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장. 관란(官亂)-외세를 막다
혈괴삼마를 베어버린 지 칠 일이 지났지만, 상대는 더 이상의 도발을 가해오지 않았다.
그것이 안심이 되었던지, 아니면 약속한 보름이 다 찼기 때문인지 경공왕은 담담한 신색으로 고덕의 출발을 지켜보았다.
왕팔과 호철랑, 거기에 은영까지 따라붙은 고덕 일행은 차가운 겨울 삭풍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시월의 마지막 날에 사천을 벗어나고 있었다.
사천을 벗어나자마자 고덕은 두 여인을 양팔에 끼고 경공을 펼쳤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둘 중 한 명을 업고 가겠다는 왕팔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묵살한 고덕의 속도는 왕팔이 홀로 전력을 다해서도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런 고속 이동 덕인지 고덕과 일행이 소흥 왕부가 위치한 절강성까지 걸린 시간은 채 육 일이 넘지 않았다.
그 후유증으로 두 여인이 한동안 멀미를 했다는 점과 왕팔이 약간의 내상을 입었다는 것을 빼면 여행은 사소한 다툼 하나 없는 편안한 것이었다.
경공왕의 친필 서한과 더불어 도착한 호철랑의 서신대로 이미 움직이고 있던 소흥 왕부는 호철랑의 귀환으로 그 움직임에 속도가 붙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연수에 합의한 영상 왕부였다.
영상 왕부의 명을 받은 후군도독부의 십만 병력이 왜구의 토벌을 광동과 복건 두 성의 향방군에 일임한 채 급거 이동하여 호북으로 들어선 것이다.
소흥 왕부의 세력권인 호북성은 그렇게 들어선 후군도독부의 정병을 막아서는 대신 길을 열고, 군량을 조달해주어 그들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고속으로 이동한 후군도독부의 정병이 척회 왕부인 섬서성의 경계를 넘어섰다. 미처 선제공격을, 그것도 소흥 왕부가 아니라 멀리 떨어진 영상 왕부에게 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척회 왕부로서는 대단히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기에 척회 왕부는 소흥 왕부를 향해 검을 갈고 있던 이십만에 달하는 전군도독부의 병력 절반을 돌려야만 했다.
양측이 곧 전투를 벌일 것 같은 긴장에 휩싸이자, 그간 하남으로 이동 배치되어 대기하고 있던 중군도독부가 소흥왕의 명으로 섬서 중부를 통해 척회 왕부의 세력권에 발을 디뎠다.
놀란 척회 왕부는 남겨진 전군도독부 잔여 병력 십만을 그들에 대응시켰다. 또한 뒤에서 세를 불리고 있던 달단의 참전을 독촉했다.
결국 십일월의 중반에 들어서자 가욕관을 무혈 통과한 사십만에 육박하는 달단의 기병이 경공 왕부가 도사리고 있던 사천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달단의 대병을 맞아 경공 왕부는 좌군도독부와 청해, 사천의 향방군을 모조리 동원하여 철철히 수성을 통한 지연전을 펼쳤다.
경공 왕부의 대응에 달단의 대병이 애초에 계획했던 속도를 내지 못하는 동안, 동북어위도총부에 속한 우군도독부 이십만 정병이 요녕을 떠나 달단의 땅에 들어섰다.
그렇게 달단의 땅에 발을 디딘 우군도독부의 병력은 대부분의 장정이 떠난 달단의 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며 전진했다. 놀란 달단의 부족들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우군도독부 병력의 진격이 달단의 땅 깊숙이 이어질수록 피난 행렬은 길어졌다. 그리고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한창 사천에서 날뛰고 있던 달단의 병영까지 들어갔다.
소문을 들은 부족장들이 당황한 모습으로 칸에게 달려왔다. 그들로서는 원한에 사무친 한족 놈들을 죽여 없애는 것보다 자신들의 부족을 지켜야 하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칸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이 사천을 박살내고 중원으로 뛰어들면 자신들의 땅에 들어서 있는 한족 놈들의 병력도 결국은 자신들을 막기 위해 중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칸의 결정에 부족장들은 할 수 없이 자신들의 병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은 무섭도록 사나와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천의 방어를 깨고 중원으로 달려 들어가야 했던 까닭이었다.
그런 달단 대병의 총공세를 막아야 했던 경공 왕부의 사정은 대단히 위급했다. 겨우 십칠만의 병력으로 사십만, 그것도 모두가 기병인 달단의 병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호철랑의 전언으로 미리 대비해두지 않았다면 절대로 초기 방어조차 성공하지 못했을 정도로 달단군의 공격은 거칠고 무서웠다.
“이렇게 가다간 뚫리고 말겠어. 도대체 지원군은 어디에 있는 건가?”
전선을 시찰 중이던 경공왕의 물음에 수행하고 있던 하 총관이 답했다.
“오늘 아침에 온 기발에 의하면 영상 왕부가 지원한 호남 향방군 오만이 흥문에 접어들었다 합니다.”
“흥문이면 사천의 최남단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왕야.”
“그곳부터 이곳까지는 얼마나 걸리겠나?”
“이동속도로 보아 오 일은 더 걸릴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오 일이라……. 미치겠군. 그 안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 오 일을 무슨 수로 버틴단 말인가. 다른 지원군들은? 소흥 왕부에서 보내준다던 호북성 향방군은 왜 소식이 없어?”
서슬이 퍼런 경공왕의 물음에 어두운 표정인 하 총관의 답이 이어졌다.
“소흥 왕부에서 지원한 호북성 향방군은 이쪽으로 이동 중에 후군도독부의 후미를 치기 위해 기동하던 섬서성 향방군과 조우하여 전투 중이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뒤를 받치기로 했던 하남성 향방군은?”
“그들은 산서성 향방군을 묶어두기 위해 산서성으로 급파되었다고 합니다.”
“산서성? 산서성은 동북어위도총부에서 맡기로 한 거 아니었나?”
경공왕의 물음에 곤혹스런 표정이 된 하 총관이 답했다.
“동북어위도총부는 요녕성과 길림성 향방군을 집중하여 그들과 접경한 달단 지역에서 대기 중이랍니다. 도총부의 전언에 따르면 달단 병력이 회군하면 그들을 요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겠답니다.”
“미친 것들. 이곳이 뚫리면 그쪽에 있는 병력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나. 흑룡강성 병력은 왜 안 움직이고?”
“조선과의 국경을 비워둘 수 없다고…….”
과거부터 동이라 불린 반도의 작은 나라는 그 좁은 땅덩어리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신경 쓰이는 나라였다.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하면 달단과는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것이었기에 그 부분에서는 경공왕도 불만만 터트릴 수 없었다.
“하면 다른 병력이라도 움직이라고 영상과 소흥 두 왕부에 전해!”
“이미 그리하였습니다만…….”
“왜?”
“소흥 왕부나 영상 왕부 모두 그 전언에 따라 남부의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만, 시일이…….”
하긴 코앞이라 생각하는 흥문에서 전선에 도착하는 시간만도 오 일이 걸리는 상황에서 그보다 먼 곳의 병력은 있으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제길, 빌어먹을!”
욕설만 쏟아내는 경공왕은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런 주군을 바라보는 하 총관의 표정은 대단히 어두웠다. 주군의 걱정대로 이대로 가다간 자신들이 먼저 달단의 대병에 흔적도 없이 휩쓸리게 생긴 까닭이었다.
* * *
경공 왕부의 위기를 영상 왕부와 소흥 왕부가 손을 놓은 채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공 왕부가 뚫리면 곧바로 자신들의 세력권으로 달단의 대병이 뛰어들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영상 왕부는 물론이고 소흥 왕부도 동쪽에 치우친 관할지에서 향방군을 차출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강소와 절강 향방군에서 절반씩 차출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첨의 보고에 소흥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절반만?”
“왜구의 침탈에 대비하자면 병력을 모두 뺄 수 없었습니다. 왕야.”
이첨의 답에 소흥왕의 표정에 답답함이 떠올랐다.
“여태 왜구의 침습을 격멸하지 못했다니, 도대체 후군도독부는 그간 뭘 한 건지…….”
원래 후군도독부엔 명나라 최대의 수군인 남양함대가 소속된다. 후군도독부 본연의 임무가 왜구의 수탈을 격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 후군도독부는 왜구와의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주력 세력인 후군도독부가 왜구와의 전투로 소모될 경우 다른 왕부와의 세력 싸움에서 밀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영상 왕부가 후군도독부의 병력을 아낀 까닭이다.
물론 소흥왕도 그런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저 답답하기에 내뱉는 것뿐. 그 까닭에 소흥왕의 입에선 곧바로 대책을 묻는 물음이 이어졌다.
“하면 방법이 없는가?”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이 답했다.
“일단은 저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낼 계책이 필요합니다.”
“계책? 계책만으로 저들을 막을 수 있겠나?”
소흥왕의 기대 어린 물음에 호철랑의 시선이 고덕에게 향했다.
“고 대협에게 방법이 있을 줄 압니다만…….”
호철랑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 대해선 분명히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호철랑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거론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속 내용을 모르는 소흥왕은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고덕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
“그것이…….”
“어려운 일이 있거든 말만 하게. 가능성만 있다면 내 무엇이라도 내어줌세.”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고소를 지어 보이는 호철랑을 사납게 노려봐준 후 맥 빠진 음성으로 답했다.
“달단의 병사들을 격멸하는 것이 아니라 당분간 잡아둘 수 는 있을 듯합니다만…….”
“오오~ 그래. 무언가, 그 방법이?”
초롱초롱 빛내며 묻는 소흥왕의 두 눈이 연화, 그녀와 무척 닮았다는 것에 고개를 내저은 고덕이 답했다.
“강호의 무리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강호의 무리를 이용한다? 정천맹 말인가?”
그간 관에 협조한 강호의 무리라고 해봐야 가뭄에 콩 나듯이 협조한 정천맹이 다였기 때문이다. 그런 소흥왕의 물음에 고덕의 고개가 저어졌다.
“아닙니다. 천마신교라고…….”
“천마신교? 흐음… 교라니, 사교 집단인가?”
맹목적인 이유로 덤벼드는 종교는 무섭다. 특히 사교 집단이라면……. 그래서 관의 입장에서 사교 집단은 잠재적인 반란 집단일 뿐이었다. 그 걱정을 알기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강호의 무리일 뿐입니다.”
“강호의 무리라…….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겠지. 한데, 그들만으로 정녕 달단의 대병을 붙잡을 수 있겠나?”
“단지 혼란을 야기해 붙잡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더 기다릴 것도 없네. 즉시 움직여 주게. 지금은 단 일각이 급함세.”
소흥왕의 말에 다시 한 번 호철랑을 노려봐준 고덕은 그길로 왕부를 벗어났다.
* * *
깊은 야밤. 며칠 만에 잠이 들었던 혈마는 섬뜩한 살기에 놀라 침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임에도 그의 손에선 어느새 자신의 애도가 시퍼런 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혈마를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비틀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놈. 겁은…….”
“누, 누구냐?”
“내 목소리도 있은 게냐?”
음성과 함께 천천히 창문을 통해 비춰지는 달빛 아래로 나선 것은 고덕의 모습이었다.
“대, 대협!”
불안감이 넘쳐흐르는 음성이다. 거기다 격랑에 흔들리는 일엽편주처럼 눈동자도 심하게 떨렸다.
“그리 겁 많은 놈이 왜 그런 일을 벌인 거냐?”
양쪽 귀를 잃고 광천도마가 귀환한 이후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하며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었다. 그 탓이었을까? 정말로 그 일이 벌어지자 놀랐던 마음은 곧바로 가라앉고, 우습게도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 까닭이었을까? 혈마가 도를 저만치 걸린 도갑에 던져 넣었다.
“뭐냐? 기예를 보여 줄 생각이냐?”
“어차피 도 하나 들었다고 대협의 손에서 살아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요.”
“하면, 곱게 죽겠다?”
“칼을 치신다면 받겠습니다.”
생각 외로 순순한 혈마를 지그시 바라보던 고덕이 물었다.
“이럴 걸 왜 그따위 일을 벌인 거야?”
“두려웠으니까요.”
“뭐가?”
“대협의 힘, 광혈의 광기가 말입니다.”
“광혈의 힘이 아무 이유도 없이 널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저 하나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럼 교를 위해 한 일이다?”
“적어도 교는 이미 대협을 배신했으니까요.”
혈마의 답에 고덕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결정도 네놈이 한 게 아니더냐?”
“그… 렇습니다.”
“한데 무슨 교를 핑계로 대긴…….”
듣고 보니 그렇다. 모두가 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 때문인 것을…….
“그러고 보면 다 제 욕심 때문인 모양입니다.”
“네 욕심?”
“예. 교를 완벽히 장악한 교주가 되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
하긴 자신이 살아 있다면 혈마가 천마신교를 완벽히 장악하기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특히 자신이 교의 재건에 방파제가 되어주었던 일을 결부시킨다면 더욱이…….
“미친놈…….”
말은 그리했어도 비난만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성공했다면 천하의 효웅이 되어 있을 테니까. 시대의 지배자는 그렇게 태어난다는 것도 알고 있기에 고덕은 더 이상 혈마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그 탓에 지난 일은 묻고 자신의 용무를 꺼냈다.
“애들 좀 모아 봐라.”
뜬금없는 고덕의 말에 혈마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애들 좀 모아 보라는데 표정이 왜 그래?”
“애, 애들은 어디다 쓰시려고……?”
“잠시 몸 좀 풀 일이 생겼다.”
“저기… 복수는 안 하십니까?”
잔뜩 주눅이 든 혈마의 물음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미련한 놈. 아쉬운 소리 하러 온 사람이 복수하는 거 봤냐?”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애들 좀 내놔. 빠릿빠릿하고 드센 놈들로, 한 오천 정도. 다는 아니지만 절반 이상은 제대로 돌려줄 테니까.”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혈마의 물음에 고덕이 씩 웃었다.
“그래. 전쟁을 좀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제 삼의 세력이라면 그 정도로는 어려울 겁니다.”
삼천을 의미하는 혈마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걔들하고는 나 혼자 계산 볼 일이니 네들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아.”
“하면… 정천맹입니까?”
“미련한 놈. 어찌 생각하는 것이 그 짝인지. 생각 좀 넓혀. 지금 저 아래서 죽고 죽이는 게 안 보이더냐?”
“저 아래면… 달단의 침입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나, 그 일은 관부의 일이온데 어찌…….”
“멍청한 놈. 관부의 일에 죽어나가는 건 힘없는 교도가 아니더냐?”
“그야…….”
교도들은 대부분 신강과 청해에 모여 산다. 하지만 사천에 교도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개중엔 분명 이번 전란에 죽어나가는 이들도 있을 터였다. 그 탓에 답을 잇지 못하는 혈마에게 고덕이 핀잔을 주었다.
“뭘 그러고 서 있어. 애들 좀 모으라는데도. 네가 흘릴 피도 그들이 흘릴 피로 상쇄해준다잖아.”
몰론 그런 말은 지금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 말 안에 숨은 뜻을 못 알아들을 정도로 혈마가 어리석은 건 아니었다.
“대, 대협!”
“나 그만 찾고, 애들부터 모아. 벌써 몇 번째 이 말인지 모르겠다.”
조금은 붉어진 고덕의 얼굴에서 그가 얼마나 겸연쩍어하고 있는지 알아본 혈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 알겠습니다. 곧, 무사들을 소집하겠습니다.”
황급히 혈마가 달려 나간 후, 마뇌가 모습을 드러냈다.
“속하를 죽여주십시오, 광혈의 주인이시여.”
무릎을 꿇고 죽음을 청하는 마뇌를 지그시 노려보던 고덕이 답했다.
“네놈을 죽인다고 나아지는 건 없겠지. 하나, 다음에 또 내게 검을 겨눈다면 네놈은 결코 살아남지 못해. 아니, 네놈과 연이 있는 것들이라면 빌붙어 사는 빈대 한 마리까지도 찾아내 결단코 찢어죽일 테니까.”
“며, 명심하겠습니다, 광혈의 주인이시여.”
“가. 꼴 보기 싫으니까.”
고덕의 말에 마뇌는 무릎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고덕은 근 오천에 이르는 마교의 무인들을 이끌고 신강의 천산을 벗어났다. 그가 소흥 왕부를 나선 지 사흘이 지나는 시점이었다.
* * *
주변에 흩어진 성들은 모조리 버렸다. 결국 성도까지 물러난 경공 왕부의 병력은 결사의 각오로 성도의 성벽을 의지해 달단의 대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병력은?”
경공왕의 물음에 하 총관이 답했다.
“칠만을 간신히 넘기옵니다.”
좌군도독부와 청해, 사천의 향방군을 합쳐 십칠만의 병력으로 달단의 침입을 막아섰었으니, 단 십여 일 만에 십만에 이르는 대병력을 잃은 셈이었다.
“빌어먹을……. 호남성 향방군은 어디에 있나?”
“아직 내강을 지나지 못하였사옵니다.”
“삼 일 전에 흥문이었다면서 삼 일 동안 전진한 게 고작 내강에도 못 미친단 말인가?”
불같이 분노하는 경공왕에게 하 총관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것이… 우리를 우회한 달단의 병력 일부가 북진 중인 호남성 향방군의 진군을 방해 중인지라…….”
“도대체 그렇게 우회해 간 달단의 병력이 얼마나 되건대 오만이나 하는 병력이 진군을 저지당한단 말인가?”
“호남성 도지휘사의 전언에 의하면 적어도 삼만가량이라 하옵니다.”
달단의 기병 삼만이면 보군인 향방군 오만으로서는 절대 경시할 수 없는 상대다. 자칫 허를 찔리면 전멸도 각오해야 할 터. 북진이 아니라 방어를 공고히 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해야 할 상황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경공왕의 입에서 다시금 욕설이 튀어나왔다. 위기가 이어지는 전황 탓에 경공왕은 최근 들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상황이었다. 그런 주군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하 총관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기대되는 소식이 있긴 하온데…….”
“뭔가?”
금방 반색을 하며 물어오는 경공왕에게 하 총관이 조심스럽게 답을 했다.
“일전에 보았던 소흥 왕부의 부마 말씀이옵니다.”
“아! 그 무서운 이.”
절로 무서운 사람이란 말이 흘러나온다. 마지막 결전을 본 병사들은 그를 군신 관우의 환생이라 했다. 아니, 그들의 말이 아니어도 자신의 침실에서 직접 목도한 그의 무위는 결단코 관우의 전설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그런 경공왕의 평가에 쓴 미소를 그린 하 총관이 말을 이었다.
“그가 일단의 강호인들을 이끌고 지원을 할 것이라 하옵니다.”
“그가? 직접 온 소식인가?”
“아니옵니다. 소흥 왕부의 호 군사가…….”
“흠… 강호인이라…….”
과거 암중의 강호 세력이 보낸 일만의 강호인들이 보인 끔찍한 무력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런 무력이라면 달단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싶었다.
“수나 작전에 대해선 알지 못하오나, 그가 달단의 병력을 묶어둘 것이라고 호 군사가 전해왔사옵니다. 왕야.”
“격멸이 아니라 묶어둔다?”
“달단의 대병을 격멸할 정도의 세력은 모으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하 총관의 답에 경공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만한 수를 모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
“예.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온데 문제는 그들이 저들을 묶어두는지 아군이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옵니다.”
“방법이라……. 굳이 방법을 알 필요는 없겠지. 달단의 병력이 이상 징후를 보이면 그로 인한 것으로 알면 될 터. 하면 우린 그동안 방어를 굳히고 지원군을 기다리면 되는 것인가?”
“호 군사의 전언으로는 그동안 영상 왕부와 소흥 왕부에서 최하 십만의 지원군을 파견하겠노라고 전해왔사옵니다.”
“십만이라…….”
분명 향방군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상비군. 정예 병력인 도독부의 군사만큼은 아니겠지만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부대다. 그들이라면 동북어위도총부가 달단을 완전히 휘저을 동안 저들의 발을 막아둘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좋아. 우린 그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기다린다. 그가, 소흥 왕부의 부마가 저들, 달단의 발길을 붙잡을 때를 기다리며…….”
“예, 왕야!”
수하 제장들의 우렁찬 복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공왕의 입가에 모처럼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 * *
오천의 마교 고수들을 거느린 고덕은 자진해 따라온 광천도마의 보필을 받고 있었다.
“네놈이 따라올 줄은 몰랐다.”
“부교주입니다. 이만한 교의 고수들이 나가는 일에 어찌 빠지겠습니까?”
지난번과는 다르게 공대를 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는 광천도마의 양 볼이 허전했다. 자신이 벌인 일을 눈앞에 마주하니 괜한 일을 한 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서운하냐?”
“예?”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고덕의 시선이 자신의 잘려 나간 양 귀에 머물고 있음을 알자, 광천도마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목숨과 바꾼 일입니다. 득이면 득이었지, 손해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광천도마 답에 고덕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 생각한다면 다행이고…….”
“그나저나 어디부터 치실 생각이십니까?”
광천도마의 물음에 고덕은 생각 외로 성도를 가리켰다.
“현재 가장 많은 달단의 병사들이 집결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전면전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걱정 어린 음성의 광천도마에게 고덕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미쳤어? 우습게 보여도 기마대가 수십만이야. 갇히는 날엔 아무리 우리라도 죽음은 면치 못해.”
“하오시면……?”
“일자 관통.”
“예?”
“우리가 왔다는 거 정도는 알려 줘야지. 그냥 관통해서 지나갈 거다.”
고덕의 말에 광천도마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일자 관통이면…….”
“전후좌우 무조건 박살내며 돌파하는 거지.”
“통쾌하겠군요.”
“물론, 경공이 가장 딸리는 녀석의 속도에 맞춘다. 무슨 뜻인 줄 알지?”
“그 속도대로 돌파하라는 명령이십니까?”
“그래. 멈추면 죽는다. 하니 멈추지 마. 그리고 놈들의 기마대에 추격당하지 않아야 하고.”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하온데 돌파한 후엔 어찌…….”
“놈들의 뒤로 돌아가서 뒤통수를 후려갈겨 줘야지.”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광천도마의 물음에 고덕이 인상을 썼다.
“머리는 어깨가 허전할까 봐 달고 다니냐?”
“그, 그게…….”
자신의 핀잔에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광천도마에게 고덕의 음성이 이어졌다.
“전쟁에서 제일 골치 아픈 게 뭔지 아냐?”
“그야…….”
말문을 열어놓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광천도마의 모습에 고덕이 혀를 찼다.
“쯔쯔, 장식이 맞네. 들어봐. 놈들도 먹어야 할 거 아니냐. 더구나 저 많은 놈들이 모두 기마대다. 그것도 욕심이 얼마나 많은 놈들인지 한 놈이 서너 마리씩 끌고 다닌다고. 건량이 얼마나 들어갈 것 같으냐?”
“아! 보급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렇지. 저들에게 우리가 온 걸 알려 준 후엔 열 개 집단 정도로 찢어져서 놈들의 보급선을 완전히 끊어놓는다. 그렇게 얻은 건 팔아먹는다.”
“팔아요? 누구에게 말씀입니까?”
“누군 누구야. 명군이지.”
“그들과는 한편 아닙니까?”
“한편은 무슨……. 싸우다 보면 피도 흘릴 텐데, 적어도 피 값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
고덕의 말뜻을 알아들은 광천도마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장사군요.”
“그래, 장사다. 그러니 밑지면 뒈진다.”
고덕의 으르렁거림에 광천도마가 웃어 보였다.
“암요, 장사에서 밑지는 놈은 신교의 후예가 아니지요.”
천마신교의 시조를 흘러가면 상인이 나온다.
수천수만의 교도를 먹여 살렸어야 하는 일이니 수뇌에 상인이 없을 수는 없는 노릇. 그 탓에 교도들은 자신들이 만마의 우두머리인 천마의 교도이며 천만인을 먹여 살린 만상의 후예라 일컫는다.
“알았으면 됐고, 애들 준비시켜.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이동할 테니까.”
고덕의 명에 고개를 숙여 보인 광천도마가 마교의 고수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움직였다.
* * *
그로부터 반나절. 고덕과 마교의 고수들이 멀리 성도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자리를 잡은 것은 고덕이 소흥 왕부를 나선 지 나흘째가 저물어가는 시점이었다.
“잘하면 성벽을 타고 넘겠는데요.”
광천도마의 말처럼 성도의 높은 성벽을 둘러싸고 악착같이 기어오른 달단의 병사들은 조금만 지나면 지칠 대로 지친 명군을 밀어내고 성벽을 장악할 수 있을 것같이 보였다.
“아주 시간 제대로 맞춰서 왔군. 자- 몸 좀 풀자. 저런 덜떨어진 놈들한테 칼 맞는 놈은 나중에 저승 끝까지 쫓아가서 멱을 따줄 생각이니까 뒈지지 마라.”
고덕의 말에 뒤에 모여 있던 마교 고수에게서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그런 이들을 둘러본 고덕이 말을 이었다.
“선봉은 내가 선다. 왜 우리를 백도 놈들이 마교라 부르는지 달단 놈들에게 확실히 보여 준다. 준비됐나?”
“예-!”
우렁찬 답에 비틀린 미소를 그려 보인 고덕의 입에서 힘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가자!”
곧이어 산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과 함께 오천의 마교 고수들이 앞서 달리는 고덕의 뒤를 따라 달렸다.
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