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9장 (110/129)

제109장. 현신(現身)-마룡이 출현하다

고덕은 자신의 내부를 뒤흔들며 꼬여 가는 내력이 외부의 기를 맹렬하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다.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외부의 힘이 그렇게 끌려들어갔다. 문제는 끌려들어간 내력이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찢어진 살을 되살리고, 뼈를 이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독한 고통이 고덕을 뒤덮었다. 사지 육신이 수십 차례 부서졌다 다시 만들어지는 듯한 고통이 연이어졌다.

그 고통 속에서 무섭게 외기를 빨아들인 내기가 이번엔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예전에 자신의 내공이 안정을 찾던 때와 비슷한 현상.

반가움이 고덕의 뇌리로 퍼져 나갈 때쯤 무시무시한 경력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고덕은 그 시원함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이렇게 뛰쳐나간 내력은 그보다 서너 배로 불려 다시 밀어닥치며 진정한 고통을 쏟아놓기 때문이다.

고덕의 예상은 무섭도록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잠시간의 공백 뒤로 엄청난 내력이 그대로 고덕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온 핏줄이 터질 듯 부풀고 혈맥은 찢어지기 직전까지 팽창했다. 단전은 차고 넘치다 못해 전신으로 내력을 쏟아냈다. 주요 혈맥과 혈관은 물론이고, 흘러넘친 내력이 전신 세맥과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까지 파고들었다.

꽝-

벼락이 고덕의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순간, 다른 이들은 거대한 흑룡이 고덕의 전신을 타고 똬리를 트는 광경을 보았다.

“마, 마룡이다. 마룡이 현신했어!”

광천도마의 음성에 마교 고수들의 얼굴에 환희가 가득해졌다.

마룡이 현신하면 천마의 힘이 세상을 움켜쥐리라.

천마신교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이 그들의 뇌리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탓에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고덕을 두고 광천도마와 마교 고수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웃기지 않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반드시 죽여야 해. 살려 두면 삼천에 최악의 상대가 될 놈!’

결정이 서자 불연노는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자신에게 남은 내력은 이제 삼 할. 그 내력으로는 마룡은커녕 그 속에 들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고덕의 상대도 아니 될 터. 하지만 그에겐 비책이 남아 있었다.

상고의 도존이 마신을 죽였다고 일컫는 최후의 비책, 폭혈참마공. 몸을 날리는 불연노는 자신의 선천진기를 모조리 일깨워 비책을 따라 돌렸다.

순간, 범상치 않은 기세가 고덕을 향해 몸을 날리는 불연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광천마도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 막아!”

그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마교 고수들이 거침없이 몸을 날려 불연노의 앞길을 막았다. 하지만 불연노의 기세에 부딪치는 족족 폭죽 터지듯이 몸이 폭발해 죽어나가는 마교의 고수들. 그럼에도 마교 고수들의 저항은 멈춰지지 않았다.

죽음을 불사한 그들의 저지 속에 늦춰진 불연노를 향해 모든 내력을 개방한 광천마도가 부딪쳐 들었다.

콰앙-

폭음이 길게 울렸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앗아갈 것 같은 기세를 품은 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사람이고 돌이고 흙이고, 가리지 않고 찢겨지고 분쇄되어나갔다.

그렇게 반경 백여 장이 완전히 초토화되고서야 사나운 바람은 사라졌다.

폭발의 여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 남아 있던 운 좋은 마교 고수들과 괴무인들의 시선엔 그 폐허 안에서 여전히 용트림을 하고 있는 흑룡, 아니 마룡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광혈의 주인께서 건재하시다. 나머지 놈들을 격멸하라!”

누구의 입에서 시작됐는지 모르겠지만 한 마교 고수의 외침에 남아 있던 자들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교 고수들은 자신들의 우상을 지키기 위해, 괴무인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

살아남은 이들의 대부분이 뒤에 물러나 있을 만큼 실력이 처지는 까닭인지 역설적이게도 싸움은 더없이 치열했다. 치고 박고 베고 베이는 싸움이 온 들판을 채웠다. 갈라진 배로 흘러내리는 창자를 부여잡고 적을 향해 한 팔로 권장을 뿌리는 무사들부터, 잘려 나간 팔에서 검을 빼내 남은 한 팔로 싸우는 이들까지…….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죽이기 위한 광기가 그렇게 벌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광기의 결과가 드러낸 참상은 도저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고작 수십. 그중에서 몸이 성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가 웅덩이를 이룬 피 속에 누워 고단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을 간신히 내력의 평온을 찾은 고덕이 바라보았다. 적어도 절반은 살려 돌아오마 약속을 했건만, 거의 모두를 잃었다. 더구나 그렇게 죽어간 이들 대부분이 자신을 지키려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괴감은 더욱 깊었다.

일일이 살아남은 이들을 일으키고 부축해 모았다. 그들은 곧 죽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입고서도 자신이 직접 부축한다는 것에 영광이라고 외쳐 댔다. 그 맹목적인 추종이, 그 순수한 동경이 고덕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을 추려 근처의 마을로 들었다.

사람들은 전란 통에 마을을 찾은 피투성이 사내들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의원을 찾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의원이 없다고 답했다. 사정도 하고 겁을 줘 봐도 답은 마찬가지였다.

피를 보았다. 죄 없는 민초 여덟을 베었을 때 비로소 염소수염을 단 초로인이 자신이 의원이라면서 나섰다. 그는 적을 돌봐주었다간 나중에 마을 전체가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의원임을 숨겼다고 말했다.

그에게 찢기고 잘려 나간 마교 고수들을 보였다. 의원의 실력은 시골 의원치고 나쁘지 않았다. 더러는 고덕이 보기에도 치료가 불가능해 보였던 상처마저 싸매고 꿰매 치료를 해냈다.

그렇게 외상이 치료된 이들을 고덕이 일일이 운기요상으로 살폈다. 다시 늘어난 내력에 죽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내버려 둬도 죽을 거 같은 이들부터 운기요상을 시도했다.

이전의 청여나 근래에 왕팔을 치료했던 경험 덕에 운기요상은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이전보다 수배는 더 우악스러워진 내력이 간혹 몸부림을 쳤지만, 상대를 상하게 할 정도의 위기는 없었다.

그렇게 마교 고수들을 치료하고 나서 자신이 베었던 이들을 돌봤다. 애초부터 목숨을 위할 생각을 버리고 검을 휘두른 탓에 죽은 이들은 없었다. 거기에 의원이 외상을 치료한 덕에 고덕의 운기요상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더구나 내력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라 혈맥을 쓸고 닦을 필요가 없었기에 치료는 오히려 내가 고수들인 마교의 고수들보다 빨랐다.

그 이름 모를 마을에서 삼 일을 쉬었다. 밖으로 나갔던 사내들이 성도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여전히 다른 곳에서 출발한 지원군은 도착하지 않았고, 자신들은 첫 싸움을 제외하곤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경공 왕부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저히 운신하기 어려운 이들 서넛을 제외하고 서른가량을 챙겨 마을을 벗어났다. 사지의 하나가 없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마치 굶주린 이리 떼와 같았다.

그들을 이끌고 달단군의 보급선을 쳤다. 살아 있는 것은 수레를 끄는 말을 제외하고 모조리 죽였다. 이백여 대에 이르는 수레를 이끌고 마을로 돌아온 고덕은 그 물건들 중에서 식량을 골라 마을에 풀었다.

전란의 시작에 징발당한 곡물 탓에 굶주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도 지옥 야차처럼 두려워하던 마교의 고수들을 마치 마을의 은인처럼 대했다.

그들과 어울려 마교 고수들이 술에 취했다. 아직 적의 기습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고덕은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죽어간 동료를 추모하고 잘려 나간 자신의 사지를 잊어갔다.

다음 날. 일부러 남겨 둔 수레의 흔적을 따라 일단의 달단 기마대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그들의 접근을 미리 인지하고 기다리던 고덕과 마교 고수들은 그들을 덮쳤다.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한 후 급히 도주하는 이들까지 악착같이 쫓아가 모조리 죽이고 흔적을 지웠다.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었지만 고덕은 그들을 위로하지 않았다. 지워진 흔적을 찾아낼 자들이 달단 병사들 속에도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 옳았다는 것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자그마치 일만이 넘는 달단의 기마대가 보급선을 공격한 무리를 찾아 마을로 진출했다. 고덕과 살아남은 마교의 고수 서른이 검을 들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내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한 시진 후, 그 넓은 들판이 일만에 이르는 달단 기마대의 시체로 가득 찼다. 고덕은 그 전투에서 다시 여덟의 마교 고수를 잃었다. 그리고 전투 불능에 빠진 이들도 여섯이나 나왔다. 남은 수는 이제 스물도 되지 않았다.

저물어가는 석양을 등지고, 고덕이 그 스물을 모아놓고 물었다.

“왜 돌아가지 않나?”

“광혈의 주인을, 마룡의 전인을 보필하다 죽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스물 남짓한 마교 고수들의 외침에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죽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남아 있습니다.”

“영광은커녕 비참한 최후만 있을 뿐이다.”

“그 비참함이 우리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잘리고 짓이겨진 몸으로 간신히 서서 외치는 그들을 바라보며 고덕이 웃었다.

“크하하하하.”

알수 없는 그의 웃음을 그들이 따랐다.

“크하하하하.”

그렇게 미친 듯이 웃던 이들의 뇌리로 전음이 흘렀다.

-양곡이 이 푼, 궈궐에 사 푼, 지양에 삼 푼…….

창창이 흐르는 전음이 고덕의 것임을, 자신들의 우상이 들려 주는 법문임을 알고 미친 듯이 외웠다. 그렇게 같은 내용이 세 번 반복된 후 고덕이 말했다.

“그것이 천마심공. 천마 사조가 남긴 마신의 심공이니라.”

놀라는 마교 고수들의 뇌리로 또 다른 법문이 전음으로 흘렀다.

-앙천, 이명, 곡지, 참홍 삼 푼의 힘으로 돌려 양호, 이격, 삼홍에서…….

똑같이 세 번을 불러준 고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천마참격. 천마 사조가 강호를 질타했던 일초 삼식의 패도식이다. 그 하나로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익히면 감히 맞설 이가 없으리라.”

고덕의 외침에 마교의 고수들이 일제히 부복해 외쳤다.

“만마앙복 제마결천!”

마교라 손가락질받는 이들이 만마를 누르고 마를 제압하겠노라 하늘에 약속하고 있었다. 그 장엄한 약속이 온 들판을 떨어 울리는 듯했다.

천하 최강의 심공과 도법을 전수받았다고 한가하게 익히고 앉아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달단의 보급선을 공격했고, 그들을 쫓는 추적대와 전투를 벌였다.

수십이 수백, 수천을 맞아 싸웠고, 만을 넘기는 적을 맞아 싸운 것도 세 번이나 되었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죽은 이는 없었다. 그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싸우다 안 되면 도망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암습이고 살수고 가리지 않았다. 적을 죽일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개처럼 바닥을 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길 보름. 열아홉 사신들의 몸에선 지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겼다.

그날, 오만의 달단 추격대를 고덕과 그 열아홉이 전멸시키던 날, 땅이 울고 하늘이 놀랐다.

장장 이백여 리를 치고 빠지며 죽여 나간 달단 병사의 수가 오만. 살아 도망친 이들은 삼백 리를 쫓아 모조리 죽어 없앴다. 달단군 사이에서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들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보급선은 차단되었고, 달단군은 추격대를 보내는 대신 주변 마을을 돌며 필요한 물자를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경공왕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십만이 충원된 경공 왕부의 반격은 거셌다. 보급이 원할 하지 않은 달단군은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더구나 본토의 부족들이 계속해서 죽어나가자 많은 수의 부족장이 군열을 이탈해 회군했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달단군이 감숙으로 물러나더니 이내 가욕관을 통해 달단의 땅으로 물러갔다. 그 와중에 결탁을 맺었던 척회 왕부의 감숙은 달단군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했다.

달단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약속을 믿고 병력을 모조리 남쪽으로 돌렸던 척회 왕부가 입은 상처는 상상을 초월했다. 끌려간 포로의 수가 수십만에 이를 정도였고, 죽어나간 백성의 수가 그보다도 많았다.

원성이 퍼져 나가고, 한창 전투 중이던 군영에까지 소문이 전해졌다. 척회왕과 결탁을 맺은 달단의 배신으로 가족이 죽고 포로로 끌려갔다는 소리에 하룻밤에 수백 수천의 병사들이 탈영했다.

척회 왕부는 빠른 속도로 와해되어갔다. 그런 그들을 전력을 한데 모은 경공 왕부와 영상 왕부, 그리고 소흥 왕부의 대군 사십만이 일거에 몰아쳤다.

전란 중에 척회왕의 목이 잘려 나가고, 왕부의 고위 인사들이 줄줄이 잡혀 왔다. 전세가 기울자 속속들이 투항하는 장수들이 늘었다. 척회왕의 세습권을 가진 왕자가 대항을 위해 병력을 모으러 돌아다니다 변심한 휘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한 채 토벌군에게 전해졌다.

그로써 척회 왕부가 무너졌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모조리 투항했다. 그렇게 무너진 척회 왕부의 권역으로 경공 왕부와 영상 왕부, 그리고 소흥 왕부의 병력이 각기 진주하기 시작했다.

전후 처리는 놀랍도록 빨랐다. 경공 왕부는 아직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귀주와 광서를 영상 왕부에 양보하는 대신 영상 왕부 몫으로 떨어진 섬서를 취했다. 이로써 경공 왕부는 자신들에게 떨어진 감숙과 녕하성을 포함해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그에 반해 소흥 왕부는 산서 하나를 얻는 데 그쳤다. 두 왕부에 비해 피해가 적다는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었지만, 사실 고덕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소흥왕과 호철랑이 전후 처리에 적극적이지 못한 까닭이었다.

척회 왕부로 비롯된 달단과의 전투는 종결되었다. 하지만 상처는 도처에 남아 기나긴 시간 동안 치유에 공을 들여야 하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에도 소흥 왕부의 고덕 찾기는 멈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고덕과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말도, 그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사천 일대에 사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조용히 흘러 다녔다.

하지만 경공왕은 일단의 군병을 풀어 그런 말을 퍼트리는 마을 하나를 통째로 불태워 없애는 강수로 소문을 지웠다. 그로서는 자신의 이득을 다시 돌려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까닭이다.

더구나 달단과의 전투에서 죽었다고 믿는 사람 때문에 그런 손해를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일 년, 이 년, 삼 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화창한 하늘에 봄볕이 따듯한, 어제와 별로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날이었다.

“누구?”

“호 판관, 아니 지금은 군사일지도 모르겠소.”

“그런 사람은 없소만. 이름이 뭐요? 왕부에서 벼슬은 자주 바뀌기도 하니 이름을 말해주면 내 찾아봐주리다.”

왕부의 수문 위사치고는 서글서글한 병사의 말에 사내는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호철랑… 아니면 호여랑이란 이름을 쓸 게요.”

“호철랑… 가만, 지금 산서 자사를 말씀하시는 게요?”

“산서 자사?”

자사. 명조가 들어서며 달리 순무라 부르는 일성의 최고 행정 관료를 칭한다. 흔히 성주라 부르는 자리로,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권력자다.

“호 판관이 산서 자사가 되었단 말이오?”

상대가 일성의 순무와 잘 아는 사이처럼 보이자 수문 위사의 말투가 한풀 꺾였다.

“어찌 아시는 사이이신지……?”

“친우요.”

“치, 친우요?”

“그렇소. 참, 이곳에 왕팔이란 사람이 은영이란 여인과 함께 머물고 있었을…….”

고덕의 말은 중간에 멈추어져야 했다. 사람 좋아 보이던 수문 위사가 사나운 표정으로 창을 뻗어 자신을 위협하며 호각을 불었기 때문이다.

그 호각 소리에 반응해 일단의 군병들이 왕부의 정문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모습에 사내의 입가에 고소가 지어졌다.

“무슨 일인가?”

병사들과 함께 뛰어나온 장수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묻자 수문 위사가 사내를 가리키며 답했다.

“저자가 부마와 관계된 이들의 정보를 물었습니다.”

수문 위사의 말에 사나운 표정의 장수가 사내를 향해 돌아섰다.

“어디의 세작… 부, 부마!”

놀라는 장수를 바라보며 사내, 고덕이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오, 공 장군.”

“부마!”

기쁜 음성의 장수가 떠는 호들갑을 고덕은 미소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고풍스런 응접실에 찻잔을 두고 앉은 소흥왕과 고덕은 말이 없었다.

그 적막을 먼저 깬 이는 생각 외로 고덕이었다.

“오래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고덕의 말에 소흥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왜 연락하지 않았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무슨, 어떤 시간이 필요하기에…….”

잠시 말을 멈춘 소흥왕은 간신히 격동을 참는지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 말을 이었다.

“그 아이를 잃고 더 이상 가족을 잃는다는 걸 겪고 싶지 않았네. 내게 남은 가족은… 자네가, 자네가 유일하다는 걸 아는 겐가?”

생각 이외의 말에 고덕은 놀란 눈으로 소흥왕을 바라보았다. 동생의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아니라 가족이라 말할지 미처 몰랐던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그 탓에 고덕의 음성엔 진심이 담겼다. 그런 고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소흥왕의 음성이 이어졌다.

“하포로 가봐야 할 걸세.”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었다. 자신이 소흥 왕부를 떠나던 때, 형 내외를 이곳 소흥 왕부로 옮겨 놓았던 까닭이다.

“형님이 하포로 가셨습니까?”

“막을 수 없었네. 자네 소속을 듣고는 모든 걸 포기한 모습이었지.”

“다른 이들은……?”

“협련과 창군이라던 강호인이 따라갔네.”

“왕팔과 은영 소저는 어찌 되었습니까?”

“그 둘은 호 자사를 따라 산서로 갔네. 그는 자네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소흥왕의 그 말에 왕팔이 호철랑을 따라간 것이 이해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왕팔을 앞세워 자신의 흔적을 찾으려 했을 공산이 높았다.

“그랬습니까?”

“그래. 호 자사가 미친 듯이 자네를 찾았네. 그 모습이 마치 잃어버린 정인을 찾는 여인 같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수군거림도 많았지. 그런 오해에도 불구하고 호 자사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네. 그의 우정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어디부터 갈 텐가?”

하포와 산서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고덕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하포로 먼저 가볼까 합니다.”

“호 자사가 서운해하겠군.”

소흥왕의 말에 고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그에게 소흥왕이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괜한 말을 한 모양이로세.”

“아닙니다.”

“하면 산서에는 내가 소식을 전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고덕의 답에 소흥왕은 왠지 허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연유를 물어볼까 망설이던 고덕은 결국 아무 말도 묻지 못했다. 소흥왕의 표정이 물음을 허락지 않겠다는 의지를 함께 보인 까닭이었다.

오자마자 다시 떠나가는 고덕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흥왕은 여동생이 머물던 전각 쪽으로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란다. 네가 서운해할 일도, 내가 아쉬워할 일도 아닌 것이지…….”

알 수 없는 소흥왕의 말을 뒤에 둔 고덕의 모습은 흐릿해져 결국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소흥 왕부를 벗어나 벌판으로 들어서자 고덕의 주변으로 열아홉 개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변은 마치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듯 어둠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덕은 애초의 일행이었던 듯 그들의 합류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고덕이 하포를 향해 떠나던 시기, 간신히 지난 상처를 치유하고 일어서던 정천맹은 갑작스런 소식으로 인해 혼란에 휩싸였다.

“그가, 그가 확실하다던가?”

“만일에 대비해 소흥 왕부에 심어놓았던 밀영의 보고입니다.”

“이런, 죽은 줄 알았건만…….”

여전히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독괴의 한탄에 다른 이들의 물음이 이어졌다.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정천맹이 그를 공격한 이후 급작스런 관란으로 인해 정천맹과 그, 검마와의 충돌은 뒤로 밀려났다. 그러던 와중 벌어진 검마의 실종 소식은 정천맹으로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죽었던 망령이 되살아나듯 버젓이 살아 돌아온 검마의 모습이 목격된 이상, 지난 과거에 대한 대비는 반드시 필요했다.

“지금이라면 대비는 되겠습니까?”

제검가의 신임 가주인 추풍검의 물음에 독괴의 시선이 묵묵히 앉아 있는 무당 장문인, 일성 진인을 향했다.

“이번에도 침묵할 생각이시오?”

독괴의 물음에 눈을 뜬 일성 진인이 되물었다.

“정천맹은 그를 어찌 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지난 일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었던 탓이다. 한데, 그런 독괴의 갈등을 깨끗이 깨부수는 언사가 나왔다.

“뭘 물어보시는 게요? 마두의 처단은 백도의 책무. 그 악적을 징치하지 않고 어찌 백도의 의무를 다한다 하리까!”

일성 진인이 돌아보니 예상대로 소림의 신임 방장인 구련 대사였다.

“방장께선 여전히 피를 보아야 한단 말씀이시오?”

“피라. 마두의 피를 어찌 피라 하오이까? 마두는 그저 격멸해야 할 악일 뿐이외다.”

이전 검마의 혈사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입은 것이 소림이다. 그 피해 속에서 배운 것이 있을 법도 하건만, 소림은 오히려 깨달음보다는 복수에 미쳐 있는 듯 보였다.

“무량수불…….”

기가 막힌 일성 진인의 도호에 구련 대사는 고리눈을 뜨고 그를 노려봤다. 그 탓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다. 이젠 덮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들과 소림처럼 끝을 봐야 한다는 강경론자들끼리 고성이 오고 갔던 것이다.

팔걸이를 두드려 그런 소란을 잠재운 독괴가 구련 대사에게 물었다.

“하면 소림은 그를 징치할 능력이 남아 있소이까?”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였다고는 하나 폐사엔 십팔나한과 사대금강이 존재합니다.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전의 사대금강과 십팔나한은 검마에게 모조리 쓸려 버렸다. 그렇게 비워진 자리를 새롭게 무공을 이어받은 이들로 채워 넣었다고는 하나 수십 년을 고련한 절정 고수들로 이루어졌던 이전과는 분명 손색이 있는 이들이다.

그런 이들로 검마를 도모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의욕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라 생각되오만…….”

한발 물러나는 듯 보이는 독괴의 말이 거슬렸던지, 구련 대사의 눈썹이 곧바로 곤두섰다.

“하면 맹주는 그 마두를 그냥 두자는 말씀이외까?”

사나운 구련 대사의 음성에 독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때 가장 극렬한 강경주의자였던 독괴다. 지금에서야 물러나는 모양을 보이면 꼬리를 내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그 까닭에 독괴의 말은 흐릿하기 그지없었다.

“징치를 하자니 힘에 부치니 하는 소리가 아니겠소?”

“마두를 잡다 양패구상을 한다 한들 그것이 겁나 뒤꽁무니를 빼겠다는 말씀이오?”

도가 지나친 구련 대사의 말에 독괴는 응대보다는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괜히 대꾸해봤자 검마를 잡는 것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구련 대사에게 말꼬리만 잡힐 것이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맹주인 독괴가 입을 다물자 장내는 구련 대사와 강경론자들의 음성으로 가득 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중간에 무당의 장문인과 하북팽가의 가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들로서는 소림의 독단과 검마를 향한 아집에 동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빠지자 온건론자들은 물론, 지난 피해가 부담스러웠던 일부 중문들까지 정천맹을 벗어났다. 검마의 일이 매듭져지기 전엔 다시 정천맹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심산인지, 그들은 대표조차 남겨 두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자 정천맹은 온통 검마를 타도하자는 음성으로 가득 찼다. 그렇게 되지도 않을 전력을 끌어모은다고 수십 개의 문파가 다시금 소란을 떠는 모습을 독괴와 제갈천은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저들을 그냥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제갈천의 물음에 독괴는 답 대신 똑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하면, 군사는 말릴 생각인가?”

독괴의 반문에 제갈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깃들었다.

“말린다고 듣겠습니까?”

“나 또한 그 생각일세.”

“하면 문제는…….”

“우리겠지.”

자신의 뒷말을 대신하는 독괴의 말에 제갈천이 물었다.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본가엔 여력이 남아 있지 않네. 검마는커녕 검마 사촌만 나타나도 무너지기 직전이지.”

삼 년 전, 소림을 도와 검마를 도모했다 입은 피해다. 수십 년을 기른 정예들의 대부분을 잃었고, 중요한 절기의 맥도 더러 끊겼다. 물론 무공 비급은 남았지만 심도 있게 익힌 이들이 모두 죽은 탓에 깨달음이 단절되었다.

독괴의 한탄에 제갈천도 힘 빠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갈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도를 다루는 무인들은 물론이고 다수의 석학들마저 비명에 갔습니다.”

진을 구성한다고 몰려갔다가 검마에게 몰살을 당한 까닭이다. 물경 삼백여 석학과 오백 무사를 동원했던 제갈세가는 살아 돌아간 석학이 겨우 십여 명. 살아남은 무사는 서른을 넘지 못했다.

무력으론 팔대세가의 말석을 차지하던 제갈세가로서는 이미 대외적인 힘을 모조리 상실한 셈이었다.

“하면……?”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이 맥 빠진 웃음을 보였다.

“아무래도 제갈세가는 이제 정천맹 군사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 듯합니다.”

그 말뜻을 알아들은 독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하네. 겨우 사괴의 일인이 맹주라니, 욕심이 과했던 게지.”

서로의 의중을 확인한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자 두 사람의 입가에 공히 허탈한 미소가 어렸다.

악착같이 붙잡고자 했던 명예와 권력이 자신들의 손을 덧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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