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제1장. 와룡비향(臥龍匕響) (45/228)

제1장. 와룡비향(臥龍匕響) 

- 와룡과 비향은 사막에 지고

"전멸." 

호연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전멸이라니, 이것은 벽사단이 전멸할 때와는 의미가 다르다. 

천각이 무너졌고 자신의 심복 중 한 명인 모대건이 쓰러졌따는 사실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특히 호연세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모대건의 죽음은 큰 손실

이었다.

설비향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설마 전멸이라니.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전할 말이 더욱 난감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아운이란 자와 호연란이 악연으로 맺어졌는지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보아 아운은 확실히 호연세가에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매듭을 풀 수 있다는 것이 설비향의 생각이었다. 

살아 돌아오고 있는 무사들에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호연세가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운이 자신들을 적대시 

했는지 그 연유를 물었다고 했었다. 

당연히 궁금했으리라. 

곤란한 일이었다. 

이미 권왕 아운의 이야기는 막을 수 없는 소문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비록 강호 무림까지는 아니라도 호연세가의 많은 무사들이 권왕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놔두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설비향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이젠 아운이란 존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모대건이 절대로 아운에게 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주먹이라니. 

그럴 수도 있는가?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다. 

설비향은 맥이 빠진 표정으로 호연란을 보았다. 

얼음장처럼 굳어진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몸이 떨리는 한기를 느꼈다. 

"설 각주, 지금 상황을 말해봐라!" 

설비향은 가볍게 숨을 고른다. 

얼굴에서 배어 나오는 진땀으로,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는 한 마디로 맹수입니다. 그리고 아주 영리하고 흉폭한 맹수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맹수가 호연세가를 적대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유는?" 

설비향은 호연란을 올려다보았다. 

침착하다. 

냉기가 가득한 얼굴엔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치 얼음을 조각해 놓은 것 같았다. 

설비향은 잘 안다. 

지금 그녀가 아주 화가 난 상태고, 이럴 때 폭발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호연세가와 어떤 원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뭐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세가에서 행한 여러 가지 비밀 작업들 중, 

어느 것이랑 꼬여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호연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가에서 행한 일들 중에는 무림에서 절대 알아선 안 되는 일들이 다수 

있었다. 

그렇게 은밀한 일들을 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죄 없이 죽어 나갔다. 

그 많은 일들 중 어느 것과 원한이 맺어졌는지 알기란 쉽지 않았다. 

"우리와 특별하게 원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가?" 

꿀꺽. 

설비향은 말을 하기 전에 우선 마른침을 삼켰다. 

참으로 어려운 말을 해야 한다. 

"돌아오고 있는 무사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했다 합니다. 호연세가를 멸하고, 

소가주님을 죽여 무림의 정기를 바로 세우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설비향은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호연란은 침착했다. 

그녀는 호연세가 보다도 자신과 원한 관계를 가진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거론한 것으로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설비향도 그것을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녀 역시 누구인지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원한 살 만한 짓을 제법 한 편인 호연란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처리 할 참인가?" 

"그 자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우리에겐 불리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자와 수 천 리 밖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둔다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두 가지." 

"죽이는 것과 우리 사람으로 만드는 것." 

호연란이 얼굴을 찡그렸다. 

죽이는 것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말은 맘에 들지 않는다. 

지금 상황에서도 그에게 미련을 두어야 하는가? 

설비향은 그녀의 마음을 바로 눈치 챘다. 

"적으로 만들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입니다. 그리고 죽이려면 그만한 

피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그 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부담입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그 자에 

대한 정보는, 모대건 각주가 쓰러지면서 버려야 합니다. 일단 원한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풀 수 있는 것이라면 우리 사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풀 수 없는 원한 관계라면 죽여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빨리. 죽이는 방법은 간단하게 두 가지 뿐입니다." 

"두 가지라!" 

"사마무기가 우리 대신 죽일 수 있기를 바라던가, 사라신교에 같다가 돌아

오는 길목을 노리고 있으면 됩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 보았자, 사라신교로 

들어가기 전에 추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신 이번에는 확실한 고수

들을 보내야 하며, 말에 달통하고 사람의 비유를 잘 맞출 수 있는 인물을 

함께 보내서 먼저 그의 마음을 떠봐야 합니다." 

호연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내가(內家)의 고수들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군. 아직은 그들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렇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가주님이 직접 

움직이거나 태상호법님이 직접 가실 순 없는 일입니다." 

호연란은 설비향의 말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저 설비향을 바라 볼 뿐이었다. 

설비향은 그 표정을 보고 일단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도 자신의 말을 그녀가 받아 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현재 호연세가는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무림맹 내에서의 입지도 굳건해지는 중이었고, 

북궁세가를 밀어내고 천하제일가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모두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호연란과 호연낭, 그리고 설비향은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좋아! 그것은 설 각주가 알아서 하고 난 먼저 일어나겠네." 

호연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호연란이 나가자 설비향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무서운 놈이다. 무사들을 폐인으로 만들어 보낸 것은 세가에 부담을 주기 

위한 것 같다. 원한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은 것도 그렇다. 이렇게 되면 

무사들은 더욱 궁금해 할 것이고 여러 가지 악소문이 번질 우려가 있다. 

차라리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어려워졌다. 온갖 추측이 난무할 

테고, 완전히 폐인으로 망가진 자들을 보면 다른 무사들이 생각할 때, 

얼마나 원한이 깊었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그 처참한 모습을 

본다면 권왕에 대한 두려움도 쌓이게 될 것이다. 결국 그들이 돌아오면 

격리해야 하는가? 이래저래 부담이다.' 

설비향은 아운이란 자가 그것을 노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호연세가는 돌아오는 무사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 

이미 살인멸구 할 수 있는 기회는 지나갔다. 

자칫하면 호연세가에 대한 악소문이 나돌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살아 돌아온 자들의 생활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호연세가의 다른 무사들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들을 내치게 된다면 누가 호연세가에 충성을 하겠는가? 

무슨 일이든 뒤처리가 가장 고민스런 법이다. 

생각할수록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도 설비향은 아운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

설비향과 헤어진 호연란은 밀실로 들아갔다. 

밀실에는 수많은 나무 인형들이 놓여 있었는데 모두 십칠 세 정도의 소년 

모습에 실물 크기였다. 

호연란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으아악, 이 개새끼야! 죽어라, 죽어." 

갑자기 찢어지는 고함과 함께 인형들을 마구 파괴하기 시작했다. 

거의 미친 듯이 인형을 부시는 그녀의 눈은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언제고 네 놈을 잡아서 네 녀석 코를 씹어 먹으리라. 그리고 그 권왕

이란 개자식도 반드시 포를 떠서 죽여 버리겠다." 

호연란은 인형이 정말 사람인 것처럼 갖은 욕설을 다 하고 있었다. 

인형들은 죄 없이 욕을 먹으며 맥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데 인형의 모습은 흑룡당 시절의 아운과 아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화풀이 대상 인형들은 하나같이 코가 뭉개져 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

사마무기의 표정은 어두웠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아운에 대해서 다시 곱씹고 곱씹어도 갈수록 놀라울 

뿐이었다. 

삼귀가 당했다는 사실은 사마무기에게 큰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조금 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호연세가의 모대건이 일 권에 제압당했다고 했다. 

'설마 이 자의 무공이 삼봉이나 삼무룡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무의 천재들이 한꺼번에 여섯이나 태어난 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한데 이번엔 권왕이란 자마저 이들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나이도 어린데.' 

혈궁 대전과 그 이전의 혼란했던 일 갑자의 세월 동안 무림은 수많은 기인 

이사들을 탄생시켰고, 그 토양 속에서 능히 백미라 할 수 있는 열네 명의 

초인을 탄생시켰다. 

그들이 바로 쌍절과 칠사, 그리고 신주오기였다. 

그들 이후 강호에는 절대 그들과 견줄 수 있는 기재들이 당분간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예측을 깨고, 혈궁 대전 이후에 모두 여섯 명의 기재들이 태어나 

그들의 뒤를 이었다. 

강호엔 삼봉과 사룡이 있어서 그들의 제지가 능히 천하에 제일을 다툰다고 

했다. 

그 중, 무의 재능으로 능히 쌍절과 오기 칠사와 견줄 수 있는 후기지수들이 

있으니, 그들을 일컬어 삼봉 삼무룡이라고 했다. 

삼봉과 삼무룡은 쌍절, 칠사, 오기로 대표되는 십사 초인들의 제자들이거나 

후예들이었다. 

무림맹의 이화로 불리는 북매와 남란은 삼봉 중 둘이였고, 

마지막은 혈궁의 금마녀(金魔女) 초소소(初小嘯)였다. 

무림 역사에 무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여자들이 셋이나 한꺼번에 나타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많은 무인들이 말하길 세 명의 여자 중 금마녀 초소소는 상징적일 

뿐, 실제 무공의 깊이는 무림맹의 천중쌍화에 비해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림맹의 이룡 중 한 명인 흑룡과 혈궁의 혈룡, 

그리고 옥룡을 합해서 삼무룡이라고 했다. 

그 중 혈룡은 혈군이란 이름으로, 

옥룡은 기린, 또는 옥기린으로 불리는 불세출의 기재들이었다. 

와룡 사마무기는 무림맹의 이룡 중 한 명으로 무명이 아니라 군사로서 

이름이 높았다. 

사실 호연세가의 설비향이 사마무기와 겨룰만한 군사적 재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철저하게 음지의 인물이라 강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림에서 사룡을 논하면 마지막으로 와룡 사마무기를 끼워서 하는 말이 

되고, 그냥 삼무룡이라고 하면 와룡을 뺀 나머지 세 명을 일컬어 하는 

말이 된다. 

무림맹의 이룡이라고 하면 흑룡과 와룡 사무무기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사마무기는 앞으로 당분간 삼무룡이나 삼봉과 견줄 수 있는 무의 기재들이 

나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그 예측은 틀리고 말았다. 

난데없이 나타난 아운이 그의 믿음을 흔들어 놓고 말았다. 

'혈랑대가 실패했다면 결국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그들뿐인가?' 

사마무기는 자신이 지닌 마지막 패를 믿고 있었다. 

그들만큼은 절대로 실패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패를 사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더군다나 그들은 따로 할 일도 있었다. 

호연세가나 사마무기가 소식을 들은 것은 아운이 대사막에서 죽음의 결전을 

치르고 난 보름 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은 아직 보고가 없었다. 

사마무기는 광풍사와 아운이 싸운 사실을 아직 듣지 못하고 있었다. 

***

대사막을 가로질러 쉬지 않고 달려서 열흘. 

아운과 열일곱 명의 흑룡당 형제들, 그리고 소설, 소산을 비롯한 묵소정 

남매와 편일학은 쌍지호가 멀리서 아련하게 보이는 부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편일학은 더 이상 짐꾼 노릇을 하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아운을 따라 

나섰다. 

사막의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쌍지호의 또 다른 이름은 쌍지유사도

(雙池流砂島)였다. 

줄여서 쌍지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쌍지호가 따로 섬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유는 유사 때문이었다. 

쌍지도의 주위 십 리 밖은 유사 지대였다. 

마치 유사도를 호위라도 하듯이 폭 오십여 장에 이르는 유사의 강줄기가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멋 모르고 접근했다간 모두 모래 속으로 수장 되고 말 것이다. 

쌍지도로 들어가는 길은 단 한 곳 밖에 없다. 

바로 유사가 흘러와서 쌍지도를 돌아 나가는 곳. 

즉, 유사의 줄기가 쌍지도 근처로 와서 쌍지도를 돌아서 다시 나가는 

사이로 폭 십 장 정도 넓이의 입구뿐이었다. 

원래 유사란 항상 그 흐름이 바뀌게 마련인데 쌍지도를 도는 유사 만큼은  

변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였다. 

그 원인은 혈랑왕조차 모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입구만 지키고 있으면 어느 누구도 쌍지도에 접근하기란 불가능 

하다. 

혈랑대가 대사막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황룡이 말을 몰아 아운에게 다가왔다. 

"형님, 지금부터는 우리만 쫓아오시면 됩니다. 언제고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 들어가는 길을 확실하게 기억해 놓았습니다. 사막 안에 있는 

길이라 표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익숙해지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

습니다." 

"앞장서라! 광효(光梟)가 많이 기다리겠다." 

"그 올빼미 자식, 형님을 보면 엉엉 울고 말겁니다." 

"성격은 여전한가 보군."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낯설지 않아서 좋겠군." 

"그렇긴 할 겁니다. 그럼 앞장 서 겠습니다." 

황룡을 비롯한 흑룡당의 열일곱 명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묵가 남매가 쫓았다. 

그리고 그 뒤를 편일학이 서고, 소설과 소산이 말 하나에 함께 올라탄 채 

그 뒤를 따랐다. 

맨 뒤는 아운의 차지였다. 

이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황룡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멈추었다. 

아운이 일행을 지나쳐 황룡에게 다가왔다. 

"형님, 이제 앞으로 삼십 장 정도만 더 가면 쌍지호입니다." 

아운은 황룡이 가리키는 전면을 보았다. 

그들 앞에는 뿌연 모래 먼지가 마치 하나의 성벽처럼 늘어서 있었고, 

그 안으로 작은 언덕 같은 산과 나무의 그림자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처음 유사 부근에서 보았을 때는 뿌연 먼지 안으로 희미하게 보이던 

것보다는 좀 더 뚜렷했지만 여전히 그 안의 사물을 알아 볼 수 없었다.

마치 짙은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저 모래 먼지가 있는 곳이 유사의 끝입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생각

보다 상당히 큰 녹주가 나타납니다. 지금 모래벽 사이로 보이는 희미함은

쌍지연의 일부일 뿐입니다." 

"저 모래 먼지는 언제나 존재하는가?" 

"아마도 유사가 섬 주위를 돌면서 어떤 기현상으로 저렇게 모래 먼지를 

만들어 놓는 것 같습니다. 항상 존재하는 저 모래 먼지 때문에 쌍지연의 

존재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럼 가자." 

"저 먼지 속에 혈랑대가 숨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어서 가자." 

"혀… 형님." 

황룡이 당황해서 부를 때 아운의 신형은 바람처럼 날아서 먼지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아운이 그 바람 속에서 나와 손짓을 한다. 

불과 반각이 지나기도 전에 웅크리고 있던 십여 명의 혈랑대를 제압한 

것이다. 

그들은 황룡 일행을 보고 돌아오는 혈랑대의 일부라고 생각했기에, 

안으로는 연락조차 못하고 당한 것 같았다. 

모래 먼지를 뚫고 안으로 들어온 편일학과 묵소정 남매 그리고 소설과 

소산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그들이 들어선 곳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녹주가 있었다. 

몇 만 평에 달하는 녹주 안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고, 

녹주의 양 옆으로는 두 개의 호수가 녹주를 보호하듯이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녹주 안에는 무려 백여 채에 달하는 가옥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고, 중앙에는 제법 거대한 건물까지 있었다. 

혈랑대의 본채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특이하다면 쌍지호의 오른쪽 호수엔 이십여 명의 여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왼쪽 호수에는 그 누구도 접근해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왼쪽 호수가 중수로 이루어진 호수인 것 같았다. 

"여자들이 의외로 많군." 

편일학의 말에 벽룡 청안귀가 대답하였다. 

"모두 납치해 와서 강제로 여기서 살게 된 여자들입니다. 저 여자들은 

모두 혈랑왕 관량의 여자들입니다." 

"욕심이 과하군." 

그 말을 듣고 아운이 기가 찬 표정으로 말하자, 

황룡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욕심뿐만 아니라 잔인하고 비열하기까지 했습니다." 

황룡이 혈랑왕에 대해서 더 말을 하려 할 때 아운 일행을 발견한 

수십 명의 혈랑대가 무기를 들고 몰려왔다. 

쌍지호를 지키고 있던 자들인 듯 했다. 

그들 중에 머리를 변발한 우람한 덩치의 청년이 있었는데, 

그를 본 황룡과 흑룡당의 형제들이 눈에 살기를 머금고 말했다. 

"저 개자식이 혈룡왕의 동생인 소혈랑(小血狼) 관헌이란 놈입니다. 

무던히도 우리 형제들을 괴롭힌 놈입니다." 

비분강개하는 황룡의 말을 듣고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비슷하게 생겼군." 

아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온 관헌이 고함을 지른다. 

"이놈, 배 가야! 네 놈이 정신이 돌았느냐? 허락도 없이 외인을 데리고 

들어…"   

나타난 관헌은 아운과 편일학을 보고 황룡을 욕하다가 묵소정과 소설, 

소산을 보고 눈이 둥그레지더니 말을 멈추었다. 

묵소정의 미모는 그의 나이 삼십이 다 되어 가도록 처음 보는 아름다움

이었다.

비록 아운에게 맞은 곳이 부르트고 이가 깨졌지만, 

그 바탕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은 어리지만 소설의 청순함 또한 그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미모라 할 수 있었다. 

입가에 침이 흐른다. 

"험, 황룡. 내 이것저것 따지지 않을 테니, 저 소저들이나 소개해 주면 

어떻겠느냐? 그럼 여기서의 생활이 좀 더 편해질 텐데." 

관헌의 말을 들은 황룡은 그만 헛웃음이 나온다. 

어떻게 된 종자가 지금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계집부터 본다. 

일면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최소한 먼저 해야 할 일을 잊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군." 

벽룡이 뒤에서 혀를 찬다. 

그래도 귀는 밝아서 그 소리를 들은 관헌의 눈에 살기가 감돌았다. 

"저런 시퍼런 눈의 고양이 새끼가 죽으려고…" 

관헌의 말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이번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 틈에 편일학의 검이 그의 목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언제 그가 자신의 앞에 왔는지 보지도 못했다. 

"아이야! 아직 철이 없구나." 

편일학의 말은 나직했지만, 

소혈랑 관헌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그가 언제 이런 위협을 당해본 적이 있었던가? 

"다, 당신은 누구요? 내 형이 혈랑왕인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편일학이 차갑게 말하자 관헌은 더욱 허둥거린다. 

자신의 형을 신으로 알았던 관헌이었다. 

사막에서 그 누구라도 형의 이름을 들으면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그 이름에 도전하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혈랑왕 관량의 이름이 먹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 부분을 믿지 못했다. 

"우리 형이 혈랑왕 관량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이 놈! 우리 형을 모른단 말이냐?" 

"네 형이 누군데?" 

"혈랑왕 관량이다." 

"그래서?" 

관헌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제야 상대에게 자신의 형이 별로 위협적이지 못하단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자신을 비웃으며 바라보는 황룡과 그의 일행들을 보고서야 상황을 이해

하기 시작했다. 

"황룡, 형제들과 함께 광효를 찾아라!" 

"예, 형님. 얘들아 가자." 

아운의 명령에 흑룡당의 형제들이 움직이자 관헌을 쫓아 왔던 삼십여 명의 

혈랑대가 용기 있게 그 앞을 막으려 했다. 

"너희들 상대는 여기 있다." 

고함과 함께 아운이 그들 사이로 뛰어 들며 연환육영뢰의 제 일 권을 

휘둘렀다.

꽈앙! 하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혈랑대가 삼 장이나 날아가 땅바닥에 

쳐 박혔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서너 명도 그 힘에 못 이겨 이리저리 나뒹굴고 말았다.

전부 팔다리가 부러진 채로. 

그나마 아운이 힘을 집중하지 않고 사방으로 퍼지게 만들면서 살상능력을 

조절한 덕분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머지 십오 명 정도의 혈랑대와 새롭게 나타나 그들과 

합류하려던 혈랑대들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굳어 버렸다. 

관헌의 얼굴은 시퍼렇게 죽어갔다.

하늘처럼 믿었던 관량이 살아 돌아와도 지금 아운이 보여준 한 수를 흉내 

내기도 힘들 것 같았다. 

큰 덩치에 험한 얼굴의 관헌이 겁을 먹고 절절거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아운은 관헌 같은 인간들이 약자에게 얼마나 무자비한지 잘 안다.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하긴 이들에게 죽은 죄 없는 양민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흑룡당의 형제들은 무인지경으로 녹주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소 잔인하기로 유명했거나 사람 죽이는 것을 우습게 여겼던 

혈랑대들은 기어코 잡아서 단죄를 하였다.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한꺼번에 풀어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은 이십 세 정도의 청년 한 명을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그가 바로 건덕의 뒷골목에서 불과 십사 세의 나이로 빛살의 올빼미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광효였다. 

광효는 한동안 아운을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 앉아서 대성통곡하며 말한다. 

"아이고, 형님. 왜 이제야 오셨수. 엉엉…. 정말 보고 싶었수." 

아운과 황룡은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러려니 했는데, 어찌 한 치의 오차도 없단 말인가. 

아운은 소혈랑의 무공을 폐하고 황룡에게 넘겨주었다. 

순간 엉엉 울고 있던 광효가 벌떡 일어서더니 소혈랑에게 달려들어 이빨로 

코를 물어뜯어 내곤 그 자리에 깔고 앉아서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 팬다. 

"이 개자식이 내 코를 때렸었지." 

분에 못 이긴 광효의 폭력을 본 몇몇 혈랑대의 얼굴들이 파랗게 얼어가고 

있었다. 

광효는 언제 울었나 싶었다. 

황룡이 아운에게 다가와서 나직하게 말했다. 

"유난히 광효와 우리를 괴롭혔었습니다." 

아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흑룡당의 형제들을 보았다. 

광효의 뒤로는 열여섯 명의 흑룡당 형제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눈에 살기를 품고 있었는데 손에는 별의별 무기가 전부 들려 

있었다.

"광효, 너 대충 하고 빨리 빠져라! 내거도 좀 남겨 놓아야 할 거 아냐?" 

벽안이 고함을 지르자 맨 뒤에 있던 외팔이 청년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광효 형, 팔 두 개는 남겨 놓으시오. 그 새끼가 내 팔을 잘랐으니 난 

두 개로 복수해야겠소."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평소 소혈랑 관헌이 얼마나 많은 인덕(?)을 쌓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들을 전부 상대하고도 소혈랑 관헌이 살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금강불괴를 십이 성이나 터득했다고 자랑해도 될 것이다. 

편일학이 고개를 흔든다. 

묵천악이나 묵소정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운과 그 형제들을 번갈아 본다. 

그 형에 그 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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