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용봉출현(龍鳳出現)
- 용봉이 그 재지를 겨루기 시작하고,
사마무기는 귀문을 열었다.
묵소정이 필요한 것을 챙겨 별채를 떠날 때까지 오요홍은 그저 멍
하니 보고만 있었다.
운기조식에 들어간 형가를 죽이지 않고 떠나는 것만으로도 일단 고마울
지경이었다.
정운이나 묵가장의 남매로선 더 이상 오절과 원한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고,
다른 침입자가 오기전에 빨리 떠나고 싶었다.
아운이 형가를 죽이고 오요홍을 제거하려면,
그가 펼칠 수 있는 마지막 일곱 번째 주먹을 써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는 꼴이 된다.
앞으로 험난한 길을 가려면 자기 자신을 조금은 숨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보다도 일곱 번째 주먹을 쓴 후에 또 다른 강적이 나타나면
어쩔 것인가?
아운으로서는 힘을 아껴 둘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공 특성을 이해 못하는 묵가장의 남매나 오요홍, 정운은 아운이
생각보다 독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가지게 하였다.
***
“실패라고.”
사마무기(司馬武基)의 인상이 굳어졌다.
설마 실패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묵가장, 두 남매의 무공수준과 그들의 호위무사인 칠살무정검(七殺無情劍)
정운(鄭雲)의 무공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마무기였다.
묵가장의 호위무사들이라야 자신이 뽑아 보낸 무사들 아닌가?
한데 실패 했단다.
오절의 두 명과 낭인촌의 최고 살수들까지 고용하였고,
혹시나 해서 세 명의 고수들을 돈 주고 사서 딸려 보냈다.
혹시 눈치 챌까 두려워서 연고가 없는 고수들을 뽑아 쓰긴 했다지만,
그들의 무공 실력은 모두가 일류였다.
이름만 대면 그 지역에서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한데, 실패했단다.
‘뭐가 잘못되었을까?’
무림맹의 군사인 와룡(臥龍) 사마무기(司馬武基)의 이름에 처음으로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자부심에 작은 생체기를 낸 일이지만,
와룡은 오히려 그 점이 더욱 흥미로웠다.
그는 자신의 수하들이 보내 온 서류들을 찬찬히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이제 이십대 중반의 어이없는 살수 때문이란 사실도
알았다.
“혼자서 두 명을 죽이고 두 명을 완전히 무력화 시키다니. 더군다나 형가를
맨 주먹으로 이겼다. 쓸수록 강해지는 주먹이라니, 이런 무공도 있었던가?
설마 삼백 년 전의 전설인 칠초무적자라도 환생한 것인가? 휴우, 내가 생각
해도 이건 말이 안 되지.”
사마무기가 고개를 흔들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북궁연(北宮娟) 총사님이 오셨습니다.”
시녀의 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민에 잠겨 있던 사마무기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서 뫼시어라!”
사마무기의 명령이 떨어지고,
잠시 후 한 명의 여인이 사마무기의 거처로 들어섰다.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동여매고 허리에 검을 찼다.
가느다란 허리가 그 검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후리후리한 키와 늘씬한 체격,
체격에 비해서 도드라져 보이는 가슴 선을 지녔다.
그리고 조금 눈을 들어 보면,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의 얼굴.
절세미녀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한 여름, 나무 밑을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이 형체를 지녔다면,
지금 북궁연과 같은 모습일까?
오대세가 중에 수위를 다투는 북궁세가의 장녀이자,
검후(劍后)란 호칭만으로도 무인들에게 우상이 되어버린 그녀는,
바로 북경 하씨 세가의 며느리로 태중 혼약한 상태이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요. 북궁 총사님.”
북궁연의 서늘한 눈이 사마무기를 본다.
맑은 눈동자는 흑백이 뚜렷하고 지혜로워 보였다.
사마무기는 북궁연의 모습 중에서 지금처럼 고요한 눈동자가 가장 보기
좋았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리 봐도 싫증 날 것 같지 않았다.
“일이 실패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사마무기가 가볍게 웃었다.
“일단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마 군사님이 실패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하하, 나도 인간입니다. 이번일은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습니다.”
“변수요?”
“낭인촌의 살수 한 명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반기요?”
“보고서에 따르면, 이 쪽에서 청부를 하기 전에 이미 먼저 청부를 받았다고
합니다.”
북궁연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마무기를 보았다.
“아마도 우리가 흘린 소문 때문에 따로 보표를 구하려 했었나봅니다. 그때
묵소정의 시녀 하나가 차후 자신의 주인을 지켜 달라고 청부를 하였다
합니다. 살인을 하러 가고 보니, 자신에게 청부한 시녀가 그 자리에 있었고,
선 청부의 법칙에 따라 묵가장의 남매와 그 시녀를 지켰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영웅 소설을 듣는 기분입니다.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보낸
고수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아주 많이 강한자였다고 합니다.”
“묵가장의 시녀는 아주 부자인가 봅니다. 그 정도의 보표를 살 수
있었다뇨.”
북궁연의 말을 들은 사마무기의 표정이 조금 묘하게 변하였다.
“허허 그게…”
북궁연이 사마무기를 바라본다.
사마무기는 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먹밥 한 개였다고 합니다.”
“주먹밥 한개요.?”
“그렇다고 합니다. 오절 중 한 명인 오요홍이 그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
니까 분명히 사실일 것입니다.”
“주먹밥 한 개에 목숨을 걸다니, 정말 그 기개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북궁연은 좀 뜻 박이라는 표정이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그 어려운 일을 맡은 청부금이 주먹밥 하나라니.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사마무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운 고수들이 주먹밥 하나 때문에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도 작은 약속이지만, 그것을 지켰다니 무사다운 배짱과 기개는 있는
인물이군요.”
“그래서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북궁연이 사마무기를 본다.
사마무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았다.
고개를 슬쩍 틀면서 말했다.
“이 일에 관련된 자는 모두 죽어야 합니다.”
북궁연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묵가장의 남매를 왜 죽여야만 하는지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니 북궁 총사께서는 그냥 모르는
척 해 주십시오. 이번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이미 늦은 상황
이라 그들은 꼭 죽여야만 합니다.”
북궁연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방법이 없었다.
또한 사마무기가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북궁연이 알고 있는 상황만 하더라도 두 남매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그럼 난 이만.”
북궁연이 갑자기 돌아가려 하자 사마무기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벌써 가십니까? 내게 마침 좋은 차가 있습니다. 차나 한잔 하시고 가면
어떻습니까?”
“지나던 차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하던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합니다.”
북궁연의 말에 사마무기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차후에 차한잔 하시러 오십시요.”
북궁연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웃는 모습은 가을 하늘을 닮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사마무기의 얼굴에 아쉬움이 여운으로 남는다.
북궁연이 자신의 거처에서 나가고 나자, 사마무기는 천천히 일어섰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완전히 마무리를 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잠시 후, 부림맹의 비밀 거처.
“군사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어떻게 하던지 살려 둘 수는 없습니다. 호연란과 구파 일방이 움직이기
전에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묵직한 남자의 물음에 사마무기가 대답하였다.
“휴, 사마군사에게는 너무 거추장스러운 일을 맡기게 되었네.”
“세상을 살다 보면 항상 예기치 않은 일은 있게 마련입니다. 한 명의
남자로서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고맙네. 한데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아무래도 귀문(鬼門)을 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육 척의 키에 당당한 체격의 남자는 사마무기를 본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림맹의 인물들 보다는 그들이 낳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일이 끝 난 후, 폐기 처분해도 문제가 없을 테고요.”
“상대가 귀문을 열어야 할 정도로 강한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확실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영호세가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구파 일방도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젠 시간을 끌 여유도 없습니다.”
“누구를 쓸 참인가?”
“오절을 전부 동원하고, 삼귀를 쓸까 합니다.”
“삼귀?”
사내는 좀 놀란 듯 사마무기를 보았다.
“그 정도는 되어야 완벽할 것 같습니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그들을 풀어 놓으면 다시 잡아넣기도 힘들단
말일세. 더군다나 강호의 이목은 어떻게 할 참인가?”
“추종술과 자신들을 숨기는데도 일류인 자들입니다. 또한 차후에 밝혀
지더라도 천마인혼대법(天魔人魂大法)과 그들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천마인혼대법과 그들의 자유를 대가로 말하겠군.”
“그렇습니다. 뒷마무리는 저절로 될 것입니다.”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서 하게.”
“감사합니다.”
“북궁 총사는 어떤가?”
사마무기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냥 보기엔 삼십대로 보이지만,
신창(神槍) 조원의(趙願意)의 나이는 이미 오십이 넘어 육십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무림맹의 맹주인 신수(神手) 조진양(趙振揚)의 아들로서 그의 무공이
얼마나 깊은지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사마무기도 대략 짐작만 할 뿐이었다.
“걱정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일세. 하지만 북궁 총사를 끌어 들인 것은 아무래도
불안하네.”
“상황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흘러들어갈 소문입니다.
그래도 아직 우리가 한 말을 믿고 있으니 별 탈은 없을 것입니다.”
“알았네. 그럼 자네가 귀문으로 들어가서 직접 처리하게.”
“그럴 생각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어차피 귀문에 들어가려면 부 맹주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조치해 놓겠네.”
조원의는 상당히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마무기는 그 마음을 능히 집작할 수 있었다.
***
귀문(鬼門), 또는 귀역지문(鬼域之門)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무림맹에서도 극소수만이 아는 곳.
이곳을 잘 아는 사람들은 마옥(魔獄)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이 곳은 무림맹 지하 삼 십장 아래에 있는 감옥이었으며,
생체 실험장이기도 했다.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쇠창살 사이로 세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한데 그들의 모습이 실로 기괴하다.
한명은 머리에 털이 단 한 올도 없는 대머리에, 키는 무려 칠 척에
가까웠고, 덩치는 산만한데 위에는 옷을 입지 않은 맨 몸이었으며,
벌거숭이 몸은 쇠사슬로 칭칭 매여져 있었다.
그는 옥 안의 한 쪽에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사슬에 묶인 거대한 불곰 한 마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인물은 오척 단신에 유난히 큰 코가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노인은 옥의 뒷벽에 등을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오른 쪽엔 자그마한 손 방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둥근 모양의 검은색 방패는 노인과 묘한 동질감을 지니고 있어서,
누가 봐도 방패의 주인이 단신의 노인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한 인물은 긴 장발을 허리까지 내리고 있었으며,
바닥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었다.
기이한 것은 노인의 몸이었다.
노인의 몸에는 세 개의 장검이 꽂혀 있었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단전에 하나, 오른쪽 어깨에 하나,
그리고 왼쪽 어깨에 하나가 꽂혀 있었는데,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하게 박혀있는 장검들은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더군다나 등 뒤로 빠져 나온 검의 날들은 모두 하얗게 날이 서 있었다.
더욱 신기한 일은 칼이 꽂힌 부분에서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았고,
장발의 남자 역시 고통스런 표정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세 명의 기괴한 인물들은 사마무기가 나타났지만,
어느 누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마무기는 장발의 남자를 보면서 말했다.
“자유를 주겠다.”
세 인물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뿐 아무도 대답을 하는 자들은 없었다.
“천마인혼대법을 얻을 수도 있다.”
곰처럼 거대한 덩치의 사내와 단구의 노인이 상당히 놀란 듯 눈을 뜨고
장발의 남자를 본다.
장발의 남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마무기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결국 기다림의 결과는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삼귀는 절대 지금의 제의를 거절 할 수 없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루하게 흘러갔다.
장발의 사내가 눈을 떴다.
피와 배고픔에 굶주린 이리의 눈.
사마무기는 그 눈을 보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칠흉 중에서도 무공이 가장 뛰어나고 잔인하다는 삼귀의 대형인
삼검인요(三劍人妖)였다.
불과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들의 흉성은 강호를 떨어 울렸었다.
“천마인혼대법이 어떤 것인 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전부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에게 필요한 부분만 따로 적어 주겠다.
주기 전에 내 앞에서 필요한 부분만 네가 적어 가면 된다.”
“주기 전?”
“지금 너희들이 할 일이 그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천마인혼대법을 찾아
오는 것.”
장발의 사내가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사마무기를 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사마무기를 찢어 죽일 것 같은 눈동자였다.
그러나 사마무기는 태연했다.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눈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느냐?”
“안 믿으면 어쩔 셈이냐? 어차피 이 안에 쳐 박혀 있는 것 보다는
잠깐이라도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삼검인요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거절할 수 없는 제의였다.
“우리가 나간다면 한 가지에서 자유를 달라.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으로 제의를 수락한다.”
“대충 알 것 같군. 좋다. 하지만 몸에 금제를 하겠다. 물론 금제는 임무를
완수하고 난 후에 풀어 주겠다.”
그 말을 들은 곰처럼 덩치 크고 키가 큰 금강혈귀(金剛血鬼)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 거렸다.
“네 놈을 언제고 씹어 죽일 것이다.”
“쉽진 않겠지.”
장발의 사내는 말이 없었다.
차가운 시선으로 사마무기를 볼 뿐이었다.
어차피 그 정도야 각오한 일이었다.
***
얼굴만 보아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인상의 미녀였다.
눈에서 쏘아지는 기광이 서릿발이요. 잘 벼린 칼과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코가 약간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정도의 흠이 그녀의 미모에 상처를 주진 못했다.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할 뿐이었다.
너무 완벽함에서 오는 이질감을 상쇄시켜 준다고 할까?
설비향(雪匕響)은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호연세가의 가주인 폭풍도(暴風刀) 호연상(呼延霜) 앞에서도 이렇게까지
기가 죽진 않는다.
그러나 상아도후(霜牙刀后) 호연란(呼延蘭) 앞에서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나이 약관에 이미 가주인 아버지의 무공을 넘어 섰다고 알려진 무공의
천재,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기개와 위엄은 당대에 비교할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나마 여자 중에서 비교할 수 있다면 검후 북궁연과 사혼혈궁의 금마녀
(金魔女) 초소소(初小嘯) 뿐일 것이다.
무림에선 이 세 명의 여자들을 일컬어 절대삼봉이라고 불렀으며,
무림맹에선 북궁연과 호연란을 일컬어 천중쌍화(天中雙花)라고 불렀다.
그 정도의 가치가 넘치고 남는 여자였다.
나이 이십삼 세에 무림맹의 최고 요직 중 하나인 비월령(秘月囹)의 령주가
된 호연란이었다.
“확실한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이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비각(秘閣)의 수하 열두 명이
죽었습니다.”
“사실이면 기회로군.”
“그렇습니다. 소공녀님.”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들을 생포해야만 한다는 말인데.”
설비향은 호연란을 보기만 하였다.
“할아버님과 아버님은 뭐라고 하시던가?”
“두 분은 이번 일을 소공녀님에게 직접 일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한 후에 자신의 옆을 돌아보았다.
그 곳에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파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으며,
맞은편 오른쪽엔 당당한 덩치의 남자가 서 있었다.
노파는 호연세가의 태상호법인 호연낭이었고,
남자는 호연세가의 세 중추 중 한 곳인 천각(天閣)의 각주였다.
“모 각주에게 맡기시면 어떻습니까?”
노파는 자신과 대각선으로 앉아 있는 천각 각주인 모대건을 보면서 말했다.
경천묵장(驚天墨掌) 모대건(毛大健).
혈궁대전 이후에 나타난 최고의 고수들 중 하나인, 사협의 일인으로
강호를 누비던 자였다.
한데 십 오년 전, 호연세가의 가주인 폭풍도 호연상과의 비무에 진 후
호연가에 투신하여 지금은 천각의 각주를 맡고 있었다.
“하긴 두 분은 나설 수 없겠지, 나 역시 나선다면 파장이 클 것 같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긴 너무 사안이 중하고, 모각주님이 수고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사마무기 쪽은 벌써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구파일방에서도 나서려는
기미가 보입니다. 다행히 묵가장의 두 남매는 아직 무사한 것 같습니다.
빨리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서둔다면 일은 쉬울 수 있습니다.
사마무기 쪽에서 죽이려 한다면 우리는 보호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잘 구슬리기만 해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들의 음모만 확실
하게 전해줘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두 분이 처리해 주십시오.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럼.”
모대건과 설비향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하지만 모대건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가는 곳에서 만나야 할 또 다른 운명을.
***
묵가장의 남매와 정운, 그리고 아운과 두 시녀는 묵가장이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 숨어 있었다.
무조건 도망 갈 줄 알았는데, 아운은 이 산위로 일행을 데리고 왔다.
숨기도 좋고, 묵가장을 감시하기도 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확실히 지금 있는 곳은 숨기도 좋고 묵가장을 감시하기도 좋은 곳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도망가야 할 상황에서 숨을 필요는 머고 페허가 된 묵가장은
왜 감시를 한단 말인가?
모두 의아해 할 때 아운은 정운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정운은 아운이 물어오자 오히려 반문한다.
“그럼 이유도 모르고 왔단 말이오?”
“살수는 청부를 받아서 죽이면 그만이오. 이것 저것 다 알고 나면
일 못하지. 그렇지 않습니까?”
“살인을 하려면 상대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난 다르니까. 더 이상 그 문제는 거론하지 맙시다. 어차피 마지막 청부
였으니까?”
“마지막 청부?”
“그런 게 있으니 넘어가고. 말해 보시요. 나도 알아야 청부를 제대로
이행할 거 아니겠습니까?”
정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천마인혼대법이라고 알고 있소?”
“모릅니다.”
모른다는 소리를 너무도 당연한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일 수는 없었다.
실제 강호 무림에서도 천마인혼대법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교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악마의 대법이 바로 천마인혼대법이오. 만약
인간이 이 무공을 익힌다면 이십 년 안에 절대의 고수가 될 수 있다고
하오. 문제는 이 무공을 익히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마성에 물이 들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게 된다고 하는데, 이백 년 전 천마혈겁이 바로
천마인혼대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소.”
“근데 그게 어쨌단 말이죠?”
“묵가장의 두 남매가 그것을 익힌다고 소문이 났었소.”
아운은 정운을 보았다.
정직한 눈이었다.
아운이 보기에 묵가장의 남매는 이 정도의 사람을 거느릴 그릇이 아니었다.
그것부터가 이상했지만 뭇지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사연을 알리라.
“정말 없습니까?”
“없소. 비슷한 것도 없소.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이해하기도 어렵소.”
“그럼 누군가가 묵가장을 노리고 헛소문을 뿌렸단 말인가?”
정운과 남매의 얼굴이 굳어졌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쪽이던 위험은 이제부터 시작일거란 말인데.
아무래도 후자 같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정운이 물었다.
“오늘 온 자들은 천마인혼대법이 목적이 아니라 묵가 남매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소.”
“그럴 리가?”
“누굽니까?”
정운의 물음에 아운은 오히려 직설적으로 묻는다.
그 물음은 정운이 묵가장을 노린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
묵가장의 남매도 정운을 보았다.
정운은 입가에 고소를 머금고 고개를 흔들었다.
“모릅니다.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음, 모르나 보군.”
아운은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아운은 묵가장의 남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오절의 이절이 헛소문에 속아서 묵가장을 침입했단 말인데, 어떻게
그들은 내내 비급에 대한 말은 한번도 안했을까? 지금까지 내내 묵가
남매만 죽이는데 주력했단 말인데, 결국 오늘 온 자들은 천마인혼대법을
노리고 온 것이 아니라, 묵가장을 몰살시키고 천마인혼대법 때문에 그런
것처럼 꾸미려 했었다는 기분이 드는군. 자신들이 실패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에 조심성이 조금 부족했던 느낌이란 말이야. 뭔지
몰라도 아주 구린 구석이 많은 작자들이군.”
아운의 말에 정운의 안색이 굳어졌다.
묵소정이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이유 없이 우리 남매를 죽여야 할 이유가 뭐죠? 누가? 왜?”
아운은 묵소정과 묵천악을 보았다.
그들은 정말 이유를 모르고 있는 듯 했다.
아운은 정운을 보며 웃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정운의 물음에 아운은 피식 웃었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엉뚱한 소문이 돌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데 정말
누군가와 원한 관계는 없었습니까?”
묵가 남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운 역시 고개를 흔든다.
“그럼 괜히 고민할 필요 없겠군. 그런 난 요상이나 하겠다. 묵가장으로
누가 들어가는지 잘 감시해 주십시오. 내상이 좀 심해서.”
아운이 털썩 주저 않아 운기를 시작하였다.
모두 멍한 표정으로 볼 때,
아운은 이미 진기를 끌어 올려 내상을 치료하고 있었다.
만약 이럴 때 누가 급습이라도 하면 어쩌겠단 말인가?
모두 어쩔 수 없는 표정으로 묵가장을 감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 후, 형가의 운기 조식이 완전하게 끝나자 오요홍은 형가를
데리고 묵가장을 떠났다.
그리고 밤이 되자 아운은 운기 요상을 끝내고 일어섰다.
“이제 가자.”
아운의 말을 들은 정운과 남매는 아운이 밤이 되길 기다렸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니 낮보다는 밤에 움직이는 것이 혹시라도 모를 다른 자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공을 제대로 모르는 두 명의 시녀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밤에 움직이는 것이 결코 좋다고만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도 형가를 비롯한 일곱 명이 급습을 했을 때,
그들은 충분하고도 넘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그들 외엔 또 다른 적의 무리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그때 도망쳐도 무방할 텐데 하필이면 왜 밤에 도망가려 할까?
고민하던 묵소정은 짜증이 났다.
“이봐요.”
“말해.”
“하필이면 왜 이 밤에 도망을 가려고 하죠. 아까 해 밝을 때 도망가도
되잖아요.”
“도망?”
아운이 묵소정을 보았다.
“그래요. 지금 도망가는 거 아닌가요.”
“아닌데.”
모두 아운을 본다.
“지금 묵가장으로 다시 간다.”
무두들 멍한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저 안으로 다시요?”
“물론이지. 뭐 안 될 것 있나? 아무도 묵가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며.”
“그렇긴 하지만, 지금 그 안에 있으면 적은 다시 올 텐데.”
“어디가도 마찬가지지. 오절 중에 두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자라면
우리가 출발하고 그 뒤를 쫒는 것도 어렵지 않아, 지금은 묵가장에
있는 것이 좋아.”
묵천악이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등화불명이란 생각으로 하는 짓이라면, 이건 정말 아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데 일단 여기는 다시 한번 와 볼 것이 뻔하다. 멍청한…”
말을 하다가 자신도 화를 이기지 못하던 묵천악이 입을 다물었다.
더 말을 이어가기엔 자신을 바라보는 아운의 눈이 너무 살가웠다.
“멍청한 놈은 너다. 누가 묵가장에서 뻐젓하게 놀자고 했냐? 너나 네
부모가 멍청하지 않다면 묵가장에 비밀 장소가 하나쯤은 있을것 아니냐?
보아하니 너희들은 항상 위험에 대비를 하고 있던 것 같던데, 우리가
며칠 동안 쉴 장소는 있겠지.”
묵가 남매와 정운은 갑자기 할 말이 없었다.
아운의 말은 분명히 맞았다.
묵가장엔 비밀리에 숨어 있을 곳이 있었다.
만약을 위해 만들어 놓은 장소로 묵가장의 중요 식솔이 아니면,
그곳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생각하지 못했었다.
얼마 후 모든 일행은 묵가장의 지하 밀실에 들어가 있었다.
밀실은 몇 개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당분간 생활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묵가 남매조차도 이 안에는 처음 들어와 보는 것 같았다.
그들마저도 놀라고 있었으니.
묵가장의 정체가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그럼 난 좀 같다 와야겠어.”
“어디를.”
정운과 묵가장의 남매가 자신을 보자 아운은 흐릿하게 웃었다.
“받아야 할 빛이 좀 있어서.”
아운의 눈에 점차 살기가 어린다.
정운과 묵가 남매는 그 무서운 살기에 몸서리를 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