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무공수련(武功修練)
- 살수는 정면 대결을 하지 않는다
그날 이후 아운은 다시 무공 수련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운십팔령은 열흘이 지나면서 광풍사의 기초검법인 선풍본검법을
연성하기 시작했다.
원래 선풍본검법은 모두 십이 초식이었지만,
아운은 그들에게 육 초식까지만 연성하게 할 작정이었다.
십이 초식 중 앞의 육 초식은 검을 다루는 가장 기본적인 초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일단 검을 익히려는 초보자들에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검초였고, 초식의 변화 또한 배우기에 아주 쉬웠다.
그렇게 검에 기초를 완전히 잡아 놓고 광영검법을 익히게 한다면 한결
쉽게 터득하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학문을 익힐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도 튼튼하게 자란다는 사실을 아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운은 풍운십팔령에게 당분간은 오로지 내공심법인
광유초심기공(光柳初心氣功)과 선풍본검법의 육 초식만 익히게 한 것이다.
내공심법은 여전히 아운이 가르쳤고,
육 초식의 검법은 편일학과 아운이 번갈아 가르쳤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배우는 풍운십팔령 사이에도 조금씩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록 같은 바닥에서 시작한 내공심법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초식으로 들어가자 싸움에 귀재들이라는 흑룡팔수들이 앞서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황룡이나 벽룡은 자신들이 조장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보다 단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르는 열성을 보이면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다.
실제 손발을 휘두르고 싸우는 방법이 몸에 익은 그들은 정적인 내공심법
보다도 동적인 초식에서 더욱 빠른 진전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운 또한 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육 초의 검법을 완전하게 배워야만
했고, 이는 분광영검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아운과 편일학은 무공에 대해서 논하였고,
특히 편일학은 분광영검법에 대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하여 주었다.
이는 두 사람에게 똑같이 큰 이익을 안겨 주었다.
아운은 분광영검법의 원리와 내공의 응용, 그리고 심검과 어검에 대해서
빠르고 정확하게 터득하여 갔고, 편일학 또한 검론을 펴면서 자신의
검학을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분광영검법을 펼치기 위한 내공심법과 초식의 미진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편일학은 아운과 검론을 하면 할수록 그의 범상치 않은 이해력과 빠른
성취에 몇 번이고 놀라야만 했다.
노강호인 편일학이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집어낼 때가 많았고,
실용적으로 상대를 죽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운이 편일학보다 오히려
위였다.
아운은 검법에 대해서 이해만 했지 검법을 수련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편일학은 아운의 장기가 권법임을 알고는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경지에 이른 사람이 굳이 다른 무학을 배울 필요는 없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의 무공을 더욱 가다듬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편일학이었고, 이는 아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아운이 분광영검법을 다시 배워 완전히 익히려면,
그 시간은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아운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고, 설혹 분광영검법을 완전히 터득하여도
그 위력이 연격포를 능가하지 못함을 잘 안다.
그러나 이미 생각한 것이 있었기에 분광영검법과 검법에 대해서 연구를 한
것이다.
그리고 알면 알수록 대만족이었다.
특히 후이식의 검법과 네 번째 초식인 폭렬이 아운에겐 새로운 무공 이론을
세우는 초석이 되고 있었다.
폭렬의 경우는 검법의 초식이었지만, 그 펼치는 방식이 연격포의 강기를
쏘아내는 방법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운은 또한 시간나는 대로 선풍본검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선풍본검법은 배우기에 쉬워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는 검법이었고,
배워서 풍운십팔령에게 가르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기초 공부를 함으로 인해 검법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운은 풍운십팔령의 몸에 어느 정도 내기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하자 전부
천중호 안에서 검법을 익히게 하였다.
물론 그들에게 물 속 깊이 들어가서 무공을 익히게 하진 않았다.
허리 아래까지만 물에 담근 채 무공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나 십팔령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히 버거운 일이었다.
검법을 익히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다리 움직임이 있게 마련이었다.
중수의 힘은 다리와 손의 조화를 방해하였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십팔령이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튼튼한 하체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하중이 튼튼해야 무기를 다루는데 흔들림이 없게 마련이다.
아운은 십팔령들에게 흡중수에서 무공을 익히다가 힘에 겨우면 밖에
나가서 내공심법을 연성하게 하였다.
절대 물 밖에서 검법을 연성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운과 풍운십팔령이 무공을 연성하는 동안 흑칠랑의 무공 수련도
그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열심이었다.
흑칠랑은 이를 악물었다.
'으으. 지금도 벅찬 느낌인데, 이렇게 열심히 무공 수련을 하다니. 정말
상종 못할 독종이다.'
흑칠랑은 치를 떨었다.
그러나 흑칠랑이 누군가?
절대 기죽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무공 수련을 하였다.
아운보다 단 한 번이라도 칼질을 더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운을 쫓아갈려니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툭하면 코피를 쏟아내기 일수였다.
이를 악물고 무공에 매달리는 흑칠랑을 보면서 야한 또한 뒤질세라 무공
수련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수련을 하고 있는 야한의 눈이 곱지 않았다
흘끔거리며 흑칠랑을 쏘아보는 눈초리엔 무엇인가 불만이 가득했다.
필생의 적수로 생각하는 흑칠랑이 때 아니게 무공 수련을 하자,
그도 뒤질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무공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물론 그것도 울화통 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야한의 진정한 불만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로선 삼 개월 전만 생각하면 화가 났다.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흑칠랑은 간단한 한 마디로 그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었다.
황룡이 같다 준 먹을 것과 물.
흑칠랑과 야한은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운기행공까지 다 마쳐 기운을
차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시진도 안 걸렸었다.
일단 힘이 나자 야한은 기대에 찬 눈으로 흑칠랑을 보면서 말했다.
"선배, 이왕이면 꼭 이기시오. 내 열심히 응원하리다."
물론 그의 말이 진심일 리는 없었다.
혹시라도 흑칠랑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을 하고 말까 우려되어 쐐기를 박은
말에 불과했다.
싸워야 한다.
싸워야 흑칠랑이 쓰러진다.
그래야 야한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구세대 살수인 흑칠랑은 어떻게 하던 자신의 힘으로 아운을 이기겠다고
바둥거리지만, 신세대 살수인 야한은 달랐다.
안 싸워도 가질 수 있는 것을 굳이 피 흘리고 싸워서 얻을 필요가
있겠는가?
당연히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흑칠랑은….
"걱정 말게. 내 살수의 진면목을 보여 주지."
이렇게 말하며 씩씩하게 아운을 찾아 갔다
야한은 그 말을 듣고 '과연' 하는 시선으로 흑칠랑을 보면 은근한 감탄을
하고 말았었다.
솔직히 자신의 자세를 조금은 반성할까도 신중하게 고려하였었다.
아운은 대련 준비를 하고 흑칠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천하제일살수와 권왕의 대결.
편일학을 비롯한 풍운십팔령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나 야한이나 승부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흑칠랑이 아운과 마주섰다.
아운이 말했었다.
"그래, 편히 쉬었나? 이제 선조들의 일을 해결하기로 하지."
"좋지, 그럼."
두 사람의 주위로 기이한 진기의 파동이 휩쓸고 가는 것을 살피며 야한은
정말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흥분했었다.
그때였다.
"이제부터 우리의 대결은 시작되었네. 난 자네를 노리고 살수를 펼칠 거야.
잘 견디어 보게."
그 말을 한 다음 흑칠랑은 너무도 태연하게 돌아섰다.
"뭐, 뭐야?"
너무 황당한 일이라 모두 흑칠랑을 바라볼 때,
흑칠랑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살수는 정면 대결을 하지 않는다. 암습이야 말로 살수의 기본인걸
모르나?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는 그 암습의 기회를 노릴 것이고,
권왕은 그것을 견디면 된다."
따지려던 야한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모두 멍한 표정이 되었고, 아운은 그저 웃기만 한다.
딴은 정말이지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야한은 속은 듯한 기분에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었다.
"아니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그런데 왜 당신이 암습을 해야 한단
말이요. 권왕이 암습을 하면 단 일격에 끝날 텐데."
참 속 보이는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해진다.
당시 흑칠랑은 그것도 몰라 하는 얼굴로 말했었다.
"멍청한 후배야. 도전자는 나다. 그러니까 내가 암습하는 것이 당연하지."
야한은 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일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그 동안 흑칠랑은 암습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죽어라고 무공만 수련하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야한이 물었다.
"선배, 언제 암습할 작정이요?"
흑칠랑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었다.
"살수의 미덕은 인내심이다. 때를 기다리는 것. 이거야말로 살수가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임을 모르는가? 나는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네."
야한은 다시 할 말을 잊고 말았었다.
정말이지 그때만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암습의 때가 다가올 것 같지 않은 불안감은 뭐란
말인가?
이렇게 다시 이 개월이 흐른 것이다.
물론 흑칠랑은 아직도 그 때를 기다리며 살수의 미덕을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야한으로선 참으로 허탈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흑칠랑이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는 한,
그의 꿈은 영원히 정지선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덕분에 둘은 정말이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흑칠랑의 경우는 정말이지 징그럽게 무공 수련하는 아운을 보고,
야한은 그런 흑칠랑을 보면서 묘한 경쟁심을 발동하는 중이었다.
***
"후욱."
아운은 천중호에서 걸어 나오며 길게 호흡을 나누어 했다.
몸 안에 가득한 진기가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처럼 꿈틀거린다.
이제 무극신공은 칠 단계의 극에 이르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칠초무적자의 무극진기가 서서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제 어느 순간, 지금의 단계를 탈피하고 그의 무극신공은 팔 단계로
들어설 것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아운은 그날부터 십 일간 집중적으로 풍운십팔령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삼 개월간 풍운십팔령의 무공은 비약적으로 발전해 있었다.
비록 기초검법이지만, 선풍본검법의 육 초식을 어느 정도 완벽하게 펼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광유초심기공으로 인해 검법에 진기가 실리고
있었다.
아운은 먼저 그 동안 준비했던 내공심법을 가르친 후,
나누어진 두 조에게 한 조는 부법을, 한 조는 궁술을 가르쳤다.
심법은 원래 흑룡당의 형제들이 배웠던 불안전한 심법에 광영검법의 심법,
그리고 광풍사의 기초 심법들을 흡수하여 새롭게 정리한 것으로,
그 동안 배운 광유초심기공이나 불안전한 심법으로 익혔던 내공들을 기초
진기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흑룡당의 형제들은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지니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심법 하나로 광풍사의 무공은 물론이고 광영검법을 익히는데
필요한 내공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즉, 새로 만든 광영심법(光榮心法)은 광유초심기공과 불안전했떤 흑룡당의
내공심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심법이라고 볼 수 있었다.
흑룡당의 형제들이 연공을 시작하고 십 일이 지나 광영심법이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운공할 정도가 되자 아운 대신 편일학의 풍운령을 맡아서
칠절광영검법을 가르치고, 그 외에 무공 수련과 과정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아운은 다시 천중호로 돌아갔다.
***
다시 삼 개월이 지났다.
묵천악에게 한 동안은 지옥이었다.
고기를 먹던 고양이에게 풀만 준다면 견딜 수 있는 고양이가 몇이나 될까?
묵천악의 경우는 그것보다 더욱 심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비록 아운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지만,
여자에 대한 열정은 감추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묵천악이 있는 곳은 여자가 없었지만, 가끔 누나인 묵소정을
만나러 가면 그곳엔 무려 이십여 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뿐이랴, 미공자인 묵천악을 보는 여자들의 시선에는 색정이 가득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었지만,
아운의 눈치를 보느라 감히 그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리지도 못하고,
그저 마음만 콩 밭이었다.
아운은 여자들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만약 누군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된다면 자신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얻고 사귀라고.
자칫하여 여자들 때문에 기강이 흐트러질 것을 염려한 명령이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풍운십팔령은 무공을 익히느라 여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여자들은 아운의 말을 명심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혈랑왕이 자신의 말을 어겼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으로 본 아운은 무리의 두령으로 흑룡당에게 있어서
혈랑왕과 같은 위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운이나 풍운십팔령은 물론이고, 편일학이나 소설, 소산마저도 무공
수련을 하느라 여자들은 완전 관심 밖이었고, 묵가 남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되자 묵소정이나 묵천악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묵천악의 담도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여자들 중에 제법 미모를 가진 홍희를 유혹하는데 성공하였다.
여자들 또한 혈랑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새롭게 나타난 남자들
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자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홍희 또한 그런 여자들 중에 한 명으로 그나마 자주 보이는 묵천악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둘은 쉽게 사귈 수 있었다.
또한 나타난 남자들 중에 묵천악은 가장 미남 축에 들었고,
거칠어 보이지 않았기에 더욱 인기가 있었던 참이었다.
그때부터 홍희와 묵천악은 다른 여자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시간이 나는
대로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비록 아운의 명령이 마음에 걸렸지만, 한 번 불이 붙은 두 남녀의 사이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홍희는 아운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고 싶었지만,
묵천악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말하기가 싫었다.
묵천악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았던 둑이 터지면서 묵천악은 도저히 한 명의 여자로는 양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또 다시 새로운 여자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여자들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정염이란 여자를 새롭게 만나기 시작했다.
홍희는 사나운 기세로 묵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홍희, 대체 왜 그러는 거요?"
묵천악의 말에 홍희의 얼굴에 힘줄이 파랗게 돋아났다.
"흥, 그래 정염이라는 계집이 나보다 더 좋던가요?"
묵천악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요?"
"시치미 떼지 마세요. 내가 그렇게 눈치 없는 계집으로 보이던가요?"
"홍매."
"함부로 부르지 마세요."
홍희가 눈물을 흘리며 앙탈을 부리자 묵천악은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난 정말 정염과 아무런 관계도 없소. 정말 억울하오. 나에겐 지금 홍매
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오."
묵천악의 말에 홍희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묵천악을 보았다.
'흐흐. 계집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니고 대충 넘겨짚은 것이구나.'
묵천악은 홍희가 아직 자신과 정염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슬그머니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홍매, 난 정말 홍매 밖에 없소. 나를 그렇게 못 믿겠소. 정염이란 계집이
내게 꼬리를 쳤지만, 내가 단호하게 거절하고 말았소."
"정말인가요?"
"나를 그렇게 못 믿는단 말이오. 내 무가의 아들로 태어나 아직까지
지조를 어겨 본적이 없소."
묵천악의 표정은 진지했다.
한 동안 묵천악의 얼굴을 보던 홍희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가가를 믿어요."
"이리 오시오, 홍매."
달빛이 부끄러운 듯 구름 속으로 사라질 때,
홍희는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남성의 힘을 느끼고 두 눈을 부릅떴다.
"흐윽. 가가, 이제 정식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아운 두령에게 정식으로
허락을 받은 후, 편하게 만나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가가."
묵천악의 눈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아운이란 말을 듣자 묵천악의 남성이 힘없이 죽으면서 여자의 몸에서
저절로 빠져 버렸다.
홍희가 놀란 눈으로 묵천악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게게, 죽었네. 뭐예요? 남자가 맥없이."
홍희가 투정 부리듯이 말할 때 묵천악은 남자의 자존심이 이중으로 상처를
받고 말았다.
순간 묵천악은 가슴 한 가운데로 치고 나오는 격한 감정을 억지로 눌러
참느라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또한 새삼스럽게 아운의 모습이 떠오르며 오금이 저려온다.
홍희는 묵천악의 표정을 보고 그가 아운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뭐가 두려워서 그래요. 아운 두령이 그랬잖아요. 정식으로 말만 한다면
얼마든지…. 끄르륵."
홍희는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묵천악의 눈에 살기가 어리면서 그녀의 목을 잡고 그대로 분질러 버린
것이다.
"계집, 그냥 그대로 있었으면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다. 아운 그 새끼에게
허락을 얻겠다니, 이 개 같은 년."
아운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여자에게 무시당했다는 자존심으로 인해
묵천악은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귀찮기만 했던 계집이다.
참고 참았던 천마혈이 터지면서 묵천악은 인내의 한계를 넘고 말았다.
묵천악은 실성한 듯 그녀를 마구 걷어찼다.
이미 목이 부러진 채 죽은 홍희의 몸이 다시 상처를 입는다.
***
소설과 소산은 초조한 눈으로 천중호를 보고 있었다.
아운이 천중호로 들어간 지 벌써 네 시진 째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천중호에서 한 시진 이상을 넘겨 본적이 없었던 아운이었기에
혹시나 하는 불미스런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육 개월간 소설과 소산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동안 갈고 닦은 무공 때문인가?
더욱 탄탄해진 몸매와 성숙해진 분위기는 이제 소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구릿빛으로 탄 얼굴은 건강미가 넘친다.
소설이 소산을 보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산, 설마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닐까?"
"절대 그런 일 없을 거니 염려 하지 마."
"그렇지? 그럴 거야."
소설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말할 때,
풍운령을 가르치던 편일학이 다가왔다.
소설이 편일학을 보면서 말했다.
"할아버지, 아운 아저씨가 아직도 안 나오고 계세요."
그녀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다.
편일학이 가볍게 웃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별일 없을 테니."
말하는 편일학의 시선은 천중호의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천중호가 아무리 깨끗해도 소설이나 소산이 호수 중심에 있는 아운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편일학은 아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운은 물 속 깊은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을 수련하는 중이었다.
편일학은 그런 아운을 보았다가 소설을 보면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친손녀를 바라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소설이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을 때였다.
"저… 저…."
소산이 천중호를 손으로 가리키며 놀란 표정으로 편일학과 소설을 보았다.
소설과 편일학은 소산의 손이 가리키는 천중호를 본다.
"아…!"
소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한 모습이었고,
편일학 역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은은한 담청색의 서기가 천중호의 물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 광경은 실로 신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편일학은 그 서기가 아운의 몸에서 뿜어지고 있음을 알고 속으로 감탄과
함께 은근히 놀란다.
'참으로 빠른 진전이다. 그의 무공이 또 다시 새로운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대체 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까?'
약 일각의 시간이 지났을 때, 푸른 색의 서기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아운이 천중호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물 속에서 나오는데 그의 옷은 전혀 젖어 있지 않았다.
외관상 아운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소설과 소산은 아운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반가워
했다.
편일학이 아운을 보면서 말했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아운이 웃으면서 말했고, 소설과 소산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다.
담청색의 서기를 본 것은 소설, 소산, 편일학이 전부였기에 두 명의
살수나 풍운십팔령은 전혀 알지 못했다.
서기 자체가 은은했던 탓도 있었고, 근래에 풍운십팔령의 무공 수련
장소가 바뀐 이유도 있었다.
두 명의 살수 또한 아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공 수련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사람이 천중호에서 나와 쌍지도의 마을로 들어섰을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 중앙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그 곳으로 다가갔다.
그 곳에는 혈랑왕의 여자들과 풍운십팔령의 일부가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운이 다가서며 묻자 황룡이 빠르게 다가와서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형. 마을에서 여자 한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어제부터
오늘 사이에 사라진 모양입니다."
아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때 마을 뒤편에서 벽룡과 몇 명의 풍운령이 달려왔다.
그들은 큰 보자기에 둘둘 만 어떤 물건을 들고 있었다.
벽룡이 아운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시체를 찾았습니다."
아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떻게 죽었는가?"
"목이 꺾여 죽었습니다. 시체는 알몸이었고, 약간이지만 정사를 했던
흔적이 있었습니다. 심하게 구타 당한 흔적은 있지만, 죽을 때 반항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잘 아는 사이의 남자에게 죽은 것 같습니다."
벽룡의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시체를 보시겠습니까, 형님?"
"되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된다."
벽룡이 그렇다면 분명할 것이다.
그들의 출신으로 보아 그 정도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
"근데 시체를 어디서 찾았나?"
"마을 뒤쪽 모래 속에 파 묻혀 있었습니다. 죽인 후 시체 처리를 어수룩
하게 했더군요. 상당히 다급했던 것 같습니다."
아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묵묵히 벽룡의 설명을 들은 후 그는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
"죽은 여자와 사귀던 자가 있었는가?"
아운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이때 한 명의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한인으로 혈랑왕에게 잡혀와 있던 여자였다.
"묵 공자님이 그 여자와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정염도
묵 공자를 만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여 있던 여자들 중에 나이가 어려 보이는 정염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모아진다.
"그만. 이 일은 저 여자와 관계가 없다. 이젠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오늘 일은 모두 잊고 다들 돌아가라! 황룡은 여자를 잘 묻어 주어라!
그리고 벽룡은 묵가 남매에게 통고해라!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고.
이제 약속을 지키러 간다고 전해라!"
"예, 형님."
황룡과 벽룡이 각자 맡은 일을 하러 떠나고 나자 편일학이 아운을 보면서
말했다.
"어떻게 할 참인가? 자넨 그냥 모르는 척 할 셈인가 보군."
"지금은 참아야 할 것 같습니다."
"뜻은 이해하겠네. 그런데 너무 서둘러 출발하는 것 아닌가? 자네는 이제
막 한 계단을 오른 것 같은데, 완전히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에
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래도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것은 가면서 해결할 생각입니다."
아운의 표정을 보고 편일학은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문다면 또 다른 사건이 터질 것 같고,
자칫 화를 참지 못하면 천마혈인이 쌍지도에 나타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상황이라면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아운이 참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운이 편일학을 보면서 말했다.
"혼자서 가겠습니다. 편 노선배님은 여기서 풍운령의 무공 수련과 소설,
소산을 돌봐 주십시오."
"혼자서 괜찮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있습니다. 함께 가면 오히려 어려워집니다."
"자네를 믿겠네."
아운의 눈에 기광이 어린다.
그의 고집스런 표정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어떤 단호함으로 다가선다.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
그 의지의 표현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