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장. 환란(患亂)-싸움이 끊이질 않다
사방으로 구원을 청한 구문제독부가 준비를 갖추던 시기, 청하지도 않았던 요녕성 향방군이 남하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걸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군.”
“산적들이 미치지 않고서는 홀로 황도를 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보 담당관의 말에 구문제독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하면 자네의 생각은 뭔가?”
“최소한 요녕성 향방군은 우리를 돕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줄은 아는가?”
“예, 제독.”
“그리 쉽게 답할 성격은 아니야. 증거는 수집되어 있는 건가?”
“아닙니다.”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입에 담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하나, 정황이…….”
정보 담당관의 말을 구문제독이 자르고 들어갔다.
“정황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다. 속히 정보를 모으고 증거를 수집해. 그런 다음에 논의한다.”
“하오나, 그러다 실기를 하면……?”
“어차피 현재 진행하는 대응 방안 외에는 별도의 방법이 없다.”
“비상 징집을 실시하면 됩니다.”
정보 담당관의 말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황도인 북경에서 비상 징집을 실시한다는 건 황도가 적에게 포위당해 결사 항전을 할 경우뿐이다.
“안 돼!”
지난 융경 왕부의 반란 때 이미 해본 일이다. 한 황조에서 그런 일이 두 번씩이나 벌어진다면 가정제의 역사적 평가는 바닥을 칠 게 뻔했다. 신하 된 자로 그것은 도저히 방관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오나 제독!”
“무조건 안 돼. 황도의 비상 징집은 정말로 적에게 포위된 이후에나 거론한다. 이것은 군령이다.”
구문제독의 추상같은 엄명에 정보 담당관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자 구문제독의 시선이 휘하 장수들에게 돌아갔다.
“현재 병력은 모두 성벽에 배치되었나?”
“전시체제에 준하는 경비 체계에 맞춰 성벽의 경비가 강화되었습니다. 하온데 금의위에서 황도의 방위는 포기하는 것인지 물어왔습니다.”
구문제독부의 전 병력을 황성인 자금성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황도인 북경을 둘러싼 북경성은 완전히 비워져 있었다.
“제한된 인원으로 북경성과 자금성을 동시에 방어할 수는 없다.”
“금의위에서는 차라리 구문제독부가 북경성을 맡고, 금의위가 자금성을 맡는 것이 어떻겠냐고 합니다.”
나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북경성은 이만의 구문제독부가 방어를 맡기엔 너무 컸다. 원래 오만에 달하는 하북성 향방군이 방어를 맡았던 곳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기엔 병력의 부족이 심각하다. 외성은 우리가 막아볼 테니 내성은 금의위가 맡아달라고 전하라.”
“옛, 제독.”
명을 받은 장수가 급히 금의위로 달려가자 구문제독의 명령이 줄을 이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분주해진 회의장으로 젊은 부장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일단의 군대가 접근 중입니다.”
“어디로?”
“북경성 누곽에 배치된 정찰병의 보고입니다.”
그 말은 상대가 아직 북경성 외곽에 위치해 있다는 뜻이었다.
“속히 기찰군교를 내보내 상대의 신분을 확인하라.”
“옛, 제독.”
부장이 달려 나가자 구문제독부 장수들의 움직임이 더욱 분주해졌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서둔 덕에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을 무렵, 북경성 외곽에 나타난 군대의 정체를 확인하러 나갔던 기찰군교가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여기, 기찰군교의 시신에 꽂혀 있던 서신입니다.”
수행부장이 내민 서신을 펼쳐 든 구문제독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더러운 배신자!”
배신자란 말에 눈을 질끈 감는 장수들이 적지 않았다. 구문제독이 배신자라 부를 만한 이는 단 셋. 소흥왕이나 새로이 정비된 전군도독부를 맡아 나간 신임 전군도독, 그도 아니면 동북어위도총사뿐이다.
하지만 앞에 언급된 둘은 배신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인사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적으로 돌아서면 최악의 상대가 될…….
“역시 동북어위도총부입니까?”
조심스러운 부제독의 물음에 구문제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호경명, 이 씹어먹을 위인이 배신의 검을 들었다. 현재 북경성을 포위 중인 병력은 요녕성 향방군 오만이다.”
구문제독의 말에 미리 눈을 감았던 장수들은 결의를 다진 채 눈을 떴지만, 이제 상대를 확인한 장수들은 암담한 현실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을 흥륭에 집결하던 산적 패거리가 돕는다면…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입니다.”
부제독의 말에 구문제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 이미 구원을 청하는 기발이 소흥 왕부를 향해 출발했다. 소흥 왕부가 돕고 안휘로 내려간 하북성 향방군이 귀환한다면 충분히 저들과 자웅을 겨룰 수 있다. 우리는 그때까지 자금성의 성벽을 역도들로부터 지켜 내면 되는 것이다. 알겠는가?”
추상같은 구문제독의 음성에 휘하 장수들이 우렁찬 외침을 토했다.
“충!”
“가라. 가서 제병 지휘에 만전을 기하라!”
구문제독의 명에 장수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여전히 앉아 있는 정보 담당관이 보였다.
“또 할 말이라도 남았나?”
“저들이 강호의 야인을 동원하였다면 우리도 동원하면 됩니다. 제독.”
“강호의 야인들을 동원하자?”
“그렇습니다.”
“누구를 동원하자는 건가?”
“대부분 관의 일에 협조를 해오던 곳은 정천맹이란 이들입니다.”
“그들이 가까이 있던가?”
“하남의 낙양을 근거지로 하나 그들의 움직임은 기마대보다 빠르다 하니, 최선을 다한다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독.”
“흐음… 그들을 움직이려면 역시 폐하의 칙서가 필요하겠지?”
“그래야 할 것입니다.”
“알겠네. 내 가서 받아오지.”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고개를 숙이는 정보 담당관을 둔 구문제독이 수행 부관과 호위 무장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향했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길목마다 중무장을 한 금의위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 길을 걸어 정청에 들어서자 이번엔 동창의 고수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게.”
가정제의 반색에 구문제독이 군례를 올렸다.
“폐하 만세, 만만세.”
“인사치레는 되었다. 어떤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이미 동창을 통해 저들의 정체는 들었을 황제다. 그들의 능력을 잘 아니 당연히 걱정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시일이 문제이옵니다.”
“시일? 무슨 시일 말인가?”
“한도 끝도 없이 막아낼 수는 없는 일.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막아낼 수 있는 시일 말이옵니다.”
“하면 그 시일이 얼마나 가능하겠나?”
“현재로선 삼사 일이 고작일 것입니다.”
구문제독의 답에 가정제의 안색이 검게 죽었다.
“저들이 오만이라고는 하나 구문제독부와 금의위를 합하면 삼만이 아닌가. 그 정도밖에 못 막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저들이 요녕성 향방군만이라면 막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습을 가해 격파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헛된 말은 아니다. 그만큼 구문제독부와 금의위의 병력은 정예 중의 정예였으니까.
“한데 왜 삼사 일밖에 못 막아낸다는 말인가?”
“저들 속에 강호의 야인들이 섞여 들고 있사옵니다.”
“강호의 야인들?”
“예. 이미 수만의 산적들이 저들의 배후에서 집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감히 산적 따위가!”
분노하는 가정제에게 구문제독이 서둘러 설명을 이었다.
“그 산적들 속엔 녹림이라 불리는 강호 야인들의 집단이 섞여 있사옵니다.”
황제도 관인이다. 당연히 녹림이라 불리는 산적들에 대해선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토벌에 애를 먹는다던 바로 그놈들이로구나.”
“맞사옵니다. 지금 그들이 대규모로 모여들어 저들을 지원할 기세이옵니다.”
“하면 대책은 있는 것인가?”
“우리도 강호의 야인들을 끌어모을 생각이옵니다.”
“강호의 야인들을?”
“예, 폐하. 하여 망극하옵게도 폐하의 친서가 필요하옵니다.”
구문제독의 말에 황제의 뒤에 서 있던 동창제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를 동원하려 하시는 겝니까?”
“정천맹이라는 강호 야인들의 집단이 있다고 들었소이다.”
“가끔 관부의 일에 협조하던 이들이지요. 하나 그들은 동원할 수 없습니다, 구문제독.”
“어째서요?”
“그들은 멸절당하였습니다.”
“멸절?”
“그렇소이다.”
동창제독의 답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구문제독이 물었다.
“언제 말이오?”
“얼마 전의 일이오. 저들끼리의 충돌 속에서 모두 죽거나 도망치고 건물들마저 불탔다는 보고를 받았소.”
“하면 다른 곳은 없겠소?”
관에서 정보로 가장 뛰어난 곳은 누가 뭐라 해도 동창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정적일지라도 그곳의 수장에게 묻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협조적인 곳에 소림이 있었으나 그들도 봉문을 했다 하고, 남은 곳은 무당인데…….”
“하면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면 어떻겠소?”
“무슨 일인지 그들은 요사이 강호의 일에도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폐하의 칙서에도 움직이지 않을 순 없을 게 아니겠소.”
구문제독의 말에 동창제독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강호인들의 생리를 모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금의위 제독이 나섰다.
“그보다는 차라리 하북팽가를 동원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하북팽가?”
생소한 이름에 구문제독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동창제독은 그럴듯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들이라면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능력도 있지요.”
“하면 무엇을 망설이는가? 대전 내관은 즉시 칙서를 작성하여 오라!”
가정제의 명에 대전 내관이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전 내관이 올린 칙서에 옥새를 찍은 가정제가 그것을 금의위 제독에게 주었다.
“경이 하북팽가란 곳을 잘 아는 듯하니, 금의위를 시켜 속히 짐의 뜻을 전하게 하라.”
“명을 받나이다.”
복명한 해서령이 황급히 칙서를 들고 물러나자 방어 지휘를 위해 구문제독도 곧바로 대전을 벗어났다.
그날, 일단의 금의위들이 어둠을 틈타 포위된 북경을 빠져나갔다.
* * *
왕팔은 정말 미친 듯이 달렸다. 그런 왕팔을 도왕도 미친 듯이 따라왔다.
“저 미친 늙은이, 납치했던 이를 뭐하러 이렇게 죽자고 쫓아와.”
하지만 상대가 공주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도왕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공주가 무사 귀환하면 팽가는 끝이지, 끝!”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왕팔의 발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런 왕팔의 신형은 점차 북쪽으로,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왕팔과 달리 작은 마차에 몸을 실은 고덕은 남쪽을 향해 천천히 내려왔다.
“그냥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요.”
지치지도 않는지 호철랑은 고덕이 동북어위도총부를 그냥 떠나는 것을 줄기차게 반대하고 있었다.
“돼.”
언제부터인가 고덕이 자신에게 반말을 하고 있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호철랑은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 고덕을 향해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고 대협!”
“귀 안 먹었어.”
“정말 이렇게 가면 안 된다고요. 아버지는 지금 반역을 꿈꾸고 있단 말이에요!”
‘난 사내일세. 이만한 힘을 손에 쥐었으면서 한 번쯤 천하를 도모해보지 않았다는 것도 흉이 아니겠는가?’
호경명이 돌아서는 고덕에게 한 말이다. 그 말이 그다지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힘을 쓰는 것이 귀찮기만 한 자기 같은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너무 재미없는 곳일 테니 말이다.
“반역도 한 번쯤은 해보고 그래야지.”
“고 대협!”
“거참, 귀 안 먹었다니까.”
“정말 이건 아니란 말이에요. 반역이 벌어지면 전쟁은 필수적으로 따라온다고요. 그 속에서 죄 없이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생각해봤어요?”
“내가 왜?”
“뭐라고요?”
“내가 왜 그런 이들을 생각해야 하냐고? 그들도 살면서 내 생각은 안 할 텐데 말이야.”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에 있어요? 당연히 힘을 가진 자가 힘없는 이를 지키고 보살피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란 걸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호철랑의 주장에 고덕은 설핏은 미소를 그렸다.
“응, 몰라. 내가 본 세상은 힘없는 이를 밟고 올라서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곳이었거든.”
“그런 것을 고쳐야죠. 그래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뭐, 그건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맡겨 두지. 난 귀찮으니까.”
“고 대협!”
다시금 소리를 지르는 호철랑의 고함에 고덕은 귀를 후벼 댔다.
“그렇게 부른 게 벌써 세 번째라고.”
“정말!”
발작하려는 호철랑을 손을 들어 제지한 고덕이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저거 팔이잖아. 저놈이 왜 여기에……?”
고덕의 음성에 호철랑도 목을 빼고 저만치에서 달려오는 이를 바라보았다.
“정말이네요.”
호철랑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수백 장을 단숨에 달려온 왕팔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덕에게 달라붙었다.
“대협!”
“뭐하는 거야?”
고덕의 못마땅한 음성에 얼른 떨어진 왕팔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워낙 반가운 나머지……. 헤헤헤.”
헤픈 웃음을 짓는 왕팔을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다시금 먼 곳을 향했다.
“저놈은 또 웬일이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가오던 사람의 모습이 거꾸로 작아져 갔다.
“어쭈, 보고서 도망간다 이거지. 야, 팔아.”
“예, 대협.”
“가서 저거 잡아와라.”
“예?”
“저놈 잡아오라고.”
“제, 제가요?”
여태 개 쫓기듯 쫓겨 다녔건만 그렇게 만든 이를, 그것도 돌아가는 이를 구태여 쫓아가서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그럼 내가 가랴?”
“그, 그래도 그냥 두시는 게.”
미적거리는 왕팔에게 고덕이 인상을 써 보였다.
“쓰읍!”
“다, 다녀오겠습니다.”
황급히 돌아서던 왕팔이 뒤늦게 생각난 듯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것을 조심스럽게 마차에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게 뭐지?”
무심코 천을 들춰 보던 고덕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뭐, 뭘 보는 거예요! 빨리 고개 돌려요!”
비명 같은 호철랑의 고함에 마지못해 고개를 돌린 고덕의 입가엔 꽤나 만족스런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 고덕의 표정을 알 길 없는 호철랑은 서둘러 드러난 여인의 상반신을 천으로 덮었다.
“설마 요새 수하들에게 인신매매 같은 거 시키는 건 아니죠?”
사나운 눈매로 물어오는 호철랑의 물음에 고덕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왜? 혹시 저놈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그 말에 호철랑의 눈매는 더욱 날카로워졌고, 고덕은 움찔하며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그런 요상한 분위기가 흐르길 얼마. 왕팔이 미적거리는 도왕과 함께 돌아왔다.
“아이고, 대협 아니십니까? 어떻게 이런 곳에서, 반갑습니다.”
도왕이 선수를 친답시고 반가운 척을 했지만, 고덕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너 나 보고 도망간 거지?”
“아, 아닙니다. 제가 왜 도망을… 절대로 아닙니다.”
고개를 맹렬하게 젓는 도왕의 코앞으로 고개를 들이민 고덕이 물었다.
“품새가 저놈 쫓는 거 같던데, 아닌가?”
“그, 그게…….”
말을 더듬다 말고 마차에 실려 있던 손녀의 얼굴을 본 도왕이 황급히 다가왔다.
“멈춰요!”
손을 뻗는 도왕을 호철랑이 제지했다.
“누구……?”
“그러는 분은 누구시죠?”
“나야…….”
무명만 꺼내놔도 모르는 이가 없는 자신을 소개하려던 도왕의 의도는 고덕의 음성에 사정없이 구겨졌다.
“있어. 덜떨어진 칼잡이.”
“칼잡이면… 낭인!”
“뭐, 비슷해.”
“대협!”
도왕의 부르짖음에 고덕이 고리눈을 뜨고 을렀다.
“잘하면 한 대 치겠다.”
그제야 자신이 누구에게 소리를 지른 것인지 자각한 도왕이 사색이 되었다.
“이, 이놈의 입이 미친 모양입니다. 대협.”
자신의 입을 때리는 시늉을 해대는 도왕의 너스레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물었다.
“정말 어찌 된 일이야?”
고덕이 진중하게 들을 표정이자 도왕이 재빨리 설명을 하고 나섰다.
“저놈이 세가에 침입해서 사람을 납치해가는 바람에 제가…….”
“누가 누굴 납치했다고 그래요? 대협, 먼저 납치한 쪽은 저쪽입니다. 전 구하러 갔던 거라고요.”
억울하다는 듯이 반발하고 나서는 왕팔의 말에 가로막힌 도왕에게 고덕이 물었다.
“정말이야?”
“그, 그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실제로 황궁에서 손자가 좋아하는 여인을 납치해다 준 게 도왕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군데 납치까지 하고 그래. 이 여자인가 보지? 누구야?”
“공주입니다.”
“내 손녀입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의 답에 고덕이 인상을 썼다.
“공주란 거야, 아니면 손녀란 거야?”
“공주라니까요.”
“미친, 내 손녀란 말이다!”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도왕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 표정을 바라보던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거짓말 같진 않은데.”
고덕의 말에 도왕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이 팽여군, 비록 대협의 눈엔 별 볼일 없는 하수일지 몰라도 명예 하나로 사는 놈입니다.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는데?”
돌아보는 고덕의 말에 왕팔이 펄쩍 뛰었다.
“제가 직접,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추적해서 구해낸 걸요. 그럼 대협은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까?”
팔팔 뛰는 것이 왕팔도 거짓말 같진 않았다. 그것이 고덕을 헛갈리게 했다.
“뭐야, 이거. 그나저나 얘는 왜 벌거벗고 있는 거야?”
“그게… 구출하러 들어갔는데 모, 목욕을 하고 있어서…….”
뒷말을 흐리는 왕팔을 도왕이 고리눈을 뜨고 노려봤다.
“뭐라! 하면 네놈이 감히! 이익, 내 네놈의 눈을 파서 개 먹이로 던져 줄 것이다!”
“거참, 말을 해도…….”
고덕의 핀잔에 움찔하긴 했어도 왕팔을 노려보는 도왕의 눈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친인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결국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 고덕이 호철랑을 바라봤다.
“깨워볼 수 있을까?”
고덕의 물음에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는 여인을 흔들어본 호철랑의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걸요.”
그 말에 왕팔이 나섰다.
“아, 그거 자꾸 움직여서 혈도를 눌러놔서 그렇습니다. 제가 풀까요?”
왕팔의 말에 도왕이 길길이 뛰며 반대를 했지만, 고덕의 사나운 눈길 한 방에 조용해졌다. 그런 도왕을 향해 혀를 내밀어준 왕팔이 여인의 전신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뭔 혈도를 그리 많이 누른 거야?”
“그, 그게 처음엔 소리를 못 지르게 아혈만 눌렀는데 자꾸 움직이니까 마혈도 누르고, 뻣뻣이 굳어서 눈만 굴리는 게 안돼 보이기도 하고 해서… 나중에 수혈을 눌렀는데, 그게 전중혈을 눌러서요.”
“뭐, 어디!”
다시금 도왕이 발작할 만도 했다. 전중혈이면 젖가슴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혈도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중혈을 눌러 상대를 잠을 재우려면 양쪽 가슴에 있는 신봉혈을 같이 눌러야 한다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신봉혈의 위치는 젖꼭지 바로 옆이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몸을 떠는 도왕이 노려보는 가운데 여인이 천천히 눈을 뜨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깨어나자마자 자지러지는 비명을 들은 고덕은 잔뜩 인상을 써야 했다. 놀란 여인을 호철랑이 조심스럽게 안았다. 딴에는 놀란 것을 진정시킨다고 한 듯한데, 자신의 차림이 남장이라는 것은 잊은 모양이었다.
“꺄아아아악~!”
좀 전보다 더 큰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간신히 여인이 안정을 찾자 호철랑이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지 않나요?”
“내가 어디서 당신 같은 불한당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설마 호 언니?”
여인, 팽연의 놀람에 호철랑이 무릎을 쳤다.
“아! 팽 동생!”
호철랑의 음성에 고덕이 곁에 서 있던 왕팔에게 물었다.
“요즘 황족의 성이 팽씨냐?”
“아닐걸요?”
“근데 제는 팽씨라잖냐.”
“그러게요.”
멀뚱멀뚱한 왕팔을 바라보던 고덕이 호철랑과 인사를 나누던 팽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소저.”
“예? 어! 거, 검마!”
처음엔 미처 몰랐지만 나중에 자신들을 구한 이가 검마란 것을 알았다. 그 탓에 팽연은 자신들을 구하러 낙안채에 왔던 고덕을 기억하고 있었다.
“날 아나?”
“예. 저기, 이전에 낙안채에서…….”
“낙안채? 아!”
기억이 없을 수 없다. 그곳에서 고이현을 만났으니까. 그녀 생각이 떠오른 탓인지 고덕의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런 고덕에게 도왕이 말을 걸었다.
“이제 확인이 된 겁니까?”
“음… 대충은. 그나저나 공주를 납치했다는 건 무슨 소리야?”
“그게…….”
당황하는 도왕을 대신해 팽연이 사정을 설명하고 나섰다. 그 설명을 모두 들은 고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운라인지 뭔지 하는 공주가 자신을 납치해달라고 부탁했단 말인가?”
“예. 그분도 오라버니를 많이 사랑했거든요.”
“그럼 하가시켜 달라고 청할 일이지, 그게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일국의 공주가 강호의 야인에게 하가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혼 자체가 세력을 키우는 도구인 황실에서는 말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기에 고덕의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 뭐냐? 너 완전히 헛다리짚은 거지?”
고덕의 물음에 왕팔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남의 집에 들어가 멀쩡히 목욕하던 처녀를 납치한 셈이었으니 뭐라고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왕팔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이 도왕을 달랬다.
“이번 일은 이쯤에서 덮지?”
“하, 하지만…….
“몰라서 벌어진 일이지 않나. 더구나 원인은 그쪽에서 제공한 일이고. 그러니 덮자고.”
천하의 검마가 원하는 일이다.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인 데다 말마따나 팽가의 잘못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기에 도왕은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대협이 정히 원하신다면…….”
“고맙다.”
이로써 팽가는 검마에게 빚을 지운 셈이다. 그 탓인지 고개를 숙인 도왕의 입가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느닷없이 다섯으로 늘어난 일행은 고덕의 마차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이 가세한 탓인지 고덕을 괴롭히던 호철랑의 설득도 흐지부지 사라졌다. 물론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