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집법사자(執法獅子)
- 권왕은 자신에게 무례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묵소정은 묵천악이 무엇인가 일을 저릴렀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홍희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는 순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묵천악을 찾아갔다.
"어찌된 일이냐?"
묵천악은 이를 악물었다가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그 계집이 감히 나를 능멸하였습니다. 나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누님."
묵소정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필이면 지금."
"아운, 그 개새끼는 나를 말려 죽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내
심장에 검을 꽂아 주십시오. 내가 천마혈인이 되어 이 쌍지도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말겠습니다."
묵천악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묵소정도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쌍지도를 들어온 지도 벌써 반 년이다.
묵천악이 지금까지 참은 것도 기적 같은 일이라고 하겠다.
"그래, 다 죽인 후 넌 어떻게 유사를 빠져 나가려고 하는 것이냐?"
"황룡이나 그 밑에 있는 몇 놈만 살려 놓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라면 누님의 무공으로도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묵천악의 당당한 말에 묵소정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천마혈인이 되면 넌 나마저도 죽이려고 할 것이다. 누굴 살려 놓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고 입이나 닥쳐라!"
묵소정이 화가 나서 말하자, 묵천악은 그제서야 고개를 숙였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느냐?"
묵천악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어제 유사하에 던져 버리려고 가다가, 갑자기 황룡의 수하들이 나타나는
바람에 일단 모래 바닥에 묻어 놓고 돌아왔습니다."
묵소정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요즘 이른 새벽에 황룡의 수하들이 모래 위에서 무공을 연습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래 위에서 무공 수련을 하면 하체가 튼튼해지고 몸의 중심을 잡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 흡중수에서 무공을 수련하다가 모래 위에서 무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것은 이 개월전부터 였다.
그 이유는 궁법과 도끼를 던지는 초식 때문이었다.
화살도 그렇지만, 도끼의 경우는 물 속에서 던지는 수련을 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었고, 날아간 화살이나 던진 도끼가 물 속에 빠지면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묵천악에게 있어서 그것은 불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급하다고 시체를 모래 안에 넣었다면 안 봐도 뻔했다.
일단 급하게 모래를 파고 넣은 시체라면 그 티가 금방 날 것이고,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제 아운의 성격이라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불안해졌다.
"넌 끝까지 네가 아니라고 말해라!"
"알았습니다, 누님."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죽였다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너는 홍희가 죽을 때 나랑 함께 있었던 것이다. 마침 나는 혼자 자고
있었으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누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시간에 둘이서 뭐하고 있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떠나야 할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한탄하고
있었다고 하면 될 것이다. 운 공자 자신이 지금까지 늦장을 부린 당사자니
그 말을 들으면 가슴에 찔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안해서
라도 우리를 함부로 추궁하진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묵소정의 말엔 그 동안 아운에게 섭섭한 마음이 묻어 나왔다.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무정함도 무정함이지만, 벌써 육 개월이다.
아직까지도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녀나 묵천악이나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책임의 일부를 아운에게 전가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늦은 시간에 자주 만나서 푸념하곤 했었으니,
변명이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그리고 묵소정은 묵천악이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겨우 사막의 마적단 첩 노릇이나 하던 계집이었다.
그런 계집 하나 죽였다고 큰 죄가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묵천악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운이 무서울 뿐이지, 자기가 한 일에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
날이 밝았다.
묵소정의 예상대로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점심이 지나 오후가 되었을 때 홍희의 시체가 발각 되었다.
그런데 당연히 자신과 동생 묵천악을 불러서 추궁할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아운은 다음 날 출발한다는 말만 전해왔다.
묵소정은 그 말을 듣고 조금 안심했다.
'하긴 그 따위 마적단 계집 때문에 나를 추궁한다면 말이 안 되지.'
묵서정은 홍희 따위의 일로 아운이 자신을 추궁하지 않은 것은 신분상의
문제 때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그런 하찮은 계집들보다는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일 거라고
믿으며 나름대로 아운의 마음을 헤아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는 묵소정이었다.
그러나 묵천악은 달랐다.
차라리 매도 먼저 맞는 사람이 낫다고, 오히려 갈수록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워 잠을 한숨도 못자고 말았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일까?
아니면 아운이 남자였고, 그로 인해 여자로서 자신감이 넘치는 묵소정의
지나친 자만일까?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
아침이 되자 갑자기 야한은 부지런을 떨고 있었다.
흑칠랑이 의아한 표정으로 짐을 싸는 야한을 보며 물었다.
"이보게 후배, 자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인가?"
"뭐 하다니, 보면 모릅니까? 짐 싸지 않습니까, 짐."
"짐은 왜?"
"그야 이 세상에서 제일 신나는 구경을 보러 가려는 참이죠."
"…?"
흑칠랑은 의아한 표정으로 야한을 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 권왕 운 공자님이 묵가 남매를 데리고 어딘가로 간답니다. 당연히
쫓아가야죠."
'운 공자님? 이런 얍삽한 자식 같으니. 죽이려 할 땐 언제고, 이젠 대 놓고
운 공자님이라니.'
흑칠랑은 자신에겐 삐딱한 말투를 쓰면서 아운에게는 존경의 표현을
아끼지 않는 야한에게 울화가 확 치밀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래 거길 쫓아가면 뭐 좋은 일이라도 있나? 대체 무슨 구경을 한단
말인가?"
순간 야한의 표정이 아주 묘하게 변하였다.
"흐흐, 운 공자님이 두 남매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이곳을 뜬단
말이오."
"그래서?"
"권왕이 누구요? 저 묵가 남매가 한 짓을 모르지 않을 텐데 그냥 묵과하고
나간다는 것은, 일단 데리고 나가서! 흐흐! 그 좋은 구경을 놓칠 순 없지
않겠소."
야한이 음흉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보따리 한가운데 놓여 있는 피 묻은
도끼 자루를 바라보았다.
흑칠랑은 그제서야 뭔 말인지 알아들었다.
'벼, 변태 같은 놈….'
흑칠랑은 야한이 드디어 이상한 곳에 취미가 붙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끼 자루를 보니까 몸이 더워진다.
야릇한 공상이 떠오르며, 피투성이가 된 묵소정의 모습이 그의 전신을
짜릿하게 만든다.
"으음, 뭐 나야 그런 구경엔 별 관심이 없지만, 역시 암습의 기회를 노려야
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흑칠랑도 짐을 싸기 시작했다.
***
떠날 채비를 마친 아운은 두 남매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돈황으로 들어간다. 그리 알고 준비
하도록."
아운의 말을 듣고서야 묵천악은 불안한 마음이 가셨다.
반대로 묵소정은 너무 간단한 아운의 말을 들으며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뭔가 자신에게 한 마디쯤 더 해주길 바랐던 탓이었으리라.
"우린 준비가 다 끝났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서 바라본 곳에는 두 명의 살수가 나란히
말을 타고 다가온다.
아운은 표정의 변화 없이 두 살수를 바라보았다.
흑칠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암습을 조심해라! 난 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흑칠랑은 차갑게 말하여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누가 뭐라고 해도 쫓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운의 시선이 야한을 향했다.
"공정한 대결을 위해서 심사를 해야 하겠기에…."
야한은 멋쩍은 표정으로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별로 멋진 변명은 아니었다.
그렇게 일행은 다섯이 되고 말았다.
아운을 바라보는 소설과 소산의 표정만이 굳어 있을 뿐이었다.
***
우칠은 사막을 어떻게 지나갈까 망설이다가, 마침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무려 황금 두 냥이나 주고 말 한 필을 샀다.
그의 사부가 우칠에게 남겨준 돈은 적지 않았기에 그 정도는 별 문제가
없었다.
상인은 우칠을 보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막이 처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명심하십시오. 사막에서 물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산 이 말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없이 홀로 사막을 거너려면 차라리
자살하는 것이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우칠은 그 말을 가슴에 담고 또 담아 두었다.
어디든 첫 발을 디딜 때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들어야 한다는 사부의
교훈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우칠은 그렇게 물과 음식까지 넉넉하게 준비한 다음,
말을 몰아 당당하게 사막으로 나서싿.
삼 일간 말을 몰아 달려도 한없이 펼쳐진 대사막은,
그 끝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넓고 넓었다.
우칠은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맞으면서 저절로 호연지기가 이는 것을
느꼈다.
그 동안 패해서 아프고 쓰리던 마음과 육체가 저절로 다 아무는 듯 했다.
"역시 남자는 가슴이 넓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겠구나.
나 우칠은 사막의 광활함을 가슴에 담아 진정한 남아가 되리라! 사막의
영웅들이여 기다려라! 대막제일신마 우칠이 가신다. 크하하하!"
혼자 중얼거리던 소리는 끝내 대 사자후로 변해서 사막의 저편으로 번져
갔다.
한데.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우칠을 태우고 가던 말이 픽 쓰러지고 말았다.
"으헉!"
순간 몸을 가뿐하게 날려 겨우 낙마를 모면한 우칠은 어이없는 얼굴로
말을 보았다.
우칠처럼 무식한 덩치의 인간을 태우고 삼 일간 제대로 쉬지도 않고
달린 대가가, 갑자기 들려온 우칠의 고함(자신도 모르게 내공까지 실은)에
충격을 받고 기절한 것이다.
우칠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할 수 없지."
우칠은 말을 통째로 어깨에 둘러메고 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상인이 한 말을 아직도 명심하고 있었다.
< 말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다. >
***
돈황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명의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사막의 모래 바람은 마치 몽고의 기병처럼 돈황을 덮치곤 하였지만,
돈황의 영웅객잔은 언제나 사람이 붐비고 있었다.
아운은 두 남매를 데리고 객잔 안으로 들어간 다음 음식을 시켜놓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무사히 왔다. 하지만 나도 여기서 어떻게 하란 말은 듣지
못했다. 너희 남매는 당연히 그 다음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
한다."
"이 다음은 제가 알고 있으니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단, 우리가 사라신교
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해준다는 약속은 지키리라 믿습니다."
묵소정의 말에 아운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너 하고 한 약속은 아니지만, 약속은 지킨다."
아운의 냉정한 말은 묵소정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작은 상처를 만들고
말았다.
그녀의 오기와 독기가 다시 한 번 꿈틀거린다.
묵천악은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겨우 억눌러 참아 내었다.
'개자식! 조그만 기다려라.'
속으로 욕을 하며 울분을 겨우 참아내는 묵천악이었다.
아운은 그저 냉정하기만 했다.
쌍지도에서 돈황까지 꼬박 삼십이 일이 걸렸다.
시간이 나는 대로 무공 수련만 하였고, 잠자는 시간은 간단하게 운공으로
대처하였으며, 말을 달리면서도 오로지 무공에 대한 연구만을 하였다.
묵소정으로서는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운은 노골적으로 방해 된다는 표정을 짓곤 했었다.
철저한 무시였다.
그럴수록 묵소정은 아운에 집착이 강해져 갔고,
묵천악은 아운에 대한 미움이 더해졌다.
또한 아운에게 무엇인가를 바라던 두 살수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래도 끈덕지게 따라 온 두 살수는 아운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날 일행은 영웅객잔에 방을 잡고 묵천악은 정운이 시킨 대로 깃발을
달아 놓았다.
그리고 삼 일이 지났다.
객잔의 별채에 자리 잡은 일행은 누군가 접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삼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흘 째 아침이 되는 날이었다.
일행이 아침밥을 먹으로 객잔으로 나갈 때였다.
콰앙!
갑자기 별채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와락 열리며,
세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를 분간하기 어려운 노인과 덩치가 크고 변발을 한 두 명의 대한,
그리고 상당한 미모의 중년 여인과 이제 이십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한 명이었다.
이십대 여자의 미모는 중년 여자보다도 더욱 뛰어나 여자가 안으로 들어
올 때부터 묵천악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두 명의 대한은 등에 거대한 환도를 메고 있었는데,
생긴 모습으로 보아 둘은 형제 같았다.
노인은 비록 나이는 들어 보였지만, 허리가 꼿꼿하고 걸어 들어오는 걸음엔
박력이 있었읍며, 눈초리가 매섭다.
누가 보아도 노인의 무공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운은 나타난 사람들이 묵천악의 손님임을 알았다.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묵천악과 묵소정은 앞으로 나와 긴장한
눈으로 나타난 사람들을 살펴본다.
매부리코의 노인이 묵소정에게 다가왔다.
노인의 손에는 묵소정 남매가 달아 놓았던 작은 깃발이 들려 있었다.
노인은 잠시 동안 묵소정과 묵천악의 얼굴을 살펴 본 다음 물었다.
"이 깃발의 주인인가?"
"그렇습니다. 나를 찾아오신 분인가요?"
묵소정이 조금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자,
노인이 그 자리에서 허리를 숙였다.
노인의 뒤에 서 있던 두 남자오 두 여자들 역시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다.
"사라의 소교주님가 신녀님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라의 집법사자(執法獅子) 무태가 인사를 드립니다."
처음엔 당황하던 묵소정과 묵천악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묵소정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그 동안 당한 서러움과 아운으로부터 받았던 박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 두 분의 이름과 두 분에게 이 깃발을 남기신
분의 함자를 알고 싶습니다."
"깃발을 남기신 분은 묵씨 성에 희자 영자를 쓰십니다. 저의 어미니
셨습니다."
묵소정이 침착하게 말하자 집법사자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심하게 떨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두 남매의 모습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신녀
묵희영의 얼굴을 빼다 박았다.
특히 묵소정의 얼굴은 묵희영이 살아 돌아온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 안을로 들어오자마자 깃발의 주인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태의 뒤에 있던 이십대의 여자가 앞으로 사뿐히 걸어나와 큰 절을
하면서 말했다.
"화당주인 호혜라고 합니다. 소교주님과 신녀님을 뵙습니다."
묵천악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에 이어서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중년의 여자가 뒤이어 인사를 했다.
"신녀님을 모시는 하녀장 요설이옵니다."
마지막으로 두 명의 변발 대한이 앞으로 나서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면서 말했다.
"아륵진입니다."
"아륵도입니다."
무태가 보충 설명을 하였다.
"앞으로 소교주님을 호위하게 될 아륵진, 아륵도 형제들입니다. 두 사람은
사라의 십이맹표(十二猛飄) 중에서도 수위 무사들입니다."
무태의 말을 들은 묵천악은 내심 실망을 했다.
비록 강해 보이지만, 두 형제가 아운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그런 눈치를 보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묵천악입니다. 두 분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저희 형제는 목숨을 걸고 소교주님을 보호할 것입니다."
아륵진이 자신 있게 말했지만, 묵천악은 속으로 '너희 실력 정도로.' 하고
말하는 중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눌 때에 무태는 두 남매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말을 하는 묵천악이나 묵소정의 입에서 바람이 조금씩 새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비록 내공으로 조절하고 있었지만 발음이 이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언뜻언뜻 보이는 두 남매의 깨져서 날아간 이빨.
무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동안 고생을 많이 하신 듯 합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소교주님과
신녀의 성스런 몸에 생채기를 냈습니까? 당장 그 놈을 잡아서 사체
분시를 해 버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누구인지 안다면 그 자리에서 쳐 죽일 기세였다.
묵소정이 움찔할 때, 묵천악은 자기도 모르게 아운을 보았다.
아운은 태연한 표정으로 무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은 무관하다는 모습 같기도 했고,
네가 보면 어쩔래 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묵천악은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아직 무태의 실력을 모르는 그로선 감히 아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묵천악이 아운을 돌아보는 순간, 무태의 시선도 아운에게 향했다.
묵천악의 행동으로 보아 지금 이 청년이 소교주와 신녀의 몸에 난 상처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그러나 무태는 설마 아운이 직접 그랬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우선 아운의 몸에서 느껴지는 내공의 기운이 너무 평범했다.
그 정도로는 묵소정이나 묵천악을 어떻게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또한 아운의 분위기로 보아 여자인 묵소정에게 폭력을 휘두를 정도의
무뢰배로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운이나 아운 뒤에 서 있는 두 남자의 위치나 행동으로
보아선 소교주나 신녀인 묵소정과 함께 온 일행인 것이 분명했다.
"일행이십니까, 신녀님?"
무태의 물음에 묵소정은 묵천악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며 말했다.
"저를 여기까지 데려다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뒤에 계신 두 분도 함께
온 일행입니다."
묵소정이 아운을 소개하자, 무태는 아운을 다시 보게 되었다.
여기까지 보호해온 보호자라면 자신이 오해를 할 뻔 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신녀를 여기까지 모시고 온 자라 하지 않는가?
말하는 투로 보아서 묵소정은 저 어려 보이는 청년을 무척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묵천악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무엇인가 특출한 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엔 그저 애송이에 불과했다.
아마도 길 안내인쯤 될 거라 생각했다.
"참으로 수고 하였다. 사라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투였다.
결코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투가 아니었다.
무태의 오만한 말에 묵소정은 당황했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 말투는 영 아니군."
아운이 무태를 쏘아보며 말하자, 순간적으로 무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뒤에 있던 아륵진, 아륵도 형제는 당장이라도 등에 메고
있는 환도를 뽑아 들 기세였다.
"이놈, 감히 집법사자님에게 무슨 말 버릇이냐? 당장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어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의 율법으로 다스리겠다."
참으로 무식한 협박이었다.
그걸 보고 흑칠랑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맹호 앞에서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는군."
야한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 말을 받았다.
"언제부터 고양이가 저렇게 약했소?"
"사막의 고양이는 먹을 게 없어 빈약한 법일세."
야한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라의 율법은 네놈들에게나 통하는 말이다. 난 사라신교의 교도가 아니다.
단지 나는 청부를 맡아 네놈의 잘난 소교주와 신녀를 보표해 왔을 뿐이다."
아운의 차가운 말에 아륵진 형제가 등 뒤에서 환도를 뽑아 들려는 순간,
무태의 손이 올라갔다.
반사적으로 두 형제의 손이 멈추어졌다.
"그만."
나직한 말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형제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무태는 아운을 보며 가볍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나 아운의 모습은 태연하기만 하다.
무태는 그제서야 상대가 보이는 것과는 달리 결코 약자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담이 갔다.
지금도 아운의 내공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살기를 쉽게 받아낸 자가 약자일 수는 없었다.
무태는 상대가 어떤 특수한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아직 저 나이에 자신의 힘을 안으로 갈무리할 정도의 실력을 지녔을 리는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특히 자신의 눈을 완전히 피할 정도로 자신의 내공을 감춘다는 것은
사라신교의 교주라도 어려운 일이다.
어떤 종류의 무공은 내공이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런 종류의 무공을 익혔으리라 짐작했다.
절반은 맞은 셈이었다.
묵소정과 묵천악은 아운과 사라의 호법인 무태가 충돌하려 하자 잔뜩
긴장했었다.
묵소정은 말리고 싶었지만, 사라의 힘을 알고 싶었다.
과연 사라의 힘으로 아운을 누를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그 궁금함은 묵소정보다는 묵천악이 더욱 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묵소정은 자신의 심정을 숨겨야 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혹시라도 집법사자가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반대로 아운이 여기서 화가 나서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계획이
틀어진다.
일단 사라신교로 가서 일이 벌어져도 벌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는 얼른 앞으로 나섰다.
"무뢰해서는 안 됩니다. 저를 여기까지 보호해 주신 분입니다. 운 공자님도
참으십시오. 소녀가 대신 사과를 드립니다. 집법사자님, 이 분은 아운이란
분으로…."
"아, 아운. 권왕 아운!"
무태가 놀라서 아운을 보았고, 아륵진 형제나 화당주와 시녀장도 놀란
표정이었다.
얼떨떨한 것은 묵소정이나 묵천악이었다.
설마 사라신교의 인물들이 아운을 알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운마저도 황당한 기분이었지만, 사막을 횡단한 용진회의 짐꾼들과
금룡표국의 표사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번진 아운의 명성은 이미 사막의
영웅, 그 이상이었다.
비록 호연세가와 관련한 이야기는 슬쩍 빼고 말했지만,
혈랑대를 완전히 쓸어버린 것이 아운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금룡표국의 표사들로선 천마혈인이 나타난 것을 알지 못했기에 아운이
그들을 격파했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이것이 살아남은 혈랑대들의 말과 합해지면서 권왕은 괴물이라는 말로
와전되면서 가지가지 소문으로 확대되어 가는 중이었다.
특히 사막의 신이라는 광풍사의 대군령이 아운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운의 명성은 사막의 태양보다 더욱 뜨겁게 떠오르고 있었다.
사막에서 광풍사의 명성은 혈랑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사라신교라고 해도 감히 광풍사와 비교할 순 없다.
그런데 혈랑대는 물론이요, 광풍사의 대군령조차 꺾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아운의 명성은 이미 대 사막을 넘어 중원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묵천악이 천마혈인이 되어 저지른 일도 아운이 한 일로 둔갑을
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아운의 모습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서로 엇갈리는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아운이 광풍사와 혈랑대를 꺾었다는 사실은 변함없이 사막의
모래 바람을 타고 널리 알려졌다.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알려진 소문은 단 한 가지였다.
< 권왕은 자신에게 무례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
그들은 경악한 모습으로 아운을 보는데,
아륵진 형제의 얼굴엔 설마 하는 표정이 강했다.
그러나 여자인 화당주나 시녀장인 요설의 시선은 젊은 영웅에 대한 호기심
으로 가득했다.
"권왕을 몰라보았습니다. 무태가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사람은 권세와 힘이 있고 봐야 할 일이며,
이름에 값어치가 있어야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묵천악은 약이 오른다.
특히 묘한 시선으로 아운을 보는 화당주의 모습을 보자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처음부터 호감을 지녔던 여자였고, 소설의 경우가 있었기에 그가 느끼는
시기심과 질투심은 도가 넘어서고 있었다.
특히 화당주의 저 끈적끈적한 눈초리는 소교주인 자신을 향해서만 보여
줘야 할 모습 아닌가?
감히 자신이 아닌 인간에게.
그것도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아운에게.
'개 같은 년, 내가 정식으로 소교주가 되면 노리개로 삼았다가 죽여
버리겠다.'
묵천악은 결심을 굳혔다.
여자가 누구에게 눈길을 보내던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묵천악의 시기심은 그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운과 관련된 것은 점점 민감해지는 그였다.
"아운이요."
아운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였고, 무태는 좀 무안한 표정으로 아운의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일종의 면피 행동이었다.
"난 흑칠랑."
"난 야한이라고 하는데. 선배, 우리 이름 함부로 말해도 되는 거요?"
"뭐 어때, 어차피 그래봐야 권왕의 명성에 가려질 이름인데."
흑칠랑이 투덜거리며 말했지만, 듣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언제고 중원을 도모하려는 사라신교는 강호의 소식에도 밝은 편이었다.
그런 그들이 흑칠랑과 야한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암천마검과 귀검살이라니."
무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두 살마을 보았고,
아륵진 형제의 눈은 불타올랐다.
그들은 무태와 달랐다.
경험 많은 무태는 평범해 보이는 아운의 모습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힘을
느끼고 있었지만, 사라신교의 젊은 전사들 중 최고라는 그들의 눈에 비친
아운의 모습은 만만한 상대였다.
비록 무태의 보이지 않는 저지로 인해 참고 있었지만,
사막에 도는 소문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믿었다.
두 형제는 전사들답게 기회가 된다면 아운에게 사라신교의 힘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중원제일, 제이를 다투는 살수들과 사람을 죽여 시체를 사체분시로 찢어
죽인다는 권왕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이제 갸야하지 않겠소. 난 빨리 사라신교까지 두 남매를 데려다주고
돌아가야겠소."
아운의 말에 무태가 앞장을 서서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온 묵소정과 묵천악을 비롯한 아운과 두 살수는 모두 놀란
표정으로 그들을 기다리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모두 사십 마리의 거대한 낙타가 이열로 나란히 서 있었고,
그 가운데엔 네 마리의 하얀 낙타가 끄는 백옥의 거대한 마차가
서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은 능히 선녀가 타는 천상의 옥차 같았다.
그리고 이열로 선 낙타들 옆에 서 있는 당당한 모습의 무사들은 모두
일당백 이상의 기상이 엿보인다.
약 십여 명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마차 앞에 이열로 서 있고,
그 사이로 아름다운 비단이 별채 앞의 문 앞까지 놓여 있었다.
소위 말하는 비단길이리라.
묵천악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소교주님과 신녀님은 마차에 오르십시오."
두 남매는 비단을 밟으며 마차로 향했다.
묵천악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기분이었다.
'흐흐. 아운 이놈, 몹시 부러울 것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운을 보았지만, 그저 태연한 모습이었다.
다시 속이 뒤틀린다.
이때 묵소정이 다시 한 번 그의 속을 긁었다.
"운 공자님, 함께 다고 가시죠."
묵소정이 권하자, 아운이 통렬하게 비웃으며 말했다.
"붉은 비단은 사라신교가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피 같고, 백옥차는 신교의
광인을 가두는 감옥 같아서 싫다."
냉랭한 말이었고, 그 말을 들은 묵소정은 물론이고 무태를 비롯한
두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태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일어나며 아운을 향했고,
혈기왕성한 아륵진 형제는 참지 못하고 환도를 뽑아 들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개자식이! 권왕이라고 제법 환대를 했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운의 신형이 어느새 두 형제의 앞에 있었고,
그의 두 손은 형제의 목줄을 움켜잡고 있었다.
"커거걱."
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형제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입을 놀려라! 보이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려한다면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아운의 기세는 당장이라도 둘의 목을 분질러 놓을 것 같았다.
두 형제는 뜨거운 태양 아래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 늙은이가 대신 사과하겠소. 두 형제를 용서해 주시오."
무태가 묵소정의 눈짓을 받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자,
아운은 두 손을 놓고 돌아서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입을 함부로 놀리면 목을 꺾은 후에 혓바닥을 뽑아 놓겠다."
묵소정과 묵천악 남매는 아운의 한 마디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그러나 사라신교의 인물들은 무태와 묵소정 남매의 눈짓으로 인해,
당장이라도 아운에게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권왕은 아직 믿을 수 없는 전설일 뿐이었다.
야한이 마른 침을 삼키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선배, 지금 권왕의 동작을 봤소? 어째 전보다 무공이 엄청 더 강해진 것
같지 않소?"
"뭐…. 조, 조금 그런 것도 같고."
"에이, 선배. 아무리 적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소. 선배
혹시 쫄은 것 아니오?"
"쫄다니, 누가 쫄았다고 그러는가?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야한은 영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흑칠랑을 보았다.
흑칠랑은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자 하늘을 본다.
괜히 서럽다.
'하늘에서 천년 하수오 하나 안 떨어지나.'
물론 떨어질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