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야이진구(夜異陳九)
- 야이의 검, 진구의 주먹
열흘.
그 동안 아운이 한일은 먹고 또 먹고, 놀다가 다시 와서 또 먹고
그리고 한숨 잔 후에 또 먹는 일이었다.
그 동안 음식에 주려 있던 아운인지라,
항주 제일의 음식점인 항주제일품(杭州第一品)을 완전 독점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나고 나자, 항주제일품에서 할 수 있는 요리 중에 아운이
안 먹어본 음식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특히 고급 요리란 요리는 거의 전부 시식했다고 볼 수 있었다.
호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로 강호의 팔대요리 중 하나라는 상채 요리는
물론이고 동안계, 마랄자계, 우중삼걸에 이르기까지 확실하게 설렵한
다음이었다.
그의 식도락은 순식간에 소문이 나서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식도락은 한 명의 손님이 찾아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흑점사 곡 어른께서 찾으십니다.”
“나를…”
“그렇습니다.”
“난 관심 없는데.”
“청부 건입니다.”
“미안하지만 난 좀 쉬고 싶은데. 나중에 다시 찾아오게.”
아운의 너무도 태연한 말에 흑점사의 심복인 유칠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한번 아운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유칠은 아운의 표정에서 확실한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자신이 아니라 황제가 찾아와도 소용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오면서 산전수전에 해전까지 다 격어본 유칠의
눈치는 나름대로 비상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흑점사의 심복이 될 수 있었겠는가?
유칠은 맥없이 돌아섰다.
아무래도 자신이 상대하기엔 벅찬 인물이라 생각했다.
아운은 유칠이 가거나 말거나 대나무에 넣어서 푹 찐 돼지고기 한점을
집어서 아주 맜있게 씹고 있었다.
어차피 두 번째 사문의 일 때문에 살수 노릇을 했지만,
무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살수 자체가 아운의 성격하고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 한번의 살수행으로 암혼살문의 첫 문규는 이행한 셈이었다.
암혼살문의 가장 큰 문규는 첫 살수행으로부터 십 년 안에 두 번의 살수
행만 더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문주의 마음이었다.
평생 동안 살수행을 안 해도 되고 문규를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며,
암혼살문의 이름을 바꾸어도 상관이 없었다.
결국 암혼살문의 후예는 평생 동안 단 세 번의 살수행만 하면 그 다음
부터는 자기 맘이라는 사실이었다.
암혼살문의 규칙 중 그나마 가장 맘에 드는 일이었다.
뭐 앞으로 반드시 죽여야 할 인간이 있을 때 죽여주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거기에는 다른 단서가 있기는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는 반드시 황금 백냥 이상의 가치를 지닌 자로
고를 것이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는 저절로 알게 될 거라 했으니 기다리면 된다.
한데 아운은 언교해를 죽임으로서 이미 또 한번의 살수행을 한 결과가
되었으니, 이젠 한번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운은 더욱 느긋해졌다.
그러나 그의 느긋함은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그날 밤.
객잔에서 막 잠자리에 들려던 아운은 다시 일어나야 했다.
이번엔 흑점사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뭐냐?”
아운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묻자, 흑점사는 여유 있게 웃으면서 말했다.
“황금 백이십 냥 짜리일세.”
아운의 눈이 빛났다.
말이 그렇지 황금 백이십냥짜리 청부가 쉽게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마지막 세 번째 살행을 끝내고 암혼살문의 규제에서
벗어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운은 흑점사를 보았다.
담담한 그의 얼굴엔 어떤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상대는?”
“묵가 산장일세.”
“상대는?”
흑점사는 잠시 멈칫하였다.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닐세. 이번의 경우는 청부자와 함께 움직이면서
보조만 해주면 되는 일이지. 그러니 상대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아운이 흑점사를 보았다.
돈에 비해 일이 좀 쉬운 듯 보였다.
그러나 쉬운 일이라면 황금 백 냥을 그냥 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차피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더욱 맘에 들었다.
“좋아. 하지.”
아운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정오에 내게로 오게.”
흑점사가 막 일어서서 나가려 할 때였다.
“기대하지.”
흑점사가 멈칫한다.
흑점사가 천천히 돌아서서 아운을 보았다.
아운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엇을 기대한다는 뜻일까?
청부에 대한 기대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흑점사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태연했다.
“이번 청부는 기대해도 좋을 걸세.”
흑점사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아운은 피식 웃었다.
“역시 무엇인가 있군. 내가 너와 같은 인간들에 대해서는 제법 잘 아는
편이지.”
한 동안 뒷골목을 전전했던 아운이었다.
그래서 흑점사 같은 인물이 얼마나 집요하고 얼마나 독한 인종들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작은 원한이라도 그들은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기도 했다.
강자에게는 철저하게 약한 듯 보이고, 약한 자에게는 철저하게 강하다.
하지만 실제 알고 보면 강자에게 자신을 낮추고 있다가 언제라도 기회만
있으면 물어뜯을 수 있는 게 흑점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단 한 푼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백 명의 아이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죽일
수 있는 게 또한 그들이었다.
***
총 일곱 명이었다.
아운을 포함해서 다섯의 인물들은 나란히 서 있었고,
두 명의 복면인은 그들의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운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흑의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모두 날렵한 경장 차림으로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두 사람 중 한 명이 여자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몸매였다.
그녀는 허리에 비단으로 만들어진 채대를 감아서 옆으로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허리에 도를 비켜 찬 남자 복면인은 살기어린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
“올 때 복면을 하고 오라했었다.”
아운은 씨익 웃으면서 자신의 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네 명을 보았다.
전부 복면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운은 복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뭐가 무서워서 복면을 하겠는가? 난 내가 하는 일에 당당하다.”
복면인의 눈가에 가벼운 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 날카로운 살기에 그 앞에 서 있던 네 명의 복면인들은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지만, 아운은 여전히 태연했다.
“맘에 안들면 그냥 갈까?”
아운은 정말 미련 없이 떠날 기세였다.
“됐다. 그냥 넘어가지.”
복면인도 어쩔 수 없다는 눈치였다.
아운이 옮기던 걸음을 다시 되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자 복면인은
다섯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오늘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묵가 산장에 들어가서 두 명의 목숨을
취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죽이는 것은 내가 할 것이다. 당신들이 할
일은 만약의 경우 묵가 산장의 호위무사들을 상대하면 된다.”
묵가 산장(墨家山莊), 강호에서는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단지 호남성의 유지들 사이에서는 조정의 벼슬아치가 낙향하여 세웠다는
일설만 있었다.
물론 아운은 그런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묵가 산장이란 말도 오늘 처음 들었고, 그가 할 일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묵가 산장의 이목을 끌어만 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운은 오늘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복면인의 기세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었다.
‘묵가 산장이 얼마나 대단한 집단인지 모르지만 이들 정도면 어지간한
문파 하나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운은 흑점사의 말을 듣고 약속 장소에 와서,
자신을 제한 나머지 여섯 사람을 만나고 상당히 놀랐다.
자신뿐이 아니라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복면의 사람들 역시 상당히 놀란
느낌이었다.
그들도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들의 무공을 가늠해 보았을 것이다.
단지 앞에 있는 두 복면인들만이 이미 이들의 수준을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단지 그뿐인가? 정말 묵가 산장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우리 정도의
고수가 전부 있어야 하는가?”
허리에 검을 차고 있던 복면인이 물었다.
목소리로 보아 나이가 최소 육순은 넘은 것 같았다.
“그것뿐이다. 하지만, 호위무사들 중에 정운이란 자가 있다. 그의 실력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강하다. 만약 그를 만나면 무조건 협공을 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죽여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묵가 산장의
호위무사들 실력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여야할 자들
역시 그 무공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모두 약간씩 긴장한 듯 했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았다.
축시에서 인시로 막 넘어갈 무렵(새벽 세 시 정도) 묵가 산장의 십여 장
밖에 일곱 명의 인물들이 서 있었다.
“이제 가자.”
복면인의 말을 들은 일곱, 아니 여섯의 인물들이 담장을 단숨에 날아
올라갔다.
그들은 가볍게 담장 위를 박차고 묵가 산장의 지붕위로 숨어들었다.
“하! 역시 대단한 자들이었군.”
아운은 그들 여섯 사람의 신법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하였다.
그러나 언제까지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운의 신형이 묵가산장의 대문을 향해 쏘아갔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묵가산장의 대문이 박살났고,
동시에 아운의 신형은 대문을 지나쳐 묵가산장의 본 건물을 향해 직선으로
쏘아나갔다.
척살자가 자는 방으로 숨어들던 여섯명의 복면인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저, 저… 미친놈.”
청부자인 남자 복면인은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새벽까지 기다렸다 몰래 숨어든 공이 한번에 무너지고 만 셈이었다.
모두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아운을 볼 때 아운의 신형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 건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한데 그렇게 되자 묵가 산장의 무사들이 일사 분란하게 아운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런 아운의 급습에도 불구하고 묵가 산장의 무사들은 조금도 당황함이
없었다.
‘정운, 과연 무사들을 제대로 훈련시켜 놓았구나.’
“서둘러야겠어요. 어차피 묵가산장의 인물들은 단 한 명도 살려 놓지 않을
작정이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요.”
복면인이 감탄할 때 여자 복면인이 다구쳤다.
“두 분은 묵가산장의 무사들을 전부 처리해 주십시오.”
복면인이 네 명의 또 다른 복면인 중 두 명을 보고 말하자
그들은 그 자리에서 묵가산장의 무사들을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남은 네 사람의 신형은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운은 막 건물을 향해 뛰어들려는 찰라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사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묵가 산장의 무사들은 몇 안 되는 것 같지만, 모두 대단하구나.’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운은 달려들던 그 기세로 몸을 회전하면서 선풍팔비각(?風八飛脚)의
풍운연환섬(風雲連環閃)을 펼쳤다.
삼백 년만에 다시 나타난 천각괴 오칠의 각법은 일반 무사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벅찬 무공이었다.
번개처럼 빠른 발이 앞에서 달려들던 두 명의 무사와 옆과 뒤에서 달려
들던 서너 명의 무사들을 한번에 스치고 지나갔다.
검을 들고 달려들어서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한 묵가장의 무사들은,
다다다닥!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막 마당에 뛰어내려 무사들을 공격하려던 두 명의 복면인들도 눈이 커졌다.
물론 아운을 공격하던 무사들도 기겁하여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아운은 무사들을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문짝을 박차고 들어갔다.
“막아!”
정신을 차린 한 명의 무사가 고함을 지르자,
무사들이 다시 한번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운을 뒤에서 공격한 두 명의 무사들을 제하고 나머지 무사들은
두 명의 복면인이 막아섰다.
앞으로 뛰어들던 아운의 신형이 갑자기 돌아섰다.
마침 아운의 등을 향해 검을 찔러오던 두 명의 무사들은 다시 한번 놀란
몸을 움추려야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엔 아운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응천각괴(飛鷹天脚怪) 오칠(吳七)의 각법에 이어 구전무적권문의
단룡수가 두 무사의 마혈을 집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운은 다시 돌아서서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동시에 밖에서는 무사들의 비명소리가 연이어 들리기 시작했다.
아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밖을 안보아도 두 명의 복면인들이 무사들을 향해 살수를 펼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맘에 들지 않았다.
두 명의 복면인 정도라면 굳이 살수를 쓰지 않아도 무사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아운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무사들을 죽이는 복면인들을 뭐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아운은 일단 방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운이 걸어 들어온 방 안에는 두 명의 인물들이 뒤엉켜 있었고,
한 명의 복면인은 선 채로 그들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닥에는 두 명의 여자가 목 없는 시체로 쓰러져 있었는데,
모두 벌거숭이였다.
그리고 몇 명의 무사들도 죽은 채 엎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안으로 뛰어 들었다가 결투를 지켜보는 복면인에게 죽은 듯 했다.
시체의 모습으로 보아 모두 단 일격에 죽은 것 같았다.
아운의 시선이 또 한 명의 복면인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인물에게 모아졌다.
그리고 아운의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청년은 이미 두 군데나 검상을 입고 있었는데,
상당히 위태로워 보였다.
완전 벌거숭이인 채로 검을 휘두르는 청년은 아운에게 아주 낯익은
인물이었다.
주먹밥 세 개로 자신에게 청부를 하였던 소녀,
그리고 그 소녀의 주인이었던 청년.
아운의 시선이 빠르게 죽어 있는 시녀들에게로 옮겨졌다.
다행히 그 시녀들의 얼굴은 낯설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안심하던 아운의 표정이 급박하게 굳어져 갔다.
청부자인 남녀 복면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은 남매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운이 벌거벗은 채로 검을 휘두르는 청년을 보았다.
이미 기진해서 벽에 밀려 있는 청년을 향해 복면인의 주먹이 맹렬하게
뻗어나갔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복면인의 검이 소리 없이 뽑힌다.
“살수의 검.”
아운은 서 있던 복면인이 살수임을 알아보았다.
그의 은밀한 움직임을 보고 한번에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다른 한 명의 복면인에게도 열세를 면치 못하던 묵가의 소장주가
지금 복면인의 은밀한 살수를 피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운의 신형이 마치 번개처럼 움직였다.
주먹밥 세 개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사구아(蛇口牙)라는 초식이 있다.
말 그대로 뱀이 어금니로 물어뜯는다는 초식인데,
주로 상대의 하체를 공격하는 각법이었다.
비응천각괴 오칠이 평소 가장 애용하던 몇 개의 초식 중 하나 이기도 했다.
막 검을 뽑아 들던 복면인은 자신의 하체를 쓸어오는 강력한 힘을 느끼고
기겁을 하였다.
그의 신형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며 몸을 뒤틀었다.
동시에 그의 검은 선회소환(旋回召還)의 초식으로 자신을 공격한 아운의
상체를 쓸어 갔다.
사혼검(死魂劍) 야이(夜異)는 낭인촌 최고의 살수였다.
비록 강호무림의 삼대 살객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삼대 살수 중 한 명인 귀검살(鬼劍殺) 야한(夜寒)의 동생이자 사제였다.
만약 삼대 살수가 아니라 사대 살수였다면,
네 번째 자리는 분명히 자신일거라고 자부하던 차였다.
과연 그 자부심에 걸맞을 만큼 빠른 대응이었다.
한데, 사라졌다.
자신을 공격하던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져서 야이가 당황할 때,
묵가의 소장주를 거의 죽음직전까지 몰고 간 또 한 명의 복면인도
당황하고 있었다.
칠보둔형신기(七步遯形神氣)의 보법으로 야이를 피해 소장주를 공격하는
복면인에게 다가선 아운은 다시 한번 사구아의 초식으로 복면인의 다리를
차갔다.
칠보둔형신기가 무엇인가?
비응천각괴 오칠의 최고 절기가 아닌가?
단 일곱 걸음이면 피하지 못 피할 공격이 없다고 하였던 오칠의 장담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단 일보로 야이의 공격을 피하고 삼보만에 또 다른 복면인을 공격하는
아운이었다.
복면인은 급히 자신의 초식을 거둠과 동시에 옆으로 몸을 회전시켜 아운의
공격을 피하였다.
아운의 발이 스치면서 복면인의 바지가 찢어져 나갔다.
“네 놈은 누구… 너, 넌…”
복면인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아, 미안하오. 내가 말이지, 이전에 받은 청부가 있어서… 허헛. 그거 참
이상하게 꼬이네.”
아운은 좀 미안한 표정으로 사혼검 야이와 또 한 명의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이미 죽었구나 했던 소장주는 멍한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혹시 자신이 아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아운은 차가운 시선으로 소장주의 벌거벗은 몸을 훑어보았다.
‘개자식, 만약 네가 나에게 청부한 시녀도 건드렸다면 내가 먼저 쳐
죽이겠다.’
결심은 결심이고 일단 눈앞의 일이 먼저였다.
“옷을 입으시오.”
소장주는 벌떡 일어서더니 침착하게 자신의 옷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제법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복면인과 야이는 청년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아운에게 모아져 있었다.
나이도 어렸고, 몸에 어린 기운도 강해 보이지 않았다.
흑점사 곡현이 장담하지 않았다면 아예 싹 무시하고 말았을 인간이었다.
한데 조금 전의 공격은 그들을 서늘하게 하였다.
소장주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배신자는 당장에 쳐 죽여야 직성이 풀렸다.
그것이 낭인촌의 법이었다.
물론 그것은 낭인촌의 법이지 아운의 법이 아니었다.
“저 놈은 내가 상대하겠소. 목표를 감시해 주시오.”
복면인의 말에 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장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복면인은 살기를 담은 시선으로 아운을 보며 말했다.
“네 놈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일고 있는 것이냐?”
“당연히 알고 있지.”
“그럼 이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가능할까?”
복면인이 피식 웃었다.
“넌 내가 누구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알아서 뭐해, 어차피 결과는 마찬 가지일 텐데.”
복면인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젊다는 것은 좋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아운의 무모한 혈기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죽지 못해 몸부림치는 들개의 만용이라고 생각했다.
죽이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잘 구슬려서 데려다 제자로 삼을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우선은 시간이 없었다.
“어리석은 놈, 잘 가라. 시체는 제대로 묻어주마.”
복면인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주먹으로 아운의 가슴을 쳐 갔다.
언뜻 보면 상당히 평범한 초식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운은 그 주먹에 실린 힘을 느끼고 은근히 긴장하였다.
아운의 신형이 회청 하는 듯 하더니 복면인의 주먹을 비켜났다.
동시에 아운의 발이 복면인의 십육개 대혈을 향해 난타하기 시작했다.
풍운연환섬(風雲連環閃)은 한 숨의 진기로 스물 네 번이나 발길질을 할 수
있는 초식이었다.
복면인은 기겁을 해서 몸을 죄우로 틀면서 어지럽게 공격해오는 아운의
발을 막았지만, 무려 세 번이나 몸에 맞고 말았다.
“크윽.”
비명과 함께 복면인이 뒤로 주르륵 밀려 날 때,
아운은 이미 사혼검 야이를 향해 공격하고 있었다.
사혼검 야이는 설마 아운이 그렇게까지 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좀 심했다.
그렇다고 당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검이 달려드는 아운을 향해 진선으로 찔러 갔다.
달려드는 속도와 찌르는 속도가 더해지면서 검과 아운의 거리는 급속도로
축소 되었고, 미쳐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사혼검 야이의 검은 아운의
심장을 뚫고 들어갔다.
한데 아운의 심장을 찌른 야이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찔렀는데 손에 아무런 감각이 전해 오지 않았다.
순간!
“멈춰랏.”
하는 고함과 함께 뒤로 물러섰던 또 다른 복면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나가며 주먹을 앞으로 밀어내었다.
칠보둔형신기로 야이의 시선을 현혹함과 동시에 소장주를 둘러메고
창문으로 뛰쳐나가던 아운은 뒤에서 밀려오는 무지막지한 힘을 느끼고
안색이 변했다.
강하고 빠르다.
피하고 뭐고 할 시간이 없었다.
얍! 하는 짧은 기합과 함께 소장주를 앞으로 던져 버린 아운은 뒤로 몸을
틀며 항마금강신권을 뻗어 내었다.
꽝!
거친 소리와 함께 아운의 신형은 무려 삼 장이나 날아간 다음 서너 바뀌나
바닥을 구르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빠르게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몸을 점검하였다.
비록 가슴이 얼얼하고 충격은 있었지만,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무극신공과 불괴신공 덕분이었다.
“개산권(開山拳).”
아운으로 인해 이미 오 장 밖에 서 있던 묵가장의 소장주인 묵천악(墨天岳)
이 놀란 표정으로 한 말이었다.
아운은 일어서서 침을 밷어 낸 다음 천천히 다가오는 복면인을 보았다.
달도 없는 밤이었지만, 어차피 어둠 정도가 이들의 시선을 가리진 못했다.
어둠을 뚫고 다가오는 시선에 살기를 느낀 아운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개산권(開山拳) 진구(陳九)라니, 그렇다면 그 옆의 인간은 보나마나
사혼검(死魂劍) 야이(夜異)겠군. 이거 영광이요. 낭인촌 최고의 살수와
최고의 용병 낭인을 한꺼번에 맞이하다니.”
아운의 말에 묵천악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이미 낭인촌 최고의 살수와 최고의 용병이라 일컬어지는 사혼검 야이와
개산권 진구의 실력은 강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마흔두 번의 자객행을 완벽하게 완수한 살수 야이,
용병들에게 전설로 통하는 진구.
두 사람이 힘을 합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무림의 고수들은 꼬리를
말 것이다.
특히 진구의 개산권은 파괴력에서 소림의 백보금강신권(百步金剛神拳)과
겨룰 수 있다고 알려진 절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체를 알고 난 아운은 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었던 아운이었다.
막상 무공을 배우고 나서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다.
이제 이들이라면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후, 이거 좋은데.”
아운이 웃으면서 말하자, 다가오던 야이와 서 있던 묵천악은 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진구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조금 전 충돌할 때 아운의 힘을 느껴 보았기 때문이었다.
“네 놈은 여기서 죽을 것이다.”
“글쎄, 죽어도 여기서는 아닐 것 같은데.”
“네 놈은…”
“나도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서 너하고 겨루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생각해보니 청부가 먼저더라고.”
아운은 그 말을 끝냄과 동시에 금강신권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진구는 기다렸다는 듯 개산권을 휘둘렀고,
두 개의 경기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꽝! 하는 소리를 내었다.
삽시간에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충격으로 아운의 신형이 다시 뒤로 튕겨져 날아간다.
한데 뒤로 튕겨지는 아운의 신형이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가속도를 내면서
묵가 산장의 뒤 쪽에 있는 별채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또한 묵천악도 아운의 앞에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이미 아운이 공격하기 전에 미리 언질을 준 것 같았다.
“허, 정말 대단하군. 하지만 거긴 정말 피할 수 없는 곳인데.”
진구가 조용히 말하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야이 역시 진구를 쫓아 뒤쪽에 있는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