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장. 단죄(斷罪)-적을 치다
경악에 가득 찬 광천도마의 모습에 혈괴일마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크크크, 아직도 노부를 기억하는 어린놈들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혈괴일마. 실제로는 혈괴삼마라 불리는 마인들로 한때는 마교의 삼태상을 지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백여 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 그들이 버젓이 살아 있을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저, 정말로 혈괴삼마, 아니 혈괴일마 태상이십니까?”
“하면, 감히 누가 우리의 이름을 도용이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하, 하지만 분명 교에서는 돌아가셨다고…….”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다. 사연이 깊은 일들이 한두 가지일까? 우리가 살아 있는 것도 그런 사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렇듯 건재하시다면 교로 돌아오실 일이지, 왜……?”
“사연이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묻는 것은 자유이다만, 답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야. 그래도 듣기를 원하느냐?”
“아, 아닙니다, 선배.”
강자들의 땅인 마교에서 직급에도 없던 태상을 지낼 정도로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들이다.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 혈괴삼마 중 혈괴일마는 지금의 천하오존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던 이다. 또한 나머지 둘도 당시의 천하십대고수.
그런 이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괜한 호기심으로 목숨을 날리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좋은 선택이다. 하면 가자꾸나.”
더 이상 나눌 말이 없다고 생각했던지 몸을 돌리는 혈괴일마를 광천도마의 음성이 잡았다.
“오늘 잡아야 할 목표가 누구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주인께서 잡아 죽이라 명한 개새끼.”
천하의 검마를 개새끼라 부른 것에도 놀랐지만, 광천도마는 그것보다 혈괴일마가 주인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주, 주인이라시면……?”
“이미 말했을 텐데. 답은 결코 녹록치 않다고.”
순간 번뜩이는 혈괴일마의 눈빛에 광천도마는 단숨에 쭈그러드는 자신의 심장을 느껴야만 했다.
“아,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는 그냥 개… 가 아닙니다. 천하오존의 일좌로, 본교의 부교주 출신이며 광혈의 주인입니다.”
마교인에게 있어 암천의 주인과 광혈의 주인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이다. 한쪽은 교주의 적통이고, 한쪽은 교를 지탱하는 힘의 상징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데 그런 이의 이야기를 듣고도 혈괴일마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했을 텐데. 놈은 그저 주인이 잡아 죽이라 명한 개새끼라고.”
그것으로 이미 상대의 신분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광천도마도 걱정할 일이 없다. 상대의 신분을 가장 잘 알 만한 이가 그럼에도 나섰다는 것은 그만한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교주의 명으로 검마를 잡으러 나왔던 광천도마는 혈괴일마의 자신감에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긴 이미 백 년 전에도 현경에 달했던 인물. 그가 검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다 화경에 속한 이가 둘이다. 아니, 자신까지 포함하면 셋인가?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까지 생기는 광천도마였다.
그 탓이었을까? 광천도마는 자신에게 검마를 죽이라 명하던 혈마의 자신만만한 눈빛의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움직이는 혈괴일마의 뒤를 따르는 광천도마의 어깨에는 이전보다 훨씬 힘이 들어가 있었다.
* * *
완전히 전시를 방불케 하는 경공 왕부의 정문에 버티고 선 검마는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크크크, 마중인가?”
혈괴일마의 물음에 고덕이 피식 웃었다.
“뭐, 손님은 손님이니까.”
“크크, 저승사자에게 손님이라…….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로군.”
“저승사자는 누가 될지 지켜봐야 알겠지. 한데 어째 교의 냄새가 진하군.”
고덕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광천도마와 귀천마의 신형이 움찔거린다. 그런 둘을 슬쩍 일별한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밀지단의 거물들께서 다 나서셨군그래.”
마교에서 밀지단은 조금 특별한 곳이다. 교에 속하지만 명은 오로지 교주 개인에게서만 받는다. 그 탓에 천마신교 내부에선 그들을 일러 교주의 친위대라고도 부른다. 문제는 그들이 한동안 교외의 외딴곳에서 숨어 지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내의 사람들은 수군거렸었다. 광혈의 힘을 두려워한 교주가 밀지단에 폐관을 명했다고……. 아마 교의 변고가 생긴 이후에 출관하여 혈마에게 힘을 실어준 모양이었다.
그런 사정을 짚어낸 고덕의 빈정거림에 귀천마가 발끈해 소리쳤다.
“감히 교의 천년 영화를 무너트린 변절자에게서 비아냥을 들을 일은 없다.”
“교의 천년 영화라……. 뭐, 네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나저나 뒤에 숨어서 소리만 지르지 말고 앞으로 나와 보지그래.”
고덕의 도발에 튀어나오기는커녕 움찔거린 귀천마는 오히려 혈괴삼마의 뒤로 조금 더 물러났다. 그런 귀천마의 행동에 고덕의 시선이 앞에 버티고 선 혈괴삼마에게 향했다.
“꽤나 능력 있는 손님들인 모양이야? 저 겁쟁이 자식이 뒤에 꽁꽁 숨어 나올 생각이 없는 걸 보면 말이야.”
“네놈 모가지 정도는 힘들이지 않고 비틀어줄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능력도 있었나? 나도 빨리 보고 싶군그래.”
“겁대가리 없는 천둥벌거숭이 자식. 그리 죽고 싶다면 얼마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혈괴일마의 주먹이 공간을 갈랐다.
부- 웅.
벌이 떼를 지어 나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주먹을 내민 곳은 고덕과는 삼 장이나 떨어진 곳. 하지만 벌 떼 우는 소리는 고덕의 코앞에서 울렸다.
예상외의 상황에 눈살을 찌푸린 고덕의 신형이 뒤로 이 장을 미끄러져 이동했지만, 벌 떼 우는 소리는 아직도 그의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결국 피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고덕이 명혼을 검집째 들어올려 막을 쳤다.
꾸앙-
마치 거대한 철기둥을 작은 봉으로 두드렸을 때와 같은 진동이 명혼을 타고 팔로 전해졌다.
“이건…….”
놀란 고덕의 시야로 혈괴일마의 주먹을 떠난 무지막지한 권력이 짓쳐들었다.
“타합-”
난생 처음 고덕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일어선 강력한 기세가 명혼을 타고 튀어나갔다.
쾅-
세사에 가르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검강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그렇게 강기를 뚫어낸 혈괴일마의 권력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고덕의 눈이 빛을 발하고 노란 달무리가 밀려오는 권력의 진로 앞을 가로막았다.
스걱-
달무리에서 뛰쳐나온 현월이 권력을 갈랐다. 한데, 갈라진 혈괴일마의 권력이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두 조각 난 채 고덕을 향해 달려들었다. 믿을 수 없는 괴사에 고덕의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리 움직였다.
퍼걱-
명혼이 가르고 지나간 공간이 비스듬히 어긋났다. 혈괴일마의 요상한 권력도 차마 어긋난 공간은 돌파할 수 없었던지 수박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소멸됐다.
생각 외로 강력한 상대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고덕이 명혼을 중단에 세우며 혈괴일마를 노려봤다.
“혈광폭마도. 어디에서 얻었지?”
고덕의 음성이 북풍한설보다 차가왔다. 그런 그의 물음에 혈괴일마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권법에 무슨 도법 이야기. 이건 그저 혈광폭마권일 뿐이야.”
도가 아닌 권. 단 한 자 차이다. 그 말은 누군가가 혈광폭마도를 권법으로 변화시켜 혈괴일마에게 전했다는 뜻이다. 아니면 혈괴일마가 혈광폭마도를 알고 있던지…….
“누군지 궁금해지는군.”
고덕의 말에 혈괴일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야 궁금해진다……. 크크크, 우리가 너무 오래 잠을 잤던 모양이야.”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다시금 물어오는 고덕에게 혈괴일마가 답했다.
“감히 부교주였던 놈이 삼태상에게 하대를 한다. 교의 규율이 그리 엉망이 된 것이었나?”
“삼태상? 하면… 혈괴삼마!”
놀라는 고덕에게 혈괴일마가 음흉하게 웃었다.
“클클클, 알면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혈괴일마의 괴소에 어느새 놀람을 가라앉힌 고덕이 가래침을 뱉었다.
“퉤, 어디서 뒈졌다더니 여전히 숨을 쉬는군.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감사한 마음으로 산속에 처박혀 살 것이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기어 나오긴……. 그나저나 교에서 보낸 것은 아닌 듯싶고, 어디지? 삼천인가 하는 쥐구멍인가?”
“뭐, 뭣이라. 내 이 똥물에 튀겨 죽일 새끼를…….”
분노한 혈괴일마의 주먹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한 번 당한 걸로 두 번은 안 당해!”
고덕의 말이 끝남과 함께 혈괴일마의 신형 주변으로 노란 달무리가 일었다.
콰과과과쾅-
혈괴일마를 둘러싼 달무리에서 현월들이 튀어나와 직격했다. 하지만 파육음이 아니라 충돌음이 퍼져 나왔다. 그 말은 혈괴일마가 현월들을 막아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혈괴일마를 향해 고덕의 검이 공간을 갈라냈다.
퍼걱-
갈라지던 공간이 터져 나간다. 어느새 혈괴일마의 앞을 가로막은 두 괴인, 혈괴이마와 혈괴삼마의 방어에 공간도가 부서져 나간 것이다.
“혼자인 놈 서러워서 못살겠군.”
시답지 않은 말을 뱉어낸 고덕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쾅-
고덕이 사라진 자리로 어느새 현월을 모조리 튕겨 낸 혈괴일마의 혈광폭마권이 떨어져 내렸다. 권력의 무시무시한 힘을 대변하듯이 혈광폭마권이 떨어져 내린 땅이 일 장의 넓이로 움푹 파여 나갔다.
그 결과에 놀란 귀천마의 휘둥그레진 눈 속으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고덕의 신형이 내리꽂히는 것이 보였다.
“흐헙!”
기겁을 해서 물러나는 귀천마의 앞으로 광천도마가 자신의 애병 칠마도를 펼쳐 들고 막아섰다.
쾅-
“커헉!”
단 한 차례의 공격을 막았을 뿐인데, 혈류가 역류하고 내력이 단박에 흩어졌다. 그런 상태로 근 칠 장을 미끄러져 나가서야 경력을 해소한 광천도마의 경악 어린 시선엔 기필코 귀천마의 목을 쳐올리는 고덕의 모습이 보였다.
초극의 극의. 제하이십사강의 상위권에 충분히 이름을 올리고도 남을 귀천마가 고덕의 단 일검에 목 없는 시신이 되어 땅바닥을 굴렀다.
“이놈-!”
분노한 광천도마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지만, 고덕은 비틀린 미소를 남긴 채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로 혈괴삼마의 공격이 매섭게 쏟아져 내렸다.
콰과과과쾅-
무수한 폭음과 함께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았을 땐 혈괴일마와 어울려 엄청난 공방을 주고받는 고덕의 모습이 보였다. 신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광경에 광천도마는 전의가 급속히 사라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그 우스운 절망감에 비칠거리며 물러나는 광천도마를 향해 갑자기 신형을 돌린 고덕이 달려들었다. 기겁을 한 광천도마가 자신의 애병을 세워들고 도막을 펼쳐 들었다.
한데 곧바로 충돌할 것 같았던 고덕의 검이 애꿎은 허공을 베어내는 순간, 자신의 뒤에 서 있던 혈괴이마와 혈괴삼마가 피를 토하며 뒤로 튕겨 날아갔다.
혈괴삼마의 둘을 공간도의 묘리로 기습적으로 베었지만, 그들은 강력한 강기로 오히려 자신들이 머물던 공간을 쳐 뒤로 몸을 빼냈다. 물론 공간도의 권역을 완벽히 빠져나가지 못해 약간씩의 내상은 입었겠지만, 고덕의 예상에는 미치지 못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던진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자 곧바로 위기가 닥쳤다. 미친 듯이 폭주한 혈괴일마의 혈광폭마권이 고덕의 뒤를 때린 것이다.
호신강기를 최고조로 일으키고 그도 모자라 공간권의 묘리로 위치를 이동했지만, 노란 달무리에서 튀어나온 고덕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쿨럭-”
적지 않은 피를 토한 고덕의 눈에 저만치에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혈괴일마의 모습이 보였다.
“해보자는 거지. 좋아!”
피를 닦아낸 고덕이 마주 달려 나가며 치켜든 명혼에 파랗게 타오르는 검강이 넘실거렸다.
이내 충돌한 혈괴일마와 고덕의 공방은 무섭도록 사나왔다. 오죽하면 이를 가는 혈괴이마와 혈괴삼마가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거셌다.
그런 둘의 공방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공간권과 현월, 거기에 공간도까지 쏟아부었음에도 약간의 내상을 입은 고덕이 혈괴일마의 혈광폭마권에 밀려 튕겨 난 것이다.
고덕이 튕겨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혈괴이마와 혈괴삼마가 덮쳤다. 무시무시한 경력이 미처 중심을 찾지 못한 고덕에게 쏟아져 내렸다.
쾅, 콰광, 쿠과과쾅-
수도 없는 폭음이 고덕의 주변에서 터져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쫓아온 혈괴일마가 내지른 혈광폭마권이 강력한 폭발과 함께 고덕의 신형을 휩쓸었다.
스걱-
“커헉-”
한데, 느닷없는 파육음과 비명음이 뒤에서 들려왔다.
놀란 혈괴일마의 시선이 돌아간 곳엔 어느새 모습을 옮긴 고덕의 검이 혈괴이마의 목을 깨끗이 잘라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마총 최고의 보법인 섬보에 이어 마총 최고의 쾌검인 섬혼이 펼쳐진 것이다.
“이노~ 옴!”
힘없이 무너지는 혈괴이마의 모습에 격노한 혈괴일마의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경기가 회오리쳤다. 경기의 회오리는 이내 유형의 힘을 만들고, 곧이어 떨쳐진 혈광폭마권과 함께 고덕을 향해 쏘아졌다.
부- 웅.
다시금 벌 떼 우는 소리가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과 다르다. 상대의 권격을 회피하지 않은 고덕의 애검 명혼이 전장을 향해 뻗어졌다.
쫘악-
마치 비단 찢어지는 것 같은 음향이 고덕의 전방에서 일었다.
자신이 쳐낸 혈광폭마권과 함께 날아들던 혈괴일마의 눈에 경악이 들어섰다. 고덕의 검이 혈광폭마권을 쪼개며 다가서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권력을 쪼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자나가는 공간을 쪼개고 있었다.
푸확-
혈광폭마권을 쪼개고 들어온 명혼은 어느새 혈괴일마의 몸마저 깨끗이 가르고 지나갔다.
천천히 뒤로 돌아서는 혈괴일마의 눈엔 경악과 찬탄, 그리고 공포가 함께 떠올라 있었다.
“마, 마총의 진산절기……. 그걸 얻은 건가?”
혈괴일마의 물음에 고덕이 답했다.
“광혈의 주인이니까.”
“그렇군. 그 말이 그저 허울이 아니었어. 크흐흐흐, 하지만 조심… 주인도 이미 광혈… 주인… 었으니……. 크헙!”
말을 다 마치지 못한 혈괴일마는 세로로 몸이 갈라지며 쏟아지는 장기들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광기에 든 혈괴삼마가 달려들었다.
“죽어라-!”
흉험한 혈괴삼마의 공격을 고덕은 현월로 받았다. 팔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현월이 자신의 방어는 포기한 채 미친 듯이 달려드는 혈괴삼마의 신형을 여덟 갈래로 찢어발겼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바라보던 고덕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이제 너 하나 남았군.”
고덕의 말에 광천마도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도주나 사정은 없다.
“어차피 교를 나설 때부터 이리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소.”
솔직히 말하면 혈괴삼마를 만나면서는 조금 희망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역시 광혈의 주인은 그저 전설 속에만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묻고 싶군.”
“뭘 말이요?”
“저들의 출처는 대략 짐작이 가는데, 네놈들은 어찌 된 거지?”
죽어 나자빠진 귀천마의 시신과 자신을 번갈아 보는 고덕에게 광천도마가 흐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교의 행사였소.”
광천도마의 답에 고덕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교라……. 지금의? 아니면 예전의?”
밀지단의 수뇌였던 광천도마와 귀천마가 전임 교주인 마제와 맺었던 끈끈한 정리를 알기 때문에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광천도마의 답은 고덕은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현임 교주의 명이었소.”
“현임 교주라면… 설마 혈… 마?”
“맞소.”
광천도마의 답에 고덕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고덕에게 광천도마가 물었다.
“왜? 믿어지지 않소?”
“세상에 믿어지지 않는 일은 없어. 다만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은 있지.”
“그렇다면 이번 일이 그런 모양이구려.”
“대충은…….”
“마뇌가 그럽디다. 죽이지 못할 경우엔 입을 다물라고.”
“한데 입을 연 이유는……?”
“억울하지 않소. 내가 안 된다고 극구 말렸는데, 자신 있다면서 성화령까지 들먹이며 내린 명이었으니 말이오.”
“복… 수라 그 말인가?”
“뭐, 복수까지는……. 그저 외세의 힘에 기댄 교에 대한 충고 정도가 좋겠소.”
“엉뚱한 놈들 뒤에 숨어 있었던 놈의 말치곤 우습지 않나?”
“그래서 더 기분이 더러운 게요. 차라리 정면으로 붙었다 깨졌으면 이렇듯 기분이 뭐 같진 않았을 테니까.”
“제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못된 버릇까지 가졌군. 기왕지사 그런 마음이라면 이야기 좀 들려주지. 빌어먹을 혈마 자식이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 말이야.”
“크크, 기왕 우스운 꼴이 되었으니 못난 모습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럽시다.”
광천도마는 생각 외로 순순히 입을 열었다.
“쉬워서 좋군. 좋아, 혈마 그 자식의 마음이 바뀐 이유?”
“원래는 정천맹의 연수 요청 때문이었소. 교주는 그들이 적어도 광혈의 주인을 주저앉힐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오.”
“한데 그러지 못했군.”
“크크, 주저앉히기는커녕 정천맹이 쪽박을 찼지. 교주는 놀랐소. 그리고 두려워했지. 자신이 당신, 광혈의 주인을 배신한 걸 들킬까 봐 말이야.”
“멍청한 자식…….”
혈마를 향한 것이 분명한 고덕의 욕설에 광천도마는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 멍청한 작자의 두려움은 예상외로 컸던 모양이오. 마뇌를 통해 외부 세력과 연결까지 했으니까 말이오.”
“그게 삼천이다?”
“삼천이 뭔지는 모르오. 다만 은거한 마도의 전설적인 고수라는 말만 들었을 뿐…….”
틀린 말도 아니다. 삼태상을 지냈던 혈괴삼마가 튀어나왔으니까. 문제는 그 뒤에 있는 주인이라는 작자다. 적어도 혈괴일마가 뿌려 댄 혈광폭마권의 진체인 혈광폭마도가 그에게 있을 공산이 높았기 때문이다. 마예삼본의 서열 일 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 악마의 무공이…….
“네놈은 그럼 꼭두각시였다 그 말인가?”
“뭐, 아닌 줄 알았는데 결과는 그렇구려. 꼭두각시……. 크크크.”
자조적인 웃음의 광천마도를 바라보던 고덕이 말했다.
“내게 칼을 겨눈 놈을 살려 보낸 적이 없다. 알고 있나?”
“알고 있소.”
“억울하면 다음 생에선 더 강해지도록.”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는 고덕의 뒤로 노란 달무리 속에서 튀어나온 현월들에 의해 피가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털썩-
누가 주저앉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고덕은 그대로 경공 왕부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 고덕의 뒤엔 양쪽 귀를 잘린 광천마도가 복잡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고덕이 사라진 경공 왕부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