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장. 파국(破局)-용서할 수 없었다
경공왕은 하 총관을 따라 들어서는 외부인들의 모습에 놀란 표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전에 허락을 얻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불쾌한 음성의 경공왕에게 하 총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소관이 왕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외인들을 들였사옵니다. 하오나 일의 중요성이 남다르니, 소관의 죄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연후에 물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총관이 내 명도 없이 외인을 들일 정도로 중한 이야기라?”
“예, 왕야. 들어주소서.”
하 총관의 간청에 경공왕이 소매를 털며 왕좌에 몸을 묻었다.
“그리하라.”
경공왕의 허락에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하 총관이 호철랑에게 눈짓을 했다. 그에 호철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신은 좌군도독부 부도독이자 소흥 왕부의 군사인 호철랑이라 합니다.”
이미 서필의 서신으로 찾아온 이들의 신분은 알고 있던 까닭에 경공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하고자 하는 말을 들어보자꾸나.”
시큰둥한 경공왕의 물음에 호철랑은 서필에게 했던 말을 다시금 설명했다. 그 말을 모두 들은 경공왕이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하면 척회왕이 달단을 끌어들여 고(孤)를 치고, 스스로는 병력을 내어 영상왕이나 소흥왕을 칠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달단의 대병이 모여드는 것은 사실이니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쳐도 척회왕이 그들과 결탁했다는 증거는 있느냐?”
“달단의 대병이 감숙 부근에 모여들었습니다. 하온데 전군도독부 병력은 물론이고, 감숙성 향방군은 어디에 있나이까? 그것만으로도 모든 해답은 찾아질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호철랑의 답에 경공왕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경공 왕부 내에서도 척회왕의 변절을 조심스럽게 예측하던 상황에서 소흥 왕부의 군사라는 이에게서 나온 말이니,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하면, 그대는 우리가 어찌하여야 한다는 말인가?”
“달단의 대병은 수가 삼십만가량으로, 경공 왕부 홀로는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삼십만?”
놀라는 경공왕에게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 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으니 지금은 그보다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 소신이 관찰할 때까지는 대략 삼십만가량으로 추산되었사옵니다.”
호철랑의 말에 경공왕의 시선이 한쪽에 시립해 있던 한 장수에게 향했다.
“오희 장군.”
“예, 왕야.”
“경의 보고로는 모여든 달단 놈들의 수가 오만가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그리 보고하였습니다.”
살짝 당황한 표정인 장수의 답에 경공왕의 눈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우양!”
경공왕의 부름에 한쪽에 시립해 있던 젊은 장수가 복명하며 나섰다.
“하명하소서, 왕야.”
“즉시 강호의 정보 상인들과 접촉하라. 알아볼 것은 감숙 너머에 집결한 달단군의 군세이니라.”
“명을 받사옵니다, 왕야.”
우양이란 젊은 장수가 대전을 나가자 경공왕의 물음에 답했던 장수의 표정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경공왕이 차가운 음성을 토했다.
“오희.”
“예? 예, 왕야.”
“지금이라도 바른대로 고한다면 가족의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다. 바른대로 대라!”
경공왕의 압박에 한참을 주저하던 오희가 무릎을 꿇었다.
“소장을 죽여주소서, 왕야.”
“죽이고 살리고는 네 말을 들어보고 결정할 것이다. 하니 사실대로 고하라!”
서슬 퍼런 경공왕의 독촉에 오희의 입이 열렸다.
“사실은 모여든 달단의 병력은 저자의 말대로 삼십만을 넘어가옵니다.”
오희의 말에 놀란 이들이 많은 탓에 사방이 술렁거렸다.
“한데도 내게 거짓을 고한 이유가 무엇이더냐?”
“소장의 여식이 그만 저들의 손에… 죽여주소서.”
죄를 청하는 오희를 바라보던 호철랑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와 같은 일을 당한 것은 오 장군만이 아닐 것입니다.”
그 말에 경공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면 더 있을 것이다 그 말인가?”
“예. 고위 무장들 중 상당수가 그와 같은 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어찌 그와 같이 장담을 하는가?”
“증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증인?”
경공왕의 의문에 호철랑이 은영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 눈길에 숨을 크게 들이쉰 은영이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소녀, 은영이라 하옵니다.”
“누구인가?”
뜬금없이 나서는 은영을 바라본 경공왕의 물음에 호철랑이 소개를 이었다.
“현 청해 도지휘사사의 지휘동지인 서필의 여동생입니다.”
“서 장군의?”
서필이라면 경공왕도 잘 아는 장수다. 나이는 젊지만 일 처리가 꼼꼼하고 기개와 충심이 깊어 유심히 지켜보는 이였다. 청해 도지휘사사의 지휘사와 지휘첨사가 한날한시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자리가 비었지만, 그대로 둔 것은 그의 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경공왕의 의지 때문이기도 했다.
“예. 이번에 납치되었다 구출된 여인이기도 합니다.”
“납치가 되었었단 말인가?”
놀라는 경공왕의 음성에 은영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왕야. 당시 그곳엔 저와 같은 처지의 여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흐음… 한데 어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냐?”
경공왕은 은영이 거론한 여인들의 수보다 은영의 말 그 자체의 신빙성에 더 관심을 두는 듯했다. 하긴 은영의 말이 거짓이라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세우는 대책들이 모두 잘못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긴 했다.
“은공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은영의 말끝에 향하는 그녀의 시선을 좇은 경공왕은 고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강호의 야인입니다.”
“야인이라……?”
경공왕의 중얼거림에 근처에 배속해 있던 노장군이 호통을 쳤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야인이라 하나 이름은 있을 것이 아니더냐?”
자신에게 호통을 치는 노장군을 바라보는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내가 누구라 하면 알겠는가?”
경공왕에겐 어쩔 수 없이 공대를 했지만 그 외의 사람에게까지 공대를 할 마음 따윈 없었다. 그것은 연화로 인해 소흥 왕부에 붙어 있어야 하기에 왕부의 요인들에게 존어를 상용했던 것과는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감히! 네놈이…….”
호통을 치던 노장군의 입은 저절로 다물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고덕의 시선에 어린 것이 진심 어린 살기임을 읽은 까닭이다. 더구나 역전의 장수인 자신이 단박에 기가 죽을 정도의 날카로운 기세가 함께 실린…….
왕부의 최고위 무장인 나부렴이 꼬리를 마는 모습을 이채롭게 지켜보던 경공왕이 물었다.
“나 지휘사가 기세만으로 맥없이 무너지는 것으로 보아 이름 없는 필부는 아닐 터.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그리 좋은 평가를 받는 이름이 아닙니다.”
“강호라 불리는 야인들의 평가보다 고는 고의 눈을 믿는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끝내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고덕이 답을 하려는 찰나, 호철랑이 선수를 쳤다.
“한때 황제 폐하의 자객이라 불렸던 이입니다.”
“황상의 자객!”
멀리는 융경왕과 가까이는 균사왕은 물론이고, 중군도독부의 고위 장수들이 제거된 일에 사용된 이름이다. 감히 아무도 막지 못한 피로 점철된 그 이름 앞에 어지간한 경공왕도 이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흐음…….”
잔뜩 가라앉은 경공왕의 얼굴을 바라보며 호철랑이 결정타를 날렸다.
“또한 소흥 왕부의 부마도위입지요.”
“부마도위? 소흥 왕부에 무슨 공주가…….”
말을 하다 보니 기억이 났다. 전임 동북어위도총사에게 하가되었던 소흥왕의 여동생이.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중간에 감쪽같이 사라졌고, 전임 동북어위도총사는 반란의 와중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모든 정황을 짐작한 경공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의 일은 유감일세, 부마.”
이로써 대외적으론 처음으로 연화의 남편으로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가슴이 먹먹한 가운데 고덕은 제법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런 고덕에게 경공왕이 물었다.
“한데 왜 서 소저만 구출해온 것인가?”
“우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적병 속에서 여러 사람을 구해올 능력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고덕의 답에 경공왕은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수십만의 정병이 모여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이라도 무사히 구출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능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면 그녀들이 남아 있다는 말이고, 오 장군을 보면 납치된 여인들로 협박을 했다는 말인데……?”
“그러합니다. 경공 왕부만이 아니라 영상 왕부나 소흥 왕부는 물론이고 황실 쪽에도 협박을 당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그러합니다. 서필 장군처럼 단호히 거부한 이들도 있겠지만, 오희 장군처럼 저들의 협박에 무릎을 꿇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호철랑의 말에 여전히 대전에 꿇어 엎드려 있는 오희를 바라보는 경공왕의 눈은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 오희 장군이 꽤나 충성스러운 장수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이들도 굴복하는 마당에, 충성심이 모자란 이들이라면…….
“혼란이 크겠군.”
“그럴 것입니다. 그 사이를 척회 왕부의 병력과 달단의 병력이 파고들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겠군.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 내게 하고픈 말은 무엇인가?”
경공왕의 물음에 호철랑이 단호한 음성으로 답했다.
“손을 잡으시옵소서.”
“손을 잡으라? 누구와? 소흥왕과 말인가?”
“이번 일은 소흥 왕부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영상 왕부와도 손을 잡으시고 황실과도 연수를 하셔야 하옵니다. 가능하다면 동북어위도총부에서도 지원을 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세력에 손을 벌리라는 말인가? 이 주재수가 시전의 거지처럼 말인가?”
다소 격앙된 경공왕의 음성에 호철랑은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렇게 왕야가 손을 내민 이들도 편한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왕야와 손을 잡지 못한다면 멸절될 뿐이니 오히려 왕야의 대의에 감명할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흐음… 같은 입장이라 이건가?”
“그러하옵니다.”
호철랑의 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경공왕의 시선이 하 총관에게 향했다.
“총관의 생각은 어떠한가?”
소흥왕에게 호철랑이 있다면 경공왕에게 하송, 하 총관이 있었다. 주군의 물음에 하 총관은 거침없이 답했다.
“저자의 말에 틀린 점이 없사옵니다. 지금의 상황은 분명 어느 한두 개의 세력이 모여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옵니다.”
“하면 총관도 내게 연수를 하라 권하는 겐가?”
“송구하옵니다, 왕야.”
하 총관의 답에 경공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경공왕의 입이 열렸다.
“하 총관은 즉시 영상 왕부와 소흥 왕부, 그리고 황실과 동북어위도총부로 기발을 띄우라. 내용은 지금 거론된 이야기를 하나도 빼놓지 말고 기록하되, 말미에 내가 정중히 연수를 청한다는 말을 넣어라.”
“명을 받사옵니다, 왕야.”
하 총관의 복명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경공왕이 고덕에게 말했다.
“소흥 왕부의 부마는 잠시 고를 따르라.”
이유를 알 수 없는 경공왕의 부름에 머뭇거리는 고덕에게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는 경공왕이 황제의 자객으로 소개된 고덕과 조용한 대화를 나누길 원할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호철랑의 권유에 마지못해 경공왕을 따라 대전을 나선 고덕은 이내 경공왕의 전용 정원으로 발길을 들였다.
“아름답지 않은가?”
경공왕의 물음에 정원을 둘러보던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군요.”
하지만 음성엔 열의도, 적극적인 동의의 감정도 없었다. 그런 무성의한 고덕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경공왕의 입가엔 미소가 그려졌다.
“자네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군.”
“그들이라시면……?”
“내게 손을 내밀었던 이들이 있었지. 너무 겁이나 멀리하고 말았지만…….”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왜, 한때 내게 강호인들로 이루어진 일만의 정병을 손에 쥐어주었던 자들 말일세.”
경공왕의 말에 고덕은 일전에 호철랑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호철랑은 그들이 삼천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조금은 차가워진 고덕의 음성에도 경공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 답했다.
“맞군. 내 지위나 권력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야. 그래서 부럽지만 무섭기도 했었지. 왜 묻느냐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굳이 저를 따로 불러 그들의 이야기를 전할 필요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들이 내게 내건 조건은 두 가지뿐이었네. 소흥 왕부의 멸절과 소흥 왕부에 관계된 누군가의 목.”
경공왕의 말에 고덕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소흥 왕부에 관계된 누군가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네도 바로 알아차리는군. 하긴 나도 자네와 소흥 왕부와의 인연을 듣고선 알아보았으니……. 그나저나 자네, 보기보다 더욱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로군. 그 무서운 이들이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이라니 말이야.”
“그런 말을 제게 해주는 이유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도움을 청하려는 것일세.”
생각지 못한 경공왕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내가 그들의 힘에 두려움을 느껴 약속을 저버리자 그들은 척회 왕부에 손을 내민 것 같네. 문제는 이제 그들의 검이 내게도 향할 것이라는 점이지. 솔직히 내 휘하에는 그들에게서 나를 지켜 낼 만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없네.”
수천의 병사들이 두 겹, 세 겹의 경비망을 펼치던 왕부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이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목 하나 따는 것은 일도 아닐 이들인 것이다. 그것이 경공왕을 두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손길은 언제라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 저는 이곳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 없습니다.”
“나도 아네. 다만 보름 정도만 머물러 달라는 말일세.”
“왜 보름입니까?”
“그간은 내 배신에 대해 아무런 해코지도 없었지. 아마 척회왕이 날 멸절시키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려 하지 않았나 싶지만, 이번에 저들의 방식이 바뀌었네.”
“그게 무슨……?”
“어젯밤 자객이 들었네. 다행히 난 예정에도 없던 곳에 가 있었지. 대신 내 부름에 침전에서 기다리던 장수들 일곱이 죽었네.”
왕부가 소란스러운 이유가 자객이 든 탓이라더니,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보름을 지킨다고 달라지리라 보십니까?”
“그들의 능력상 보름이면 적어도 대여섯 번의 시도는 있겠지. 그것이 모두 실패한다면…….”
“포기할 거라 보시는군요.”
“내가 아는 그들은 되지 않을 일에 불필요한 힘을 쓰는 이들이 아닐세.”
경공왕의 말에 고덕은 잠시 이후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정세가 어지럽게 돌아가면 소흥 왕부도 위험해지겠지만, 그곳엔 협련과 창군이 있었다. 그 둘이라면 어지간한 일은 대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쪽은 자신이 떠나는 순간 위험에 노출된다. 호철랑의 계획대로라면 중심축을 담당할 경공 왕부가 그렇게 무너지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고덕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그리하지요.”
고덕의 답에 경공왕의 표정이 꽤나 밝아졌다.
“고맙네.”
경공왕의 치사에 고덕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 * *
경공왕의 친서를 소지한 기발들이 사방으로 뛰는 동안 경공 왕부에서는 숙청 아닌 숙청이 단행되었다.
협박을 당했다 의심되는 이들은 모조리 왕부로 불려 와 사실 여부를 추궁받았다. 때론 경공왕의 호통에 실토하기도 하고, 호된 고문에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게 실토한 이들은 곧바로 관직이 삭탈되어 수감되었다.
또한 그들이 비틀어놓은 일들을 바로잡기 위해 왕부의 장수들이 급히 그들이 비운 자리를 메우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라고는 하나 연관된 장수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졌으니 척회 왕부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곧바로 척회 왕부의 요청에 의해 삼천에서 나온 살수들이 경공 왕부를 찾았다.
어두운 그늘 아래서 소리 없이 일어나던 그림자는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몸이 굳어버렸다.
“오늘이 두 번째로군. 좀 나은 놈들은 없나?”
권태로운 음성에 천천히 돌아서던 삼천의 살수는 노란 달무리가 시야를 채우는 것으로 모든 사고가 정지되었다.
공간권으로 살수의 머리를 날려 버린 고덕이 호위병들을 불러 시신을 치우는 동안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경공왕이 감탄의 음성으로 물었다.
“도대체 어찌 아는 겐가?”
“기세를 느끼는 것입니다.”
“기세를 느낀다?”
“쉽게 말하면 감이지요.”
“감이라면 직감 말인가?”
“비슷합니다.”
고덕의 답에 경공왕은 대단히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덕의 능력에 대한 순수한 놀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이 그동안 타인의 직감에 달려 있었다는 것에 대한 경악이었다. 물론 기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고덕과 그쪽으론 전혀 지식이 없었던 경공왕의 무지가 불러온 오해였지만 말이다.
비슷한 일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더 이어졌다. 물론 자객의 수준은 점점 높아졌다. 하지만 이전에 고덕이 상대했던 이들처럼 화경에 오른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저들의 살행이 멈추어간다고 느낄 때쯤 전혀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경공왕은 누군가 자신을 흔든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놀란 그의 눈앞엔 심각한 표정의 고덕이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인가?”
“놈들입니다.”
“그럼 이전처럼 상대하면 되는 게 아닌가?”
이전에는 자신을 머릿속을 울리는 말, 전음이라는 것으로 깨우고 밖에 있는 호위병을 대기시킨 채 순식간에 자객을 제압해왔던 것이다.
“그때와는 다릅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입니다.”
“제대로라니?”
“제가 완벽하게 막아드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고덕의 말에 경공왕의 표정은 사색이 되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수가 셋, 아니 다섯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능력이… 아무래도 제압하자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사이를 다른 놈들이 노린다면…….”
뒷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당황한 경공왕이 물었다.
“하, 하면 호위병들을 불러들이면 되겠나?”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렇게 하십시오.”
고덕의 답에 경공왕의 고함이 방을 떨어 울렸다.
“여봐라-!”
경공왕의 고함에 중무장한 호위병들이 난입에 가까운 모습으로 뛰어 들어오자, 고덕은 그늘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렇게 고덕이 사라지자 경공왕의 음성이 빠르게 이어졌다.
“병력을 늘려라. 비상이다. 침전 주위로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란 말이다.”
갑작스런 호통이었지만 왕명이다. 감히 대꾸조차 할 수 없었던 근위 장수가 복명했다.
“명을 받사옵니다, 왕야.”
곧바로 비상 호각이 울리고, 왕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수도 없이 밝혀지는 모닥불로 인해 대낮처럼 밝아지는 경공 왕부를 바라보던 이들 중의 한 명이 씁쓸한 음성을 흘렸다.
“들킨 모양이군요.”
귀천마의 말에 뒤에 서 있던 광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이 저 안에 있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한데 정말로 그분을 상대할 사람이 오는 겁니까?”
“그래도 왕이 한 약속인데 헛소리는 아니지 않겠나?”
“만에 하나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귀천마의 물음에 광천도마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답했다.
“돌아가야겠지. 죽음을 사서 청할 필요는 없으니까.”
“클클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꼬마야.”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광천도마와 귀천마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엔 언제 등장한 것인지 삿갓을 깊게 눌러쓴 괴인 셋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 누구요?”
이미 화경에 오른 광천도마다. 그런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묻는 음성에 서렸다.
“클클, 잡아먹지 않을 것이니 그리 겁을 먹을 건 없다.”
“거, 겁을 먹다니. 그런 일 없소.”
광천도마의 반박에 괴인들의 입에서 괴소가 흘러나왔다.
“클클, 그래도 마교의 부교주라고 체면은 챙기고 싶었던 모양이로구나.”
“도, 도대체 누구이기에, 감히…….”
상관을 위해 나섰던 귀천마의 말은 중간에서 막혔다. 괴인들 중 한 명의 손아귀에 목울대가 잡힌 까닭이다. 당한 귀천마는 물론이고, 곁에 서 있던 광천도마까지 상대가 도대체 언제 움직였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들과는 한참 차이 나는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광천도마가 포권을 취해 보였다.
“한배를 타기로 한 사람들이오. 미처 몰라보고 저지른 실수이니 사정을 봐주리라 믿겠소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광천도마의 모습에 뒤에 남아 있던 괴인들 중 한 명의 입에서 클클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클클클, 자신들의 처지를 안 것 같으니 막내는 그만 물러나거라.”
그 말에 귀천마의 목을 끌어당겨 눈을 마주한 괴인이 으르렁거렸다.
“다시는 우리 앞에서 감히란 말 따위는 하지 말거라. 꼬마야.”
상대의 기세에 완전히 꺾인 귀천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괴인은 그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털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자자, 저 꼬마의 말대로 이제 한배를 탄 입장이니 지난 일은 덮자꾸나. 아니 그러하냐, 아이야.”
나타난 이들 중 수좌로 보이는 괴인의 물음에 광천도마는 정중히 포권을 해 보였다.
“그러합니다. 하온데 저희를 꼬마라 부르시니 혹, 강호의 선배가 되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괴인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강호의 선배라……. 크크크, 그래. 원래대로라면 내 네놈의 선배가 되겠지. 이 몸을 사람들은 한때 혈괴일마라 불렀느니라.”
“혈괴일마… 설마!”
혈괴일마를 되뇌던 광천도마의 표정은 경악으로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