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5장 (126/129)

제125장. 대범(大汎)-마교, 중원을 얻다

소림이 봉문하고 정천맹이 화염에 휩싸여 괴멸된 이후, 백도는 사실상 무너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백도 십이대파에서 그나마 세력을 보존하고 있는 곳은 무당과 하북팽가뿐이었고, 그 외의 문파들은 명맥만 간신히 유지하거나 아예 멸문된 곳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백도의 한쪽 기둥을 자처하던 팔대세가도 멸문을 당하거나 명맥만 간신히 남아 현판조차 걸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었다.

중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백도가 그 지경이 되자, 살판난 곳은 사파였다.

숨죽이고 살던 사파들이 들판에 불길 번지듯 일어서며 무주공산이 된 중원을 잠식했다. 더구나 안창의 반군이 적몰되며 고립되어 있던 사패련까지 활동을 재개하자, 중원의 사파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밝은 곳으로 나선 사파는 자신들이 왜 사파라 불리는지 여실하게 증명해 보였다.

곳곳에서 대낮에 여인이 희롱을 당하고 재물을 빼앗겼다. 살인과 강간이 아무 때나 일어났고, 그것을 단속하는 관군이 시체가 되어 발견되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그런 사파를 견제해야 할 백도의 문파들은 제 몸을 건사하기에도 벅차서 감히 사파의 행사를 막아서지 못했다. 더구나 중원을 분할한 채 세력 싸움 끝에 급기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왕부들로 인해 관의 단속은 그 어느 때보다 느슨해져 있었다.

그 탓에 힘없는 백성들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방관만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마뇌의 말에 혈마의 얼굴에 갈등이 어렸다.

“지금 나선다면 그분이 참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 그렇다고 방치하면 중원은 통제 불능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긴 하겠지만…….”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혈마에게 마뇌가 말했다.

“그분의 생각이 걱정이시라면 차라리 의견을 여쭈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견을?”

“예. 우리가 피를 보자는 것도 아니고, 사파의 난동을 진압하고 중원 무림의 안정을 되찾자는 것이니 그분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까?”

“지난 도움을 기억한다면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지난 도움. 만마대를 비롯한 오천의 마교 고수들을 이끌고 나가 그들 대부분을 잃은 것을 뜻함이었다.

“그런 것에 연연하는 분이 아니니 걱정을 하는 것이야.”

“그렇긴 하오나 지난 행적을 보면 언제나 은원이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하니, 이번엔 저희의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뇌의 설득이 주효했던지 한참을 고심하던 혈마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새로이 만들어진 교내 무력 집단인 마참대의 대주 무한마검이 고덕이 머물고 있다는 강소로 향했다.

* * *

여전히 강소는 분주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곧바로 진격해올 것 같았던 영상 왕부와 경공 왕부의 병력은 강소와 산동을 지척에 두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누구냐?”

방 밖에서 울린 고함 소리에 고덕이 문을 여니, 사신대원들이 사내 하나를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밑에 깔린 사내를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너 낯이 익은데, 날 아나?”

“과, 광혈의 주인을 으윽… 뵈옵니다.”

완전히 찌그러진 채 말하는 사내의 음성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런 그가 광혈의 주인을 거론하자 사신대들이 후다닥 물러났다. 고덕을 그리 부르는 이들이 있을 곳은 한 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소인, 마참대의 대주로 발탁된 무한마검이라 합니다.”

“마참대?”

처음 듣는 이름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무한마검이 재빨리 설명을 이었다.

“진마검대를 대신해 새로이 창설된 무력 집단입니다.”

그제야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진마검대는 과거 마제를 따르던 마교 최강의 무력 집단. 아마도 흩어지고 무너진 마교를 재건하며 새롭게 구성한 곳에 마참대란 이름을 붙인 모양이었다.

“한데, 무슨 일로 온 게냐?”

“교주께오서 여쭈어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게 말인가?”

“예, 광혈의 주인이시여.”

“말하라.”

고덕의 허락에 무한마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금 중원 무림의 상황이 사파들로 인해 어지러워 신교가 나아가 혼란을 잠재우려 하니, 그 허락을 구하신다 하였습니다.”

무한마검의 말에 고덕이 답했다.

“어찌 교의 일을 외인에게 묻는가? 교의 일은 교주가 결정할 일. 뜻을 세웠으면 망설일 것이 무엇이더냐고 전하라.”

사실상의 허락이다. 그에 무한마검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교주께 그리 전하겠습니다.”

“돌아가라.”

“예, 광혈의 주인이시여.”

큰 목소리로 복명한 무한마검이 돌아가는 것을 사신대원들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이들에게 고덕이 물었다.

“돌아가고 싶더냐?”

“아, 아닙니다.”

“책망하고자 묻는 것이 아니다.”

고덕의 말에 동료들을 훑어본 육지겸이 답했다.

“그립지 않다면 거짓이겠으나, 천산보단 주군의 곁을 더 원합니다.”

육지겸의 말에 사신대원들이 하나같이 외쳤다.

“믿어주소서!”

그 모습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대기 중에 살기가 높다. 조만간에 피를 볼 일이 생길 터이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

“예, 주군!”

사신대의 복명을 받으며 고덕이 문을 닫자, 구석에 숨어 있던 강희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가셨냐?”

강희의 물음에 후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휴우~ 눈에 띄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나저나 왜 자꾸 대협을 피하는 거야?”

“무섭잖냐?”

자신이 겁 없이 행동했던 상대가 검마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특히 세상 사람들은 몰랐지만 강희가 마음속으로 닮고자 했던 이가 바로 검마였다. 물론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검마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안하무인적인 독선이 흠모하게 만들긴 했어도 분명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임엔 분명했다.

그런 인물을 앞에 두고도 몰랐다는 것이 강희는 부끄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여하간 고덕의 그림자만 보면 좋아하는 여자아이를 피하듯 그렇게 숨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강희였다.

“그럼 돌아가든가?”

후량의 말에 강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이들처럼 휘하로 들어가지도 못하면서 왜 떠나지 못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떠나면 안 된다는 느낌이 너무 강했다. 그것이 강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냅둬라. 저러다 뒈지게.”

왕팔의 빈정거림이 날아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강희는 눈조차 부라리지 못했다.

솔직히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것이 근처에 있던 왕팔이었으니까.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달리 왕팔의 무위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오죽하면 보고 있던 협련마저 혀를 내둘렀을까?

기이막측(奇異莫測)하게 휘어져 들어오는 비도술은 둘째 치고, 순식간에 자리를 이동하는 경공과 보법은 강희의 정신을 쏙 빼놓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결국 왕팔에게 뒤를 잡힌 강희는 그날 생전 처음 눈물이 쏙 빠지게 얻어터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강희가 선택한 먹잇감은 이전에 승리를 해보았던 후량이었다. 문제는 후량의 성취가 왕팔보다 높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지만…….

그 탓에 눈 오는 날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이후, 강희는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의 면면을 세심하게 살피곤 기절할 듯이 놀랐다. 마당을 쓰는 사람, 밥한다고 법석을 떠는 사람까지도 전부 초극에 발을 디딘 것이 확실했던 까닭이다.

결국 자신과 비슷한 이들이란 소리가 되자 강희는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그 탓으로 은연중에 막내 신세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 * *

소강상태가 예상보다 길어지던 어느 날, 당황한 표정의 호철랑이 고덕을 찾아왔다.

“이걸 좀 보세요.”

호철랑이 내미는 서신을 펼쳐 든 고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도대체 뭐라는 소리야?”

“절구(絶句)라는 두보의 시예요.”

호철랑의 말마따나 서신엔 시가 한 수 적혀 있었다.

강벽조유백 (江碧鳥逾白)

산청화욕연 (山靑花欲燃)

금춘간우과 (今春看又過)

하일시귀년 (何日是歸年)

“두본지 두부인지는 관심 없고, 이게 어쨌다는 거지?”

“뜻을 풀어줄 테니까 한번 들어봐요. 강물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게 보이고, 산이 푸르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도다. 올봄이 보건대 또 지나가니, 어느 날이 정말 고향에 돌아갈 해인고.”

낭랑한 목소리로 운율까지 타니 듣기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지만, 그 안에 무슨 뜻이 들었다는 건지 고덕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모르겠어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 줄 모르겠다.”

고덕의 답에 씽긋 웃어 보인 호철랑이 설명을 시작했다.

“다른 건 모두 제쳐 두고 이 부분만 봐도 돼요. 여기, 하일시귀년.”

“뭐? 무슨 년?”

“욕이 아니라 시구라고요.”

“아! 그랬지. 한데, 그게 어쨌다는 건데?”

“이 말을 풀면 고향에 돌아가는 해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뜻인데요. 달리 언제 올 거냐는 물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시를 보낸 사람을 생각해봐요.”

“누가 보낸 건데?”

“경공왕이 보냈다고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조건 이거 보라고 서신을 들이밀었지.”

“어마, 제가 마음이 급해서… 호호호.”

요즘 들어 고덕의 앞에서는 자주 여인네의 행색을 하는 호철랑이었다. 한데, 그게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닌 게 남장을 하고서 그러니 영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처럼 ‘어마’ 하고 놀란다거나 입을 막고 ‘호호호’거리는 것이 그랬다.

“남들이 보면 너 딱 남색꾼이다.”

“상관없어요. 남들이야 무슨 생각을 하든지.”

제법 대범하게 나오는 호철랑을 슬쩍 바라본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런 고덕에게 호철랑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든 생각은 경공왕이 고 대협을 부르는 것 같아요.”

“날?”

“예.”

“지금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 나일 텐데, 그런 날 부른 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상하다는 거죠. 더구나 여기 강백조유백이란 시구를 보면 그는 고 대협이 조용히 자신을 찾아왔으면 하는 것 같아요.”

“이 말이 어째서 그렇게 들리는 거지?”

“말을 그대로 풀어놓으면 강물이 파라니 새가 더 희게 보인다는 건데, 이건 주변의 눈이 많으니 모든 것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을 품거든요.”

“하면 누구에게 감시라도 당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건 알 수 없죠. 대협이 다녀올 때까지는요.”

“이거야 원, 등만 안 떠밀었지 내쫓는 것과 다름이 없군.”

“필요하면 등도 떠밀어드릴까요?”

무슨 생각일까? 요즘 들어 유난히 밝게 행동하는 호철랑의 모습에 고덕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건 대부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뭐, 등을 떠밀 것까지야. 그렇게 원한다니 한번 다녀오지. 한데, 날 빼내려는 저들의 술수라면 위험할 수도 있어.”

“그럼 이곳에 붙어 있죠, 뭐.”

호철랑의 답에 고덕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남경에 자리 잡은 소흥 왕부의 행궁에서 고덕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 *

사실상 고덕의 허락을 얻어낸 마교는 즉시 중원으로 진출했다. 이미 길목을 막고 있는 곤륜을 손봐서 곤륜산 안으로 밀어 넣은 뒤였기에 마교의 진출을 막아설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백도가 유명무실해진 이상 무시무시한 마기를 뿜어내는 고수들을 앞세우고 천천히 중원으로 들어서는 마교의 앞은 아무도 막아서지 못했다.

물론 자신들에게 불리한 시류에도 불구하고 기백 하나로 막아서는 백도의 소문파나 흔히 협의지사라 불리는 소수의 인사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충분히 준비를 갖춘 마교의 무력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거칠 것 없이 진입하던 마교가 제대로 된 반항을 받은 것은 사천이었다. 화산과 아미, 거기에 더해 당문이 위치해 있던 사천은 작은 소문파들도 많았고, 산에 묻혀 살던 기인이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이 불현듯 뭉쳐서 봉기를 했던 것이다.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고수들이 다수 섞여 있습니다.”

마뇌의 보고에 혈마가 눈가를 찌푸렸다.

“당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미와 청성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아는데 아니었나?”

“그것은 맞습니다. 다만 그들의 속가 중에서도 쓸 만한 이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방계 출신들 중에 산속에 틀어박혀 있다 튀어나온 이들이 적지 않아서…….”

“해결책은?”

혈마의 물음에 마뇌가 답했다.

“두 가지 방향으로 처리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온건한 방법으로, 봉기한 이들을 일일이 색출해서 격살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공책으로, 그 뿌리를 아예 짓뭉개버리는 것입니다.”

“그 말은……?”

“생각하시는 대로 전력을 투입해 아미와 청성, 그리고 당문을 아예 멸문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안 돼!”

“예?”

“멸문은 안 돼.”

“어째서입니까?”

“우리가 들어서며 저들을 멸문시킨다면 이후에 우리가 지날 곳의 백도는 모조리 일어나 뭉칠 거야. 그건 위험한 일이야.”

“하오면 온건한 방법으로…….”

“아니. 우리가 언제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었던 적이 있나?”

“하오시면 교주님의 뜻은……?”

“강공으로 가되, 명맥은 놔둬.”

“하오나 그리되면 후한이 무궁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와 원한을 진 이들이 한둘이던가? 저들만 해도 적지 않은 은원이 얽혀 있을 터. 그것에 몇 개를 더 얹었다고 큰일이 생기진 않아.”

혈마의 당당한 말에 마뇌가 미소를 그렸다. 지난날의 패기를 되찾은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교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복명하는 마뇌를 바라보는 혈마의 눈은 흥분으로 들떠 있지도, 두려움으로 떨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는 그의 눈이 왠지 그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대응 방법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자 마교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새로 구성된 마참대와 혈전대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아미와 청성, 당문을 돌며 무자비한 살육을 벌인 것이다. 그들의 행사에 머뭇거리던 봉기 세력은 결국 청성의 싸움에선 모조리 모습을 드러내 대항해왔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마교는 교주인 혈마가 직접 교내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을 거느리고 뛰어들어 순식간에 그들을 도륙해버렸다.

사천에서의 저항이 무력화되자 마교의 진출 속도는 탄력을 받았다. 막는 건 과감히 부수고, 적당히 몸을 낮추고 비켜서는 이들은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마교가 생각 외로 피를 보지 않자, 처음엔 당황했던 백도의 문파들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마교가 지나가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파는 모조리 손을 보고 움직인 탓에 백성들에게서도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오죽하면 사파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어떤 관아에선 술과 고기를 내줄 정도였다.

상황이 그리 흘러가자 은연중에 마교와 교류를 트는 백도의 문파까지 생겼다. 그들로서는 마교가 지나간 연후 다시 발원할 사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의 지원을 약속받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과를 주목하던 강호는 놀랐다. 마교가 백도의 문파와 격의 없이 교류를 트고 동맹에 준하는 약조까지 맺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약속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다시 일어선 사파에 항거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백도의 소문파를 돕기 위해 마교의 고수들이 파견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더구나 그 대가로 마교의 분타를 하라거나 마도로 전향하라는 압박도 없었기에 마교는 정천맹을 대신해 중원을 차지하고 앉은 강호 세력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을 백도의 노고수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도가 내걸었던 정의와 협의란 기치가 유명무실해지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마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중원을 장악해가고 있었다.

* * *

선잠이 들었던 경공왕은 작은 기척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뭐가 그리 불안한 겁니까?”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음성에 화들짝 놀란 경공왕은 이내 그 음성이 자신이 기다려오던 이의 것이란 걸 알고는 반색을 했다.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경공왕의 책망을 들으며 천천히 불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 고덕이 희미하게 웃었다.

“초청을 하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게 된 줄 알았습니다만.”

“고의 결정으로 그리되긴 했지.”

“하온데 왜 청하신 겁니까?”

“호랑이를 피하자고 한 일에 늑대가 달려드니 어쩔 수 있어야지.”

“늑대요?”

“예전에 내게 손을 내밀었었다는 이들에 대해선 기억하는가?”

“삼천을 말하는 것이라면 기억합니다.”

“삼천. 그렇지. 그땐 그렇게 말했는데, 이번엔 주천이 열렸다고 말했네.”

이전에 알고 있던 곳은 두 곳이다. 멸천과 혼천. 거기에 경공왕의 말로 드디어 마지막 하나를 알게 된 셈이다. 주천이라는 곳을.

“그들이 직접 찾아왔습니까?”

“그랬네. 자네처럼 불쑥 나타나더군.”

“언제입니까?”

“벌써 여러 날 되었지. 나보고 관부를 장악해 바치라더군.”

“몇 명이나 왔습니까?”

“혼자였네. 이름이 창룡검제라던가? 강호인들은 이름에 황제의 칭호를 너무 잘 갖다 붙이더군.”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너무 먼 과거의 이름이기에 솔직히 그가 당사자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얼굴이 어떻던가요?”

“젊었네. 자네보다는 못해도 이십대가 넘어 보이진 않더군.”

나이가 들어 보였다면 전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젊다면, 그것도 자신과 비슷하다면 본인일 가능성이 오히려 높아진다.

“언제 온다는 말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다만 내 호위로 쓰라면서 몇몇을 보내왔더군. 지금 저 방문 밖에 있네.”

“전 특별히 강호에서 구하신 호위들인 줄 알았습니다.”

“내 눈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저런 이들로는 자네를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네.”

경공왕의 말에 슬며시 미소를 지은 고덕이 물었다.

“그런 정보나 주시자고 절 청하신 건 아니실 테고,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놈을 제거해주게.”

“창룡검제를 말씀입니까?”

“그러하네.”

“제게 그런 부탁을 하시기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만.”

“자네가 승낙한다면 내 군을 물리지.”

“저희 쪽 머리 좋은 이가 말하길 그러면 내분이 생길 거라고 하던데, 상관없으십니까?”

“그것도 자네가 처리해줘야겠지.”

한마디로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위협을 하든 협박을 하든 주저앉히라는 소리다.

“제 입장에선 그것보다는 모조리 숨을 끊어놓는 게 편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왕씩이나 되면서 지금처럼 전전긍긍하며 사는 것도 지겨우니 말이야.”

생각 외로 대차게 나오는 경공왕을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대로 하지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영상 왕부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주셔야겠습니다.”

“영상 왕부를?”

“예. 영상 왕부의 병탄에 성공하면 절반을 드리지요.”

“소흥 왕부의 힘으로 그들을 밀어낼 수 있겠는가?”

“아직 절반의 힘은 남아 있다더군요.”

“절반의 힘이라…….”

거기에 경공 왕부의 힘이 더해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렇게 될 경우 황실의 힘이 더 커진다는 것이었지만……. 그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던지 고덕이 말을 이었다.

“그로 인해 커진 황실의 힘이 부담이 되시거든 동북어위도총부에 손을 내밀어보시랍니다.”

“동북어위도총부에?”

“예. 이번에 반란을 주도한 곳이니 그들도 황실과는 척을 진 셈이라더군요. 뭐, 적의 적은 동료라던가요.”

고덕의 말에 경공왕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 모든 것이 그쪽 머리 좋은 이에게서 나온 생각인가?”

“맞습니다.”

“한번 보고 싶군.”

“이전에 보셨지 않습니까?”

고덕의 답에 언뜻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산서 자사로 나갔다던 자로구만.”

“맞습니다. 그입니다.”

“소흥왕은 좋은 인연을 옆에 두었군.”

경공왕의 말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왕야께서도 좋은 이를 곁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 하 총관 말인가?”

지난 방문에서 보았던 그는 분명 호철랑만큼이나 뛰어난 인물로 보였다.

“예. 잘 아시는군요.”

고덕의 답에 경공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고의 곁에 없네.”

“어디로 갔습니까?”

“멀리 갔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고덕이 표정을 굳혔다.

“누구의 짓입니까?”

“창룡검제. 자네가 죽여줘야 할 자일세.”

고덕은 그 이름을 말하는 경공왕의 음성에 분노가 파랗게 일어선다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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