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장. 일상(日常)-비로소 돌아오다
싸움은 외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와 비슷한 시간에 내원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 들어온 것인지 야행복을 입은 일단의 무사들이 내원을 휘저으며 보이는 족족 베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막아선 것은 가주의 가족들이 머무는 지역을 지키던 수신 호위들이었다. 이내 그들과 야행복을 차려입은 밀기대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거칠고 사나웠다. 지킬 것이 있는 이들과 그것을 빼앗으려는 이들의 혈투에 내원은 삽시간에 피와 시신으로 도배가 되었다.
그 상황에서 가주인 고유장과 몇몇 장로들이 나타났다.
“이놈들!”
추상같은 호통에 이어 상승의 절기가 쏟아져 내렸다. 비록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초절정에 이른 고강한 고수인 고유장은 물론이고, 절정에 달한 장로들의 무위는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한데, 그런 이들을 맞아 일방적으로 몰리던 밀기대가 일정한 검진을 짜자 오히려 고유장과 장로들이 위험에 처했다. 그에 수신 호위들이 다시금 사납게 달려들었다.
절강고가 곳곳이 싸움터가 되고, 사방에 비명과 병장기 소음이 뒤덮였다. 거기다 누가 질렀는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절강고가의 내부는 아비규환의 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고일천과 일기대는 버거운 적을 맞아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 이곳저곳을 누비며 사촌들을 구하는 고일천의 움직임은 단연 발군이었다.
그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던 고일천을 어호의 눈짓을 받은 밀기대원 하나가 가로막았다.
“이놈!”
두말없이 쳐내는 고일천의 검을 상대는 예상외로 어렵지 않게 막아섰다. 그에 이채를 머금은 고일천의 검이 폭풍처럼 밀어닥쳤다.
한데, 그런 고일천의 검을 상대도 빠르게 움직이는 검으로 막아서는 것이 아닌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한 고일천의 자세가 바뀌었다. 가주와 소가주에게만 전해진다는 일성검형의 마지막 오초 참극의 기수식이었다.
이내 고일천의 검이 중단을 갈랐다. 그것을 막으려면 상대도 의당 중단을 방어해야 하는 법. 한데 상대는 엉뚱하게도 하단으로 검을 세웠다.
츠팡-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장기 소음이 터졌다. 중단으로 날아들던 고일천의 검이 느닷없이 아래로 꺼지며 상대의 하단을 쓸어간 까닭이다. 자신의, 아니 절강고가의 비기가 사전에 읽혔다는 충격에 잠시 멈칫거린 고일천의 가슴을 어느새 다가선 밀기대원의 검이 꿰뚫고 지나갔다.
움찔.
그 고통에 허우적대던 고일천의 손에 상대 밀기대원의 복면이 벗겨졌다. 그렇게 나타난 얼굴을 본 고일천의 눈은 더할 수 없이 커졌다.
“네… 흐윽… 가 어… 허억… 찌…….”
마지막 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한 고일천의 목이 힘없이 떨어지자 그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들고 돌아서는 이는 둘도 없는 친우였던 모용휘였다.
그제야 고일천의 비기를 막아낸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고일천은 기억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언젠가 술김에 마지막 비기의 특징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에게…….
“이쪽은 다 정리되었습니다, 신임 대주.”
어호의 보고에 잠시 눈가를 떨던 모용휘가 명했다.
“내부를 샅샅이 뒤져라. 고이현을 찾아 주인께 진상해야 한다. 서둘러라.”
“명!”
복명한 야행복의 사내들이 사방을 뒤지는 동안 모용휘는 물끄러미 죽어 널브러진 고일천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부친은 어호를 통해서 요구했다. 친구를 배신하고 밀기대의 신임 대주가 되어 살아남든지, 의리를 지키며 죽으라는 것이었다.
몇날 며칠의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살아남겠다는 것이었다. 저주만큼 강한 이기심이 그의 핏줄에 흐른다는 것을 모용휘는 그날 처절하게 깨달아야만 했다.
쾅-
무지막지한 충격파와 함께 절강고가의 정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와 함께 주변에서 싸움을 벌이던 모용세가의 무사들과 절강고가의 무사들도 한낱 육편이 되어 흩어졌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파괴력에 무사들의 시선이 모여들기 무섭게 절강고가의 무인들 속에서 반색이 터져 나왔다.
“거, 검마다. 검마 대협이 도우러 왔다!”
그 말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검마란 이름 하나에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을 살려 보낼 마음이 고덕에겐 없었다.
가벼운 손짓의 끝에서 수십 개의 혈인이 튀어올랐다. 핏빛으로 부서져 내리는 혈인들과 함께 숨이 끊긴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광경을 연출한 고덕이 안으로 사라졌지만, 살아남은 절강고가의 무사들은 환호성도 지르지 못했다. 고덕의 절대적인 무위에 질려 버린 탓이었다.
고유장과 장로들의 주검을 밟은 밀기대가 안으로 밀어닥쳤다. 이내 몇몇 여인들로 이루어진 근접 호위들이 나섰지만, 그들은 곧바로 밀기대에 파묻혀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어머니의 앞을 막아선 고이현의 눈에선 눈물이 계속 흘렀다. 적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지만, 저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것은 오라비와 부친이 절명하였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이현의 눈앞으로 모용휘가 나섰다.
“모, 모용 오라버니?”
놀라는 고이현의 음성을 싸늘한 모용휘의 명령이 덮었다.
“저년들을 잡아라!”
그 명에 몇몇 밀기대원들이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와지끈-
불길한 소음과 함께 옆 건물이 통째로 주저앉으며 자욱한 먼지가 일어났다.
“콜록콜록.”
사람들의 기침 소리가 사라질 때쯤 가라앉는 먼지 사이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공자님!”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던 고이현이 고덕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이던 고덕의 시선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용휘와 밀기대원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수십 개의 현월이 따랐다.
“크아아아악.”
자그마치 여섯 개의 현월에 둘러싸인 채 갈기갈기 찢겨 죽는 모용휘의 비명 소리가 내원의 앞마당을 울렸다.
놀라운 소문이 세상을 강타했다. 모용세가가 절강고가를 기습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소문은 그 보복으로 검마가 모용세가를 적몰시켰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주춧돌 하나 남지 않은 폐허의 모용세가를 보며 검마의 잔혹함에 치를 떨었다.
그런 소문이 한참 퍼져 가던 시기, 사납게 생긴 사내들에 둘러싸인 한 대의 커다란 마차가 하포로 들어서고 있었다.
* * *
작은 마을인 하포 거리 전체에 휘장이 걸리고 폭죽이 연이어 터졌다. 사람들은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곳곳에서 연을 띄우고 폭죽을 터트렸다.
그런 들뜬 분위기의 하포로 낚싯대를 걸어 멘 사내 하나가 들어섰다.
그는 잔뜩 들뜬 마을의 잔치엔 관심이 없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바닷가의 높은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낚싯줄도 없는 낚싯대를 드리웠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사내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한창 결혼식 준비로 바쁘던 고덕의 시선이 저 멀리 절벽으로 향한 것은 그 사내가 자리를 잡은 직후였다.
밖으로 나서는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협련을 고덕이 제지했다.
“혼자 갔다 오지.”
“하오나 오늘은…….”
“괜찮아. 결혼식 준비나 신경 써줘.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 말에 협련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물러나자 고덕이 휘적휘적 걸어 절벽 위로 올라섰다.
“잘 잡히나?”
슬쩍 사내의 곁으로 앉으며 묻는 고덕의 물음에 사내가 웃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입질은 시작을 했는데, 결과는 낚싯대를 거둘 때야 알 수 있겠지.”
“미끼는 제대로 쓴 거 같다만, 하필 오늘이냐?”
“잔칫날만큼 피 보기 좋은 날도 드물거든.”
사내의 말에 고덕의 입매가 비틀렸다.
“미친놈.”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어떻게 썰어줄까?”
“글쎄, 그 전에 잠시 대화로 해결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사내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난 대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들어는 보았으면 좋겠는데, 어때? 잘하면 잔치도 망치지 않을 테고. 네 손님들도 많던데 말이야.”
사내의 말에 잠시 망설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
“네가 짐작하겠지만, 나도 마총의 후예야.”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너도 이젠 느끼고 있겠지만 마총의 무예는 끝이 없어. 원한다면 수백 년간 죽지 않고 살 수도 있지. 나처럼.”
“얼마나 산 건데?”
“한 오백 년 되나?”
“지겹게도 오래 살았군.”
“그래, 지겹지. 그래도 참고 살았던 건 이 세상을 한번 움켜쥐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뭐, 천하 통일?”
“우습게 들리나?”
“글쎄, 난 그런 쪽엔 워낙 관심이 없는 편이라서.”
“그런가? 하지만 난 관심이 많았지. 사내로 태어나서 그거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어디의 누구와 똑같은 말을 하는군.”
“그렇게 당찬 사내가 또 있던가?”
“글쎄, 당찬 건 모르겠지만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 삶인지에 대해선 이해가 부족한 사내는 하나 보았지.”
“자넨 너무 비관적이군.”
사내의 평에 고덕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소리, 나만큼만 긍정적이라고 해.”
“그런가? 하면 내게 오게. 하나로 통일된 이 세상을 주지. 나에겐 통일이 목적. 그 후엔 소용없는 세상이니, 자네에게 물려주겠네. 이후에도 유지를 하든지 아니면 원래대로 돌려놓든지 그건 자네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보고 네 뒤치다꺼리나 하란 건가?”
“아니,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는 아니야. 마총의 후예에게 그건 실례되는 말이지.”
“하면?”
“동료라고 해도 좋고, 후계자라고 해도 좋겠지. 그저 내 앞을 막지만 않는다면 그 이후는 모두 자네 거란 말이야.”
“왜 이런 제의를 하는 거지?”
“마총의 후예를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그쪽이 죽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자신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모양이지?”
사내의 물음에 고덕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런 너는 어떤데?”
“나야 천하 만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분이시지.”
너무도 당당한 말에 고덕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럼 하나만 묻지. 극아는 깨고 하는 소리겠지?”
“극아?”
“왜, 보지 못했나?”
아니, 보긴 했다. 스치듯이. 하지만 그 글귀에 무슨 뜻이 있었단 말인가? 당황하는 사내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덕이 물었다.
“알려 줄까?”
“정말인가?”
반색하는 사내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것도 아닌걸, 뭐.”
“그렇다면 부탁하지.”
사내의 답에 고덕이 그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 댔다.
“있잖아…….”
뒤이은 말은 너무나 작아서 바람조차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게 극아의 오의를 전한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럼 고기 잘 잡아.”
그 말을 남긴 고덕이 언덕을 내려갔지만, 사내는 역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고덕이 서둘러 고길의 집으로 내려오자 결혼식 준비가 다시 탄력을 받았다. 여러 하객들이 둥그렇게 자리를 잡자 이내 협련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외쳤다.
“신랑 입장~”
굳게 닫혔던 방문이 열리며 신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의 사모관대를 쓴 신랑이 가장 가까운 이의 도움을 받으며 성큼성큼 들어서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신랑이 서자 협련의 음성이 다시 울려 퍼졌다.
“신부 입장~”
붉은 성장에 붉은 주단으로 얼굴을 가린 신부가 등장하자 식장이 떠나갈 것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부의 자태도 고왔지만, 신부를 부축하며 나선 고이현과 서은영의 모습도 아리땁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이내 신랑, 신부가 나란히 서자 사회의 구령에 맞춰 신부 곁에 서 있던 두 여인이 신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주단을 걷었다.
“오호~”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신부의 아름다움이 뛰어났던 까닭이다. 한데 얼굴이… 호철랑도 아니고, 신부는 팽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모관대에 연신 싱글벙글인 신랑은 왕팔이다. 고덕의 부축을 받으며 식을 올리는 왕팔의 입은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는 하객들 중에 끼어 있는 도왕의 표정은 마치 품 안의 보석을 강도라도 맞은 듯했다.
“빌어먹을 자식, 대협하고 떨어지기만 해도 갈아 마셔 버릴 거야.”
작게 중얼거리는 도왕의 말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파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다.
그런 흥겨움 속에 배가 불룩한 호철랑, 아니 이젠 호여랑이 된 그녀가 방에서 나왔다. 그러자 고덕이 쪼르르 달려가 부축을 했다.
“이렇게 나오다 넘어지면 어쩌려구.”
“이제 오 개월이에요. 돌아다녀도 상관없다고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안 돼. 방에 있어.”
고덕의 유난에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 둘이 울렸다.
“상공!”
그 음성에 뒤를 돌아본 고덕의 시선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노려보는 고이현과 서은영의 모습이 보였다.
“아하하, 그, 그냥 부축만 한 거야. 정말이야. 나 딴짓 안 했어.”
“딴짓 안 했는데 배가 불러와요?”
“그, 그거야 예전에 내가 잠시…….”
당황해서 더듬는 고덕에게 고이현이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요. 하여간 남자는 다 늑대라는 어머니 말이 맞았어. 뭐해요, 바람이 얼마나 찬데. 언니는 들어가고, 상공은 저리 가요.”
고이현과 서은영의 손에 힘없이 밀려나는 고덕을 바라보는 고길 내외의 입가엔 한없이 따스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