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장. 대박(大舶)-추적대, 영웅 되다
천년 고도 낙양은 마지막으로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던 후당 이후 중원의 황조에게선 버려진 도시였다. 워낙 긴 시간 동안 도읍으로 이용된 탓에 수없이 벌어진 전란에 도시 곳곳이 깊은 상처를 입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중원의 황조가 버리고 간 낙양은 강호의 한 축을 떠받치는 정천맹이 들어서며 또 다른 도약을 이룩해냈다.
당조 때의 궁궐터를 기본 삼아 건축된 정천맹의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가 질릴 정도로 웅장했고, 그들로 인해 몰려든 강호의 인사들을 상대하기 위해 상권은 과거처럼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 탓에 사람들은 낙양을 무림의 수도라고 불렀다.
지금, 그 영광을 재현한 정천맹을 향해 빛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쾅!
강렬한 굉음과 함께 정문이 박살나 비산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영문조차 모르는 수문 위사들은 정문을 박살낸 힘의 후폭풍에 휘말려 형편없는 모습으로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혼란은 극히 일순간이었다. 석년의 전력에 비해 십분지 일도 안 된다는 전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정천맹의 대응은 즉각적이었다.
이상이 발생하자마자 정문 주변으로 수십의 무사들이 쏟아져 나오고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들도 서넛이 재빨리 튀어나왔다. 나무랄 데 없는 기민한 대응이었지만, 이번엔 상대가 너무 좋지 않았다.
푸확- 스걱-
이미 말로 해결 볼 생각을 접은 탓인지 고덕의 행동은 강공 일변도였다. 내력이 얕은 일반 무사들은 솟구치는 혈인에 덧없이 목숨을 잃었고, 절정에 달한 고수들은 소리 없이 덮친 현월에 걸려 반 토막이 났다.
진입과 동시에 피로 내를 이루고 시체로 작은 동산을 쌓았다. 하지만 그렇게 걸린 시간은 채 큰 숨 두어 번 들이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빠르게 정문 지역을 무력화한 고덕의 신형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쿠앙-
정문 바로 앞을 막고 서 있던 접객당 건물이 벽력탄에 맞은 듯 폭발해 주저앉았다. 주변의 기를 모조리 뭉쳐 몸에 두른 고덕의 돌진을 건물의 내구력이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무식해 보이는 그 한 수가 생각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접객당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짜고 있던 상당수의 정천맹 무사들을 바보로 만들고, 그대로 안쪽으로 파고들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지 못한 상대의 움직임에 당황한 정천맹 무사들이 급히 안으로 파고드는 고덕의 뒤를 따라 모여드는 순간, 사신들이 그들을 덮쳤다.
“커헉!”
“으아악~!”
자지러지는 비명이 울렸다. 놀란 정천맹 무사들의 고개가 돌려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회전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무사들의 시선이 목 없이 서 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보는 순간 그들의 사고가 정지하고 있었다.
검은 바람, 사신의 행렬. 후로도 지겹게 회자되는 사신대의 전광석화 같은 공격이 휘몰아쳤다.
비등한 고수들도 아니도 일반 무사들이다. 수가 많다고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검의 궤적이 두셋의 목 언저리를 한 번에 지나간다. 그렇게 무너지는 정천맹 무사들의 수가 일순간에 수십이다.
추적대 둘을 더한 사신대 열여섯과 협련, 창군, 후량이 가세한 죽음의 광풍은 정천맹의 일반 무사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다.
접객당 소속 무사들이 모조리 목 없는 시신으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향 반 자루도 태우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의 도륙을 뒤로한 사신대와 협련 등은 고덕이 지나간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달렸다.
그들은 고덕이 어디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애써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직진. 고덕이 향한 길의 방향이다. 거치적거리는 건물들은 모조리 주저앉혀 놓았으니, 그가 달려간 방향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탓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남겨진 정천맹 무사들을 정리하며 들어가는 사신대의 돌입도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맹주 대리를 맡은 소림의 구련 대사가 자리를 비운 탓에 정천맹을 지휘하던 것은 소림과 함께 검마 타도를 강력하게 외치던 백도 사십 중문의 고수들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던 제검가의 신임 가주 추풍검이 지휘하는 정천맹의 수뇌들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덕의 모습에 기겁을 했다.
“어, 어찌 그대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소림이 맡겠노라 철석같이 약속했던 구련 대사의 말이 아직도 귀에 선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황하는 정천맹의 수뇌들을 돌아보며 고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거야 완전 어중이떠중이들만 남아 있군.”
“놈! 감히 마두…….”
고덕의 빈정거림에 발끈해 나섰던 청성의 오구 진인은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발아래서 느닷없이 튀어오른 현월에 의해 세로로 두 동강이 나 양쪽으로 갈라졌다.
“상대를 빈정거리는 것도 그만한 능력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아직 배우지 못했나?”
고덕의 물음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왜 모를까? 힘이 모든 것인 강호에서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인 것을.
하지만 그만큼 백도의 자존심을 지키며 산 세월도 적지 않았다. 그것을 보여 주려는 듯이 종남의 장로인 태을신수(太乙神數)가 나섰다.
“미천한 마두가 제 힘 하나만 믿… 크아악~”
이번엔 죽지 않았다. 좌우로 솟구친 현월 두 개가 양팔을 잘라내고 사라진 까닭이다. 하지만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 손이 무기인 사람이 두 팔을 잃었으니까.
“깨끗하게 끝내주면 항상 제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있지.”
싸늘한 고덕의 음성에 사람들의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얹혔다. 흉포한 기세들을 흘리는 사신대가 도착해 고덕의 뒤로 늘어선 까닭이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이미 주눅이 든다.
설사 검마가 없다 해도 저들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정천맹 수뇌들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그 속에서 애써 용기를 짜낸 추풍검이 다시 나섰다.
“소림으론 가지 않은 것이오?”
“아직 소문을 듣지 못했나?”
“소문이라니, 무슨……?”
“소림은 봉문했다. 지은 죄를 봉문으로 갚겠다니 살려 줄밖에.”
고덕의 말에 추풍검을 비롯한 정천맹 수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유일하게 믿었던 소림이 무릎을 꿇었으니, 자신들로서는 이제 검마를 막을 방법이 없어진 탓이다.
“그, 그럼 우리는 어, 어찌할 생각이오?”
처음과 달리 잔뜩 겁을 집어먹은 이들을 훑어본 고덕이 차가운 음성으로 답했다.
“그거야 네들의 행동에 달렸겠지.”
“무, 무슨 말이오?”
“설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고덕의 반문에 추풍검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안다. 자신이 소림과 직접 나가서 잡아온 이들의 일이건만 왜 모를까? 하지만 지금은 몰라야 했다.
“모, 모르니 묻는 것이 아니겠소?”
“몰라? 모른다?”
좀 전보다 더 차가워진 고덕의 음성에 추풍검은 이까지 덜덜 떨리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그, 그렇소.”
푸확-
피가 쏟아졌다.
“모르면 필요 없다. 너희도 모르는가?”
어찌 손을 쓴 건지도 모르게 목이 날아간 추풍검의 시신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경악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이 고덕의 물음에 저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그 탓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조용!”
고덕의 짜증에 삽시간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변해버렸다. 그렇게 조용해진 이들을 둘러보던 고덕이 화산파가 분명한 중년 검수를 지목했다.
“말해봐.”
고덕의 지목에 화산파의 중년 검수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포에서 모셔 온 분들을 묻는 것이라면……?”
“그래. 그분들, 어디에 계신가?”
“그, 그게…….”
주저하던 화산의 검수는 자신을 향해 고덕이 손을 들어올리자 황급히 말을 이었다.
“서, 섬열검가의 사람들이 모시고 빠져나갔소이다.”
“빠져나가? 언제?”
“어, 어제…….”
화산 검수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더구나 고길 내외를 데리고 나갔다는 섬열검가는 고덕과 악연으로 묶인 곳이다. 그들의 본가가 고덕이 멸문시킨 남궁세가이고, 일전의 혈사에서 그 복수를 부르짖던 섬열검가의 가주를 비롯한 수뇌 고수들 수십을 베어 죽인 기억이 남아 있었다.
“어디로 향했는지 아는가?”
이전보다 배는 더 차가워진 고덕의 음성에 화산의 검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 그게…….”
여전히 망설이던 화산 검수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절정을 넘어선 고수였지만, 오로지 한 명에게 집중된 죽음의 사술은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푸확-
화산 검수의 목을 뚫고 뛰어오른 혈인이 요사스런 핏빛을 뿌리며 부서져 내리자 고덕의 시선이 다른 이를 찾았다.
“너, 그들이 어디로 갔나?”
고덕의 질문을 받은 점창의 고수는 덜덜 떨리는 시선으로 죽어 나자빠진 화산 검수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 그들이 어디로 간다는 말은 모, 못 들었지만… 아무래도 본가로…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그에게 고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어디로 갔느냔 말이다?”
“저, 적계. 서, 섬열검가의 본가가 그곳에 있으니 아마…….”
푸확-
아마란 말이 나오기 무섭게 점창파 고수의 몸에서 혈인이 튀어나왔다. 맥없이 무너지는 그에게서 사나운 시선을 돌린 고덕이 일갈했다.
“정확히 대라. 어디로 갔나?”
분노 가득한 고덕의 물음에도 중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것도 죽어 자빠진 점창파 고수의 말과 그다지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을 노려보던 고덕의 손이 들려지자 협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대협! 이곳에서 저들과 허비하는 시간만큼 어르신들의 안전이 더 위험해집니다.”
그 말에 올라가던 고덕의 손이 멈칫거렸다.
“필요하다면 일부는 적계를 뒤지고, 왕팔을 이용해 추적에 나선다면…….”
협련의 말에 팔을 내린 고덕의 신형이 돌아섰다.
“팔!”
하지만 나서는 이가 없다. 눈가를 찌푸린 고덕의 시선이 사신대를 훑었지만 왕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팔이는 어디 간 건가?”
고덕의 물음에 육지겸이 곤혹스런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아무래도 아까 만난 곳에서 쫓아오지 않은 듯합니다.”
“안 쫓아와!”
“예, 주군.”
분노로 벌겋게 변하는 고덕의 얼굴을 바라보던 후량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제가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그나마 왕팔과 가장 연을 많이 쌓은 이가 후량인 까닭이다. 그는 이 상태로 왕팔이 고덕과 마주치면 절대로 무사치 못할 것이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 말에 잠시 분에 겨워하던 고덕이 이내 화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히 데려와.”
“예, 대협.”
답을 한 후량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뛰어나가자 협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부를 뽑아 적계로 보낼까요?”
그 말에 시선을 돌린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적표와 몇몇을 데리고 다녀와 주게.”
“예, 대협.”
협련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표가 사신대에서 넷을 지목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을 일별한 협련이 곧장 움직이자 적표와 네 명의 사신대원들이 그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제비처럼 날쌘 움직임으로 보아 아마 경공 실력을 위주로 뽑은 대원들 같았다.
그렇게 사신대의 일부가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던 정천맹의 수뇌들은 목을 움츠린 채 잔뜩 기가 죽은 모습으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의 모습만 보아서는 검마를 타도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이들이라곤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 * *
바람처럼 달린 후량은 얼마 전 왕팔과 만났던 곳에 도착했지만, 주변 어디에도 왕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인사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짜증이 벌컥 올라온 후량의 고함만이 벌판을 울릴 뿐 왕팔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주변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서도 왕팔의 거취를 발견하지 못한 후량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정천맹으로 돌아갔다.
어찌나 급히 달렸는지 단 이각 만에 도착한 정천맹은 차디찬 죽음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수뇌들이 전전긍긍하자 하급 무사들의 대부분은 도주를 택했다. 그 탓에 엄청난 크기의 정천맹은 처음에 그들이 진입하며 베어버린 시신들만 남아 괴괴한 기운만 돌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 전과 완전히 달라진 정천맹으로 들어서는 후량에게 고덕이 물었다.
“왜 혼자야?”
“그, 그게… 아무리 둘러봐도 왕팔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후량의 답에 눈가를 찌푸린 고덕이 물었다.
“함께 있던 놈들은?”
“그들은……?”
미처 거취를 살펴보지 못한 후량의 시선이 사신대의 대주격인 육지겸을 찾았다. 그 시선을 받은 육지겸이 조심스런 음성을 토했다.
“함께 남아 있던 공도와 이필, 육엄도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고덕의 머리에 한 가지 예감이 떠올랐다. 왕팔의 평소 성격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려 들었을 터. 모르긴 몰라도 흔적을 찾아 움직였을 공산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움직인다면 그것대로 나쁠 건 없다. 다만 자신이 이대로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염홍.”
고덕의 부름에 추적대란 이유 하나 때문에 바짝 얼어 있던 염홍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옙, 대협!”
“찾아라.”
밑도 끝도 없는 고덕의 명에 당황한 염홍이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물었다.
“무, 무엇을 찾으라는 명이시온지……?”
“왕팔과 나머지 세 명의 흔적.”
“그, 그들은 어찌……. 화가 나시겠지만 기다리시면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주군.”
무엇을 생각했는지 엉뚱한 말을 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염홍의 모습에 고덕은 어이가 없었다. 한데, 그보다 한술 더 뜨는 놈이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군. 왕 대주도 그렇고 나머지 놈들 모두 장가도 못 가본 놈들입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 주십시오.”
납작 엎드려 비는 가혁을 바라보며 고덕은 이놈이 그들을 용서해달라는 이유가 장가를 못 갔기 때문인지, 수하들을 아끼는 뜻에서 기회를 달라는 것인지 헛갈렸다.
“염홍, 그리고 가혁.”
“예, 주군.”
동시에 울리는 두 사람의 답에 고덕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는 내가 새끼들이나 잡아먹는 머저리로 보이나?”
“예?”
당황하는 둘에게 고덕이 힐난을 이었다.
“살려 주긴 뭘 살려 줘? 하면, 내가 그들을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건가?”
“그럼… 아니… 었습니까?”
염홍의 물음에 고덕은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 탓에 더 이상 말도 섞기 싫어진 고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헛소리 그만하고 그들의 흔적이나 찾아. 아마 왕팔은 형님 내외분의 이동 흔적을 쫓고 있을 테니까.”
그제야 고덕이 왕팔과 추적대원들의 흔적을 찾으라는 이유를 알게 된 염홍과 가혁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한데, 그런 반응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거봐,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거참… 주군이 목은 아니라도 팔 하나쯤은 거두실 줄 알았는데.”
한쪽에 모여 있던 사신대 속에서 흘러나온 작은 속삭임에 고덕은 한심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팔 하나쯤은 거둘 줄 알았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던 까닭이다.
연이어서 맥이 빠진 까닭인지 이젠 화를 낼 기운도 모자랐던 고덕이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염홍과 가혁을 바라보았다.
“뭐해? 안 찾고.”
“그, 그게… 자신이 없습니다.”
“뭐?”
“왕 대주에게 배우긴 배웠는데, 그게…….”
“그게?”
고덕의 물음에 머리를 땅에 묻을 심산인지 고개를 잔뜩 수그린 염홍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을 토했다.
“기억이 잘…….”
배움이라는 게 그렇다. 한창 코앞에서 선생이 떠들 땐 마치 다 이해하는 것 같았는데, 돌아서면 ‘멍~’ 하나도 떠오르는 게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처음 접하는 데다 생소하기까지 한 분야라면 그건 백발백중이다.
“도대체 이것들을 그냥!”
홧김에 손을 올리는 고덕의 모습에 사신대에서 기대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진짜다. 거봐, 손을 쓰실 거라고 했잖아.”
그 음성에 절로 힘이 풀린 손이 도로 내려갔다.
그렇게 돌아서는 고덕의 눈엔 자신의 수하도 요절을 낼 수 있다는 걸 확인한 정천맹 수뇌들의 파랗다 못해 새카맣게 변한 얼굴이 보였다.
사신대의 헛소리에 그들의 모습까지 겹치자 고덕의 입에선 절로 이 앓는 신음이 빠져나왔다.
“흐음… 모조리 다 빌어먹을 인간들.”
그 음성을 들은 창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직한 음성을 토했다.
“맞습니다. 빌어먹을 인간들이죠. 왕팔 이 잡것, 제가 한마디 꼭 해주겠습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대협.”
이젠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고덕의 고개가 제법 비장해 보이기까지 하는 창군의 모습에 절레절레 저어졌다.
* * *
고덕이 그리도 애타게 찾던 왕팔과 추적대는 정천맹의 후문격인 북문으로부터 삼십여 리 떨어진 곳을 지나고 있었다.
“이거 마차 바퀴 자국 맞죠?”
공도의 물음에 왕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다. 하지만 조금 이상해.”
“예? 어디가요?”
“흔적이 너무 진해. 이건 마치 ‘자- 여기 있다. 따라와 봐라.’ 하는 거 같잖아.”
왕팔의 말에 심각한 표정의 이필이 끼어들었다.
“하면 유인입니까?”
“글쎄, 확실한 거야 부딪쳐 봐야 아는 거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다.”
“그럼 쫓아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이필의 말에 공도와 육엄도 고개를 끄덕인다. 정천맹에 쳐들어가 고길 내외를 구출하자던 전날의 기백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정천맹과의 충돌에서 고생이 심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이도 나쁘지 않았다. 지나친 자신감보다는 소심함이 오히려 추적에는 요긴한 까닭이다.
“조심하긴 해야겠지만, 추적을 단념할 수도 없다.”
“왜입니까?”
이필의 물음엔 항의가 가득했다. 이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소심함이 낫다지만 이 정도면 겁먹은 거다.
“왜, 무서우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당황하는 이필의 모습에 왕팔이 피식 웃어 보였다.
“지나친 자신감이 장애물이라면 공포감이나 두려움은 독이다. 저들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쫓는 것은 우리라는 점도 대단히 중요하다. 놈들은 사냥물, 우리는 사냥꾼. 이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곧바로 변하는 이필을 비롯한 대원들의 표정을 지켜보던 왕팔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포기할 수도 없다. 찾아야 하는 분들의 중요성도 문제이지만, 놓치면 대협이 우릴 그냥 두지 않을 거다.”
왕팔의 말에 대원들의 얼굴에 당황과 결의가 동시에 떠오른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는 결의가 생긴 것이다. 그 모습에 다시 미소를 지어 보인 왕팔이 말했다.
“더구나 난 저놈들에게서 그분들을 찾아 반드시, 꼭! 영웅이 될 거다.”
그 말에 대원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 정도면 사라진 자신감을 어느 정도는 되찾았을 것이라 판단한 왕팔이 앞장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무기를 굳게 쥔 대원들이 지체 없이 따랐다.
왕팔과 추적대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흔적을 확인하며 쫓아야 하는 탓에 전속력을 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신형은 충분히 바람과 비교될 정도의 빠르기를 유지했다.
추적이 재개된 지 반나절 만에 추적대는 하남의 중부에 위치한 무강에 이르고 있었다.
“잠깐!”
갑자기 멈춰 선 왕팔의 경고성에 공도를 비롯한 세 대원이 급히 발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공도의 물음에 왕팔이 흔적 하나를 가리켰다.
“저게 뭘 말하고 있는 거 같냐?”
왕팔의 물음에 흔적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공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마차 바퀴가 두 개라는 거 외에는…….”
자신 없어 하는 공도의 답에 왕팔이 미소를 그렸다.
“제대로 봤다. 흔적이 두 개로 늘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대원들에게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여태까지는 마차 바퀴가 한 개였다.”
“그거야 뒷바퀴가 앞바퀴를 따라가니 당연한 게 아닙니까?”
공도의 말에 왕팔이 고개를 저었다.
“네 바퀴 마차의 경우 뒷바퀴가 내는 흔적은 앞바퀴의 흔적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어째서요?”
“흔히 마차가 일직선이고 딱딱한 몸체를 가지고 있어서 뒷바퀴의 흔적이 앞바퀴의 것과 동일하게 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마차가 달리면서 생기는 진동 탓에 바퀴의 진행로, 다시 말해 마차가 나아가는 방향이 약간씩 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는 흔적이 같았던 겁니까?”
“그야 우리가 쫓은 마차가 이륜마차였으니까. 그걸 여태 몰랐던 거냐?”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왕팔의 시선에 공도 등은 당황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은 아니라는 듯이…….
“멍청한 놈들. 여하간 이제라도 알았으니 잘 봐. 그동안 이륜마차였던 탓에 바퀴 자국이 동일했다. 한데 여기선 두 개로 보인다. 이건,”
“사륜마차로 바꾼 겁니다. 맞죠?”
공도의 말에 그를 노려봐준 왕팔이 다시 설명을 이었다.
“놈들이 이곳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었단 뜻이다. 그것도 이륜마차를.”
“왜요? 이미 이륜마차는 있는 게 아닙니까?”
“우리가 걱정했던 부분을 실현시킬 생각인 게지.”
“우리가 걱정했던 부분이면… 유인 말입니까?”
“그래. 놈들은 다른 마차로 흔적을 이어가며 우리를 불러들이고자 한다.”
“저기… 이건 정말 궁금해서 그런 건데요.”
“뭔데 뜸을 들여?”
“그게… 두 대가 같이 달릴 거면서 왜 굳이 두 대로……?”
“멍청한 놈.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고 누가 그래?”
“흔적이… 하나잖습니까?”
공도의 말대로 잠깐 두 개로 겹쳐진 흔적은 정확히 한 개만 남아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니 멍청하다는 거다. 한 몸체에 달린 앞뒤 바퀴도 이중으로 흔적을 남기는데, 완전히 다른 마차의 바퀴가 앞에 난 흔적과 정확히 일치할 수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하지만 흔적이…….”
“시끄럽고, 흩어져서 마차 바퀴의 흔적을 찾아라. 놈들은 분명 이곳에서 일각 이내의 거리까지 마차를 들고 움직였을 거다.”
“마차를 들고… 아! 그럼 마차를 들고 뛰었단 말입니까?”
“그래. 원래의 마차는 그렇게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달려갔을 거다.”
왕팔의 답에 공도가 다시 물었다.
“한데 왜 일각 이내의 거리만 뒤집니까? 그보다 멀리 가서 마차를 내려놨으면 어쩌고요?”
“그런 이동은 즉각적이고 일시적이어야 한다. 왔다 갔다 하면 흔적이 많이 남기 때문이지. 하면 어떻겠냐? 마차뿐이 아니라 마차를 끄는 말은? 거기에 자신들이 타고 온 말들은?”
왕팔의 물음에 공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것들도 모두 짊어지고 날랐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이곳에 다른 쪽으로 이어진 흔적이 없다는 건 뭐로 설명할래?”
“그럼 족적이라도 남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뭐, 답설무흔의 경지에 이른 놈들이거나 아니면…….”
말끝에 이동한 왕팔의 시선은 주변에 잔뜩 들어서 있는 나무들로 향해 있었다.
백도 사십 중문의 놈들이 분명할 이들 속에 답설무흔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가 있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십수 명이나. 답은 왕팔의 시선에 있었다.
“나무를 밟고 뛰었다면…….”
공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필이 주변의 나무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만한 무게를 짊어지고 뛰었다면 흔적이 남았을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다.
그 생각대로 흔적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흔적이 너무 많은데요?”
“함정을 파는 놈들이 그만한 준비를 갖추지 않았을까. 아마 나무에 난 흔적은 방향을 유추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그리고 어지럽게 흩어져 있을 것이다. 하니, 우리는 주변을 훑는다.”
“그럼 일각이란 한계를 둔 것도……?”
“난 놈들이 마차와 말을 짊어지고 일각 이상 나무 위를 달릴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왕팔의 말에 공도를 비롯한 추적대원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만한 능력이라면 이미 강호에 널리 회자되었을 정도의 고수. 그만한 인물들이 십수 명씩 움직일 만큼 당금의 정천맹은 능력이 좋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복명한 추적대원들이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새롭게 시작되는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그렇게 흩어진 대원들이 비워놓은 동쪽을 향해 왕팔도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