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칠보둔형(七步遯形)
-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데,
단 일곱 걸음이면 충분하다
실제 아운은 보법에 큰 관심이 없었다.
우선 그가 아는 보법이란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에 불과했고,
기껏해야 좁은 범위에서 걸음을 옮기는 법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법을 극한까지 익혀 작은 공간에서 사용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칠보둔형신기(七步遯形神氣)를 읽어본 아운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칠보둔형의 뒤에 보법이 아니라 신기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법이 이렇게까지 대단할 수 있다니.'
아운이 감탄할 수밖에 없었던 칠보둔형신기는 비응천각괴의 최고 무공
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섬광어기풍(閃光魚氣風)이 빠르기로 치자면 강호무림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었고, 선풍팔비각(?風八飛脚) 또한 각법의 일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칠보둔형신기는 보법 그 자체가 하나의 신공이나 마찬가지였다.
첫 장에 비응천각괴가 적어 놓은 문구를 보았을 때만 해도 아운은 코웃음을
쳤다.
<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키는데,
단 일곱 걸음이면 충분하다. >
누가 이 말을 믿겠는가?
그렇다면 왜 칠초무적자 스승님에게 졌는가?
당연히 그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보법의 구결과 도해를 읽으면서 아운의 놀라움은 컸다.
칠보둔형신기는 비응천각괴 오칠이 그렇게 장담할 수 있을 만한 무공이었다.
물론 배우기에 결코 쉽지 않은 무공이었지만,
이 보법이 완벽해지면 일곱 걸음 안에 피하지 못할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 사부님이 일 사부님의 육삼쾌의연격포를 칠 초까지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 보법 때문인 것 같다.'
보법을 우습게 알았던 아운은 개안을 하는 기분이었다.
칠보둔형신기는 말 그대로 일곱 걸음에 대한 무공이었다.
그리고 그 일곱 걸음 속에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공격하는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보법 자체가 피하는 것에 중심을 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공격을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즉, 공격을 방어의 하나로 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운은 그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피하기만 하는 보법이라면 그렇게까지 감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비록 육삼쾌의연격포에 지긴 했지만 그것은 칠보둔형신기가 부족해서라기
보단 구전무적권문의 무공 자체가 워낙 특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보법을 육삼쾌의연격포와 함께 사용할 수 있다면.'
아운의 눈이 밝게 빛났다.
구전무적권문에도 분명 보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사부인 칠초무적자는 보법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신법도 남기지 않았다.
'대사부님의 뜻은 삼 사부님의 신법과 보법이 무적권문의 신법이나 보법
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하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보법이나
신법을 구전무적권문의 무공에 융합한다면, 어쩌면 그 뜻일지도.'
아운은 칠보둔형신기를 다시 한번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어 본 아운은 칠보둔형신기의 문제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았다.
'삼 사부님의 무공은 내공심법이 초식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다.'
비응천각괴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 터득해야 하는 심법이 천각둔형심법
(天脚遯形心法)이었다.
이 심법 자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여타의 심법에 비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심법이었다.
그러나 이 심법은 십단무극신공은 물론이고, 불괴수라기공에 비교해서도
많은 손색이 있었다.
물론 신공과 달리 심법이란 오로지 내공을 축기하고 단련하는 방법이고,
사문의 비전심법이라면 그 사문의 무공에 맞는 내공을 정심하게 축기해
주거나 사문의 초식 특성에 맞게 정제해주는 역할 이외에 다른 효능은
별로 없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심법과 신공은 분명히 달랐다.
신공과 연결된 초식의 경우는 그 신공으로 축기한 내공이 아니면 초식
운용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신공으로 파생되는 초식도 신공 내의 심법과 일체화 되어 있다.
이는 내공의 성질이나 특성과 관련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내공심법에 포함된 초식의 경우는 다른 내공심법으로 축기한
내공을 사용해도 큰 부작용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다는 말이었다.
아운은 그 점을 상기했다.
'육삼쾌의연격포에 칠보둔형신기를 제대로 함께 사용하려면 같은 내공심법
하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 사부님의 무공 중 심법을 버리고 초식만 십단무극신공의 내공을 끌어다
쓸 수 있다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무극신공의 특성으로 인해 삼 사부의
무공은 더욱 빨라지고 강해질 수도 있다.'
좀 엉뚱한 생각이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아운은 그때부터 칠보둔형의 연구와 함께 삼 사부의 무공을 무극신공에
접목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상당한 시행착오도 있었고,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걸릴 뻔한 일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십단무극신공이 만류귀종에 바탕을 둔 신공인지라
다른 초식을 응용하기에도 편하게 만들어졌고,
이 신공을 익히면서 다른 신공이나 심법을 익혀도 부작용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기에 큰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초식의 위력이 강할수록 특성이 강해 다른 무공과 융합하기 어려운
점이 있게 마련이었다.
비응천각괴의 무공은 그런 점에서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년이란 시간이 지나서야 아운은 비응천각괴의
무공을 십단무극신공의 내공으로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아운은 임독이맥이 뚫리면서 무공이 가일층 진보했다.
***
이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자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이 하씨 가문의
장자는 당장이라도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아직은 나갈 방법이 안 보였다.
'결국 내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 도달할 때까지 여기서 꼼짝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이 사부님의 말씀대로라면 불괴수라기공이 십 성에 달해야만
이 곳의 기관을 강제로 부수고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맘에 안 든다.'
아운은 싫었다.
우선 무공을 십 성까지 완성하려면 앞으로 십 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모든 무공이 그렇듯이 불괴수라기공도 뒤로 갈수록 배우기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진다.
사실상 십 성의 단계라면 불괴수라기공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십일 성이나 십이 성의 경지는 깨달음과 함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지라, 평생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경지였다.
그렇다고 십 성은 쉬운가?
팔 성까지 배우는데 오 년이 걸렸으면 구 성의 경지에 도달하는 시간은
그 보다 배 이상 걸릴 수도 있다.
또한 구 성에서 십 성에 도달하려면 평생이 걸려도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경지가 바로 십 성의 경지다.
이렇듯 상승무공이란 뒤로 갈수록 배우기가 어렵고 난해해진다.
보통 암혼살문에서 이 연공실에 들어온 후 문을 폐쇄하는 경우는,
암혼살문의 무공을 십 성 이상으로 터득할 때까지는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였다.
그것을 불괴음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불괴수라기공에 맞추어서 바뀌어
놓았었다.
그리고 그것이 불괴음자 자신의 발목을 잡게 만들었고,
아운으로 하여금 억울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벌써 이 안에 들어온 지도 오 년이 지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앞으로 십 년 안에 나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으로 보아 구전무적권문의 무공으로도 이곳을 빠져 나가려면 상당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 가능하단 이야기인데, 그것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아운이 정말 화가 난 것은 누군가의 안배대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 같은 신세 아닌가?
그건 아운의 성격하고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상한데서 하씨 가문의 고집이 다시 발동했다.
'내 의지대로 여길 나가고 말겠다.'
아운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
그리고 다시 이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아운은 자신이 배운 무공을 이용해서 석실 안을 하나씩 부셔
나갔다.
특히 그는 북경 하씨 문중에서도 천재로 알려졌던 인물인지라 학문에서
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우선 무극신공이 오 단계 이상이 되면서 연격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위력은 그에게 또 다른 도움을 주었다.
기관 진식에서도 모자람이 없던 차에 암혼살문의 석실엔 그 부분에 관한
서책이 여럿 있었다.
살문에서 기관진을 모른다면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 지식은 암혼살문의 연공실을 해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드디어 이 년이 지났을 때, 아운은 암혼살문의 연공실을 거의 완벽하게
해체하는데 성공했다.
만약 이 사실을 암혼살문의 전대 문주들이 보았다면 하늘에서 통곡
했으리라.
현재 살문의 연공실은 다시 연공실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이제 연공실 내의 기관도 어지간한 것은 멈추었을 것이다.
아운은 연공실을 나가는 마지막 문 앞에 섰다.
묵직한 철문은 철문과 붙어 있는 쇠벽과 함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가로 팔 척, 세로 일 장 팔 척의 철문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철문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 강제 폐쇄된 상황에서 이 문을 여는 것이라면,
십 성의 불괴수라기공을 운용하여 단 한번에 옆의 벽에 있는 천관도해의
구궁을 점하고 칠성을 폐하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능력 없이 욕심을 부리면 그 대가를 치르리라.
- 불괴음자. >
좀 더 해석해 놓으면 간단했다.
지금 문이 강제로 폐쇄된 상황이라면 문의 오른쪽에 그려진 천관도해라는
그림 진 안에 있는 구궁을 점하고 칠성 방위에 있는 돌기를 부수라는
말이었다.
단 반드시 십 성에 달한 불괴수라기공으로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열리지도 않을 것이고,
기관이 작동해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협박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운은 문 옆에 그려진 천관도해를 보았다.
철벽에 그려진 도해는 놀라우리만큼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을 그린 사람의 무공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아운은 그 도해가 수라정을 이용해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해는 곡선과 직선을 이용해서 하나의 진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진의 구궁과 칠성 방위 부분에 쇠로 된 돌출 부분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즉, 불괴수라기공으로 구궁 방위에 있는 쇠 돌기를 누르고,
칠성 방위에 있는 돌기는 부수면 간단한 일이 된다.
그러나 지금 아운의 불괴수라기공은 팔 성 수준이었고,
십단무극신공은 육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대사부인 칠초무적자가 말한 칠 단계의 경지에도
미달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운은 태평했다.
밖에 나가서 더 배우면 된다는 편리한 생각이 아운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은 다른 사부들의 무공도 함께 터득
했으니, 처지가 다르다는 생각도 그 안에는 포함되어 있었다.
즉, 다른 사부들의 무공이 일 단계 정도의 무극신공은 능히 메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대사부인 칠초무적자의 말을 십단무극신공이 칠 단계에 이르면이 아니라
그 정도 수준이라고 해석을 한다면, 아운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모두 제 편한 방식대로 해석한 아운의 생각이었다.
천관도해를 바라보던 아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도해 따위는 아예 싹 무시하고 무엇인가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철문
앞에 섰다.
“이야압!”
괴성이 들리며 아운의 두 손이 번갈아 가면서 철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선 밝은 색의 광채가 일어나 번개처럼 철문을 강타했다.
꽈꽈꽝!
그리고 폭음과 함게 철문이 날아가 버렸다.
아운은 섬전어기풍의 신법을 발휘해서 부서진 문 사이로 뛰쳐나갔다.
삼십여 장을 앞으로 쏘아가자, 막힌 곳에 도달했다.
그곳은 원형의 장소였는데, 앞이 막힌 대신 하늘 위쪽은 원형의 우물형으로
길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약 십 장 높이의 천장은 또 다시 무엇인가로 막혀 있었다.
그리고 그 우물은 지금 조금씩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려고 하는 참이었다.
아운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 올랐다.
이미 다섯 번을 내친 그의 주먹이 여섯 번째로 주먹을 뻗어냈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리며, 그의 몸이 그 위로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우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원래 철문이 강제로 부서지면 작동하기로 돼있던 기관은 이미 전부 부서진
다음이었고, 아운으로서도 어쩔 수 없던 한 가지 기관 작동으로 인해
연공실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아운은 이미 연공실을 벗어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
오르는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육삼쾌의연격포 중에 연환육영신기와 섬전어기풍의 신법이 삼백 년 만에
부활한 셈이었다.
그 육중한 철문도 연환육영뢰(연환육영신기)의 다섯 주먹을 견디지
못했으며, 우물을 가리고 있던 철판도 여섯 번째의 주먹에 박살이 나
버렸다.
아운은 일단 위험을 벗어나자, 더 없이 통쾌한 기분이었다.
우선 생각했던 대로 대단한 위력의 연환육영뢰가 마음에 들었고,
남의 안배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에 나온 것이 기분 좋았으며,
지금 시전한 섬전어기풍의 가공할 속도가 또한 그의 기분을 흡족하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운은 세상에 나왔다.
***
“크하하하!”
아운은 오랜만에 힘차게 웃었다.
그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아주 멀리 번져 나갔다.
“고가, 이 개자식아! 조그만 기다려라! 네 코뼈를 분지르기 전에 어떤
계집부터 밟아 놓고 찾아가겠다.”
아운은 씨근덕거리며 일단 자신이 있던 위치를 둘러보았다.
대략 계산을 했을 때, 자신이 연공실 안에 있었던 시간은 칠 년 정도였다.
이제 그의 나이 이십오 세가 된 해이기도 했다.
길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그는 홀가분한 마음이 되자마자, 미친 듯이 자신이 나왔던 우물가의 근처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계집, 제발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거라. 완전히 뭉개 주마.'
아운의 마음은 그의 행동을 한참 앞질러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찾아낸 계집과 모대건의 거처는 이미 불에 타 버리고 집터만
남아 있었다.
아운은 허탈한 표정으로 겨우 희미하게 남은 집터만 바라보다 성질을
죽여야 했다.
'계집아, 네가 아무리 숨어 보았자 소용없다. 내 반드시 찾아내서 네 년의
주리를 틀어 놓고 말겠다.'
아운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분을 죽이다가 돌아섰다.
그래도 한 가지 확인한 것이 있다면, 자신을 잡아온 집안 내력이 호연성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라 하겠다.
왜냐면 지금 불타서 없어진 집의 흔적은 길어야 오 년 정도인 것 같았고,
오 년 전에는 그 집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이곳은 위치상으로 불괴음자가 말한 그의 집이 맞았다.
그렇다면 오 년 전까지 그 집의 주인 노릇을 한 것은 호연성의 후예이거나
최소한 어느 정도 상관이 있는 곳이란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근처 십 리 안에서 집이나 집터가 이곳 한 군데 뿐인 것으로 보아 틀림은
없을 것 같았다.
타고 남은 잔재와 불에 탄 흔적으로 일단 자신의 추측을 확인한 아운은
돌아섰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몸이 가벼운 느낌이었다.
한동안 산길을 달리고 나서야 인적이 있는 곳에 도착한 아운은 마침
산나물을 캐러 나온 듯한 두 명의 여자들을 보았다.
혹시 상대가 놀랄까봐 조심스럽게 여자들에게 다가선 아운이 물었다.
“말 좀 묻겠습니다.”
갑자기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아운을 본
두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리고 결국.
“꺄아악!”
하는 비명과 함께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가?
아운은 여자들이 너무 놀라자 조금 당황했다.
더군다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고개까지 돌리는 것을 보고 칠 년 간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닐 정도로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휴우, 이런 난감할 때가.”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던 아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수염이 덥수룩한 것이 그의 당황한 표정을 그나마 감춰준다.
“이, 이…”
차마 말을 끝내지 못한 아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칠 년 동안 입고 있던 옷은 삭을 대로 삭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오 년쯤 지난 후엔 전부 떨어져서 아예 알몸으로 지냈었다.
그게 버릇이 되고 보니 자신이 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스스로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던 사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혹시 자신들이 뭔가 잘못 보았나 싶을 정도였다.
두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분명히 보았지?”
둘은 모두 생각보다 나이가 어린 이십대의 여자들로 보였다.
그중 언니인 듯한 여자의 물음에 나이가 좀 어린 듯한 여자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정말 크다…”
어린 듯한 여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을 나타났던 누군가가 사라진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도망가지 않아도 되는데…”
언니인 듯한 여자는 무척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비록 사라진 사내가 수염이 덥수룩했지만, 어차피 그녀들이 사는 화전민
마을에선 그 정도가 보통이었고, 무엇보다도 지금 사라진 남자처럼
미끈한 몸매의 남자는 없었다.
***
'어쩐지 유난히 몸이 가볍더라니. 이거 무공을 익히면서 내 건망증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데…. 큰일이군.'
아운은 조금 걱정스런 얼굴로 신법을 펼쳤다.
사실 아운은 어렸을 때부터 가끔씩 나타나는 심한 건망증 때문에 고생을
하곤 했었는데, 그다지 오래가거나 하진 않았기에 크게 지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건망증으로 인해 망신을 당하고 보니,
그 건망증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낙천적인 그의 성격상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날 밤, 두 명의 처녀들이 사는 화전민 마을에서 마을 청년의 옷이
도독을 맞고 말았다.
한데 도둑 맞은 옷 대신에 여우가죽 두 개와 토끼 두 마리,
그리고 산돼지 한 마리가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것에 비해서 너무 많은 대가였다.
그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화전민 마을에서 훔친 옷을 입은 아운은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과연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
삼대 문파의 맥을 이은 만큼 그 문파와 관련한 몇 가지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일단 삼 사부인 비응천각괴는 특별한 문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진전을
이은 것 뿐인지라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사문이라고 생각하는 구전무적권문의 유지는
지금의 실력으론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다.
차후 무극신공의 경지가 팔 단계에 도달하고 난 다음에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되고 나자 남은 것은 이 사부인 불괴음자의 사문인 암혼살문의
문제가 제일 먼저 걸렸다.
비록 곁다리로 배웠지만, 싫던 좋던 그래도 이 사부님의 사문이 아닌가?
한데 연공실과 터전마저 완전히 부수어 놓았으니, 은근히 미안했다.
'비록 내가 암혼살문의 뒤를 이어 살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일단 암혼살문
의 의무는 충실히 하자. 그리고 의무를 완수하는 와중에 그 계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돈도 좀 필요하고.'
일단 결심을 굳힌 아운의 신형이 섬전어기풍의 신법으로 하늘을 갈랐다.
물속을 헤엄치는 고기가 아니라 바람 속을 헤엄치듯 날아가는 아운의
신형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멀리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