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나한몽진(羅漢夢眞)
- 주군을 이길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노개의 모습을 본 이자청은 놀랍고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신개 어르신 아니십니까?"
"아직도 나를 기억하다니, 다행이군."
둘은 이전에 안면이 있었던 사이였다.
"제가 어찌 신개 어르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처음부터 아는
척을 하지 않으시고?"
신개는 자신들이 있던 자리를 둘러보았다.
섬라사도 목우락을 비롯한 세 명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언덕 너머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네. 그 부분은 나중에 해명하기로 하지. 그보다도
자네의 초청에 우리도 좀 낄 수 없겠나?"
이자청이 대답 대신 아운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중심인물은 아운이었기에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이다.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녹주 안의 사람들 모두가 어울리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잔치는 거창할수록 좋겠지요. 단지 단주님 재산이 축나겠지만."
이자청이 껄걸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감당할 일이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신개 어르신, 함께 계신 분들 소개 좀 해 주십시오."
이자청의 말에 나머지 네 사람도 입고 있던 장포를 벗었다.
그러자 한 명의 노승과 젊은 무승,
그리고 한 명의 노도사와 이제 약 이십여 세 정도의 젊은 거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이신개는 아운과 린, 그리고 이자청 등을 둘러본 후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개방의 양몽이라고 하네. 모두들 무이신개라고 부르지."
"아미타불. 소승은 소림의 원화라 합니다."
이자청은 놀란 표정으로 원화를 보앗다.
원화라면 소림의 장문인인 원몽 대사의 사제로,
문무에 두루 능한 고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소림사 장로란 신분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만큼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량수불. 무당의 운비라고 합니다."
백마상단의 무사들은 온몸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무당의 운비자 또는 운비거사라고 불리는 이 도인은 무당 장문인의 사제
였던 것이다.
백마수호대의 무사들로선 평생 가도 한 번 보기 힘든 인물들이었고,
이들은 모두 무림의 고수들이었다.
"소림의 몽진이라고 합니다."
"개방의 소걸개 이심방입니다. 하핫."
두 사람 역시 평범한 이름은 아니었다.
몽진은 소림의 후기지수라는 십팔나한 중에 한 명이었고,
소걸개는 무이신개의 제자로 개방십걸 중에 한 명이었다.
이자청은 일일이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이거 오늘 이모가 운이 좋아 강호 무림의 고인들을 한꺼번에 뵙습니다."
무이신개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인은 나 한 명으로 족하네. 땡초와 말코는 그저 그렇지 뭐."
"무량수불. 이놈의 거지가 갈수록 입이 거네."
운비자가 무이신개에게 일침을 가하며 웃었다.
이 세 사람의 무림 명숙은 벌써 오십 년 이상을 사귀어 온 지기들이었다.
그래서 신분을 떠나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였으며,
일 년에 한 번씩은 서로의 문파에 번갈아 초청하여 정담을 나누는 사이
였다.
아운은 그들을 보면서 자신이 무림 정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어떤
선입견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 무이신개와 원화대사, 그리고 운비자는 자신들을 소개하면서
아운과 린을 주시했지만, 그들의 표정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린만이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았을 뿐,
아운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장무린입니다."
"하영운입니다."
장무린과 아운은 짧게 자신들의 소개를 했다.
비록 짧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표정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했다.
필요 이상 허리를 굽히지도 않았다.
무림에서 아운은 유명해도 하영운은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들의 인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모든 시선이 장무린의 일행과 아운의
일행에게 모아졌다.
먼저 두 명의 라마승이 합장을 하며 머리를 숙였고,
그들 중 약간 덩치가 큰 라마승이 말했다.
뜻밖에도 라마승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유창한 한어였다.
"아미타불. 소승은 아라한이라 합니다. 그리고 소승의 사제는 아사라 라고
합니다."
모두 라마승의 한어에 놀라고 있을 때,
두 사람의 소개를 들은 원화대사가 탄성을 발하면서 말했다.
"아미타불. 두 분은 포달랍궁의 이대 호법승이 아니십니까?"
이자청과 철중환이 놀란 듯 두 라마승을 바라본다.
포달랍궁의 라마승을 사막에서 만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사막 뿐만 아니라 서장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고승들이 바로 포달랍궁의
이대 호법승이었다.
그런 고승들이 사막에 나타난 이유도 궁금했거니와 장무린과의 관계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한이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아미타불. 본 궁의 일로 잠시 외유 중 입니다."
그 일도 궁금했지만, 물어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이때 장무린의 일행 중 노인이 나서며 말했다.
"노노와 탕문은 장 공자님의 수하이니 특별히 내세울 이름이 없습니다.
여러 귀인들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이렇게 장무린 일행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엔 아운의 뒤쪽에 서 있는
흑칠랑과 야한 그리고 우칠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우칠이 앞으로 나서며 자기의 소개를 하려 하자,
아햔과 흑칠랑이 그의 양쪽에서 우칠의 손을 붙잡앗다.
보나마나 고금천하제일충복 어쩌고 저쩌고 할 것이 뻔한데,
그 망신은 일행 모두가 골고루 감당해야 할 것이란 판단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흑칠랑과 야한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순 없었다.
아운이 얼른 그들 대신 나섰다.
"저의 수하들입니다."
간단한 소개였지만, 더 이상 캐묻는 사람들은 없었다.
아운이 수하라고 말하는 순간,
흑칠랑의 눈이 가로로 찢어진 채, 코에선 연기가 난 것을 빼곤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이런 쌍! 대체 어디까지 추락하는 것이냐?'
흑칠랑은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그렇다고 나 살수요 할 수도 없는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야한은 조금 미묘한 웃음을 머금고 흑칠랑을 본다.
불구경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이자청은 대충 소개가 끝나자 넓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제 모두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금부터 잔치 준비를 하겠습니다."
이자청은 일꾼들에게 무엇인가 명령을 내렸다.
백마수호대의 대주인 철중환은 어정쩡하게 서서 그런 이자청을 바라
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감히 그들 틈에 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본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다.
"자, 거기 수호대주 되시는 분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철중환이 이자청의 눈치를 보자 이자청이 말했다.
"자네도 함께 어울리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분들과 통성명을
할 수 있겠는가?"
철중환이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저는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저 이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철중환의 말에 무이신개가 말했다.
"사나이가 그렇게 소심해서야 되겠는가? 자네도 이리 오게."
무이신개의 말에 철중환은 못 이기는 척 인사를 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무린 일행과 아운, 그리고 무이신개 일행이 자리를 잡고 나자
그 가운데 이자청과 철중환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백마수호대의 무사들은, 기절해서 널려 있는 남궁단과 언화,
문형기를 그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나란히 널어놓았다.
야한과 흑칠랑, 그리고 우칠은 셋이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운은 살수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이유가 있다는 말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마달을 비롯한 관의 인물들은 마차를 중심으로 그들끼리 따로 모여
앉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운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의 동생을 지키는 자들이 아닌가?
세 군데 음식은 모두 이자청이 조달해 주기로 했다.
이자청은 그 동안 준비해 둔 음식 중 일부만 제외하고 나머지를 전부
끌어내었다.
그리고 수많은 짐꾼들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하자,
장무린을 지켜보고 있던 운비자가 말했다.
"무량수불. 혹시 장 소협은 옥룡이 아니십니까?"
운비자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경직되면서 모든 시선이 장무린에게
모아졌다.
옥룡이라면 바로 기린을 말하는 것으로 삼무룡 중 한 명을 일컬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고,
무림에서는 가장 신비한 존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신주오기 중 봉명우사(鳳鳴羽士)의 제자란 사실과 그 모습이 기린처럼
뛰어나다 해서 옥기린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봉명우사는 도가의 신비라 알려진 소요문의 문주로,
혈궁대전이 벌어지기 전에는 소요문이 있었는지조차 강호에는 모르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모아지자 린은 운비자를 보면서 대답했다.
"제가 옥룡이라고 불립니다."
모두 놀란 시선으로 옥룡을 바라보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봉명우사의 제자이자 삼무룡의 한 명을 바로 눈앞에서
본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듯한 표정들이었다.
삼십이 안 된 나이에, 무공의 깊이가 능히 천하 십사대 고수 다음이라는
단 몇 명의 고수 중 한 명이요,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와
명성, 항렬이 대문파의 장문인을 능가한다는 삼룡삼봉 중 한 명이 바로
옥룡이었다.
그리고 삼무룡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인물로 알려진 청년 기협이 바로
옥룡이었다.
옥룡의 이름이 장무린이란 사실도 이들은 처음 알았다.
이자청이 일어서서 다시 한 번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이모가 눈이 있어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옥룡
소협께 인사를 드립니다."
장무린이 손을 흔들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그냥 편히 대해 주십시오."
참으로 청아한 목소리였다.
옥룡의 말에 이자청 대신 철중환이 포권지례를 하면서 대답했다.
"강호엔 엄연히 질서가 있습니다. 무인으로서 그 부분을 존중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옥룡 장무린 소협은 그 명성과 지위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무린이 고개를 흔들며 무이신개와 운비자를 바라보았다.
"여기 선배님들도 계십니다. 이제 서로 체면치레는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무린의 말에 모두들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무이신개가 웃으면서 분위기를 마무리했다.
"그건 이분 소형제의 말이 맞네. 너무 이것저것 따지면 골치 아프니,
이제 그 부분을 떠나 좀 편하게 어울리기로 하세."
모두 그 말에 찬성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장무린은 자리에 앉으면서 어색한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운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때 무이신개가 운비자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말코 역시 그 코는 개 코인가? 어떻게 장 소제의 정체를 알았는가?"
"무량수불. 장 소협의 몸에 흐르는 현기가 도가의 신공이라 같은 류의
무공을 익힌 내가 알아보기 쉬웠을 뿐이었네. 그 깊이가 능히 나의
그것을 넘은 듯 하였기에 놀라서 잠시 생각해 보았네. 나이를 감안했을
때, 봉명우사 선배님의 제자인 옥룡이 아니라면, 누가 삼십이 안 된
나이에 그 정도 깊이의 도가 무공을 익힐 수 있겠나? 그래서 혹시나
했던 것일세."
운비자가 장무린의 경지가 자신을 넘었다고 인정하자,
아운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과연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특히 몽진과 소걸개 이심방의 시선은 옥룡 장무린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들에게 있어서 삼무룡과 삼봉은 우상이요, 반드시 넘고 싶은 벽이었다.
그들이 꼭 만나고 싶은 인물이 있다면 당연히 일왕삼룡으로 통칭되는
젊은 후기지수들인 권왕과 삼무룡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광풍사의 혈사 이후 권왕 아운의 이름은 삼무룡을 넘어서
무림 칠사, 오기, 쌍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들은 자신과 별로 나이차가 나지 않는 옥룡의 무공에 대해서 궁금한
표정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운비자 선배님께서 겸손하신 것뿐입니다.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마십시오."
장무린이 의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무이신개는 얼른 말을 돌리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의 시선은 아운을 향해 있었다.
"흠, 과연 그렇군. 정말 오늘 이 자리는 용호가 도사린 자리라 할 만하군."
무이신개의 시선을 쫓아 아운을 본 사람들은 갑자기 아운에 대한 의구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아운의 무공 실력은 세 명의 후기지수를 간단하게 쓰러트릴
정도였다.
삼무룡에 비해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요는 그가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그러나 아운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전부 무시해 버렸다.
굳이 자신이 스스로 권왕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사막을 지나면서 지나치게 높아진 자신의 명성이 부담스러웠던
아운이었다.
무이신개는 아운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아직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망설였다.
그는 마차 안의 소홀에게 전음을 보내 물어봤지만,
소홀은 자기도 모른다고만 했다.
대신 하영영과는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만 말해 주었다.
소홀과 무이신개 등은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고,
사막에서도 함께 고생을 한 사이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러핟고 아운이 말하기 전에 그의 신분을 전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렇게 어색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고 밤이 깊어 가면서 무인들의 이야기는 이자청이 내놓은
음식과 함께 익어가고 있었다.
어느덧 음식이 사람들 앞에 주욱 나오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졌고, 이야기는 문에서 무로, 무에서 문으로 끝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아운과 장무린, 그리고 원화대사의 문에 대한 박식함과 식견은 듣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주로 원화대사와 장무린이 대화를 나누고, 아운은 말수가 가장 적었지만
그 말마다 능히 금과옥조라 할 만 했다.
운비자나 무이신개 역시 문에 대해서 나름대로 실력이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세 사람과는 차이가 많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운비자나 무이신개, 그리고 원화대사는 옥룡과 아운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공뿐만 아니라 문에 대해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자 더욱
두 사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다시 문에서 무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이번엔 아운이나 옥룡은 주로 듣는 쪽이었다.
이렇게 한참 흥이 나서 무에 대한 이야기를 논하고 있을 때였다.
원화대사가 아운을 보면서 말했다.
"조금 전 운 공자의 무공을 보니, 젊은 층에서 삼무룡을 빼고는 겨룰
자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인물들이 새삼 아운의 무자비한 무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침 뒤쪽에서 그 말을 들은 우칠이 불끈 해서 고함을 지르듯이 말했다.
"무슨 소리! 주군의 무공은 고금 제일이다. 주군을 이길 자는 세상에
없다."
흑칠랑과 야한은 먹던 음식이 목에 걸려 버렸다.
어떻게 손쓸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이 황당한 한 마디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모든 시선이 우칠을 향했다가 다시 아운으로 향했다.
물론 그들은 우칠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하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어떤 근거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무시하기엔 우칠의 말이 너무 당당했고,
그 표정 또한 더 없이 진실하게 당당했다.
아운은 들고 있던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제 수하는 제가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수하로서는 당연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운의 태연함에 모두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보인다.
저 덩치 크고 순박해 보이는 청년 역시 그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한데 모두 그렇게 수긍할 때,
젊은 무승(武僧)이요, 한창 혈기왕성한 몽진이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아운과 한번 겨루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옥룡은 자신의 사부와 항렬이 같은지라 함부로 도전할 순 없었고,
지금 그에게 만만한 것은 아운 뿐이었다.
몽진은 나이 스물일곱으로 십팔나한 중에서도 어린 편에 속하지만,
무공만 놓고 본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파였다.
평소 자신의 나이 대에서는 삼무룡을 제외하곤,
누구든지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열혈의 무승이 바로 몽진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아운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을 이길 순 없을
것이라 자신하는 중이었다.
특히 정통 소림의 무공을 익힌 그는 그 무공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어디서 무엇을 익혔는지조차 모르는 아운에게 남궁단 등이 진 것은
그들이 방심했고, 소문보다 형편없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옥룡은 그렇다 치고 무명인 아운이 모든 사람들의 칭찬과 관심을
받고 있자 못마땅했다.
어디를 가든지 오늘처럼 자신의 위치가 초라해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소림의 십팔나한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전혀 걸맞지 않는
대접이라고 생각하던 참에, 우칠의 그 말은 그의 가슴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아미타불. 소승 몽진이 하영운 시주에게 청이 있습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모아졌다.
"편히 말해 보시오."
"소승은 하 공자님과 한 수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몽진의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흥미진진한 표정이 떠올랐다.
마차 안에 있던 하영영과 소홀의 얼굴도 상기되었으며,
옥룡 역시 기대 어린 표정으로 아운을 본다.
무이신개 양몽만 혹시나 자신이 짐작하는 사람이 맞을 경우를 생각해서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아운이 몽진을 보았다.
몽진은 아운이 거절할 것을 생각해서 미리 쐐기를 박으려는 생각으로
말했다.
"아미타불. 소승이 사 내에서만 무공을 수련하여 실전이 많이 부족한 편
입니다. 그러니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입니다."
아운을 걱정하는 듯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야한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세상에 강아지가 호랑이 걱정을 다 하네."
흑칠랑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 말을 받았다.
"스님한테 강아지가 뭔가? 소라고 하게, 소. 소처럼 우직한 스님이 아니
신가? 한데, 도축장의 소가 백정 걱정을 다 하는군."
이럴 땐 죽이 잘 맞는 이대 살수였다.
두 사람은 정말 작은 목소리로 소근거렸지만,
들을 만한 사람은 다 들었다.
모두들 표정 관리를 하느라고 안간힘을 쓸 때,
의외로 원하대사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또한 아운의 정체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한이나 흑칠랑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몽진의 대결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고수와의 대결이 그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몽진은 가볍게 숨을 몰아 쉬고 염불을 외웠다.
과연 십팔나한답게 두 살수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운은 그런 몽진을 보고 물었다.
"대결이라면, 실전과 같은 대결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간단하게 손속을
나누는 정도의 대결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운의 물음에 몽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실전 같은 대결을 원합니다."
"그럼 각오는 되어 있겠군요."
몽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며 물었다.
"각오라니요?"
"실전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팔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죠."
마치 남의 말을 하듯이 말하는 아운을 보면서 몽진은 모욕감을 느꼈다.
아운의 말에서 풍기는 느낌대로라면 당연히 목숨을 걸고 대결하면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은 자신이란 뜻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몽진은 다시 한 번 호흡을 조절하며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 다음 아운을
보며 대답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시주."
확실히 소림의 십팔나한 다웠다.
그의 수양과 평정심에 모두 갈채를 보냈다.
아운은 일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앉아 있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무언의 응낙이었다.
한쪽으로 피워 놓은 모닥불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린다.
마침 겨우 정신을 차린 남궁단 일행이 이 모습을 뒤에서 웅크리고
지켜보는 중이었고, 하영영과 소홀도 마차 밖으로 나왔다.
하영영을 지키던 마달과 병사들도 두 사람을 주시한다.
둘은 일 장의 거리를 마주 선 다음 간단하게 예를 갖춘 후,
몽진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
말하던 몽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을 하던 중에 아운의 신형이 갑자기 쏘아진 화살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너무 급작스러웠고, 아운의 동작은 시선이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당황한 몽진이 소림의 절기를 이용해서 아운을 마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몽진이 초식을 전개하기도 전에 아운의 주먹이 몽진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며 몽진은 뒤로 이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모두들 이제 시작하는가 보다 하고 정신을 집중시키 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몽진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운이 주먹에 많은 내공을 싣지 않았었기에 몽진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설 수 있었다.
익히고 있던 금강신공 덕으로, 충격은 있었지만 큰 상처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일어선 몽진이 아운을 보면서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시주, 이것은 무슨 경우요? 말하는 사람을 공격하다니."
그 말을 들은 아운이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죽고 사는 싸움에 무슨 말이 필요한 거지? 지금은 실전이라면서."
그 말에 몽진은 할 말이 없었다.
멀리서 야한과 흑칠랑의 말이 다시 한 번 몽진의 말문을 막았다.
"선배, 사람 죽일 때, 내가 이제 널 죽이려 하니까 조심해, 그러고 죽이는
것 보았소?"
"고명한 스님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럼 그 말 듣고도 맞아 죽는 놈은 뭐 하는 놈이오? 나 같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싸우든지, 실력이 안 되면 도망가고 말겠소."
"멍청한 후배야! 그러니까 넌 죽어서 지옥 가고 스님은 극락 가는 거다."
"그러다 맞아 죽느니, 그냥 이승에서 밥 빌어먹고 살다 지옥 가겠소."
말이 무척 이상했지만, 생각해보니 할 말이 없었다.
"좋소. 처음은 내가 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습니다.
난 아직 내 실력 발휘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아운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몽진이 신중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했다.
소림 칠십이 절기 중의 하나인 복마금강권(伏魔金剛拳)의 기수식이였다.
아운은 천천히 걸어서 몽진에게 다가갔다.
내공조차 사용하지 않고 다가오는 아운을 보고 몽진은 이상하게 긴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당사자인 몽진 뿐만 아니라 보고 있던 사람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둘의 거리가 오 척 정도 되었을 때,
갑자기 아운이 공격을 가해 왔다.
그의 주먹이 몽진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순간,
몽진은 복마금강권을 복마금강수(伏魔金剛手)로 전환하면서 불영착(佛迎捉)
의 초식을 전개해 아운의 손목을 잡았다.
몽진은 아운의 손목을 잡은 순간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 크으윽 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부렸다.
아운의 발꿈치가 몽진의 발등을 밟고 있었던 것이다.
발등으로부터 전해 오는 고통을 참으면서, 몽진은 아운의 손목을 잡은
손에 내공을 모아 그 손을 부러트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운의 손이 미끄리진 것처럼 그의 손아귀를 빠져 나갔다.
이어서 아운의 왼 주먹이 그의 오른손 손등을 가격했다.
마치 손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인해 몽진은 이를 악물고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나 밟힌 발등으로 인해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몽진은 밟히지 않은 왼발을 이용해 자신의 발을 밟고 있는 아운의 발을
걷어차려 했다.
그러자 아운은 뒤로 슬쩍 물러섰다가 다시 다가서며 발로 몽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걷는 동작과 차는 동작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
발을 보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아운이 발길질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운의 상체는 흔들림이 없었다.
빠각!
괴이한 타격음과 함께 몽진은 정강이 뼈가 모두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그러나 몽진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내공을 끌어 모으며 고함을
질렀다.
"크아앗!"
고함과 함께 소림 칠십이 절기 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인 무공 중 하나인
대력금강장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아직 완숙하지 못한 대력금강장을 펼치려면 내력을 모으는 시간이
필요했다.
위력이 큰 만큼 펼치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몽진이 소림사 내에서 사형제들과 겨룰 때 자주 사용하던 무공이 바로
대력금강장이었다.
그러나 그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사 내에서 겨룰 땐 사형제들이 내공을
끌어 모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지만, 아운은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내공을 끌어 모으는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아운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가격해 버렸다.
"컥!"
신음과 함께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한 몽진은 뒤로 비실거리며 물러서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 멍한 표정으로 아운을 바라본다.
아운은 몽진을 상대하면서 어떤 특별한 초식도 사용한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소림의 신진 고수 중 한 명을 너무 쉽게 이겨 버렸다.
결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가 되지 않는 결투
였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두 사람의 겨룸을 본 무인들의 충격은 컸다.
마치 막싸움 같은 아운의 공격에, 절기라고 할 수 있는 무공을 펼친
몽진이 일방적으로 패한 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