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개새끼."
고함과 함께 그녀의 주먹이 흑칠랑의 콧등을 강타했다.
"어이쿠!"
비명과 함께 흑칠랑이 뒤로 쓰러졌고, 한상아의 발이 그대로 흑칠랑의 낭심을 걷어찼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흑칠랑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끄으으."
한상아는 한 손으로 흑칠랑을 들어 오렸다.
코피가 터진 흑칠랑의 모습은 실로 엉망이었다.
검은 어느새 그녀의 오른속으로 다시 옮겨 와 있었다.
그녀의 검이 흑칠랑의 얼굴을 찔러 갔다.
흑칠랑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검이 그의 얼굴을 비껴갔고, 흑칠랑은 얼떨결에 검을 쥔 한상아의 손을 잡아 갔다. 한상아는 그대로 흑칠랑을 덮치며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흑칠랑의 얼굴을 덮쳤다. 정확하게 한상아의 입술이 흑칠랑의 입술을 덮친 것이다.
"우웁."
흑칠랑의 눈이 대문짝만 하게 커졋다.
한상아의 손에 들린 검이 딸에 떨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오른손으로 흑칠랑의 사타구니를 꽉 움켜쥔다. 그녀의 손에 큼직한 두 개의 방울이 잡히는 순간 흑칠랑은 몸을 바르르 떨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흑칠랑은 허우적거리면서 남은 손으로 한상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엔 힘이 없었다.
"이익."
흑칠랑은 몸을 뒤로 뺏다. 그런데 아랫도리가 허접하다. 어느새 그의 바지가 한상아의 발가락 사이에 끼어 딸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그녀가 언제 맨발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좁은 ㅡㅂ에서 둘이 엉킨 채 다시 한 바퀴를 돈 순간, 한상아가 흑칠랑의 배 위에 앉아 잇었다. 성난 모습으로 하늘까지 찌를 듯 서 있는 흑칠랑의 상징이 한상아의 치마와 허벅지 사이로 숨어든다.
까칠한 느낌이 그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가 싶더니 뒤이어 부드럽고 미끈한 감촉이 그의 상징을 감싸고 잇었다. 한상아의 치마 속은 투명함 그대로였던 것이다.
"끄으으."
흑칠랑은 자신의 뿌리가 땅속 깊숙이 박히는 느낌을 받으며 기묘한 감촉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비좁은 살을 헤집고 들어가는 남자의 상징은 은밀한 감촉에 더욱 성을 내고 있었다.
'어무이, 당신 아들 강간당하고 있어라! 크어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아니면 신음인지 모를 이상야릇한 신음이 흑칠랑의 입을 타고 흘러나왓다.
무려 십여 년이나 지난 잊혀진 추억이 흑칠랑의 기억 속에 차올랐다.
"들어오너라."
사부의 부름에 허겁지겁 달려온 흑칠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사부 이외에도 한 명의 노인과 고개를 숙인 한 명의 소녀가 더 있었다.
그러나 한창 살수 수행 중이던 흑칠랑에게 있어서 노인이나 소녀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사부님?"
"이눔아, 내가 불렀으니까 네가 왓겠지. 다 아는 사실을 왜 물어?"
흑칠랑은 고개를 숙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럴 땐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최고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는 그런 흑칠랑을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다가 노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ㅁ라했다.
"인사하거라! 이 사부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인 한수인 어른이시니라."
흑칠랑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현 강호 무림에서 가장 유명한 살수 중 한 명이 바로 조검한수인이었다. 검이 새처럼 날아 상대를 죽인다고 해서 조검이라고 불린다 했었다.
흑칠랑은 얼근 일어서서 넙죽 인사를 했다.
"칠랑이 어르신께 인사를 드립니다."
노인은 살수답지 않게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너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지금 보니 들은 것보다도 더욱 뛰어난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어르신. 아직 걸음마 수준일 뿐입니다."
"허허, 겸속하기까지. 참으로 금상첨화로다. 참, 인사하게나. 내 딸인 상아일세. 자네보다 나이가 두 살 아래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으니 앞으로 잘 사귀어 보게."
제법 예쁘장한 소녀가 수줍은 표정으로 흑칠랑을 바라보며 인사를 했다.
"한상아라 합니다."
"흑칠랑입니다."
둘이 인사하는 못브을 보면서 두 노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두 노인은 이 두 사람을 맺어 주기로 약조를 했었다.
흑칠라은 덤덤했지만, 한상아는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그야말로 천생 요조숙녀였다.
흑칠랑의 사부는 한상아가 너무 아름답게만 보인다.
살수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그런 험한 수행을 하면서도 여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날 이후로 두 사람은 자주 볼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졌다. 바보가 아닌 이상 두 사람은 이미 두 노인의 생각을 눈치 챘지만, 흑칠랑은 한상아가 거북스럽기만 했다.
한상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갑게 예쁘고 날씬한 한상아가 왠지 꺼림칙햇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한상아를 꺼리게 된이유는 따로 있었다.
한상아가 너무 대담해서 흑칠랑이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안 그런데, 둘이 있기만 하면 그녀는 야수로 변했다.
흑칠랑이 조금 잘못 말하기라도 하면 당장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들었으며, 대법하게도 흑칠랑에게 먼저 입맞춤을 시도하기도 했었다.
순진한 총각 흑칠랑은 둘이만 있으면 절절맸다.
그것도 모르고 두 노인은 의도적으로 둘만 있을 시간을 만들어 주곤 햇엇다. 그러나 여전히 흑칠랑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간을 죽이고 지나갓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상아와 흑칠랑의 사부가 죽었다.
물론 두 노인은 두 사람이 함께 살 것을 유언으로 남겻다. 그리고 두 노인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제법 술이 오른 한상아가 흑칠랑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날 한상아는 흑칠랑을 덮쳤고, 기겁을 한 흑칠랑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결국 수치심으로 심하게 화가 난 한상아와 흑칠랑은 검까지 뽑아 들게 되었고, 흑칠랑은 하상아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나서야 도망칠 수 이썽ㅆ다.
그날은 흑칠랑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한상아는 너무 무서웠다.
그날로 흑칠랑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한상아 역시 그날의 한을 가슴에 담은 채 자신의 사문으로 돌아갔다.
"크으윽."
흑칠랑은 참으려 했다.
절대로 자신의 동정을 여기서 잃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강간으로.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허걱!하는 소리와 함께 흑칠랑의 동공이 무섭게 수축되었고, 한상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둘은 모든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맥없이 늘어졌다.
한상아의 얼굴엔 아주 만족한 표정이, 그리고 흑칠랑의 얼굴엔 수치심과 함께 이상야릇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아주 오래전의 어떤 상황과 상당히 반전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흑칠랑의 큰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천하제일살수라 불리던 흑칠랑의 한이 맺힌 눈물이었다. 천하에 여자에게 강간당한 최초의 살수로 남게 된 것이다.
억울했지만, 감히 한상아를 바라보지도 못했다.
마치 허깨비처럼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노인은 묵묵히 불상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몹시 감탄한 표정이었다.
노인의 뒤에는 두 명의 노인이 더 있었는데, 그들 역시도 나무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정 사형, 정말 대단한 곳입니다. 저렇게 완벽한 기환진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사형이라 불린 노인은 바로 광전사 정룡이었다.
정룡은 사제이자 광전사 중 한명인 사마풍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엿다.
"분명히 만만치 않은 곳이다. 이곳으로 침입한 한상아도 아직 나오지 못하는 걸 보면 쉽지 않은 곳이다. 우린 이만 물러서자."
"그냥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까? 듣기로 권왕은 심한 부상을 당해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우리에겐 첨마혈성과 첨마폭인까지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가 공격해서 끝을 보는것이 어떻습니까?"
정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안으로 들어간 한상아가 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상대는 이미 우리가 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안가에 침입을 감지할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것이고, 우린 분명히 그것을 건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괜히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오연세가에게 이곳을 알려 줘라. 그들끼리 치고받은 다음에 우리가 마무리를 하는 것이 좋겠다. 특히 천마혈성이나 천마폭인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되는 물건들이다. 쉽게 쓸 수 없다."
듣고 보니 사형의 말이 백 번 옳았다.
"알겠습니다, 사형. 그럼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사찰 밖으로 사라졌다.
설비향의 입가에 고소가 어렷다.
그는 비각의 일조 조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한상아가 실종되었고, 그곳이 바로 이 근처에 있는 사찰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한상아가 사라진 곳을 추적해서 흔적을 찾았습니다."
"삼대 살수 중 한 명인 한상아의 흔적을 찾았다고? 비각이 대단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일조 조장이 설비향을 바라본다.
"됐다. 어차피 상관은 없겠자. 중요한 것은 안가를 찾았다는 것이겠지. 밀각의 장로님에게 알리고 집중 공격하게 하라."
일조 조장이 그 자리를 떠났다.
설비향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사마무기. 네놈이 흔적을 만들어 주었겠지. 제놈도 살수를 고용할 것이란 생각은 했었따. 그래도 누구인지 대단하군. 한상아와 맞먹는 실력이라니. 그보다도 흔적을 알려 준 것은 나더러 앞장을 서란 말이겠지. 좋아,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니 그렇게 해주마. 어차피 부상당한 권왕을 네놈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금룡단이다. 금룡단의 인물들 중에는 함부로 건들기 어려운 자들이 있다. 월등히 강한 힘으로 그들을 누르고 아운만 완전히 죽이면 된다.'
설비향은 지금 준비한 전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호연세가의 최괴 기밀인 밀각의 장로들이 출동했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정룡은 전서구를 읽고 난 후 사마풍을 보면서 말했다.
"설비향이란 아이가 드디더 공격을 하려는 것 같다."
사마풍이 피식 웃었다.
"그 아이가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금룡단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자칫 죽이기라도 하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중 일부와 원한을 질 수도 있습니다. 제아무리 호연세가라도 그것을 바라진 않을 것입니다."
"호연세가의 군사는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생각한 것이 있겠지."
사마풍 역시 사형인 정룡의 말이 옳다고 생각햇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만약을 위해서 길목을 지키고 있기로 한다. 만약 여의치 않으면 모조리 쓸어버리면 그뿐이다. 단 한 명도 살려 놓지 않으면 누가 누굴 죽였는지 감도 잡지 못하겠지. 그리고 와룡은 이 와중에 장로원과 호연세가를 반목시키는 이간계도 생각하는 모얀이다. 우리는 일ㄷ나 지켜보기로 하자."
"좋은 생각입니다."
정룡이 사마풍과 단목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잊 우리도 돌아가자."
"예, 사형."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사찰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