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장. 도우(道友)-도가 불법을 살리다
땡땡땡땡땡땡-
정신없이 울리는 종소리에 소림의 승려들이 놀란 표정으로 산문 쪽을 바라봤다. 소림이 창건된 이래 이렇듯 다급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낯섦을 가르고 지객당주인 공명 선사가 십여 명의 지객당 무승들을 이끌고 황급히 산문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소림승들의 눈에 보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 수군거리는 소림승들 속에서 그들처럼 산문을 내려다보던 불목하니 양원 대사의 눈은 불안과 갈등으로 깊은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공명 선사가 지객당의 무승들과 나는 듯이 달려와 본 것은 산 채로 참혹하게 찢겨 죽는 십여 명의 무승들이었다.
“멈춰라!”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지만, 그에 대한 답은 목 언저리를 스쳐 가는 상현달이었다.
스걱-
현월로 단박에 공명 선사의 목을 베어버린 고덕의 손이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인식치 못한 지객당의 무승들을 향했다. 순간 뒤에 서 있던 사신대에서 십여 줄기의 빛살이 날아들어 무승들의 품을 파고들었다.
퍽- 퍼벅.
가슴에 사발만 한 구멍이 뚫린 지객당의 무승들이 일제히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고덕의 음울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멸하라!”
고덕의 명에 육지겸과 적표를 포함한 열넷의 복명이 동시에 울려 나왔다.
“존명!”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치고 올라가는 사신대의 주변으로 피를 뿌리는 승려들이 즐비하게 쓰러졌다. 그 사이를 고덕이 천천히 걸었다.
그 뒤를 쫓는 협련과 창군은 사신대보다 더 날뛰는 후량과 달리 과연 이 일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것이 둘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산문을 통과해 위로 치고 올라간 사신대의 움직임은 거칠고 사나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고 죽어나가던 승려들의 수가 백을 넘길 때가 되어서야 사태를 파악한 무승들이 집단으로 대항해왔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앞을 막아섰던 무승들이 목 없는 시신으로 바닥을 구르고, 사신대원들은 그 시신을 밟고 안으로,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향화를 위해 산사를 찾았던 참배객들도 사신대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어나간 이들의 시신이 대항하던 무승들의 곁을 굴렀다. 그들에게서 흘러내린 피가 소림 경내를 가로질러 깔린 청석 위를 흥건히 적시며 산문 쪽으로 흘렀다.
그 참경을 바라보며 협련과 창군은 절로 저어지는 고개를 막을 길이 없었다.
소림에서 최초로 제대로 된 저항을 받은 것은 역시나 나한전에서였다. 나한전 앞마당을 가로지른 채 대기하는 쉰일곱 무승의 앞에 나한전주인 불연 선사가 불장을 짚고 서 있었다.
“이곳은 불지. 살행을 멈추시오!”
불연 선사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살수를 멈추지 않던 사신대가 고덕의 손짓에 칼을 거두고 그의 뒤로 모여들었다.
“나한전인가?”
앞을 가로막은 무승들의 뒤로 서 있는 웅장한 불전의 현판을 바라보며 물은 고덕에게 불연 선사가 답했다.
“맞소이다. 불전의 수호를 맡은 나한전이오이다.”
“수호라……. 적에게 지키는 것만이 수호였던가?”
지난날 행했던 잘못된 일들에 대한 물음이다. 그 말을 모를 리 없는 불연 선사의 낯빛이 어두웠다.
“나한전은 외부를 향하는 방패. 내부를 향한 검은 계율원에 있음이니 빈승이 답할 일은 아닌 듯하오이다.”
“중들은 참 편해. 내 일이 아니다, 석가세존의 뜻이다, 뭐 그런 말로 모든 게 허용되고 용서되니 말이야.”
고덕의 빈정거림에 불연 선사가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소림이 지은 죄는 소림이 갚아야 하는 법. 하나, 무고한 이들의 피는 덧없는 살행일 뿐이오. 검마 시주.”
상대의 신분을 단박에 짚어냈다. 이미 그를 소림으로 불러들여 제거하겠다는 방장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날 기다리던 모양이군.”
“소림은… 하아~ 아미타불…….”
말을 하다 말고 깊은 한숨과 함께 불호를 외운다. 고뇌에 찬 불연 선사의 얼굴엔 자괴감과 포기의 표정이 가득했다.
검마의 혈사라 칭해지는 일이 시작될 때부터 소림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불연 선사다. 나한들이 소림 밖으로 풀려나감에도 나한전주가 소림에 틀어박혀 있던 이유는 그가 검마에 대한 단죄를 반대한 까닭이었다.
그가 전임 방장이나 현임 방장에게 고루 주장한 것은 소림은 무림 방파가 아니라 불가의 요람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젠 요원한 바람이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일어날 일을 어느 정도는 짐작하는 모양이야?”
“살계를 열 때는 그 겁화에 스스로도 빠져드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 이미 소림이 살계를 열었으니 그 겁화에 소림이 빠져드는 것도 모두 정해진 일이뿐이오.”
“하면 그냥 죽어줘.”
“그리하리다. 하니 무고한 이들의 피는 멈춰주시오.”
너무 선선한 불연 선사의 답에 고덕이 이채를 머금고 물었다.
“정말 죽어준단 말이야? 그것도 스스로?”
“무고한 피를 멈춰준다면 그리하리다.”
그 말에 뒤에 늘어선 나한들 속에서 작게 웅성거림이 일었지만, 불연 선사가 불진으로 땅을 치자 소란은 금세 사라졌다. 그 모습에 고덕이 진중한 음성을 토했다.
“정녕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스스로 죽는다면.”
“굳이 장부를 거론치 않아도 약속은……?”
“천금이다.”
고덕의 말에 나한들을 향해 돌아선 불연 선사가 입을 열었다.
“나한은 살아서 불지를 수호하고 죽어서 정토의 길을 닦는 존재. 그대들과 내가 죽어 수백의 불도를 살리는 일이니 두고 가는 한은 없을 것이다. 설혹 살행의 죄를 물어 세존의 정토에 들지 못하고 육도의 윤회에 빠진다면 이 죄 많은 육신, 그대들의 제자가 되어 평생토록 수발을 들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불연 선사의 몸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스스로 심맥을 잘라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 모습에 나한들이 일제히 반장을 하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호의 끝은 맥없이 쓰러지는 쉰일곱 무승의 모습으로 귀결되었다. 머뭇거리거나 거부하는 이 하나 없는 죽음이었다.
그들의 시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고덕의 입이 열렸다.
“소림승들을 제외한 이들에겐 손을 쓰지 마라.”
고덕의 명에 사신대원들이 일제히 복명했다.
“존명!”
이후 다시금 살수를 펼치기 시작하는 사신대원들과 후량은 겁먹은 표정이 역력한 참배객들에겐 손을 쓰지 않았다. 그나마 불연 선사와 나한전 무승들의 희생으로 무고한 살육을 막았다고 생각한 협련과 창군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었다.
* * *
비상종이 울릴 때부터 상황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방장실에 앉아 나가 보지 않은 것은 이제 곧 끝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구련 대사를 찾는 다급한 음성이 방장실 밖에서 들려왔다.
“방장, 위험합니다. 장생전으로 피하심이…….”
팔대호원의 수좌승이다. 그들의 최우선 임무는 소림의 수호가 아니라 방장의 보호. 조급한 그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구련 대사는 미동도 없었다.
“방장!”
음성에 실린 다급함이 이젠 그의 허락이 없더라도 방장실로 들 생각이란 것을 알아차린 구련 대사의 입이 열렸다.
“돌아가라.”
“방장!”
“돌아가 소림을 지키다 죽어라.”
승려로서는 하기 힘든 말이다. 죽으라니…….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탓인지 팔대호원의 수좌승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는 잠시간의 침묵 후에 낮은 음성으로 답을 해왔다.
“방장의 명을 따릅니다.”
아마도 자신의 안위를 희생해서라도 소림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말인 줄 안 모양이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팔대호원들의 발소리를 듣는 구련 대사의 입가엔 비틀린 웃음이 그려졌다.
“멍청한 것들. 오로지 제 생각만 중요한 답답한 것들. 그렇게 모두 죽어라! 이 빌어먹을 위선을 모두 던지고 그렇게 죽으란 말이다!”
중원 불법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소림의 방장이 내뱉은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저주를 퍼부은 구련 대사는 뭐가 좋은지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다 불타라! 다 죽어버리란 말이다. 크하하하!”
주변을 지키던 팔대호원마저 떠나간 방장실에서 새어나오는 광소는 그렇게 텅 비어진 공간을 흔들고 있었다.
* * *
긴나라전에 속한 작은 암자. 불목하니들에게 내어준 곳에 다수의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나무를 하거나 밥을 짓거나 마당을 쓰는 가장 낮은 신분의 승려들이다. 그런 이들의 중심에 서 있는 양원 대사를 한 승려가 답답하다는 듯이 불렀다.
“방장!”
방장. 버젓이 방장실에 구련 대사가 앉아 있음에도 방장이란 호칭이 사용됐다.
“불가하다. 외소림의 방장은 내소림의 발호를 원치 않는다.”
“하오나 소림은 외소림의 것만은 아니질 않습니까?”
“그렇다 한들 계율에 묶인 내소림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양원 대사의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노승 하나가 나섰다. 매일같이 지객당의 마당을 쓸고 참배객이 어지른 불전을 정리하던 노승이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라오, 방장.”
노승의 말에 양원 대사의 손이 모여들었다.
“이미타불… 현오 대사백을 뵈오이다.”
공손히 반장을 취하는 양원 대사의 말에 주변을 둘러싼 승려들의 얼굴에 해연히 놀란 표정이 가득하다.
이미 양원 대사조차 현임 방장의 사증조뻘이다. 장생전에 앉은 노승들과 비슷한 연배란 의미다. 한데, 그런 양원 대사가 대사백이라 부를 만한 승려가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승려들의 놀람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선 현오 선사가 말을 이었다.
“늙어서도 죽지 못하는 이를 아직도 기억하시는구려.”
“어찌 소승이 대사백을 잊으리까.”
“클클클… 그렇다면 내 말을 한번 들어볼 의향이 있으시오?”
“귀를 씻는 마음으로 말씀을 청합니다.”
양원 대사의 말에 현오 선사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방장, 내소림은 방장의 말대로 외소림의 허락이 없는 한 일어날 수 없소. 그것은 소림을 두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내분을 방지하고자 조사들께서 만드신 규약. 그것과 마찬가지로 소림이 외부의 힘에 의해 멸절되는 것을 막는 것도 내소림에게 내려진 규약. 두 가지 규약이 충돌하니 어찌할꼬.”
현오 선사의 말에 양원 대사가 고개를 숙였다.
“소질의 배움이 짧아 대사백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모든 것을 알아듣진 못했다고 해도 그 안에 든 흉험함은 알아듣고도 남음이 있을 터. 그럼에도 남은 말을 들려 달라는 사질을 현오 선사는 대견하고, 또 가련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늙은 잡승의 말이 칼같이 날카로우니 방장은 마음을 닫고 들으시게.”
현오 선사의 걱정에 양원 대사가 미소를 그렸다.
“그 칼날이 어둠을 가르고 빛을 내리는 말씀이라면 이 양원, 대사백의 말씀을 가슴으로 받겠습니다.”
“허허, 죄는 다 노부와 같은 퇴물들에게 있는 것을……. 방장.”
“예, 대사백.”
“일어서지 말라는 외소림 방장의 말은 그대 혼자 들은 말이라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악과 당황이 장내를 휘감았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양원 대사는 물론이고 모여 있던 내소림의 승려들 모두가 알아들은 까닭이다.
그렇게 놀란 승려들의 시선이 양원 대사에게 몰렸다. 한데, 분노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양원 대사의 얼굴엔 미소뿐이다.
“소승의 어두운 눈을 대사백께서 열어주시는군요. 그러합니다. 외소림 방장에게서 내소림은 일어나지 말라는 말을 들은 이는 저뿐이지요. 제가 없다면…….”
“내소림은 외부의 힘에서 소림의 멸절을 지켜 내라는 규약만 남는 것이니…….”
현오 선사의 말에 진한 미소를 그려 낸 양원 대사가 반장을 취한 채 깊게 허리를 숙였다.
“모든 것을 맡기고 떠나는 미련한 사질을 용서하십시오, 대사백.”
“그대의 마음이 불존의 곁을 지키는 밝은 등불이 되시길… 아미타불…….”
현오 선사의 불호가 끝났지만 양원 대사의 허리는 펴질 줄 몰랐다. 이상한 상황에 당황한 승려들이 웅성거리고, 이내 용기를 낸 한 승려가 양원 대사를 건드리자 그의 신형이 풀석 무너져 내렸다. 이미 심맥을 끊어 자결한 후였던 것이다.
놀란 승려들이 양원 대사의 식어가는 몸을 잡고 비분에 찬 음성으로 흐느낄 때, 이미 앞서 간 사질의 시신을 향해 깊게 반장을 취한 현오 선사가 창노한 음성을 터트렸다.
“입적한 방장의 뜻을 가벼운 눈물로 씻는 자가 누구인가!”
현오 선사의 음성에 양원 대사의 시신을 잡고 눈물짓던 승려들의 흐느낌이 점차 줄어갔다. 그런 승려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현오 선사의 음성이 이어졌다.
“방장의 뜻이 어디에 있음인지 이 늙은 중이 말로 해야 알겠는가?”
그의 물음에 주저하던 한 승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하면 무얼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것인가?”
현오 선사의 물음에 조금 더 많은 승려들이 답을 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면 무얼 망설이는 겐가?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이여.”
현오 선사의 외침에 암자 안에 있던 모든 승려들이 결연한 표정으로 반장을 하며 답했다.
“소림을 지켜 불법을 수호하리다!”
“가라! 가서 소림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지켜 내어 불법을 수호하라!”
“아. 미. 타. 불!”
웅혼한 외침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암자가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그 속에서 서른에 달하는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이 신형을 뽑아 올려 혈겁이 벌어지는 곳으로 쏘아졌다.
다른 수호법승들이 몰려 나가고, 홀로 남은 현오 선사가 숨이 끊긴 채 누워 있는 양원 대사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 곧 사질을 따라감세. 세존께 잘 말씀드려 내 자리 좀 맡아주시게…….”
그 말을 남긴 현오 선사의 신형이 마치 촛불이 꺼지듯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혜가 이후, 가장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림의 신승 현오의 마지막 발걸음이 그렇게 피가 낭자한 살육의 장으로 향했다.
* * *
소림의 경내 한 곳에서 시작된 폭발적인 기세에 고덕은 사신대를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다가오는 힘이 결코 경시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사신대가 고덕의 명으로 모여듦과 동시에 일단의 무승들이 그들의 전면으로 날아 내렸다. 마치 철벽이 막아선 느낌이다. 하나, 그런 강력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고덕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뒤를 향해 있었다.
“소림에 이만한 고인이 있었는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고덕의 말에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시주가 오지 않았다면 결코 나서지 않았을 힘이라오.”
수호법승들의 앞으로 천천히 솟아오르는 것은 현오 선사였다. 특이하게 나타난 그를 바라보며 표정을 굳힌 고덕이 답했다.
“나를 불러들인 것은 소림이라는 걸 몰랐던 모양이오.”
그 말에 이번엔 현오 선사의 표정이 굳었다.
“알면서 막지 못했으니 모두 이 늙은 땡중의 잘못인 모양이구려.”
“그럴지도 모르겠소이다.”
눈을 빛내는 고덕의 답에 현오 선사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면, 이 늙은 땡중이 그 죄를 짊어지고 떠난다면 물러나주시겠소?”
간절한 눈빛인 현오 선사의 말을 고덕은 거부로 받았다.
“소림의 죄가 그리 가볍지 않소이다.”
“허허허, 가볍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니나 소림에서 나고 소림에서 늙어온 이 어리석은 땡중은 그럼에도 이곳을 지켜야 하니, 용서하시겠소?”
“어차피 소림의 모든 것을 멸할 생각이니 용서하고 말 것도 없소이다.”
고덕의 싸늘한 응대에 현오 선사가 반장을 취했다.
“뜻이 무서우나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긴 어려울 게요.”
“어렵긴 하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외다.”
고덕의 답에 표정을 완연히 굳힌 현오 선사가 외쳤다.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은 죽음으로 소림을 지켜 내라!”
현오 선사의 외침에 뒤에 늘어선 수호법승들의 입에서 다시금 웅혼한 불호가 터져 올랐다.
“아. 미. 타. 불!”
쿵-
단 서른의 무승이 진각을 밟았을 뿐임에도 소림 전체가 진동했다. 그들의 힘을 단편적으로 드러냈음이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고덕이 명했다.
“죽여야 할 소림의 잡것들이다. 살려 두지 말라!”
고덕의 싸늘한 음성에 사신대원들의 복명이 울렸다.
“존명!”
상대의 강함을 느꼈으면서도 사신대원들의 눈엔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없다. 그들의 눈 속에 일렁이는 것은 오로지 파괴의 광기와 피로 점철된 투지뿐이었다.
양측의 긴장이 최고조를 달리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쪽은 승려의 가사를 걷어붙인 소림 최후의 보루, 한쪽은 죽음의 사선을 수없이 넘나든 사신들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이들과 기필코 죽이고자 하는 이들의 대결인 이상 싸움은 거칠고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싸움에 참가한 후량과 달리 잠시 지켜보던 협련과 창군도 그 살벌한 땅에 발을 디뎠다. 마음이 동하고 안 동하고의 문제를 떠나 사신대 쪽이 수적으로 확연한 열세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능력을 가진 강자들이 즐비하게 맞붙는 곳이었지만, 화경과 초극의 극의가 추가된 사신대는 한층 힘을 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사신대의 전투력에 현오 선사는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로 사신들을 데려왔구려.”
“사신? 아니요. 저들은 지금 살기 위해 싸울 뿐이니까.”
그랬다. 고덕이 항상 사신대에 요구한 것은 살아남으라는 것이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 그랬기에 사신대원들은 필요하다면 미련 없이 등을 돌리고 도주를 택한다. 상대를 죽이는 것은 그 뒤에 살행을 나서든 기습을 하든 다시 시도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 말을 증명하듯 사신대원들의 움직임은 꽤나 자유로웠다. 암습이나 치졸하다고 불릴 만한 일들도 서슴지 않는다. 간혹 가다간 냅다 내뺐다가 동료들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싸움에 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에 반해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마치 죽음으로 지켜야 하는 마지막 보루인 양 악착같이 밀려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지켜 내야만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이 작은 파탄을 불러오고, 결국엔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신대의 칼날을 허용하는 계기가 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현오 선사는 고통 어린 눈빛을 담은 시선을 고덕에게 돌렸다.
“정녕 이 길뿐이외까?”
“소림 스스로는 끝낼 수 없는 일이니 말이오.”
고덕의 답에 현오 선사는 슬픈 헛웃음을 웃었다.
“죄가 깊음이니……. 하나, 내겐 지켜야 하는 이의 숙명도 있음이니 죄 많은 노승의 손을 야박타 마시오.”
현오 선사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소림은 언제나 그렇게 말하지. 강호 정의니, 세존의 뜻이니, 이젠 숙명까지 나왔군. 그나마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나 그 밥에 그 나물이었어. 좋아. 뭘 망설이나. 그 숙명의 손길, 한번 견식해 주지.”
양팔을 펼쳐 보이며 빈정거리는 고덕을 현오 선사는 나무랄 수 없었다. 그에게 지은 소림의 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나,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 속으로 불호를 외운 현오 선사의 주먹이 느릿하게 허공을 갈랐다.
팡-
느릿한 주먹의 움직임에 비해 고덕의 코앞에서 터진 폭음은 너무나 빨랐다.
하지만 고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경고의 의미를 담은 상대의 허수를 가려내지 못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은 까닭이다.
저쪽이 경고의 의미를 담았다면 이쪽은 필살이다. 백보신권으로 시작한 현오 선사를 향해 고덕은 강렬한 현월로 답했다.
츠팟-
비껴낸다고 냈지만 여력만으로도 승포 자락이 찢겨 나갔다. 감히 경시하지 못한 현오 선사의 주변으로 강력한 불력(佛力)의 회오리가 휘돌았다. 그렇게 휘도는 회오리가 석가세존의 형상을 허공에 그려 냈다.
“흐음… 반야대능력…….”
고덕의 입에서 침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천마신교에 천마심공이 있다면 중원 무학의 중심이라 불리는 소림엔 반야대능력이 있다. 이것은 경전을 내공심법으로 바꾼 불가해한 것으로, 운기를 통해 내력을 쌓는 여타 내공심법과 달리 일로정진한 순수한 불법이 쌓여 내공의 역할을 한다. 그런 까닭에 심공이 아닌 능력이란 말이 붙었다.
하지만 그 효용은 놀랍도록 경이롭다. 한때는 이름 없는 소림의 학승이 보인 반야대능력에 당시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혈교의 교주가 한 줌의 재가 된 일화도 있을 정도이니, 그 무시무시한 힘은 달리 설명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다.
그런 강력한 힘을 향해, 어느새 마음을 가라앉힌 고덕의 현월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퍽-
단 하나의 소음만 남긴 채 불력의 회오리에 휘말린 현월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그 막대한 힘이 현오 선사의 장심으로 몰려들더니 고덕을 향해 쏘아졌다.
날아오는 강력한 권력을 향해 고덕은 양손으로 잡은 명혼을 뻗어냈다.
스걱-
공간이 갈라지며 권력이 갈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권력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둘로 나뉜 채 그대로 고덕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를 악문 고덕의 몸에 호신강기가 씌워지고, 그 앞을 검막을 펼쳐 든 명혼이 막아섰다.
드드드드드…….
어느새 다가든 권력이 검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창호지에 빗발이 부딪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와 똑같은 파장을 가진 진동이 명혼을 흔들었다.
쩌정-
진동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검막을 이룬 강기가 마치 유리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전에 혈괴일마를 상대한 이후 늘어난 고덕의 내력은 상상 이상. 그럼에도 이전처럼 검막을 이룬 강기가 형편없이 깨져 나갔다. 그것은 반야대능력을 펼치는 상대의 불력이 진정으로 자연경에 달한 고덕의 성취와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경이로운 능력에 맞서 고덕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의 전진을 택했다.
부서진 검막을 거둔 고덕의 명혼이 천하 최고의 쾌검 섬혼의 능력을 타고 순간적으로 허공에 놀랍도록 날카로운 선들을 그려 냈다.
그 선들이 둘로 나뉜 권력을 네 개, 여덟 개, 종래엔 열두 조각으로 잘라냈다. 그리고 그 열두 조각의 권력을 향해 언제 모습을 드러냈는지 모를 열두 개의 현월이 달려들었다.
크왕-
공기를 가르고 권력에 부딪쳐 가는 현월에서 마치 야수의 포효 같은 소성이 울렸다.
쾅- 콰광, 쾅쾅쾅!
정확히 열두 번의 폭음이 허공을 부술 듯이 떨어 울리고, 강기가 부서지며 쏟아지는 파편들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 강력한 후폭풍에 놀란 수호법승들과 사신대원들이 피하면서 그들의 싸움이 멈춰졌다.
그렇게 멈춰버린 이들의 시선 속에 이 장을 사이에 둔 현오 선사와 고덕의 맹렬한 공방이 이어졌다.
현오 선사의 휘젓는 손길 하나, 내지르는 권장마다 강기처럼 날카로운 법력이 일어섰고, 그것을 상대해 움직이는 고덕의 모든 행동에 파랗게 일어선 강기가 따라 움직였다. 온통 법력과 강기의 바다였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일기 시작한 바람을 따라 흘러들던 낙엽이 그들이 장악한 권역에 접어들기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진정 경이적인 모습이었다. 부서지거나 흩어진 것이 아닌 말 그대로의 소멸.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휘돌고 있는 힘의 무서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밀리는 자도, 밀어내는 자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완벽하게 이룬 평형. 끝없이 법력을 끌어내야 하는 현오 선사도, 미친 듯이 용트림하는 내력을 한없이 펴내는 고덕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두 사람의 형색이 미련한 강호 초행들이나 벌인다는 내력 대결의 모양새가 된 까닭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이미 얽혀 버린 상태다. 동시에 내력을 거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이상 한쪽이 파탄 날 때까지 변할 길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서로를 죽이기 위해 손을 쓴 상태. 그런 상황에서 상대를 믿고 내력을 거두고 물러나기에는 불법이 극한에 이르렀다는 현오 선사도, 자신감 빼면 시체라는 고덕도 마땅치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그렇게 되자 중요한 것은 외부의 도움이 되어버렸다. 저 팽팽한 줄다리기를 끊어 내줄 작은 힘의 도움.
순간, 한 수호법승이 고덕을 향해 폭사했다. 그 의도를 재빨리 읽어낸 협련의 검이 날아든 수호법승의 앞을 가로막았다.
상황이 그리되자 다른 모든 이들의 움직임이 급박해졌다. 상대를 향해 손을 쓰는 이들과 그런 이들을 막아서는 손길. 한데, 우습게도 맞붙은 두 초인들을 향해 손을 쓰는 이들은 내소림의 수호법승들뿐이다. 사신대는 오히려 그런 이들의 앞을 가로막을 뿐, 현오 선사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치하고 섰다고 주변의 일을 모를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다. 그 탓에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이 벌이는 일과 그들을 막아서는 사신대의 행동을 현오 선사는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허허, 이거야 누가 불존의 가르침을 지키는 법승이고, 누가 사람을 파리처럼 죽이는 살귀란 말인가?’
자신들마저 모르는 사이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림의 편협함을 닮은 내소림의 수호법승들을 바라보는 현오 선사의 눈은 슬프고 참담했다.
‘과연 이 소림을 지키는 것이 세존이 뜻이련가……?’
깊은 고뇌가 현오 선사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한 줄기 법어가 그의 뇌리를 훑었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
그 법어가 현오의 마음을 흔들고, 눈을 열고, 머리를 열고, 깊은 성찰의 문을 열었다.
‘본디 죄는 업으로 갚는 법. 나를 지키고자 허물을 덮고 죄를 가리면 업은 어디서 받는가? 소림의 업을 미련한 중들이 막아섰음이니…….’
그 생각 끝에 현오의 불력이 끊어졌다.
쐐애애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이끌며 순식간에 몰아닥친 강기의 파도가 현오 선사의 몸뚱이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팍-
그 엄청난 힘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 남겨진 힘의 여력이 그 뒤를 휩쓸었어야 함에도 그 막강한 힘은 마치 흩어진 현오 선사와 함께 사라진 듯 감쪽같이 모습을 감췄다.
소림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를 떠받치는 기둥이 무너졌다. 그 충격은 생각보다 강력해서 전의를 상실한 수호법승들의 수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들어버렸다. 잠깐의 방심을, 잠깐의 파탄을 놓칠 만큼 사신대원들의 실력이 낮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 피바다 속으로 고덕의 발이 한 걸음 움직였다.
그때였다.
“멈추시오!”
강력한 기파를 담은 사자후와 함께 날아 내린 이는 고덕이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