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장. 격멸(擊滅)-싸움이 사납다
요녕성 향방군의 공격이 시작된 북경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북경에 사는 백성들의 입장에선 마른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수만에 달하는 군병이 북경성 안으로 들어왔고, 이내 그들과 자금성을 의지한 구문제독부 간에 피 튀기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문제는 요녕성 향방군을 지원하기 위해 가세한 이들에게 있었다. 산적들이 물산이 풍부하고 재물이 도처에 널린 북경 안으로 들어섰으니 벌어질 일은 뻔했다.
곳곳에서 약탈이 벌어지고 강간과 살인, 방화가 줄을 이었다. 그럼에도 요녕성 향방군은 산적들의 난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방어진지가 구축된 주성문인 오문의 공격이 맡겨졌다.
수만의 산적들이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것은 장관이었다. 그 속에 섞인 녹림의 고수들은 일제히 성벽을 타고 넘었다. 사다리도, 갈고리가 달린 줄도 필요 없었다. 그저 간단한 경신공부만으로도 자금성의 성벽은 너무나 쉽게 비처를 드러냈다.
하지만 정예 중의 정예라는 이름처럼 구문제독부의 정병들은 성벽 위로 오른 녹림의 고수들에게 벌 떼처럼 달려들어 그들을 다시 밀어내고 있었다.
“부채주급들을 투입하면 금방 제압이 되겠는데요? 어떻게, 투입할까요?”
추치의 물음에 녹림 총표파자인 멸사도귀 망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저들의 똥구멍이 다 탈 때까진 기다린다.”
“왜 기다리는 겁니까?”
추치의 불만에 망진이 혀를 찼다.
“방금 말했잖냐. 저들의 똥구멍이 탈 때까지 기다린다고.”
“그러니까 왜 꼭 그렇게까지 기다려야 하냔 말이죠, 제 말은.”
“답답한 놈. 그래야 돈이 더 나올 게 아니냐. 초반에 후딱 해치워봐라. 보수를 제대로 챙길 수 있겠냐?”
“하지만 련주는 빨리 처리하라고…….”
련주. 아마도 사패련주를 말하는 것이리라. 녹림은 사패련의 주요 세력 중 하나였으니까 말이다.
“미련한 놈. 련주가 돈 주냐? 자고로 영업을 나가면 전주를 잘 물어뜯어야 하는 법이다. 하니, 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지난번처럼 엉뚱한 짓 하지 말고.”
흥륭에서 이름도 없는 놈들에게 수백의 수하를 잃고 오히려 그들에게 비풍대란 위명만 안긴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부는 참. 그놈들 정말 빠르고 셌다니까!”
“됐으니 조용히나 해라.”
망진의 핀잔에 추치는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공세는 망진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녹림의 고수들을 아낀 탓에 공격은 일반 산적들 위주로 벌어졌다. 일반 산적이라고는 하나 강호에서 굴러먹는 탓에 그나마 한두 가지의 호신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 덕에 관병들에 비해 조금은 나은 실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공성전이란 특성 때문인지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구문제독부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산적들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구문제독부는 전사자가 많았다. 제대로 된 투로를 따라 휘둘린 검과 칼을 제대로 피하는 이들이 적은 탓이었다.
그렇게 누적된 인적 피해는 병력 부족이라는 구문제독부의 치명적인 약점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공격이 시작된 지 사 일. 드디어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내성의 방어를 담당하는 금의위에서 일단의 병력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하급 장수에 준하는 실력을 가진 금의위들이 충원되자 성벽 위의 방어에선 다소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금의위는 일반 산적에 비해 뛰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었다.
상황이 변했지만 망진은 여전히 녹림의 고수를 투입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요녕성 향방군의 지휘관에게서 독촉이 왔다. 그 독촉에 망진은 고수들을 초청하기엔 돈이 모자랐다는 답을 보냈다.
그다음 날, 금괴가 가득 든 궤짝 여섯 개가 도착하자 망진은 즉시 녹림의 고수들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성벽 위는 금의위들과 녹림 고수들이 죽고 죽이는 살육의 장으로 변해버렸다.
제아무리 금의위가 뛰어나다지만 강호의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다. 소식을 들은 동창제독은 곧바로 동창의 고수들과 서창의 고수들을 동원했다. 그들의 지원을 받은 금의위는 간신히 성벽 위를 방어할 수 있었지만, 이미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였다.
* * *
고덕과 함께 돌아온 도왕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제의 칙서였다.
“구원?”
“예. 요녕성 향방군이 반란을 일으켰답니다. 그것을 녹림이 거들고 있답니다.”
당대의 팽가주인 팽군현의 말에 사사로이는 가주의 아비이자 공적으론 태상가주의 위에 있는 도왕이 물었다.
“너는 어찌할 생각이더냐?”
“황제의 칙서가 도착한 이상 거부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반란이 성공하면?”
“잠시의 시간만 벌어준다면 반란은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다수의 군병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다수의 군병들이 움직인다?”
“예. 우선 산서의 양고에 주둔 중이던 전군도독부의 병력과 훈련을 위해 안휘로 내려가 있던 하북 향방군은 북경을 향해 고속 이동 중입니다. 뿐만 아니라 산동성 향방군도 긴급 소집되어 북경을 향해 이동 중입니다.”
팽군현의 설명에 도왕이 물었다.
“그들이 도착하면 요녕성 향방군은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게냐?”
“요녕성 향방군의 수가 오만이나 되지만 전군도독부는 이십만, 하북 향방군과 산동성 향방군은 공히 오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삼십만의 대병이 북경을 향해 이동 중인 것입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절대로 요녕성 향방군은 무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황실을 돕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아버님.”
“가주의 결정이 그렇다면 노부야 따를 뿐. 뜻대로 해봐.”
도왕의 말에 팽군현이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감사는 무슨…….”
이젠 자신의 도움 없이도 훌륭하게 세가를 이끌어가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도왕에게 팽군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검마가 황실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는 움직이지 않는답니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그가 움직인다면 우리 측의 피해가 훨씬 적을 것입니다.”
“그야 그렇겠지만… 내 한번 알아보마.”
“송구합니다, 아버님.”
고개를 숙여 오는 아들을 도왕은 미소로 바라보았다.
“송구하긴.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세가의 전력을 보전하는 일이니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내 알아볼 테니 돌아가 기다리거라.”
“감사합니다, 아버님.”
고개를 조아린 팽군현이 돌아가자 도왕은 고덕의 일행을 머물게 한 객사로 발길을 옮겼다.
객사로 들어서던 도왕의 눈이 커졌다.
“네가 여긴 웬일이더냐?”
“하, 할아버지.”
당황하는 팽연의 모습에 도왕의 눈이 급격하게 가늘어졌다.
“네가 이곳에 왜 있냐고 묻질 않더냐?”
“그, 그냥…….”
“잠시 말벗을 해준 것뿐입니다.”
같이 있던 왕팔의 답에 도왕의 눈에서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러니까, 왜 네가 저 인간의 말벗을 해주고 있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소, 손님이니까요.”
“손님 접대는 이 할아비가 잘하고 있으니, 너는 다시는 이곳으로 발길을 하지 말거라.”
“할아버지…….”
“어허!”
눈을 부라리는 도왕의 귀로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왜? 내가 쟤를 잡아먹기라도 하나? 왜 오지 말라는 거야?”
“대, 대협!”
“말해봐. 왜 오지 말라는 건데.”
언제 나타난 건지 고덕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도왕은 불안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일 다시 와라. 보아하니 네 할아버지도 찬성하는 것 같다.”
고덕의 말에 팽연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되, 되었으니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차마 손녀 앞에서 주눅 든 할아비의 모습을 보이긴 싫었으나 그런 자존심을 따지기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결국 도왕은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련의 상황에 당황한 팽연이 서둘러 돌아가자, 고덕이 고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애들 노는데 시비야.”
“애, 애들이라기엔 너무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왕팔의 나이는 쉰이다. 물론 천마심공을 연성한 연후로 마치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처럼 동안으로 변해가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잘 봐줘서 삼십대 후반의 모습이었다. 그 탓이었던지 고덕이 슬쩍 왕팔을 일별하곤 억지를 부렸다.
“외모 가지고 놀리면 안 되는 거다.”
“대협!”
“아아, 그거 가지고 논쟁하고픈 마음은 없으니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
단호한 고덕의 표정에 도왕은 억지로 불만을 접으며 말했다.
“그게, 황제 폐하의 칙서가 도착한 탓에 저희 세가가 조만간 황실을 지원하기 위해 출진을 할 예정입니다.”
“황실을 지원해? 무슨 일이기에 강호 세가가 황실을 지원해?”
“최근에 요녕성 향방군이 반란을 일으켰답니다.”
“그래봐야 관과 관의 충돌이 아닌가? 그런 일에 강호 세가가 왜 끼어들어?”
“그것이… 아무래도 녹림이 요녕성 향방군의 한 팔을 거들고 있는 모양입니다.”
“녹림이?”
“예, 대협.”
“그 돌대가리들이 스스로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없을 텐데?”
“그 말씀은……?”
도왕의 물음에 대한 답은 고덕의 뒤에서 나왔다.
“배후가 있을 거란 말이에요. 아마도 사패련이 나섰을 공산이 클 겁니다.”
“아, 호 자사께서도 나오셨소.”
천천히 걸어 나오는 호철랑의 모습을 슬쩍 일별하는 고덕의 표정엔 걱정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런 고덕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호철랑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황실의 대한 소식이 귀를 간질여서 앉아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이거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 그나저나 상황이 그 지경이면 지원군이 움직일 텐데요?”
“예. 말씀대로 여러 곳에서 지원군이 달려오는 모양입니다. 아! 호 자사가 다스리는 산동성의 향방군도 움직이고 있다더군요.”
가장 가까운 군대이니 당연한 움직일 것이었다.
“그렇겠지요. 하면 전군도독부도 이동을 시작했을 것이고, 안휘로 내려갔던 하북 향방군도 귀환 중이겠군요.”
“미리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놀라는 도왕의 물음에 호철랑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처음 들었습니다만.”
“한데 어찌 그리 정확히 아시는 건지……?”
“관부에 오래 있다 보면 대강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요.”
“그렇습니까?”
답은 그리했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도왕도 잘 알았다. 그 탓에 호철랑을 바라보는 도왕의 눈빛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저 검마와 아는 관부인 정도는 넘어서는 인사란 느낌을 받은 때문이었다.
“하면 언제 움직이실 요량이십니까?”
호철랑의 물음에 슬쩍 검마를 일별한 도왕이 답했다.
“내일 오후에 출진할 생각입니다. 반나절이면 도착하니 밤을 도와 황성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함께 가겠습니다.”
호철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덕의 못마땅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호 자사!”
“예, 대협.”
“그냥 있지.”
“싫습니다.”
“가서 좋은 꼴 볼 게 뭐라고?”
“그래서 더 가려 합니다.”
고집을 부리는 호철랑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눈 속에 들어선 결심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애들은 두고 너만 가자.”
고덕의 말에 도왕의 눈이 커졌다.
“예?”
“내가 함께 갈 것이니 애들은 두고 가잔 말이다.”
“하, 하나, 둘로 상대하기엔 저들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직도 수에 연연하나?”
“그, 그게…….”
당황하는 도왕에게 고덕은 마치 결정 사항을 알려 주듯 못을 박았다.
“내일 오후에 여기 있는 이들만 간다.”
고덕의 시야 안에 들어온 이는 도왕과 왕팔, 그리고 호철랑뿐이었다.
“하오나 칙서엔…….”
“그건 내가 가서 황제에게 설명하지. 그리고 네가 가니까 황명을 위반한 것도 아니잖아.”
“그,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도왕은 검마의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대협께서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대로 따르지요.”
마지못한 도왕의 답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면 낼 보지.”
그 말을 남겨 놓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고덕을 도왕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북경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시기, 사천의 경공 왕부에서도 이번 반란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 중이었다.
“이렇게 되면 지난 소문이 우리의 손과 발을 묶어두기 위한 것이란 의중이 깊어집니다.”
하 총관의 말에 경공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리가 제 풀에 놀라 난리를 치는 동안 동북어위도총부는 선수를 쳤어. 하나 아무리 녹림이라는 강호 집단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요녕성 향방군만 움직인 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인데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길림성 향방군이나 흑룡강성 향방군은 물론이고 우군도독부조차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도총사의 생각을 도무지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소리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소관은 달리 생각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 총관의 말에 경공왕이 의문을 표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입니다. 흑룡강성 향방군이야 요사이 달단과의 견제로 지금도 달단과의 경계선에 배치되어 있으니 움직이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사옵고, 길림성 향방군은 최근에 시행하고 있는 여진족의 정리에 동원되어 있으니 그 탓에 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면 우군도독부는?”
“그들이야 언제나 조선이 문제였지요.”
“조선을 경계하느라 움직이지 못한다?”
“예. 조선이라는 나라는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저력을 지녔으니 말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용하기엔 왠지 찜찜했다. 그것은 말을 한 하 총관도 마찬가지. 그 탓에 확신을 두고 주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찌할 것이냐는 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황실과 소흥 왕부, 그리고 동북어위도총부는 단단한 한 무리였습니다. 지금 그 무리가 깨어진 겁니다. 소흥 왕부를 정리하자면 지금처럼 좋은 기회는 없습니다. 왕야.”
“하면 소흥 왕부를 도모하자?”
“그러하옵니다.”
하 총관의 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경공왕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다 영상왕, 저 잡것에게 뒤를 물리게 되면 치명적일 텐데?”
“그러니 연수를 해야 합지요.”
“연수를? 저 간악한 영상왕과?”
“이미 한 번 해본 일입니다. 두 번은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왕야.”
“그거야 그렇지만…….”
“일단 눈앞의 난적을 치고 후일을 도모하시면 될 일입니다.”
하 총관의 설득에 경공왕의 고개가 마지못해 끄덕여졌다.
“좋다. 내 경의 말대로 따르지. 하면 내 의사를 영상 왕부에 전하라.”
“명을 받잡옵나이다, 왕야.”
크게 복명하는 하 총관을 바라보는 경공왕의 눈에 서서히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경공왕의 친서를 받은 영상왕은 그 제안을 곧바로 수락했다. 그에게도 소흥 왕부라는 난적을 해치울 기회는 지금뿐이라고 간하는 책사, 유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내 양측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그리고 북경의 싸움이 최고조를 달리던 칠월의 어느 날, 경공 왕부와 영상 왕부의 병력이 동시에 소흥 왕부와의 접경지대를 돌파했다.
“현재 선봉을 선 후군도독부의 병력이 절강의 남부를 유린하며 전진 중입니다.”
전선에서 속속 올라오는 장계를 읽어 내리는 환관의 음성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영상왕이 곁에 서 있던 유소에게 물었다.
“남양함대를 돌렸는데, 그들을 어디에 쓰려는 생각인가?”
“현재 남양함대는 광동과 복건, 두 성의 향방군 십만을 태운 채 절강의 후방으로 접근하고 있사옵니다.”
“절강의 후방으로!”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절강은 소흥 왕부가 위치한 곳. 전략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소는 지금 그런 절강의 후방에다 십만에 이르는 병력을 상륙시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 여부는 주산군도에 배치된 주산함대의 태도입니다. 그들이 순순히 남양함대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상륙을 막을 어떠한 세력도 없으니 성공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하나.”
“하나?”
“주산함대가 남양함대를 막아서면 얼마나 적은 피해로 그들을 격파하는지에 따라 상륙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옵니다.”
유소의 답에 영상왕이 근심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주산함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지?”
“규모면에서는 남양함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오나, 다수의 포함이 배치된 까닭에 제법 위협적인 전력이옵니다.”
최근 들어 화포를 배에 실어 해전에 임하는 포함의 건조가 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포함은 남양함대보다는 북경과 가까운 주산함대에 먼저 배치가 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화포를 생산하는 화포도감이 황실의 예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걸리더니 결국은 발목을 잡는군.”
영상왕의 분노 어린 음성에 유소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리 포함이라 하더라도 전선의 수는 압도적으로 남양함대가 우위에 있사옵니다. 좋은 결과가 있을 터이니 기다려 보시옵소서.”
유소의 말이 아니어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영상왕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분기를 삭이느라 애를 써야만 했다.
그날 밤, 영상 왕부는 급보를 받았다.
“완패!”
벌떡 일어서는 영상왕에게 유소는 침울한 음성으로 보고를 이어야만 했다.
“주산함대의 매복에 걸려 그만……. 대부분의 전함이 격침되었으나 다행히 수송함들 중 복건성 향방군을 실은 배들은 살아남아 상륙에 임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절반. 절반이란 말이지…….”
원래대로라면 십만의 절강, 복건 향방군과 함께 이만의 남양함대 수병들도 상륙시켜 전쟁을 수행케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남양함대가 날아가면서 이만에 달하는 수병은 물귀신이 되었고, 십만의 향방군도 절강성 병력을 태운 수송선들이 바다에서 격침되면서 반 동강이가 나고 말았다.
“오만이라고는 하나 절강성 향방군은 이미 후군도독부와의 전투를 위해 모조리 남부로 몰려 있는 상황이라 충분히 위협적인 전력이 될 것입니다. 왕야.”
“그래야지. 어떤 희생을 치르고 상륙시킨 병력인데. 반드시 소흥왕의 목줄을 끊어놓아야 할 것이다.”
영상왕의 말대로 간신히 상륙에 성공한 오만의 복건성 향방군 병력은 물밀듯이 소흥으로 밀어닥쳤다.
느닷없이 후방에서 출몰한 대규모 적군에 놀란 소흥 왕부는 전투를 위해 이동해온 강소성 향방군 일부를 급히 소흥 남부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겨우 오천에 불과했던 강소성 향방군 선발대는 오만에 달하는 복건성 향방군 병력의 파상공세 앞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한 채 전멸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간단히 오천의 강소성 향방군 선발대를 짓밟은 복건성 향방군은 노도같이 소흥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강소성 향방군 선발대의 희생을 발판 삼아 소흥 왕부는 왕부군 일만을 급히 이동시켜 간신히 소흥의 서쪽에 위치한 소도시 상우 근방에 방어선을 펼치는 것에 성공했지만, 워낙 병력 차이가 심해서 저들의 진군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 없었다.
“속히 피하셔야 하옵니다, 왕야.”
왕부군을 지휘해 상우로 나간 이첨을 대신해 소흥왕을 보필하던 왕부도사 예참의 간언에 소흥왕이 무심한 시선을 던졌다.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현재 중군도독부가 급거 이동하고 있습니다. 강소로 들어가시면 중군도독부의 호위를 받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왕야.”
현재로서는 가장 안전한 곳이 강소였다. 그 외의 지역은 모조리 경공 왕부나 영상 왕부의 군대와 전투 중이었던 것이다. 물론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산동도 있었지만, 그곳을 지키는 산동성 향방군은 지금 북경을 구하기 위해 진군 중이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격이었다. 동북어위도총부가 반란의 기치를 들었을 때를 노려 영상 왕부와 경공 왕부가 연수를 해 공격해오리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탓에 소흥 왕부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일격을 맞았다.
그나마 주산함대가 대규모 상륙군을 호송 중이던 남양함대를 격파하는 개가를 올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들이 소흥과 거리가 먼 주산군도 아래의 상산이 아니라 소흥의 지척인 항주나 소산에 상륙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퇴로가 막힌 소흥 왕부는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멸절당했을 수도 있었다.
“정녕 그 방법뿐인가?”
“그러하옵니다. 하니 서두시옵소서.”
예참의 독촉에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선 소흥왕을 대기하던 무장들이 황급히 부축하여 마차에 태우고는 급히 소흥성을 벗어났다.
멀어져 가는 소흥왕의 마차를 바라보며, 왕부를 지키기 위해 남은 예참은 자신의 주군이 무사하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소흥왕이 강소로 피난을 가던 시점에 이첨의 소흥 왕부군은 전진해오던 복건성 향방군과 맞닥트렸다.
이내 서로를 향한 비방과 자신들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서신이 오고 가길 잠시. 사신의 목을 베어버린 복건성 향방군의 파상공격이 시작되었다.
자신들이 버티는 시간만큼 소흥왕이 안전해질 것이란 생각에 이첨을 비롯한 소흥 왕부군은 사력을 다해 복건성 향방군을 막았다. 하지만 다섯 배란 숫자의 차이를 그들은 넘어서지 못했다.
결국 일만에 이르는 왕부군의 시신을 밟은 복건성 향방군은 삼만으로 줄어든 병력으로 절강서 내륙으로 파고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 시점에 소흥 왕부의 서쪽을 공략하던 경공 왕부의 병력이 맹렬한 저항을 뚫고 하남과 호북을 점령했다. 그에 자극을 받았던지 남부를 공략하던 영상 왕부의 병력이 곧바로 안휘와 절강을 병탄하고 북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소의 성도인 남경에 도착한 소흥왕은 기다리던 십만의 중군도독부와 강소성 향방군 이만 오천, 그리고 각지에서 살아남아 후퇴한 패잔병들을 규합한 병력 이만을 추슬러 방어선을 공고히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 *
고덕이 모는 마차는 말이 아닌 나귀가 끌고 있었다. 그에 당연히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지구력이 강한 나귀의 특성대로 마차는 끊임없이 움직였다. 어찌 보면 여행의 운송 수단으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고덕을 제외한 이들에겐 고역이었다.
속도가 느려 속이 터지는 데다 끊임없이 움직이니, 제대로 된 식사조차 못하고 마차에 앉아 건량으로 끼니를 때운 것이 벌써 여러 날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다간 전쟁이 모두 끝나고서야 도착하겠어요.”
참다못한 호철랑의 말에 고덕은 무심한 말로 그녀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대협!”
높아진 호철랑의 음성에 귀를 휘비는 고덕에게 왕팔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협, 이러다 정말 문제라도 생기면 그분이 속상해하실 겁니다.”
그 말에 고덕의 표정은 굳었고, 호철랑은 움찔했으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도왕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럴까?”
묵직한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살아 계실 때 그리 챙겼던 사촌동생이라 하지 않습니까? 도와주시길 바라실 것입니다.”
“흐음…….”
솔직히 시간을 끌다 북경이 점령된 후에나 도착할 생각이었다. 호경명이라는 사내의 야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한데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왕팔이 지목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사람이 걷는 것만큼이나 느릿하게 움직이던 마차가 삐거덕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나중엔 마차를 버리고 경공으로 달린 덕에 고덕과 일행은 북경이 점령당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점령 직전일 뿐이었다.
다급해진 도왕이 황궁으로 직행했고, 발을 동동 구르는 호철랑과 왕팔을 대동한 고덕은 산적들이 새카맣게 몰려 있는 오문 쪽으로 움직였다.
“어이, 망진.”
“어떤 호래자식이 감히 이 몸의 이름을 함부…….”
말을 하다 만 망진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크게 부릅떠졌다. 절대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사가 버젓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대협!”
납작 엎드리는 망진을 바라보며 고덕이 심드렁하니 물었다.
“너 여기서 뭐하냐?”
“예?”
“우리 처남 집에서 뭐하냐고?”
“처, 처남이요?”
“그래.”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당금의 황제인 가정제는 죽은 연화, 아니 문정 군주의 사촌동생. 당연히 고덕에겐 사촌 처남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저기… 여기가 자금성, 그러니까 황궁인데 말입죠.”
“안다.”
“그럼 황제하고 대협이……?”
“방금 전에 말했잖아 내 처남이라고.”
“허걱!”
기겁을 하는 망진에게 고덕이 물었다.
“저거 황궁 벽 타고 넘는 거 아니지?”
“아, 아닙죠. 아닙니다, 대협.”
“그럼 뭐하는 거지?”
“처, 청소. 그렇지, 청소 중입니다. 구경을 왔는데 어찌나 더럽던지.”
“구경?”
“예. 모처럼 애들 데리고 유람을 나온 김에… 하북 하면 또 자금성이 유명한지라…….”
식은땀을 흘려 가며 얼토당토않은 변명을 해대는 망진을 바라보며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난 또 네가 애들 풀어서 처남 집 담을 넘나 했지. 괜한 사람 목을 비틀 뻔했구나.”
고덕의 그 말에 움찔한 망진이 아우성을 치며 여전히 황궁의 담을 넘고 있던 산적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기, 뭐하는 거야? 청소를 그렇게 하면 어쩌자는 거야?”
순식간에 여기저기 다니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니, 산적들이 어안이 벙벙할 밖에. 이내 추치를 포함한 채주들이 모여들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요? 청소는 또 뭐고?”
“미, 미친놈. 우리가 청소하러 왔는데 그럼 청소하지 뭐하겠냐. 서, 서둘러서 청소나 해라.”
“아니, 뭔 소리…….”
말을 하다 말고 망진이 자꾸 흘깃거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던 추치가 기겁을 해서는 펄쩍 뛰었다.
“헉! 거, 검마!”
주변에 있던 이들치고 그 기겁성을 듣지 못한 이가 없다. 당연히 채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고덕에게 몰릴 수밖에. 그런 시선을 받으며 고덕이 손을 들어 보였다.
“오랜만이다.”
“아, 예, 옙, 대협.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기체후일향만강하셨습니까?”
“그놈 참… 그래, 덕분에 잘 지냈다.”
“하, 한데 이곳엔 어찌……?”
고개를 갸웃거리는 추치에게 망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협께서 처남 집에 놀러올 수도 있는 거지, 네가 뭔 상관이야?”
“처남 집이요?”
“그래, 처남 집!”
망진의 답에 추치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궁을 가리켰다.
“설마 저기……?”
“그래.”
“히끅!”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이 나왔다. 망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들은 지금 검마의 처남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시작하려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야, 네들 뭐해? 애들 청소하는 거 감독해야지!”
망진의 고함이 이젠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채주들이 부리나케 달렸다. 반항? 그따위 말은 개한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 생각했던 정천맹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충분히 보아왔기 때문이다.
결국 십팔 채의 채주들이 고함을 지르고 때론 수하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통에 산적들은 난데없이 자신들이 부수고 헐었던 성벽을 고치고, 자신들이 지른 불로 그을음이 묻은 성벽을 닦아야만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호철랑은 강호에서 발휘되는 고덕의 진가를 여과 없이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