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8장 (119/129)

제118장. 아비(阿鼻)-지옥이 내리다

소문의 시작은 황실에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품고 있는 파괴력의 강도만큼이나 너무나 급속도로 퍼져 나가, 지금엔 소문을 모르는 이들이 드물 지경이 되었다.

“황실의 지시를 받은 소흥 왕부가 영상 왕부를 공격하여 멸할 것이다. 이 소문이 시작된 곳은 사천 부근이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사천은 경공 왕부가 있는 지역. 재수 그놈이 어부지리를 노리고 퍼트린 것일 수도 있다.”

영상왕의 말에 그의 책사인 유소가 한 걸음 나섰다.

“왕야의 혜안이 깊습니다. 말씀대로 경공왕이 퍼트린 소문일 수도 있사오나, 일부에서 그 소문의 진원지가 강호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옵니다.”

“강호에서 퍼진 것일 수도 있다?”

“예. 왕야께오서도 아시듯이 황상에겐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불세출의 자객이 있사옵니다.”

유소의 말에 영상왕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멀리 윤경왕까지 갈 것도 없었다. 균사왕과 그 휘하 주요 무장들의 목이 그의 손에 날아갔으니까. 최근에 도는 소문에 의하면 전대 동북어위도총사였던 척계광 부자들의 목도 그자의 손에 날아갔다고 했다.

“하면 황상이 그자를 시켜 소문을 냈을 것이란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옵니다. 하나 황상이 그자를 시켜 강호인들을 규합하고자 하였다면, 소문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사옵니다.”

“왜? 그자 정도의 능력이라면 고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을 터인데?”

영상왕의 물음에 슬쩍 그의 뒤에 시립해 있는 이들을 일별한 유소가 미소를 그렸다.

“왕야의 호위들에 대한 소문은 적지 않게 나 있는 상황이니, 그가 조심을 했을 수도 있사옵니다.”

유소의 말에 영상왕도 자신의 뒤에 시립해 있는 두 호위 무사를 바라보았다. 한데, 영상왕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더 뒤쪽을 향한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유소가 칭찬의 말을 이었다.

“일천과 모로 두 호위의 실력이라면 황제의 검도 그 날을 접어야 할 것입니다. 왕야.”

“그래, 그래야 하겠지. 해서, 난 놈이 내게 오길 은근히 기다렸는데 말이야.”

“그것을 눈치챈 것이 아니겠습니까?”

“놈이 눈치를 챘다?”

“예. 하니 동료를 모으려 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옵니다.”

“하면 그 와중에 소문이 났다?”

“예. 소신은 그리 생각이 드옵니다.”

유소의 말에 영상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경공왕에 대한 의심도 접을 수는 없어. 여하간 황실이나 소흥 왕부와 우리가 충돌하면 좋은 것은 그놈뿐이니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왕야.”

“무슨 소리지?”

영상왕의 물음에 유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난 달단의 난에서 보듯이 동북어위도총부의 움직임이 황실의 뜻과 살짝 어긋나옵니다.”

“그 말은……?”

“동북어위도총사가 다른 생각을 가졌을 공산이 있다는 말씀이옵니다.”

“호경명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

전대 동북어위도총사였던 척계광과 달리 호경명은 황실에 대한 충성이 높은 사람으로 정평이 난 이였다. 그 덕에 동북어위도총사의 직위가 재빨리 승계된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황실이 동북어위도총부를 장악한 그를 부정하진 못했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가 다른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영상왕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지난 달단의 난과 요사이 벌어지고 있는 동북어위도총부의 확대 정책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예상을 터무니없다고만은 할 수 없사옵니다.”

“확대 정책?”

“예. 요사이 동북어위도총부가 조선과 함께 요동의 여진을 몰아내고 있사옵니다. 그렇게 차지한 땅에 동북어위도총부의 병력과 백성들이 이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일이니 칭찬받을 일이 아닌가?”

“그것만 본다면 왕야의 말씀이 지당하신 것이오나, 그 내면을 보면 호경명의 생각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기우를 지울 수 없사옵니다.”

“내면이라?”

“예, 왕야.”

“어떤 내면을 말하는가?”

“여진을 몰아내고 백성을 이주시킨다고는 하오나 일부 여진족은 오히려 내륙 쪽에 기름진 땅을 내주고 정착을 지원하고 있사옵니다.”

“변경의 일이야 채찍만 들어서는 아니 될 일. 당근을 던진 것일 수도 있지 않겠나?”

“처음엔 소신도 그리 생각하였사오나 그렇게 모인 여진의 부족이 자그마치 열여덟이옵니다. 더한 문제는 호경명이 그들에게서 사병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병? 여진족을 사병으로 부린단 말인가?”

“예, 왕야. 요사이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렇게 끌어모은 호경명의 여진 사병이 오만을 넘긴다 하옵니다.”

“오만!”

놀랄 수밖에 없는 숫자다. 거칠고 사납기로 유명한 여진의 병사를 오만이나 확보하고 있다면 정예병 오만을 보유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문제는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호경명이 원할 때 여진의 열여덟 부족이 언제라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옵니다.”

“흐음…….”

절로 침음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여진의 병력은 항상 대명제국의 위협거리였다.

“하면 책사는 그가 반란이라도 꿈꾸고 있다는 소린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사오나, 호경명이 과거처럼 황실에 대한 충성으로 가득한 자는 아니란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만일 유소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제는 소흥 왕부와 함께 황실을 지탱해주던 든든한 방패를 잃어버린 격이었다. 그것은 최근에 정국을 어느 정도 장악하며 중원의 안정을 꾀하던 황제의 통제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영상왕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통제력이 상실되면 혼란이 찾아오기 나름이다. 그리고 혼란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걸 영상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귀주와 강서에 대한 정지 작업은 어느 정도나 진행되었나?”

대번에 중요점을 짚어내는 주군을 미소로 바라보던 유소가 답했다.

“정치와 치안에 대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장악하였습니다, 왕야.”

“역시 유소로군. 하면 이제 남은 것이 군대인가?”

“이미 두 성에 대한 군은 사라진 상태입니다. 새로이 쌓아올리면 되는 일입지요.”

“좋아. 하면 즉시 귀주와 강서 도지휘사사를 복구하고, 군병을 징집하여 훈련에 임하라!”

“신 왕부 책사 유소, 지엄하신 왕명을 받드옵니다.”

그 말 하나로 왕명이 세워졌다. 영민하게 움직이는 유소를 영상왕은 흡족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주와 강서가 소란스러워졌다. 무너졌던 두 성의 도지휘사사를 복구하고 군병을 징집하는 탓이었다. 하나, 그것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없었다. 당연한 절차였기 때문이다.

귀주와 강서를 정비하자니 장수에 대한 소요가 발생했다. 당연히 인사이동이 발생했고, 영상 왕부가 장악한 호남, 강서, 복건, 광동에서 근무하던 장수들이 귀주와 강서로 이동했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에 새로운 장수들이 들어서자 휘하 군병들에 대한 검열과 보충이 이루어졌다.

당연하게도 모자란 인원을 채워 넣고, 무기에 대한 점검과 훈련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럼에도 모든 이들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없었다. 그것 또한 당연히 따라오는 절차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상 왕부는 외부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상태로 군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 * *

영상 왕부가 군비 점검으로 소란스럽던 그 시기, 경공 왕부는 오히려 조용했다.

“황상이 날 노릴 이유가 없다. 그리고 노렸다면 진즉에 사단이 벌어졌겠지.”

“그를 생각하시는 것이옵니까? 왕야.”

하 총관의 물음에 경공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하네. 총관도 이미 보았겠지만, 그자의 능력이라면 고의 머리는 이미 떨어지고 없겠지. 한데 그런 이를 두고 구태여 병력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

“하오면 이 소문의 근원이 어디라 보시옵니까?”

“빌어먹을 영상 왕부나, 총관이 일전에 눈여겨보라 했던 동북어위도총부이겠지.”

경공왕의 답에 하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사옵니다. 하오나 소신은 소문의 근원이 강호일지도 모른다는 설이 돌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옵니다.”

“소문이 강호에게 시작이 되었다?”

“예, 왕야.”

“하면 총관은 혹 이전에 우리를 도왔던 그들이……?”

경공왕의 물음에 하 총관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소신의 걱정이 바로 그러하옵니다.”

“흐음…….”

경공왕의 입에서 절로 침음이 흐를 수밖에 없다. 고덕의 도움으로 간신히 그들의 암살 위협에선 벗어났다지만, 지금 도는 소문이 하 총관의 걱정처럼 그들이 퍼트린 것이라면 아직도 그들이 경공왕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 소신은 군을 정비하여야 한다 청해 올리는 것이옵니다.”

“군병을 정비한다고 그들을 막을 수 있겠는가?”

포기의 느낌이 강한 경공왕의 음성에 하 총관이 당황한 음성을 토했다.

“정녕 저들이 이런 소문을 퍼트렸다면 그것은 자객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세력으로 우리를 거꾸러트리겠다는 의미일 것이옵니다.”

“세력으로?”

“그러하옵니다. 저들이 세력으로 나온다면 우리가 얼마나 대비했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옵니다.”

“하니, 준비를 하자?”

“그러하옵니다, 왕야.”

하 총관의 설득에 경공왕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자객이 아닌 세력으로 걸어오는 싸움이라면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자신은 중원의 사분지 일을 장악한 세력가였기 때문이다.

“총관의 뜻에 따르지. 군을 정비하게.”

“하오면 왕명을 내려 주소서. 병력을 늘리고 무기와 훈련을 점고하겠나이다.”

“그리하라. 왕명을 내릴 터이니 전 군병은 모두 전쟁 준비에 돌입하라.”

경공왕의 명에 하 총관을 비롯한 문관들과 장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왕명을 받드옵니다.”

일사불란한 그들의 복명에 경공왕은 새롭게 일어선 투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비로소 경공 왕부가 시끄러워졌다. 사방에서 징병이 이루어지고 그들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또한 다수의 무기가 만들어지고 군비가 확충되기 시작했다.

경공 왕부의 권역에 숨어 지내던 각 파벌의 세작들은 이내 경공 왕부의 움직임을 소상히 적어 사방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내 경공 왕부가 소문에 반응해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풍문이 또다시 중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풍문에 그치지 않았다. 실제로 경공 왕부의 군비 증강이 뚜렷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경공 왕부의 군비 증강이 시작된 지 사 개월. 경공 왕부에서 열린 대전 회의에는 완전무장을 갖춘 무장들이 길게 도열해 있었다.

“금번 군비 확충 계획이 마무리되었음을 왕야께 보고드리옵니다.”

하 총관의 음성에 경공왕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고생들 했네. 하면 세부적인 사항을 들어보도록 하지.”

경공왕의 명에 이내 노장군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신 왕부지휘사 나부렴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리하라.”

경공왕의 허락에 나부렴의 보고가 이어졌다.

“현재 왕부에 속한 신강, 서장, 운남, 청해, 사천, 섬서, 감숙, 녕하 여덟 개성 중 자치권이 보장된 신강, 서장, 운남을 제외한 다섯 개성의 도지휘사사가 확대 개편되어 편제를 완료하였습니다.”

“병력은 어느 정도나 확충되었는가?”

“사천과 섬서는 십만, 청해와 감숙, 녕하는 오만의 병력이 준비되었나이다.”

그 수대로라면 이전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난 수치였다.

“그러면 도합 삼십오만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왕야.”

자부심 강한 나부렴의 답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경공왕이 물었다.

“하면 왕부군은 어찌 되었는가?”

“기존의 일만에서 삼만으로 확충하였사옵니다.”

“하하하, 좋다. 아주 좋아. 좌군도독은 어떠한가?”

경공왕의 물음에 왕부 휘하 무장들 중에선 가장 상급자인 좌군도독 허량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장도 매우 흡족하옵니다, 왕야.”

“내 경의 좌군도독부도 확충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네만, 어떠한가?”

경공왕의 물음에 허량이 가슴을 쭉 펴며 답했다.

“정병 이십만이 언제라도 왕야의 명을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원래 좌군도독부의 병력은 황법에 의해 십만이다. 그런 병력을 이십만으로 늘려 놓은 것이다. 그것은 황군의 주축군으로 평가되는 우군도독부나 전군도독부와 같은 수치였다.

“경의 자신감을 보아하니 고의 마음 또한 든든하다. 자- 우리를 위협하는 그 어떠한 세력도 감히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경공왕의 선언에 대전을 가득 메운 무장들은 물론이고, 문신들까지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대전을 가득 채우는 함성에 경공왕의 두 눈에선 투지가 가득 피어올랐다.

* * *

단아한 서재다. 호화스런 장식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단출하나, 방을 채운 가구 하나마다 기품이 서리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말은 수수한 가구들이 결코 싸구려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 방에 중년의 장수 한 명이 아름다운 여인과 마주 앉아 있었다.

“네가 예까지 어인 일이더냐?”

장수의 물음에 여인이 답했다.

“그만두세요, 아버지.”

여인의 말에 중년 장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을 그만두란 말이더냐?”

“소녀에게 숨기시는 것 모두를 말씀드리는 것이에요.”

그 답에 중년 장수의 눈이 불길을 토할 듯이 사나운 기세를 담고 여인을 쏘아보았다.

그러길 한참. 중년 장수, 호경명의 입이 열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느냐?”

“아버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날 잃고 싶지 않다?”

“예, 아버지.”

여인 호철랑, 아니 호여랑의 답에 호경명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겁박이더냐?”

“황상이 황제의 검을 불러들였어요. 그 검이 이곳을 향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깟 자객 하나가 두려웠다면 장수가 되지도 않았다.”

호경명의 호기에 눈살을 찌푸린 호여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자객이 아니잖아요!”

“안다.”

“알면서 그리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죠?”

“내게도 방법이 있다는 걸 뜻하는 것이다.”

“방법이라고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호여랑의 뒤로 스멀거리며 일어서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나를 말하는 것일세.”

갑작스런 음성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호여랑의 시선에 호한의 노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누, 누구시죠?”

“나? 사람들이 한때는 고루귀마라 불렀던 사람일세.”

아무리 강호의 일에 밝은 호여랑이라 해도 관부인임엔 변함이 없다. 그녀로서는 이미 백 년도 전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전대 거마의 무명을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녀에겐 무시할 수 없는 감이 있었다. 특히 호여랑의 직감은 무인들의 기감 이상으로 발달된 감각이었다.

“저분과 손을 잡은 건가요?”

호여랑의 물음에 호경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게 날개를 달아주겠다는 이의 손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당황과 놀람으로 높아진 호여랑의 음성을 호경명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리 부르지 않아도 네 마음은 안다. 하나, 나도 천하를 호령하고픈 욕망이 있는 남아다. 내게 힘이 있는 이상 그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반역입니다.”

“내 딸마저 그렇게 부를지라도 외면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 제발!”

호여랑의 간절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호경명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밖에 누구 없느냐?”

“예, 도총사!”

복명한 장수들이 들어서자 호경명의 차가운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이 아이를 방에 가둬두거라.”

“예?”

생각지 못한 명에 놀라는 무장들에게 서릿발 같은 호경명의 명이 떨어졌다.

“군령을 듣지 못하였는가?”

“아, 아니옵니다.”

당황한 무장들이 호여랑을 잡아 일으키자 호경명의 음성이 이어졌다.

“가둬는 두되 불편함을 주지 말라.”

호경명의 명에 장수들이 고개를 숙였다.

“충!”

그렇게 끌려 나가는 동안에도 호여랑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아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저리해도 되시겠소?”

고루귀마의 물음에 호경명이 고개를 저었다.

“자식을 가둔 아비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소. 하나, 해야만 하는 일인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호경명의 답에 고루귀마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한데 정말 저 여인을 가두었다고 그가 찾아오겠소이까?”

“그간에 보인 그의 행동을 참작하면 찾아올 것이오.”

호경명의 장담에 고루귀마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게 되길 진심으로 빌겠소이다.”

“그리될 것이오. 분명히.”

호경명의 음성엔 왠지 모를 절박함이 감돌고 있었다.

* * *

자신을 찾아온 딸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두어둔 호경명은 휘하 세력에 대한 정비에 전력을 쏟았다. 그 덕에 기본 편제를 채운 것에 불과한 동북어위도총부였지만, 그 병력은 군비 확충에 열을 올린 경공 왕부나 은근히 군비를 늘려 온 영상 왕부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간 누적된 손실을 모조리 메운 터라 기본 편제가 완성되었습니다. 도총사.”

우군 부도독의 보고에 호경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녕과 길림성의 향방군은 원래부터 편제를 갖추었던 곳이라 문제가 없겠지만, 흑룡강성은 이번에 편제를 완료한 탓에 병사들의 훈련 상태가 부족했을 터인데 어찌 처리하였나?”

“흑룡강성 도지휘사로 나간 이가 이억이옵니다.”

“그 억척이가?”

“예. 스스로 맡아 나갔사오니 흑룡강성 향방군의 훈련 상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부도독의 말대로다. 상장군 이억은 훈련이 모든 것이라 생각하는 장수였다. 그 탓에 휘하 병사들은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야 하지만, 유사시 승전율과 병사들의 생존율이 가장 높은 것이 바로 그의 휘하 병력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에겐 지옥 훈련대장이란 별명과 함께 전장의 수호신이란 별칭이 따라다닌다. 그래서인지 휘하 병사들은 지독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반발을 하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일부 직업군인들은 그를 쫓아 소속 부대를 옮길 정도로 병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아. 다음은… 우군도독부의 훈련 상태는 어떤가?”

“이억만큼은 아니지만 투지에 불타는 부장들이 주축이 되어 맹렬히 훈련에 임하고 있사옵니다.”

“수석 부장이 새로 들인 사람인데, 불협화음은 없던가?”

“최석 부장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생각 외로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맡은 궁병대의 훈련 성과가 대단히 좋습니다. 서글서글한 데다 능력까지 인정받은 터라 부장들 사이에서 평이 좋습니다. 어디서 얻은 인재입니까?”

“조선인일세.”

“예?”

“조선에서 넘어온 장수란 말일세. 저번 여진 토벌에서 눈여겨보았던 장수였네.”

“한데, 어떻게 그가……?”

“조선에 압박을 좀 가했더니 보내주더군.”

“압박을 받았다고 자신들의 장수를 내주었단 말입니까?”

“조선엔 기특한 자들이 많아.”

대명제국이란 이름 하나에 굽힌 허리를 펼 줄 모르는 조선의 사대주의로 무장된 정치인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알다 모를 곳이옵니다. 조선이란 나라는…….”

대명에 적대시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결코 가벼운 힘을 가진 나라는 아니다. 여진과 합세해 대항해왔다면 적지 않은 두통거리가 되었을 나라가 알아서 허리를 굽히고 들어오니 대명제국으로서는 그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그렇지. 대가 곧고 기개가 있다 싶으면 어느새 낭창낭창 허리를 숙이니,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할 곳이야.”

“그러니 예로부터 동북아의 호랑이라 불리던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하나, 유학을 중시하면서부터 중원을 어버이의 나라라 부르고 공경하니 걱정할 일은 없겠다 싶기도 하고.”

“아마 유학을 숭상하는 한 중원을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 전에 내란이 먼저 일어날 것이니 말이옵니다.”

“나도 그렇게 보네. 여하간 그렇게 얻은 장수일세. 방법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고는 해도 결코 홀대해서는 안 될 인재일세.”

“도총사의 명을 명심하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는 부도독에게서 시선을 돌린 호경명이 도총부의 정보를 담당하는 도총부 부첨사를 불렀다.

“부첨사.”

“예, 도총사.”

“황실의 반응은 아직 제대로 잡히는 것이 없나?”

“이렇다 할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소흥 왕부와의 연락이 빈번해지고 있는 것 외에는…….”

“소흥 왕부와의 연락은 빈번해지는데 이곳으론 별다른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 다라……? 눈치를 챈 모양이군.”

호경명의 말에 부첨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 황실이 눈치를 챘다고 벌일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호경명의 말에 부첨사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그것이, 그리 간단치 않을 듯합니다.”

“왜?”

“최근에 전군도독부가 재건되어 훈련에 들어갔다는 첩보가 있어 사실을 확인 중에 있습니다.”

전군도독부는 달단과 내통했던 척회왕의 반란에서 영상 왕부와 소흥 왕부의 연합 공격에 괴멸되었었다. 지금 그렇게 무너졌던 전군도독부가 재건되었다면 그 배후는 황실뿐이었다.

“전군도독부가. 하면, 황실이?”

“그것을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전군도독부의 재건이 확실하다면 그 배후는 황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간에 그만한 인적자원이나 재원을 충당할 곳이 황실뿐인 탓이다. 물론 전군도독부의 관할권과 겹치는 경공 왕부도 그만한 역량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들은 최근에 벌어진 군비 확충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울 터. 전군도독부의 재건을 도모할 만큼의 여유는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호경명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겠지.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곳은 황실뿐이니.”

문제는 그렇게 됨으로써 언제라도 도총부의 옆구리를 찌를 검 한 자루를 황실이 쥐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소흥 왕부가 중군도독부를 동원해 우리를 압박하고 황실이 전군도독부를 동원하여 측면을 친다면……?”

“방어선 면이 길어진 우리에게 불리해지겠지. 하나, 그때를 대비한 안배가 있으니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네.”

자신감을 내비치는 호경명에게 부도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진병으로 구성된 사병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자네의 걱정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난 그들을 믿네.”

평생의 주군으로 결정한 호경명의 단언이다. 믿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무의미했다. 결국 부도독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소장도 믿겠습니다, 도총사.”

수하의 믿음에 호경명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내 자네의 믿음이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걸세.”

호경명의 말에 부도독의 입에서 우렁찬 군령이 터져 나왔다.

“충!”

그 음성이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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