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장. 염화(炎火)-불타오르는 정천맹
윽박을 질러 앞을 세운 염홍과 가혁을 따라 고덕이 정천맹을 빠져나가자, 천행으로 살아남은 정천맹의 수뇌들은 무엇인가를 논의하더니 곧바로 다수의 전서구를 날려 보냈다. 그리고 이내 정천맹의 건물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연기는 삽시간에 사방을 채웠고, 그 아래서 무섭게 일어선 붉은 화마는 파괴의 화염으로 거대한 고루거각군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렸다.
지난 이백 년, 강호 백도의 중심지였던 정천맹이 그렇게 한 줌의 재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던 고덕의 일행도 저 멀리서 일어서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대협!”
놀라는 협련의 음성에 고덕은 싸늘한 시선으로 연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천맹의 화재를 우리의 탓으로 돌리려는 짓거리가 분명합니다.”
분노한 창군의 음성에 고덕이 고개를 돌렸다.
“상관없으니 가자.”
“대협!”
다시금 놀란 음성으로 부르는 협련에게 슬쩍 시선을 준 고덕이 말했다.
“그렇다 해도 바뀔 것은 없다. 이미 저들과 우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니까.”
그 말끝에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고덕을 쫓아 후량과 사신대원들이 몸을 뽑아 올렸다. 그 뒤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협련과 창군도 결국 고개를 저으며 저만치 멀어진 고덕을 쫓아 신형을 날렸다.
* * *
고덕의 추적은 더뎠다. 처음 북문 쪽에서 흔적을 발견한 이후 가혁과 염홍이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동한 까닭이다. 경공을 펼쳤다 접기를 수십 번. 흔적을 놓쳐 왔던 길을 되돌아간 적도 열댓 번이나 된다. 상황이 그러니 속도를 높이라는 독촉도 할 수 없었다. 괜히 빨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천천히 진행하는 것만도 못하다는 걸 직접 체험한 뒤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내리누르며 가혁과 염홍의 뒤를 따라 이동한 지 하루 하고도 반나절. 해가 완전히 저물어가는 숲가에서 가혁과 염홍이 헤매기 시작했다.
“뭔가?”
짜증이 가득한 고덕의 물음에 가혁이 진땀을 흘리며 답했다.
“그, 그것이… 흔적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그게… 하나였던 흔적이 갑자기 두 개가 되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가혁이 가리키는 흔적을 일별한 고덕이 말했다.
“마차 바퀴가 잠시 어긋난 모양이지. 저렇게 흔적이 이어졌으니 그걸 따라가면 되는 게 아닌가?”
“그게, 그럴 거 같긴 한데…….”
“한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서요. 이럴 땐 마음을, 감각을 믿으라고 한 말이 자꾸 생각나서 결정이 서지 않습니다.”
“누가 한 말이지?”
“왕 대주가 한 말입니다, 주군.”
“팔이가……. 하면, 저 흔적 말고 다른 흔적을 찾았나?”
“그게… 주변에 다른 흔적은 없습니다.”
기어들어가는 가혁의 음성에 고덕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추적을 이어갈 만한 다른 흔적이 없다면 저 흔적을 쫓는 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주군.”
“이런! 하면 뭘 망설여! 저 흔적을 계속 쫓는다.”
“하, 하나, 그러다 저들의 함정에라도 걸리면…….”
“설마 함정이 무서운 게야? 우리가, 내가 그 함정에 빠져 위험해질까 봐서?”
고덕의 분기 가득한 물음에 가혁은 휙휙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그럼 뭐가 문제야? 서둘러 쫓기나 해!”
고덕의 성난 음성에 가혁이 고개를 숙였다.
“조, 존명!”
이내 다시 가혁과 염홍을 앞장세운 고덕 일행은 길게 이어진 마차의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같은 시각 왕팔이 지휘하는 추적대는 하남의 남부인 광산 인근에 이르고 있었다.
“이곳이 맞긴 맞는데…….”
“왜요? 뭐가 이상합니까?”
“마차는 저 장원으로 들어간 게 분명한데, 말 몇 필은 계속 남하하고 있다.”
왕팔의 말대로 마차의 흔적과 떨어진 말굽이 분명한 흔적 몇 개가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면 어쩔까요?”
공도의 물음에 마차가 남긴 흔적을 뒤집어 흙의 마름 정도를 측정하던 왕팔이 물었다.
“혼자 여길 지킬 수 있겠냐?”
“혼자요?”
“그래. 흔적들이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말은 남쪽으로 내려간 말들도 이곳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설마 쫓아가시려고요?”
“그래야겠다.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겠어.”
왕팔의 말에 공도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그러다 이곳에 있는 마차가 움직이면 어쩝니까?”
“그러니까 널 남기고 가려는 거다.”
“그, 그럼 마차가 나오면……?”
“쫓아야지.”
“제압이 아니라 다시 쫓는 겁니까?”
“지난 정천맹 꼴 날래?”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되묻는 왕팔에게 공도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 아닙니다.”
“그러니 그냥 추적만 해.”
“예. 하면 흔적을 남길까요?”
“뭐하러?”
“예?”
“저놈들이 남기는 흔적만으로도 충분한데, 뭐하러 네가 더 남기냐고.”
왕팔의 말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뒤늦게 알아들은 공도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예. 알겠습니다.”
“미련한 놈. 정신 바짝 차리고 지켜.”
“걱정 마십시오.”
씩씩하게 답하는 공도를 못 미더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왕팔은 이필과 육엄을 이끌고 말이 남긴 흔적을 따라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왕팔과 동료들이 떠나가자 홀로 남게 된 공도가 조용히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가 섬멸이 아니라 감시와 추적이라는 것을 되뇌면서…….
반나절. 금세 돌아올 것 같았던 왕팔과 동료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 탓에 공도의 감시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 감시에 이상이 생긴 것은 달이 중천을 지나는 야심한 시각이었다.
마차가 들어간 장원이 잠시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이내 두 대의 마차가 나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차를 따라가기로 했던 공도는 당황했다. 어느 마차를 쫓아가야 하는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로 혼란스럽거든 둘 중 하나를 부숴라.’
지극히 단순 무식하지만 이것만큼 명확한 답도 없다.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서쪽을 향한 마차의 뒤로 공도가 따라붙었다.
단 며칠 사이 훌쩍 늘어버린 섬마공으로 따라붙자 상대는 공도 자신의 추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반 각. 장원에서 충분이 멀어졌다 생각한 공도는 지체 없이 행동을 개시했다.
와지끈-
공도가 달려드는 순간 마차의 축거가 부러져 나가며 주저앉았다. 더 이상의 진행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 공도가 마차 바퀴를 연결하는 축거를 부러트린 것이다.
마차가 주저앉자 주변에서 말을 타고 호위하던 무사들 십여 명이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고 대항에 나섰다.
“오호, 좋아! 내가 이런 걸 좋아한다고. 이야!”
괴성을 지르며 마주 달려 나간 공도의 손에 어느새 사 척에 이르는 장도가 들렸다.
우적-
무언가가 잘려 나가는 ‘스걱’이 아니라 짓터지는 소음이 분명한 ‘우적’이다. 그 섬뜩한 소음이 울려 나옴과 함께 공도의 장도를 정면으로 받았던 호위 무사 하나가 허리가 꺾인 채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비워진 말 잔등을 밟고 뛰어오른 공도의 장도가 허공을 일자로 갈랐다.
부아아아아앙~
무시무시한 기세가 하늘을 가르며 떨어져 지상의 모든 것을 부쉈다.
쾅콰광쾅쾅쾅쿠앙-!
참마격! 그 무소불위의 가공할 공세가 팔 척에 이르는 공도의 거체를 휘돌아 사 척에 이르는 장도를 뛰쳐나왔다. 그 무시무시한 힘이 곧바로 지상의 모든 것을 휩쓸었고, 주변은 이내 피와 시신으로 가득 차버렸다.
단 일합으로 호위 무사 여덟은 베어버린 공도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역시 이게 제일 편하다니까.”
자신이 만들어놓은 일에 미소를 지은 공도가 마차 문을 여는 순간,
팡-
강력한 폭음과 함께 비침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야행복 차림의 누구가가 튀어나왔다.
차장-
부지불식간에 휘둘러진 공도의 장도가 비침을 튕겨 내고, 뒤따라 들어온 야행복 차림인 자객의 비수도 튕겨 냈다.
“누구냐?”
공도의 성난 외침에 상대는 말 대신 비수로 답해 왔다.
스핏-
얇고 작으면서도, 빠르게 움직인 상대의 비수가 공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륵.
뺨에 전해지는 이물감에 손을 대니 피가 흥건히 묻어나온다. 피륙만 상한 게 아니라 안에 든 핏줄을 건드린 것이다.
“이 새끼가!”
화가 난 공도의 장도가 급격한 움직임을 보였다. 참마격 이전에 익히고 있던 그의 무공이 튀어나온 것이다. 조잡하고 어지럽다. 한데, 그것에 섬마공의 보법이 섞이자 상대에겐 피하기 어려운 난공이 되어버렸다.
자신의 공격을 피해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상대의 신형이 장도와 일직선상에 서자 공도는 미련 없이 참마격을 불러냈다.
크렁-
허공에서 포효가 울렸다. 커다란 공도의 장도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움직이며 공간을 베어낸 탓에 미처 도속을 따르지 못해 뒤처졌던 바람이 한꺼번에 지르는 비명이다,
그 정도로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린 장도가 야행복 차림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헙.”
짧은 신음 사이로 이등분된 상대의 몸뚱이가 분리되는 모습이 보였다.
상대의 절명을 확인한 공도의 시선이 마차 내부를 훑었지만, 남겨진 것은 암기 발사를 위해 설치되어 있던 기관 장치뿐이었다.
“빌어먹을!”
발을 구른 공도의 신형이 서쪽을 향해 쏘아졌다. 함께 장원에서 빠져나왔던 다른 마차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었던 탓이다.
그렇게 공도의 모습이 사라진 숲 속 공터엔 부서진 마차와 죽은 시신들 사이를 배회하는 말들만이 남아 있었다.
서쪽을 향해 달리는 공도의 신형은 바람이 뒤를 쫓지 못할 정도였다.
그간의 성취가 적지 않은 것을 강변이라도 하듯 최대로 펼쳐진 섬마공은 엄청난 거구의 공도를 미친 듯이 밀어댔다. 그 덕에 반나절이 지나기 전에 서쪽으로 달리는 마차와 호위대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공도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지는 것과 동시에 상대를 향해 내리꽂혔다.
쾅-!
마치 투석기에서 쏟아 올려진 바위처럼 묵직한 힘으로 내려 박히며 선두에 선 호위 무사 둘을 말과 함께 통째로 깔아뭉개버린 공도가 온통 피칠갑을 한 채 천천히 일어서는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히이이이잉~
놀란 말들이 울부짖고, 이내 행렬이 멈춰 서자 공도의 신형에서 기다란 장도가 튀어나왔다.
우적-
날조차 갈아두지 않은 장도가 휘둘리자 그것에 맞아(?) 죽은 말들과 호위 무사들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미친 듯이 날뛴 탓에 순식간에 아홉에 달하는 호위 무사를 정리한 공도가 마차로 다가섰다. 이미 한번 당해본 까닭인지 문을 여는 공도의 모양새는 매우 해괴했다.
언제라도 뒤로 내뺄 수 있게 엉덩이는 잔뜩 빼고, 다리도 반쯤 돌려놓았다. 거기에 사 척에 이르는 장도를 뻗어 마차 문을 밀었다.
툭-
물론 마차 문은 여닫이다. 하지만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다. 당연히 밀어서는 열 수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공도가 아니다.
“웃차!”
힘을 주어 다시 밀었다. 하지만 부서지라는 문은 멀쩡하고, 마차가 넘어갈 듯 기울었다. 저렇게 마차가 넘어가서 열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안에 있을 자객 놈도 피를 볼 것이고…….
자신의 선택이 별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공도의 팔근육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힘을 더 받은 마차가 드디어 넘어가기 직전에 처했다.
그때였다. 불쑥 고덕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그리고 아스라이 떠오른 것은 넘어간 마차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형님 내외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우는 고덕의 모습이었다.
한데 천천히, 천천히 피투성이가 된 채 고덕의 품에 안겨 있던 고길의 모습이 공도 자신의 것으로 바뀌어갔고, 부둥켜안고 있었던 고덕의 손은 어느새 자신의 목을 쥐어 비틀고 있었다.
“흐헉!”
기우뚱-
놀란 탓에 힘이 일순간에 과하게 전달되었다. 그 탓이었을까. 마차가 저 반대로 천천히 넘어가고 있었다.
“이 씨- 이!”
당황한 공도가 후다닥 달려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마차를 받았다. 항우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렸던 공도의 신력이 발휘되며 마차가 다시 원상태로 넘어갔다. 그런데 속도가 너무 빠르다.
“으윽-”
밀던 힘이 당기는 힘으로 바뀌었다. 넘어가던 마차의 속도가 현격하게 줄어드는 순간, 마차의 벽을 뚫고 창이 튀어나왔다. 기겁한 공도가 마차를 힘껏 밀어버렸다.
쾅쾅, 우지끈, 쾅쾅쾅-
훌렁 뒤집혀 굉음을 울리며 굴러가는 마차를 바라보는 공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아아악!”
당황, 기겁, 곤혹, 불안 등 갖가지 감정이 모조리 뒤엉킨 표정의 공도가 형편없는 모습으로 부서지며 산 아래를 향해 굴러가는 마차를 따라 달려 내려갔다.
사정없이 굴러 떨어지는 마차를 쫓아 한참을 내려가던 공도의 눈에 드디어 절망이 차올랐다. 그의 시선에 저만치 산을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인 까닭이다.
“으아아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른 공도가 무서운 속도로 마차를 쫓았다. 그리고 간신히 너덜거리며 열린 마차의 한쪽 문을 잡는 데 성공했다.
절반을 절벽 밖에 걸친 채 간신히 잡힌 마차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찰나, 피투성이의 야행복이 불쑥 튀어나오며 공도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흐헉!”
상대는 살기 위해 잡은 것일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경우 놀라서 손을 털기 나름이다. 그 부분에선 공도도 대부분의 사람을 벗어나지 못했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은 공도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뿌리친 공도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야행복의 자객이 저 멀리 절벽 아래로 추락하며 지르는 비명이었다.
마차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계곡이었다. 안에 든 사람은 물론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으아아아아악~!”
야행복 자객이 지르던 비명보다 몇 갑절은 커다란 비명이 공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공도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 * *
비슷한 시간. 가혁과 염홍을 앞세운 고덕의 일행은 흔적을 쫓아 대별산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기…….”
가혁의 손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산 중턱 공터에 세워진 마차가 보였다. 고덕의 눈짓에 육지겸을 비롯한 몇몇 사신대원들이 빠르게 다가가 마차를 뒤졌지만, 안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활짝 열려진 마차 앞에서 고개를 젓는 육지겸의 모습에 고덕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싸늘한 감촉에 눅진한 습기, 거기에 얼버무려진 알싸한 살기…….
입가를 따라 비틀린 미소가 자리를 잡는 것과 동시에 고덕의 손짓을 따라 숲 한 자락이 폭발해 올랐다.
콰광-
어느새 뛰쳐나간 두 개의 현월이 숲을 덮친 까닭이다. 그 폭발의 여력에 휘말린 자객 둘의 신형이 형편없는 모습으로 땅에 처박혔다.
입가로 흘러나오는 피의 색깔이 검붉다. 거기에 가슴의 기복도 없다. 현월의 폭발 속에 치명적인 내상을 당하고 절명한 것이었다. 그렇게 덩그러니 놓인 시신 두 구에서 시선을 돌린 고덕의 손이 천천히 명혼을 뽑아들었다.
“그래도 안 나온다면 나오게 만들 수밖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혼에서 파랗게 빛나는 상현달들이 튀어나왔다. 적어도 십여 개는 될 법한 현월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숲을 유린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가 튀었다.
콰광- 쾅!
숲을 가른 현월들이 폭발하자 주변으로 강기의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그 끝을 둔탁한 소음들이 채우는가 싶더니, 이내 숲 주변으로 진한 혈향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정리해. 살려 둘 필요는 없다.”
고덕의 명이 끝나기 무섭게 추적대 둘이 포함된 열여섯 사신대원들과 후량의 신형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곳곳에서 병장기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숲 전체가 싸움터가 된 듯싶었다.
하지만 소란은 곧바로 잠잠해졌다. 그리고 사방에서 사신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처를 입은 자도 전무. 부상 하나 없이 숲 속에 은신한 채 자신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살수들을 모조리 처리한 것이다.
“다른 흔적은 없습니다.”
돌아온 육지겸의 보고에 고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찌할까요?”
조심스러운 육지겸의 물음에 고덕의 시선이 가혁과 염홍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두 사람의 고개가 더할 수 없이 깊게 숙여졌다.
그 모습에 혀를 찬 고덕이 말했다.
“어제 이상하다고 했던 지역으로 돌아간다.”
추적으로 인해 더디게 움직인 탓에 하루가 걸렸지만, 최대치의 경공이면 반나절이면 도달할 곳이다. 이내 고덕을 위시한 일행의 신형이 빛살이 되어 대별산을 벗어났다.
그들이 대별산을 떠난 직후, 그림자 하나가 슬며시 일어섰다.
“소문 이상이로군. 의뢰는 실패야. 저런 놈을 상대하다간 살맹이 먼저 거덜 나겠어.”
그림자 사내의 말에 답이 들려왔다.
“살맹. 오래전에 잊었던 이름을 다시 듣는군.”
생각지 못한 음성에 화들짝 놀라 돌아선 그림자 사내의 눈엔 굵은 나뭇가지를 밟고 서 있는 고덕의 신형이 들어왔다.
“어, 어떻게. 분명 떠났는데……?”
“뭐, 빙글 돌아오면 간단한 거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주변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은 고덕과 함께 떠났던 사신대였다.
“함정!”
“함정은 무슨. 그저 목을 따줘야 하는 놈들이 누군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모, 목을 딴다고……?”
“그래. 하니, 살맹에 돌아가서 전해. 곧 찾아가겠다고 말이야.”
그 말을 남긴 고덕이 등을 돌리자 그림자 사내가 당황성을 터트렸다.
“그, 그대로 간단 말이오?”
“아니면 뭐라도 주고 가야 하나?”
“그, 그건 아니지만… 날 살려 준다는 게…….”
“누가 살려 준다고 했지? 넌 죽어. 분명히! 다만 시간이 생겼을 뿐이야. 내가 찾아갈 동안의 시간이.”
그 말이 끝났을 땐 이미 장내에서 고덕의 모습이 사라진 후였다. 그 뒤를 따라 사신대마저 모습을 감추자, 남겨진 그림자 사내의 표정엔 당황과 불안만이 가득해졌다.
“사신을 잘못 건드렸어…….”
그림자 사내의 음성이 대별산의 적막을 조용히 흔들 뿐이었다.
* * *
“잡아!”
“악! 그쪽이에요, 그쪽.”
시끄러운 고성이 안휘성 몽성 부근의 산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대주, 그쪽으로 갑니다.”
“이놈!”
펄석-
온몸을 던졌지만 목표는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튀었다. 뒤를 막아!”
왕팔의 고함에 육엄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콱! 꾸웩꾸웩.
드디어 육엄의 손에 잡힌 돼지 새끼가 소란스럽게 울어댔다.
“잡았냐? 으하하하, 잡았구나!”
뛰어오던 왕팔이 돼지 새끼를 잡고 흔드는 육엄의 모습을 보고 대소를 터트렸다.
잠시 후, 산속에서 구수한 냄새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버님, 여기.”
왕팔이 내민 돼지고기를 받아든 이는 고길이었다.
“고맙구나.”
“아하하, 뭘요. 여기, 어머니도 드세요.”
고길의 처에게도 돼지고기를 발라 내미는 왕팔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포근한 햇살에 적당히 익어가는 돼지고기, 그리고 돼지머리가 있어야 할 곳에 자리 잡은 고덕의 머리가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는 모습…….
“흐헉!”
기겁해 지르는 왕팔의 비명에 이필이 부스스한 얼굴로 물었다.
“악몽 꾸셨어요?”
“헉헉헉, 이 빌어먹을 악몽.”
추적이 길어지며 밤에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반 시진가량의 새우잠을 잤다. 문제는 그때마다 고리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고덕의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자는 건 어려울 거 같은데, 이만 출발할까요?”
이필의 물음에 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낫겠다. 놈들과의 거리는?”
“우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 이각 전이니까 대략 이십 리 정도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금방 따라붙겠군. 가자.”
왕팔의 말에 나무 위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눈을 붙였던 육엄과 이필이 찌뿌드드한 몸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움직인 지 일각. 앞조차 잘 보이지 않는 야심한 산길을 고속으로 질주하는 무리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오늘도 저리 둡니까?”
“저 인간이 떠나지 않는 이상 방법은 없어.”
왕팔의 시선이 머무는 곳엔 독괴 당조성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랬다. 왕팔이 이끄는 이필과 육엄은 정신을 잃은 고길 내외를 호송하던 이들을 제대로 찾아냈다. 한데 그들을 급습하려는 순간, 문제가 생겨 버렸다. 애초에 함께한 것인지 아니면 중간에 우연히 합류하게 된 것인지, 놈들과 독괴가 만나 일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제아무리 사신대라 불릴 만큼 뛰어난 무위를 가진 이들이라지만, 독괴를 상대하기엔 어불성설이다. 누가 뭐라 해도 상대는 화경의 고수였다.
그 결과 왕팔과 이필, 육엄은 벌써 사흘째 저들의 뒤를 쫓고 있을 뿐이었다.
“주군께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필의 조심스러운 의견에 왕팔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무슨 수로?”
“제가 다녀오면……?”
“어디로 가서 어디로 올 건데?”
“예?”
“대협이 어디에 있는 줄은 아냐? 설령 대협을 만났다 치자. 그때 우리가 어디에 있을 줄은 아냐?”
“그, 그게…….”
당황하는 이필에게 왕팔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왜 못 가는지 알았으면 입 닥치고 쫓아나 가자.”
“옙, 대주.”
이필의 모습에 육엄은 더욱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필이 나서지 않았다면 자신이 물어봤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왕팔과 이필, 육엄의 추적은 한동안 끝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안휘를 가로지른 이들은 장강을 코앞에 두고서야 기회를 맞을 수 있었다. 우연한 동행이었던지 독괴가 섬열검가의 사람들과 헤어져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멀어지는 독괴의 모습을 바라보던 왕팔의 시선이 투지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장강을 넘기 전에 일을 마친다. 준비해.”
왕팔의 말에 이필과 육엄의 눈에 싸늘한 살기가 번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