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장. 단애(斷崖)-끝으로 몰리다
섬마공을 최대로 펼친 덕에 왕팔과 추적대가 자금성에 도착한 것은 소흥 왕부를 나선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그들의 행색에 금의위와 동창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이들이 소흥왕이 보낸 이들이다?”
“그러합니다, 폐하.”
왕팔 등을 안내해온 해서령의 답에 가정제는 불안한 시선으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좀처럼 신임이 가지 않는 몰골들이었다.
“그대들이 정녕 사라진 공주를 찾을 수 있겠는가?”
“아직 시도를 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사오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제법 의젓하게 답하는 왕팔을 추적대원들이 신기한 눈으로 힐끗거렸다.
“짐이 당부를 하지. 꼭 찾아야 하네.”
“노력하겠습니다.”
왕팔의 답에 해서령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황제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는 격식에 크게 어긋나는 탓이었다. 하지만 가정제는 그것을 문제 삼을 생각이 없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다.
“내 그대들의 노력을 믿고 기다림세.”
* * *
황제의 말을 뒤로하고 대전을 물러나온 왕팔과 추적대는 해서령의 안내로 운라 공주가 머물렀다던 운라궁을 찾았다.
“흔적을 찾아라.”
왕팔의 명에 다섯 추적대원들이 잽싸게 흩어지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시정잡배들이 비싼 물건을 탐하는 모습 같아 해서령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리 허술하게 살펴서 흔적을 찾을 수 있겠소?”
해서령의 물음에 왕팔이 히죽 웃어 보였다.
“못 찾죠.”
“뭐, 뭐요?”
당혹해하는 해서령에게 왕팔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실전은 교육의 연장. 녀석들 교육을 위해서는 잠시 기다려 주는 거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 말은 그대가 나서면 찾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리오만……?”
“뭐, 벌써 몇 개는 눈에 뜨였으니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도대체 긴장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왕팔의 답에 해서령의 눈가는 잔뜩 찌푸려졌다.
나름대로 추적에 일가견이 있다는 금의위와 동창, 서창의 고수들이 모조리 동원되고서도 찾지 못한 흔적이다. 한데 그런 흔적을 입구에 서서 벌써 몇 개나 발견했다는 왕팔의 말이 신용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불신의 눈길을 받던 왕팔이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추적대원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누가 골동품 감정하랬냐? 흔적, 흔적을 찾으란 말이다.”
왕팔의 고함에 입을 삐죽거린 추적대원들이 더 열심히 사방을 뒤적거렸다.
그렇게 일각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찾아낸 것이 없었다.
“멍청한 것들. 그리 배웠으면 적어도 한두 개는 찾아내야지. 도대체가 눈구멍에 박힌 건 눈알이 아니라 구슬이야? 왜 버젓이 보이는 것도 못 찾아?”
방방 뛰는 왕팔의 책망 아래서 연신 방 안을 맴도는 추적대의 모습은 여전히 미덥지 못했다. 그런 이들을 불신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해서령에게 언제 들어섰는지 동창제독이 다가섰다.
“저들입니까? 소흥 왕부에서 보내왔단 이들이?”
“그렇소.”
“한데, 지금 뭐하는 짓이랍니까?”
“무슨 훈련 중이랍디다.”
“훈련? 이 상황에 훈련이라니, 그걸 두고 보셨단 말씀입니까?”
“저들의 수장은 이미 흔적을 찾아냈다니 참고 지켜보는 중이라오.”
“흔적을 찾았단 말입니까?”
놀라는 동창제독에게 해서령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솔직히 그다지 믿기진 않소만, 여기 가만히 서서도 몇 개는 보인다더이다.”
“무슨 그런 미친…….”
대번에 그런 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흔적을 찾는 작업을 지휘했던 이가 바로 동창제독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도 추적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 흔적을 찾는 일엔 누구에게도 뒤진다 생각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에게 입구에 가만히 서서도 몇 개나 되는 흔적이 보였다는 말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만! 멍청한 것들. 이리로 모여 봐.”
왕팔의 짜증에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추적대원들이 모여들었다.
“자- 여기서 흔적까지는 아니어도 이상한 점을 발견한 사람?”
왕팔의 물음에 공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공도.”
“여기 신발 자국이 보이긴 하는데요. 그게 너무 흐려서…….”
공도의 말에 그가 가리킨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한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왕팔과 추적대원들과는 달리 해서령과 동창제독의 고개는 모로 기울어졌다. 그들의 눈에는 신발 자국은 차치하고 작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런 둘의 귀로 왕팔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긴 잘 봤다. 하지만 그런 건 개나 소나 다 찾는 거다.”
왕팔의 말에 개나 소에도 들지 못한 해서령과 동창제독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을 알 길 없는 왕팔과 공도의 대화가 이어졌다.
“흔적은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래. 이건 어떤 개념 없는 새끼들이 조사한답시고 신발을 신고 돌아다닌 탓에 생긴 잡흔이다.”
그 말에 왕팔과 추적대의 발을 보니 어느새 벗었는지 버선발이었다. 그것도 발가락으로 곤두선 까치발이다. 그 탓에 개념 없는 새끼들 중의 하나가 된 동창제독의 표정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어찌 압니까?”
공도의 물음이 아니었다면 동창제독이 물었을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왕팔을 부르려 반쯤 내밀었던 손을 동창제독이 황급히 거둬들였다.
“새대가리 자식. 머리 위에 달린 건 장식으로 달고 다니냐? 흔적을 잘 봐봐. 먼지 위에 찍힌 자국 아니냐?”
왕팔의 말에 바닥을 뚫어지기 노려보던 공도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정말 그러네요.”
“그래. 이건 사건이 벌어진 후 사람의 움직임이 사라진 지 세 시진 이상이 지나 먼지가 내린 위를 흙발로 밟은 흔적이다. 그리고 신발의 모양으로 보아선… 가죽신이되, 선이 좁고 날렵하다. 이런 건…….”
왕팔의 뒷말을 공도가 큰 목소리로 받았다.
“여인네의 꽃신이 아니면 낯바닥 하얀 새끼들이 신고 다니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슬쩍 동창제독을 일별한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환관들이 즐겨 신는 신의 모양이다.”
“꽃신일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염홍의 물음에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꽃신은 코가 이것보다 더 날렵하다. 전족을 한 여인들의 발끝이 가늘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건 코가 뭉툭하다. 이런 건 환관들이 싣는 거다.”
“하면 환관들이 방을 어지럽혀서 흔적을 더 못 찾는 겁니까?”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런 잡흔이 없었다면 좀 더 나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겠지.”
왕팔의 말에 마침내 동창제독의 불쾌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을 어찌 보증하는가? 내 눈엔 그 신발 흔적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동창제독이 나서는 것을 해서령은 말리지 않았다. 자신도 같은 궁금증을 가진 탓이었다.
“일반인은 안 보일 수 있지요. 하지만 추적을 조금이라도 배운 이들이라면 초보라 할지라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왕팔의 말에 해서령은 곁에 선 동창제독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어디 내게 그 흔적이라는 것을 증명해보라!”
분기 가득한 동창제독의 요구에 왕팔이 귀찮다는 듯이 공도를 바라보았다.
“가서 분무기에 물 좀 담아 와라.”
“분무기가 어디 있는데요?”
“저쪽에 난이 있으니 그쪽 어딘가에 있겠지.”
왕팔의 말에 방의 한구석을 뒤적이던 공도가 분무기를 하나 들고 왔다.
“물이 들어 있는데요.”
“그럼 이리 줘봐.”
공도의 손에서 분무기를 받아든 왕팔이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방바닥을 향해 물을 뿌렸다. 물이 방바닥에 내려앉자 희미하게 물을 먹은 흙이 드러나며 흔적이 나타났다.
“이제 보입니까?”
왕팔의 물음에 동창제독은 입을 닫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방해꾼이 그렇게 사라지자 왕팔의 설명이 추적대에게 이어졌다.
“다른 흔적들도 대부분이 잡흔이다. 아주 기본이 안 된 새끼들이 방을 뒤졌다는 거지. 이런 놈들에게 돈을 주는 의뢰인이 있다면 그 자식은 머저리가 분명할 거다.”
그 말로 동창제독을 포함한 황궁의 추적 전문가들은 기본이 안 된 새끼들이 되었고, 그들을 고용하고 있는 황제는 머저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말을 트집 잡지도 못했다. 자신들의 능력이 미천하여 황상을 욕 먹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고리눈만 부릅뜬 동창제독의 시선 아래 왕팔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 이제 제대로 된 흔적을 보자. 저기 창가 아래에 불룩하게 솟은 벽지가 보이나?”
“예.”
“반항흔이다. 공주가 납치되면서 반항하다 생긴 흔적이란 말이다.”
“저게 어떻게 봐서 반항흔입니까? 그냥 벽지가 들뜬 것처럼 보입니다만.”
공도의 물음에 왕팔이 핀잔을 줬다.
“그러니까 네놈 눈이 해태 눈깔이라는 것이다.”
공도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졸지에 해태 눈깔이 된 해서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런 해서령의 기분을 알 길 없는 왕팔의 음성이 이어졌다.
“잘 봐라. 벽지가 오래전에 들떴다면 이곳 아랫부분이 접힌 흔적이 있어야 하지만, 이건 불룩하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이렇게 불룩하니 장시간 방치할 사람은 없다.”
“그렇긴 하지만…….”
“또 하나, 벽지의 위로 희미하게 쓸린 흔적이 있다. 이건 무언가로 벽지를 밀었고, 그로 인해 이 벽지가 밀려나며 들떴다는 걸 의미한다. 내 예상으론 발로 민 게 아닌가 싶다.”
“발로요? 이렇게 위를 말입니까?”
“너 정도 체격의 사내가 여인네를 들쳐 메면 어때. 딱 그 위치지?”
염홍을 가져다 대보는 왕팔의 말마따나 대략적인 위치가 맞아 들어갔다.
“놈은 이 창문으로 나갔다. 그러니 다음에 우리가 살펴볼 곳은?”
왕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도의 손이 올라갔다.
“그래, 공도.”
“이 창문 너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을 것이기 때문이죠.”
공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동창제독의 얼굴은 이어진 왕팔의 말에 와락 구겨졌다.
“너 같은 인간들을 사람들은 식충이라고 부르는 거다. 이 식충아.”
“왜요?”
“생각해봐라. 이곳까지 소리 없이 잠입할 정도의 고수가 여자 하나 들쳐 업었다고 창문 아래로 뛰어내리겠냐?”
“그럼요?”
“이곳 창문을 밟고 도약. 저기 저쪽에 뭐가 보이냐?”
왕팔의 손을 따라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던 염홍이 재빨리 답했다.
“담장입니다.”
“담장을 밟으면 그 위에 덮인 기와 때문에 소리가 난다. 그런 실수를 저지를 정도의 인사면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하면 어디를……?”
“담장의 왼쪽.”
“나무가 있는데요.”
“그래. 그 나무의 위를 살펴본다.”
왕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추적대원들이 창문을 통해 날아올라 나무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보이는 게 있냐?”
창에 턱을 괸 왕팔의 물음에 공도가 답했다.
“경치 죽이는데요.”
“내가 너 경치 보라고 올려 보낸 줄 알아?”
빽 하니 소리를 지르는 왕팔의 음성에 공도가 입을 삐죽이자 염홍이 답했다.
“흔적이 하나 보입니다. 반동을 주었는지 살짝 나뭇가지가 찢어졌습니다.”
“찢어진 방향은?”
“궁 안쪽인데요?”
염홍의 답에 해서령이 뒤편에 시립해 있던 금의위 위사에게 눈짓을 하자 그가 곧바로 일단의 금의위들을 이끌고 나무와 직선상에 위치한 궁 안 지역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그런 부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팔이 천천히 말했다.
“나뭇가지가 찢어진 반대 방향으로 사람의 신형은 움직인다.”
“하면 이쪽이네요.”
염홍이 가리킨 쪽은 궁 밖이었다. 그에 해서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흔적을 찾아 이동한다.”
왕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추적대원들이 궁 담을 넘어 밖으로 날아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왕팔도 곧바로 창밖으로 신형을 뽑아내 담장을 넘어 나갔다.
결국 덩그러니 남게 된 해서령과 동창제독은 똥 씹은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왕팔이 자금성에서 공주 찾기로 분주할 때, 고덕은 천천히 동북어위도총부가 위치한 길림성의 장춘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전에 호철랑과 함께 왔던 적이 있는 장춘은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고, 물산도 풍부해 보였다. 그런 변화는 다스리는 이가 나름대로 선정을 베푼다는 의미였기에 고덕의 입가엔 절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쨌거나 이곳을 다스리는 이가 그가 아는 사람이었던 탓이었다.
느긋이 걸어 관아로 다가선 고덕이 수문 위사에게 말을 걸었다.
“가서 도총사께 고덕이란 사람이 보잔다고 전해다오.”
나이도 어린놈이 다짜고짜 반말이었지만, 그 탓에 수문 위사는 더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대체로 고관대작가의 도련님들이 이렇게 말투에 싸가지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저 고덕이라 전해 올리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그리만 전하면 된다.”
고덕의 답에 다른 수문 위사의 전갈을 받은 하급 장수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안으로 드시지요.”
하급 장수의 인도로 도총부 안으로 든 고덕은 도총부 내에 위치한 별원으로 안내가 되었다.
“잠시 기다리시면 도총사께서 오실 것입니다.”
“알겠네.”
고덕의 답에 그를 안내해온 장수는 가벼운 군례를 남긴 채 별원을 나갔다.
잠시 적막을 즐기던 고덕의 눈가가 작게 찌푸려졌다.
“접대 방식이 특이하군.”
천천히 일어서는 고덕의 전면으로 문을 부순 인형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쾅-
전면뿐이 아니다. 거의 동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하게 사방의 벽과 지붕이 터져 나가면서 병장기를 세운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이미 일어서 있던 고덕이 탁자를 밀치는 동시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손을 뻗었다.
턱-
칼을 내지른 손을 고개를 살짝 기울여 피해낸 고덕의 손이 상대의 가슴에 닿았다.
씨익-
고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그려지는 순간.
푸확-
상대의 등 뒤를 뚫고 현월이 뛰쳐나왔다.
뻣뻣하게 굳어 넘어가는 이를 두고 빙글 돌아선 고덕의 양손이 빠르게 허공을 교차하고, 각기 네 개씩의 현월이 좌우로 뻗어나갔다.
콰직- 퍼석.
두 가지 소음 끝을 양쪽 벽을 벌겋게 물들이는 피가 장식했다.
스핏-
한쪽으로 비켜선 고덕의 코앞을 강력한 강기가 스쳐 지나갔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자마자 돌아선 고덕의 손에 명혼이 뽑혀 나왔다.
스걱-
어느새 뒤에서 전면으로 바뀐 공간과 사람이 통째로 잘려 나갔다.
촤장창-
다시금 바닥이 터져 오르며 창을 꼬나 쥔 이가 튀어 올라왔다. 조금 전 지붕을 부수고 내려와 바닥으로 사라졌던 이였다.
올라오는 이의 정수리로 명혼이 내리꽂혔다.
퍼석-
섬뜩한 소리를 남기고 내려간 명혼이 올라오던 사람을 다시 바닥 아래로 밀어 넣었다.
고덕이 명혼을 회수하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라왔다. 그 피를 밟고 방을 나서자, 호한의 노인이 담담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애들이 적극적이더군.”
고덕의 비아냥을 고루귀마는 담담한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조금 소란스러운 편이긴 하지.”
화경에 이른 고수 다섯을 잃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상대의 반응에 고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곳에서 온 게 아닌가?”
“맞아.”
“한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군.”
“그놈들의 팔자니까.”
고루귀마의 답에 고덕이 설핏은 미소를 지었다.
“협공을 하지 않은 거, 후회할 텐데.”
“후회는 미련한 놈들이나 하는 거지. 난 후회 안 해.”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
“솔직히 보기 전까진.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군.”
“한데도 담담하다?”
“기껏해야 죽기밖에 더하겠나.”
고루귀마의 답에 고덕의 입가에 진짜 미소가 어렸다.
“제법 마음에 드는 가치관을 가졌군.”
“나도 내 가치관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대부분은 좋아하지 않지.”
“왜?”
“내 가치관의 중심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다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장사를 접을 생각인가?”
“아니.”
“그럼 손해가 날 텐데?”
고덕의 물음에 고루귀마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내 가치를 꽤나 높게 쳐주는군. 황송하다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이지?”
“내가 널 보고 느낀 내 가치는 네 오른팔 정도야.”
고루귀마의 답에 고덕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 고덕을 바라보며 고루귀마가 말을 이었다.
“네 오른팔만 가져간다면 내 목숨도 손해를 본 건 아니란 말이지. 하니, 날 죽여. 그리고 오른팔을 내놓고.”
그 말을 던져 놓고 기세를 끌어올리기 시작하는 고루귀마를 바라보는 고덕의 표정은 진중했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아는 놈.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족속이다. 그들은 자신의 한계를 너무나 잘 알기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엔 아예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때문에 성공 확률은 상당히 높다.
그 말은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의 오른팔을 거둬갈 확률이 꽤나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하는 고덕을 향해 고루귀마의 신형이 폭사되어 왔다.
쾅-
온몸을 던져 온 상대의 공격을 막은 팔이 쩌르르 저려 왔다. 최소 현경의 중간이다. 그런 이가 오로지 자신의 팔 하나만을 노리고 달려드니, 어지간한 고덕으로서도 상대하기가 난감했다.
쑤아아악-
현월이 날고, 공간도가 사방을 갈라도 귀신같이 피해내며 오로지 오른팔 하나에 집중해왔다. 그런 상대를 막기가 버거웠다. 더구나 저돌적인 상대의 공격에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감싸다 보니 공격도 멈칫거리기 일쑤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고덕의 오른 어깨에서 피가 튀었다.
팔은 여전히 움직여지는 것이 힘줄은 상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꽤 굵은 핏줄이 끊어진 듯 피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재빨리 어깨의 혈도 몇 군데를 짚자 뿜어지던 피가 기세를 누그러트렸지만, 완전히 멎진 않았다. 피가 완전히 멎는다는 것은 혈도를 완벽히 틀어막았다는 것. 지금처럼 맹렬히 어깨를 써야 하는 상황에선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줄줄이 새는 피를 달고 고덕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이동한 자리로 고루귀마의 성명절기인 고루장이 쏟아져 내렸다.
파바바바박-
튀어오르는 흙을 뚫고 피투성이가 된 고루귀마가 따라 들어왔다. 어깨에서 피를 보았다지만 온몸이 피투성이인 고루귀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만큼 일방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지만, 우습게도 도주하는 건 고덕이고 그 뒤를 쫓는 것은 고루귀마였다.
주객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이었지만 싸움에 임한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의 한 팔과 자신의 목숨을 바꿀 요량으로 임하는 고루귀마는 그 마음만큼이나 결사적이었고, 고덕으로서는 그런 적에게서 자신의 팔을 지켜 내고 상대를 격살해야 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하게 싸움에 임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치열한 난타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불쑥 고루귀마의 손에서 비수가 날아올랐다. 권장가란 생각에 미처 방비하지 못한 공격이었던 탓에 너무 가까웠다. 피하면 가슴이 열리고, 막자니 오른손을 고루귀마의 전면으로 내밀어야만 했다.
찰나의 순간, 이를 악문 고덕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전력을 다한 고루귀마의 양 주먹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내리쳐졌다.
퍽-
머리의 절반이 날아간 고루귀마가 한쪽만 남은 눈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런 고루귀마의 눈앞으로 명혼이 내밀어졌다.
오른팔에 집중한 고루귀마는 미처 못 느꼈던 모양이지만, 고덕은 오른 어깨를 뺀 상태로 몸 전체를 날렸다. 당연히 오른쪽 팔보다 왼쪽 팔이 더 빨리 고루귀마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왼팔에 들려 있던 명혼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현월. 고루귀마의 머리 반쪽을 날려 버린 장본인이었다.
물론 대가도 치렀다.
푹-
뒤늦게 통렬한 고통을 수반한 채 날아든 비수가 고덕의 오른쪽 가슴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고덕으로서는 비수에 가슴을 내주는 대신 상대의 격살을 택한 것이었다. 그것을 고루귀마는 고덕이 팔을 포기하고 비수를 막고 자신의 머리를 노릴 것이라 판단했을 뿐이었다.
그 판단의 차이가 생사를 바꿨다. 천천히 넘어가는 고루귀마의 눈엔 손해를 본 것에 대한 억울함이 가득했다.
털썩-
난적을 제거했지만 부상이나 돌볼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이곳은 적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천천히 비수를 뽑은 고덕의 손이 빠르게 가슴 쪽 혈도를 짚었다. 뿜어져 나올 피를 막은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기의 운행엔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이쪽은 심장과 가까워서 출혈이 일어나면 어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피와 시신으로 도배된 별원을 나서는 고덕을 발견한 군병들이 놀라 호각을 불고 창검을 세워 막았다.
그런 군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막으면 죽는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길이 열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탓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을 들어올리던 고덕은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앞을 막아섰던 군병들이 천천히 물러나며 길을 연 까닭이다.
그 믿기지 않는 상황에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고덕의 앞으로 천천히 중년의 장수 한 명이 나섰다.
“오랜만이외다.”
“그렇구려.”
“살아 나오지 못할 줄 알았소.”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대를 했었구려.”
“그랬던 것일지도…….”
뒷말을 흐리는 호경명을 바라보며 고덕이 말했다.
“그를 내놓으시오. 하면 돌아가리다.”
“황제의 뒤통수를 치려는 나를 두고 말이오?”
“그거야 당신과 황제가 알아서 할 일. 나완 상관없소.”
고덕의 답에 호경명은 예상외란 표정이었다.
“그 말을 믿을 것이라 보시오?”
“믿지 않아도 상관없소. 내겐 당신의 믿음이 필요 없으니까.”
그 답에 호경명은 한참 동안 고덕을 노려보았다.
“내 믿음을 얻지 못하면 살아서 나갈 수 없소.”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는 군병들을 믿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권하고 싶소.”
“저들이 그대를 못 잡을 듯싶소?”
“수의 미학을 맹신하는 모양이군. 때론 수가 많을수록 더 위험한 법도 있는 것이오.”
고덕의 말에 호경명이 고개를 저었다.
“난 강호의 야인들이 황실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바로 다수의 황군 때문이라 믿는 사람이오.”
“그리 믿는 이들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소만, 착각이라고 말해주고 싶었소.”
“내가 착각이라고 믿게 만들어준다면 놓아주겠소.”
호경명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대를 존중하는 것은 그대의 직위 때문이 아니오.”
“알고 있소.”
“하면 어리석은 놀음에 날 끌어들이는 우를 범하지 마시오.”
고덕의 경고에 호경명은 단호한 음성을 토했다.
“어리석은 놀음? 중원의 안녕과 황실의 안위가 이 일에 달렸음인데, 그것이 놀음처럼 보이는가?”
분노의 호통이 터져 나왔지만 고덕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내겐 그저 뒤에서 벌이는 관인들의 권력 싸움일 뿐이오. 자신이 있다면, 그리고 그 싸움이 그대의 것이라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서시오. 그러면 내 기꺼이 상대해주리다.”
고덕의 말에 호경명의 뒤에 서 있던 부도독이 버럭 성을 내며 나섰다.
“감히 야인 주제에 격장지계라니! 내 네놈에게 군의 무서움을 알려 주리라! 뭣들 하느냐! 놈을 쳐라!”
부도독의 명에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군병들이 함성과 함께 밀어닥쳤다.
와아아아아~
그런 이들을 둘러본 고덕의 손이 들렸다. 그리고…
푸확-
수백 개의 혈인이 그 핏빛 칼날을 이끌고 튀어올랐다. 동시에 주변을 가득 메웠던 군병들이 일거에 쓰러졌다.
그 경악할 광경에 잠시 당황하던 부도독의 명이 쩌렁쩌렁 울리고, 이내 사방에서 밀려드는 군병들의 파도가 고덕을 향해 밀어닥쳤다.
쑤아아아악-
수십 개의 현월이 핏길을 내며 군병들의 파도를 가르고 지나갔다.
콰과과쾅쾅쾅-
강렬한 폭음과 함께 폭발한 현월이 강기 세례를 퍼부었다. 외곽에 있던 군병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순간, 안쪽에선 또다시 수백 개의 혈인이 악마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단지 숨 두어 번 몰아쉴 순간에 근 천여 명의 군병이 시체가 되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도총부 안에 작은 내를 이뤘고, 시체들은 마당을 빼곡히 채워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
호경명의 고함이 모든 것을 멈춰 세웠다. 죽은 동료들을 밟고 밀려들던 군병들도, 그렇게 몰려든 군병들을 덧없이 죽이던 고덕도…….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라.”
호경명의 말에 부도독의 당황성이 터져 나왔다.
“도총사!”
그런 이들을 지나친 고덕의 신형이 호철랑을 찾아 안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군병들의 시선엔 공포심이 가득 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