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정정당당(正正堂堂)
- 장부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아운이 말하는 살수의 도
아운이 사라지고 나자 흑점사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바람과 같이 사라진 아운의 경이적인 경신법에 놀라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데 뭔가 찝찝했다.
마치 볼 일을 보고 뒤를 딱지 않은 기분이랄까?
잠시 고민을 하던 흑점사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청부자와 죽여야 할 자를 말하지 못했다.”
곡현의 얼굴에 힘줄이 돋아나고 말았다.
***
곡현이 어떻게 생각하던 아운은 이미 번개처럼 악양까지 날아와서 죽여야
할 자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죽여야 할 자가 사는 집은 아주 가까운 악양에서도 가장 유명한
갑부의 집이였다.
살수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자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죽이려는 자나, 그의 친위 세력에 의해 언제든지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위험을 앉고 있으며, 수많은 원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자칫 신분이 알려지면 평생을 쫓기며 살수도 있었다.
그래서 살수는 언제나 은밀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모습이나 본 신분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살수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을 지니게 되고 암습은 기본이며
필수였다.
만약 살수행을 하다가 자신의 얼굴을 본 자가 있으면 당연히 살인멸구 해야
한다.
그 만큼 은밀하고 조심해야 하는 직업이 바로 살수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살수에 대한 상식을 살펴보면 대충 이렇다.
한데 지금 세상이 아는 살수에 대한 상식과는 전혀 동 떨어진 살수가
한 명 나타났다.
아운은 길게 숨을 몰아쉬며 천금장(天金莊)이라고 써진 거대한 현판을
보았다.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는데,
그 햇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천금장의 거대한 문은 죽어야 할 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능히 짐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살수는 암습에 능해야 한다고, 다 개소리다. 장부라면 정정당당해야 한다.
내가 암습 따위나 하려고 무공을 배운 것은 아니지.’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다른 살수들이 어떤 관습과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던 그것은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다.
암혼살문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살수의 법칙도 그에겐 다 필요 없었다.
의무는 어쩔 수 없지만, 살수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행동 규칙엔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었고, 불괴음자나 암혼살문에서 말한 법칙들이 전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부가 자신이 하는 일에 그렇게까지 숨어서 활동한다는것이 우스웠다.
원한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 공격을 당한다면 그 정도는 능히 이겨 낼
정도로 강해지면 된다.
그렇지 않고 겁이 나거나 그렇게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하지 않으면 된다.
문사 출신인 그에게 있어서 살수들의 행동 규칙은 장부가 지녀야 하는
행동 규칙과 비교해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따라서 규칙을 쫓아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살수로 살아갈 인생도 아니었다.
‘나의 살수 규칙 제일은 정정 당당이요. 제이는 정면 돌파다.’
아운은 나름대로 규칙을 정하면서 천금장의 정문 앞에 우뚝 섰다.
마침 정문 앞엔 네 명의 선위 무사가 당당하게 서 있었다.
모두 키가 장대하고 인상은 위엄 그 자체였다.
문지기들은 그 좋은 인상들을 찌푸리며, 아운을 보았다.
천금장의 대문과 자신들을 훑어보는 아운의 눈초리가 아무리 보아도 기분
나빴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아운은 제법 예의 바른 문지기 무사를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문지기의 하는 행동을 보니 제법 예의가 있어 보였고,
그렇다면 그 주인 또한 제법 힘이 있을 것 같았다.
첫 살인 대상 치고는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주인 이름이 대청산(大靑山)이고, 그 부인 이름은 언교해가 맞는가?”
말투가 완전 상전의 말투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온다면 아무리 문지기라도 기분 나쁘다.
그렇지 않아도 아운의 눈초리에 기분 상해 있던 문지기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닌 자 같았다.
네 명 중, 선임 선위무사가 화를 속으로 삭이고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만, 공자님은 누구신지?”
“나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걸 이제야 묻다니, 자넨 너무 굼뜨군.”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있나. 난 살수 일세.”
“사… 살수.”
문지기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람이란 너무 비상식적인 일을 당하면 상황 자체를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고, 상황 그 자체를 희극으로 오판하기도 한다.
세상에 어떤 살수가 아침나절에 정문으로 당당하게 걸어와 나 살수요 한단
말인가?
굳이 문지기가 아니라도 강호무림의 상식에도 없는 일이었다.
선임 문지기는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조금 짜증이 난다.
하지만 어쩌랴, 찾아온 손님이고 보아하니 신분도 만만하지 않아 보였기에
조금 더 참기로 했다.
“공자님. 그런 농담은 곤란합니다. 어디서 온 누구이신지, 그리고 무슨 일로
오셨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십시오. 지금 안에 기별을 하겠습니다.”
아운은 피식 웃었다.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 몰라주다니, 좀 서운하기도 했다.
“나 살수 맞네, 그리고 살수가 뭐 하러 왔겠는가? 당연히 죽이러 왔지.”
문지기들의 인상이 험해졌다.
참고 참았던 그들의 분노가 드디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꼬마 애송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못하는 말이 없네.
네 놈이 살수면 난 무림맹주다.”
아운이 웃었다.
더 말해야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살수란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 된다.
그 증명이란 아주 간단했다.
아운은 천천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뭐 하자는 거냐?”
선임 선위 무사가 아운에게 추궁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항마금강신권의 금강붕(金剛鵬)이란 것일세.”
친절한 설명과 함께 아운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그의 몸은 천금장의 대문앞에 서 있었고,
그의 주먹이 대문을 향해 뻗어 나갔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짝이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날아갔다.
천금장의 대문은 비록 쇠로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단단하기로 유명한 흑단목으로 만들어져서 어지간하면 도검으로도 쉽게
잘라내지 못할 만큼 단단했다.
한데 단 한 주먹의 권경(拳勁)으로 문짝을 산산 조각 내었다면,
이건 문지기에 불과한 선위 무사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모두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아운을 보면서 벌벌 떨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아운이 내가의 고수임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수고들 하게.”
아운은 여유 있게 인사까지 하고 부서진 대문 안으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섰다.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라서 뛰어 나온 호위무사들은 아운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구냐?”
“뭐 하는 놈이냐?”
“난 살수 아운이다. 모두 비켜라!”
아운이 고함을 치며 앞으로 걸어갔고, 호위무사들은 처음엔 멀뚱했다가
곧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저 놈은 살수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라!”
문지기였던 선위 무사 하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 말을 신호로 호위무사들이 검과 도를 휘두르며 아운에게 달려들었다.
“그냥 있으면 다치진 않을 텐데.”
아운은 입가에 미소를 달고 그대로 뛰어 올랐다.
순간 사방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향해 그의 두 손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펼쳐진 단룡수는 절묘하게 변화하며 호위무사들 틈 사이로
파고들었다.
단 일각, 약 삼십여 명의 호위무사들은 모두 마혈이 점혈
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아운은 그들을 한번 훑어보고 휘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문이 앞을 막으면 부셔 버렸고,
사람이 막으면 모조리 점혈을 하여 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의 걸음이 자꾸 지체가 되어진다.
아운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이거 안 되겠군. 이러다 놓치겠다.”
아운의 신형이 갑자가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천금장의 어딘가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의 신법은 너무 빠르고 비행하는 공간이 높아서 호위무사들로서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
천금장의 내당 깊은 곳에 대청산의 거처가 있었다.
삼대를 이어오며 악양 최고의 갑부로 군림해온 대씨 집안의 현 장주인
대청산의 나이는 오십 삼세였다.
그의 부인인 언교해는 무림 명가인 진주 언가의 둘째 딸로도 유명했다.
둘 사이에는 일남 일녀의 자식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운은 전면에 보이는 두 채의 건물을 보았다.
마치 그림을 그린 듯이 아름다운 두 채의 건물은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것
같았고, 그 화려함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겉모습이 저 정도라면 내부의 화려함은 안 봐도 짐작이 갔다.
아마도 저 중에 오른쪽 건물은 언교해의 거처이고,
왼쪽의 건물이 대청산의 거처이리라.
아운은 청각을 예민하게 모아 보았다.
마침 남녀가 다투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부부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아운은 오른쪽 건물로 다가서며 건물 벽을 때려 부셨다.
언교해의 거처를 지키던 호위무사들은 모두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변변히 대항한번 못해보고 바닥에 업어졌다.
건물의 가장 화려한 방안에 들어선 아운은 막 침상 앞에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한쌍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여자는 귀티가 나는 모습에 아직도 젊었을 때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빼어난 면이
있었다.
그러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매서운 눈초리로 보아 보통 사나운
성격이 아닌 듯 했다.
아운은 그녀가 대청산의 부인인 언교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 역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살이 피둥피둥찌고, 얼굴에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으로 보아 대청산이
분명했다.
개는 짖지 않아도 보면 개임을 알 수 있게 마련이었다.
“대청산 부부가 확실하군. 내가 제대로 찾아왔어.”
아운은 만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서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하게 다투던 부부는 벽이 부서지는 소리에
놀랐다가 갑자기 아운이 나타나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더군다나 그 많던 호위무사들은 전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대청산은 문득 조금 전에 누군가가 나타나서 소란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결과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 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언교해였다.
“네 놈은 누구냐?”
“말이 거칠군, 네가 언교해냐?”
아운의 무식한 물음에 언교해의 눈이 서늘해졌다.
“네 놈은 누구기에…”
“난 살수다.”
그 말에 언교해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죽어 줘야겠다.”
아운은 의기양양하게 말해놓고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부부의 얼굴을 보기
시작했다.
두 부부는 아운이 살수라고 말한 다음에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신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자, 더욱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수많은 호위무사들을 정면으로 뚫고 여기까지 왔다면,
지금 나타난 살수의 실력은 인정해야 했다.
살수가 대낮에 정문으로 쳐 들어왔다는 황당함은 제쳐 놓고 말이다.
두 부부의 얼굴에 똑 같이 두려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둘의 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가 청부자고, 누가 죽을 자였지?”
아운이 멀뚱한 표정으로 말하자,
두 부부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아운을 보았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황당한 살수도 있었는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던 언교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뭐하는 거예요. 빨리 죽이지 않고, 청부자는 나예요.”
언교해의 차가운 목소리에 아운은 대청산을 보았다.
대청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황급하게 정신을 차린 그는 아운을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 이 교활한 계집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내가 바로 청부자
입니다.”
이렇게 되자 아운은 더욱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언교해의 눈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늙어서 그것도 꼬부라진 주제에, 어린 계집을 다섯 명이나 첩으로 두고
돌아다녔으면서 살아 있기를 바랬느냐? 네놈은 죽어 싸다. 그래서 내가
청부를 넣었다.”
언교해의 말에 대청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계집애야 말이면 다냐? 네 년은 시집와서 언가의 무력을 등에 업고
나에게 온갖 구박과 폭력까지 휘두르지 않았는가. 내가 네 년에게 맞아
갈비뼈가 부러진것만 세 번이고,여기 앞니까지 부러졌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어떤 개자식인들 가만히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살수를 불렀다.
청부자는 바로 나다. 어서 이 계집을 죽여주십시오. 청부금은 내가 배로
올려주겠습니다.”
대청산은 두 손으로 입술을 벌려 부러진 앞니를 보여주었다가,
아운을 보면서 고함을 질러대었다.
“이 문어 대가리 같은 자식아, 네 놈은 돈 좀 있다고 나를 얼마나 무시
했느냐? 뭐 계집이 힘만 세고 제대로 남자도 만족 못 시킨다고… 제대로
세우지도 못하면서 먼저 구박한 게 기억도 안 나느냐? 세상이 아무리
여필종부라지만, 그 소리 듣고 살심 품지 않을 여자 있음 나와 보라고
해.”
“이 년아! 그래서 넌 호위무사 놈과 놀아났느냐?”
언교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대청산이 그것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뿐이랴. 하인 놈과도 놀아났고, 전에는 거리에서 처음 만난 남자 놈
과도 놀아나지 않았느냐? 내가 창피해서 어디다 말도 못하고, 오죽했으면
자식 놈이 알기 전에 조용히 죽어 주는게 우리 가족을 위해서 좋을거라
생각 했을까.”
대청산은 생각만 해도 분한 듯 몸을 떨었다.
아운은 대청산의 처지를 납득하고도 남았다.
언교해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미 대청산이 한 두 건은 눈치 채고 있을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알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진작 죽이지 못한 게 억울했다.
“네 놈은 내게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겨우 열여섯 살짜리 계집을 차지
하기 위해 그 집안을 몽땅 몰살시키고도 모자라, 내 시녀까지 건드려
임신시키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멸구한 것을 다 알고 있다.”
이번엔 대청산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눈치 빠른 년.'
속으로 감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뭐! 이년이 그래도 잘했다고.”
“이 개자식아!”
대청산이 언교해의 머래채를 잡자 언교해는 손톱으로 대청산의 얼굴을 후벼
대었다.
순식간에 대청산의 얼굴은 손톱자국이 난자되었고,
언교해는 대청산의 주먹에 맞아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언교해는 진주 언가의 딸이었지만, 여자는 가문의 무공을 익힐 수 없다는
언가의 율법대로 무공을 익히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가의 딸답게 힘은 보통 남자보다 훨씬 앞서 있었고,
옆에서 보고 들은 풍월이 있었다.
그래서 대청산은 번번이 마누라에게 얻어맞았었고,
대청산은 그에 맞서서 늦은 나이에 무공을 배워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그런대로 호적수가 되어 있었다.
“내가 청부자니 이 자식을 빨리 죽여.”
“내가 청부자다. 이 년을 죽이면, 청부금의 세배를 주겠다.”
“난 열배를 주마.”
“이 년아! 낸 돈인데 왜 네가 함부로 쓰려 하느냐?”
“네 놈이 죽으면 다 내거다.”
대청산과 언교해의 싸움은 대략 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운은 하도 기가 막혀서, 한 동안 부부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어차피 고문을 해도 내가 청부자가 아니요 하고 진실을
말 할 상황도 아니었고, 갑자기 그것을 아는 것도 귀찮아졌다.
“결국 하나는 어차피 죽어야 할 자고, 하나는 죽어도 싼 자라 이거지.”
아운이 중얼거리듯이 말하자, 부부가 싸우던 행동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이제 그가 무엇인가 결정을 내린 듯하자 둘의 얼굴은 긴장한 듯,
엉망진창이 된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귀찮으니까, 둘 다 죽어라.”
아운의 주먹이 날아갔다.
***
흑점사는 아운을 보고 있었다.
아운은 아주 개운한 표정으로 그 앞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흑점사는 일단 안심이 되었다.
아운의 표정으로 보아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온 듯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얻어맞고 강제로 일 준 것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일 끝내고
돌아오면 반드시 죽여주겠다고 벼르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맞았다고 하기에도 창피했으며,
아운의 무공실력이 아깝기도 했다.
대략 자신이 계산한 아운의 실력이라면 낭인촌에서 특급에 해당하는
실력은 될 것 같았다.
“수고했네.”
“수고는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
흑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내가 청부자와 죽을 자를 말하기도 전에 나갔는데 어떻게 청부자를
구별해 내었나?”
“구별은 무슨, 둘 다 죽였으니 어쨌건 죽을 놈은 분명 죽었을 거야.”
아운의 태연한 말에, 흑점사는 혀가 꼬부라지는 감동을 받았다.
저런 농담을 할 줄 알다니.
당연히 농담일 것이다.
아무리 멍청하고 미친 인간이라도, 살수가 청부자를 죽였을 리는 없다.
그것도 청부금을 다 받기도 전에.
헛헛, 하고 흑점사가 웃을 때였다.
밖에서 누군가가 허겁지겁 안으로 뛰어 들었다.
잔여 청부금을 받으러 보냈던 심복이었다.
흑점사는 안색을 찌푸리며 뛰어 들어온 자를 노려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뭔데 그리 호들갑이냐고 나무라는 투였다.
“무슨 일이냐?”
“청부자가 죽었습니다.”
“뭐라고.”
흑점사 곡현의 안색이 굳어졌다.
청부자가 죽다니.
그럼 청부금은 물 건너 간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흑점사에게 청부금을 받지 못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고 지금 청부금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보아라! 대체 누가 청부자를 죽였단
말인가?”
“그게…”
곡현의 심복은 원망의 눈초리로 아운을 보았다.
흑점사 곡현, 역시 심복의 시선을 타고 아운을 의문의 눈초리로 본다.
“내가 죽였지.”
“그것도 아주 자알 때려 죽였다지요.”
심복이 아운을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
그 역시 황당하고 너무 화나는 일이었지만,
감히 아운에게 덤비진 못하고, 말로 한 수 쏘아 붙인 것이다.
흑점사는 이 황당한 사건에 잠시 동안 말을 못했다.
낭인시장이 생겨나고 청부금을 받기 전에 살수가 청부자를 죽인 예가
없었다.
그건 너무도 상식적인 일이라 거론하기도 뭐한 일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하였다.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흑점사 곡현은 아운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청부금은 어떻게 할 참인가? 아니 대체 청부자를 왜 죽였지? 비록
청부자가 누구인지 몰랐겠지만, 둘 중 하나가 청부자인 것은 알고
갔었다. 조금만 힘을 쓰거나 몇 가지만 물어봐도 청부자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 아닌가? 아니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청부자가 누군지는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귀찮아서.”
“뭐라고. 이이…”
곡현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죽어도 싼 것들이라! 굳이 그걸 가릴 필요가 없었지. 처음 내가 앞뒤
안가리고 청부를 맞은 이유중 하나가 부자라는 이윤데, 부자치고 사람
좋은 놈 별로 못봤거든, 한데 이것들은 더욱 심하더군. 뭐, 청부자를
죽인데는 더욱 오묘한 이유가 있었지만.”
“크극…. 후우…. 좋아, 그까진 이유 따위는 따지지 않겠다. 청부금은
어쩔 참이냐?”
아운은 씽긋 웃더니 품에서 황금 두 냥을 꺼내서 흑점사에게 던져 주었다.
“이거면 충분하겠지.”
흑점사는 아운이 던진 황금 두 냥을 집어 들고 조금 화가 풀린 기색으로
물었다.
“그래도 예의는 있군. 자신의 돈으로 내 묶을 주다니.”
“내 돈이라니 그럴 리가 있나, 그것은 청부금을 내가 직접 받은 것일세.
뭐 나도 내 맘대로 청부금을 수렴했으니, 심부름 값은 받지 않겠네.”
흑점사 곡현은 어이없는 눈으로 아운을 보았다.
도대체 저 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무대포 같기도 한데, 청부금을 받아 온 것을 보면
아주 멍청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곡현은 일단 청부금을 받고 나자 아운이란 인간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정말 귀찮다는 이유로 청부자를 죽인 것인가?”
아운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살수고, 살수답게 행동했을 뿐이지. 단지, 나는 살수의 규칙이 다른
사람과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 두었으면 좋겠군.”
흑점사는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연약하고 호리호리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가늠할 수 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는 것도 그렇고, 무공보다도 가늠하기 어려운 성격도 흑점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운이 청부자를 그냥 죽이진 않았을 것 같았다.
흑점사는 눈짓으로 자신의 심복을 내보내고,
다시 느긋하게 앉아 있는 아운을 보았다.
“말해보게! 자네가 청부자를 왜 죽였는지 나는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단
말일세. 자칫하면 내 사업에도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 테지. 내가
맡긴 일에 청부자가 청부를 맡은 살수에게 죽었네. 이것은 결코 적은
일이 아닐세. 만약 이 소문이 난다면 누가 내게 와서 청부를 맡기겠는가?
자칫하면 나는 다시 청부를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네는
알겠지.”
아운은 흑점사를 잠시 바라보았다.
딴은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청부자는 여자였겠지?”
“알고 있었군.”
“뭐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니지. 조금만 눈치가 있다면 말이야. 아니
조금만 상식을 가졌다면.”
“근데 여자는 왜 죽였나?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줄은 알고 있었겠지.
준 종이에 간단하게라도 적혀 있었으니.”
“죽여야 할 남편이 내게 청부를 하였단 말일세.”
“뭐….”
흑점사는 일 시간 할 말이 없었다.
“살수란 어떤 곳에서도 청부를 마다해서는 안 되지. 하지만 아무나
죽여서도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일세. 보아하니 둘은 죽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더군.”
“남편이 정말 정식으로 청부를 했단 말인가?”
“이것 봐. 내가 비록 성질이 좀 급해서 가끔 실수는 하지만, 설마 그것도
모를까? 남편은 정말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네. 난 그 것을 마음속으로
받아 주었지. 뭐 어차피 내가 안 죽여도 보아하니 남편은 이미 다른 살수
에게 여자를 죽여 달라고 말했던 것 같더군. 그리고 그 살수는 모르긴
해도 엄청난 자일 거야. 그래서 내가 그냥 대신해 버렸지. 그 남편은
지금 당장 자신의 앞에서 죽여주길 원했단 말일세.”
“컥! 그러니까?”
흑점사는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아운의 말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많았다.
우선 상대의 청부를 받았다는 말이었다.
흑점사의 입장에서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제 곧 죽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미 다른 곳에 청부를 해 놓았던 것 같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 자가 아운에게 청부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럼 뭔가?
흑점사는 멀뚱한 시선으로 아운을 보았다.
아운은 흑점사의 의문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살수란 청부를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는 것일세. 나의 새로운 규칙으로
말한다면 알아서 청부를 받고 청부금도 받는다는 것일세. 대청산의 심정은
진실했고, 난 그 진실을 받아 들였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흑점사는 알아들었다.
기가 막힌 일이지만 아운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운의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데 그렇다고 청부자를 죽이다니.
기가 막힌 일이었다.
만약 죽어가는 자마다 청부자가 누구인지 죽여주기를 간절히 원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흑점사가 아운을 보았다.
“청부자가 아주 죽일 놈이 아니라면 그럴 일 없을 걸세.”
'그리고 난 이제 단 한번의 살수행만 더 하면 이 생활 종지부지.'
뒷말은 속으로 한 말이라 곡현이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운의 말에 흑점사 곡현은 가슴이 뜨끔했다.
생각이 읽혔다.
낭인 시장 최고의 흑잠사인 곡현인 만큼 심계로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그였다.
아울러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에도 능한 자였다.
그런데 아운을 만나고 나서는 계속 허
둥거리고 있었다. 그가 아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다 보니,
그의 머릿속에 쌓인 인간 군상들에 대한 지식으로 대처하기엔 역부족
이었다.
그리고 단순 무식한듯한데 눈치는 귀신이었다.
아운에 대한 상식이 점점 희미한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이 계속 아운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닿운 흑점사 곡현은
얼른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눈빛이 다시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운의 말을 정리하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그의 사고는 멈추고 말았다.
아니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도 아운의 황당함에 묻혀 있었다고
봐야 했다.
아운은 언교해를 자신이 죽이지 않아도 어차피 살수에게 죽어야 할
여자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살수는 모르긴 해도 엄청난 자일거라 했다.
아운은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주 간단했다.
언교해가 누군가?
여자라 비록 가문의 절기를 이어 받지는 못했지만,
진주 언가의 여식이었다.
진주 언가가 어딘가?
바로 강호 무림의 무수히 많은 세력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오대세가
중에 하나가 아닌가?
낭인시장의 힘이 제법 강하다고 해도 감히 언가를 건들지 못한다.
만약 언가가 그것을 알게 된다면 낭인 시장은 그 날로 잿더미가 될 것이다.
낭인 시장의 존재 자체가 무림맹의 묵인하에 있었고,
무림맹의 더러운 일을 뒤치다꺼리 해주는 조건하에 살아 있을 뿐이었다.
언가라면 무림맹에서도 핵심세력이었다.
그래서 곡현도 겨우 황금 열 냥에 청부를 받은 것이다.
물론 청부자는 언교해였다.
그의 남편이 바보가 아니라면 낭인시장에 청부할 리가 없었다.
낭인시장에 청부했다간 그날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흑점사 곡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언교해가 죽었다.
지금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아니 아운의 황당함에 가려 있었던 진짜
무서운 일이었다.
“이 미친놈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한거냐?”
“무슨 짓은, 살수가 돈 받고 살인을 했을 뿐이지.”
여전히 태연하다.
“이 놈아 그렇다고 언교해를 죽여,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려고…”
“걱정하지 마라, 영감. 죽었다 깨어나도 낭인 시장과 관련해서 언교해의
죽음을 생각할 사람은 없다.”
곡현의 얼굴이 멀뚱해졌다.
“낭인 시장이 돌았냐? 언교해를 죽여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그리고
그렇게 정정당당하게 들어가서 언교해를 죽일 만큼 낭인시장이 대담한가?
아마도 화살이 날아와도 나에게 날아올 것이요. 아니면….”
아운은 거기까지 말하고 씨익 웃었다.
‘보물을 노린 강도짓이라고 생각하겠지.’
흑점사는 멍하니 아운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자식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기엔 너무 벅찬 인간이었다.
아운은 흑점사에게서 획하니 돌아섰다.
흑점사는 멀뚱하게 아운의 등을 보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갑자기 따져
물었다.
“근데 자네 말투가 영 거슬리는군. 그래도 내가 존장인데.”
“거슬리면 내게 대접 받을 만큼 무공이나 인격적으로 올라가 있게. 겨우
사람 죽이는 것이나 주선하는 주제에 욕심이 많군.”
흑점사는 화가 난 목소리로 다시 한번 아운에게 따졌다.
“그러는 넌 살수 아닌가?”
“늙은이와는 격이 다르지.”
“뭐라고! 이런 개자식이…”
그러나 아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운이 나가고 나자 흑점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이 더 커져서 언가가 알기 전에 차리라 밀고해 버릴까?’
흑점사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자수한다고 언가의 진노가 풀어질까?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끝까지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면 아직 낭인시장에서 아운을 아는 자가 없다는 것이리라.
“휴우….”
그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 쉬고 말았다.
금방 십 년은 늙어진 것 같아 보인다.
한데 한숨을 내쉬던 흑점사가 벌떡 일어섰다.
“언교해를 죽였으면 그 청부금도 받은 거 아닌가?”
그러나 아운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아운은 밝은 표정으로 저자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낭인시장에서 가장 호화로운 객잔을 찾아 나섰다.
그의 품에는 청부금으로 받은 황금 오백냥 중에 다섯 냥이 있었다.
흑점사 곡현에게 준 두냥과 자신의 품에 있는 다섯 냥을 뺀,
나머지 사백구십세 냥에 해당하는 금전과 보물은 은밀한 거처에 감추어
놓았다.
말이 황금 사백구십세냥이지 무게로 보나 양으로 보나 그걸 어떻게 들고
다니겠는가?
아운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흠. 지들이 싸우다가 청부금을 열배로 올렸고, 언교해 정도를 죽이려면,
그녀의 위치로 보아 대청산의 네 배는 받아야 옳지. 생각해보니 이것도
싸긴 한데, 들고 올만한 보물이 그 정도뿐이니 아쉽지만 참 많이 참았
도다.’
이것이 아운이 말하는 살수의 도였다.
뭐 죽은 대청산은 억울할 것도 없었다.
원하는 대로 자신의 앞에서 먼저 맞아 죽는 언교해를 보았고,
그래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은 사람이 보물에 연연할 필요가 있겠는가?
억울하다면 대청산의 아들과 딸이 억울할 일이었다.
하지만 두 남매도 대청산이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보물 창고를 아운
덕분에 찾았고, 그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덩치 큰 보물들(작은 것은 전부
아운이 들고 나왔다.)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리 억울할 것도 없었다.
아운이 아니었으면 그 비밀 금고를 찾기는 상당히 어려웠으리라.
아운이야 전직이 있었으니 좀 쉽게 찾은 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부모를 죽인 자가 살수란 생각은 못할지도 몰랐다.
살수가 일류 도둑도 찾기 힘든 비밀 금고를 찾아 황금을 훔쳐(?) 도망
가리란 생각은 안할 테니.
하지만 아운이란 이름은 남으리라.
그래서 만약 언가가 아운을 찾아온다면.
‘만약 언가가 나를 찾아 와 따진다면, 언교해 부부가 한 일을 세상 천지에
전부 까발리고 말겠다.’
아운은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그래서 명문이란 허울 속에 사는 족속들이 자신의 체면을 얼마나 중하게
여기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거라면 무림의 명문가 역시 별다르지 않으리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운은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첫 살행에서 자신의 흔적과
암혼살문이 세상에 나타났음을 알려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뭐 어차피 자신이 남긴 흔적을 알아 볼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뒤가 미적지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 의무는 그 흔적으로 인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했으니,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만약 아무런 일 없이 삼 년이 지나면 잊으라 했으니,
그것도 별 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뒤가 찜찜한 일은 꼭 문제가 되기 마련이었다.
아운은 그 찜찜함을 일단 잊기로 했다.
신경 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어차피 저절로 알게 될 일이었다.
그보다도 아운을 더 궁금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악양 제일부자를 죽이는데 황금 열 냥이라!'
청부자의 지위를 생각한다면 청부금이 지나치게 적었다.
이로 보아 평소 흑점사 곡현이 언가나 무림맹과 어떤 연관이 있을 듯
싶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은 충분히 보상을 받았고,
깊게 알아봐야 골치만 아플 것이다.
***
이름: 흑칠랑(黑七狼).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그의 사부가 지어줌.
별호: 암천마검(暗天魔劒)
나이: 삼십오 세.
직업: 살수.
직책: 강호 무림의 삼대살수문 중 하나인 흑살문(黑殺門)의 현 문주.
경력: 삼십이건의 청부살인 완벽 처리.
현 무림에서 천하 삼대 자객 중에서도 수위를 차지하고 있음.
삼십삼, 흑칠랑은 이 숫자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삼십삼 번째의 청부살인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한데 청부 대상자가 여자였다.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진주 언가의 여식이란 말을 듣자 생각을 바꿔 청부를 받아 들였다.
그 정도라면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데 청부를 받고 죽일 여자를 찾아온 흑칠랑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어떤 씹어 먹을 자식이!”
중얼거릴 것도 없이 자신의 밥을 빼앗아 가고 말았다.
흑칠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일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하필이면 삼십삼 번째 청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그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데 사방을 살피던 그는 언교해가 죽었던 자리를 살피다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주 작은 무늬가 방바닥의 피 얼룩과 함께 자연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강호의 모든 문파 중,
단 두 개의 살수문만 알고 있는 교묘한 통신방법이었다.
흑칠랑은 그 무늬를 따라 글씨를 만들어 내었고 그 글을 읽어 나갔다.
어둠(暗) 속에 숨어 살지 않는다.
혼(魂)을 빼앗아도 마땅한 자만 죽인다.
살(殺)인을 해도 당당한 무인임을 잊지 않는다.
문(門) 밖을 벗어나면 자유인으로 산다.
사구로 된 시를 읽은 흑칠랑은 그 안에 숨은 사내의 기상을 느끼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어둠은 암(暗)이었다.
그리고 시 구의 맨 압자를 조합하면 암혼살문이란 말이 된다.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지금 바닥에 교묘하게 그려진 무늬 글자는 자신과
암혼살문의 후예가 아니라면 절대로 그릴 수 없었다.
‘드디어 나타났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어느 문파가 천하제일 살문인지
완전하게 가릴 때가 되었다. 네 놈은 내가 있을 때 나타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암천마검 흑칠랑은 그토록 기다리던 상대가 나타났음을 알게 되자,
가슴에 벅찬 환희를 느꼈다.
무려 삼백 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다.
그 지긋지긋한 천하제이살문이란 소리를 들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무림 역사상 최고의 살문은 암혼살문이었다.
그래서 흑살문의 역대 제자들은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그러나 이미 삼백 년 전에 있었던 다섯 번의 승부를 논하며,
언제나 암혼살문을 삼대 살문의 최고 위치에 올려놓았었다.
흑살문은 그것이 죽도록 수치스럽고 싫었다.
“이제서야 나타났는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
흑칠랑의 눈이 새파란 살기를 머금고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