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7장 (118/129)

제117장. 충동(衝動)-왕부의 난

이필과 육엄. 마교의 하부 무력 집단인 만마대의 조장들이었다. 고덕의 지휘 아래 달단의 병사들을 공격할 당시의 능력은 절정. 하지만 죽음의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삼 년간의 지옥 수련 끝에 도달한 경지는 초극의 극의다.

하지만 이들이 무서운 점은 경지를 초월한 실전 감각이다. 그 강렬한 투기가 활을 떠난 살처럼 섬열검가의 호송 대열을 파고들었다.

스걱-

“크아악!”

섬뜩한 소음 끝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들이 체득한 다대일 전투의 비법은 적을 살상하는 것보다 지독한 중상을 입히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항거 불능의 치명상을 입은 부상자는 반격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위협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선 죽임을 당한 자와 같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속적으로 비명을 질러준다. 특히 고통스러운 부위를 베었을 때는 효과가 더 크다.

이들이 질러주는 비명은 다른 이들에겐 공포심이 된다. 간혹 그것을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적의로 바꾸는 놈들도 있지만, 그런 놈들은 예상외로 적다. 그런 놈들은 무작정 돌진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애초에 제거하면 편하다.

그리고 부상자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걸림돌이다. 탈출을 하자니 부상자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좀처럼 쉽지 않기에 시간을 지체하게 만든다. 대부분은 그렇게 지체한 시간에 저승 문턱을 넘는다.

더구나 싸움을 위해 보법을 밟는데도 거추장스럽다. 부상당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료를 시체처럼 무시하고 밟아댈 수 없기 때문이다. 적이니 상관없이 밟고 다니는 자신들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크아악~”

부상당한 동료를 피해 움직이던 호위 무사의 가슴이 바닥을 기는 부상자를 밟고 뛰어오른 이필의 검에 그대로 갈려 나갔다.

미친 듯이 휘젓는 이필과 육엄의 기세는 초극의 극의라는 그들의 경지와는 또 다른 섬뜩함을 뿌렸다.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왕팔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 소름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그 탓에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까진…….

“이놈들!”

고함과 함께 독괴가 뛰어들었다.

팡-

파공성과 함께 이필이 비척이며 물러섰다. 그런 그의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썩은 피다. 단 한 방에 저런 몰골이라면 상대의 독장을 정통으로 허용했다는 의미였다. 사태를 직감한 육엄이 이필을 안고 내빼려는 순간, 그의 뒤를 독괴의 장력이 후려쳤다.

“위험해!”

왕팔의 경고성이 미처 다 울리기도 전에 독장에 격중당한 육엄의 신형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다. 그런 둘에게 독괴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다.

파방, 팡-

세 번의 공방이 이루어졌다. 훌쩍 물러난 독괴의 눈이 예상외의 일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놀란 것은 왕팔도 마찬가지. 상대의 장력을 세 번씩이나 제대로 막아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독장이 분명할 상대의 장력을 정면에서 받았음에도 중독 증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의 독성에 분노하듯 창창하게 일어선 내력이 절로 천마심공에 따라 왕팔의 혈맥을 돌고 있었다.

‘천하 최강이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천마신공을 두고 고덕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이 왜 지금의 상황에서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구신가? 내 독장을 그리 가볍게 막아섰다면 무명소졸은 아닐 터. 이름 정도는 밝힐 수 있지 않겠나?”

“왕팔. 추귀, 아니 마풍이요.”

“마풍? 추귀란 이름은 들어봤다만 마풍은 금시초문이로군.”

“추귀는 이미 옛 이름. 이곳에서 거론될 필요는 없소.”

그 말에 독괴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깃들었다. 비로소 상대가 추귀란 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진 까닭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것도 우연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감히 하오문도 따위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가 하오문도라는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이름난 고수가 아닌 겨우 일류에 턱걸이했다는 이가 자신의 독장을 막아냈다는 것 때문인지, 다시 이어진 독괴의 손속은 거칠고 사나왔다.

팡- 파방, 팡팡팡-

하지만 이번에도 막혔다. 그렇다고 뛰어난 권장술로 막은 것도 아니다. 뛰어난 보법을 이용해 자신의 독장을 비스듬히 흘렸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흘렸다지만 독장이 품은 독성은 절대 극독에 못지않다. 독괴의 독장엔 스쳐도 죽는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독장에 맞선 왕팔은 멀쩡했다.

특수한 장갑이라도 끼었나 싶어 흘깃 살펴도 보았지만, 왕팔의 손엔 아무것도 끼어 있지 않았다.

“네놈이 알량한 재주를 믿고 까부는 것이렷다.”

분노한 독괴의 신형이 움직이는 찰나, 언제가 들었던 고덕의 창노한 음성이 왕팔의 기억을 깨워 일으켰다.

‘창천마선비, 날아올라 피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다!’

순간, 왕팔의 품에서 한 자루의 비도가 날아올랐다.

스걱-

예리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은빛에 화들짝 놀라 물러난 독괴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금강불괴는 아니었지만 만독으로 단련된 자신의 손은 웬만한 병장기로는 작은 생채기도 내지 못한다. 한데, 그 손이 길게 상처를 입었다. 그만큼 독괴의 자존심도 깊게 상처를 입었다.

“이놈! 내 네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리라!”

분노한 독괴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그를 상대로 왕팔의 품에서 다시 비도가 날아올랐지만, 이번엔 허공을 베었다. 대신 왕팔의 가슴에서 가죽 북 터지는 소음이 튀어올랐다.

펑-

“크흑!”

미친 듯이 움직이는 내력이 천마심공의 심법에 따라 휘돌았지만, 비릿한 내음과 함께 피를 토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쿨럭-”

내뱉어진 피가 검고 독한 냄새를 풍겼다. 중독된 피라는 의미다.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와중에 독괴의 장력이 다시 밀어닥쳤다. 우장은 흘려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불쑥 솟아오르는 좌장은 놓쳤다.

펑-

다시금 가슴 어림에서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울리고, 저만치 날아가 떨어진 왕팔은 검붉은 피를 뿜어내야 했다. 그런 왕팔을 향해 날아들던 독괴를 막아선 것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이필과 육엄이었다.

두 사람의 협공이 날아들었지만 독괴는 큰 위기 없이 피해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사나운 독장이 밀어닥쳤다.

쾅, 쾅-

두 번의 폭음과 함께 이필, 육엄이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우웩-”

순간적으로 쳐낸 좌장을 맞은 이필과 달리 제대로 마음먹고 쳐낸 우장에 격중당한 육엄의 상세가 좋지 못했다. 토해내는 피의 양과 색이 너무 많고 너무 검었다.

시작된 이상 끝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그런 육엄을 향해 독괴의 신형이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날아들었다.

스핏-

그 사이로 은빛 광망 세 개가 날아들었다. 공중에서 수없는 회전으로 간신히 은빛 광망을 피해낸 독괴의 시선에 어느새 돌아온 비수 세 개를 움켜쥔 왕팔의 모습이 보였다.

“이 빌어먹을 잡것들이!”

분노를 피워내는 독괴를 앞에 둔 왕팔의 곁으로 어느새 떨치고 일어선 이필과 육엄이 붙었다. 그런 둘에게 왕팔이 전음을 날렸다.

-어때, 튈 수 있겠어?

-어렵습니다. 내장이 다 뒤틀린 모양입니다.

육엄의 전음에 이필은 답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그는 도주할 수 있는 모양이었지만 육엄을 버리고 갈 순 없다는 생각 같았다. 그건 왕팔도 마찬가지였다. 난생처음 초극을 뛰어넘는 수하들이 생겼는데 버리고 갈 생각 따윈 없었다.

-제가 뒤를 맡겠습니다. 대주께선 이필을 데리고 피하십시오.

육엄의 전음에 왕팔이 고리눈을 떴다.

“그따위 생각을 할 기력이면 저 새끼 회나 잘 떠!”

“대주!”

“그래, 나 네 대주야. 그러니까 죽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독괴를 노려보는 왕팔의 모습에 곁에 선 이필을 슬쩍 일별한 육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도주 따위 집어치운 것인지 이필이 어느새 폭풍 같은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가자!”

왕팔의 고함과 함께 이필과 육엄의 신형이 쏘아졌다. 그들을 맞아 독괴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팡- 파방, 츠팟, 스핏.

제법 공방이 이어지는 듯싶더니 둔중한 충격음이 튀어나왔다.

퍽-

“크헙!”

비명과 함께 튕겨져 나온 이는 이필이었다. 그는 독장에 적중된 탓에 많은 양의 피를 내뿜으며 바닥을 굴렀다. 셋이서도 간신히 버티던 것을 둘이서 막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파방-

“쿨럭.”

“크헉.”

두 마디의 비명성과 함께 왕팔과 육엄도 튕겨져 나왔다. 그런 둘을 따라 몸을 날리는 독괴를 향해 이필이 사력을 다해 몸을 날렸다.

“이 잡것이!”

자신의 의도를 막은 이필을 향해 독괴의 양 주먹이 내리꽂혔다.

“크헉!”

이필의 신형이 활대처럼 휘었다. 양 주먹을 통해 파고든 독성이 침습하며 통렬한 고통이 머리끝까지 치고 달리는 까닭이리라. 하지만 그런 고통 속에서도 악착같이 붙잡고 늘어진 탓에 독괴의 신형은 중간에 멈춰졌다.

그 덕에 간신히 신형을 수습한 왕팔과 육엄이 이필을 거듭 가격하고 있는 독괴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두 사람의 돌진에 당황한 독괴의 왼손이 수도의 형태로 날을 세웠다.

푹-

“크아아악!”

이필의 비명이 산자락을 떨어 울렸다. 그의 오른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던 독괴의 손이 빠져나오자 상처 주변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며 검은 피가 쏟아졌다. 그런 와중에도 이필의 양팔은 독괴를 강하게 부둥켜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에 제약이 걸린 독괴를 향해 왕팔과 육엄이 달려들었다.

팡- 쾅!

하지만 독괴는 강호십대고수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려 줄 심산인지 달려드는 육엄을 강력한 독장으로 맞았다.

“커헉!”

답답한 신음과 함께 검은 피를 뿜어냈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다. 지독한 독성이 파고들어 얼굴까지 검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육엄은 자신을 쳐낸 독괴의 오른손을 붙잡고 늘어졌다.

그 상황에 왕팔이 뛰어들었다. 세 개의 비도가 다시 날아올랐지만, 자신에게 달라붙은 이필과 육엄을 앞으로 돌린 탓에 왕팔은 비도를 다시 불러들여야만 했다.

결국 비수를 든 왕팔이 달려들었지만 독괴는 왼손 하나만으로도 왕팔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그의 목을 움켜쥐는 데 성공했다.

숨을 쉴 수 없어 벌겋게 변해가는 왕팔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필과 육엄은 달리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부여잡은 독괴의 신형을 놓는 순간이 셋 모두의 죽음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 왕팔이 죽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자유로워진 독괴의 왼손이 차례차례 육엄과 이필을 격살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싣고 떨어져 내렸다.

쾅-!

강렬한 충격을 뒤통수에 받은 독괴의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그런 독괴를 향해 하늘에서 떨어진 무엇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죽어! 죽어! 죽어~!”

이미 형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부서진 독괴의 머리를 여전히 내리치는 이를 육엄이 뜯어말렸다.

“됐어. 그만해, 그만. 그만하라고, 공도!”

육엄의 제지에 간신히 멈춘 공도를 희미한 미소로 바라보던 이필이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 이필을 받아든 왕팔이 다급한 음성을 터트렸다.

“서둘러! 의원, 의원에 가야 해!”

* * *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찾아온 공도를 맞은 고덕은 그의 말이 반도 끝나기 전에 여강을 향해 신형을 뽑아 올렸다. 다른 이들도 급히 움직이긴 마찬가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사신대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하남의 무강에서 안휘의 여강까지 사천 리의 길을 단 반나절 만에 주파하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실현시키며 도착한 고덕의 눈엔 걱정을 잔뜩 단 채 의원 마당을 서성이는 고길 내외의 모습이 보였다.

“형.”

“이런, 덕아!”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건만, 지금은 그것을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팔이가, 팔이가 말이다…….”

“나도 알고 있수. 그 일은 내가 어떻게 해볼 테니 형은 걱정 마시우.”

“도련님, 제발요.”

고길 처의 사정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최선을 다해볼게요, 형수님.”

“그래요. 도련님만 믿어요.”

형수의 말을 들으며 들어선 의방엔 심각한 표정의 의원이 혼수상태의 환자 셋을 눕혀 놓고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어떤가?”

고덕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린 의원이 답했다.

“손을 쓰긴 썼소만 워낙 지독한 독이 침습한 터라…….”

생각 같아선 대꾸도 해주기 싫었지만 무림인들이 분명한 터라 손자뻘 되는 젊은 놈의 반말도 참아주었다. 그런 의원을 마치 물건 치우듯 발로 밀어낸 고덕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느 놈이 가장 중한가?”

고덕의 행동에 인상을 쓰면서도 의원은 묻는 말에 답했다.

“이자요. 외상도 큰 데다 그곳을 통한 장기의 중독이 워낙 심해서…….”

의원의 말에 고덕이 이필의 앞으로 옮겨 앉았다.

“이놈 좀 일으켜 앉혀 봐.”

여전히 반말 일색인 고덕의 말에 의원은 속으로 육두문자를 남발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이필의 상체를 일으켜 앉혔다.

이미 여러 번 해본 일이다. 못할 것 없다고 속으로 다짐한 고덕의 장심이 의원이 붙잡고 있던 이필의 명문혈과 백회혈에 닿았다. 지난 깨달음으로 백회혈을 함께 자극하면 운기요상의 효과가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덕의 내력이 장심을 타고 이필의 명문혈과 백회혈을 파고들었다. 이내 이필의 모든 혈맥을 장악한 고덕의 내력이 의원의 손을 밀어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밀려난 자신의 손과 반 치 정도 공중에 떠 있는 이필의 몸을 번갈아 보는 의원의 눈엔 놀람이 가득했다.

이후에 벌어진 장면은 의원의 남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광경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고, 마치 보이지 않는 막에 둘러싸인 듯 허공에서 둥글게 말려 뭉쳐지는 모습에 의원은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창문을 열어.”

고덕의 말에 화들짝 놀란 노인이 황급히 창을 열자 독단이 허공에 둥실둥실 떠 창가로 다가가더니 확 하고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놀라운 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는 의원의 귀로 고덕의 경고가 날아들었다.

“중독돼서 죽고 싶으면 다가서던지.”

그 말에 펄쩍 놀라 뒤로 물러난 의원은 순식간에 타서 사라지는 독단의 모습을 여전히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후엔 공손한 하인처럼 고덕이 시키는 일은 최선을 다해 따랐다. 의원의 눈에 고덕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과정을 통해 셋을 모두 치료한 고덕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의원이 물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올지……?”

물어오는 의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덕이 퉁명스런 음성을 토했다.

“그걸 왜 내게 물어? 네가 의원이지, 내가 의원이야?”

“예?”

당황하는 노의원에게 고덕이 불퉁거렸다.

“처방을 해야지. 뭐 약을 먹이든가 아니면 침을 놓든가, 그런 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제야 상대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란 걸 확인한 노의원은 서둘러 세 사람을 진맥하더니 약방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덕에게 의원이 물었다.

“저기… 정말로 의술은 모르시는 겁니까?”

“알면 내가 고치지, 돈 줘가면서 영감에게 시키겠어?”

고덕의 말에 의원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돈… 도 주시는 겁니까?”

“그럼 안 받을 생각이었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엔 공히 아차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노련한 의원이 빨랐다.

“절대로 그렇진 않습지요. 이미 충분히 치료비를 치르실 것이라 생각했답니다.”

유난히 충분히란 말을 강조하는 의원에게 고덕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밖에 있는 노친네 둘은?”

“건강엔 문제가 없습니다. 요사이 마음을 쓸 일이 있었는지 기가 좀 허해 보이기에 보약을 좀 썼습지요. 한데 저 나이 또래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편입니다. 혹시 그것도…….”

손짓으로 명문혈과 백회혈을 짚는 시늉을 해 보이는 의원에게 고덕이 톡 하니 쏴붙였다.

“그건 아무 때나 쓰는 줄 알아! 노친네들 약이나 좀 더 써. 좋은 걸로. 알지, 아주 좋은 걸로. 내, 돈은 섭섭지 않게 치를 테니까.”

“저기, 돈보다는 그 방법을 전해주신다면 제가 아껴 놓은 백년삼을 쓰지요.”

의원의 제안에 고덕이 웬일인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래? 뭐, 나야 상관없지. 하지만 좀 걸릴 거야. 이만한 내공을 쌓으려면 죽어라 내공에만 매달려도 한 오십 년 정도. 그것도 좋다는 건 다 먹어가면서 해야 하니까 이래저래 한 백 년은…….”

“그냥 돈으로 받습죠.”

포기가 빠른 건지, 아니면 사태 파악이 빠른 건지 모를 의원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마음대로. 대신 백년삼은 쓰는 거다.”

“그건 돈이…….”

“그런 이야기 들어는 봤지? 강호인들은 가끔 마음에 안 들면 막 사람 죽이고 그런다는 거.”

“쓰, 씁지요.”

“좋은 생각이야. 그럼 부탁하지.”

문을 나서는 자신의 뒤통수에 삿대질을 하고 입을 벙긋거리는 의원의 행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덕은 그냥 모른 척 의방을 나섰다.

“어, 어떻게 되었느냐?”

고길의 물음에 미소를 지은 고덕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아. 의원이 약만 쓰면 좋아질 거랬으니 걱정하지 마슈.”

“정말이냐?”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소?”

“그건 아니다만…….”

뒷말을 흐리는 고길을 책망하며 고길의 처가 나섰다.

“고생했어요, 도련님.”

“고생은요. 그나저나 형수님하고 형은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는 거죠?”

“예, 저희야 괜찮지요. 팔이가 걱정이죠.”

“그놈 괜찮아요. 저들 중에선 제일 상처가 가벼우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이요?”

“예.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행이네요. 다행…….”

다행을 연발하는 형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고덕을 고길은 축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기 누워 있는 이들의 안위보다 솔직히 멀쩡히 살아 돌아온 동생의 귀환이 더 기쁜 형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고길을 바라보며 고덕은 씨익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런 고덕의 웃음에 형, 고길도 마주 웃음을 지었다. 그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는 고덕은 왠지 마음이 먹먹해지는 느낌이었다.

* * *

협련을 비롯해 사신대원들이 여강의 의원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새벽녘이었다.

뒤늦게 도착해서 부산을 떨던 이들은 문을 벌컥 연 고덕의 짜증에 찍소리 한 번 못하고 빈 의방에 들어가 미친 듯이 달려오느라 지친 육신을 뉘였다.

다음 날 아침, 멀쩡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왕팔과 육엄, 이필을 부둥켜안은 사신대원들의 환호에 의원이 떠나갈 것 같았다.

그 기쁨이 컸던가? 공도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묻어두기로 했던 일을 동료들에게 말하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 동료들은 대부분 공감을 해주었고, 때론 격려도 받았다.

다만 한 사람, 자신의 친형 내외를 살해할 뻔한 죄인으로 몬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그 탓에 공도는 이필의 옆에 누워 의원의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쯔쯔, 아주 걸레를 만들어 놨구만. 이거 고치려면 돈이 좀 들겠는데?”

제법 견적이 나오는 환자를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의원에게 고덕이 빽 하니 소리를 질렀다.

“돈 없어. 그놈 안 고쳐도 되니까 그냥 내버려 둬!”

팩 하니 돌아서 나가버린 고덕을 대신해 가혁과 염홍이 미적거리며 다가와 금자 한 냥을 내놓았다. 그들로서는 추적대이면서도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왕팔을 포함한 넷은 피식 웃어주었다.

* * *

강호가 검마의 귀환에 이은 소림의 봉문과 정천맹의 소실이란 전대미문의 충격적인 소식에 놀라 술렁거리던 시기, 관부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술렁거림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소문의 발생지는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만, 이미 중원 전역으로 소문이 퍼진 것은 확인이 되었습니다.”

동창제독의 보고에 가정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면 아직도 소문의 발원지를 찾지 못하였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런, 송구만 찾을 일이 아니질 않는가?”

가정제의 호통에 동창제독은 할 수 있는 말이 하나뿐이었다.

“명을 받잡지 못하였으니 죽여주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깊숙이 조아리는 동창제독의 모습에 혀를 찬 가정제의 시선이 금의위 제독인 해서령에게 돌아갔다.

“해 제독은 달리 수집한 첩보가 있는가?”

동창에 비해 열세라지만, 금의위도 별도의 정보 라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면 금의위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였단 말인가?”

“금의위의 정보망은 동북어위도총부에 집중된 터라…….”

그러도록 지시한 이가 가정제 본인이니 달리 화를 내기도 우스워졌다.

“이거야 원…….”

답답해하는 가정제를 바라보던 해서령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다만 확실하지 않은 정보가 하나 있긴 하옵니다만…….”

“뭔가 그게?”

“이미 말씀드렸지만, 이건 확실치 않습니다.”

“상관없네. 짐이 감안하고 들을 터이니 속히 말해보게.”

“그것이… 소문의 발원지가 아무래도 무림이라 불리는 야인들 쪽 같습니다.”

“무림이라……?”

“예, 폐하.”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소문이 퍼진 시기가 공교롭게도 정천맹이라는 강호의 거대 집단이 괴멸된 직후입니다. 더구나 소문이 돈 시점에 살아남은 정천맹의 야인들 상당수가 사천으로 몰려들고 있었답니다.”

“사천이면……?”

“이번 소문이 가장 먼저 돌았다고 의심되는 지역이옵니다.”

“흠… 경공왕의 반응은?”

“아직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까닭인지, 아니면 당사자가 아니어서인지는 몰라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긴 소문의 당사자인 영상 왕부가 황실과 충돌하면 경공 왕부로서는 어부지리를 얻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가정제의 말에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니 자칫 황실의 위험을 좋아하는 꼴이고, 부정하자니 거짓을 아뢰는 간신이 될 상황인 탓이었다.

그런 대신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정제가 명했다.

“소흥 왕부에 기발을 띄우라. 부마를 보내라고.”

관부의 소문은 강호의 소문에 비해 심도 있고, 또한 빠르다. 소흥 왕부의 부마가 누굴 말하는지 모를 관부의 고관대작은 없다. 그런 연유로 가정제의 명을 들은 대신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황제가 가장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대신들의 상당수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쓰다듬는 웃지 못할 광경이 대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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