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권왕출도(拳王出道)
- 한 모금 마시면 꿈속에서 꽃이 핀다
장년 무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 금덩이 하나가 술 한 병 값어치도 안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년 무사는 몽화산주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며 청년이 있는 쪽을 바라본다.
아마도 청년의 의견을 묻는 것 같았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년인은 품 안에서 또 다시 하나의 금덩어리를
꺼내 들었다.
"이것까지 합하면 한 병은 되겠습니까?"
이자청이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부족하지만, 특별히 한 병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년인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이자청이 뒤에 있는 충복에게 명령을 내리자,
그는 마차 안에서 한 병의 술을 가지고 돌아왔다.
장년의 무사는 그 술을 감사히 받아서 청년과 그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달은 자신이 오해한 부분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지금 장년 무사의 행동으로 보았을 때,
청년 일행이 결코 나쁜 자들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보고 나니 청년 또한 반듯한 성품이 엿보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달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불안한 직감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달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흑칠랑은 장년의 무사가 사 간 술이 몽화산주란 말을 듣자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안타까운 눈으로 그 술을 바라보았다.
아운 역시 그 술이 몽화산주란 것을 알고 몹시 놀란 표정이었다.
몽화산주라면 그 역시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술이었다.
한번은 마셔 보고 싶었던 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야한은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
"일생에 한 잔을 마셔보기 어렵다는 몽화산주가 눈앞에 있는데 냄새조차
못 맡아 보다니 이거야 원."
그의 말을 들은 우칠이 야한을 보면서 물었다.
"몽화산주가 그렇게 맛있는 술이오?"
우칠의 물음에 야한이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말하면 잔소지고, 세말하면 헛소리지. 천하에서 가장 좋은 명주 중
하나라오."
둘은 나이가 비슷해서 말을 놓지도 못하고 올리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우칠은 그 말을 듣자 더욱 목이 칼칼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술을 마셔 본 것이 언제의 이야기인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꿀꺽."
군침을 삼키면서 청년이 마시는 몽화산주를 바라보았다.
아운은 우칠이 몽화산주에 갈증을 느끼는 것을 보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흑칠랑과 야한이 그를 바라본다.
"잠시 기다리고 있게."
아운은 그렇게 말하고 백마상단의 이자청에게 다가갔다.
이자청은 다가서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중키에 평범하고 약간 마른 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남자 같았지만,
상인의 눈을 가진 이자청은 아운의 몸에 흐르는 어떤 기세를 느꼈다.
볼수록 범상해 보이지 않는 어떤 기질을 읽은 것이다.
좋은 상인이라면 반드시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눈으로 상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상급의 상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감으로 상대를 알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대 거상이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자청은 지체하지 않고 일어서서 아운에게 다가섰다.
역시 그의 곁엔 비환금검 철중환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이자청이 나직하게 말했다.
"절대 무례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철중환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이자청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시는 단주의 직감과 눈을 믿었다.
"걱정하지 마시오."
철중환이 대답을 했을 때 아운은 이미 그들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운은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고 말했다.
"운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저도 몽화산주 두어 병을 샀으면 합니다.
혹시 여유가 있다면 파실 수 있는지요?"
아운의 말에 이자청의 눈이 커졌다.
"두 병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운은 말을 하면서 품안에서 주먹만한 보석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보석을 받아 살핀 이자청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 공자님께 몽화산주 세 병을 갖다 드려라!"
아운이 이자청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꺼낸 보석으로는 두 병 값밖에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자청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한 병은 공자님이 마음에 들어서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좋게
드십시오."
아운은 잠시 동안 이자청을 바라보았다.
이자청 역시 아운을 바라보았다.
아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몽화산주 한 병 값은 정말 적지 않은 값이다.
어떻게 보면 일반 백성들은 일 년 동안 일한 돈을 꼬박 모아도 그 술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정도였다.
그걸 사람이 마음에 든다고 그냥 준 사람이나 쉽게 받아들인 사람이나
조금 이상하긴 다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이자청의 충복이 세 병의 몽화산주를 가져 올 때쯤엔,
우칠과 흑칠랑, 야한이 바로 아운의 뒤에서 침을 흘리며 서 있었다.
아운은 그 세 병을 들고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세 사람이 군침을 삼키며 쫓아왔다.
아운은 들고 온 병을 한 군데 놔두고, 그 중 병 하나를 들어서 시원하게
몇 모금 들이킨 다음 우칠에게 주었다.
우칠은 기다렸다는 듯 받아 들고 헤벌쭉하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공."
말과 함께 병을 거꾸로 입에 박은 다음 단숨에 다 마셔 버렸다.
자고로 영웅은 그렇게 술을 마셔야 한다고 들은 우칠다운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본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흑칠랑과 야한은 그 모습을 보다가 화가 나서 말했다.
"아니, 다 마시면 우린 어떻게 하라고?"
그 말에 우칠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내가 마시다가 남겨 주란 말은 못 들었소. 크허헉, 정말 좋오타아…."
그들은 멍한 표정으로 우칠을 보았다가 다시 아운을 본다.
아운은 그들을 못 본 척하고 다시 한 병을 들어 입에 대고 쭈욱 들이켯다.
시원하고 청량한 술의 기운의 그의 몸을 화끈하게 데우며 목젖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간다.
정말 기가 막힌 맛이었다.
잔에 따라 홀짝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런 맛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철중환이 이자청에게 물었다.
"단주님은 어떤 점 때문에 저자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 것입니까? 몽화산주
한 병 값이 얼마인데."
이자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일세. 내가 관상을 볼 줄 아는데, 저 청년은
풍운의 상을 타고 태어난 자일세. 그리고 그의 관상으로 보아 무엇을
하든 가장 높은 곳까지 갈 자일세. 몽화산주 한 병은 그 때를 위한 투자
라고 생각하게. 아주 싼 값이지."
이자청의 말에 철중환은 아운을 다시 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관상을 볼 줄 몰랐다.
그의 눈에 비친 아운은 그저 평범하지만 조금 무엇인가 있어 보이는
정도의 청년에 불과했다.
아운이 벌컥거리며 술을 마시자, 흑칠랑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내가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지만, 나는 자네의 목숨을 두 번
이나 구해준 사람일세. 그걸 항상 명심하게나."
흑칠랑의 말을 들은 아운이 병을 내리면서 말했다.
"목적이 있어서겠지?"
"그래도 구해준 것은 구해준 것일세."
흑칠랑의 발악적인 말에 아운이 할 수 없다는 듯,
마지막 남은 몽화산주 한 병을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좋아! 내가 인심 한 번 쓰지. 둘이 나누어 먹게."
흑칠랑은 말릴 사이도 없이 받아서 벌컥거리며 마셨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화끈한 기운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흑칠랑의 후각을 자극하면서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원래 모든 술은 먼저 향을 음미하고 찬찬히 술을 마신다.
그러나 몽화산주는 좀 달랐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그 향이 잘 우러나오지 않지만,
마시고 난 다음엔 그 향이 입에서부터 천천히 우러나온다.
그래서 후향주(後香酒)라고도 불리고, 여자들이 좋아한다 하여,
여아주(女阿酒)라고도 했다.
흑칠랑은 그 기막힌 맛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였다.
야한이 냉큼 빼앗아 꿀꺽 하고 서너 모금을 들이켰다.
"크아아. 죽인다, 죽여!"
야한이 감탄한 표정으로 말하자 흑칠랑은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달려들었다.
"야, 이 도둑놈아! 왜 남의 것을 가로채 마시는 거냐?"
그 말에 야한이 몸을 틀어 비키면서 대꾸했다.
"무슨 소리! 나누어 마시란 말을 못 들었소?"
"내가 선배니까 조금 더 마신 후에…."
"치사하게 이런 데서도 선후배 찾습니까?"
둘이 술 한 병을 놓고 싸울 때였다.
남궁단을 비롯한 세 명의 청년이 이자청에게 다가왔다.
이자청은 세 명의 청년 무사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남궁단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이 단주, 우리에게도 몽화산주를 파시오."
그 말을 들은 이자청과 철중환의 안색이 굳어졌다.
팔라는 말인지 달라는 말인지는 고사하고,
말속에 포함된 강압적이고 건방진 태도를 읽은 것이다.
이자청은 분노를 느꼈지만, 일단 참았다.
무인들하고 원한관계를 가진다면 무조건 손해 보는 장사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조금 전 스스로 신분을 밝혔듯이 모두 명가의 후예들
이었다.
이자청은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하면서 말했다.
"몇 병이나 필요하십니까?"
남궁단은 들고 있던 돈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걸로 세 병을 주시오. 모자라는 것은 추후 백마상단으로 보내주겠소."
당당하게 말하는 남궁단을 이자청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가 내민 돈은 한 병 값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었다.
철중환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함부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이들의 신분을 이미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이들에게 잘못 보인다면, 강호 무림에서 상업 활동을 접어야만 할 정도로
막강한 배후를 가진 자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이자청은 망설이지 않고 사과를 하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세 병은 안 되고 두 병만 드리겠습니다. 나머지는 이미
언약이 되어 있는 술이기에 더 이상 팔 수가 없습니다."
상인에게 약속이란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미 줘야 할 곳이 정해져 있는 술이다 보니 함부로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궁단을 비롯한 세 청년의 안색이 변했다.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남궁세가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인가?"
남궁단이 얼굴을 굳히며 말하자, 그의 뒤에 있던 언화가 들고 있던
단창으로 바닥을 찍으며 한탄하듯이 말했다.
"남궁가가 무시당하는 세상인, 우리 언가나 쾌도문은 말 하나마나이겠구려.
언제부터 상단 하나가 이렇게 배포가 커졌는지 모르겠소, 남궁 형."
이젠 명백한 협박이었다.
그것도 가문을 들먹이며 말하는, 가장 치졸한 협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자청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철중환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다.
그러나 뽑지 못했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힘이 없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남궁세가나 진주 언가는 물론이고, 섬서 쾌도문은 상단 하나가 상대하기엔
너무 크고 무서운 곳이었다.
이자청은 잠시 분노를 삭이느라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힘이 없다는 것이 이렇게 억울한 것인가?'
이자청은 자신도 모르게 장포를 걸친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상단에 있어서 무력은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무림맹이 창설된 이후 상단에서 무인을 고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
지고 있었다.
무림맹의 장로들은 상단이 무력을 가지는 것을 싫어했다.
상단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움직잉려는 그들만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강호의 상단들은 언제나 그들과 타협을 해야 했고,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몇 명의 무림맹 장로들에게 줄을
대고 정기적인 상납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이젠 상단 자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공공연하게 움직이는 가문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 와중에서도 호연세가의 욕심은 가장 두드러졌다.
백마상단 해도 그들에게 이런저런 제재를 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자칫해서 약점이라도 잡힌다면 상당히 큰 문제가 불거질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교역에서 구입한 몽화산주는 호연란이 거의 대부분 미리
선불을 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자칫하면 호연세가에게 빌미를 줄 수 있었다.
이자청으로선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자청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두 병을 뺀 나머지는 호연세가의 호연 낭자가 이미 선주문을 하였소.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번엔 남궁 공자께서 너그럽게 양보해
주시오."
이자청의 간곡한 말에 남궁단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호연세가는 무섭고 우리는 안 무섭다 이건가? 더군다니 어떤
거지새끼는 마음에 든다고 그냥도 한 병을 더 주고, 우린 그보다 못해서
돈을 주겠다는 데도 오히려 한 병을 더 못주겠다, 이 말이지."
남궁단이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로 말하자 언화가 옆에서 말리며
말했다.
"남궁 형이 참으시오. 이게 다 힘 없는 부모를 둔 탓 아니겠소. 차후에
우리가 무시당한 것을 무림맹에 계신 분들게 전하고 죄를 청합시다.
우리가 못나서 그분들의 후인이 개 무시를 당했다고."
정말 손발이 척척 맞는 협박이었다.
철중환이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들려 할 때,
이자청은 얼른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상인이오. 상인으로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 차후에 이
문제로 따진다면 이 모가 감당하리다."
그의 말에 남궁단의 표정이 굳어졌다.
결국 끝까지 못준다는 말이 아닌가?
고작 한 병을 더 달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남궁가를 비롯한 언가나 쾌도문이 호연세가에 견줄 수 없다고
하지만, 그들은 젊은 혈기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런 씨펄, 앞으로 백마상단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겠다."
뒤에 서 있던 문형기가 고함을 지르자, 철중환이 참지 못하고 다시 검을
뽑으려 했고, 상단의 호위무사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한쪽에 있던 무인들도 이들을 보며 혀를 차고 있을 때,
남궁단과 문형기, 그리고 언화는 모여드는 호위무사들을 비웃으며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명문의 자제나 뒷골목의 하오 잡배나 전혀 다른 것이 없군."
"누구냐?"
고함을 치며 돌아선 그의 뒤엔 라마승과 함께 있었던 청년이 꿋꿋하게
서 있었다.
남궁단은 고함을 치려다가 주춤거렸다.
마치 계집처럼 갸름한 얼굴에 약해 보일 것 같은 청년의 모습이었지만,
그의 기세마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언화가 상대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 주춤거렸던 스스로의 모습을 부끄러워
하면서, 단창을 들고 앞으로 나서려 할 때 였다.
"이 자식들은 내게 넘기시오. 아무리 봐도 형씨보단 내가 이자들한테 더
잘 어울릴 거외다."
수려한 모습의 청년과 남궁단 등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엔 아운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보기엔 마치 유생처럼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수려한 용모의 청년은 아운의 몸에 흐르는 힘을 느끼고 움찔했다.
아운이 자신의 기를 풀어 놓기 전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힘인지라,
수려한 용모의 청년 무사는 자신의 그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는 놀란 시선으로 아운을 보다가 자신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노인과 두 라마승은 청년이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 알아채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아운이 숨긴 기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청년 무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 나이에, 우리 일행을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자신의 기운을 숨길 수
있는 실력자란 말인가?'
자부심이 강했던 청년은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이들은 명가의 자제들이요. 자칫하면 강호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할 수
있소."
점잖은 충고였다.
아운은 미소를 머금고 청년을 쳐다보았다.
정말 여장을 하면 잘 어울릴 만큼 수려한 용모였다.
그러나 그 여린 듯한 청년의 몸에서 뿜어지는 힘이나 기품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요. 난 원래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
라서. 그리고 나는 여기 백마상단의 단주님께 몽화산주 한 병의 빚이 있소
이다. 그리고 저들은 그것을 핑계 삼은 면도 있으니, 당연히 내가 나서야
원칙이오."
청년은 그 말에 말문을 막혔다.
그러고 보니 남궁단과 그 일행은 백마상단의 단주가 아운에게는 덤으로
몽화산주를 주고, 자신들에게는 한 병을 더 줄 수 없다고 한 부분을
따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서로 나서겠다고 다툴 때,
녹주의 모든 시선들은 이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영영 역시 마차 안에서 문틈으로 남궁단 일행의 억지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시끄러운데 누군들 내다보지 않겠는가?
그녀는 남궁단 등의 행동거지에 화가 나서 한 마디 하려 했건만,
소홀이 나서서 말리는 바람에 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두 명의 청년이 나서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나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로선 조금 뜻밖이었다.
하영영은 다행이다 싶은 생각으로 두 청년을 살펴보다가 아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멈추었다.
아무리 변하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하영영은 오빠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비록 모닥불로 인해 희미한 얼굴 윤곽이었지만, 그 윤곽 안에서 고집스런
입술과 아운만이 가지는 기질을 읽었고, 그가 자신의 오빠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목소리.
하영운 특유의 고집스럽고 약간은 오만한 듯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영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홀은 그런 그녀를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아운과 수려한
용모의 청년을 보면서 말했다.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라면 젊은 측에서 그래도 꽤 한다고 하는
실력자들인데, 저 청년들이 걱정스럽네. 여차하면 나라도 나서야겠는데.
어차피 나야 저 자식들 가문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아니면 신개라도
나서겠지."
소홀의 말을 듣고 하영영이 물었다.
그녀는 소홀이 신개라고 하는 말을 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은 오빠가 전부였다.
"소홀 언니, 우리 오빠가 권왕인 거 맞죠?"
"내 정보가 틀림없다면 분명할 거야!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지?"
"그럼 저 망나니 세 사람과 오빠를 비교하면 어떻죠?"
그 말을 듣고 소홀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가볍게 웃었다.
"동생은, 어른과 이제 막 걸음마 떼는 아이를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물론 오빠가 어른이겠죠?"
"당연히!"
하영영은 그 말을 듣고 상큼하게 웃어 준다.
소홀은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운과 남궁단의 일을 지켜보는 시선은 그녀들 뿐만 아니었다.
무인들로 보이는 여덟 명의 인물 역시 아운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한 무림처럼 보였지만 엄격하게 말해서 두 무리였고,
그 두 무리는 오늘 녹주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었다.
그들 여덟 명은 언뜻 보면, 한 무림처럼 똑같이 모래바람을 막아줄 수
있는 장포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우연치고는 참 묘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장포로 인해 그들의 얼굴이나 모습을 구별하기가 아주 어려웠다.
단지 그들이 허리에 찬 무기를 보고 무인이라 짐작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섯 명이 무리를 이룬 일행들 중 세 명은 모두 강호의 명숙들이었으며,
나머지 두 명은 그들의 사문에서 상당히 기대를 걸고 있는 후기지수들
이었다.
이들은 남궁단 일행의 행실을 보고 자신들이 끼어들 틈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한 쪽에 있는 세 명의
무인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녹주에서 합류한 무인들로 무엇인가 수상쩍은 면이 있었기 때문
이었다.
특히 다섯 명의 일행 중 무이신개 양몽은 그들 세 명 중에 한 명을 알아
보았다.
그는 강호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섬라사도(閃羅死刀) 목우락(目宇樂)
이었다.
혈궁대전 이전의 사파 고수인 섬라사도는 당시에 가장 유명했던 수많은
고수들 중에 한 명이었다.
그의 손속이 워낙 잔인하고 냉정해서 어느 누구도 그와 사귀는 것을 꺼려
할 정도로 무서운 자였다.
그는 당시 칠사 중 에 한 명인 검사(劍死)에게 패한 후 강호에서 사라졌던
인물이었다.
무이신개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수였으며,
그가 강호 무림에 다시 나타났다는 그 하나만으로 무림이 놀랄 만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그런 목우락이 다른 두 사람에게 상당히 공손하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나머지 두 사람의 정체가 더욱 궁금한 무이신개 일행이었다.
무이신개 등은 알게 모르게 목우락 일행의 동정을 살피던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목우락은 무이신개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남궁단 등의 행실이 극에 이르자, 젊은 후기지수들이 참지
못하고 일어서려던 찰나 아운과 수려한 용모의 청년이 먼저 참견하고
나선 것이다.
무이신개는 눈을 빛내며 두 젊은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수려한 청년의 일행인 두 라마승,
그리고 장년 무사와 노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단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섰다면, 그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을 거란
생각이었고, 그의 일행을 살핌으로써 청년의 실력과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를 거란 생각을 한 것이다.
밤에 그 모습을 살피기엔 먼 거리였지만,
내공의 고수인 무이신개에겐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땡초, 말코. 오늘 아무래도 이 녹주 안에는 용호가 득실거리고 있는 것
같네."
"아미타불. 무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 두 명의 라마승이 포달랍궁의 라마승들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 중일세."
"아미타불. 그럴 리가 없네. 근래 들어 오십 년 동안 포달랍궁의 라마
들이 그 곳을 떠나 사막으로 온 예가 한 번도 없는 것으로 들었네.
포달랍궁의 대활불은 노납의 스승님과 친분이 있어서 그 사정을 내가
잘 알고 있네."
"후후, 그거야 나중에 알게 되겠지.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무이신개의 말에 그의 오른쪽 옆에 있던 소림의 원화대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두 라마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포달랍궁의 사대활불인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미타불. 신개는 무엇으로 그런 추측을 하는 것인가?"
"이 거지가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네. 서장의
라마승들 중 저들 만큼 출중해 보이는 인물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포달
랍궁의 라마승들이 아니라면 힘들 거란 말일세. 그 외의 라마들은 모두
요사스럽고 색정에 반들거리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구할일세."
원화대사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라마승들을
바라보았다.
한편 무이신개는 수려한 청년의 일행을 전부 훑어보고,
이번엔 아운의 동료들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무이신개라도 두 명의 살수와 우칠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강호제일의 살수답게 흑칠랑과 야한은 자신들의 능력을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삼류 낭인무사 같아 보였다.
그리고 우칠은 당연히 그저 힘만 센 촌놈처럼 보일 뿐이었다.
조금 멀리 있기에 아운의 기를 눈치 못 챈 무이신개는 이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 나서는 것을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동료들이나 그의 어디를 보아도 남궁단과 그 일행을 저지할 만한,
그 어떤 특별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 평범해 보이는 청년의 일행들은 전혀 걱정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여유가 있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무이신개는 아운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아운과 수려한 용모의 청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은 그들의 결정에 따라 누군가
에게 아주 혼이 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치 당연히 혼내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을 보고
남궁단과 언화, 그리고 문형기의 얼굴엔 살기가 어렸다.
그들은 세상 어디 가서도 이렇게 무시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남궁단이 거칠게 말을 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이런 후레자식들이 있나. 어디서 어정쩡한 무공 한 수 배웠다고 사람을
무시하다니, 그냥 둘이 한꺼번에 나서라! 어차피 두 놈 다 살려 놓을
생각은 없으니."
남궁단의 말을 들은 야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묘한 웃음을 입가에 달고 흑칠랑에게 말했다.
"선배, 저 어린 놈이 말하는 것 들었소?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아름다운
밤이 될 것 같지 않소?"
흑칠랑은 눈살을 찌푸리며 야한을 노려보았다.
'이런 변태새끼가, 지 나이는 많은가? 누구에게 어린 놈이라고 해.'
속으로 욕을 한 흑칠랑은 대꾸하기 싫은 듯 아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도 묘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운은 손에 든 몽화산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남궁단을 보고 피식 웃은
다음, 말했다.
"천하의 남궁세가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너를 보면 알 것 같다. 그리고
언화라고 하는 놈. 어차피 언가는 나하고 묵은 빚이 조금 있으니 오늘 그
빚까지 네놈이 청산해야겠다."
아운의 말에 언화가 눈을 부릅뜨고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정말 세상 무서운… 켁."
언화는 말을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아운이 들고 있던 술병으로 사정없이 머리를 내리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작이 너무 빨라서 언화는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치는 힘에 의해 고개가 푹 수그러드는 순간
아운은 위로 뛰어 오르며 무릎으로 그의 입을 올려 차 버렸다.
다시 한 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이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언화의 입은 모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마치 밟힌 떡처럼 으깨진 언화가 바닥에 누워 바들거렸다.
너무 큰 충격과 아픔으로 인해 눈물을 찔끔거리고 있었지만,
기절할 수도 없었고, 맥이 빠져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았던 고통은 그에게 공포를 선사함과 동시에
정신을 황폐화시켰다.
아운의 단 한 수를 본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자청 역시 놀란 얼굴로 아운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일에 나서 준 것은 더 없이 고마웠지만, 젊은 사람이 괜한 일에
끼어들어, 나중에 삼대 가문으로 인해 앞길이 막힐까 봐 말리려 했었다.
그러나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한쪽에 웅크리고 지켜만 보던 여덟 명의 무인들도 이때만은 모두 놀란 듯
했다.
그들 중 무공이 약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그 누구도 지금의 아운처럼 간단하게 언화를 쓰러트릴 순 없었다.
귀문창(鬼刎槍) 언화(彦華)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젊은 층에서는 그 나름대로 강한 인물이었고,
능히 일류라 할 수 있는 자였다.
비록 젊은 층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백마상단의 호위무사들인 백마수호대의 대주 철중환이라고 해도 결코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언화가 너무도 간단하게 쓰러졌다.
그것도 술병에 맞아 기절 직전까지 간 것이다.
남궁단과 문형기는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젊은 고수들 중에서 자신들을 이렇게 간단하게 다룰 수 있는 자들이라면
삼룡삼봉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순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는 그가 아는 삼룡삼봉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였다.
혹시 반노환동한 숨은 기인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운의 분위기가 노고수의 그것과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무이신개는 아운을 보면서 한동안 머리를 짜내야 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젊은 고수들이 한꺼번에 전부 떠올랐다가 차례대로
지워졌다.
그러다가 그의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하긴 요즘 그 일로 인해 거의 두 달간 사막을 헤맸고,
이젠 꿈에서도 환상이 보일 정도로 매진해 있던 일과 관련이 있는
자이기도 했다.
"땡중, 말코. 오늘 어쩌면 사막 한가운데서 천고의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 같네."
그의 오른쪽에 있던 원화대사가 말했다.
"아미타불. 신개는 저 청년을 두고 한 말인가? 아니면 그 앞의 수려한
용모의 청년을 두고 한 말인가?"
"흐흠, 땡초.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 신개를 믿어보라고.
내 생각이 맞는다면, 오늘 저 망나니 녀석들은 아주 크게 혼이 날 거야.
다시는 함부로 날뛰지 못할 만큼."
무이신개 양몽의 말에 그의 왼쪽에 있던 자가 말했다.
"무량수불. 노개는 이미 저 청년의 정체를 짐작했구먼."
"말코 역시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그것은 나중에 말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지켜보기나 하자고. 어차피 우리가 나선다면 제대로 혼을 내지도
못할 테니, 혼 좀 나게 놔두는 것도 좋을 거란 생각일세. 저 망나니
녀석들에겐 보약이 될 수도 있으니."
무이신개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아운에게 모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