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구천혈맹(九天血盟)
- 권왕 아운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노인은 잠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둘러본 후에 옥룡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 때문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옥룡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마른침을 삼키자, 그의 목젖이 목줄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간다.
만약 그것이 아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만큼 옥기린 옥룡의 모습은 수려하고 호리호리했다.
옥룡은 눈을 뜨고 노인을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권왕의 무공이 칠사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에 두 명의 라마승과 탕문, 그리고 노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권왕의 무공은 처음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위일 거라는 것이
제 느낌입니다."
옥룡의 말에 아라한이 말했다.
"아미타불. 환환대법(幻煥大法)으로 인한 제약 때문에, 본 실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해서 진 것이 아니었습니까?"
옥룡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로 인한 제약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내 실력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탈명검사(奪命劍死) 능유환과
대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말에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을 겁니다. 칠사와 쌍절, 오기는 이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거의 반신반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권왕의 나이를 감안한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옥룡은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칠사 중의 한 명이라면 혼자서 광풍사를 전부 죽일 수 있을까요?"
그 말에 노인과 두 라마승은 아무 말도 못했다.
이때 탕문이 반박했다.
"듣기로 암기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거리를 확보하고 쏘아댄 암기에 괴멸
되었다면, 그의 진정한 무공은 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기로는
칠사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옥룡이 고개를 흔들었다.
"약 이십여 명의 군령들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워서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권왕의 무공이 칠초무적자의 무공이 맞는다면, 그는 아직 사용하지
않은 무공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의 암기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현장을 살핀 무림의 명숙들은 많아도, 권왕이 어떤 암기를 사용했는
지 알아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실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할 정도의 암기라면 그 위력 또한 아무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섣불리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권왕의 능력은 칠사
와 비교해서 크게 떨어지지 않을 거란 판단입니다."
네 사람은 모두 조용히 있었다.
누구보다도 옥룡의 재지를 잘 아는 노인과 탕문이었다.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무공은 공전절후란 말이 합당할 것입니다.
강호 무림사에 그 나이에 그 정도의 경지를 이룬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옥룡은 노인을 보고 말했다.
"차라리 권왕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설혹 권왕의
힘이 조금 달린다고 해도, 우리와 권왕이 힘을 합하면, 능유환을 상대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와 사부님은 간접적으로
그에게 이미 한 번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는 모르고 있겠지만."
옥룡의 말을 들으며 노인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하다면, 차라리 그것이 나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아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혼자서 광풍사를 괴멸시켰다면 그 실력은 능히 칠사와 겨룰 만
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을 주저하는가?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구나. 그의 나이 때문이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모습과 나이에
대한 집착 때문에 광풍사가 괴멸된 사실을 뒷전에 두고 생각하게 되었
구나. 그래서 그의 실력을 자꾸 과소평가하게 된 것이고.'
노인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과연 누가 있어 혼자 광풍사를 몰살시킬 수 있는지를.
그 누구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운의 무공이 칠사를 넘어선다는 것은 아니었다.
무공 한 가지만 가지고 광풍사를 몰살시킨 순 없을 것이다.
노인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처럼 도망치다가 포달랍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칠사 중 한 명인
탈명검사를 만난다면 꼼짝없이 죽어야 할 판이었다.
그럴 바엔 여기서 꼬리를 자르고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운은 그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혼자는 힘들지라도 협공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옥룡의 뜻대로 하십시오."
옥룡이 노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 오래 살아야만 구천혈맹(九天血盟)의 다른 분들이
조금이라도 숨을 쉴 텐데, 이러다간 그들의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노인과 두 명의 라마승은 측은한 눈으로 옥룡을 보았다.
옥룡이 애처로울수록 배신자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그러나 그 배신자가 구천혈맹의 아홉 명 중 누구인지 전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노인이나 아라한과 옥룡은 구천혈맹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조직인지 그 인원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누가 배신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옥룡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 물이 고여 흐른다.
"사부님은 어떻게 되셨을까요? 제발 살아계셔야 할 텐데."
그 말에 아라한이 굳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걱정 마십시오. 누가 감히 신주오기 중의 한 명인 봉명우사를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사께서는 반드시 살아 계실 겁니다. 그보다도
우린 빨리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자칫하면 시간이 늦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됩니다."
아라한의 말에 옥룡이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두 잠시만 이곳에 계십시오."
옥룡은 마침 마차에서 나오는 아운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아운은 마차에서 내려오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옥룡 장무린을 바라
보았다.
"하 형,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운이 웃으면서 기분 좋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전 괜찮습니다."
"그럼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운은 그 말에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그 옆에서 옥룡이 걸음을 옮긴다.
둘은 자연스럽게 호수 주변을 걷게 되었다.
성격 급한 사람이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삼 분 정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밤이 깊어 새벽이 되도록, 아운과 옥룡에 대한 이야기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아지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아운이 걸음을 멈췄다.
보조를 맞추어 걷던 옥룡이 놀라서 함께 걸음을 멈추고 아운을 바라
보았다.
아운은 이미 그를 보고 있었다.
"장 형은 누구에게 쫓기고 있습니까?"
장무린이 놀란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사막을 건너면서 장포도 걸치지 않은 모습과,
보면 무엇인가 불안한 느낌. 그 불안함은 장 형이 도망자라서가 아니라
장 형을 쫓는 사람들이 그 만큼 무서운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옥룡은 그저 아운을 보기만 한다.
아운은 짧게 숨을 들여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장 형이나, 장 형 일행 정도의 고수가 감히 대항할 생각도 못하고 쫓긴
다면, 내가 보기에 칠사 정도의 실력자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옥룡은 다시 한 번 아운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하 형은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 정도에 내가 무섭다고 한다면, 내 동생을 지키는 마달이란 군장도
꽤 무서운 사람일 겁니다.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끼고 경계를 하던데,
직감이 아주 뛰어난 사람이더군요."
무엇인가 흡족한 웃음이었다.
'그 정도로 뛰어난 무장을 거느린 장수라면, 내 동생의 배필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아운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굳이 하영영에게 약혼자의 이름을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이름 아닌가?
물론 고대성일 거란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었다.
옥룡은 갑자기 아운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우선 소생과 사부님의 생명을 구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한 번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운은 좀 벙벙한 표정으로 옥룡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가 안 갑니다."
"광풍사를 괴멸한 것 때문에 우리가 한 번 정도의 목숨을 걸질 수 있었
습니다. 나중에 연이 닿으면 이 부분은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
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소생을 용서하십시오."
아운은 별거 아니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건 그렇게 하십시오."
너무 간단한 대답에 옥룡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참 간단 명쾌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장 형이 칠사의 누군가에게 쫓기는 이유도 당연히 말할 수
없겠구려."
옥룡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미안할 뿐입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습니다. 하 형과 우리는 무엇
인가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머지않아 하 형에게
해명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데 장 형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닐
걸나 생각이 듭니다. 칠사와 싸워 달란 말입니까?"
아운의 말에 옥룡은 그만 할 말이 없었다.
민망해 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아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난 싫습니다."
옥룡이 아운을 보았다.
"나에겐 사랑하는 동생과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약혼녀가 있지요.
그런데 이제 처음 본 장 형을 위해 내가 목숨을 걸고 싸워햐 할 이유
가 없습니다. 칠사의 인물이라면 내가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상대
입니다. 목숨을 함부로 걸 순 없습니다."
"그, 그건…."
옥룡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아운은 옥룡이 예상 이외로 당황해 하자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약혼자가 있으시군요."
아운은 멀뚱한 표정이 되었다.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하, 실례했습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처음 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달란 말은 확실히 나의 오만이란
생각입니다."
아운은 웃으면서 말했다.
"부디 살아서 포달랍궁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무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음이 진정된 것인가?
떨리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꼭 살아남겠습니다. 그러면 차후에 연이 닿으면 다시 보기로 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장무린 일행은 그렇게 사막을 떠났다.
아직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의 일이었다.
아운은 무거운 표정으로 장무린 일행이 떠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운은 장무린 일행이 완전히 떠나고 나자, 돌아서서 잠자리를 향했다.
그러던 그의 시선에 한쪽에서 열심히 무공 연습을 하고 있는 몽진이
보였다.
모두들 잠시라도 잠을 자두려고 하는 시간에 몽진은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운을 만남으로 인해,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아운의 결투를 보고 받은 충격은 그의 무공에 관한 이론을 바꾸어
놓았다.
그 뿐만 아니라 소걸개 이심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개구쟁이 같다던 소걸개는 몽진의 옆에서 열심히 타구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좀 떨어진 곳엔 남궁단 일행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운 몰래 떠나려다가 다시 한 번 치도곤을 당하고 그 자리에
잡혀 왔던 것이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다시 잡혀 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아운에게 그것을 물어 보지 못했다.
다음 날 출발하기에 앞서서 아운은 백마상단의 단주와 무이신개 일행
등을 모아 놓고 자신과 하영영의 관계를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모두들 흔쾌하게 대답을 한 가운데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아운이 한 시진 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떠난 옥룡은 당연히 몰랐고,
무이신개를 비롯한 원화대사나 운비자도 몰랐다.
그리고 밤을 세워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던 몽진이나 소걸개 이심방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다.
***
녹주를 출발한 백마상단과 아운 일행,
그리고 마달을 비롯한 명군은 천천히 사막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그렇게 약 한 시진 정도를 가던 아운이 신개와 백마상단의 단주인
이자청을 불렀다.
그들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눈 후, 다시 반 시진이 지났을 때,
마달을 비롯한 하영영 일행은 방향을 남쪽으로 잡으면서 백마상단과
헤어졌다.
소홀은 무이신개와 운비자, 그리고 원화대사에게 인사를 한 후 하영영의
마차에 타고 그녀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다시 반 시진이 흐른 후 무이신개를 비롯한 그 일행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백마상단과 헤어졌다.
이제 아운 일행과 남궁단, 그리고 언화와 문형기만 남아서 백마상단과
함께 길을 가게 되었다.
다시 한 시진이 지나서 백마상단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사막 한가운데서
짐을 풀었다.
그리고 그때 세 명의 장포를 걸친 괴인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모두 말을 탄 그들은 섬라사도 목우락 일행이었다.
말을 몰고 천천히 이자청이 있는 곳까지 다가온 세 명의 괴인들을,
이자청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처럼 철중환이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이자청의 삼 장 거리에 다가와 말의 고삐를 잡아 당겼다.
그들 중 한 명이 이자청 앞으로 다시 두어 걸음 말을 몰아 다가오자,
결국 이자청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에게 볼 일이 있는 분들입니까?"
그 물음에 앞으로 다가온 괴인이 대답하였다.
"몽화산주가 필요하다. 그것만 놔두고 간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철중환과 이자청의 표정이 굳어졌다.
"감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몽화산주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이자청의 말에 괴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놓고 가라고 했지, 산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몽화산주만 놔두고 가라. 그럼 살려주겠다."
이자청은 어이없는 시선으로 상대를 보았다.
무조건 놔두고 가란 말은 자기더러 죽으란 말과 같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그럴
의사가 전혀 없다."
"결국 죄 없는 수하들만 죽겠군. 쳐라! 그리고 몽화산주만 빼앗아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두 명의 장포인이 말에서 신형을 날렸다.
그들 중 한 명은 도를 들고 있었으며 한 명은 맨손이었다.
철중환이 검을 뽑으려고 할 때였다.
그보다 그의 뒤에 있는 누군가의 신형이 먼저 앞으로 뛰쳐나가면서
두 명을 덮쳐갔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과 함께 두 장포인을 덮친 것은 아운이었다.
그는 속전속결을 결심한 듯 처음부터 양 주먹으로 연환육영뢰를 펼쳤다.
일기영이 섬라사도의 도신을 때렸고, 그 충격에 놀라서 섬라사도가 뒤로
물러서는 순간, 아운의 이벽권은 맨손의 장포인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장포인은 이 엄청나게 빠른 주먹 앞에 자신의 신분을 속여야 한다는
어정쩡한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 또한 급한 대로 자신의 성명 절기를 펼쳤다.
찌르릉!
괴음과 함께 그의 주먹에서 한 가닥의 경기가 뿜어져 나왔다.
쇳소리 비슷한 괴음을 들은 철중환이 놀라서 외쳤다.
"팔황벽력철권, 그자는 벽력철권(霹靂鐵拳) 오주완(吳周完)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철강기와 아운의 이벽권이
충돌했다.
크윽 하는 신음을 내며 오주완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섬라사도 목우락이 섬라도법을 펼치며 아운을 협공해 왔다.
아운은 방향을 다시 목우락에게 틀며, 삼권척의 능력으로 섬라사도를 마주
공격해갔다.
도와 주먹이 막 충돌하려는 순간,
주먹과 삼 척의 거리에서 도가 멈추었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섬라사도의 도신의 부러졌고,
목우락은 신음과 함께 뒤로 주춤거리며 다섯 발자국이안 물러섰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노옴!"
고함과 함께 벽력철권 오주완이 아운을 공격했고,
동시에 말 위에 있던 장포인이 검을 뽑아 들고 협공을 했다.
장포인이 검을 든 손은 기이할 정도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아운은 칠보둔형을 펼쳐 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양 주먹을
번갈아 날렸다.
사환권은 벽력철권을 향해, 그리고 오금강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장포인을
향해 공격해 갔다.
오주완은 자신의 벽력철권 중 가장 무서운 살수인 철기정(鐵氣釘)의 초식
으로 아운을 공격했다.
오주완의 철기정이 연환뢰의 사환권과 충돌했다.
그러자 기이한 힘이 철강기를 밀어내면서 아운의 손에서 뿜어진 강기가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힘에서 철강기가 밀린 것이다.
오주완이 기겁을 해서 피하려 했지만, 사환권의 강기는 너무 빨랐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일 장 정도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은 편이었다.
조장인 장포인은 검법 한 번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오금강에 의해 이 장이나 날아가 땅바닥에 거꾸로 처박혔던 것이다.
무려 일 장이나 더 날아갔다.
실로 눈 깜박할 사이에 세 명의 괴인들이 고꾸라지자 철중환이나 백마
상단의 호위무사들은 모두 멍하니 아운을 본다.
그들 틈에 끼어 있던 야한이 혀를 차면서 말했다.
"언제 보아도 권왕 아운님의 주먹은 깨끗하고 깔끔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선배?"
흑칠랑은 아운의 동작을 보고, 그 주먹을 어떻게 하면 피할까 하고 한참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야한이 엉뚱한 질문을 하자, 화가 나서 간단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이 쌍! 주먹으로 청소하냐?"
야한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흑칠랑을 보다가,
무엇인가 깨우친 듯 잽싸게 앞으로 나갔다.
그는 물어보지도 않고 쓰러진 자들을 끌어다가 한 군데 모아 놓은 다음,
아운 앞에 경건하게 다가선 후, 품 안에서 피 묻은 도끼 자루를 꺼내어
주었다.
아운은 아무 말도 없이 도끼 자루를 들고 쓰러진 세 명의 침입자들에게
다가섰다.
야한은 부리나케 제자리로 간 다음 남궁단 등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잘 봐둬라! 지금부터 권왕 아운님의 진면목을 보게 될 것이다."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운을 볼 때,
아운은 군소리 하지 않고 도끼 자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허공을 선회하는 나방처럼 가뿐하게 춤을 추는 도끼 자루는 사정도
없고, 인정도 없었다.
왜 때리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그들 중 조장인 청수마검은 어차피 어떤 고문을 해도 자신이 아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허탈하게도 아운은 아예 무엇을 묻지도 않았다.
그냥 때리기 시작하는데, 도끼 자루가 사정없이 골통을 치고 지나갔다.
골이 우웅 하고 울린다.
보통 그 정도 충격이면, 그 자리에서 사망 내지는 기절인데,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그리고 고통은 그 다음으로 후폭풍처럼 몰려왔다.
보통, 사람을 때릴 때는 정말 죽일 것이 아니면 그래도 가려서 때리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운의 도끼 자루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때리는데, 그 고통은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끄으으."
"사, 사, 사…."
"뭐든지, 뭐…."
세 사람은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다.
아니 아운이 물어보면 뭐든지 다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운은 본 척도 안했다.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는 그 살벌한 현장을 보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야한과 흑칠랑은 그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본다.
한데 야한의 모습은 뭔가 점점 이상하게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아주 묘한 광기가 엿보일 정도의 표정이었다.
철중환과 이자청은 감히 끼어들어 말릴 생각도 못하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도 가슴이 떨려 아운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운이 멈추었다.
그리고 간단하게 말했다.
"우칠."
"예, 주군."
"잠시 후엔 네가 해라!"
"걱정 마십시오, 주군. 제가 아주 골로 보내겠습니다."
우칠은 신이 나서 말하곤 도끼 자루를 시험 삼아 휘둘러 보았다.
부웅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덩치의 우칠만 한 소리가 대기를 찢어
놓았다.
만약 지금 우칠이 휘두르는 도끼 자루에 맞고서 죽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금강불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젠 정말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아운이 쉬는 틈에 겨우 말문이 트인 섬라사도와 벽력철권 그리고 조장인
청수마검은, 그대로 무릎을 꿇은 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대, 대협. 살려주십시오."
"저, 저의… 지, 집에는 홀머니가…."
"뭐, 뭐든지 물어만 보십시오. 제가 다 말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 도끼 자루만은…."
모두 말들을 버벅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덜덜 떠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초라해 보였다.
조금 전의 그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운은 그들을 잠시 내려다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섬라사도 목우락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철중환의 안색이 다시 바뀌었다.
혈궁대전 이전에 유명했던 대 마두였다.
"벽력철권 오주완입니다."
"청수마검(靑手魔劍) 반자혼(班自琿)입니다."
그들은 혹여 아운의 마음이 바뀔까봐 필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을 들은 철중환과 남궁단,
그리고 야한과 흑칠랑까지 모두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들은 모두 혈궁대전 이전의 고수들로 모두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 고수들이었다.
새삼 아운의 무공이 얼마나 무식하게 강한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흑칠랑은 속으로 눈물이 찔끔 난다.
그들 중 어느 한 명도 일대일로 싸워서 흑칠랑이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없었다.
'사부, 나도 당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 가 주시오.'
흑칠랑의 눈가에 눈물마저 글썽이는 것 같았다.
야한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내가 사문 하나는 잘 택했지. 그냥 천하제이살수로 만족하며 살아야지.
에구구."
그 말은 그냥 흑칠랑이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아운은 그들의 이름을 다 듣고 나서 말했다.
"누가 시켰냐?"
그들이 주춤거리자, 아운의 표정이 짜증이라는 감정으로 일그러졌다.
그 순간, 세 명의 마두들은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호연세가입니다."
"호연세가의 밀각입니다."
"호연란이 시켰습니다."
결국 원하는 대답은 다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너, 조장. 네가 말해라! 이유가 뭐지?"
"저희가 몽화산주를 빼앗으면, 호연란 소공녀는 그것을 빌미로 백마상단을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조장은 혹시라도 아운이 짜증을 낼까 두려워,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렇단 말이지…. 이 단주님."
아운이 이 단주를 불렀다.
이 단주가 다가오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지필묵을 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자청이 지필묵을 준비하러 간 사이에 아운은 다시 청수마도 일행을
보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이 호연세가에 대해서 아는 것을 단 하나도 남김
없이 써라! 물론 너희들은 각자 따로 떨어져서 아는 것을 쓴다. 차후
비교해서 다른 두 사람과 사실이 다르거나, 혹시 나중에라도 속여 쓴
것을 알게 된다면 그땐 우칠의 도끼 자루가 너희들을 찾아갈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우칠이 도끼 자루를 가볍게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막과 일생을 함께 하던 제법 큰 바위 하나가
모래로 산화하였다.
그 무식한 모습을 본 다음은, 아주 착실하게 일이 진행되어 갔다.
아주 쉽게.
아운의 일처리 하는 것을 본 철중환과 이자청은 기가 질리고 말았다.
간단하고 철저했으며, 무자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이었다.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는 창대에 맞은 자신들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우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운의 광기를 본 그들은 평생 동안 아운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것이다.
***
그날 저녁 헤어졌던 무이신개 일행과 하영영 일행이 다시 모였다.
아운은 녹주를 떠난 후, 누군가가 백마상단의 뒤를 따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무이신개와 이자청을 모아 놓고 이야기 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섬라사도 목우락임을 알게 되었다.
아운과 무이신개 등은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그들이 가장 꺼림칙해 하는 사람들을 전부 흩어지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운 일행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기에, 기회다 싶어 백마상단을
덮친 것이다.
***
이자청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호연세가의 집요함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만약 몽화산주를 잃게 된다면, 호연란과 거의 강제적으로 맺은 계약을
이행하여 백 배 위약금을 물어줘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단 삼 일 이내에.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이자청은 아운에게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무이신개 등은 아운이 잡은 마두들을 보고 기가 질려 말을 하지 못했다.
섬라사도나 벽력철권도 무서운 존재지만,
청수마검은 무이신개나 원화대사 그리고 운비자보다 한 배분 위의 마두
였던 것이다.
아운은 알 것을 다 알게 되자, 섬라사도 일행을 놓아 주었다.
어차피 호연세가의 비밀을 다 불어댄 그들이기에 세가로 다시 돌아가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잡아 놔 봤자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호연세가에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기면 그만이었다.
'호연란, 네가 갈수록 나하고 꼬이고 엮이는구나. 조만간 보게 될 것이다.
좀 기다리고 있거라!'
아운의 압기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가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날 저녁이었다.
아운은 문형기와 남궁단, 그리고 언화를 불러 놓고 말했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중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내가 그만 할 때까지 나와 대련을 하면서 간다. 흐흐, 물론 난 아주
무자비할 것이다. 그렇게 맞으면서 각자의 죄를 뉘위치도록. 뭐 열심히
대항해서 누구든지 내 주먹을 한 번이라도 피하거나, 내 몸에 손을 대는
자가 있다면 그자는 바로 집을 향해 떠나도 좋다."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지옥을 보아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에 세 번씩 아운에게 구타당하면서 그들은 단 한 대라도
아운을 때리거나 단 일격이라도 피하기 위해 죽어라고 무공을 명연습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세 번의 대련에는 언제부터인가 몽진과 소걸개 이심방까지
끼어들었다.
아운의 구타는 아주 교묘해서 남궁단 일행은 매일 선잠을 자다시피
해야만 했다.
이렇게 대사막의 장정은 끝이 나고 있었다.
그리고 중원으로 돌아온 날,
아운은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기를 불렀다.
"이제 돌아가도 좋다. 단 나와 관련한 이야기를 누구에게든 단 한 마디
라도 하게 된다면, 내가 너희들을 만났을 때, 더 이상 인정을 생각하지
마라."
아운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갔다.
아운이 돌아가자 세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다시는 아운을 보고 싶지 않았다.
***
여름이 지나 가을 초입에 들었을 때, 아운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단 반 각 만에 그는 아버지 하문영을 보자마자
쫓겨나야만 했다.
"이놈! 당장 약혼녀를 찾아가거라! 가서 빌고 빌어 용서을 받고, 함께
돌아오지 못할 것이면 아예 돌아오지도 말아라!"
아버지의 고함과 하영영의 눈물을 뒤로 하고 아운은 그날로 무림맹을
향해 떠나야만 했다.
하문영은 아운이 처음 집을 나갈 때처럼 벌거벗겨서 맨몸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달리 나오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