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패자불경(敗者不敬)
- 우리는 패자를 공경하지 않는다
약 사십여 세 정도의 남자는 세 명의 몽고병들을 보고 고개를 숙인 채
함부로 들지도 못했다.
세 명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가 능히 그의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말 위에서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명의 소군령들 중 대군령인 누루치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보면서
물었다.
"네가 신기루의 밀영삼호(密營三呼)인가?"
내려다보는 말투였지만, 밀영삼호는 감히 그 말에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이기는 모두 삼십대로 보여도 실제 나이는 모두 자신보다 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아니라도 그들이 지닌 무력을 잘 아는 밀령삼호였다.
"그렇습니다, 장군. 제가 신기루의 밀영삼호입니다."
"이야기는 미리 전해 들었다.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가? 듣기로는
삼귀란 자들이 권왕을 상대한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장군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삼귀의 무공이라면 권왕
아운이 아무리 강해도 충분할 것입니다. 설혹 거기서 살아난다고 해도
살수 야한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가?"
"삼귀는 아운을 처리하고 바로 중원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오늘
중으로는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겠다. 그리고 십벽진은 우리가 돕지 않아도 충분하겠는가?"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혈랑대 전원에게 줄 만큼의 천마
금환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귀문에서 만들어낸 보물 중 하나로, 그 약을
먹으면 평소의 두 세 배 이상의 힘을 내게 되고, 아픔과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제 아무리 호연세가의 무사들이 강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결투는 천마금환의 실험장이 되겠군."
밀영삼호는 부정하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운이란 자, 강하다고 들었다."
"생각보다 많이 강한 것 같습니다."
"아쉽군. 그 정도 용자라면 한번 겨루어 보고 싶건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군."
누루치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운과 이들이 겨룬다면 대체 누가 더 강할까?
신기루의 밀영삼호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광풍사는 아직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어차피 삼귀로 인해 그 기회도 없을 것이다.
"어차피 여기 일은 자네에게 맞기겠네. 그럼 우리에게 줄 정보는 어떻게
되었나?"
밀영삼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누루치를 보았다.
"고대성 장군의 약혼녀는 북경 하씨 세가의 장녀인 하영영입니다. 그리고
고대성 장군을 만나러 대사막으로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삼천 명의
병사들이 함께 라고 합니다."
누루치의 얼굴에 서늘한 웃음이 어렸다.
"그랬단 말이지. 삼천의 허수아비들을 믿고 감히 호구 속으로 들어오다니.
그 계집, 배짱 하나는 대단하군."
"위험해서 모두 말렸지만, 그녀의 고집을 아무도 꺾지 못했다고 합니다.
원래 하씨 문중이 고집 강하기로 유명한데, 그녀의 고집은 그 중에서도
그녀의 오빠와 함께 유별나다고 합니다. 내가, 내 낭군을 만나러 가는데
누가 감히 말릴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여장부군."
누루치가 웃으면서 말하자, 밀영삼호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고집이 자신의 낭군을 위험하게 만들고 자신의 생명도 단축했음을
모를 것입니다. 그것은 여장부라고 말하기 보다는 어리석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녀인들 자신이 이곳에 오는 비밀을 우리가 알게 되리라 생각했겠는가?
이제 우리가 할 일만 남았군. 자네도 부디 잘하길 바라겠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초상화입니다."
밀영삼호가 누루치에게 족자 하나를 전해주자,
누루치는 받아서 그 족자를 펼쳐 보았다.
눈에 언뜻 감탄한 표정이 어렸다.
"아름다운 계집이군. 잡아서 내 첩으로 삼고 말겠다."
누루치의 얼굴에 탐욕이 어렸다.
"북경에서는 최고의 미인 중에 한 명으로 통하는 계집입니다."
"과연 그 소리를 들을 만하군. 수고했네. 잘 전해 받았다고 전해주게.
그럼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었나?"
"다행히도 혈랑왕도 처리해야 할 수하들이 있었기에 서로 좋은 메듭을
지었습니다."
"수고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준비만 하면 되겠군."
"그렇습니다, 장군."
밀영삼호가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자,
누루치가 웃으면서 두 명의 소군령을 보았다.
"여긴 누가 맡을 텐가?"
누루치의 물음에 창검 소군령 다르하가 말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장군."
"그럼 다르하 소군령이 남아서 신병들을 관리하게."
"걱정 마십시오, 장군."
"그럼 우리는 지금 출발해서 기다리던 수하들과 만나 예정된 장소로
가도록 하겠네. 빨리 마치고 뒤쫓아 오도록."
"명대로 하겠습니다."
짧지만 힘 있고, 자신 있는 목소리였다.
누루치는 마지막으로 밀영삼호를 보았다.
"우리가 없어도 자신 있는가? 지금이라도 말하라! 그렇다면 우리가
처리해 버리겠다."
"오절도 있고, 혈랑대 인원이 무려 육백 명입니다. 그리고 강적이었던
호연세가의 인물들도 거의 다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가장 무서운
적인 아운은 삼귀가 맡았으니 그 또한 살아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젠
굳이 광풍사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혈랑대가 모두 쓸어버린 것으로 하면 될 것입니다. 단 한 명도 살려
놓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믿겠다. 가자!"
누루치가 조금 큰소리로 말하자, 협곡 안에서 여섯 명의 인물들이 역시
대완구를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이들 세 명의 부장들보다 먼저 와 있던 광풍사의 전사들로 순부,
창검, 궁도 별로 각각 두 명씩이었다.
이들로 인해서 얼마 전 십벽진을 공격했던 혈랑대의 삼백 명이 완벽하게
광풍사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제 임무를 완수하고 새로운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누루치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들은 광풍사의 전사들 중에서도 정예들이었다.
차기 소군령이 될 인물들로 하영영의 납치와 묵가 남래를 죽이기 위해
특별히 차출된 광풍사의 전사들이었다.
누루치 일행은 십부장인 다르하를 남겨 놓고,
말을 몰아 사막의 한 편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
말발자국을 보는 아운의 눈에 약간의 불안함이 깃든다.
동생들이 말했던 방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발자국.
'혹시…'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둘러 가봐야겠습니다."
아운의 서두르는 말에 편일학이 묻는다.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나?"
"내 아우들이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아우들?"
"그렇습니다."
"서두르세."
편일학 역시 무엇인가 느낀 듯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을목진과 진성현 역시 급히 그 뒤를 따른다.
***
대사막의 협곡은 마치 몇 개의 거대한 담장이 서로를 마주 보고 달리는
형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미로처럼 메마른 계곡이 바위 절벽사이로 길게
연결되어 있어서 웅장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절벽들이 시작되는 앞부분엔 상당히 넓은 터가 있었고,
터 앞쪽은 끝없는 사막이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땅.
그 위를 구르는 자잘한 돌과 바위들.
대사막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협곡 사이에 육백여 인물이 모여 있었으며,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부상이 심한 오십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서 있는 육백 명의 앞에는 매서운 눈초리의 사십대 장년인이 큰 바위에
올라가서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바로 혈랑대의 대주인 혈랑왕(血狼王) 관량이었다.
사막에서 가장 무서운 마적단의 두목으로 그의 이름은 곧 사막의 법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혈랑왕 관량이 올라가 있는 바위 아래 근처엔 밀영삼호가 서 있었고,
그의 뒤에는 오절이 나란히 서 있었다.
"이제 우리는 사막의 법에 따라 우리의 법을 어긴 자들을 처단하러 떠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가로 황금 수백 냥에 해당하는 돈과 비단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들, 모두 힘을 내자!"
우우우우!
육백 명의 혈랑대들은 마치 늑대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고함을 질렀다.
정말이지 이 맛에 마적단 두목도 할 맛이 났다.
혈랑왕 관량은 만족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나누어준 환약은 내가 주는 선물이다. 전에도 이미 효험을 보았듯이
이 약을 먹으면 힘이 나고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한다."
와아!
혈랑대의 함성이 다시 한번 협곡을 맴돌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사기충천.
그들은 당장이라도 십벽진을 뭉개버릴 듯한 기세로 고함을 질러댔다.
혈랑왕 관량은 흡족한 표정으로 잠시 밀영삼호를 보았다가 혈랑대원들
중에 누군가를 보면서 호명을 했다.
"그리고 함사량과 배대근."
"옛."
관량의 지명에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와 배대근이 힘차게 대답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얼굴 표정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내가 지명하는 일부 형제들과 여기 남아서 부상 입은 형제들을
보호하고 있어라!"
"옛!"
대답은 힘차게 했지만, 배대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함사량과 자신을 남으라고 한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의아해 할 것 없다. 먼저 고생을 하고 왔으니 좀 쉬라는 뜻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부상 입은 형제들을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함 두목과 배 두목은
내가 지목한 형제들과 남아라!"
때 아니게 친절한 말이었다.
"명."
함사량과 배대근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 출동하라!"
관량은 수십 명의 인원을 일일이 지명한 후 출도 명령을 내렸다.
고함과 함께 혈랑대의 대원들은 혈랑왕이 나누어준 환약을 품 안에 넣고
일제히 협곡을 출발했다.
그리고 밀영삼호와 오절이 그 뒤를 따른다.
모두 떠나고 나자 그 자리엔 오십여 명의 부상 입은 혈랑대들과 배대근을
포함한 흑룡팔수의 일곱 명, 그리고 흑룡당의 형제들 이십여 명과 소두목인
함사량을 포함한 오십여 명의 혈랑대가 남았다.
남은 혈랑대를 살펴보던 배대근의 안색이 일변했다.
'이건 좋지 않다.'
모두 혈랑왕에게 불만을 품었거나 몽혼약을 먹고 싸워야 하는 일에 반대를
했던 대원들 뿐이었다.
'배척 당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었다.
이미 각오했던 일 아닌가.
하지만 무엇인가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은 현실로 다가왔다.
협곡의 바위 절벽이 굽어진 안쪽에서 한 명의 몽고 병사가 긴 창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도 그 뒤로는 열 명의 광풍사가 말을 타고 뒤를 따른다.
그 뿐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다시 이십 명의 광풍사가 나타났는데, 그들은 각각 순부 열 명,
창검 열 명, 궁도 열 명으로, 완벽한 광풍사의 한 조였다.
배대근의 안색이 변했다.
남아 있던 무리들 중에 수좌라 할 수 있던 함사량이 허리에서 대환도를
빼들고 다르하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군데 여기에 나타난 것이냐?"
다르하의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바보 같은 놈. 얼마 전에 우리 흉내를 내고도 우리가 누군인지 모르다니."
함사량의 얼굴이 검게 변했다.
이제야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을 한 것이다.
그렇지만 설마 이들이 여기에 직접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광풍사의 이름은 사막에서 신과 동일한 이름이었다.
아무리 혈랑대라고 해 보았자, 광풍사와 그 이름을 견줄 수는 없다.
특히 사막에서는.
"광풍사가 여긴 무슨 일이요?"
함사량은 놀랐지만, 침착하게 물었다.
혈랑대에서도 강골로 이름 높은 소두목다웠다.
그의 무공 실력도 혈랑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만큼 뛰어난 자이기에 혈랑왕이 하는 일에 일부 제동을 걸려 했었고,
그의 눈 밖에 난 것이다.
"네놈들은 버림 받은 것이다. 혈랑왕으로부터 네놈들을 전부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제부터 우리 신입 광풍사들에게 피맛을
보게 해 줄 작정이다. 실망시키지 말고 제대로 반항해 보도록 해라!"
다르하의 말을 들은 함사량과 그 자리에 있던 혈랑대원들으 얼굴은
분노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상대가 겨우 삼십이고 이제 신입병들이란 말을 듣자,
용기를 내어 무기를 들고 한 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었던 자들 중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은 전부 무기를 들고
나섰다.
배대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본능은 지금 상황이 아주 위험하다고 말한다.
***
말을 몰아가던 편일학과 을목진, 그리고 진성현은 맨 앞에서 말을 몰아
달리던 아운이 갑자기 멈추자 덩달아서 말고삐를 잡아 당겼다.
아운이 말을 세우고 지평선을 바라보자 그 옆으로 다가온 편일학과
을목진, 진성현도 아운의 시선을 쫓아 지평선을 향했다.
아주 멀리서 작은 점들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모두 여덟 명이군."
편일학의 말에 아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저들은 광풍사입니다."
아운의 말에 편일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을목진과 진성현의 표정도 긴장으로 팽팽해진다.
한참이 지나서야 점으로 보이던 그림자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런데 점이 커질수록 편일학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누루치."
아운과 을목진 그리고 진성현이 편일학을 본다.
편일학의 눈에 기광이 어려 있었다.
깊숙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 맺힌 눈빛.
아운은 나타난 광풍사의 무리 중에 편일학과 겨루었던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을목진과 진성현 역시 느끼는 것이 있어 긴장한 표정으로 나타난
광풍사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참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운의 말에 편일학은 호흡을 고른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자네의 동생들이 위험해진 것 같던데,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편 노 선배님이 저들을 알아보았다면 저들도
편 노 선배님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를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간 자들은 셋인데, 오는 자들은 여덟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인원이 불었다는 것은 저들 중 일부가 먼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가
만나서 그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생각됩니다. 난 그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더군다나 저들이 간 곳은 내
아우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혈랑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저들과 혈랑대가 어떤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는 방향을 보고 우리의 목표도 짐작할 것
입니다. 만약 정말 저들이 혈랑대와 관계가 있고, 그 관계가 적대적이
아니라 상호 돕고 있는 관계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운의 말에 편일학이나 을목진 그리고 진성현은 새삼스런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추리였다.
"그리고 이 길을 간 자가 세 명이고, 그 세 명이 모두 소군령들이었다면,
저들 중 한 명의 소군령은 모종의 임무로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짐작입니다."
아운은 언행과 소운십절창이 죽은 흔적에서 세 명의 무공이 모두 소군령
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운 뿐만 아니라 편일학이나 을목진, 그리고 진성현도 능히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세 명의 십부장 중에 한 명이 없었다.
아운은 그 사실이 자신의 의동생들에게 해가 되지 않기로 속으로 빌고
있었다.
아운의 말에 편일학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저들 중에 누루치와 견줄만한 무공을 지닌 자는 한 명
뿐일세. 그렇다면 그가 또 한 명의 소군령이겠고, 한 명이 비는군."
편일학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피할 수 있다면 일단 피해보겠네."
아운은 가볍게 호흡을 하고 을목진과 진성현을 보았다.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결투가 벌어지면 두 분은 백 장 밖으로
피해 있으십시오."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을목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자칫하면 자신과 진성현은 짐이 될 수도 있었다.
몰론 을목진이라면 광풍사의 십부장만 아니라면 해볼 만한 실력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진성현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다.
만약 진짜 광풍사가 나타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진성현을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겠네."
짧지만 확실한 대답이었다.
진성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실력이 모자람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무리 중에 누루치가 천천히 말을 몰아 다가온다.
누루치의 시선은 편일학에게 모아져 있었다.
"오랜만이군."
편일학이 가볍게 웃는다.
"나이 많은 어른에게 말버릇이 없군, 누루치."
편일학의 말에 누루치가 웃으면서 여유 있게 말했다.
"우리는 패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네."
편일학의 얼굴이 굳어졌다.
***
아무리 신법에 자신이 있다고 하지만, 태양이 쨍쨍 내리쬐는 사막을
신법만으로 달린다면 누구라도 싫은 일이었다.
그것도 두 시진 정도를.
하지만, 살수인 흑칠랑과 야한은 어쩔 수 없었다.
말은 타면 나 여기 있소 하는 것이나 같다.
그러니 최대한 몸을 숨기며 쫓아야 했다.
다행히 말의 속도라야 두 사람의 신법에 비하면 그다지 빠른 변이
아니라서 두 시진을 달리면서도 탈진하진 않았지만,
숨이 벅찬 것은 숨기지 못했다.
자신들이 쫓고 있음을 아운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부터라도 들키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이젠 사라졌겠지 하고 방심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살수의 본능을 발휘한담녀 아직도 희망은 있다고 생각하는 의지의
흑칠랑이었다.
이것은 흑칠랑의 자존심이었다.
들켰다는 것은 이미 한번 졌다는 것이고, 그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승부가 아직 완전하게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부터 다시 도전해서 이기면 된다.
반드시 들키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진다.
한데 그의 옆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혹 하나가 붙어 있었다.
야한이었다.
자기야 이유가 있어서라지만,
이미 복수도 포기한 놈이 왜 쫓아다닌단 말인가?
정말 울화가 치밀지만 그래도 같은 살수종족 아닌가.
그래서 참고 있었다.
하지만 야한은 당연히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옆에서 달리는 흑칠랑을 보면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흐, 저렇게 포기를 안 한담녀 언제고 아운과 한판 승부를 하겠지.
그리고 당연하게 흑칠랑이 개처럼 두드려 맞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런
역사적인 순간을 못 본다면 그건 말이 안 되지. 아운, 이왕이면 도끼
자루로 패주게.'
야한의 흑심은 이것이었다.
물론 다른 부수적인 것도 몇 가지 있지만,
이것보다 큰 이유는 단연코 없었다.
세상 인간들 중에 흑칠랑만 한이 있겠는가?
살수 생활 십수 년이 지나도 언제나 현 시대의 천하제이살수라고 불린
인물이 야한이었다.
그 이유가 바로 흑칠랑 때문이었다.
어찌 한이 없겠는가.
흑칠랑이 고금천하제일살수라는 자리에 목을 매고 아운을 쫓는다면,
야한은 그냥 지금의 천하제일살수라도 돼 보고 싶은 게 원이었다.
이제 희망이 보인다.
야한이 본 아운은 괴물이었다.
그가 흑칠랑을 처리해 준다면, 그간의 한이 한번에 풀릴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앞을 가로 막고 있던 흑칠랑을 야한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이걸 일컬어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