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10장 (111/129)

제110장. 실책(失策)-정천맹, 모험을 걸다

독귀와 제갈천의 사퇴는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이백 년 이상 정천맹의 군사를 독점해온 제갈세가의 낙향도 충격적이었지만, 십대고수 중에서 유일하게 정천맹의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독괴의 퇴진은 심각한 상황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많은 백도 문파들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정천맹에 남아 있던 문파들은 순식간에 수뇌부를 정리하는 기민함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새로이 맹주 대리로 선출된 것은 소림의 방장인 구련 대사였다. 그는 맹주 대리라는 딱지를 붙이는 대신 소림의 방장을 겸임하게 되었고, 맹주좌에 오르자마자 제갈천과 독괴가 정천맹을 떠났다는 소문을 완벽하게 막아버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후, 맹주 대리가 된 구련 대사를 중심으로 정천맹의 강경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여전히 정천맹에 남아 검마 척결을 반대하던 일부 문파들의 우려를 강경론자들은 온건파들의 일괄 제명이라는 극약 처방으로 해결했다. 더구나 제명된 이들을 모조리 정천맹에 연금시킴으로써 소문이 정천맹의 담장을 넘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경파에 속하는 삼십여 개 문파가 참여하는 대검마 결사대가 만들어졌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고수를 모조리 동원하여 하포로 급파했다. 소흥을 출발한 검마보다 빠르게 인질을 잡기 위해 결사대는 최대한의 속도로 이동했다.

정천맹의 급박한 움직임에 비해 고덕의 이동은 평소와 달리 느긋했다. 고덕으로서는 삼 년 만에 햇빛을 보는 수하들을 평온한 일상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평온한 이동이 지속되고, 많은 이들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죽음의 냄새만 풍겨 내던 열아홉 사내들의 기세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흩어집니다. 이건… 좋지 않습니다.”

고덕의 곁에 끝까지 살아남은 열아홉 사내들 중에서 사지 육신이 멀쩡한 이는 육지겸과 적표 단둘뿐이었다.

그 참혹한 전투를 거치며 자신의 몸을 온전하게 지켜 냈다는 것은 그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 까닭인지 그 둘이 열아홉 사내들의 대표가 되어 있었다. 그중 육지겸의 걱정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날이 선 긴장은 해이해진 기강보다 못하다. 평온함에 적응한 감각을 익히도록.”

“평온함에 적응한 감각… 입니까?”

“그래. 아주 평온한 일상에서도 이상기류는 귀신같이 잡아내는 감각. 그것을 기른다.”

고덕의 말에 적표가 물었다.

“감각과 기감에 차이가 있는 겁니까?”

“작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기감은 내력에 기반을 둔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감각은 기감은 물론이고 육체가 가진 오감에 경험에 의한 육감, 거기에 수련으로 쌓은 초월감을 더한다. 너희가 중점으로 키워야 하는 것은 초월감이다.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감각이고.”

고덕의 말에 적표는 물론이고 나머지 열여덟 사내들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 고덕의 입가에 어려 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무공은 그저 칼을 휘두르고 육장을 내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언제부터인가 사색과 명상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고수로 가는 길에 제대로 들어섰다는 반증이다. 더구나 지난 삼 년간의 지옥 같은 수련으로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의 능력은 과거 자신이 길러냈던 마검대 오백이나 참마대 오백을 훨씬 뛰어넘는다.

하긴 가르친 것이 천마심공과 천마격이다. 거기에 더해 경공으로 섬마공을 풀어냈으니, 절반만 따라와도 초극에 이르는 길은 지척이다. 거기다 자신이 매일같이 운기요상으로 내력의 발전을 돕고, 자신들이 스스로 온 산야를 뒤져 약효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약초고 동물이고를 가리지 않고 먹어 젖힌 까닭에 내력에 있어서는 커다란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더구나 그 아비규환의 장을 뚫고 살아남았던 이들의 능력은 대부분이 절정을 넘어섰던 이들뿐이었다.

그들을 갈고닦은 시간이 삼 년이다. 그 시간이 지났을 때 일행의 가장 막내가 이룩한 경지가 초절정의 극의였다. 그가 삼 년 전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승의 일류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나머지 이들의 성취는 묻지 않아도 알 만한 것이었다.

그런 이들을 이끌며 고덕은 천천히 남하하고 있었다.

* * *

정천맹을 나서 단 오 일 만에 하포에 도착한 결사대는 다섯 집단으로 나뉘었다.

“저들에겐 화경에 이른 무명의 고수와 창군이 있소.”

구련 대사의 말에 제검가의 신임 가주 추풍검이 말을 보탰다.

“그뿐이 아니지요. 투견 후량도 머물고 있습니다. 삼 년 전에 작지 않은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지만, 그간 흘러간 시간이 적지 않으니 그도 완쾌되었다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추풍검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자신들이 상대해야 하는 이들이 십대고수 한 명과 제하이십사강 둘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인조들은 저들과의 충돌보다는 유인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오.”

구련 대사의 말을 추풍검이 받았다.

“그렇다고 너무 티를 내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백도의 정의를 위해서이니 얼마간의 희생은 각오하여야 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졌다. 그 말인즉 이들 중에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까닭이다.

“희생 없이 이룩되는 제마척사란 있을 수 없는 노릇. 우리 모두 희생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구련 대사의 격려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어차피 결사대란 이름으로 나섰을 때는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음에도, 죽음을 목전에 두자 조금씩 흔들리고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들을 이대로 방치하면 결국은 이탈자가 나온다. 그렇게 되면 결사대는 일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와해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추풍검은 서둘러 일을 진행시켰다.

“그럼 시작하시지요.”

추풍검의 권유에 고개를 끄덕인 구련 대사가 첫 유인조를 이끌 청성의 오구 진인에게 말했다.

“무훈을 빌겠소.”

구련 대사의 말에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오구 진인이 자신의 조에 속한 이십여 명의 무인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길의 집은 조용했다.

고덕의 실종 이후, 위험하다는 소흥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하포로 돌아온 고길 내외는 너무 많이 늙어버렸다. 고덕이 가르쳐 준 도인술도 그만두었고, 천직으로 알던 농사일마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탓에 밭은 거칠어졌고, 농기구는 망가진 것들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협련과 묵린, 후량 등이 조금씩 움직이긴 했지만 농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노력은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더구나 도인술을 그만둔 후 나날이 몸이 축나기 시작한 고길 내외에 대한 걱정으로 협련을 비롯한 세 사람은 좌불안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툇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고길을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협련의 검미가 일그러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왜 그래?”

협련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지 곁에 있던 창군이 물었다.

“주변으로 기세가 접근해. 위험한 이들은 잡히지 않지만 적지 않은 수야.”

“설마 놈들은 아니겠지?”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삼천이라고 했던 고덕의 주적이었다. 고덕이 사라진 틈을 타 그들이 내습해올 것을 걱정한 이들은 한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아니, 그들이라고 하기엔 기세들이… 아무래도 정천맹 쪽 같다.”

협련의 말에 창군이 묵창을 꼬나들었다.

“내가 정리하고 오지.”

“아니, 내가 나가지. 주변에 다른 이들도 있을지 모르니 내가 나가 보는 게 좋겠어.”

협련의 말에 창군은 두말없이 물러났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의 경지는 화경. 여전히 초극의 극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보다는 뛰어난 고수였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불러. 바로 뛰쳐나갈 테니까.”

창군의 말에 슬쩍 웃어 보인 협련이 뭉그적거리며 방에서 나오는 후량을 가리켰다.

“하긴 저 친구를 남겨 두면 되겠지. 그럼 다녀오지.”

말을 마치고 담을 넘어 사라지는 협련을 발견한 후량이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친구 왜 저래? 갑자기 담은 왜 타고?”

후량의 물음에 창군이 툇마루에 앉은 고길을 힐끗 일별하곤 낮은 음성으로 답했다.

“주변으로 알 수 없는 이들이 접근 중이다. 협련의 말로는 정천맹 쪽 사람들 같단다.”

“그 자식들이 왜?”

대번에 눈에 쌍심지를 켜는 후량에게 창군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야 모르지. 일단 협련이 돌아오는 걸 기다릴밖에.”

“근데 혼자 될까?”

“그다지 위험한 기세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적어도 현 강호에서 그 친구를 곤란하게 만들 사람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일 테니까.”

창군의 말에 후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초극의 극의와 초극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들과는 달리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협련은 이미 화경의 중간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 각 정도가 지났을 때쯤 창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기세가 몰려와.”

“뭐?”

같은 초극이라고는 하나 창군은 극의를 밟고 있는 이다. 한마디로 후량보다는 한 수 위라는 말. 그 탓에 창군이 느끼는 기감을 후량은 아직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가… 적지 않아.”

“뭐야? 협련이 쫓아갔다면서?”

“다른 부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니면?”

“그 친구에게 문제가 생긴 것일 수도 있지.”

고수가 기다리는 곳으로 유인해 둘을 붙여 놓고 다시 돌아왔다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후량은 창군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나가 볼게.”

박도를 들고 일어서는 후량을 창군이 막았다.

“아니, 내가 나가 보지. 그게 좋겠어.”

극의와 일반의 차이는 생각 외로 크다. 속된 말로 후량은 마음먹고 휘두른 창군의 일격을 막아내기 버겁다. 그 말은 위기 상황이 닥치면 후량보다는 창군이 더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을 알기에 후량은 불만스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두말없이 물러났다.

“제길, 알았어.”

“어르신들 잘 모셔.”

“걱정하지 말고, 조심해.”

후량의 투박한 걱정에 싱긋 웃어 보인 창군이 묵창을 들고 담을 넘어 사라졌다.

멀리서 두 번째 유인조가 한 사람을 더 끌어내는 것을 발견한 추풍검이 작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묵창. 창군이겠군요.”

“그런 모양이외다. 이제 남은 건 투견뿐이니 그대로 치고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하오이다만.”

구련 대사의 말에 추풍검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유인조는 하나를 더 두었습니다. 계획대로 하시지요.”

“하나, 처음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유인에 걸려들겠소?”

구련 대사의 우려에 추풍검이 미소를 지었다.

“남아 있는 이가 후량인 이상 그는 반드시 걸려들 겁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시오?”

“그의 성격은 화급하지요. 기다릴 줄 잘 모릅니다. 더구나 지켜야 할 대상이 있는 데다 남은 것은 자신 혼자이니 안에서 맞기보다는 밖에서 상대하려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흠… 추풍검께서 그리 말한다면야……. 좋소이다. 마지막 유인조를 내보내시구려.”

구련 대사의 말에 한쪽에서 대기 중이던 스무 명가량의 무사들이 창군을 달고 도주하는 유인조가 방금 사라진 고길의 집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안에서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후량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자신이 확연히 느낄 정도의 기세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그대로 돌파해 들어오겠다는 의도.

여전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고길과 그 곁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는 고길의 처를 바라본 후량은 이를 악물고 담을 뛰어넘었다. 집 안으로 들여 가뜩이나 힘겨워하는 고길 내외 앞에서 피를 보느니, 차라리 밖에서 적을 박살낼 요량이었던 것이다.

그런 후량이 뛰쳐나오자마자 십여 개의 공격이 그를 덮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해오는 공격을 후량은 무지막지한 호신강기로 뚫어냈다.

퍼벅퍽퍽퍽-

다수의 격중음이 울렸음에도 후량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그 말은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첫 공격을 가한 이들이 물러나자 뒤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일제히 발검하여 달려들었다. 한데, 개중에 눈에 익은 이들이 서넛 보인다. 하나같이 자신과 동급의 고수들이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량이 사나운 기세로 맞아나가는 가운데 몇몇 고수들이 반대편으로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련 대사와 추풍검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로, 후량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귀식대법을 펼친 채 접근 중이었다.

마치 공기가 벽을 타고 넘듯이 조용히 담을 넘은 이들은 자신들의 침입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고길 내외를 순식간에 덮쳤다. 덮치자마자 수혈을 짚어 잠을 재운 그들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그들이 빠져나간 지 이각 후. 기다란 피리 소리가 하포 하늘을 가득 채웠다.

죽일 듯이 밀어붙이던 놈들이 피리 소리에 순식간에 물러갔다. 하지만 언제 다시 밀어닥칠지 몰라 후량은 곳곳에 상처를 입은 몸으로 정문을 틀어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렇게 반 각도 되기 전에 낭패한 모습의 창군과 검에 피를 잔뜩 묻힌 협련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 둘은 상처를 입은 몸으로 정문을 가로막고 서 있는 후량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눈가를 찌푸렸다.

“이곳도 공격당했나?”

“빌어먹을 새끼들이 머릿수로…….”

상처가 제법 깊은 것들도 적지 않게 보이는 것을 보니 그냥 머릿수로 밀어붙인 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고수가 꽤 있었던 모양이군.”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리고 있던 놈들이 셋이나 되더군. 빌어먹을 개자식들.”

어지간히 분했던지 대번에 욕설을 뱉어내는 후량의 어깨를 두드려 준 협련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 방 안에 들어가셨나?”

협련의 말에 창군이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텅 비어 있는 방을 확인한 이들의 눈빛에 당황감이 어렸다.

순간, 사방으로 흩어진 셋이 집 안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다.

“없다.”

“이곳도.”

협련과 창군의 말에 얼굴이 온통 당황으로 물든 후량이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빌어먹을!”

“아무래도 유인작전에 걸려든 거 같다.”

협련의 말에 창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런 거 같군. 문제는 어느 쪽으로 도주했냐는 건데.”

창군의 말과 함께 사방을 훑어보는 세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흔적들은 침입자의 도주 방향을 알려 주지 않았다.

“왕팔의 부재가 뼈저리게 아쉽군.”

협련의 말에 창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 주변을 뒤져 보겠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던지 후량이 무작정 뒤져 볼 생각으로 일어서자 협련이 막아섰다.

“그렇게 해선 찾을 수 없다.”

“하면 이대로 당하잔 말이야?”

“아니, 절대로 그럴 순 없지.”

“그럼?”

후량의 물음에 협련이 낮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협이 없는데도 놈들이 손을 써왔어. 그렇다면 노리는 건 우리라는 뜻.”

“대협을 대신해 우리에게 복수를 하겠단 소린가?”

“아마도.”

“더러운 새끼들.”

후량의 욕설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기엔 처음인 협련과 창군이었다.

“우리를 노린 이상 놈들은 조만간 소식을 전해오게 되어 있어. 우리를 함정으로 불러들여야 할 테니까.”

“정천맹의 전력이 예전에 비해 많이 깎여 나갔다지만, 우리를 잡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있을까?”

창군의 의문에 협련이 답했다.

“네 말대로 지난 피해가 너무 컸다. 복수는 해야겠고, 피해는 더 이상 입을 수 없었을 터. 지금의 계략이 태어난 게 아닐까 싶다.”

고덕의 귀환이나 그에 대한 정천맹의 변화를 일체 알지 못했던 협련들의 오판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것을 알려 줄 수 없었다.

“제기랄. 하면 이대로 놈들의 소식을 기다려야 한단 말이야?”

분에 떠는 후량을 바라보며 협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한 번에 목을 물어뜯어줘야 하니까.”

그 일에 고길 내외의 안위가 함께 달렸다는 걸 알기에 후량도 더는 날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창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칠이나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을 마치 친자식 대하듯 해준 고길 내외이지만 친자식들이 버젓이 살아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선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식을 전하는 것이 맞는 거 같긴 하지만… 그들이 나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이거야… 답답하군.”

협련의 말에 후량도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입을 다물었고, 처음 의견을 제시한 창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피를 말리는 시간이 사흘이 지났다.

툇마루에 앉아 문을 노려보고 앉은 협련 등의 눈엔 폭발 직전의 분노가 가득했다. 그렇게 이제나저제나 소식을 기다리던 이들 중 협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들이!”

갑작스런 협련의 반응에 창군이 급히 물었다.

“왜?”

“놈들이 몰려와. 수는 대여섯. 흐음…….”

말하다 말고 이 앓는 소리를 내는 협련에게 불안한 표정의 창군이 물었다.

“강한 놈들인가?”

“적어도 초극을 뛰어넘은 놈들의 수가 넷 이상이다. 개중엔 나와 비등한 놈도 있고…….”

그 말은 정천맹이 전력을 기울여 왔다는 뜻이다. 협련의 말에 후량이 그를 바라보며 생각 외의 말을 했다.

“너, 도망가라.”

“뭐?”

“우리보다 센 놈들이 숫자까지 많다면서. 그럼 이건 해보나 마나 한 싸움이야. 난 개죽음은 싫다.”

“그러면서 왜 나보고…….”

협련의 말을 후량이 중간에서 잘랐다.

“너 혼자 잘 먹고 잘살라는 게 아니야. 어르신 내외를 구해달라는 거지. 물론 그것도 무리해서 하지는 마. 괜히 되지도 않는 일에 목숨 걸다 덧없이 죽지 말라는 말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협련이 복잡한 음성으로 묻자 후량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무슨 소리긴.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저 새끼들 목을 좀 따달라 그 말이지. 그것도 정면 대결은 안 돼. 저 새끼들은 머릿수가 많고 넌 하나니까. 철저하게 살행으로 가라. 알았지?”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협련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어찌 나 혼자만…….”

협련의 말은 뒤이어 일어선 창군에 의해 다시 막혔다.

“힘든 일 맡긴다고 싫다는 거냐?”

“그, 그게 아니잖아!”

“그러면 네가 맡아. 우리 중에 가장 가능성 높은 게 너 아니냐. 좀 고생스럽겠지만 어떡하냐? 잘난 놈이 감수해야지.”

창군까지 후량의 말에 동조하자 협련의 눈에 묽은 습막이 차올랐다.

“빌어먹을 자식들.”

그 말로 승낙을 대신한 협련에게 히죽 웃어 보인 후량이 박도를 챙겨 들며 가래침을 뱉었다.

“캬악- 퉤. 한세상 잘 살았으니 됐지, 뭐. 개썅놈의 새끼들, 이번에도 대가리 수란 말이지. 아주 아구창을 모조리 박살내 주겠어.”

셋 중 실력에선 가장 처지는 것이 후량 본인이다. 화경에 든 협련이 긴장할 정도의 적이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탓에 가장 먼저 죽음을 받아들인 후량의 기세는 사납지만 차분했다.

그런 후량의 행동 때문이었는지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을 모조리 털어버린 창군이 자신의 애병인 묵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백도란 애새끼들이 꼭 머릿수로 싸움을 해. 아구창은 후량 네가 맡아라. 옥수수는 이 묵린 님이 모조리 털어버릴 테니까.”

점잔을 떨던 평소와 달리 자신을 닮은 창군의 말투에 후량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크하하! 자식, 역시 넌 멋진 놈이야.”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던 협련이 말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복수해주마. 맹세컨대 복수가 끝나지 않는 한 죽지 않겠다.”

협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창군과 후량이 그의 어깨를 하나씩 잡고 미소를 지었다.

“부탁한다.”

장엄하고 결의에 찬 세 사람의 시선이 얽히는 순간이었다.

“네들, 경극 연습하냐?”

갑작스런 음성에 고개를 돌린 세 사람의 눈은 더할 수 없이 크게 뜨였다.

“대, 대협!”

세 사람이 동시에 지른 고함에 귀가 아프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후벼 판 고덕이 퉁명을 떨었다.

“귀 떨어지겠다, 자식들아.”

그렇게 검마, 고덕이 집으로 돌아왔다.

* * *

자신들이 정천맹의 고수들이라 착각한 이들이 고덕의 수하라는 것을 안 협련 등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고길 내외의 소식을 전하며 풀이 죽어버렸다.

한데, 길길이 뛸 것이라 생각했던 고덕의 반응이 예상외로 차분했다.

“어쩐지 내려오면서 걱정은 되었었다. 하면 놈들의 방향은 아직 모르는 게로구나?”

고덕의 물음에 협련이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협.”

“네들의 잘못이 아니다. 다 내 잘못인 게지.”

“어찌하올지……?”

조심스럽게 묻는 협련에게 고덕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찌하긴, 모셔 와야지.”

그 말에 협련 등은 일이 모두 끝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긴 고덕이 나서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일이 없었던 때문이다.

“바로 출발할까요?”

“어디로?”

“그야…….”

말을 하다 만 협련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후량을 바라봤다.

“전서를 좀 날려 보내라.”

“어디로 말씀입니까?”

“팔이에게 급히 귀가하라고 적어라.”

“산서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후량의 걱정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준비를 끝낸 저들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해오려면 시간이 필요할 게다.”

“알겠습니다, 대협.”

고개를 숙여 보인 후량이 서둘러 나가자, 고덕이 한쪽에 모여 있는 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하들이니, 서로 잘 지내봐.”

“수… 하입니까?”

협련의 말에 객쩍게 웃은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들이 마교라 부르는 곳에서 나온 이들이다. 지금은 내 사람이지.”

확신 어린 고덕의 표현에 협련과 창군의 얼굴에 옅은 질시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런 두 사람에게 고덕이 말했다.

“너희만큼 믿는 이들이니 잘 지내봐.”

그 말을 곱씹던 협련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대협.”

좀 전보다 힘찬 협련의 음성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고덕이 들어가자 협련이 사내들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수장이 누구요?”

함부로 반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긴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장이랄 것은 없고, 대표를 맡고 있소. 육지겸이라 하오.”

앞으로 나선 이는 무인이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만큼 곱상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풍기는 기도를 협련은 잡아낼 수 없었다. 그것이 협련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협련이오. 대협의 그늘에 있은 지 오 년 정도 되었소.”

치졸하지만 우위에 둘 것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협련의 말에 육지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더구나 협련 등에게 자신들을 맡기고 들어가 버린 고덕의 처사로 보아 이들의 위치가 조금은 더 중하다고 판단한 육지겸은 실력에 앞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앞으로 뭐라 불러야 할지…….”

“뭐, 선배 정도로 합시다.”

협련의 말에 사내들 속에서 침음들이 터져 나왔지만,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동료들의 분위기를 살핀 육지겸이 포권을 취했다.

“육지겸이 협련 선배를 뵈오이다.”

“앞으로 잘해봅시다, 후배님들.”

단숨에 우위를 점하는 협련의 행동에 창군은 찬탄의 시선을 보냈다. 그것은 후배들과의 기 싸움을 자주 벌여야 했던 금의위에서 젊은 날을 굴러야 했던 협련의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소 불만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던 이들은 생각 외로 쉽게 녹아들었다. 특히 전서를 날리고 온 후량이 갑자기 생긴 후배들에게 넉살 좋게도 술을 내면서 양측 사이의 거리감은 급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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