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08장 (109/129)

제108장. 달단(흝?)-축이 무너지다

한창 명군을 몰아치고 있던 달단군은 갑작스런 함성에 놀라 모두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달단군에게 성벽을 내주기 직전이었던 명군도 마찬가지.

그런 이들의 시선엔 수천의 사람이 산을 바람처럼 달려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마대?”

한 명군 장수의 물음에 그를 따르는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엔 너무 빠릅니다.”

말을 타고 산을 저리 내려온다면 십중팔구 모조리 경사를 구를 것이다. 한데, 쏟아져 내려오는 이들은 마치 산을 미끄러지듯 달려오고 있었다.

“그럼……?”

명군 장수의 두 번째 질문이 모두 마무리되기 전에 도착한 의문의 집단은 그대로 달단군 안으로 파고들었다.

쾅- 우지끈.

그리고 모든 이들의 눈에 두려움이 들어섰다.

푸확-

돌입과 동시에 수백의 핏빛 칼날, 혈인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어지간한 내력으로도 막기 어려운데, 내력이라곤 전혀 익히지 않은 달단군에게 혈인은 진실로 죽음의 사술이었다.

단 한 차례의 손짓에 수백의 달단군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고덕을 선두로 한 마교의 고수들이 그대로 당황한 달단군 병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악마의 향연이 펼쳐졌다.

순식간에 앞을 피와 시신의 바다로 만드는 고덕의 돌파력에 기댄 마교의 고수들은 일각 만에 수만의 시신을 남겨 두고 달단군을 돌파해 나갔다.

단 이각. 그 짧은 시간의 상처로 치부하기엔 달단군은 너무나 깊은 상처를 입었다. 특히 고덕의 특명으로 이백의 고수를 이끈 광천도마가 휩쓴 성벽 위는 그야말로 지옥 야차의 현신이 휩쓸고 지나간 참경이 펼쳐져 있었다.

팔다리가 성한 시신이 단 한 구도 없을 정도로 마교 고수들의 손속은 잔인했다. 당황과 놀람의 뒤로 분노가 들끓어 오른 달단군이 뒤늦게 활도 날리고 쇠뇌도 날렸지만, 적은 이미 군열을 뚫고 저만치 달아난 후였다.

그 잠깐의 전투로 달단군은 거의 차지했던 성벽을 잃었고, 성벽과 가까이 몰려 있던 삼만가량의 병사가 시신이 되어 뒹구는 피해를 입었다.

번개처럼 휩쓸고 지나간 이들의 정체를 짐작한 경공왕을 필두로 한 명군의 떠나갈 듯한 함성이 성벽을 되찾자, 달단군은 어쩔 수 없이 이천 보나 군을 물려야만 했다.

“방금 지나간 게 그가 확실하지?”

흥분한 경공왕의 물음에 역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하 총관이 들뜬 음성으로 답했다.

“얼굴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분명할 것입니다.”

“역시 대단해. 자- 저들이 있는 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더구나 지원군이 달려오고 있다. 모두 힘을 내자!”

경공왕의 고함에 잔뜩 고무된 병사들의 함성이 성벽을 떨어 울렸다.

와아아아~

* * *

달단군을 돌파한 고덕과 마교 고수들은 경공 왕부의 함성만큼이나 신나지 못했다. 이유는 그들의 뒤를 수만의 달단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은 까닭이었다.

“대협, 뒤로 돌아 저들을 치시지요.”

광천도마의 권유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선 안 돼. 놈들의 본진과 너무 가까워. 조금 더 지나서, 놈들의 본진과 거리가 떨어지면 한 번에 덮쳐 끝을 낸다.”

“예, 대협.”

고덕의 의중을 읽은 광천도마의 독촉에 마교의 고수들은 속도를 더 높였다.

그렇게 질주하는 고덕과 마교 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단의 시선들이 있었다.

“놈들이 죽자 사자 도주하는군.”

삿갓을 눌러쓴 괴인의 음성에 수하가 물었다.

“어찌하올지, 덮칠까요?”

“아니. 아직 그분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지금은 저놈을 잡을 패가 없으니 뒤만 따른다.”

삿갓 괴인의 손은 앞에서 마교 고수들을 이끌고 있는 검마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수하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주.”

잠시 후, 일만에 이르는 그림자가 달단 기마대에 쫓기는 마교 고수들의 뒤를 따라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고덕과 마교의 고수들은 달단의 기마대를 달고 반 시진가량을 달렸다. 그제야 충분히 단달군 본진과 떨어졌다고 생각한 고덕의 시선이 옆에서 달리던 광천도마에게 향했다.

그 시선에 든 의미를 알아차린 광천도마가 잔혹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애도를 꺼내들었다.

“놈들을 쳐라!”

광천도마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달리던 마교 고수들의 신형이 그대로 반전했다. 반전과 동시에 폭사되는 수많은 강기들이 그대로 악착같이 뒤를 쫓던 달단 기마대를 덮쳤다.

콰광, 쾅쾅쾅, 쿠광, 쾅쾅쿠앙-

수십 수백의 폭음이 동시에 터져 올랐다.

절정의 고수만 추려도 수백이다. 일류만 골라도 이삼천은 너끈히 넘기는 고수들이 마음먹고 뿌려 댄 검강과 검기들에 직격당한 달단의 기마대는 말 그대로 찢겨 나갔다.

그 참상 안으로 오천의 마교 고수들이 사나운 기세로 뛰어들어 살아남은 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단의 기마대를 도륙하던 마교 고수들을 향해 정체불명의 무리가 달려들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달단 기마대를 척살하느라 미처 접근하던 이들의 기세를 놓친 고덕의 경고가 발했을 때는 이미 저들의 공격에 수십 명의 마교 고수들이 죽임을 당한 연후였다.

이내 잡아 죽이던 달단 병사들을 두고 뒤로 물러난 마교의 고수들이 전력을 가다듬었다. 그런 이들의 앞으로 고덕과 광천도마가 나섰다.

“뭐하는 놈들이냐?”

호령을 터트리는 광천도마의 팔을 고덕이 잡았다.

“네가 익히 아는 놈들이다.”

“제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광천도마의 뇌리로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혈괴삼마를 보낸 이들을 생각한다면 제대로 짚었다. 전임 교주를 잡아먹은 그놈들이니까.”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접한 궁금증은 뒤로 미루기로 했는지 광천도마의 얼굴 가득 떠올랐던 경악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 그의 앞으로 불길한 기운을 퍼트리는 노인 둘이 나섰다.

“자네가 검마인가?”

“어째 그쪽에서 오는 놈들은 무조건 하대야?”

검마의 받아침에 노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소문대로 재미있는 젊은이로군.”

“젊은이? 네 눈엔 내가 젊어 보이나?”

“세월의 힘이 길어야 오 갑자 남짓. 이제 육십이라면 젊은이가 아니겠나?”

노인의 말에 흥미로운 표정이 된 고덕이 물었다.

“그렇게 말하는 늙은인 꽤나 나이를 먹은 모양이야?”

“나? 나야 좀 먹었지. 열 갑자가 지난 지 좀 되었으니?”

열 갑자면 백이십이다. 그 나이대의 고수를 되짚었지만 딱히 생각나는 이가 없었다.

“뭐, 그 나이대의 이름난 이를 찾는다면 헛수고라 말해주고 싶군.”

“그럼, 대기만성인가?”

늦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어 대성했냐는 말이다. 그 말을 알아들었던지 노인이 답했다.

“그보단 은거기인이 맞겠지.”

“은거기인은 무슨…….”

말은 그리해도 고덕은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그간 자신을 찾아왔던 이들 중에 최강자는 누가 뭐라 해도 혈괴삼마의 수좌인 혈괴일마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노인은 결단코 그보다 한 수 위가 분명했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잘게 떨리는 자신의 근육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은거한 것도 아니니 은거기인이라 말하기도 우습지. 그나저나 뭘 그리 떠나.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 것을…….”

“아, 이거. 힘들어서 그래. 아까부터 죽자고 뛰어다녔거든. 늙은이가 이렇게 뛰었으면 지금쯤 퍼질렀을 텐데, 안타까워.”

지친 자신을 노리지 말라는 격장지계였지만, 상대는 넘어가지 않았다.

“지친 사냥감이라. 힘을 빼지 않아도 좋으니 나름 나쁘지 않군그래.”

“제길, 도대체 뭐하는 늙은이야?”

“말해도 모를 텐데.”

“그건 내 사정이고.”

“뭐 그렇게라도 시간을 끌고 싶다니……. 불쌍해서라도 응해줘야겠지. 가만있자. 뭐라 할까? 불연노(不緣老)라고 하면 알라나?”

“누구?”

“불연노. 그렇게 부르던데, 아닌가?”

노인의 말에 광천도마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서, 설마 백교의 난을 평정했다는 그 불연노?”

사십 년 전 강호를 피로 쓸었던 백교를 막아낸 장본인이다. 소문엔 백도의 정예가 양패구상하며 막아냈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웬만한 대문파의 수뇌들은 다 안다.

그에게 붙여진 불연노란 이름은 당시 그가 이무 곳에도 연이 없는 늙은이라 자신을 밝힌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시 그 이름이 가장 빠르군.”

“하, 한데 당신이 어떻게……?”

“뭐, 제 삼의 세력에서 얼굴을 내미느냐 그런 건가?”

“그, 그야…….”

뭐라 답을 하지 못하는 광천도마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인 노인, 불연노가 말을 이었다.

“원래 내 집이 이곳이니까. 집 앞마당이 시끄러우면 나와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일세.”

차분한 불연노의 답에 고덕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늙은이도 삼천인가 하는 놈들과 한패란 건가?”

“삼천이라……. 암천주가 벌인 일이긴 하나 이제 우리도 손을 담그게 되었으니 달리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지.”

상대의 말에서 언젠가 호철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삼천이니 세 개의 세력이 모인 곳이 아니겠냐고 하던…….

“암천? 그럼 늙은인 백천 소속인가?”

“하하하, 삼천에 백천이란 곳은 없네. 노부야 혼천에 속해 있지.”

그로써 두 곳의 이름이 밝혀진 셈이다.

“하면 나머지 하나는 뭐지?”

“그곳은 노부조차 입을 담을 수 없는 곳.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에게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지가 죽을 건 생각 안 하는군.”

고덕의 말에 불연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총의 무학이 깊기는 하나 그것이 최강은 아닐 터.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만한 능력은 있으니까. 왜? 한번 시험해볼 생각인가? 늙은이.”

“크크크, 이제 쉴 만큼 쉬었다 그건가? 그렇다면 어울려 봄도 나쁘지 않겠지.”

말과 함께 한 걸음 앞으로 나서는 불연노에게 삿갓을 눌러쓴 괴인이 물었다.

“노야, 저희는 어찌…….”

“기다리거라. 어차피 저 물건을 치워야 피라미들을 잡을 것이 아니더냐?”

“하오나 제게 내려진 명이…….”

“허허, 주인을 닮아서냐? 어찌 암천의 것들은 이리 급한지…….”

“송구합니다, 노야.”

자신과 자신의 주인을 싸잡아 비난했지만 삿갓의 괴인은 감히 발작하지 못했다. 눈앞의 노인은 암천주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거인 중의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쯔쯔, 주인의 명을 좇는 것이 사냥개의 본분이니 그 또한 막아선다고 되는 것은 아니겠지. 하면 넌 네 일을 보거라. 저 물건은 내가 맡아줄 테니.”

불연노의 말에 삿갓의 괴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무엇이냐?”

“저자도 소인의 능력 밖인지라…….”

삿갓 괴인이 가리킨 이는 광천도마였다. 그를 확인한 불연노의 입가에 불편한 미소가 어렸다.

“네놈이 손 안 대고 코를 풀려 하는구나.”

불연노의 말에 삿갓 괴인의 고개가 숙여졌다.

“송구합니다.”

“허허, 할 수 없는 일이겠지. 내가 맡아 보마.”

“감사합니다.”

저들끼리 사람을 나누는 행태에 고덕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데 반해 광천도마는 마치 그대로 해야 하는 사람처럼 고덕의 옆에 다가와 섰다. 그런 광천도마를 고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고덕이 물었다.

“뭐냐?”

“예? 그게… 저자를 막자면…….”

“지랄하지 말고 떨어져. 놈들의 수가 많으니 애들이나 챙겨.”

“하지만 저들이…….”

광천도마의 걱정 어린 음성에 고덕이 혀를 찼다.

“쯧, 넌 적이 하자는 대로 할래?”

“그, 그야…….”

“가. 가서 애들이나 챙기라고.”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 뒈져도 혼자 안 죽을 테니까 괜히 도와준다고 끼어들지 말고.”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너 몇 번씩 말 시킬래?”

“아, 아닙니다.”

당황해 물러나는 광천도마의 모습에 불연노가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그래도 되겠나? 이미 어려운 걸 느끼고 있을 텐데?”

“뭐, 내력은 어느 정도. 한데 말이오. 나한텐 늙은이가 모르는 비밀이 한 가지 있어서 말이오.”

“비밀이라……. 이 상황에서 믿을 만큼 강력한 비밀이면 좋겠네.”

“실망하진 않을 거요.”

비틀린 고덕의 미소에도 불구하고 불연노의 입가엔 여전히 담담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뭐, 좋을 대로.”

그 말을 신호로 삿갓 괴인의 손이 올려졌다가 내려졌다. 순간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만의 무사들이 일제히 마교 고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자- 화끈하게. 가자!”

상대의 전의 때문인가? 어느새 기백을 다시 찾은 광천도마의 음성에 마교 고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마주 돌진했다.

와아아아~

곧바로 양측이 충돌하고, 피가 튀었다. 일만 대 오천이라는 숫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교의 고수들은 그다지 밀리지 않았다. 적어도 마교에서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 다수 포함된 까닭이다.

물론 그 이름만으로 치가 떨린다는 마교의 상위 이 위 안에 드는 전투 집단이 빠졌다지만, 그들의 공백을 채울 만큼 능력 있는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아비규환의 장을 연출하는 수하들의 싸움에 불연노는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고덕도 마찬가지. 수적 열세가 분명하나, 광천도마란 희대의 고수가 있는 마교가 그다지 쉽게 밀리지 않을 것을 짐작한 까닭이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가는지, 광천도마가 날뛰는 곳 근처에선 괴무인들의 피가 솟구칠 뿐 누구도 감히 그의 거친 도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 어디, 그 비밀을 풀어놔 볼 텐가?”

말의 끝을 불연노의 손길이 따라왔다. 분명 오 장 이상 떨어진 그이건만 상대의 기세는 벌써 지척이다.

놀란 고덕은 명혼을 세워 검막을 쳤다.

따당-

마치 쇠가 쇠를 두드리는 소음이 검막에서 흘러나왔다.

한데, 문제는 그 소음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당, 따다다다따당, 땅땅-

무려 십여 번의 소음이 더 일어난 뒤를 무서운 경력이 때렸다.

콰광-!

자그마치 삼 장을 미끄러졌다. 물론 상대의 권세를 모두 막아내긴 했지만 그것은 작은 손짓에 불과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자- 강호의 선배로서 제대로 해야 한다는 훈계를 내린 것일세. 이제부터 시작이니 잘 받아보게.”

기분 나쁜 말을 던진 불연노의 팔이 중심을 타고 휘돌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무당의 면장이 시작될 때 그려지는 태극의 형상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휘돌다 튀어나온 강기의 힘은, 면장은 이름도 못 내밀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꽈앙-!

커다란 망치로 쇠를 때리는 음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명혼이 안으로 깊이 밀려들어왔다. 검막을 친 명혼이 뒤로 밀린다는 것. 그것은 순수한 힘에서 상대에게 밀렸다는 뜻이다.

역시나 예감대로 상대의 내력은 자신과 비교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내 이를 악문 고덕의 명혼이 뒤따라 들어오는 불연노의 권격을 향해 휘둘렸다.

따당-

퍼걱이나 스걱이 아니 따당이다. 역시 쇠로 쇠를 치는 음향이 터져 나온 것이다. 더구나 이번 것은 공간도였다. 그 말은 공간이 열리기도 전에 상대의 권력에 휘말렸다는 뜻.

소름처럼 훑고 지나가는 전율과 함께 한 줄기 식은땀이 고덕의 등을 타고 흘렀다.

내력에서 밀리는데 수세에 처해 있다면 그건 죽은 목숨이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은 고덕이 명혼을 빠르게 휘둘렀다.

순간 불연노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달무리가 어렸다.

“허허, 현월이라…….”

불연노의 음성이 끝나기도 전에 달무리에서 튀어나온 현월들이 그에게 밀어닥쳤다.

픽, 푹톡팍-

절대로 현월이 낼 수 없는 음향을 남기며, 파란 상현달들이 불연노의 손에서 터져 나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고덕은 놀람 대신에 투지를 불태웠다.

“웃차.”

다시금 고덕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상단에서 하단으로 벼락처럼 움직인 고덕의 검이 공간을 베어냈다. 극쾌의 쾌검 섬혼의 능력을 빌은 공간도가 불연노의 대응 이전에 공간을 베어내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고덕의 입가에 그려진 회심의 미소는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현월을 모두 터트린 불연노의 손이 태극의 문양을 그리는 순간, 벌어지던 공간이 다시금 아물어버렸던 것이다.

있을 수 없는 괴사에 고덕의 눈이 휘둥그레질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린 불연노의 손에서 한 줄기 강기가 튀어나왔다.

무서운 속도로 짓쳐드는 강기에 놀란 고덕이 명혼을 들어 다시 검막을 쳤지만, 검막을 구성한 강기는 마치 유리 깨지는 것 같은 소리를 남기며 힘없이 부서져 나갔다.

쩌쩡-

섬보가 펼쳐졌다. 이형환위보다 빠르다는 보법이 순식간에 고덕의 신형을 십여 장이나 뒤로 당겼건만, 뺨을 가늘게 스치고 지나가는 강기의 끝은 피하지 못했다.

주르륵.

살짝 베인 것에 비해 피가 많이 흘렀다. 그 말은 상대의 강기가 거죽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들어 혈관을 베어냈다는 말이다.

단 반보만 덜 물러났더라도 뺨에 상처를 남기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한번 발동되면 최소 십여 장을 이동하는 섬보의 제약이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순간이었다.

“아쉽군.”

불연노의 말에 고덕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게.”

“그나저나 그 비밀이라는 건 도대체 언제 꺼내 보일 생각인가? 죽은 다음엔 소용없을 텐데 말이야.”

불연노의 빈정거림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게 좀 시동이 늦게 걸려서 말이야. 그러니 비밀 아니겠어.”

“그랬던가? 하면 조금 더 몰아붙여 주지. 빨리 시동이 걸리게 말이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불연노의 장심에서 시뻘건 강기 두 줄기가 뻗어나왔다. 한 줄기도 간신히 피했건만 두 줄기가 동시에 튀어나오자 고덕은 입술을 깨물며 재빨리 검막을 치고 섬보를 펼쳤다.

쩌정-

또다시 유리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막을 형성한 강기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모습을 미처 다 확인하기도 전에 발휘된 섬보가 고덕의 신형을 뒤로 끌어당겼다.

스걱-

섬보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펼치고서도 앞섶을 붉게 물들이며 방울져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아야만 했다.

“제길, 더럽게 빠르군.”

고덕의 불퉁거림에 희미하게 웃어 보인 불연노가 말했다.

“조금 더 빠른 것이 있지. 한번 견식해 보게.”

말과 함께 휘둘러진 불연노의 장심에서 이번엔 세 개의 강기가 튀어나왔다. 이를 악문 고덕의 신형이 처음부터 펼쳐진 섬보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한데, 이번엔 조금 이상하다. 뒤로 밀려나던 고덕의 신형이 중간에 급격히 꺾이며 좌측으로 이동했다.

퍼걱-

불연노가 날린 강기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지만, 느닷없이 좌측으로 이동한 고덕의 손은 근처에서 움직이던 괴무인들 중 한 명의 머리를 산산이 부숴놓았다.

“흐음…….”

그 모습을 바라본 불연노의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먹이를 놓친 것이 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괴무인이 죽임을 당한 것에 화가 나서도 아니다. 저들이야 모두 죽는다 해도 그다지 신경 쓸 일도 아닌 터. 그럼에도 침음이 흐르는 것은 자신의 손속을 피하면서도 다른 이를 죽일 정도의 여유를 고덕이 찾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공격이 오로지 직선적이라는 허점을 파악했다는 뜻. 그것이 불연노의 마음을 흔들었다.

“네놈이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오냐, 원한다면 들어주마!”

분기 가득한 음성을 따라 불연노의 장심에서 예의 붉은 강기가 다발로 튀어나왔다.

“제길.”

고덕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기들이 향하는 방향이 모두 제각각인 탓이다. 그것은 강기들이 노리는 곳이 모두 다르다는 말. 재수 없이 붉은 강기가 향하는 곳으로 피했다간…….

걱정은 뒤에 할 일이다. 코앞으로 뛰쳐나온 강기를 피해 섬보가 펼쳐졌다.

퍼벅-

자그마치 이십 장을 물러났다가 좌우로 수도 없이 이동했다. 나중엔 섬보에 공간권까지 섞어 사용했음에도 어깨와 허벅지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헉헉헉-”

너무 많은 내력을 써서 힘든 게 아니다. 내력을 너무 빠르게 돌리다 보니 힘든 것일 뿐.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입었다. 여기서 내력을 더 빨리 돌렸다간… 근육이 견디지 못할 공산이 컸다.

“개처럼 헐떡이는구나.”

상처는 자신이 입었는데 화는 불연노가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고덕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깃들었다.

“왜, 제대로 안 되니 속상한가?”

“미친놈!”

차분하던 불연노의 음성에 날이 섰다. 분노하고 있다는 뜻. 그것은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은근히 겁을 먹었던 마음이 햇살에 녹는 눈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고덕 특유의 자신감이 고개를 들었다.

“더 꺼내놓을 게 없나?”

고덕의 빈정거림에 불연노는 다시금 붉은 강기를 쏟아냈다. 마치 그것뿐이 모르는 사람처럼…….

또다시 섬보로 미친년 널뛰듯 뛰어다니던 고덕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스핏-

낮게 날아 불현듯 코앞에서 일어선 현월이 다급히 물러서는 불연노의 앞섶을 자르고 지나갔다. 순간, 사방에서 죄어오던 붉은 강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호~”

고덕의 입에서 기성이 튀어나왔다. 상대의 약점을 또 하나 찾아 든 까닭이다.

그 모습이 불연노의 역린을 건드린 모양이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그의 전신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죽여 버린다!”

불연노의 이 갈리는 음성과 함께 거대한 화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아드는 속도는 둘째 치고, 주변 전체를 진동시킬 만큼 강력한 기세가 먼저 고덕을 덮쳤다. 이건 마치 호랑이가 먹이를 두고 터트리는 포효 같았다. 전신이 떨리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 생경한 느낌이 고덕이 그렇게 깨우려던 악마의 숨결을 흔들어 깨웠다.

천천히 흐르던 고덕의 내기가 일제히 꼬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인 내력이 자신을 덮친 경력을 그대로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덩치를 불린 내력으로 인해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고덕을 불연노가 발출한 화룡이 집어삼켰다.

그 광경에 모든 이들의 손이 멈춰졌다.

“화, 화룡일격!”

누군가의 입에서 전설 속의 무공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

광천도마의 부정이 곧바로 튀어나올 만큼 화룡일격은 전설 속의 전설에나 등장하는 무공이다. 절대로 현신할 수 없는 신의 무공. 그 무공이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놀라고 또는 경악하는 가운데 누구 하나 고덕의 생존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화룡일격을 만들어낸 불연노도 마찬가지.

한데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불연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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