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사라신교(沙羅新敎)
- 권력은 부모형제도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아름다웠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잘게 부서지는 햇빛이,
기지개를 켜는 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문득 아직 제대로 얼굴조차 보지 못한 약혼자를 생각해보았다.
이미 약혼자가 집을 나갔고, 나간 이유에 대해서도 들었었다.
너무 황당하기도 했지만, 사내라면 그래도 그 정도 의기는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
이젠 죽었는지 살았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만약 살아 있다면 어디선가 자신의 뜻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 본 얼굴이 가물거린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상대편은 자신의 모습은커녕 어떤 흔적조차 기억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 귀엽고 어린 남자 아이의 모습이 기억 속에 조금씩 형상을 갖추어
간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흐릿하기만 했다.
북궁연이 모습조차 가물가물한 자신의 약혼자 얼굴을 생각하고 있을 때,
한 명의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검을 찬 삼십대 중반의 여자였다.
왼쪽 뺨에 길게 난 칼자국과 유난히 길어 보이는 눈썹이 강렬해 보이는
여자였다.
비록 칼자국이 난 얼굴이었지만 상당히 수려한 미모였다.
북궁연이 돌아서서 방 가운데 있는 탁자에 앉으며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중년의 여자가 읍한 자세로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았다.
“소홀(宵惚), 인사드립니다.”
“인사는 생략하기로 해요. 어떻게 되었나요?”
“우선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사마군사가 쫓는 무리들에게 무엇인가
비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천마인혼대법 때문에 그 뒤를 쫒는다면
호연세가에서 끼어들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르다면 사마 군사
쪽은 죽이려하고, 호연세가 쪽은 사로잡으려는 분위기 같습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삼귀가 묵가장의 남매를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삼귀라는 말에 북궁연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어서 소홀은 비교적 자세하게 아운이 백호단을 만나고,
삼귀와 오절을 피해 도망간 상황을 설명하였다.
소홀의 설명이 끝난 후, 북궁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절이나 삼귀는 사마 군사가 움직인 무리들이겠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삼귀라면, 천마인혼대법 때문에
따로 움직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천마 인혼대법 때문 일수도 있군요. 단지 호연세가에서
왜 이 일에 끼어들었는지 그것이 문제군요. 어떤 가능성도 함부로 배제
하진 마세요.”
“예, 아가씨.”
“지금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세요. 천마인혼대법을 익힌 자라면 결코 살려
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더라도 일단은 그냥 관망만 하기로
해요.”
“하지만 아가씨, 정말 천마 인혼 대법이라면 때가 되어 각성을 할 때
까진 정말 익히고 있는지 없는지 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는
배우고 있는 자신조차 모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각성을 하게
된다면 오절이나 삼귀나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두 남매의 나이를 보았을 때, 각성할 시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일단 와룡 사마 군사가 맡고 있으니, 나름대로 방법을 준비해
놓았을 것입니다.”
소홀도 사마무기라면 어떤 방도를 준비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호연세가는 왜 이 일에 끼어들었을까요? 더군다나 묵가 남매를
생포하려고 하는 이유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림맹의 패권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무림의 금기마공인 천마인혼대법 때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점 때문에 이 일을 주시하는 중이랍니다. 그 문제는 조금 더
지켜보면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북궁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홀은 그녀의 사색을 방해하려들지 않았다.
한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북궁연이 소홀을 보면서 물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부탁했던 것은 알아보았나요.”
“알아보았습니다만, 도저히 종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갑자기 지워진 것 같습니다.”
북궁연의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소홀은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죽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북궁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대답하였다.
벌써 칠 년 째였다.
집을 나간 약혼자를 찾으려고 북궁세가의 기밀 조식을 모두 동원해서
강호전역을 안 뒤진 곳이 없었지만, 아직도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영운이 집을 나가고 한참 후에야 알았기에,
그의 흔적을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을 기다린 것이 벌써 몇 년인가?
북궁연의 하영운에 대한 감정은 극히 미묘했다.
어차피 검과 함께 살아가기로 한 몸이었기에,
남자의 필요성을 느끼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은 외롭다.
그럴 때면 얼굴조차 제대로 모르는 자신의 약혼자가 생각나곤 하였다.
이미 강호에서 최고의 기재들이라는 삼룡 중 이룡이 북궁연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녀 역시 이룡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순 없었다.
만약에 하영운이 죽었다는 사실이라도 확인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떤 것도 확인된 사실이 없었다.
소홀은 북궁연을 보면서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왜 그녀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전해야 하는 다른 소식이 북궁연에게 위안이 될지 아니면
상처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북경에서 소식이 왔었습니다.”
소홀의 말에 북궁연이 고개를 들었다.
“만약, 내년 아가씨의 생일이 되기까지 하영운 공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모든 결정은 아가씨의 뜻대로 하여도 하씨 문중은 그것을 따르겠답니다.
파혼을 하여도 그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전갈입니다.”
북궁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홀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아버님이나 할아버지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역시 아가씨의 말에 따르겠다고 합니다.”
북궁연은 잠깐 생각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천천히 말했다.
“알았어요. 내년 중추절이면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지금부터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겠군요.”
어떻게 들으면 남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좋은 결정을 내리시라 믿겠습니다. 흑룡과 와룡은 능히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기재들입니다.”
북궁연은 살짝 미소를 담고 소홀을 보았다.
소홀은 그 웃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마치 세상이 확 밝아지는 듯한 웃음이었다.
북매(北梅), 남란(南蘭)이라 해서 천중쌍화라 하였다.
남란 호연란도 역시 무림맹에 있어 북궁연과 함께 그 미모를 다투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중 제일은 북매라고 하였다.
차가운 매화의 미소.
소홀은 천하의 지자이자 용자라는 이룡이 북궁연 앞에서 절절 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운이란 살수가 정말 대단하군요. 삼귀와 오절, 그리고 백호단의 공격을
피해 사라지다니.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무공이라면 강호 명문의 최고 기재
들이라는 십영에 뒤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슬며시 말을 돌리는 북궁연이었다.
소홀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성격도 무공도 상당히 특이한 자입니다. 어떤 문파에서 그런 인재를
길렀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이십대 중반이라고 합니다.
하영운 공자님과 나이가 비슷하네요.”
북궁연이 소홀을 보았다.
북궁연도 소홀도 그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아운이 가출한 나이를 생각한다면,
이미 상승의 무공을 익히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
그 나이에 나가서 무공을 배웠다고 해도, 아무리 명사를 만나,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 아운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또 있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문사 출신이 그 혹독한 수련 과정을 견딘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아운이 발끈해서 집을 나갔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명문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흔적이 아운의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아운을 분석해보면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운은 알까?
자신의 이름이 어떤 방식이던 약혼녀의 기억 속에 조금은 흔적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
두 달이 지났다.
삼월에 호남성을 출발해서 험난한 길을 통과한 후 사천성을 거쳐 감숙에
들어선 것은 오월 중순이 지나서였다.
그 동안 묵소정과 묵천악은 손수 먹거리를 준비하고 요리를 해야 했으며,
노숙을 할 땐 땔감도 준비를 해야만 했다.
물론 그런 일들은 소설, 소산과 번갈아 가면서 하였지만,
시녀였던 그녀들과 묵가 남매가 같을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손에 물을 뭍혀 본적이 없는 묵소정이었고,
한 번도 힘들여 일을 해 본적이 없는 묵천악이었다.
가졌다가 잃어버리면 그 박탈감은 더욱 크게 마련이었지만,
묵소정이나 묵천악은 감히 싫다는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묵천악은 아운에게 다시 밟히고 싶지 않았고,
묵소정은 아운의 차가운 눈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주먹질은 안 한다고 했으니 이번엔 몽둥이로 팰지,
아니면 검으로 두 동강을 낼 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정운이 두 남매를 곁에서 도왔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소설과 소산도 어떻게 하던 묵소정을 도우려 하였지만,
아운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로 일을 정확하게 분배하였고, 그 분배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제법 정확하고 공정한 분배에서 물론 아운은 빠졌다.
그렇다고 당신은 왜 빠지는 거냐고 따질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아운은 두 달 내내 시간만 나면 운공을 했고,
걸으면서도 명상 속에 잠겨 있었다.
또한 잠시라도 쉬는 틈만 나면 손과 발을 움직여 무공을 수련하였다.
그의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은 잠시라도 쉬는 시간이면 거의 전부를
이용하고 있었다.
잠은 운기조식으로 두 시진 정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내내 수련에 수련을 더 하고 있었다.
시간이 예정보다 많이 걸린 것은 소설과 소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운이 무공을 수련하느라 지체하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떤 날은 무공 수련에 시간을 잊고, 이틀씩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적도 있었다.
당연히 그걸 따질 만큼 배포 큰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움직일 때는 철저하게 산길을 따라 움직이고 약 두 시진 정도는
신법을 발휘하여 움직였다.
그럴 때면 소설은 아운이, 소산은 정운이 책임을 진다.
정운이 본 아운의 수련 방법은 아주 독특했다.
반드시 일보를 움직이면서 같이 주먹질을 한다.
발을 내밀거나 발을 뒤로 빼면서 같이 주먹질을 하는 형식이었다.
일 보, 일 권.
처음 한 달 동안은 그랬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일 보에 이 권, 삼 권을 연이어 휘두르고 있었다.
수련과정에서 보여주는 아운의 동작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움직임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웠으며,
주먹 하나하나에 힘이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에는 무엇인가 어색해서 걸음과 주먹이 나가고 들어오는 과정이 서로
어긋나는 느낌이었지만, 그런 단점들은 불과 며칠 만에 사라지고 없어졌다.
‘무서운 속도로 초식이 정교해지고 있다. 최소의 내공만 가지고 초식을
배합하는 것 같은데, 서로 빠르게 융합하고 있다. 대체 어떤 무공들일까?’
정운의 의문은 끝이 없었지만,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아운이 무공을 연습하는 모습은 고승이 불경에 심취해 있는 모습과
비슷했다.
방해하면 그 숭고함과 정갈함이 깨질 것 같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운은 자신의 수련 과정을 다른 사람이 보던 말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승 무공이란 것이, 내기의 운용 방법과 움직임의 유기적인 관계를
모른다면 어차피 쓸모없는 것이라지만, 보통 무인들이 자신의 수련 과정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특히 운기조식의 경우는 인적이 없는 곳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만약 운기 중에 누군가가 공격한다면 그것은 정말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운은 이미 그 경지마저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묵가 남매나 정운은 그것을 감히 의심하지 못했다.
단순 무식해 보이는 아운이 얼마나 약고 머리 좋은 인간인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운은 자신의 무공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단룡수와 금강신권,
그리고 선풍팔비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아운이 검토한 결과로는, 이 세 가지 무공에 칠보둔형신기와 불괴수라기공
만 완벽해도 일대일로는 강호에서 능히 대적 할 자가 없을 정도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완벽하게 터득했다고 여긴 무공들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실전에 사용해보고,
다시 찬찬히 검토 해 본 결과는 전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언급한 무공들을 일정 이상 터득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쇠로 검을 만들어서 완성 되었다고 다가 아니었다.
그것을 어떻게 쓰고, 어떤 형식으로 사용할지 모른다면 그 효과는 얼마나
될까?
지금의 아운이 그랬다.
검을 만드는 것까지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냥 만들어진 검을 휘두르는 것이 전부였다.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검.
아운은 이 모든 무공을 뿌리만 제대로 터득했을 뿐,
실제로 응용과 실전이라고 할 수 있는 줄기와 가지 부분은 거의 백지
였음을 깨우쳤다.
‘응용과 초식과 초식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재정리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운은 그 동안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수련하였다.
아운이 배운 무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무공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부가 셋이니 그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다 보니 세 가지의 무공이 서로 얽혀 실전에서 서로 융합하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아운은 그 무공들을 거의 함께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결국 양날의 검과 같은 육삼쾌의연격포에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었고,
그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결과로 돌아오곤 하였다.
아운은 세 명의 사부에게 배운 무공들을 서로 융합하는 데 힘을 기울이면서
스스로 부족했던 기초무공을 완벽하게 다지는 성과도 함께 거두었다.
처음에 시작한 것은 칠보둔형보법에 단룡수와 금강신권을 배합하는
일이었다.
일단 이 세 가지 무공의 배합은 그 중에서도 가장 쉬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쉽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룡수와 금강권이 구전 무적권문의 절기였고,
칠보둔형보법도 현재는 무극진기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었다.
우선은 보법 일보에 주먹 일 권을 섞는 것부터 시작을 하였다.
극히 미세한 내공만을 사용한 초식의 전개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들렸지만, 어떤 경기도 뿜어지지 않았다.
일단 초식을 펼쳐 수련을 하고 거기서 깨우치고 의문 나는 점들은 길을
갈 때 명상 속에서 정리를 하였다.
비록 단 두 달에 불과 했지만, 그 동안 아운이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았다.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아운의 초식들은 서로 절묘하게 배합
되고 있었다.
이 개월이 지나고 나자 칠보둔형과 단룡수 그리고 금강신권은 이미 서로
하나의 절기처럼 배합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아운은 금강신권의 초식들이 조금 둔탁한 느낌을 받고,
거기에 단룡수의 날카롭고 유연함과 연격포의 빠르기를 배합하여 다시
다듬는데 성공하였다.
금강신권 자체가 무적권문의 절기로,
연격포를 어느 정도 참조한 무공이었기에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운은 새롭게 다듬은 금강신권을 연환금강룡(連環金剛龍)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연환금강룡이 연환육영뢰와 단룡수의 많은 부분을 참조하였기에
새로 만든 초식에서도 연환이란 이름과 용이란 말을 넣어준 것이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강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질 것이다.
일단 일 단계가 성공을 거두자 아운은 그 이후부터 삼살수라마정과
선풍팔비각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감숙성에 들어섰다.
일단 목표했던 지역에 들어서자, 아운은 이제 하나씩 정리를 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상기하였다.
모두 노숙을 준비할 때 아운이 정운에게 다가섰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날 따라 오시오.”
정운은 아운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묻지 않은 것은 먼저 말해주길 기다렸기 때문이리라.
묵가장의 남매와 소설, 소산은 두 사람을 보면서 궁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노숙하려고 하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아운과 정운이 나란히
앉았다.
“지금까지는 무사히 왔습니다.”
“운 공자님 덕분입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은밀하게 움직이긴 했지만, 그들의 포위망이 생각했던 것보다 느슨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들이 우리가 갈 곳을 이미 짐작하고 있고,
감숙성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 내 생각입니다.”
정운은 새삼스런 표정으로 아운을 돌아보았다.
정운이 생각하기에도 아운의 짐작이 맞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짐작대로, 아니 정말로 믿기 싫었지만 묵가장의 멸망과
묵가 남매의 생명을 노리는 곳은.
정운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만이 묵가 남매와 자신이 어디로 갈지
짐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우치곤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정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짐작하기에 지금 묵가장이 멸망한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쪽 뿐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묵가장이 천마인혼대법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진 마십시오. 최소한 나는 알아야 대처 할 수
있습니다.”
정운은 가볍게 한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나의 짐작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모르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 운 공자의 짐작이 맞을지도 모르니,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는
짐작을 말하겠소.”
“말해 보십시오. 대체 피해자인 저 남매조차 모르고 알아서도 안 될 것
같은 비밀이 무엇입니까?”
정운은 다시 아운을 보며 대답하였다.
“두 남매도 결국 알아야 할 비밀이니, 더 이상 숨겨서 무엇하겠소. 단지
두 남매가 충격을 받을까봐 말하지 못하고 기회를 보고 있던 참이요.”
“흠, 결국 무엇인가 있긴 있었군요. 일단 천마인혼대법을 정말 가지고
있습니까?”
“운 공자, 내가 내 명예를 걸고 말하겠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소.
저 두 남매는 내가 어려서부터 돌보아 왔기에 그것은 장담할 수 있소.
알고 있겠지만, 천마인혼대법을 익히려면 십 세 이전부터 시작해야만
가능한 일이오. 그런데 묵가장의 인물이라고 해봐야 나와 저 두 남매,
그리고 두 남매의 엄마인 묵희영님 뿐이었소.”
“묵희영. 묵씨?”
“남매가 엄마의 성을 따른 이유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하겠소. 사실
두 남매는 엄마의 성을 조씨로 알고 있었으니.”
“결국 천마 인혼대법은 없었군요. 그런데 그런 소문을 굳이 낸 이유가
뭘까?”
아운이 혼자말로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운도 그 점은 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제 말해보십시오. 대체 묵가장을 노릴 만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확실하게 내 짐작이 맞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소. 아니 절대 아니라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오.”
“말해 보십시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오절과 삼귀마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배후 세력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정운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하였다.
“휴… 우리를 공격한 무리의 배후는… 내가 생각하기에 무림맹일 가능성이
크오.”
아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의외로 놀란 것 같지 않았다.
정운은 다시 아운을 본다.
최소한 어떤 반응이라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운은 무덤덤했다.
“생각보다 강한 적이군. 하지만 그도 좋지.”
정운은 아운의 말에 꿀꺽 하고 마른 침을 삼켰다.
처음엔 혹시 무림맹의 이름을 들먹임과 동시에 무서워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아운의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최소한 도망하거나 이미 약속한 일을 이행하지 않을 사람 같진 않았기에,
솔직하게 말을 하였다.
그래도 아운의 담담함이나 별거 아니라는 저 말투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대할 때는 묵가장의 남매를 대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공손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 아직 그것을 느끼지 못했었다.
정운은 그 점을 생각하자, 아운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다.
어떻게 보면 하오잡배 같기도 하고,
지금 말투를 보면 명문세가의 냄새가 난다.
단순 무식한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그의 영리함은 나름대로 뛰어난 제지를
자랑하던 묵소정이나 묵천악을 완전히 가려 버릴 정도였다.
비록 주먹을 앞세우긴 했지만, 그 안에 숨은 아운의 영악함을 놓칠 정도로
정운은 미련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에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인간 같은데,
어떻게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소설과의 작은 약속을 꼭 지키려 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의외로 잔정이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덤덤한 아운의 얼굴을 보면서 정운은 강조하듯이 말했다.
“무림맹은 강자입니다.”
“그렇겠죠.”
“걱정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삼귀를 움직일 정도면 누구라도 벅찬 상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왕 벅찬 상대라면 무림 최강의 단체인 무림맹이라면 더욱 좋죠.”
정운이 납득할 수 없다는 눈으로 아운을 본다.
아운이 정운의 시선에 가득한 의문을 읽고 웃으며 대답하였다.
“만약 구파일 방 중 하나이거나, 오대세가 중 하나라도 어차피 벅찬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청부를 이행하다 죽더라도 언가와 싸우다 죽었다고 소문
나는 것 보다, 이왕이면 무림맹과 싸우다 죽었다는 표현이 뭔가 더 힘
있고 값 있어 보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길거리에서 날건달과 싸우다 죽는
것보다 무림맹주와 맞짱 뜨다 죽었다면 그건 상당히 멋진 일이죠.”
아운의 말에 정운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용기가 났다.
표현이 좀 잡스런 면도 있지만 듣고 보니 그랬다.
어차피 오대세가의 한 곳이거나 구파 일방 중 한 곳이라도 벅차긴
마찬가지였다.
이왕 싸우다 죽는 것 좀 더 강한 곳이랑.
아운의 말에 전염되어 한 참 웅심을 키우던 정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왠지 아운의 말투나 그의 기세에 자신이 말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아하니 무림맹 전체가 아니라, 그 중 일부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일을 진행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정운은 아운이 태연한 이유 중에 하나가 그것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체를 숨기고 움직여야 하는 상대라면,
그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고,
아운은 그것 때문에 태연했으리라 짐작했다.
그 진실은 아운만이 알 수 있으리라.
“저 두 남매는 신수(神手) 조진양(趙振揚)의 친아들과 친딸입니다.”
“조진양?”
아운도 이번만은 상당히 뜻밖이란 표정으로 정운을 보며 다시 물었다.
조진양은 현 무림맹의 맹주 이름이었다.
혈궁의 절대자인 사혼마자(死魂魔子) 초비향(初飛向)과 함께 절대 쌍절의
일인이자, 사십여 년 전 혈궁대전과 함께 무림맹의 맹주가 되어 현재
사십 년 동안 중원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하는 인물이 아닌가?
그런 무림맹주의 아들과 딸이라고 했다.
“그렇소. 조진양의 아들과 딸, 정확하게 말한다면, 현 무림맹의 부맹주인
신창(神槍) 조원의(趙願意)의 배다른 동생이오.”
아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뭔지 몰라도 그 이면에 숨은 사연이 복잡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대체 조진양의 나이가 몇인데 이제 약관의 아들과 딸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능력 있는 남자가 어린 여자들을 첩으로 맞아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일이
없는 시대였다.
“아들과 딸이라면, 그럼 무림맹에서 맹주의 아들과 딸을 노리는 무리가
누구입니까?”
“제발 나도 아니길 바라고 있지만.”
정운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린다.
아운이 정운을 뚫어지고 바라본다.
“맹주일 것 같습니다.”
아운은 다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정운을 보았다.
그의 표정은 대체 왜? 라고 묻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딸과 아들을 죽이려 한단 말인가?
아운의 의문은 당연했다.
“운 공자, 사라신교(沙羅新敎)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정운이 말이 갑자기 공손해졌다.
물론 그 동안 아운에게 말을 높여 부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좀 더 정중해졌다.
“사라의 난이라던 이십여 년 전 그 사라신교를 말하는 것이라면 나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사라신교의 뿌리는 오백 년이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일종의 종교
단체였습니다. 사라신교에선 교주가 바로 신입니다.”
아운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사라신교라면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사라신교의 제일대 교주는 모산파의 수제자인 묘일해였다.
자파 최고의 기재였던 묘일해는 모산파의 모든 희망을 한 몸에 짊어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뭐든지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하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떠받들어 지다보니 스스로 광오함이 지나쳐졌고,
결국 스스로를 신격화하면서 모산파에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찰이 심각해
졌다.
특히 언제부터인가 여자를 밝히기 시작했으며,
그의 행실은 알게 모르게 제자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그에게 대 놓고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뭐라고 하기엔 증거가 없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친 그의 오만함을 보다 못한 모산파 장로 중 한 명이
심하게 꾸지람을 하였고, 그것을 참지 못한 묘일해는 일장에 자신의
사숙을 쳐 죽이고 말았다.
묘일해는 사숙이 죽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황이 어렵게 되자 묘일해는 자신의 사부마저 죽이고 모산파의 비급을
훔쳐 도망치고 말았다.
그 이후 모산파는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고,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묘일해가 모산파에서 도망친 십 년 후,
강호에 사라신교라는 종교 단체가 생겼다.
사라신교에 가입한 인물들은 모든 재산을 사라신교에 기부해야만 했고,
모든 여자는 교주가 원할 때 그와 동침해야만 했다.
아울러 교단을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엔 그 가족 전체가 몰살당해야만
했다.
그런 사라신교의 교칙에도 불구하고 모산파의 섭혼술과 묘일해의 절대적인
무공에 심취한 교의 인원은 갈수록 그 수가 불어갔다.
드디어 교도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고, 그 피해의 정도가 심해지자,
결국 강호의 무림문파들이 연합세력을 형성해서 사라신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무려 삼 년에 걸친 토벌작전 끝에 사라신교는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끝끝내 묘일해의 시체는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백 년이 지나 이십년 전 이 사라신교가 다시 부활한 적이
있었다.
무림사에 다시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강성한 무림맹에서도 무려 이 년에
걸친 싸움 끝에 그들의 세력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다.
당시는 혈궁 대전 이후 가장 거대한 무림의 혼란기였었고,
당시의 사건을 혈궁대전에 빗대어 사라대전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 전쟁으로 인해 무림맹주인 조진양의 이름이 더욱 빛을 발하기도
하였었다.
“사라신교의 교주가 묵씨입니다.”
“…”
아운은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라신교의 현 교주가 묵소정 남매의 외증조부입니다.”
아운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까 지금 묵소정은 사라신교 교주의 손녀딸과 무림맹 맹주인
조진양의 사이에 난 딸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원래 사라신교의 교주는
묘씨가 아닙니까?”
“묘씨가 사라신교의 교주가 된 것은 처음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은 묘일해의 제자인 묵천화였고, 지금 교주는 바로 묵천화의
후손입니다. 오백 년 전 사라신교는 중원에서 쫓겨나 감숙의 돈황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자신들의 터전을 만들었고, 무려 오백 년
간이나 숨 죽여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내부에서 힘을 길러 왔죠. 하지만
숨어서 힘을 기른다는 것은 그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고, 그들에게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조금씩 모아진 힘은
드디어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십 년 전 그들의 힘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 였었습니다. 그러나 중원 무림 역시
무림맹이라는 강력한 단체가 있어서 중원을 도모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죠. 이때 사라신교의 중심은 두 개의 세력으로 갈려 극심하게
대치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아직 중원을 도모하기에는 힘이 모자
란다는 보수세력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급진세력이 이들이었는데,
소교주인 묵소방을 중심으로 한 급진세력이 압도적으로 강성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인해 사라신교는 일제히 중원에 진출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백 년 전 보다 더욱 지독하고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중원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모산파로부터 갈라져 나온 섭혼술
과 고독을 이용한 방법으로, 중원 진출 단 일 년만에 무려 백만에 이르는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무림맹의 총 공격이
시작되었죠.”
정운은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이 생각나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당시 이십대의 나이였던 정운 역시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무림맹의 힘은 무서웠습니다. 특히 맹주인 조진양과 신주오기의 힘은
사라신교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얼마 안가서
사라신교는 지리멸멸하고 말았습니다. 일부 지하로 숨어든 사라신교의
교도들이 끝까지 대항하였지만, 결국 이년 만에 중원의 사라신교는
뿌리채 뽑히고 말았죠.”
정운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라신교가 마지막 반항을 하다 결국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다시
돈황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숨어 있던 묵소방의
거처로 맹주인 조진양이 쳐들어 왔습니다. 조진양과 그의 수하들은 닥치는
대로 사라신교의 무리들을 척살하였고, 여자들은 유린당했습니다. 전쟁이란,
이미 상대의 피를 손에 묻히는 순간 정파니 사파니 하는 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짐승의 본능과 약자의 철저한 파괴뿐이란 것은 잘 알리라 생각
합니다. 그 와중에 조진양은 사라신교의 소교주인 묵소방을 죽이고, 그녀의
딸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죠. 조진양은 그 자리에서 묵희영님을 유린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모습을 본 수하들의 목숨까지 전부 취하고 말았죠.”
아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어차피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 속에서 무엇이든 정상이겠는가?
하지만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의 맹주가 무려 백여 살이나 차이나는
적장의 딸을 유린하고, 그 치부를 본의 아니게 본 자신의 수하까지 전부
죽였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물론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한 짐승인지 아운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정운의 말을 믿을 수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신중하게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한쪽의 말만 믿고 모든 것을 다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믿어 주겠습니다.”
아운의 말에 정운 역시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 공자가 믿던 말던 그건 상관없습니다. 난 단지 내가 호위무사로서
보호하고 있던 묵희영님에게 들은 이야기이고, 좀 더 확실한 것은 나를
여기로 파견해서 묵희영님을 보호하게 한 것이 무림맹의 부맹주인 신창
조원의라는 사실입니다.”
아운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했다.
“보호가 아니고 감시였겠군.”
“맞소.”
“무림 맹주인 조진양은 묵소방의 딸을 겁탈 한 후 어떻게 하였습니까?”
“묵희영님은 아름다웠소. 또한 교에서 배운 방중술은 능히 조진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조진양은 여기에 묵가장을 세우고
묵희영님을 사실상 가두어 놓았습니다. 묵가장을 지키던 호위무사들은
전부 무림맹에서 보내 준 사실상 감시병이었고, 조진양은 가끔 그녀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십년 전부터는 완전히 발길을 끊었습니다. 남의
이목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랑했었군요.”
아운의 말에 정운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운 공자, 무슨 말이요.”
아운이 정운을 돌아보았다.
“보호해하고 감시해야 할 두 남매의 엄마를 당신은 사랑했던 것이
아닙니까? 내가 보기에 짝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묵희영은 당신을 믿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정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 몇 마디 말로 아운이 거기까지 유추해낼 줄 몰랐던 것이다.
“그렇소. 난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의 유언대로 두 남매를 돈황에 있는
사라신교로 데려가려는 것이오. 그 동안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번 일이 기회가 되고 말았소.”
정운이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의지가 깃든 말이었다.
아운은 일단 정운의 심정은 이해가 갔다.
“맹주는 정운님과 묵희영과의 사이를 눈치 채고 있었군요.”
정운이 놀라서 아운을 보았다.
“그럴 리가?”
“그렇지 않다면 묵가장을 공격하면서 왜 자신의 수하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았을까요?”
정운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무림맹 소속이었다.
이번 일의 배후에 맹주가 있었다면 자신에게 어떤 명령이던 내렸을 것
같았다.
“정운님과 묵희영의 관계를 눈치 챘던지, 아니면 당신이 어느 정도 비밀을
알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당신마저 죽이려 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정운은 아운의 말이 옳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담담했다.
어쩌면 스스로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맹주가 왜 자신의 사생아들인 두 남매를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까?”
아운의 물음에 정운은 잠시 호흡을 조절하고 난 후 대답하였다.
“운 공자, 무림맹이 새워지고 사십 년이 흘렀습니다. 지겹도록 맹주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좋지만,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사십 년간 남의 밑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무림맹의 맹주 자리라면 누구나 한 번은 앉아 보고
싶은 욕망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결국 맹주의 자리를 노리는 반대 세력이 어떤 이유로 두 남매의 존재를
눈치 챘고, 그 눈치 챈 세력이 바로 두 남매를 납치하려던 양묘의가 속한
무리겠군요. 무림의 공적인, 사라신교의 적통인 여자를 납치 강간하고,
그것도 모자라 두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것만 증명하면 조진양은 도의적
으로 맹주의 자리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설명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천마인혼대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 남매를 생포하려고 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특히 양묘의 정도가 부단주로 속해 있는 무리라면 강호의 명가가 분명할
것이다.
정운은 그들이 남매를 노리는 이유를 추측할 때,
한 가지 이유뿐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알게 된 맹주가 자신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 남매를 죽이려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묵희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권력이란 것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고 했다.
무림맹주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생아인 아들과 딸을 죽이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묵희영과 두 남매는 정파 무림맹의 맹주인 조진양에게 있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주화입마의 근원인 셈이었다.
사라신교가 중원에 들어와서 한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도려내려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