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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왕무적(拳王無敵) - 초우
빈손으로 세상에 나와 단 두 주먹으로 무림을 평정하였다.
세상이 그를 권왕(拳王)이라 하였고,
먼 훗날 무림에서 그를 일컬어 말하길…
권왕(拳王)만이 진정한 무적(無敵)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하려 한다.
서장(序章). 영운가출(嶺雲家出)
- 하영운은 맨 몸으로 가출을 하고…
북경의 하씨 문중은 비록 몰락하였지만, 한때는 그 가문에서 황사(皇師)가
나왔을 정도로 대명(大明)의 알아주는 명문이었다.
한데, 그런 하씨 문중의 안방에서 키가 자그마한 십이삼 세 소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며, 그 소년의 앞에는 나이 사십이 넘은 하씨 문중의
가주가 고집이 가득한 얼굴로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비록 자그마한 몸집의 소년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 눈에 가득한 고집과 맑은 정광은 보통의 소년과는 남다른 무엇인가가
있음을 그대로 전해 주고 있었다.
가주의 표정은 몹시 화가 난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두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이놈, 학문이 왜 싫단 말이냐?”
“남자로 태어나 쪼잔하게 책상머리에 앉아 시간이나 죽이는 짓은 장부가
할 도리가 아닌 줄 압니다.”
“이, 이런 쳐 죽일 놈! 네 놈이 황사의 위에 오르시기까지 한 고조부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려는 것이냐!”
“아버님, 공부를 하는 것이야 말로 고조부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무공엔 붓이나 먹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잠시 말문이 막힌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오는 것은 갑절의 울화였다.
“이 우라질 놈아! 그것도 농담이라고 하는 것이냐!”
아들의 표정은 태연했다.
당장 주먹이 날아와도 그 모습이 변할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내심 감탄은 했지만, 지금 그걸 얼굴에 표현할 순 없는 일이다.
“아버님, 누가 뭐라 해도 전 반드시 무공을 배워서 나와 우리 가문에
모욕을 준 고대성, 그 놈의 코뼈를 분질러 놓아야만 속이 후련하겠습니다.
전 반드시 무공을 배우고 말겠습니다.”
“이놈아! 우린 문가(文家)고, 고가는 대장군가, 즉 무가(武家)란 말이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고씨 가문 이상으로 출세하면, 너는 말 한 마디
로 그 놈을 죽이고 살릴 수 있게 된다.”
“난 일대일로 겨루어 그 놈의 코뼈를 깨 놓아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다. 직위를 이용해 상대를 괴롭히는 것은 장부가 할 짓이
아닙니다.”
“이 놈! 그래서 그 무식하고 쌍놈이나 배우는 무공을 배우겠단 말이냐?”
“무식하고 쌍놈이나 배우는 무공이라니요. 그렇다면 무가의 명문 여식
으로써 나와 태중 혼약한 북궁연(北宮娟)은 뭐란 말입니까?”
“이. 이놈이.”
아버지인 하문영(何聞永)의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미 하영운(何嶺雲)과 태중 혼약한 북궁연은 무림의 명가 중에서도
명가인 북궁세가의 여식이 아닌가?
지금 돌아가신 하문영의 아버지이자 하영운의 할아버지인 하대현(何大賢)
과 북궁가의 현 가주인 북궁손우(北宮遜友)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배운 사이였다.
비록 무가지만 문을 존중하는 북궁가는 학문에도 적지 않은 비중을 두고
있었는데, 당시에 둘은 정말 마음이 잘 맞는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영운은 무려 네 살이나 나이가 많은 북궁연과 태중 혼약을 한
사이가 되었었다.
사실 하영운의 입장에서는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네 살이나 많은 나이라니.
자신이 왜 나이 많은 아줌마와 결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포기한 상황이었다.
뭐 사실 약혼녀인 북궁연의 얼굴은 기억도 못했지만,
하도 예쁘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실제 두어 번 본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때는 하영운의 나이가 어려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말문이 막혀 떠듬거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하영운은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오늘 절실하게 깨우쳤습니다. 학문으로 복수를 하려면 머리에
쥐가 나고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주먹은 아주 쉽고 간결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놈아! 한 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이 바로 오판의 지름길임을
모르느냐?”
“포기하십시오, 아버님. 우리 하씨 집안의 고집은 이미 고조부님 때부터
유명했고, 저의 고집은 그 중에서도 발군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아버님
이십니다.”
자식을 나무라던 하문영의 얼굴이 퍼렇게 변해 버렸다.
그러고보니 하씨 집안의 고집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우선 하씨 집안의 고조부(소년에게 고조부)는 당시 유명한 고관대작이었던
선우세가의 여식을 보고 한 눈에 반해서 청혼을 했었다.
물론 당시에 보잘 것 없는 유생이었던 그를 보고 선우세가는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소년의 고조부인 하성운(何星雲)은 그때부터 그 집 앞에 움막을
짓고 그 움막에서 밥을 먹고 공부를 하며 무려 십 년 동안 버틴 끝에
결국 결혼 승낙을 받고 말았다.
이미 하성운의 소문이 널리 퍼져서 달리 다른 곳에 시집보낼 수도 없는
처지였고, 십 년이나 변함없는 소년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했던
선우세가였다.
한데 그 고집으로 결국 출세를 했고, 황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황사가 되고 나서도 문제였다.
그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황제도 황태자도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고집 때문에 황궁에서 쫓겨난 하성운은 그래도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하씨 가문은 뛰어난 학문과 고집(?)으로 유명한 가문이 되었다.
또한 하영운의 할아버지도 당대를 떨어 울리는 학문의 소유자였지만,
황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그 한 가지 이유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그 아들인 하문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데 하영운은 하씨의 조상들 중 그 누구보다도 더욱 고집이 세고 성질이
급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고집과 그 성격으로 어떻게 어린 나이에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학식을 지니게 되었는지 묻는다면, 그 또한 고집 때문이었다.
공부하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걸 완전하게 알 때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집중력이고 대단한 고집이었다.
소년의 고집을 잘 아는 하문영은 난감했다.
결국 그는 한발 뒤로 물러나기로 한 다음 소년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떠냐?”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북궁연을 오라해서 그녀에게 복수를 시키면 되지 않겠느냐? 내 듣기로
연아의 무공이 북궁가 역대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 말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이 들었다.
“아버님은 지금 저에게 아녀자에게 기대어 복수를 하라 이 말입니까?
그것이 어찌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장부는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지 않는다 했습니다. 어찌 그 이치를
잘 아시는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더군다나 아녀자에게…”
소년은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화가 극에 달한 모습인지라 소년을 지켜보고 있는 하문영까지 뜨끔했다.
“이놈아, 그럼 어쩌란 말이냐? 제발 네 어머니와 여동생을 생각해서라도…”
“저를 보내 주십시오. 훌륭한 스승을 만나 반드시 무공을 성취하고 돌아
오겠습니다. 고대성의 코뼈를 분질러 버릴 만큼만 무공을 익혀 돌아오겠
습니다. 어머님이야 아버님이 계신데 뭐가 걱정이십니까? 그리고 영영이야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닌데, 지가 알아서 크면 되지요.”
하문영의 얼굴에 노화가 꽃처럼 피어올랐다.
말로 안 되자 이젠 언성으로 누르려는 듯 하문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놈, 안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놈은 학문을 해야 한단 말이다. 하씨
문중의 장래가 네놈에게 달린 것을 모른단 말이냐?”
“소자는 이미 결심을 굳혔습니다.”
“뭐야! 이런 육시랄 놈 같으니.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이놈의 옷을
홀라당 벗겨서 방 안에 가두고 문을 걸어 잠가라.”
그렇게, 제법 유명했었짐나 지금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던 북경 하씨
집안의 장남이 방안에 벌거벗은 채로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 자정을 기해 약 십이삼 세 가량의 소년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북경의 거리를 뛰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급하게 구한 거적을 몸에 둘둘 두르고 북경의 남문 근처에
숨었다가 새벽에 문이 열리자마자 거지 흉내를 내며 북경을 빠져 나갔다.
이렇게 한때는 북경이 아니라 대명 제일의 천재에 그 천재성 이상의
고집불통이라고 불리던 기재 하나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갔다.
완전히 빈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