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장. 충격(衝擊)-신기원을 이룩하다
창룡검제를 불러내기 위한 계책을 경공왕이 여러 가지로 제안했지만, 고덕은 조금 더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불쑥 방문을 열고 나가 방 밖에 서 있던 주천의 무사 셋의 목을 잘라버린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경공왕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그렇군. 가장 쉬운 방법을 두고 그리 걱정을 했다니. 으하하하!”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어젖히는 경공왕의 웃음 속에서 고덕은 왠지 모를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고덕의 생각대로 반응은 곧바로 왔다.
주천의 무인들을 베어버린 지 삼 일. 스멀거리는 기세가 경공왕의 침실 구석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어 나오던 창룡검제는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경공왕의 모습에 이채를 머금었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나?”
“방금 전에 알았지.”
“어떻게?”
“이 친구가 말해주더군.”
경공왕의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리던 창룡검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자신의 감각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곳에서 버젓이 사람의 모습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
고덕의 인사에 표정을 굳힌 창룡검제가 답했다.
“그렇다고 해두지. 지금 보인 능력이나 기세를 보니 자네가 검마란 후배인 모양이군.”
“검마라 불리기도 하는 건 맞지만, 그쪽 같은 선배를 둔 적은 없어.”
“그런가? 하긴 사조뻘 되는 이가 선배라고 칭하긴 우습겠지.”
“사조라……. 내 사부가 누구인지는 아나?”
“천마라 말하고 싶은 건가? 마총의 후인이어서?”
제법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고 있는 상대의 말에 고덕은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이미 마예삼본을 쓰는 이를 겪어본 후이니,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하다고 짐작했던 까닭이다.
“틀렸어. 내 사부는 탁결마. 천마신교 만마대의 십삼대 소속 칠조의 조원이셨지.”
사실이다. 고덕이 처음 마교에 입문하면서 사부로 모셨던 이가 그였으니까. 훗날 듣기로 그는 사라진 제자를 찾고자 중원을 뒤지고 다니다 이름 없는 백도 무인의 검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고덕은 언제나 자신의 사부는 그밖에 없다고 여겼다.
“탁결마라……. 어떤 이였는지는 모르지만, 뛰어난 제자를 두었으니 여한은 없겠군.”
“그렇게 되려고 노력 중이지.”
“뭐, 그럴 필요가 있겠나. 이제 사부를 곁에서 모시면 되는 일을.”
그 말과 함께 천천히 검을 뽑아드는 창룡검제에게 고덕이 물었다.
“여기서 하자고?”
“왜, 좁아서 싫은가?”
“그거야 상관이 없지만, 아까운 것들이 제법 많아서 말이야.”
그러면서 둘러보는 고덕의 시선엔 적지 않은 고가의 자기들과 그림들이 보였다.
“그렇군. 아깝겠어.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 것이 아닌데.”
“쯔쯔, 그러니 남의 밑에나 있는 게지. 조금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 봐. 이게 모두 내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어?”
“강탈 따위엔 관심이 없네만.”
“저런저런, 여전히 창의성이 부족하다니까. 왜 빼앗을 생각만 해. 정당한 대가로 받을 수도 있는 것을. 보라고.”
그 말 끝에 고덕의 시선이 경공왕에게 향했다.
“저 작자의 목을 베어내면 저 자기 하고 저 그림, 저 주시는 겁니다.”
“원한다면 더한 것도 주지.”
경공왕의 답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고덕이 답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참, 그리고 지금 잠시 방을 비워주시겠습니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란 걸 직감한 경공왕은 두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방이 비워지자 고덕도 명혼을 빼들었다.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 몰라도,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준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그만한 실력이 있길 바라지.”
말의 끝을 좇아 창룡검제의 검이 시퍼런 강기를 이끌고 쇄도해 들었다.
츠팡-
그 검을 휘돌면서 가볍게 튕겨 낸 고덕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모습을 감췄다.
쾅-
폭음과 함께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난 건 예상외로 공간권으로 공격에 나섰던 고덕이었다.
“뭐지?”
“밑천까지 드러내고 싸워달라는 건 아니겠지?”
상대의 비아냥거림에도 고덕은 맞받아칠 수 없었다. 분명 공간권은 제대로 들어갔다. 한데 무언가에 막혔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이 쳐냈던 공간권이 고덕을 덮쳤던 것이다.
“점점 재미있어지려고 하는군.”
고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룡검제의 검이 무서운 검속을 이끌고 날아들었다. 쾌검이라면 천하에서 고덕을 따를 자가 없다.
쐐애애애액-
섬혼이 공간을 가르고 뻗어나갔다. 순간, 무언가가 자신의 옆구리를 베고 들어오는 걸 느낀 고덕은 섬보를 펼쳐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서도 옆구리의 옷이 길게 찢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문제는 남겨진 상흔이 섬혼의 것이란 거였다.
“남들이 내게 사술, 사술 하더니 그 기분을 이제 알겠군.”
“무슨 소리. 아직 멀었거늘!”
창룡검제의 호통 소리와 함께 검의 그림자가 온 방 안을 채워왔다. 막자면 못 막을 것도 없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꺼내도 그 위험이 고스란히 돌아올 수 있다는 느낌에 고덕은 방을 벗어나기로 했다.
이내 그의 신형을 기점으로 수십 개의 현월이 튀어나갔다. 그렇게 튀어나간 현월들이 창룡검제의 검영들을 모조리 부수고 방도 부수어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검영을 부순 현월들이 마치 거울에 반사되어 돌아오듯 순식간에 고덕을 향해 들이닥쳤다.
“흐읍!”
짧은 기합성과 함께 최강의 호신기공인 천마신갑을 펼쳤지만, 충격의 일부는 고스란히 고덕의 내부를 뒤흔들었다.
“쿨럭-”
밭은기침과 함께 피가 쏟아졌다. 내상을 입었다는 반증이다. 부아가 치민 고덕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기세를 돋웠다.
실력이 달려 피를 보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공격에 되받아쳐지며 밀려나는 상황에 분노가 인 것이다.
“좋아, 해보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
마음을 독하게 먹은 고덕이 안정화되어 있던 내공을 들쑤셨다. 이내 잠자던 괴물이 깨어났다. 곧바로 내공이 비틀린 엿가락처럼 꼬여 가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혈맥을 돌기 시작했다.
순간, 고덕의 신형에서 이십여 개의 현월이 튀어나가는 동시에 명혼이 중단에서 상단으로 그어졌다.
콰과과과광-
뛰쳐나갔던 현월은 모조리 되돌아와 고덕을 때렸고, 회심의 일격으로 날린 공간도는 고덕의 앞섶에 기다란 자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천마신갑과 섬보가 없었다면 절대로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만큼 빠르고 사나운 공격이었다.
그 사이를 창룡검제의 검이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섬보가 다시 일고, 고덕의 신형을 좌로 끌어당겨 놓은 탓에 상대의 공격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언뜻 생각난 것은 진법이다. 하지만 어떻게. 사람이 움직이며 진법을 설치한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창룡검제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고,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한 고덕은 오로지 피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길 얼마, 고덕의 뇌리로 마총에서 보았던 글귀 하나가 떠올랐다.
극아(克我)
왜 그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번 떠오른 글귀는 고덕의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지 않고 떠다녔다.
‘극아. 나를 넘어서라고? 어떻게?’
쾅-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격을 허용했다.
“울컥-”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를 토했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은 고덕이 명혼을 부서져라 쥐었다. 이판사판이라고, 자신에게 돌아올 공격 따윈 잊은 건지 고덕의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콰과과광콰광- 우당탕탕탕-
수도 없이 울리는 폭음이 모조리 고덕의 몸에 격중해 폭발하는 현월이 내는 것이다. 그 무지막지한 힘에 밀린 고덕의 신형이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졌다.
“크읍…….”
이젠 숨만 쉬어도 피가 흘러나왔다. 내상이 심해져 내장이 상했다는 뜻이다.
자신은 피투성이인데 상대는 멀쩡한 모습이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상황에 부아가 있는 대로 치민 고덕이 모든 내력을 개방했다.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죽든가, 죽이든가!’
지극히 위험한 결정을 내린 고덕이 명혼에 모든 것을 담아 길게 베었다.
쐐애애애액-
명혼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형상과 비형상, 존재와 비존재, 시간과 공간, 모든 것이 갈라졌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고덕을 덮쳤다는 것이다.
한데, 그 속에서 고덕은 특이한 경험을 했다. 마치 자신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처음으로 공간도가 시간을 가르며 생긴 현상이었다.
그 속에서 고덕은 아직도 튀어나오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내력 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주먹보다 작은 크기였지만, 다른 어떤 기운보다 파랗고 차갑게 느껴졌다.
신기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던 고덕은 그것을 건드렸다.
쾅-!
눈에서 불꽃이 튀고, 머릿속에서 천둥이 울렸다.
“쿨럭.”
한 사발은 족히 넘어 보이는 죽은피가 고덕의 입에서 쏟아졌다. 그리고 갈라졌던 시간이 다시 붙었다.
우당탕탕탕.
사정없이 구른 것은 이번에도 고덕이다. 하지만 일어서는 그의 입가엔 개운한 미소가 어렸다.
“크크크, 극아는 무슨 얼어죽을. 겨우 그걸 극아라고 수수께끼처럼 꼬아놓은 거란 말이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든 고덕의 눈은 시리도록 파랗게 빛이 났다. 너무 강렬한 빛을 토해내 차마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창룡검제의 모습에 고덕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혼대법을 이 정도로 발전시켰다면 한 곳뿐이지. 모산파의 사람이었군.”
고덕의 말에 흠칫거린 것은 어이없게도 고덕 자신의 몸이다. 순간 고덕의 애검 명혼이 빛살 같은 섬혼의 수로 자신의 배를 파고들었다.
“안 돼!”
기겁해서 고함을 지르던 창룡검제의 모습이 자꾸 출렁거리게 보였다. 그러더니 일순간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잠시 휘청거리던 고덕이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자 생경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곳에 제 검으로 배를 찌른 창룡검제가 주저앉아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거였군. 어찌 당하는지도 모르고 혼을 바꿔치기당했으니……. 그나저나 꽤 뛰어난 재주야.”
“크으으윽. 어, 어떻게 안 거지?”
검을 찔러 넣을 때 비장을 겨눈 탓에 쏟아지는 피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그렇게 생명이 꺼져 가면서도 창룡검제는 자신의 비기가 어찌 깨졌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선천진기. 그걸 깨웠을 뿐이야.”
“말도 안 돼. 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선천, 흐윽… 진기는 누구나 쓸 수 있어.”
“그렇게 알고 있었지. 나도 그렇고. 하지만 진짜 선천진기는 하늘의 기운. 사람이 함부로 끌어다 쓸 수 없는 것이더라고. 너도 봤잖아. 푸른빛을.”
“그, 그럼 그게…….”
“그래, 천안통. 세상 모든 만물을 뚫어 보는 눈이었어.”
고덕이 깨운 것은 그의 말대로 진짜 선천진기였다. 그것을 깨운 데다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자 선천진기들이 모조리 눈으로 모여들며 순간적이나마 천안통이 발휘되었다. 비로소 상대로 보이는 것이 실은 자신의 몸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이유를 설명했지만, 창룡검제는 이미 숨을 거둔 후라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방 안이 잠잠해지자 망설이던 경공왕이 호위 무장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방엔 창룡검제의 시신과 방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뿐이었다. 그 방 안 어디에서도 고덕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상황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경공왕은 창룡검제를 베는 대가로 달라던 자기와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곤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호북과 하남을 장악하고 산서를 위협하던 경공 왕부의 병력이 느닷없이 영상 왕부의 권역인 귀주와 호남을 쳤다. 그와 시간을 맞춘 듯 소흥 왕부의 병력이 안휘와 절강을 차지하고 앉아 있던 영상 왕부의 병력을 들이쳤다.
양측의 공격을 받은 영상 왕부는 제대로 된 병력의 집중을 이루지 못한 채 연이어 대패를 당하고 있었다.
특히 전혀 대비조차 하지 않았던 경공 왕부 방향의 공격엔 속수무책이라 단 보름, 귀주와 호남은 물론이고 광서까지 빼앗겼다.
마찬가지로 일거에 반격으로 돌아선 소흥 왕부의 거센 공격으로 잠시 장악했던 안휘와 절강을 다시 내준 것에 그치지 않고, 강서와 복건까지 소흥 왕부의 손에 내어주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영상왕은 유소의 간언에 따라 남아 있는 남양함대의 찌꺼기를 모아 오만의 왕부군과 함께 광동을 탈출해 해남도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영상왕은 경공 왕부와 소흥 왕부의 연합 공격에 농성으로 맞섰다.
“주산함대는 어디에 있나?”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이 답했다.
“얼마 전에 당도한 전서구대로라면 광동 해변을 따라 이동 중일 것입니다.”
“아직 남양함대의 잔존 세력과는 조우하지 않았나?”
“이전의 보고까지는 조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제거할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지난 해전에서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주산함대가 남양함대의 잔존 세력을 격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살아남은 남양함대의 잔존 세력은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전쟁에서 군병들의 마음가짐은 때때로 수나 병기의 이점을 간단히 무시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하기에, 지휘부는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주산함대가 남아 있는 남양함대의 세력을 소거하지 못한다면 현재 광주항에 대기 중인 중군도독부와 좌군도독부로 이루어진 연합군의 수송은 불가능해진다. 그 말은 당분간은 해남도에 틀어박혀 있는 영상 왕부를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마치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벽력탄을 깔고 앉은 것과 같아서 경공 왕부나 소흥 왕부 양측 모두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 탓에 소흥 왕부뿐이 아니라 경공 왕부에서도 이번 주산함대의 해전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렇게 피가 마르는 듯한 시간이 흐르고…….
“장계입니다!”
무장이 달려 들어오자 빼앗듯 낚아챈 호철랑이 급히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신 주산함대 제독 충오는 왕야의 홍복을 등에 업고 간악한 역도의 편에 선 남양함대의 잔존 세력을 격파!”
갖은 미사여구로 자신의 공을 늘어놓았을 뒤는 읽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탓에 격파란 단어를 읽자마자 장내엔 환호가 떠나갈 것 같았다.
“속히 상륙군을 승선시켜라!”
소흥왕의 명에 대기하고 있던 장수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충!”
그렇게 달려 나가는 이들 속에는 경공 왕부의 지휘하에 있는 좌군도독부의 장수들도 섞여 있었다.
자그마치 이천칠백 척에 이르는 대규모 수송 선단이 이십칠만의 대병을 싣고서 주산함대의 보호 아래 해남도로 향했다.
이틀의 항해 끝 새벽에 기습적으로 상륙을 시작한 수송 선단의 작전에 결사 항전을 외치던 영상 왕부의 방어선은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수적으로도 너무 많이 차이가 지고, 사기와 장비, 군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부족했던 영상 왕부의 왕부군 오만은 처절한 저항 속에서 차츰차츰 소모되어 결국 전멸되었다.
패배가 확실시되자 영상왕은 해남도의 정청이 있었던 해구 관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로써 대륙 남부의 패자로 군림하던 영상 왕부가 적몰되고, 황실의 배후로 떠오른 소흥 왕부와 서부를 완전히 장악한 경공 왕부, 그리고 여전히 동북 삼성의 호랑이로 남은 동북어위도총부의 세 세력이 안정을 이뤄가고 있었다.
* * *
전쟁이 끝난 지도 석 달이 지나던 날, 소흥으로 환궁한 소흥 왕부에 첩보가 하나 도달했다. 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저 그런 강호의 정보였지만, 한 사람에게는 지독히도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서신을 잡고 한참을 서성거리던 호철랑은 결국 연화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전해줄 게 있어서요.”
“전해줄 거? 뭐, 맛있는 거야?”
분위기 파악 못하고 농이나 던지는 고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호철랑이 서신을 하나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고덕이 물었다.
“이게 뭔데?”
“읽어봐요.”
그 말만 남겨 둔 호철랑은 곧바로 돌아갔다. 평소와 다른 호철랑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고덕이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와락-
서신을 움켜쥔 고덕의 시선이 멀리 구룡산이 있는 서남쪽을 향했다. 그 행동에 사람들이 뭔가 싶어 서남쪽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본 자리엔 고덕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군사전에 앉아 있던 호철랑은 부마가 성을 나갔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 * *
때론 동이족이란 오해도 받고, 때론 여진족의 피가 섞였다는 멸시도 받았지만 특유의 집요함과 적지 않게 쌓아올린 부를 기반으로 변경에 위치함에도 불구하고 중원 무림에서 영향력을 잃지 않은 세가가 하나 있었다.
그곳이 요녕성 심양에 터를 잡은 모용세가다.
그들의 표식은 검은 제비. 그 표식이 선명한 무인들 수십이 재빠른 움직임으로 구룡산의 그늘을 타고 기슭에 세워진 거대한 장원으로 다가서는 중이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겁을 먹은 듯 구름 사이로 숨어 반만 내민 달빛에 장원의 현판에 새겨진 절강고가 네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그 글귀를 확인한 모용정추가 손을 내리긋자, 사방에서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솟구쳐 올랐다.
“누, 누구냐!”
경비 무사의 고함 소리 뒤를 찢어지는 비명이 이었다.
“크아아아악!”
그렇게 한밤중에 울려 퍼진 비명 소리는 어느 비상종 소리보다 효과가 컸다.
이내 절강고가의 사방에서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은 잠을 자던 탓에 제대로 옷을 갖춰 입지 못했지만, 저마다 손에 검을 굳게 쥔 모습이었다.
그들의 신속한 움직임 덕에 침입자들은 절강고가의 담을 넘자마자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하지만 담을 넘어든 모용세가의 무사들 쪽에 고수들이 많았던지, 잠시의 소강상태를 뚫고 모용세가의 무사들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외원에서 울린 비명 소리에 놀란 고일천이 내의 바람에 검을 들고 뛰어나오자, 근처에서 경비를 서던 무사들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냐?”
“확실히 알 수는 없사오나 외원 쪽에서 비명이 들렸습니다. 소가주님.”
“너는 속히 달려가 일기대를 이곳으로 모이도록 하고, 넌 아버님께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라.”
“옛, 소가주님.”
복명한 무사들이 달려 나가자 고일천은 급히 옆에 딸린 전각으로 뛰어들었다.
“현아!”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비명 소리를 들었던지 고이현도 당황한 모습으로 시비들과 함께 방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적도가 침입한 것 같다. 하니, 너는 속히 어머님께 달려가거라.”
“어, 어머님께요?”
“그래. 어머님은 네가 지켜야 한다. 알겠니?”
여인이라고는 하나 무가의 여식이다. 무공에 매진하지는 않았지만 일반 무사라면 어렵지 않게 막아낼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이내 엉겁결에 들고 나온 검을 꼭 쥔 고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요.”
“그래, 부탁한다.”
고이현을 어머니께 보낸 고일천이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자 어느새 일기대가 모여들어 있었다.
“적이 침습한 모양이다. 가자!”
고일천의 말에 몸을 돌리던 이들의 신형이 그대로 굳었다. 야행복 차림인 다수의 무인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섰기 때문이다.
“누구냐!”
고일천의 호통에 야행복 사내들이 갈라지며 사내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자, 자네…….”
놀라는 고일천의 눈에 모용휘를 보필하기 위해 들어왔다던 어호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자네가 왜…….”
“세가의 주인께서 필요하시다는 물건이 이곳에 있다더군요.”
“그 무슨……. 하면, 오늘 침습자들이 모용세가!”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군요. 그러니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겠지요.”
“이놈! 말을 삼가라!”
일기대의 부대주인 이철이 호통을 치고 나서자 어호가 피식 웃어버렸다.
“별 시답지 않은 것들이 소꿉장난도 아니고, 시간 없다. 모두 치우고 그년을 찾아야 한다.”
어호의 말에 야행복의 무인들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소리도 없는 움직임, 그러면서도 절도 있고 빠른 몸놀림. 순간 고일천은 어호가 밀기대 출신이라던 모용휘의 말이 생각났다.
“조심해라. 모용세가의 밀기대다!”
고일천의 경고성이 울렸지만 그다지 도움은 되지 못했다. 절강고가의 후기지수들의 모임인 일기대의 능력으론 밀기대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순식간에 죽어나가는 친인척들을 바라보며 분노한 고일천이 검을 쥐고 막 사촌의 목을 쳐 날리려는 밀기대원을 향해 폭사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