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이형분광(二形分光)
- 패자는 말이 필요 없다
흑칠랑과 야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죽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고, 아달라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금세 그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살기.
한 가닥의 살기가 바로 코앞가지 다가와 있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다급한 아달라가 뒤로 몸을 젖힌 순간,
무엇인가 그의 이마를 스치고 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말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아달라가 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털썩! 하는 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렸다.
아달라가 놀라서 돌아본 곳엔 그의 뒤에서 화살을 날리던 궁도병이 말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마에 구멍이 난 채로.
즉사였다.
'암기다.'
아달라는 암기라는 것은 알았지만 언제 어떻게 암기를 쏘았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자신의 화살을 피한 것도 놀라울 뿐이었다.
아달라가 황급히 돌아본 것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잠깐 사이에 누루치와 편일학의 대결이 점입가경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편일학의 검에 푸른 기운이 어리면서 누루치가 조금씩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운과 겨루는 두 명의 광풍사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달라는 황급히 화살을 뽑아 들었다.
화살이 아운을 뚫고 지나가자 작은 손도끼를 들고 있다가 던지려던
순부병은 주춤했다.
한데 죽은 줄 알았던 아운의 신형이 연기처럼 서서히 흩어지는 게 아닌가.
칠보둔형의 환영결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형은 창병의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같은 움직임이었다.
아운이 오른손으로 궁병들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가 오므리며 시선을
창병에게 향했다.
다급한 순간이라 창병은 아운의 오른손에서 무엇인가 날아가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는 상황이 급해지자 창을 놓고 대검을 뽑으려 했고,
순부병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들고 있던 도끼를 던졌다.
순부병과 아운의 거리는 불과 이 장(6 미터).
쉽게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도끼를 던지 순부 전사는 최소한 창병이 대검을 뽑아들 기회라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운의 손이 잡았던 창을 높으며 두 주먹이 번개처럼 교차하며 뻗어나갔다.
한 주먹은 창병 전사를 향해.
한 주먹은 순부 전사를 향해.
아운의 주먹에 섬광이 어리는 순간 광풍사의 병사들은 상대가 권왕 아운
임을 알아보았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아운의 주먹에서 뿜어진 섬광과 충돌한 손도끼가
허공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그리고 막 대검을 뽑아 들려던 창병은 아운의 주먹에서 뿜어진 섬광이
너무 빠르자 감히 대항할 생각을 못하고 몸을 뒤로 젖혔다.
섬광이 아슬아슬하게 창병의 코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싸! 살았구나. 잘한다, 아운!"
흑칠랑이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역시, 권왕이다."
야한도 감탄한 목소리로 말하며 흑칠랑을 보았다.
둘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들어 철썩! 하고 마주친다.
"저 정도는 되니까 내가 어쩔 수 없이 참는 거지, 암."
흑칠랑의 말에 야한도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포기하길 잘했지 않소, 선배? 근데, 저 보법 무지 멋지구랴."
"저 보법에 대해서 철저히 연구를 해야 겠군."
흑칠랑은 눈을 부릅뜨고 아운을 보면서 말했다.
아운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연환육영뢰를 연속 사용해서 두 명의 광풍사를 상대했지만,
그들을 압도하지 못했다.
광풍사의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었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아운은 소아 보냈던 수라마정을 거두면서 다시 손도끼를 뽑아 드는
순부 전사가 탄 말 다리를 공격했다.
몸을 낮춤과 동시에 선풍팔비각의 사구아로 말 다리를 걷어찼다.
순부 전사로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공격이라 속수무책이었다.
팍!
소리와 함께 말의 다리가 꺾어지면서 옆으로 쓰러진다.
아운은 일차 공격을 성공하자 다시 일어나면서 말에서 뛰어내리는
순부병의 가슴을 차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어야만 했다.
두 가닥의 살기가 그의 등과 머리를 향해 밀려왔다.
이미 말에서 뛰어내린 창병 전사가 대검을 뽑아 들고 아운의 머리를
노리고 있었으며, 을목진과 진성현을 향해 다가서던 두 명의 병사 중에
또 다른 순부 전사가 들고 있던 손도끼를 아운에게 던진 것이다.
도끼를 던진 순부 전사는 말의 안장에서 또 하나의 도끼를 뽑아든 채
말을 몰아 아운에게 돌진해 왔다.
을목진과 진성현은 순부 전사가 아운에게 가는 것을 보면서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전면에 서 있는 또 한 명의 창검 전사가 두 사람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그 한 사람만으로도 벅찼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순부 전사의 살기는 을목진과 진성현을
압도하고 있었다.
두 명의 광풍사는 을목진과 진성현의 실력을 알아보고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었다.
싸우게 되면 결코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지만,
살인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위였다.
그렇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여차하면 다른 곳을 돕는 것이 싸움에 더 유리했다.
살기로 두 사람을 묶어 놓을 순 있지만 정말 죽이려 들면 두 사람도
죽기를 각오하고 덤빌 것이다.
그러면 귀찮아진다.
물론 이 대 일로 싸우면 이기겠지만, 그건 두 사람이 함께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살기로 두 사람을 겁준다면 한 명이 그 둘을 제어할 수 있다.
즉, 급할 땐 한 명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두 전사는 그 이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움직이지만 못하게
하고, 다른 곳의 결투를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운의 신형이 왼발을 축으로 회전하며 몸을 낮추었다.
순간 대검이 아운의 얼굴이 있던 허공을 찢고 지나갔으며,
날아온 도끼가 그 아래로 스쳐갔다.
한 번의 동작으로 두 공격을 피한 아운이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말을 타고
공격해오는 순부 전사에게 날아갔다.
대검을 든 창검 전사와 또 한 명의 순부 전사가 한 손에 방패, 한 손에
손도끼를 들고 아운의 뒤를 쫓았다.
둘 다 말에서 내렸지만, 공격의 날카로움이 무뎌지지 않았다.
육영뢰의 세 번째 주먹이 말을 타고 공격해오는 순부병의 면상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이 급해지자 순부병은 들고 있던 방패로 아운의 주먹을 막았다.
방패엔 그들 특유의 내공이 잔뜩 주입되어 있었다.
콰앙!
순간 아운의 주먹에서 뿜어진 섬광이 방패를 강타하면서 순부병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들고 있던 방패는 박살이 났고,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채 무려 일 장이나
뒤로 굴러갔다.
일단 공격은 성공했지만, 아운의 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공격을 한 순간 대검과 또 하나의 도끼가 바로 그의 등까지 다가와
있었다.
두 개의 무기가 막 아운의 등을 가격할 순간이었다.
번쩍! 하는 섬광이 이는 것 같더니, 아운의 신형이 갑자기 삼 장이나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충격을 받아 쓰러져 있는 순부병의 위로 지나쳐 갔고,
두 병사의 공격은 허탕을 친다.
아운이 허공에서 섬전어기풍을 펼친 것이다.
아운은 섬전어기풍을 펼치며 빠르게 몸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신법을 멈추며 땅에 발을 디디려는 순간,
아운은 한 가닥의 살기를 느꼈다.
'화살.'
급했다.
절묘한 순간에 화살을 날린 상대의 실력에 혀가 절로 돌아간다.
아직 그의 몸은 허공에 있었고, 이는 칠보둔형을 펼치기에 가장 어려운
난관이었다.
소군령 아달라도 이것을 노렸으리라.
화살은 이미 그의 일 장까지 다가와 있었고, 다시 뒤를 쫓아온 두 명의
병사는 바로 코 앞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움직였지만, 두 병사는 망설임이 없었고,
한번 공격을 실패해도 재차 공격하는 자세는 필살이었다.
광풍사가 왜 사막의 신인지 알만한 공격이었다.
아운은 허공에서 급히 옆으로 몸을 이동시키면서 두 주먹을 교차했다.
퍽!
그러나 날아온 화살은 아운의 왼쪽 허벅지를 뚫고 들어갔다.
화살은 아운이 피한 곳으로 꺾어지며 날아 왔고,
아직도 땅에 발을 디디기 직전이라 아운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무서운 통증이 왼발의 허벅지로 몰려온다.
적장은 아운의 보법을 무디게 하려고 우선 다리를 노린 것 같았다.
그나마 아운이었기에 허공에서 몸을 두 번이나 이동시키며 그 화살을
약화시킬 수 있었으리라.
아운은 이를 악물고 불괴수라기공으로 화살 맞은 다리를 보호하며
칠보둔형의 환영결을 펼쳤다.
다리가 저려왔지만 방법이 없었다.
순간 두 번째 날아온 화살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망설였어도 머리가 뚫릴 상황이었다.
그리고 두 명의 광풍사는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운의 교차한 두 주먹과 그들의 대검, 도끼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앙!
소리가 거의 동시에 들리면서 두 병사는 무려 일 장에서 이 장씩이나
뒤로 밀려나갔다.
그 중에서 네 번째 주먹을 상대한 창검 전사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다섯 번째 주먹을 맞은 순부 전사의 경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두 병사를 물리친 아운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당연히 이 기회를 틈타 날아와야 할 아달라의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달라는 화살을 겨냥하고 있었다.
아운이 아니라 편일학을 향해서.
이미 편일학은 자신의 절기인 분광영검법을 펼치면서 대군령 누루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위험하다.'
아운은 편일학의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나중에 공격해 왔던 순부 전사가 도끼를 휘두르며 아운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의 공격은 단순무식이었다.
한 마디로 너 죽고 나 죽자 식이였다.
그리고 대검을 든 전사도 심한 내상을 참으며 달려온다.
실로 광풍사의 강함이나 용맹성은 보고 있던 야한이나 흑칠랑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런 무식한 놈의 새끼들."
흑칠랑은 자신도 모르게 욕을 하고 말았다.
"독종들이네."
야한도 감탄한다.
"그래도 아운이란 저 새끼는 더 독종일거다."
"독종지존."
야한이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아운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오른손이 아달라를 향해서 겨누어지며 삼살수라마정을 쏘아 보냈고,
그 순간 순부 전사의 도기가 아운의 머리를 향해 내리 찍었다.
아운은 칠보둔형으로 이 보를 움직였다.
그러나 다리에 박힌 화살로 인해 보법을 제대로 밟을 수 없었고,
삼살수라마정을 쏘아 보내느라 잠깐 지체한 시간으로 인해 도끼를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퍽!
도끼가 가슴을 찍고 지나갔다.
피가 튀면서 깊은 상처가 생겼고, 동시에 대검이 그의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를 그으려 한다.
아운은 이를 악물고 몸을 낮추며 다친 왼발을 축으로 하여 몸을 회전했다.
대검이 회전하는 몸의 선을 따라 비켜 나간다.
아운은 회전을 하며 오른발로 선풍팔비각의 각법 중 가장 무서운 위력을
지닌 대붕천(大鵬天)의 초식을 펼쳤다.
재차 공겨을 하려는 순부 전사의 옆구리에 대붕천의 각법이 작렬했다.
다친 몸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빠름.
퍼걱!
순부 전사의 몸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두 명의 순부병은 전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 명은 죽었고,
또 한 명은 한 쪽의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지고 내장이 터지는 중상을
입고 말았다.
그는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이어서 아운의 신형이 대검을 든 병사엑 바싹 다가서며 금강룡의 권법으로
그의 얼굴과 가슴을 난타했다.
두 주먹을 겨우 피하고 막았지만, 세 번째 주먹에 얼굴이 깨졌다.
그리고 네 번째 주먹엔 가슴이 함몰되었으며,
주저앉으려는 순간 아운의 발의 그의 턱을 부셔 놓았다.
절명(絶命).
"꿀꺽, 역시."
"무지막지한 새끼."
흑칠랑이 야한의 감탄에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한다.
지켜보던 또 한 명의 창검 전사가 협공하려 했지만,
을목진과 진성현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 대 일이면 아무리 광풍사의 병사라도 어렵지만은 않으리라.
아달라는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약간은 당황했다.
설마하니 상대가 권왕 아운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삼귀가 처리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편일학의 무공도 예상 밖이었다.
처음엔 고전하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누루치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종남검성의 명성이 다시 살아 돌아오고 있었다.
먼저 아운을 처리하고 나중에 편일학을 공격하려던 아달라의 계획은
편일학이 분광영검법의 최고 절학인 분광월인벽(分光月刃碧)을 펼치면서
수정해야 했다.
단 두 대의 화살이면 아운을 완벽하게 궁지로 몰아넣을 상황에 편일학의
검강(劍?)은 당장이라도 누루치를 베어내 버릴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그의 활이 편일학을 겨냥한 순간,
아운의 삼살수라마정이 날아오자 기겁을 했다.
대체 어떤 암기일까?
궁금함은 나중이었다.
은밀하게 날아오는 암기의 빠르기는 자기의 화살 못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일단 겨누고 있던 시위를 놓았다.
동시에 땅바닥을 뒹굴며 암기를 피해야 했다.
다행이라면 아운도 어려운 상황이라 암기의 정확성이 조금 떨어졌기에
피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었다.
막 누루치에게 마지막 검을 내리치려던 편일학은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의
기세를 느끼고 몸을 틀어 피해야만 했다.
특히 상대의 화살이 어떤 위력인지 아는 그는 분광신법으로 확실하게
거리를 두고 피해냈다.
사실 아달라는 아운의 방해로 인해 화살을 조종할 수 없었지만,
그것까지 편일학이 알 순 없었다.
덕분에 누루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순간 화가 치밀었다.
이겼던 상대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수치심을 유발했다.
"이노옴!"
고함과 함께 그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절기로 편일학을 공격했고,
편일학은 다시 한번 분광월인벽을 펼쳤다.
두 개의 강기가 충돌하면서 퍽! 하는 소리를 냈고,
누루치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섰다.
편일학도 역시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입가에 핏물이 번지면서 뒤로
주춤거리며 서너 걸음을 물러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달라의 두 번째 화살은 편일학이 물러서는 바로
그 자리까지 날아와 있었다.
편일학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운은 이를 악물고 다친 발로 섬전어기풍을 펼치며 다시 돌아온
삼살수라마정을 재차 쏘아 보냈다.
아달라는 처음의 삼살수라마정을 피하고 바로 다시 한번 화살을 쏘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편일학과 누루치가 재차 충돌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일단 활을 쏜 아달라는 아운의 공격을 보면서 활을 집어 던지고 대환도를
뽑아 들어 휘두르며 보법을 펼쳤다.
쾌도.
형가의 도법보다 빠른 쾌도였다.
차창!
연이어 두 개의 수라마정을 쳐내고 하나는 보법으로 피해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코 앞으로 다가온 아운이 삼절파천황으로 주먹을 휘두른다.
아달라가 대환도법의 강기를 휘두르며 주먹에 뿜어진 강기를 쳐 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화살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편일학의 등을 뚫고
들어갔다.
얼추 심장을 관통한 것처럼 보이낟.
모든 일은 눈 깜박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야한과 흑칠랑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을목진과 진성현, 그리고 창검 전사는 싸우던 것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이들의 결투를 넋 놓고 본다.
이들로서는 이렇게 긴박하고 단 한순간에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긴박한
결투를 본 적이 없었다.
파앗!
기음과 함께 아운의 삼절파천황이 아달라의 도를 휩쓸고 들어왔다.
땅!
쇳소리와 함께 도가 아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어지며
아달라는 무려 일 장 밖으로 밀려났다.
"크윽!"
입으로 핏물이 흘러 나왔다.
듣기는 했지만 소문보다 더욱 매서운 주먹이었다.
일단 아달라를 물리친 아운은 급하게 편일학을 돌아보았다.
심장을 뚫고 들어간 화살,
그러나 아운은 그 순간 편일학의 신형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아운은 그것이 이형환위와 비슷한 신법임을
알았다.
그러나 화살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화살이 꽃히는 순간, 모두 그 화살이 심장을 관통했다고 생각했다.
아운만은 약간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뒤로 물러섰던 누루치가 다시 편일학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든다.
아운의 오른손이 누루치를 가리키자 삼살수라마정이 누루치의 머리와 단전
그리고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누루치는 갑자기 미세한 살기가 덮쳐오자 놀라서 공격을 포기하고
도끼로 날아오는 삼살수라마정을 쳐냈다.
그리고 그 순간 푸른 섬광이 누루치를 향해 빛살처럼 날아온다.
피하고 어쩔 사이도 없었다.
다급한 나머지 누루치가 몸을 던지며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일어난 누루치의 안색은 이미 거의 죽어 있었고,
그의 한쪽 팔은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아운은 일단 안심을 하고 허벅지에 박힌 화살을 뽑으려 했다.
먼저 촉이 있는 부분을 단룡수로 쳐서 꺾어버린 다음,
나머지 부분은 손으로 잡아 뽑았다.
피가 솟구친다.
그렇지 않아도 피가 엉겨 있던 부분이었다.
아운은 빠르게 혈을 점해 지혈시킨 다음,
마지막 공격으로 누루치의 팔을 잘라 버린 편일학에게 다가섰다.
아운은 우선 편일학을 편히 뉘이며 누루치를 바라보았다.
누루치는 팔이 잘렸지만 한 손에 든 방패를 치켜들고 아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광풍사의 대군령다운 면모였다.
"가라!"
아운의 말에 누루치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죽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이 빚은 따로 받아내겠다.
그러니 지금은 사라져라!"
누루치의 안색이 굳어졌다.
지금 죽일 수 있다는 아운의 말이 거짓은 아닐 것이다.
누루치는 아운의 눈을 보면서 그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아달라에게 다가섰다.
그를 부축하고 말에 태우려 한다.
"말은 놔두고 사라져라! 내가 써야겠다."
아운이 차갑게 말을 하자 누루치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이 말은 우리 것이다."
"네놈은 패자다. 패자 따위가 무슨 말이 많은가? 나는 패자를 인간 취급
하지 않는다. 빨리 꺼져! 마음 바뀌기 전에."
누루치는 이를 악물었다.
패자를 공경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다.
이렇게 고스란히 돌려받을 줄은 몰랐다.
할 말이 없었다.
"가자!"
누루치가 말을 하자, 아직까지 결투에 참여하지 않던 단 한 명의 병사가
말에서 내려 아달라를 업었다.
그리고 그들은 사막의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을목진과 진성현은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을목진이 아운을 보고 묻자 아운은 편일학을 내려다 보았다.
"다행히 심장을 관통한 것은 아닙니다."
아운이 말하며 편일학의 상처에 지혈을 했다.
그러나 화살이 심장을 관통한 것은 아니지만 심장 바로 근처를 관통한지라
함부로 뽑을 수가 없었다.
언뜻 보면 마치 심장을 뚫고 들어간 것 같았다.
을목진과 진성현은 아운의 말을 듣고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화살이 편일학의 심장을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았었다.
위치상 분명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아운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고,
지금 보니 화살은 확실히 심장을 비켜 간 것 같았다.
편일학이 아운을 올려다본다.
편한 얼굴이었다.
"내가 이겼네."
"그렇습니다, 선배님."
"이제 원은 없네."
"정말 멋지게 싸우셨습니다."
"나를 좀 일으켜 세워주게."
아운은 편일학을 편안하게 일으켜 앉혔다.
"내가 사막에서 자네를 만난 것은 행운이지."
"감사합니다."
아운이 슬쩍 웃음기를 띠었다.
"근데 마지막에 펼친 신법은 정말 멋졌습니다. 저도 화살이 심정을
관통하는 줄 알았습니다."
편일학이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마음 수양을 꽤 했다 싶었는데 아직 멀었네. 누루치에게만 신경을
쓰다가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어. 마지막에 분광신법의
마지막인 이형분광영(二形分光影)으로 겨우 심장만은 피할 수 있었네.
자네가 제때에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것도 힘들었을 거야."
"공치사일 뿐입니다. 마지막의 신법은 도가(道家)의 이형환위 같았습니다."
"비슷한 신법일세. 하지만 난 아직 완전하게 터득하지 못했어."
아운은 좀 심각한 표정으로 편일학을 보며 물었다.
"선배님, 저들은 모두 저렇게 강합니까?"
"강하네. 물론 전부가 저 정도는 아니지만, 누루치와 아달라는 광풍사의
소군령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장들일세. 그리고 데려온 자들도 광풍사
의 일반 전사들 중에서 뽑힌 정예들인 것 같았네. 아마도 차후 소군령
후보들쯤 되겠지."
아운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 말은 저 정도의 무리들을 보내야 할 만큼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는
말이군요."
편일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몰아 쉰 편일학은 아운을 보면서 물었다.
"좀 이상하지 않나?"
아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합니다. 저들의 터무니없이 강한 힘이 정말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닐세.
저들은 원이 망할 때 가지고 있던 영약과 비급을 전부 쏟아 넣은 정예
일세. 저 정도가 아니라면 오히려 이상하지. 지금 명의 군대가 고전하는
것은 오로지 저들 때문일세."
아운은 잠시 광풍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힘을 숭상하면서도 일단 전투가 벌어지면 망설임 없이 협공을 가했다.
그들은 이기는 것이 강자라는 철저한 생존법칙을 터득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법과 도덕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든 상대를 죽이는 것이 먼저다.
그들은 그 점을 철저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드는 용맹성까지.
무공도 무공이지만 정신적으로도 완벽한 용사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은 모욕을 참으면서도 살아 돌아갔다.
아운의 도발적인 말에도 별 다른 대꾸 없이 동료를 데리고 돌아간
누루치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필요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는 자들보다 더 무서운 점이었다.
아운은 아직 두 번의 주먹을 더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이후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누루치 등을 살려 보냈다.
그러나 언제고 그 대가는 다시 받아낼 참이었다.
"그래도 망한 원의 세력이 저들과 같은 무림의 고수를 키워내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가능성이 있겠지."
아운은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 보았다.
'설마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아운은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 본 결과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정말로 광풍사가 이곳에 온 것이 혈랑대와 관련이 있고,
혈랑대가 무림맹의 사마무기와 어떤 연계성을 가진다면 추측이 맞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사마무기와 광풍사는 어떤 관계일까?
아니면 정말 자신의 추측에 불과한 것인가?
아운은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만한 힘을 지닌 곳은 많지 않습니다."
편일학은 잠시 아운을 보았다.
"자네, 무엇인가 짐작하는 바가 있는 것 같군 그래."
"선배님, 지금은 일단 상처를 치료할 때입니다."
"그래야겠지. 그 전에 부탁이 있네."
"말씀해 보십시오."
편일학이 아운의 뒤에 있는 을목진과 진성현을 보았다.
을목진은 편일학이 무엇을 바라는지 눈치채고 진성현을 데리고 십여 장
정도 물러섰다.
"내 품 안에 보면 책자가 두 권 있을 걸세."
아운은 편일학의 품 안에서 기름종이로 쌓여져 있는 두 개의 책자를
꺼냈다.
"그것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네."
아운이 놀라서 편일학을 본다.
"이 사막에 어떻게 될지 모르네. 그렇게 되면 그것도 함께 유실되겠지.
부탁일세. 그것을 종남에 전해주게. 대신 자네가 그것을 보아도 좋네."
아운은 편일학을 보았다.
책자는 분명히 무공비급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운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자 편일학이 웃었다.
"나는 누루치에게 패한 후 상심한 채 세상을 떠돌다 우연히 칠절광영검법
(七絶光靈劍法)을 얻게 되었지. 그 후 나는 종남 최고절기인 분광이십사검
과 광영검법을 합하고, 그 안에 나의 심득을 더해서 하나의 검법을 만들려
했었네. 오로지 그것에만 매달려 운 좋게 칠절분광영검법으로 체계화
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검법을 완성한 것도 근래의 일이었고,
체계적으로 수련할 시간도 없었네. 그리고 분광영검법을 완전하게 수련
하고 싶어도 이제 나이를 너무 먹었는지 진전도 느리고, 내가 완성한
검법이 완전한 것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네."
아운은 편일학을 보았다.
편일학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처음으로 펼쳐 본 것일세."
편일학이 웃는다.
나름대로 만족했다는 표시이리라.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두 개의 책자는 광영검법과 칠절분광영검법일세. 이것은 종남의 절학이
아니고 나의 절학이니 너무 부담가질 필요가 없네. 대신 자네가 살펴보고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좀 더 체계화시켜 종남에 전해주게. 자네가
완전히 터득한 후 종남의 제자에게 전후해주면 더욱 고맙겠네."
아운은 잠시 편일학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라… 분광영검법의 여섯 번째 초식은 이기어검일세. 나는 이제
겨우 오 할을 터득한 무공이지. 그것을 유심히 봐두게. 자네도 느꼈겠지.
광풍사의 궁술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들의 궁술은 이기어검과 같은 원리
일세. 자네는 이미 광풍사와 원한을 맺었고, 그들과 반드시 다시 만날 것
같은 느낌일세. 내가 보기에 그들의 천적은 자네가 아닐까 싶네. 이기어검
을 연구하면 광풍사의 궁술을 파해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일세. 사실 방금
전 그들의 궁술도 이기어검의 묘리를 인용했지만, 그저 흉내를 낸 정도일
뿐. 하지만 그들 중 궁의 최고수라는 광사 타륵하는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네."
아운은 잠시 편일학을 보다가 책자를 품 안에 넣었다.
상대가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거절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고, 이기어검술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만약 어검술의 묘리로 삼살수라마정을 사용한다면.'
아운은 아달라의 궁술을 보면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운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자 편일학은 마음이 편해졌다.
검법을 만들고 그것을 최고의 기재에게 전해주고 싶었었다.
처음 아운을 보았을 때 아운이 마음에 들어 제자로 삼고 싶었지만,
그의 무공이 자신보다 아래가 아님을 알고 놀랐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아운에게 맡기면서 편일학은 몇 가지 마음의
짐을 한꺼번에 덜 수 있었다.
아운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무공을 종남에 전해줄 것이고,
원래 제자로 삼고 싶었던 단 한 명의 인물에게도 무공을 준 셈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호 무림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난세로 치닫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종남은 아운이란 든든한 조력자를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무공을 보고 그것이 아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아운은 절대 종남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무공을 전해준 이면엔 그런 계산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아운은 그것을 알면서도 받았다.
무엇보다도 편일학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기어검술에 대한 부분이 궁금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편일학이나 아운이나 알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저 이러저런 이유로 전해준 이 검보가 아운에게 얼마나 큰 것을
주었는지.
또한 종남에게 얼마나 많은 이익을 주었는지.
편일학이 전해준 검보와 광풍사와의 결투로 인해 아운은 진정한 권왕으로
진일보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네 급하지 않나? 지금부터는 나 혼자 할 수 있네. 자네는 빨리 자네
아우들에게 가 보게."
편일학의 말에 아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운은 몽고 병사의 몸에서 옷을 찢어내어 허벅지를 단단하게 묶은 다음
을목진과 진성현을 보면서 말했다.
"두 분, 편 노선배님을 부탁합니다."
을목진이 놀라서 아운을 보며 말했다.
"걱정 말게. 하지만 자네 혼자서 괜찮겠나?"
"혼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아운은 전력을 다해 섬전어기풍으로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