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검왕검후(劍王劍后)
- 집나간 강아지를 기다리지 말아라!
호연세가의 고수들이 떠나고 나서도 을목진 형제와 진경화 조손은 한 동안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감히 천하제일세가를 멸문 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뿐인가?
사협의 수좌라는 모대건을 일 권에 날려 버리고도 모자라,
마치 애 다루듯이 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들이 기억하기로 대협이라고 불리던 사람을 저렇게 몰상식한 방법으로
체벌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반감은 생기지 않았다.
우선 평소 호연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아운이 하는 행동과
말투에서 무엇인가 느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소문으로 듣던 권왕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을국진의 말에 을목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 제 생각엔 선대의 고수들을 빼고 가장 강하다는 삼봉, 삼무룡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성현의 말에 을목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무림 제일 고수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을목진의 말에 을국진과 진성현은 새삼스럽게 아운을 보았다.
“가자, 가서 인사를 하자. 이런 인연을 놓친다면 바보나 하는 짓이다.”
을목진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진경화가 쫓아 온다.
그리고 을국진과 진성현이 마지막으로 뒤 따른다.
“눈이 있다고 세상을 다 보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제가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모자라 기인을 몰라보았습니다. 이제야 제대로 눈을 뜬 금룡표국의
을국진이, 권왕에게 다시 인사를 드립니다.”
갑작스럽게 을국진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정운을 비롯한 묵가남매는 상당히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운은 태연했다.
세상은 자신이 지닌 무게 만큼의 대우를 받게 마련이었다.
그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아운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은 대접을 받을 만한 위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코 오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를 낮추어 보지도 않았다.
아운 역시 포권을 하고 인사를 하였다.
“다시 인사를 하게 되었군요. 아운입니다. 그러나 권왕이란 말은 처음
듣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처음으로 직접 언급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듯 합니다.
아운 공자님을 세상에서 권왕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운은 자신에게 권왕이란 별호가 붙었다는 것을 알았다.
“과분합니다. 아직 왕이라 불릴 실력은 아닙니다.”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에게 왕이라 불리기에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아운이었다.
아운의 말에 동생인 을국진이 나서면서 포권을 하고 말했다.
“금룡표국의 총표두인 을국진입니다. 그리고 권왕이라 불리기에 충분
하십니다. 아운 공자님이 권왕이라 불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그 누구도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금룡표국은 결코 작은 명성을 지닌 곳이 아니었다.
대소림의 속가 장문인이란 자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 공신력 또한 강호 무림에서 절대적인 자리 중 하나였다.
그런 사람들이 아운을 권왕이라 인정하였다.
이제 권왕이란 별호는 정식으로 아운의 것이 되었다.
“진경화입니다. 작지만 용진회라는 상단을 맡고 있습니다.”
진경화가 인사를 하자 아운은 빠르게 포권을 하면서 마주 인사를 하였다.
“아운입니다.”
짧은 인사였고, 이름을 말했을 뿐이지만, 정중했다.
행동이나 어투에서 예의가 모자람이 없다.
모대건을 몰아 칠 때는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사납고 흉폭해 보였지만,
지금 모습은 그때의 인상이 전혀 묻어나오지 않았다.
진경화는 속으로 감탄하면서 말했다.
“권왕을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부족한 제 손자
입니다. 진성현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많은 부탁을 드립니다.”
진성현은 공손하게 포권을 하고 인사를 하였다.
평소 장난기 어린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운을 보는 눈엔 동경심이 가득했다.
그의 눈에 비친 아운은 결코 자신의 동년배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 같은 감정하곤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었다.
아직도 아운이 단 한 주먹으로 모대건과 다른 한 명의 고수를 압도하는
광경이 어른거릴 지경이었다.
“진성현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운은 잠시 진성현을 보았다.
부자 집 도련님치고는 순박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운일세.”
간단하고 아래 사람을 대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아주 잘 어울리는 말투다.
‘명문의 후에다.’
아운의 모습을 보면서 진경화는 아운의 기도가 상당히 귀족적인 부분을
바탕에 두고 있음을 눈치 챘다.
아운의 정체가 더욱 궁금한 순간이었다.
아운이 을목진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인사는 그만하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라니요?”
을목진이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이제 곧 가짜 광풍사의 무리가 다시 올 것입니다.”
“가짜, 광풍사?”
모두 놀라서 아운을 본다.
“지금 설명하긴 어렵지만, 그들은 광풍사가 아닙니다. 단지 광풍사의
흉내를 낸 마적단일 뿐입니다.”
아운의 설명을 듣고서야 을국진 형제는 광풍사의 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빈약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운이 나타나면서 모든 관심이 그에게 쏠리자 묵천악은 그만큼의
상실감을 맛보고 있었다.
바로 아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자신이 있어야만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서 억울했다.
그의 아운에 대한 복수심과 집착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소설아, 아운 아저씨는 보면 볼수록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소산의 말이 들려오면서 묵천악의 가슴을 더욱 쓰리게 한다.
지금은 참아야지 하면서 돌아본 묵천악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억눌러 참았다.
소설은 아운을 보고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모습으로.
‘천한 계집이.’
욕이 나올려다가 참는다.
그는 소설과 소산에게 다가섰다.
다가오는 묵천악을 본 소산의 표정이 굳어지며,
소설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설도 그 힘에 놀라 소산을 보았다가,
그녀의 시선을 타고 묵천악을 보았다.
다가선 묵천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설, 소산, 전에는 내가 좀 심했다. 그때 일은 모두 잊어라! 괜히 다른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서로 좋지 않은 일만 생기게 될 것이다.
아운이 항상 너희 곁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묵천악의 말은 협박이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일을 아운에게 이른다면 각오하란 말이었다.
항상 아운이 지켜주는 것은 아니니, 입을 함부로 놀린 다면 틈을 보아
혼을 내겠단 말이었다.
묵천악이 말을 할 때, 어느새 묵소정과 정운도 다가와 있었다.
그들의 시선 또한 소설과 소산에게 모아져 있다.
소산은 속에서 치미는 화를 참으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소설 또한 묵천악의 협박에 얼굴을 굳혔다.
“그렇게 믿겠다.”
묵소정이 끊어서 말을 하고 내공을 끌어 모아 두 소녀를 노려보았다.
은근히 살기가 들어간 눈초리에 두 소녀는 부르르 몸을 떨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모르는 소녀들이 받아 내기엔 너무 힘든 기세였다.
소설과 소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묵소정과 묵천악은 조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정운의 표정은 더욱 굳어진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운 공자가 과연 남매의 협박을 눈치 채지 못할까? 소설과 소산이
말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 내가 너무 민감한 것 아닌가?’
정운은 스스로를 위로하려 하였다.
하지만 묵소정 남매의 행동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불안하다.
***
우칠은 겨우 정신이 들자 멍한 표정으로 겨우 일어섰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온 몸이 쑤신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여기저기 고랑이 파였던 자국이 손에 만져진다.
참으로 모질고 지독한 계집이었다.
다시 한 번 호연란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생각나자 오한이 이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내가 만난 계집은 분명 여중고금제일고수였을 것이다. 아아! 난 왜
이다지도 재수가 없을까? 하필이면 그런 계집을 건들다니. 내 앞으로
예쁜 계집은 쳐다도 안 보겠다.’
결국 우칠에게 조심해야 할 유형의 인간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인간.
만만하게 보이면서 마른 인간.
예쁘고 코가 약간 함몰한 계집.
우칠은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자리에 일어서려 하였다.
“아이야! 뭐 좀 물어봐도 되겠느냐?”
어떤 할머니의 말 소리였다.
우칠이 돌아 본 곳에는 허리가 꼿꼿하고 나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늙은
듯한 할머니 한 명이 서 있었다.
온 몸이 멍투성이에 너무 맞은 탓인가?
정신도 혼미한 상황에서 다짜고짜 반말에 아이란 말을 듣자 찌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그래도 상대가 나이 많은 할머니라 제법 착하다고 자부하는 천추제일신마
우칠은 차분하게 대답하였다.
“물어 보십시오.”
“여기 근처에서 아주 예쁜 여자와 나이 삼십쯤 되어 보이는 남자를 보지
못했느냐? 옷 차람은…”
할머니의 설명을 듣던 우칠의 눈에 불길이 솟았다.
‘그 계집이다. 그럼 이 늙은 것은?’
우칠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렇지 않아도 분을 풀 곳이 없었던 참이었다.
보아하니 그 계집의 늙은 하녀쯤 되어 보인다.
그 계집에게 당한 분풀이를 이 늙은 여자에게라도 풀어야 속에 맺힌
기분이 풀어 질 것 같았다.
“흐흐, 늙은 할망구야. 넌 그 계집과 무슨 관계냐?”
우칠의 표정과 말투가 갑자기 변하자,
철마녀(鐵魔女) 호연낭의 표정도 변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 덩치 큰 바보의 얼굴엔 호연란의 흔적이 보인다.
얼굴에 난 상처로 보아하니, 호연란의 독문 조법에 당한 것이 분명한
상처였다.
보아하니 상대가 호연란에게 호되게 당한 듯해서 좋게 넘어가려고 했었다.
호연란이 얼마나 독한지 잘 아는 호연낭은 우칠에게 동정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년은 재수가 없다. 그 이린 계집을 대신해서 나한테 뒤지게 맞다가
죽어야 할 운명이니 말이다. 나 천추제일… 으음, 지금은 천추제이신마
우칠은 그 계집을 대신해서 너를 벌해야겠다.”
우칠의 표정이 살벌하게 변하자, 호연낭의 눈이 서늘해졌다.
참아 넘기기엔 너무 험한 말이었다.
멍청한 것은 맞아야 정신이 들게 마련이었다.
철마녀란 별명이 말해 주듯,
그녀의 성격상 지금까지 참은 것도 용한 일이었다.
“이노옴”
호통과 함께 호연낭의 손이 서리가 앉은 것처럼 하얗게 변하였다.
우칠은 호연낭의 고함에 움찔한 표정으로 상대를 보았다가,
섬광처럼 날아오는 하얀 선을 보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우칠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절명했을 것이다.
호연낭은 차가운 시선으로 우칠을 보다가 돌아섰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크으윽”
신음과 함께 우칠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렸다.
“으윽”
가슴이 저려온다.
우칠은 저려오는 가슴 부위를 보았다.
또렷하게 나타난 손자국.
한 동안 멍하니 손자국을 보던 우칠은 하늘을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신이 있다면 어떤 운명을 주려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고금제일을
다투는 고수들이란 말인가?
마지막엔 본 할망구는 고금제일할머니고수가 분명했다.
“휴우.”
한숨을 쉬고 한 동안 고민에 빠진 우칠은 자신의 앞날이 암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중원은 넓고 무림엔 숨은 기인이 지천이라던 스승님의 말씀이 옳구나.
그래 중원을 잠시만 포기하자. 우선 변방의 대사막으로 가서 그 곳을
정복하자! 그 다음엔 무림을. 역시 남자는 드넓은 사막과 같아야 한다.
이 정도로 기가 죽으면 장부가 아니다. 사막으로 가자. 지금부터 나는
대막제일신마 우칠이다.”
의지의 무림인 우칠은, 결국 대사막으로 갈 것을 선포하면서
대막제일신마로 거듭나고 있었다.
몇 번을 호 되게 당해도 기죽지 않는 그의 천부적인 기질은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함이었다.
그 자신도 자기가 죽었다 살아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
***
표국의 표사들이 서둘러 전투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
을국진이 조금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었나 봅니다.”
을국진의 말에 을목진과 진경화 조손도 궁금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분명히 아운과 호연란이나 모대건 사이엔 적지 않은 은원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함부로 물어 보기가 쉽지 않아 참고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무공을 익히기 전에 호연란 이란 계집에게 죄 없이 맞아
죽을 뻔한 적이 있었죠. 그리고 나 이전에 십여 명의 소년들이 무공 수련
상대로 선택되어 죄 없이 죽은 것으로 압니다.”
태연했다.
상대가 무림제일세가가 아니라 어지간한 녹림채라도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태연함속엔 꺾을 수 기개가 묻어 나온다.
아무리 강하고 어려운 상대라도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겠다는 고집과
장부의 힘이 느껴진 것이다.
을목진이나 진경화등은 아운과 호연세가의 은원의 매듭은 쉽게 풀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무공 수련 상대로 선택되어 맞아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알기엔 한계가 있었고,
더 이상 물어보기엔 아운의 표정으로 보아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무공만 전폐하고 호연세가의 많은 고수들을 살려 주신 것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아운은 을목진을 보았다.
“호연세가를 멸문은 시키겠지만, 아무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대항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할 것입니다.”
을목진은 새삼 아운이 무서운 사람임을 실감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부셔 놓았으니, 호연세가의 무사들은 앞으로 아운이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며 두려워 할 것이다. 차라리 죽이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을 보는 세가내의 사람들마다, 권왕에 대한 두려움
을 가슴에 쌓아 갈 테고, 무엇인가 호연세가가 아운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구설수에 오르기 딱 좋은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의도된 일일까?’
을목진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단 몇 마디 말을 해보았지만, 아운의 지혜로움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능히 그런 부분을 의도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모대건의 처참함은 호연세가의 무사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아운은 잠시 하늘을 보았다.
그들의 배후에서 누군가가 머리를 굴리고 있음을 안다.
그는 을목진이 생각한 것 이외에도, 또 다른 것을 노리고 있었다.
‘모두 무공이 전폐되어 갔으니, 여러 가지로 고생 좀 할 것이다. 정파라고
자처하는 호연세가고, 수많은 시선들이 보고 있으니, 그들을 그냥 나 몰라
라 할 수도 없을 테지. 최소한 앞으로 살아갈 수 있게 뒤를 봐줘야 할 것
이다. 그게 좀 많아지면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될 것이고.’
아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살아 돌아간 호연세가의 무사들은 아운과 호연세가의 은원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아운이 모대건과 대화할 때 그들은 전부 기절해 있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큰 부담을 앉고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단지 부담일 뿐.
아직은 관리상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숫자일 테고.
뿐만 아니다.
모대건이 아운의 정체를 말하고 싶어도 상태가 너무 지독해서 말하기
불가능 할 것이다.
그렇다고 살아서 돌아간 호연세가의 무사들 중 그 누구도 아운과 모대건이
하는 말을 들은 자가 없었다.
당시 아운은 그들을 전부 기절시켜 놓았었다.
호연란은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당분간은 그래야 한다.
하지만 권왕이 자신과 호연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르기에 여러 가지로 불안할 것이다.
지은 죄가 만은 집단이니 어디서 잘 못 원한 관계를 만들었는지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수련 상대자였음을 알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칠 년 동안 터득한 아운의 무공이 너무 높았다.
권왕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불안해지리라.
‘계집, 그리고 잔머리 굴리는 놈. 철저하게 말려 죽이리라. 앞으로 약자가
왜 서러운지 알게 되리라!’
아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을목진과 을국진은 그 눈빛을 보곤 더 이상 무엇을 물어보려 하지 못했다.
진성현만이 존경과 동경의 시선으로 아운을 보고 있다.
이제부터 진성현의 우상은 아운이었다.
차후 무림에 권왕을 찬양했던 수많은 후배들 중에 진성현의 이름은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남게 된다.
아운은 소설과 소산에게 다가 왔다.
두 소녀는 애써 속에 남아 있는 감정을 감추고 아운을 본다.
언제나 자신을 아는 척할까?
마음 졸이며 아운을 보고 있었던 소설이었다.
막상 아운이 다가서자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운은 소설과 소산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잔뜩 상기된 두 소녀의 얼굴과 많은 이야기가 담긴 두 눈이 아운을 마주
보다가 부끄러운 듯 숙여진다.
“무사했구나. 소설.”
아운의 말에 소설과 소산은 콧날이 찡한 느낌이었다.
작은 관심이었지만, 아운의 말은 진실이 느껴진다.
묵소정과 묵천악으로부터 받았던 협박의 아픔과 서러움도 한꺼번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예, 아저씨. 저희는 저 할아버지의 덕분으로 무사했습니다.”
소설과 소산이 한 쪽에 서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아운의 시선이 노인을 향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잠시 마주쳤다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아운입니다. 노선배님의 도움 감사합니다.”
노인이 웃었다.
“아닐세. 같은 동료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 한데 광풍사가
가짜임을 어떻게 알았나?”
노인은 이미 광풍사가 가짜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연유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한데 노 선배님은 어찌
아셨습니까?”
“나 역시 연유가 있다네. 그들과는 반드시 풀어야 할 사연도 좀 있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정말 광풍사였다면, 우리는 일각이 되기도
전에 전멸하고 말았을 것이네.”
아운은 잠시 노인을 보다가 말했다.
“강하군요.”
“강하다네. 아주 강한 자들이지.”
아운은 노인이 광풍사를 두려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그들과 어떤 사연이 있으리라.
그러나 묻지 않는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인이 다시 한 번 가볍게 웃었다.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일세.”
“노 선배님이 계신 것만으로 이미 큰 도움입니다.”
아운의 말에 노인이 눈을 빛내며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둘은 상대를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그것은 결코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맹수는 맹수를 알아본다.
‘대사막에서 정말 큰 수확을 거둔 것 같구나.’
노인은 아운을 볼수록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편 노인이라고 부르게나.”
노인이 밝게 웃었다.
묵소정이나 묵천악은 속이 꼬여 온다.
처음부터 소설과 소산을 반기면서 자신들에게는 아는 척도 안한
아운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별 거지같은 노인을 예우하면서 자신들은 다시 뒷전이었다.
완전 개무시 당한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거지꼴에 다리까지 저는 잔심부름꾼 노인에게 대하는 아운의
태도는 정말 존장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했다.
‘개자식, 언제고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주마.’
묵천악은 아래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내 치마폭에 들어온 후에도 나를 무시할 수 있을 지 두고 보자.’
묵소정의 각오는 묵천악과 좀 달랐다.
각자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아운이 그들을 본다.
“무사히 돌아 오셔서 다행입니다. 운 공자.”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 삼귀를 이기진 못합니다. 특히 사협의 우두머리인 모대건을
일 권에 제압할 순 없는 일입니다.”
정운의 말에 아운은 그저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다시 을목진에게 돌아간다.
긴장을 하고 있던 묵천악이나, 가슴 설레이며 아운과 인사를 주고받으려
기다리던 묵소정은 멀뚱해지고 말았다.
정운은 아운의 태도를 보고 무엇인가 느낀 듯 곤혹스런 표정으로 아운의
등을 본다.
***
하남성 태실봉 부근의 무림맹.
수많은 거각들이 줄지어 있는 무림맹의 위용은 태실봉 마저 압도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성처럼 넓은 무림맹 안에는 시장이 서고 객점이 있으며
주점만 해도 십여 개가 넘었다.
담과 담으로 선이 그어진 무림맹의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봉황각은
무림맹의 대총사인 검후 북궁연의 거처였다.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아가씨."
생각에 잠겨 있던 북궁연이 고개를 들고 자신을 부른 소흘을 본다.
"흑룡 조천왕 대주님이 오셨습니다."
북궁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다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연매, 그 동안 잘 있었소. 한동안 얼굴을 못 본 사이에 더욱 아름다워진
것 같아 기분이 좋소."
소홀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한 명의 건장한 청년이
안으로 들어왔다.
흑룡 조천왕.
무림맹주인 조진양의 손자로 유명했고,
그의 오만함은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의 다른 별호는 사자천왕(獅子天王)이었지만,
광장군(狂將軍)이란 별명도 있었다.
무림맹에서 가장 무서운 무력 단체 중 하나인 철혈사자대의 대주이기도
했다.
육 척에 이르는 장신, 떡 벌어진 어깨와 호리호리한 허리.
준수하고 귀공자처럼 생긴 얼굴.
완벽한 배경.
세상의 어떤 여자가 이런 남자를 싫어하랴.
흑의를 걸친 청년의 모습은 마치 금강역사가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보기엔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지만 그의 나이는 벌써 서른넷이었다.
그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북궁연 때문임을 모르는 무림맹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무례하군요. 그리고 함부로 연매라고 부르지 마세요."
쌀쌀하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나 조천왕은 조금도 실망한 모습이 아니었다.
북궁연이 아무리 날개를 퍼덕거려도 자신의 손바닥 안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약혼자가 있다고 하지만, 병약한 학사라고 했다.
그리고 연락이 두절된 것도 십 년이 넘었다고 하니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배경으로 보나 무림의 명성으로 보나 자신 외에는 북궁연의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 명 걸리는 자가 있다면, 와룡 사마무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가 출신인 북궁연이 잔머리나 굴리는 사마무기에게 마음을
주리란 생각은 안했다.
북궁연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언제보아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냉정하고 단아한 얼굴.
나이 서른이 가까워지지만, 아무리 보아도 이십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다시 보면 삼십대의 성숙함을 지니고 있었다.
청초함.
요염함.
그리고 도도한 듯 보이는 위엄까지.
보기에 따라 달라지는 그녀의 매력은 보는 남자로 하여금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천하에 그녀보다 아름답고 기품 있어 보이는 여자가 있을까?
만약 황제가 그녀를 보았다면 백만 대군을 동원해서라도 왕후로
삼았으리라.
"너무 화내지 마시오. 난 단지…"
"됐습니다. 이미 들어오셨으니.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침착하게 말하는 북궁연의 모습은 이미 사무적인 자세였다.
"이거 너무 하는 것 아니요. 난 단지 연매가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요."
"예의가 없군요. 그리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함부로 연매라 하지
마세요. 난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사적인 일이
라면 이만 나가 주십시오."
북궁연의 자세가 강경해졌다.
조천왕의 표정이 잠깐이지만 굳어졌다가 다시 펴졌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리다. 후후, 하지만 이미 집나간 강아지를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마시오. 십 년이면 이미 시체가 썩어 그 흔적조차 없어질
시간이요."
북궁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돌아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완전 무시였다.
조천왕이 눈썹을 꿈틀하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나가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시간이 지나면 최고의 남자를 놓치고 후회할거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조천왕은 북궁연의 등을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의미 모를 미소를 남기며
돌아갔다.
소홀은 그 미소를 보는 순간 갑자기 찬 서리를 맞은 것처럼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의 머리를 스친다.
조천왕은 그렇게 돌아갔지만, 북궁연은 하염없이 창밖을 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대로 굳어서 돌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소홀은 그런 북궁연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고만 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북궁연이 돌아서서 소홀을 바라보았다.
소홀 역시 북궁연을 바라본다.
"어디에 있던, 그 분도 나를 생각은 하고 있을까요?"
북궁연의 물음에 소홀은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북궁연이 소홀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힘들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