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장. 환장(換腸)-한 말을 안 했다고 우기다
하포를 출발한 왕팔은 공도를 비롯한 다섯 사신대원들과 함께 흔적을 추적하고 있었다.
“마차를 동원했다.”
왕팔의 말에 공도가 내력을 돋운 시선에도 희미하게 보이는 흔적을 짚으며 물었다.
“이것이 마차의 흔적이라는 것을 어찌 압니까?”
“흔적을 찾을 땐 그 주변을 봐라.”
“주변이요…….”
“그래. 그 흔적 곁의 땅은 양쪽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너머의 땅은 다시 안으로 물려 들었다. 눌린 자국은 흐릿해지지만, 물려 들어간 자국은 고의적인 힘이 가해지더라도 특유의 흔적이 남기 마련이지. 이렇게 흙이 안과 밖이 뒤바뀌듯이 말이다.”
말과 함께 흙을 들추니 흔적이 남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속 색이 달랐다.
“이건 왜 이런 겁니까?”
“밖에서 검게 변한 흙이 안으로 들어간 탓이다. 그래서 그렇지 않은 쪽보다 검게 나타나는 거지.”
“정말 희한하군요.”
“처음엔 희한하게 보일 거다. 하지만 나중엔 보기만 해도 알게 되지. 그 전까진 의심되는 흔적이 나오면 직접 흙을 들춰보고 확인하는 것도 방법이다.”
왕팔의 말에 공도를 포함한 다섯 사신대원들은 존경의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모습에 가슴을 편 왕팔이 한쪽을 가리켰다.
“진행 방향은 이쪽. 특이한 점은 마차의 무게가 생각 이상으로 가볍다는 거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노인들이지만 두 사람을 실은 마차의 흔적이 이렇게 적을 순 없다. 그 말은 동원된 마차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붕 씌워진 마차가 아니라는 거다.”
“지붕이 달리지 않은 마차라면… 그냥 수레 아닙니까?”
공도의 물음에 왕팔이 답했다.
“대부분은 그렇지. 하지만 간혹 특별한 일을 위해 지붕이 달리지 않은 마차를 쓰기도 한다.”
“정확히 어떤 일에 쓰이는 겁니까?”
공도만큼이나 추적술에 관심이 많은 이가 바로 염홍이란 이름의 대원이다. 얼굴에 커다란 자상을 가진 그는 상처 끝에 위치한 왼쪽 눈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공도도 왼손에 손가락 세 개가 없었고, 다른 셋도 이런저런 상처들이 가득했다.
“가장 흔하게 쓰이는 곳이 꽃놀이다. 주로 유곽이 많은 항주나 소주의 강변에서 애용된다. 그 외엔 지붕이 있어선 곤란한 물건을 소지한 사람을 나를 때 쓰기도 하고, 지체 높은 관인의 주검이 담긴 관을 옮길 때도 지붕 없는 마차를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럼 지금의 경우엔 아무것도 들어맞는 것이 없지 않습니까?”
엄홍의 질문에 왕팔이 혀를 찼다.
“쯔쯔,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다. 생각해봐라. 이들이 갑자기 마차를 동원한 이유가 뭘까? 납치한 이들을 이동시키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마차를 굳이 동원할 만한 일이 말이다.”
왕팔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섯 사신대원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납치 대상은 칠순을 넘긴 노인들이다. 거친 율동이 수반되는 인편의 이동이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근에 마음고생이 심해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지쳐 있던 상황일 테고.”
왕팔의 말에 공도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래, 뭐 같냐?”
왕팔의 기대 어린 물음에 공도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죽은 겁니다. 그 늙은이들이 모두 뒈진 거죠.”
손으로 목을 그어가며 실감나게 답한 공도의 말에 눈을 부라린 왕팔이 냅다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래, 기분도 꿀꿀한데 네가 한번 뒈져 봐라. 뭐, 아버님, 어머님이 늙은이들? 거기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뒈져?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자신이 앞서는 것이 무공이 아니라 경공이라는 것을 잘 아는 왕팔은 그들 앞에서 절대로 힘을 과시하지 않았다. 한데 그런 왕팔이 흰자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기세는 정말로 공도를 죽일 듯싶었다.
그 탓에 놀란 염홍을 비롯한 다른 사신대원들이 왕팔을 부둥켜안고 뜯어말렸다.
“참으십시오, 대주. 원래 공도 저게 머리가 비어서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대주가 참으십시오.”
고덕이 추적대 운운한 결과인지 왕팔을 따라나선 사신대원들은 그를 대주라고 불렀다. 이른바 추적대의 대주로 말이다. 그것이 나쁘지 않았던지 왕팔은 그들의 부름을 제지하기는커녕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한동안 소란이 줄어들자 왕팔이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다.
“나쁜 새끼, 나중에 대협한테 이를 테다. 대협의 형님 내외를 늙은이라 부르고, 뒈졌다고 한 불한당 같은 자식이 있다고 말이야.”
왕팔이 지칭한 대협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던 공도는 거의 날다시피 왕팔의 앞에 엎어졌다.
“아이고, 대주님. 제가 갑자기 미쳤었나 봅니다. 분이 풀리실 때까지 실컷 때리시고 제발 고자질만은…….”
“뭐, 고자질! 이 자식이!”
다시금 발광하는 왕팔을 염홍을 비롯한 다른 사신대원들, 아니 이젠 추적대원들이 된 사내들이 뜯어말렸다.
한 차례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벌판에서 도끼눈을 뜬 왕팔의 설명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놈들은 분명 몸이 쇄약해진 두 분을, 수혈을 짚어 관에 넣었을 것이다.”
“관에는 왜 넣습니까?”
“타인의 눈을 피해 잠든 노인 두 사람을 이송하기엔 가장 편할 테니까.”
“아~”
그 말에 탄성을 터트리는 이들을 둘러본 왕팔이 물었다.
“이걸 알아냈다. 그럼 앞으로 우리의 추적엔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겠냐?”
“그게… 그저 지금처럼 흔적을 놓치지 않고 쭉…….”
“그래, 그렇게 넌 쭉 헛다리 짚어라. 다른 놈은?”
염홍의 말을 자른 왕팔의 질문에 다른 이들은 눈치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쯔쯔… 우리가 알아낸 게 뭐냐? 놈들이 두 개의 관을 실은 무개마차(無蓋馬車)를 운용한다는 거다. 그럼 우리가 쫓을 게 뭐 겠냐?”
왕팔의 물음에 한쪽에 물러나 있던 공도가 쭈빗거리며 손을 들었다.
“쓰읍… 뭐야?”
“그게… 관을 실은 무개마차를 쫓으면…….”
자신 없어 하는 공도의 답에 왕팔이 박수를 쳤다.
“맞다. 바로 그거다. 그것을 쫓으면 흔적을 찾아 쫓는 것 보다 배는 빠를 거다. 단, 너무 그 정보에 모든 걸 맡기진 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중간에 놈들이 마차를 버리고 다른 수단을 이용해 두 분을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면 어찌합니까?”
“관을 실은 무개마차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중심으로 추적을 이어가되, 중간 중간 남겨진 흔적과 우리가 접한 증언이 부합되는지를 살피면 된다.”
“우와~”
추적대원들의 탄성에 우쭐한 표정을 잠시 지어 보였던 왕팔이 흔적이 이어진 방향을 가리켰다.
“자- 시간이 없으니 가자.”
달려가는 왕팔을 쫓아가는 다섯 추적대원들의 얼굴엔 감탄 어린 표정이 옅게 남아 있었다.
* * *
사람들의 증언과 소문, 그리고 흔적을 확인하며 추적에 나선지 육 일. 왕팔과 추적대는 어느덧 하남의 장갈이란 마을 근처에 접어들고 있었다.
“안 가십니까?”
마을 어귀에서 서성거리는 왕팔에게 공도가 묻자 그가 손을 내젓는다.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 표시에 추적대원들이 모여들었다.
“뭡니까?”
염홍의 걱정 어린 물음에 왕팔이 땅을 가리켰다.
“뭐가 보이냐?”
“흠… 이건 마차 바퀴 자국이네요.”
한쪽 눈밖에 안 보이면서도 제법 흔적을 찾아내는 염홍에게 왕팔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다. 그건 마차 바퀴 자국이다. 이전과 동일한.”
“그럼 제대로 쫓아온 거 아닙니까?”
“제대로 쫓아온 게 맞다.”
“한데 왜 그러십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염홍의 물음에 왕팔이 마차 바퀴의 진행 방향으로 손을 뻗어 보였다.
“이곳으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아냐?”
“제가 어찌 압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자신을 째려보는 왕팔의 시선이 억울했는지 염홍이 항변했다.
“제가 모든 길을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 말도 맞다. 하지만 말이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어디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있을 때도 있다.”
말과 함께 자신의 고개를 억지로 돌리는 왕팔에 의해 돌아간 염홍의 시선엔 갈림길에 서 있는 이정표가 보였다. 아마도 관도인 탓에 관에서 박아 넣은 안내판 같았다.
“저기 뭐라고 써 있냐?”
“낙… 양이라고…….”
기어들어가는 음성인 염홍에게 왕팔이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아래쪽 이정표엔?”
“숭산…….”
“자, 그럼 여기서 문제. 놈들은 대협을 소림으로 오라고 했다. 한데 두 분을 실은 마차는 낙양으로 향했다. 이유가 뭘까?”
왕팔의 물음에 공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공도.”
“예, 대주.”
“애냐. 매번 말할 때마다 손을 들게.”
“그게, 습관이 돼서요.”
“멍청한 자식. 알았으니 답이나 해봐.”
“그게, 우리가 중간에 놓친 게 아닐까요?”
“역시 멍청한 대답. 다른 사람?”
왕팔의 물음에 오른쪽 팔이 없는 가혁이란 사내가 입을 열었다.
“놈들이 낙양으로…….”
“그렇지, 낙양으로?”
기대 어린 왕팔의 추임새에 힘을 얻은 가혁의 힘찬 답이 들려왔다.
“돌아서 가려는 것입니다.”
“뭐? 아니, 왜?”
“그야 낙양엔 맛있는 것도 많고, 기루도 좋은 곳이 많으니까… 그게, 예쁜 여자도 많이 있을 테고…….”
점점 옆으로 찢어져 가는 왕팔의 눈매를 보며 음성이 힘을 잃어가던 가혁은 종래엔 엉뚱한 답을 했다.
“…그냥 돌아가고 싶었을 수도…….”
퍽-
“아코-”
정강이를 걷어차인 가혁이 겅중겅중 뛰는 것을 노려봐준 왕팔이 설명을 이었다.
“이런 경우 낙양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살펴야 할 거다.”
왕팔의 말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는지 겅중겅중 뛰던 가혁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하남 제일루인 춘화루! 명월이 가슴이 그냥… 아이코!”
반대편 정강이까지 걷어차인 가혁이 두 발을 교차하며 겅중겅중 뛰는 것을 일별한 왕팔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답을 말했다.
“낙양엔 정천맹이 있다.”
정천맹 세 글자가 왕팔의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바보 같은 모습으로 겅중거리던 가혁은 물론이고 그 모습을 보며 지들끼리 낄낄거리던 추적대원들의 신형에서 무지막지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씹어 먹을 새끼들!”
“창자를 뽑아 목을 졸라 죽일 놈들.”
“그걸 뽑아 입에 처넣어 죽일 놈들.”
듣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한 욕설들이 난무하자 당황한 왕팔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일단 놈들이 두 분을 정천맹으로 이동시킨 것 같으니까 지금부턴 조심해서 움직인다.”
“왜 조심합니까? 그 새끼들 겁낼 것 없습니다.”
“맞습니다, 대주. 개기면 아주 면상을 박살을 내주면 됩니다.”
흉흉한 대원들의 기세에 왕팔이 당황한 음성을 토했다.
“그러다 우리가 추적한 게 들키면 두 분은 어찌 되라고? 생각 좀 해, 생각을.”
왕팔의 말에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공도가 손을 번쩍 들었다.
“또 뭐냐?”
“이참에 아주 정천맹을 갈아엎고 두 분을 구하는 겁니다.”
공도의 말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냥 두었다가는 분명 사단이 벌어질 것이라 생각한 왕팔이 강하게 나갔다.
“미친놈들, 아주 지랄을 해라. 하여간 내 말을 무시하고 일을 만드는 새끼는 무조건 추적대에서 퇴출이야. 대협께 능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입만 살았다고 보고해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왕팔의 말이 효과를 보았는지 흥분해 날뛰던 추적대원들이 조용해졌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왕팔은 이들이 추적대에서 퇴출될 것이 두려운 건지 아니면 고덕에게 일러바쳐지는 것이 두려운 건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하간 흥분을 가라앉힌 이들을 이끌고 왕팔은 조용히, 또 조용히 낙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처에 정천맹의 무사들이 눈을 번뜩이는 낙양으로 잠입에 성공한 왕팔은 주변을 탐문한 결과 자신들이 추적해온 마차가 정천맹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젠 확실해졌다. 놈들이 소림을 선택한 것은 함정이다. 이걸 대협께 알려야 한다. 염홍, 가혁.”
왕팔의 호명에 두 대원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예, 대주.”
“두 사람은 지금부터 조용히 낙양을 벗어나라. 이후 정천맹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부턴 최고의 속도로 숭산을 향해 달려라. 숭산 어귀에서 기다리면 대협을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뵙기만 하면 됩니까?”
어이없는 염홍의 질문에 고리눈을 뜬 왕팔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두 분이 이곳 정천맹에 있다고 말씀드려야지, 이 멍청아!”
“아! 알겠습니다. 한데 그걸 위해 둘씩이나 움직입니까?”
불만스러워 보이는 염홍과 가혁에게 왕팔은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둘 중 한 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협께 사실을 알려야 한다. 알겠지?”
비로소 자신들의 임무가 생각보다 중하다고 느꼈던지 염홍과 가혁은 과도한 결의를 뿜어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목숨을 바쳐 완수하겠습니다.”
목숨 운운하는 두 사람에게 왕팔이 주의를 줬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다.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무조건 토끼면 된다. 알겠지?”
“토껴요? 우리가요? 왜요?”
역시 중간에 정천맹 무사들이 가로막는 일이라도 벌어지면 죽자고 싸울 위인들이었다.
“이건 정보를 전하는 게 중요하지, 중간에 만난 정천맹 놈들을 박살내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 말이야. 알았냐?”
“정말 박살내면 안 됩니까? 얼마 안 걸리는데…….”
“안 돼!”
“몇몇만 골라서 골을 빠개놓는 것도 안 됩니까?”
미련이 남은 듯한 염홍의 물음에도 왕팔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절대로 안 돼!”
“그럼 전낭만 채어가는 것은 되는 거죠?”
생각지 못한 가혁의 질문에 왕팔이 물었다.
“전낭? 전낭은 왜?”
“돈을 모아놔야 나중에 춘화루에서…….”
말끝에 술을 들이켜는 흉내를 내는 가혁에게 왕팔이 고리눈을 떴다.
“이 새끼, 너 빠져. 야, 공도.”
“예.”
“네가 가라.”
왕팔의 말에 반색하는 공도와는 다르게 사색이 된 가혁이 왕팔에게 달라붙었다.
“절대로 손 안 대겠습니다. 정천맹 새끼들 머리카락만 보여도 최대한 멀리 돌아가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맹세, 그렇지, 맹세도 하라면 합니다.”
“정말이야?”
의심스러운 눈초리인 왕팔의 물음에 가혁의 고개가 맹렬하게 끄덕여졌다.
“정말입니다.”
“좋아. 그럼 맹세해.”
“예?”
“맹세할 수 있다면서?”
“그래도 이만한 일에 무슨 맹세까지…….”
말과 다르게 미적거리는 가혁에게 왕팔이 사나운 눈길을 주었다.
“이 새끼, 너 그럴 줄 알았어. 야- 공도.”
“아, 알았습니다. 합니다, 맹세. 맹세한다고요.”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가혁의 말에 왕팔이 물었다.
“정말이지?”
“예, 정말입니다. 맹세해요. 맹세.”
“좋아. 가장 빠르게 가장 조용히. 알겠지?”
“알았다구요.”
불만 어린 가혁의 음성이 튀어나왔지만 웬일인지 왕팔은 별다른 말없이 그와 염홍을 보냈다.
그렇게 멀어지는 이들을 바라보는 왕팔의 귀로 공도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보내주지도 않을 거면서 자꾸 이름을 부르고 지랄이야…….”
홱 하니 돌아간 왕팔의 눈이 쪽 찢어지며 사나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뭐, 지랄?”
“누가요?”
“네가 방금 지랄이라고 했잖아.”
“제가요?”
전혀 모른다는 듯이 시침을 뚝 떼는 공도에게 왕팔이 버럭 화를 냈다.
“그래! 네가 방금 그랬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언제 지랄이라고 했다고 그러세요.”
“이 새끼가. 네가 방금 전에 분명히 지랄, 그러는 걸 이 귀로 들었는데도 발뺌을 해!”
팔팔 뛰는 왕팔에게 공도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 씨발. 제가 언제 지랄이라고 했다고 그러십니까?”
“뭐, 씨발?”
“씨발이요? 제가 언제 그랬어요.”
“뭐, 이 새끼 이거 아주 웃긴 새끼네.”
“거- 지는 새끼 아닌가? 왜 자꾸 새끼래.”
“뭐!”
“뭐가요?”
“너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했지?”
“누가요? 제가 언제요.”
“이 새끼가…….”
그 뒤로도 한참 이어지는 싸움 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는 걸 왕팔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빠르고 가장 조용히를 강조하던 왕팔이 스스로 사고를 치고 있었던 것이다.
* * *
왕팔의 당부대로 염홍과 가혁은 최대한 은밀히 낙양을 벗어났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도착한 숭산 어귀에서 고덕을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린 지 이틀. 일행과 천천히 다가오는 고덕을 염홍과 가혁이 맞았다.
“주군!”
두 사람의 인사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이자 염홍이 보고를 이었다.
“왕 대주가 두 분은 정천맹에 계시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팔이는?”
“대주는 다른 세 명의 대원들과 함께 정천맹 부근에서 만약에 대비하고 계십니다.”
염홍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에게 협련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르신들이 이곳에 안 계시다면 굳이 함정으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초청 받아놓고 안 갈 수도 없잖아?”
“하오나…….”
만류하려는 협련을 손을 들어 제지한 고덕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초청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나? 난 그런대로 만족하는 데 말이야.”
“대협…….”
“내 가족을 인질로 삼다니 신선하잖아. 이런 걸 그냥 두면 다음엔 조카들이 위험해지겠지. 무슨 말인 줄 알겠냐?”
고덕의 말에 협련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다는 걸, 아니 만류해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게 협련이 물러나자 고덕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귀로 고덕의 음성이 들려왔다.
“시작은 내가 한다. 안 하면 몰라도 시작하게 되면 일체의 자비는 버려라. 동자승이 아니라 소림의 그늘 안에 있다면 갓난아기조차 살려 두지 않는다.”
싸늘하다 못해 마기까지 느껴지는 고덕의 음성에 협련과 창군은 작게 진저리를 쳐야 했다. 하지만 사신대원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흉흉한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협련은 이들에게서 죽음의 냄새가 풍겨 나온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덕과 사신들이 소림의 산길을 걸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