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장. 징치(懲治)-소림, 석양에 지다
전서를 받은 왕팔이 헐레벌떡 하포에 도착한 것은 정천맹의 서신이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소림이라……. 정말 이곳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걱정 어린 왕팔의 물음에 고덕이 되물었다.
“안 가면 수가 있겠느냐?”
“그야…….”
딱히 할 답이 없었다. 인질을 잡고 오라는데 안 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 네 생각이 바로 내 생각과 같다.”
고덕의 말에 왕팔은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물러나는 왕팔을 고덕이 불러 세웠다.
“오랜만에 네 실력 좀 봐야겠다.”
“무슨 말씀이신지……?”
왕팔의 반문에 싱긋이 미소를 지은 고덕이 답했다.
“오라는 곳으로 가는 건 가는 거고, 그곳이 정말 맞는지 정도는 우리가 확인해야 하니 말이다.”
그 말에 왕팔의 눈이 반짝거렸다.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느냐?”
“거리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열흘이면 될 겁니다.”
하포와 정천맹이 오라고 전한 소림과의 거리면 왕팔이 전력을 기울였을 때 오 일이면 주파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열흘을 잡은 것은 그 외의 지역일 가능성과 추적에 필요한 기일을 감안한 날짜였다.
“그렇게 하지. 후량.”
“예, 대협.”
“놈들에게 답신을 보내줘라. 열흘 후에 소림에서 보자고.”
고덕의 말에 왕팔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열흘이면 제가 확인한 날짜가 아닙니까?”
“그래. 뭐, 문제가 있나?”
“그게… 만일 다른 곳이라면……?”
“네가 지키는 동안 소림을 쓸어버리고 가면 되겠지.”
고덕의 말에 왕팔과 협련 등은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육지겸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
“그, 그럼 제게도 사람을 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왕팔의 말에 고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이들로 다섯을 데려가거라. 단, 협련과 묵린은 빼고.”
가장 편한 두 사람을 제외시키는 고덕에게 왕팔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 안 됩니까?”
물어놓고도 당황하는 왕팔에게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생각 같아서는 네놈도 보내지 않고 싶지만, 그 능력을 다른 이가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할 수 없이 보내는 게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가르침을 내린 게 언젠데 아직도 그 꼴들인지……. 후배들 보기에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 말에 고덕의 말뜻을 알아차린 협련과 창군의 표정엔 기대가 가득해졌지만 왕팔은 안타까움으로 찼다. 여하간 고덕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것을 읽었던지 고덕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넌 갔다 와서 좀 보자.”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말이다. 그 말에 왕팔의 허리가 직각으로 꺾였다.
“예, 대협!”
힘찬 왕팔의 답에 사람들의 입가엔 저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육지겸을 비롯한 열아홉 사내들이 일렬로 도열한 가운데 왕팔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의 앞을 배회한다. 다섯 사람을 뽑아 가라는 허락이 있었지만, 누굴 데려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강한 순서로 다섯을 뽑자니 고덕이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될 거 같고, 그렇다고 약한 이들을 데려가면 자신의 안위가 위험했다. 더구나 추적에 관한 일이니 그런 방면에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도움이 될 듯도 한데, 그런 이를 가려 뽑는 것이 생각 외로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흔적을 잘 찾는 사람 말이다… 요.”
후배라는 말에 일단 말부터 낮췄지만, 흉험한 기세는 누구 하나 자신의 아래가 없다. 그 까닭에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은 왕팔의 말꼬리는 요상하게 끝나고 있었다.
“없나… 요?”
“저기… 제가 사냥꾼 출신이라 흔적을 좀 잘 찾습니다.”
손을 든 이는 정말로 사냥꾼답게 생겼다. 덩치도 팔 척 거구에 허벅지 두께가 왕팔의 허리만 한 사내였다.
“험험, 경공도 빨라야 해서…….”
“섬마공을 익혔으니 경공엔 나름대로 자신 있습니다. 대원들 중에서도 상급에 속합니다.”
“응? 섬마공? 지금 섬마공이라고 했나… 요?”
“예, 선배.”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는 사내를 시작으로 도열해 있는 이들을 훑는 왕팔의 얼굴에 불안감이 어렸다.
“설마 전부 섬마공을 익힌 건 아니지… 요?”
“맞습니다. 전부 섬마공을 익혔습니다.”
왕팔의 기대를 철저하게 짓밟는 사내의 답에 흘깃 고덕이 걸터앉은 툇마루를 슬쩍 째려봐준 왕팔이 물었다.
“성취는… 요?”
“거의 삼 성 정도이고, 적표 부대주만 칠성입니다.”
사내의 답에 왕팔의 표정이 왠지 밝아 보였다.
“칠성? 최고가 칠성이라고… 요?”
“예. 육지겸 대주가 육성, 저와 다른 둘이 오성, 나머지는 전부 사 성 내지는 삼 성입니다.”
솥뚜껑만 한 손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지목해가며 설명하는 사내를 왕팔은 꽤나 기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 삼 년이라고 하지 않았나?”
은근히 말끝에서 요 자가 사라졌다. 그 변화에 협련 등이 이채를 머금고 바라보는 가운데 사내가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사 성이라……. 늦어, 너무 늦어. 내가 사 성을 넘긴 건 섬마공을 배운 지 반년 만이었다고.”
왕팔의 말에 은근히 깔보고 있던 적표와 육지겸의 표정마저 변했다.
“저, 정말입니까?”
놀라는 사내에게 왕팔이 물었다.
“후배는 이름이 뭔가?”
“공도라 합니다.”
“공도.”
“예, 선배.”
“흠… 지금 섬마공에 대한 내 성취가 얼마일 것 같나?”
“그게… 한 육… 성?”
솔직히 그것도 높게 봐준 거다. 염소수염에 딱 봐도 얍삽하게 생긴 왕팔의 경지는 잘 봐줘도 상승의 일류. 그 정도 경지에서 막대한 내공을 필요로 하는 섬마공의 성취는 사실 쉬운 게 아닌 탓이다.
하지만 공도의 말에 고덕의 그것과 닮은 비틀린 미소를 그려 낸 왕팔은 손가락 아홉 개를 펼쳐 보였다. 순간, 공도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도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구, 구 성, 구 성인 겁니까?”
경악에 겨운 공도의 물음에 왕팔이 잔뜩 힘을 준 고개를 끄덕였다.
“암. 섬마공을 익혔다고 말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지.”
왕팔의 으스대는 모습을 툇마루에 앉아 바라보던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정말 경공 하나는 타고난 놈이었다. 도저히 구 성의 섬마공을 발휘할 수 없을 내력의 양으로 정말 구 성의 섬마공을 시전하는 모습은 고덕으로서도 신기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섬마공을 만들어낸 천마 사조만큼이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껏 뽐내는 왕팔의 우스운 자랑질을 그저 미소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하간 그것으로 왕팔은 자신들을 스스로 사신대라 부르는 열아홉 사내들의 절대적인 우러름을 받았다. 경공이든 뭐든 천마 사조의 무공을 그만큼 깊게 이해하는 자에 대한 순수한 존경이었다.
그 덕분에 왕팔은 공도를 비롯한 추적과 경공에 나름 일가견을 가진 사신대원 다섯을 추려 낼 수 있었다.
“준비됐습니다.”
왕팔의 보고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물었다.
“가면서 제대로 가르쳐 봐.”
“아, 예. 경공에 대해선 한번 살펴 줄 요량입니다.”
왕팔의 답에 고덕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물론 그것도 살펴 주면 좋겠지만,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야.”
“하오시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왕팔에게 고덕이 그의 눈을 가리켰다.
“보는 법. 오래된 흔적을 보는 법을 가르치란 말이다.”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만, 보긴 별거 아니어도 쉬운 배움은 아닙니다. 대협.”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다. 나도 하지 못하는 일이니까.”
고덕의 말에 왕팔의 가슴이 절로 펴졌다.
“그리 말씀하시니 한번 가르쳐 보겠습니다.”
“적당히 가르쳤다간 나중에 그들을 데리고 일을 맡을 네가 고생할 테니,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이들을 데리고 다닌다고요? 제가 말씀입니까?”
“넌 협련이나 묵린과는 또 다르니까.”
고덕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협련과 묵린의 눈이 불안감에 반짝인다. 그런 둘의 관심 속에 왕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천마심공과 섬마공, 그리고 또 하나, 천마비화를 익혔으니 하는 말이다.”
고덕의 말에 사신대원들의 강렬한 시선이 왕팔에게 꽂혔다.
“그거야…….”
말을 못 잇는 왕팔에게 웃음을 머금은 고덕의 말이 이어졌다.
“천마 사조가 남긴 최고의 비도술인 천마비화를 보고 당가 사람이 흉내 낸 것이 만천화우다. 마찬가지로 제갈세가가 본뜬 것이 소리비도이고. 하지만 아류는 아류일 뿐, 진짜배기는 따라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천마비화를 천하에서 아는 것은 너와 나 둘뿐이다. 그리고 난 더 이상 다른 이에게 가르칠 마음이 없다. 하나, 네가 사신대의 후배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막을 생각은 없다.”
그 말인즉 사신대원들이 천마비화를 배우려면 왕팔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 말을 가장 빨리 알아들은 것은 우습게도 가장 과격한 적표였다.
“왕 선배님, 사랑합니다.”
단단한 차돌처럼 생긴 적표의 갑작스런 말에 일대가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한참 동안 이어진 그 웃음이 흩어지자 고덕이 말했다.
“추적대를 잘 키워라.”
“맡겨 주십시오, 대협.”
“좋아. 가라.”
고덕의 명에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왕팔과 다섯 사신대원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자 고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천천히 준비를 해볼까.”
“너무 이르지 않겠습니까?”
협련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앉아서 좀이 쑤시느니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이 낫지 싶다.”
그 말뜻에 동감한 협련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협.”
그로부터 반 시진 후, 고덕을 위시한 이들이 하포를 떠나자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 * *
댕~ 댕~ 땡~
산사의 종소리가 길게 세 번 울렸다. 인시(寅時:새벽 3~5시)가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다.
고요함을 살짝 흔드는 그 소리를 따라 흘러든 공기가 야심한 시각에 불이 밝혀진 선방에 닿았다.
“그들이 움직였다니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장인 구련 대사의 말에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고승들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특히 나한전주인 불연 선사의 침음이 유달리 깊고 무거웠다.
그것이 마음 쓰였는지 구련 대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한전주께서는 이 방장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같은 배분이라고는 하나 구련 대사는 정통 무승이 아닌 반승 출신이다. 여기서 반승이란 학승에서 출발해 무승의 자리로 옮긴 이들을 뜻한다. 당연히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정통 무승들에 비해 얕을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알게 모르게 정통 무승들과 반승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다. 하여, 지난 실책의 책임론이 부상한 탓에 언제나 정통 무승들에게 이어져 오던 방장의 자리가 반승 출신인 구련 대사에게 돌아간 것이었다.
그것이 소림의 속살에 상처를 내고 있었다.
“방장의 결정에 소승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한데 왜 그리 시름이 깊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구련 대사의 날카로운 음성에 작게 불호를 외운 불연 선사가 답을 이었다.
“나무아미타불… 제 소임이 무엇입니까? 바로 폐사를 지키는 나한전의 전주입니다. 하나, 폐사의 안위를 위협할 난적이 다가온다는데도 아무런 대책을 세울 수 없으니 나한전을 맡은 수장으로서 어찌 시름이 깊지 않겠습니까?”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어찌해서 그렇습니까?”
눈마저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구련 대사에게 불연 선사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현재 나한전에 배속된 나한들은 모두 쉰일곱입니다. 그중에서 나한십팔수를 익히고 있는 이들이 오십, 선천나한십팔수를 익힌 이들이 다섯, 달마십팔수를 익힌 이들이 둘입니다.”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여전히 맥을 잡지 못하는 방장을 바라보는 정통 무승 출신 수뇌들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흐음… 방장, 십팔나한이 무엇을 익히는지 아십니까?”
“그야 나한십팔수가 아닙니까?”
구련 대사의 답에 여기저기서 헛웃음과 한탄이 터져 나왔다.
“허허… 이런 참…….”
그때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구련 대사에게 불연 선사의 설명이 들려왔다.
“불전을 지키는 나한은 나한십팔수로 십오 년을 닦고, 선천나한십팔수로 다시 십오 년을 닦아 나한전의 중추인 십팔나한이 됩니다.”
“어흠… 그, 그렇습니까?”
얼굴이 벌겋게 된 구련 대사의 물음에 불연 선사의 답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한데 지금 나한전에서 선천나한십팔수를 익히고 있는 이들의 수는 다섯뿐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구련 대사가 물었다.
“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방장의 물음에 정통 무승 출신 수뇌들은 이제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지 눈을 감고 불호만 외우고들 있었다. 그런 이들 사이로 불연 선사의 답이 이어졌다.
“흐음… 나한십팔수를 익힐 수 있는 무승들은 일 년에 열 명뿐입니다.”
“그거야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비로소 알고 있는 것이 나왔는지 구련 대사의 답엔 오랜만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런 방장을 바라보는 불연 선사의 눈빛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선천나한십팔수를 익힐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예비 나한들의 수가 일 년에 얼마인 줄은 아십니까?”
“그런 제약도 있습니까?”
엉겁결에 물음을 던진 이는 방장이 아니라 새로이 긴나라전주가 된 무혜 대사였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반승 출신이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또다시 사방에서 침통한 음성의 불호가 연이어 흘렀다.
“나한전주, 지금 이 방장을 희롱하시자는 게요?”
그냥 끌려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구련 대사의 역정이 터져 나왔다. 그에 불연 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어찌 소승의 방장을 희롱하리까.”
“하면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 될 터. 그리 빈승을 시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는 구련 대사에게 가볍게 반장을 해 보인 불연 선사가 말을 이었다.
“빈승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이다. 알고 있는 것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면 오히려 반승 출신이라고 무시하냐는 말을 들을까 저어해 토막 쳐 물었던 것뿐이었다.
“하면 내가 알아듣게 말씀해보세요.”
구련 대사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인 불연 선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하지요. 다시 처음부터 말씀드리자면 나한십팔수를 익힐 수 있도록 허락받은 무승들은 일 년에 열입니다. 그리고 선천나한십팔수의 수련을 허락받은 이들은 일 년에 한 명이지요.”
잠시 입을 닫은 불연 선사의 시선을 받은 구련 대사는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표정이었다. 그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불연 선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나한전의 주력인 십팔나한을 채우려면 십팔 년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한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 나한전에서 선천십팔나한을 수련 중인 예비 나한들은 겨우 다섯입니다. 그 말은…….”
“십팔나한을 채우는 데 앞으로 십삼 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사형.”
갑작스런 음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말석을 향했다. 그곳엔 반승 출신이면서도 정통 무승들에게까지 인정을 받는 천재 무승이 앉아 있었다.
“오연 사제도 와 있었는가?”
무관심한 방장의 물음에 오연 대사가 반장을 취했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 시간에 회의가 있다는 걸 미처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가 모른 것은 방장이 일부러 통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구련 대사와 최후까지 방장의 자리를 두고 다툰 이가 바로 오연 대사였다. 대부분의 정통 무승 출신 승려들이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처럼 권력을 잡은 반승들은 정통 무승들과 서슴없이 지내는 오연 사제보다는 자신들의 한을 가장 잘 아는 구련 대사가 방장이 되길 바랐다. 그 결과 이례적으로 표결까지 가는 절차를 통해 구련 대사가 방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의결권을 가진 고위 승려들 중 다수의 정통 무승들이 검마의 혈사에서 열반에 든 까닭에 수적으로 반승 출신의 승려들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 이후로 구련 대사는 물론이고, 다른 반승 출신 승려들조차 오연 대사를 은근히 따돌리는 형편이었다.
“험험, 그랬던가? 사제는 본사의 행사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걸세.”
구련 대사의 말에 오연 대사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는 그러려 합니다.”
그 답에 구련 대사의 얼굴은 미미하게 굳어버렸다. 그런 분위기를 바라지 않았던지 불연 선사가 말문을 열었다.
“다시 설명을 잇지요.”
“험험…….”
방장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의 헛기침 소리 속으로 불연 선사의 음성이 이어졌다.
“또한 백팔나한진도 구성할 수 없습니다. 백팔나한진은 말 그대로 예비 나한 백여덟 명이 펼치는 진. 하나, 나한전은 현재 단 쉰 명의 예비 나한을 보유하고 있을 뿐입니다.”
불연 선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연 대사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뿐이 아니지요. 불연 사형께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만 사대금강도 나한전에서 키워지는 이들. 이십 년 단위로 뽑는 사대금강은 십팔나한에서 해제된 상승의 무승들 중에서 스물을 추려 다시 오 년 동안 달마십팔수를 가르치고, 그들 중 열을 뽑아 다시금 오 년간 금강부동공을 익히도록 한 후 그중 넷을 뽑아 만들지요. 한데 지금 달마십팔수를 익히는 이들이 겨우 둘이라고요.”
“그렇게 되었네.”
불연 선사의 답에 오연 대사의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하면 제가 여쭙지요. 그런 상황인데 나한전엔 버젓이 십팔나한과 사대금강이 있습니다. 어찌 된 일입니까?”
“그분들은… 양심당에서 다시 내려오신…….”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불연 선사였다.
양심당이 뭐하는 곳인가? 일생을 소림에 몸 바친 무승들 중 장로에 오르지 못한 나이 많은 무승들이 노년을 보내는 곳이다. 한마디로 장로 이상을 지낸 소림의 고승들이 말년을 보내는 장생전과 똑같은 곳인 것이다.
“한마디로 은퇴했던 이들을 끌어내려 다시 불장을 쥐어주었다는 말입니다. 뭐, 어차피 늙어도 소림의 승려이니 늙은 몸을 소림을 위해 쓴다면 그도 나쁠 것은 없지요. 하나 실력이 되느냐는 겁니다. 과거 이십 년 전에 십팔나한이었으면 지금도 십팔나한이고, 삼십 년 전에 사대금강이었으면 지금도 사대금강에 마땅한 실력을 가지고 있느냐 그 말입니다.”
오연 대사의 말에 장내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대부분의 강호인들은 나이가 먹을수록 실력이 늘어간다. 그것은 어떤 무공, 어떤 심법을 익혔어도 동일하다. 숙련도가 올라가고 쌓이는 내력의 양이 늘어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무림인들도 사람인 이상 육십이 넘어가면 뼈가 삭고 근육이 마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그간 쌓아놓은 강대한 내력이 있는 초극의 고수들은 그 속도가 현격하게 느리다고는 해도 그들도 칠십이나 팔십을 넘으면 급격한 쇄락을 겪는다.
그 탓에 모든 무림인들이 미친 듯이 화경을 넘고자 하는 이유가 그것에 있었다. 화경을 넘으면 환골탈태를 거치고, 그로 인해 다시 구성된 육체는 세월과는 일정 부분 담을 쌓는다.
그 말인즉 화경을 접하지 못한 이들은 나이가 들면 예전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소림의 양심당이나 장생전에 몸을 담고 있는 원로 무승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하면, 오연 사제는 그들의 능력을 의심한다는 말인가?”
방장의 호통에 오연 대사가 승려에 어울리지 않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사대금강을 모두 나오라 하십시오. 내 그들을 방장 사형이 보는 앞에서 모조리 무릎을 꿇리리다.”
평소라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다.
소림의 사대금강은 모두가 초철정의 고수로 이루어지는 것. 그들 넷의 합공은 금강부동신공이라는 희대의 무공과 엮이며 최고의 능력을 뿜어낸다. 그 탓에 한참 윗줄인 십대고수도 사대금강의 합격엔 곤욕을 치른다고 전해지는 것이다. 그런 사대금강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오연 대사의 말에 방장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오연 사제는 입을 다물라.”
“맞는 말을 하는데 왜 입을 다물라 하십니까?”
“감히! 방장의 권위를 거스를 생각인가!”
다시금 터져 나온 방장의 호통에 오연 대사가 한발 물러났다.
“사형, 옛 영광을 지금과 혼동하지 마셔야 합니다. 혼동하는 순간 소림은 끝인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오연 대사의 말에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방장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팔대호원은 뭣들 하느냐! 기사멸조의 죄를 진 오연을 잡아 참회동에 가두어라!”
방장인 구련 대사의 호통에 문이 열리며 건장한 무승 여덟이 들어섰다. 예전이라면 이들 여덟이면 십대고수가 부럽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팔대호원은 겨우 초절정에 이르는 오연 대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이 한탄스러운지 오연 대사는 연신 혀를 찼고, 자리에 앉아 있던 정통 무승 출신 수뇌들은 눈을 감고 불호를 외울 뿐이었다.
그렇게 오연 대사가 끌려 나가자 심기가 불편해진 구련 대사가 회의를 파했다. 침묵을 지키는 방장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많은 수뇌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장실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날이 밝고, 다시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져 갈 때까지 구련 대사가 꼼짝 않고 틀어박혀 있던 방장실의 문을 한 노승이 두드렸다.
“방장, 긴나라전의 양원입니다.”
긴나라전이면 소림의 살림을 맡은 곳이다. 그곳의 승려가, 그것도 전주도 아닌 회색 가사를 입은 불목하니가 찾았음에도 방장은 선선히 그의 방문을 받아들였다.
“드시구려.”
방장의 허락에 방장실로 든 양원 대사는 윗목에 앉아 있는 구련 대사를 침중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왔으면 앉지 무얼 하시오.”
“흐음…….”
작게 침음을 흘린 양원 대사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구련 대사가 말문을 열었다.
“왜 찾아온 것이오?”
“들리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오.”
“무슨 소문 말이오?”
“검마 시주를 소림으로 불러들였다는 소문 말이외다.”
“맞소. 그리하였소.”
방장의 답에 양원 대사의 뺨이 씰룩거렸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어찌 빈승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소림의 일을 결정하는데 방장인 내가 불목하니인 양원 그대에게 허락이라도 구해야 한단 말인가?”
방장의 말에 양원 대사의 눈빛이 사납게 일어섰다.
“방장… 불목하니로 묻는 것이 아니질 않소!”
“내겐 그저 불목하니일 뿐. 내 대에 내소림은 존재치 않는 전설일 뿐이오. 정통 무승입네 하는 것들의 잘난 척을 난 받아줄 생각도, 마음도 없소. 하니, 할 말이 그뿐이라면 물러가시오.”
방장의 축객령에 싸늘한 눈빛이 된 양원이 물었다.
“내소림은 규율과 법도에 묶인 존재. 외소림의 방장이 청하지 않는 이상 소림의 멸문에도 나설 수 없는 일. 정녕 그대, 외소림의 방장은 내소림의 도움이 필요 없는가?”
차갑고 사나운 기세가 뭉클대며 일어서는 양원의 모습을 표독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던 방장의 입에서 싸늘한 답이 튀어나왔다.
“감히 불목하니가 방장의 권위에 도전이라니, 사지근맥을 잘려 참회동에 갇히고 싶었던 모양이더냐!”
이건 아예 무시다. 그런 방장의 태도에 벌떡 일어선 양원 대사가 경고를 남겼다.
“승려의 몸으로 과거의 은원에 매여 사문에 복수의 칼을 드리우다니. 정녕 죽어서도 풀지 못할 기사멸조의 죄를 업으로 삼을 요량인가? 다시 관하고 다시 참하며, 다시 존하라.”
그 말을 남긴 양원 대사가 물러났지만, 남겨진 구련 대사의 눈엔 차가운 한광만이 자리할 따름이었다.
방장실을 나선 양원 대사의 뇌리로 사십여 년 전 반승 출신인 주제에 나한전주에 도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지근맥이 잘려 참회동에 갇혀 죽은 승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그가 부르짖었었다.
‘소림의 죄가 소림을 겁화로 이끄리라. 내 육도의 나락에서 너희가 오만으로 멸하는 것을 기쁨으로 지켜볼 것이다. 으하하하!’
그 섬뜩했던 저주가 그자의 제자에 의해 실현되는 것 같아 양원은 심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에 바라본 소림은 붉은 노을에 잠겨 마치 핏속에 떠 있는 듯했다.
섬뜩한 느낌을 받은 양원 대사는 곧바로 자신의 선방으로 돌아와 소중히 갈무리해둔 새장을 꺼내 그 안에 든 비둘기를 날려 보냈다.
멀리 자유롭게 날아가는 비둘기를 바라보며 양원 대사는 자신의 간곡한 바람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길 석가세존에게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