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24장 (125/129)

제124장. 혼전(混戰)-주천이 열리다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을 맡았던 녹림이 이상행동을 보이자 그 외 지역의 공세를 맡았던 요녕성 향방군은 당황했다. 더구나 오문을 수비하기 위해 집중되었던 구문제독부의 병력과 금의위 병력이 오문을 비우고 다른 지역의 수비에 투입된 탓에 몇몇 곳에선 이전의 우세를 상실하고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부장, 즉시 녹림에게 상황을 확인해!”

“옛, 도지휘사.”

복명한 부장이 달려가자 요녕성 도지휘사의 사나운 시선이 전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지휘를 맡은 곳은 서문. 정문인 오문에 비해 손색이 있다지만 가장 강력한 방어력을 지닌 곳이었다.

하지만 오문의 공세를 맡은 녹림이 구문제독부와 금의위의 치열한 방어를 뚫어내면서 그곳으로 병력이 몰린 탓에 이곳의 전투가 수월해지고 있었다. 그 덕에 곧 성문을 장악할 것 같았던 시기에 느닷없이 오문 쪽에 몰려 있던 구문제독부와 금의위의 병력들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놀라서 상황을 확인했더니 녹림이 전투를 마치고 청소를 한다던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하는 사이, 전황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저곳으로 궁병을 추가 배치해!”

도지휘사의 명에 부장들의 복명이 울리고, 이내 후방에 대기 중이던 궁병들 일부가 그가 지시한 쪽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돌아온 수행부장의 보고는 도지휘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돌아가? 지금 녹림이 회군하겠다고 했단 말이냐?”

“그게, 이상한 말을 자꾸 하는 통에…….”

“도대체 뭐라 하기에?”

“그게, 자신들은 구경을 왔었으니 이제 구경도 끝났고 돌아갈 거라고…….”

“구경?”

“예. 그리 말했습니다.”

“미친놈들이 아니고서야, 전쟁을 어찌 구경이라 표현한단 말이냐?”

“저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서둘러 짐들을 꾸리는 것이 정말로 물러날 심산으로 보였습니다.”

“설마 매수를 당한 건가?”

연수를 약속해놓고서도 전쟁 중에 자신에게 금품을 뜯어내기 위해 수하들을 희생시키던 놈들이다. 매수를 당하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

“빌어먹을 산적 놈들! 부장은 즉시 금괴 궤짝 서른 개를 싣고 다시 가라. 가서 약속대로 오문을 깨고 황제의 목을 따라고 해!”

“충!”

군례를 올린 부장이 부리나케 달려가자 도지휘사는 불길이 쏟아질 것 같은 무서운 눈으로 오문 쪽을 바라보았다.

“일이 끝나면 반드시 씹어 먹고야 말테다. 빌어먹을 산적 놈들!”

그렇게 이를 가는 요녕성 도지휘사의 전신에서 섬뜩한 한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 * *

자신의 앞에 금괴 궤짝을 죽 늘어놓는 장수를 바라보며 망진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이게 뭐냐?”

역시나 뒷짐 지고 서 있던 고덕이 관심을 가졌다.

“그, 글쎄요. 어디서 선물이 이렇게… 아하하하.”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망진에게 요녕성 향방군 도지휘사의 수행부장이 큰 음성으로 외쳤다.

“여기 도지휘사 영감이 보내는 대가요. 혹, 황제가 제시한 금액이 이보다 많다면 더 주시겠다고 하였소이다. 하니 이제 다시 공격… 흐헙!”

느닷없이 달려들어 입을 막는 자신의 행동에 당황해 버둥거리는 부장을 뒤로 감춘 망진이 고덕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하하, 이놈이 뭔가 오해를……. 저 아무것도 받은 거 없습니다. 그저 여행, 그렇지, 여행을 온 거뿐입니다. 아하하하.”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모습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그저 피식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믿지. 하면 저건 아마 석별의 정이 아쉬운 누군가가 보낸 여비인 모양이다.”

그 말에서 고덕의 의중을 재빨리 읽은 망진이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그, 그렇습죠. 네, 맞습니다. 여비, 여비입니다. 뭐하냐, 여비를 챙기지 않고!”

망진의 고함에 추치를 비롯한 몇몇 채주들이 고덕의 눈치를 보며 궤짝을 바리바리 챙겨 짐을 실어놓은 수레에 얹었다. 그 수레들을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한데 짐이 많구나?”

“예? 지, 짐이요?”

“그래. 저렇게 짐이 많다 보면 자칫 남의 것이 섞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아니겠지?”

“아하하, 서, 설마요. 그래도 모르니까 한번 사, 살펴볼까요?”

“그것이 좋겠다.”

고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채주들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내 짐의 대부분이 줄어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북경 안에서 긁어모았던 재물들을 모조리 돌려놓은 것이다.

“저건 정말 저희 겁니다.”

추치의 말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면 저희는 이만 떠나도……?”

불안한 음성으로 묻는 망진의 물음을 새로운 음성이 가로막았다.

“지금 내 허락도 없이 어딜 떠나겠다는 겐가?”

난데없는 음성과 함께 등장한 이를 확인한 망진이 얼굴을 구겼다.

“려, 련주.”

요녕성 향방군 도지휘사의 거센 항의에 주변에서 노닥거리던 사패련의 련주인 단파, 강희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보게, 멸사도귀. 갑자기 공세를 중단했다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강희의 호통에 망진의 표정이 난감해졌다. 앞은 호랑이요, 뒤는 여우가 막아선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그리되었소, 련주.”

물론 여우보다 호랑이가 무서운 것은 인지상정. 망진의 선택은 변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고함을 지르다 만 강희의 시선이 망진은 물론이고, 십팔 채의 채주들이 연신 흘깃거리는 곳을 향해 돌려졌다.

“넌 누구냐?”

그 시선의 끝에 젊은 청년이 하나 서 있었다. 하대가 나가는 건 당연지사. 한데 이놈이 답이 없다.

가뜩이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별 허섭스레기 같은 것이 성질을 건드린다고 생각한 단파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어, 어…….”

당황한 이들의 놀라는 음성의 끝을 강렬한 격타음이 장식했다.

빡-

언제, 무엇으로, 어떻게 때린 건지조차 제대로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대자로 엎어진 단파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안 가냐?”

“가, 갑니다, 가요.”

제하이십사강의 수위에 드는 고수를 한 방에, 그것도 마치 파리 쫓듯 간단히 보낸 인물이다. 건드려 봐야 남는 게 없다는 걸 확인한 망진과 녹림은 그렇게 서둘러 물러났다.

녹림이 물러나자 요녕성 향방군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만일에 대비해 대기하던 구문제독부와 금의위의 병력마저 자신들을 향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방어에 치중하던 이들이 공세로 전환했다. 대명 강군이라 불리는 구문제독부의 군병들과 금의위의 위사들이 일제히 치고 나오자 요녕성 향방군은 그간 점해오던 우세가 덧없을 정도로 힘없이 밀려났다.

그런 그들의 옆구리를 고속으로 이동한 끝에 드디어 도착한 하북성 향방군이 물어뜯었다. 단박에 공격자에서 방어자의 신분으로 떨어진 요녕성 향방군은 분노한 구문제독부와 금의위, 그리고 하북성 향방군의 포위 아래 하나둘 차가운 육신을 피로 흥건한 바닥에 누이고 있었다.

반나절의 전투. 그것으로 근 오만에 달하는 요녕성 향방군 병사들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애초에 살려 둘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모조리 척살하라는 황명이 내려왔는지는 몰라도 나중엔 항복하는 이들마저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그렇게 누군가의 자식이거나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오만의 사내들이 주검이 되어 즐비하게 늘어섰다.

그 참경을 바라보는 고덕의 시선은 무심하고 또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북경, 나아가 황성을 위협하던 반란은 일단 진압이 되었다.

하지만 급거 몰려온 하북성 향방군이 전한 소식을 접한 고덕은 곧바로 바람이 되어 강소로 직행했다. 소흥 왕야가 왕부를 버리고 강소의 남경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소식 어디에도 왕부에 남겨 두었던 고길 내외에 대한 소식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이 고덕의 신형을 빠르게 잡아당겼다.

무서운 속도로 이동한 고덕이 남경에 도착한 것은 북경을 출발한 지 한나절 만이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었지만, 고덕은 그 어떤 성취감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우탕탕탕.

막아서는 군병들이 나무 인형들처럼 나뒹굴었다. 그렇게 들어선 고덕을 발견한 소흥왕이 무거운 표정으로 의자를 권했다.

“왔는가?”

“형님 내외는 어디에……?”

결례인 줄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고덕의 마음을 이해했던지 소흥왕은 가벼운 미소로 그 결례를 묻었다.

“사돈 내외분께선 내원에 협련 등과 함께 계시네.”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밀려나왔다.

“죄송합니다.”

뒤늦은 사과였지만 소흥왕은 노여워하지 않았다.

“아닐세. 이전의 일도 있고, 걱정이 되었을 것이란 걸 이해하네.”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나마 일이 생기기 전에 자네를 다시 봐서 다행일세.”

마치 모든 걸 포기한 것 같은 말에 고덕이 걱정의 말을 건넸다.

“전세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남은 거라곤 이곳 남경에 몰려 있는 십사만 오천이 다이니까.”

한때는 삼십만을 넘기던 대병이 반 동가리가 난 셈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그 병력의 핵심인 중군도독부가 건재하다는 것뿐이었다.

“위기를 잘 이겨 내실 것입니다.”

고덕의 말 속에서 그가 나서지 않으리란 걸 느낀 소흥왕은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다.

“말이라도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은 소흥왕을 두고 물러나온 고덕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음으로써 미련을 떨쳐 버린 고덕은 곧바로 고길 내외가 기다린다는 내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생각 외로 거친 숨을 내뱉는 왕팔이 호철랑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너…….”

고덕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펼친 섬마공은 십 성. 그것으로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은 경지를 논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무궁무진한 그의 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팔에겐 그만한 내력이 없었다. 이전의 고비를 넘기며 훌쩍 성장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의 내력은 초극에 머물러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 그가 고덕과 그다지 차이 나지 않게 도착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헉헉헉, 십이 성, 드디어, 헉헉, 해냈습니다. 대협!”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대견했던지 음성 전체에 도도한 자부심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 왕팔의 어깨를 고덕이 툭 쳤다.

“멋있다.”

그 무엇보다 커다란 찬사를 들은 듯 왕팔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가득 찼다. 그런 왕팔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고덕과 나눈 말로 왕팔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차린 까닭이다.

그런 이들을 일별한 고덕이 고길 내외가 머무는 객방으로 들었다.

“괜찮수?”

“우리야 괜찮지만, 사돈의 입장이 곤궁해진 모양이더라.”

“그런 모양이오.”

“하면 도와야지.”

자신의 말에 고개를 젓는 고덕에게 고길이 낮은 음성을 토했다.

“그리해서야 제수씨가 좋아라 하겠더냐?”

가능한 연화의 일은 입에 담지 않던 고길에게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인지 고덕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네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려는지는 대충 짐작은 간다만, 세상에서 도망친다고 잊히는 것은 아닌 게다. 세월에 맡겨. 그러면서 다가오면 맞고, 닥치면 이겨 내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는 게야. 그래서 세월이 약이란 소리도 있는 게고.”

“형…….”

낮게 부르는 고덕의 등을 고길의 거친 손이 쓰다듬었다.

“고통이고 행복이고, 다 세상사인 것을. 피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렇게 등을 쓰다듬는 형의 어깨에 기댄 고덕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격정이 가라앉았는지 일어서 나가는 고덕을 고길 내외는 잡지 않았다. 그렇게 방에서 나선 고덕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것에 닿았다.

“이건 뭐냐?”

고덕의 물음에 그때까지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왕팔이 답했다.

“그게… 아직 죽지 않았던데요.”

“죽으라고 친 적이 없으니까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

“그게 그런 건가요? 전 혹시 잊으셨나 해서…….”

왕팔의 답에 고덕이 시선을 돌렸다.

“다음부턴 아무거나 주워오지 마라.”

“예…….”

풀이 죽은 왕팔의 답을 들은 고덕이 호철랑에게 물었다.

“왕야를 만나러 갈 생각인데, 같이 갈 텐가?”

“그러죠.”

호철랑이 냉큼 고개를 끄덕이자 고덕이 앞을 섰다. 그 뒤를 따라가는 호철랑은 무언가 고덕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세가 변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고덕이 사라지자 사람들의 관심은 왕팔이 주워왔다는 것에 쏠렸다.

“뭐야?”

후량의 물음에 왕팔이 답했다.

“그냥 두면 죽을지도 몰라서.”

“뭐하는 놈인데?”

“사패련의 련주라는 거 같더라.”

그 말에 엎어져 있던 강희를 뒤집어본 후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단파, 강희.”

“단파(斷破)?”

“응. 이 작자 무림명이야.”

“뭔 무림명이 그따위야. 끊고 깬다?”

“이자의 무공 근원 때문에 그래. 강공 일색인 패도식이거든.”

제법 소상히 아는 후량에게 창군이 물었다.

“어째 인연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네?”

“예전에 한번 붙어본 적이 있지.”

후량의 말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다. 지금 후량의 경지는 초극의 극의. 사신대에서도 육지겸과 적표를 제외하고는 제압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결과는?”

조심스러운 창군의 물음에 후량은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깨졌지. 그것도 작신하게.”

후량의 답에 사람들의 시선엔 호기심보단 강한 승부욕이 자리 잡았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희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 * *

경공왕은 속속 도착하는 승전보를 받으면서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요녕성 향방군의 반란으로 촉발된 북경 사태가 예상외로 빠르게 정리된 탓이었다. 특히 요녕성 향방군을 지원했던 산적 패거리들이 갑자기 태도를 달리했다는 정보를 경공왕은 주목하고 있었다.

“그가 벌인 일이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하 총관의 물음에 경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조용히 검마란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는 소문도 그렇고…….”

경공왕의 말대로다. 당시 참여했던 산적들의 입에서 검마의 이름이 흘러나온 것이다. 그 정보를 접한 이후 경공왕은 좀처럼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그가 맞다 하더라도 이젠 그 혼자서는 돌릴 수 없는 상황이옵니다.”

“그렇긴 하겠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하남과 호북을 장악했고, 최근엔 섬서와 녕하 두 개성의 향방군을 동원해 산서를 공략하는 중이었다. 그곳마저 떨어지고, 영상 왕부에 이미 빼앗긴 절강과 안휘를 제하고 나면 소흥 왕부의 세력권은 강소와 산동만 남게 될 것이다.

“하오니 마음을 단단히 하시오소서.”

“그래야 하긴 하겠으나…….”

제아무리 땅을 많이 갖고 있으면 무얼 하겠는가 말이다. 그가 와서 자신의 목을 베면 그만인 것을.

“하아~”

그 생각만 하면 절로 이는 한숨을 경공왕은 막을 수 없었다. 때론 아는 것이 병이라더니, 지금의 경공왕이 딱 그 짝이었다. 상대의 능력을 너무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야…….”

안쓰럽게 부르는 하 총관에게 경공왕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지금이라도 당을 돌려주며 화친을 청해보는 건 안 될까?”

“왕야!”

“안 되는 겐가?”

“설사 저들이 받아들일지라도 휘하의 성주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자중지란이다. 자신과 수하들의 피로 얻어낸 땅을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스란히 들어 바친다는 주군을 따를 수하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그 땅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에 경공왕의 한숨 소리는 더없이 깊었다.

“하아~”

“이거야 원, 땅이 주저앉겠군.”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경공왕과 하 총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들로서는 고덕의 방문을 두려워한 까닭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구석의 어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내는 그들이 처음 보는 이였다.

“누, 누구냐?”

하 총관이 제법 커다랗게 호통을 쳤지만, 음성이 잘게 떨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덜덜 떨면서도 허세는……. 뭐, 일단 물었으니 답은 하지. 내 이름은 혁소. 한때 사람들이 창룡검제(蒼龍劍帝)라 불렀던 사람일세.”

말투는 노인의 것이나 생김은 이제 이십대 중후반이다. 하지만 생김새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는 이미 고덕을 통해 충분히 겪은 후였다. 그 덕인지 경공왕과 하 총관의 대응은 꽤나 신중했다.

“창룡검제?”

그들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겠지만, 만약 무림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창룡검제 혁소. 지금으로부터 이백오십 년 전의 천하제일인이다. 검 하나로 강호를 무릎 꿇린 사내. 그의 검이 두려워 마교는 천산을 벗어나지 못했고, 사파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얼마 전에 사라진 정천맹의 기틀을 세운 이도 바로 창룡검제였다.

“뭐, 관인들은 모를 수도 있지.”

“그런데 무슨 일로 고를 찾아온 건가?”

경공왕의 물음에 창룡검제는 엉뚱한 말을 했다.

“멸천주를 적당히 이용해먹고 차버렸다는 이가 그대로군.”

“멸천주가 누구지?”

“한때 그대에게 일만의 강호 무인 집단을 보내 도와주었던 머저리.”

순간, 경공왕의 표정이 굳었다. 손을 떼었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나온 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포기한 거 아니었나?”

“포기? 아! 척살을 말하는 모양이군.”

자신을 앞에 두고 감히 척살을 운운하는 상대였지만, 경공왕은 함부로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무서움을 이미 알고 있었던 탓이다.

“척살이든 암살이든 상관이 없겠지. 그것이 중단된 게 아니었나?”

“멸천주는 손을 털었어. 생기는 거 없이 잃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그 말은……?”

“뭐, 경우에 따라선 그 늙은 목을 예쁘게 도려내주겠다는 뜻이지.”

웃으며 하는 말이기 때문인지 섬뜩함은 더욱 배가 되어 가슴에 닿았다.

“그 말은 내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들어도 되나?”

“뭐, 그런대로.”

“뭐, 뭘 원하는 거지?”

두려움에 찬 경공왕의 물음에 창룡검제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네가 가진 모든 거.”

“뭐?”

“머리만 나쁜 줄 알았더니, 귀도 나쁜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 커헉!”

상대의 폭언에 참지 못하고 일어선 하 총관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털썩.

그 뒤를 따라 목이 없어진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졌다.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여 부들부들 떠는 경공왕을 비릿한 미소로 바라보던 창룡검제가 말했다.

“난 내게 삿대질을 해대는 놈은 못 참아서.”

“다시 묻지.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전과 약간은 달라진 경공왕의 음성에 창룡검제가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제왕이라 이건가? 뭐, 존중은 해주지. 귀를 열고 잘 들어라, 미련한 관부인이여. 만세를 주관하는 주천의 문이 열렸다. 너는 네가 가진 재주를 다해 관부를 장악해 주천의 지존이신 대천주께 바치는 사명을 받았다. 이루지 못한다면 시신조차 보존치 못할 것이다. 그것이 삼천을 배신한 네게 내리는 대천주의 벌이자 기회이다. 부디 놓치지 마라.”

그 말을 남겨 둔 창룡검제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사라지는 창룡검제의 등을 바라보는 경공왕의 눈은 분노로 파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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