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장. 역수(逆?)-뒤통수를 맞다
왕팔의 쾌차와 함께 난주를 출발한 고덕 일행은 곧바로 소흥 왕부를 향해 이동했다.
그렇게 움직이던 중 은영이 조심스럽게 청을 넣었다.
“중간에 헤어지자고?”
“예. 소흥 왕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제가 갈 곳은 아닌 듯합니다.”
은영의 말에 그간 제법 친해졌던지 호철랑이 고개를 저으며 나섰다.
“내가 있는 곳이니 동생이 머문다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호철랑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은영이 답했다.
“호 언니의 마음은 고맙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동생?”
“제게 군문에 계신 오라버니가 있다고 한 말 기억하세요?”
“그럼 기억하지. 기개가 대쪽 같은 분이라는 것도…….”
자신을 포기하고 절개를 선택한 것을 두고 좋게 둘러말한 것이란 걸 아는 은영은 고소를 지어 보였다.
“네, 맞아요. 이제야 말씀드리지만 그 오라버니가 머무시는 곳이 북쪽이랍니다.”
“북쪽……?”
북쪽이라는 말의 의미가 소흥 왕부가 장악한 곳보다 북쪽을 뜻한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범위를 놓으면 가능성이 있는 곳이 너무 많아진다. 다만 은영이 척회 왕부의 손에 붙잡혀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설마 경공 왕부에……?”
“맞아요. 청해성 도지휘사사에서 지휘동지로 계시지요.”
은영의 말에 호철랑의 눈이 커졌다.
“그럼 서필……?”
“맞아요. 그분이 제 오라버니지요.”
소흥 왕부에서도 주목하는 장수들 중의 한 명이다. 그 말은 그들과 적이 된다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는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되짚으면 그들이 그런 사전 계획을 세워야 할 정도로 뛰어난 장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최근에 벌어진 의문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휘사와 지휘첨사의 부재로 인해 청해성 도지휘사사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중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럼…….”
“예. 제가 소흥 왕부에 머문다는 것도 오라버니에겐 짐이 될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그리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저들의 협박을 거부하며 자신의 생사를 도외시한 오라비이기 때문에…….
“그러면 돌아가는 거니?”
호철랑의 물음에 은영은 슬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요.”
이유도 알고 이해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이해하는 일을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돌아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을 버린 오라비의 곁으로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호철랑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졌다.
“너…….”
“그냥이요, 언니. 그냥…….”
사정조인 은영의 말에 호철랑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이 고덕에게 머문다는 것을 알 때부터 그녀가 자신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것을 느낀 날, 호철랑은 자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예상대로 은영은 그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하루 온종일 신경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를 모를 여인은 없는 법이니까.
그래서 더욱 은영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떠나려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 고덕에게서 멀어지려 하는 것임을 알기에…….
그런 은영에게 고덕이 물었다.
“갈 곳은 있나?”
“찾아보면…….”
은영의 말은 중간에서 가로막혔다.
“겁도 없이. 갈 곳도 없는 게 돌아다닐 생각은. 잔말 말고 따라와.”
생각 외로 강경한 고덕의 말에 호철랑과 왕팔은 놀랐고, 은영도 당황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어떤 마음인지 신경도 안 쓰는 고덕은 그저 묵묵히 발길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놀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호철랑이 자신이 깜빡 지나친 것을 발견했다.
“저기, 잠깐만요.”
호철랑의 외침에 양팔에 그녀와 은영을 각기 나눠 안고 달리던 고덕이 발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오?”
“동생, 오라버니가 청해성 지휘동지인 서필 장군이라고 했지?”
“예, 그런데요.”
“거기에 우리를 막아선 이들은 분명 중원의 무인들이었구요.”
“그거야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의 답에 호철랑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지난 평로군과 경공 왕부와의 전투를 기억하세요?”
“한참 잘나가던 안창, 그 인간이 죽으면서 한 방에 무너졌지.”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전부터 평로군의 작전은 커다란 난관에 봉착해 있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비로소 관심을 보이는 고덕에게 호철랑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휘첨사인 소람 장군이 이끌던 일단의 평로군 병력이 파죽지세로 이동하고 있었답니다. 경공 왕부는 미처 그들의 진출로에 병력을 대비시키지 못한 상태였지요. 그들의 진공을 제대로 저지하지 못한다면 사천성의 성도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해야 했을 정도로요.”
“한데 그들이 실패한 거요?”
“예. 실패했답니다. 일단의 강호인들에게 습격을 받아 전멸했으니까요.”
“강호인들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이 답했다.
“예. 강호인들이 분명했어요. 더구나 이후에 경공 왕부가 동원한 군세 속에는 강호의 낭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존재했지요.”
“낭인 부대?”
낭인들은 간혹 관의 전투에 지원해 돈을 받고 싸움에 나서기도 한다. 그것은 왕부들의 싸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호인들이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삼류에 불과한 낭인들은 먹고살기 위해 싸움터를 전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
“그거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질 않소?”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의 수가 일만이라는 게 문제였어요.”
“이, 일만?”
아무리 싸움터를 쫓아다니는 낭인들이라고는 하나 결코 한 번에 모일 수 없는 숫자다. 그 정도 숫자라면 적어도 몇 달간은 마음먹고 모아야 가능한 수치니까. 놀라는 고덕에게 호철랑은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 주었다.
“더구나 그 일만이 귀주성 향방군을 단 한 시진 만에 박살을 냈지요.”
“귀주성 향방군? 귀주성에 무슨 향방군?”
원래 귀주성은 금사 왕부가 있던 곳이다. 그곳을 점령한 안창에 의해 귀주성 향방군은 모조리 해산되고, 그곳에서 얻은 것은 폭정에 항거해 일어난 지원군뿐인 걸로 알려져 있었다.
“안 순무의 계책이었지요. 사람들은 몰랐지만 당시 귀주성 향방군을 지휘하던 호광 도지휘사는 안 순무에게 은혜를 입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지요. 금사 왕부가 힘없이 무너진 것은 바로 그들의 인연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답니다.”
“그 말은 경공 왕부가 귀주를 점령할 때 그렇게 살아남아 있던 귀주성 향방군이 반항을 했다는 말이오?”
“예. 당시 그로 인해 귀주성으로 진입하던 좌군도독부 휘하의 기마대가 몰살당했지요. 놀란 경공왕은 급한 대로 자원한 낭인 부대를 귀주로 진입시켰고, 일만의 낭인 부대는 오만에 달하던 귀주성 향방군을 단 한 시진 만에 괴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그 낭인 부대는 진짜 낭인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그만한 무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은 몇 개 없다. 우선 마교와 정천맹이 있고, 남쪽에 찌그러져 있던 사패련이 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당시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상황에 있지 못했다.
그렇게 본다면 그들 외에 다른 세력이라는 말인데, 중원에 그만한 무인들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삼천…….”
고덕의 입에서 이 갈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디가 되었든 제 삼의 강호 세력이 개입했었어요. 한데 그 세력이 이번엔 척회 왕부와 협조하고 있었단 거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은 경공 왕부의 중요 무장인 서필 장군의 여동생을 납치했어요. 왜일까요?”
호철랑의 물음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왕팔이 답했다.
“무언가 그들이 원하는 대로 경공 왕부가 말을 듣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요?”
왕팔의 의견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지금쯤 경공왕은 시체여야 해. 그들의 능력상 그만한 일은 식은 죽 먹기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 다른 힘이 작용했다는 말이 아닐까요?”
“또 다른 힘……?”
“그 제 삼의 무림 세력이 삼천이라고 했죠?”
“그렇소만…….”
고덕의 답에 호철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천, 세 개의 하늘. 말 그대로라면 그들은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세 개의 세력이 뭉쳐 있는 게 아닐까요?”
호철랑의 말에 고덕의 눈이 반짝였다.
차면 흘러넘치는 것이 진리다. 힘도 마찬가지다. 차면 흘러넘친다. 때론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고, 조용히 세력의 분리로 분출되기도 한다. 삼천 정도의 능력을 안고서도 밖으로 나서지 않고 오랜 기간 암중의 지배자 역할을 해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가능성이 없다고 못하겠구려. 하면, 서로 다른 곳이 지원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 거요?”
“아닐 수도 있어요. 그간 유심히 살핀 바에 의하면 경공 왕부를 도왔던 낭인 부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그 말은 무슨 뜻이오?”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이동한 뒤 경공 왕부의 세력권 안에선 사라졌다는 말이에요.”
“하면……?”
“경공왕이 예상외로 강력한 상대의 능력에 겁을 먹었을 수도 있어요. 이 경우 지금 보이는 경공 왕부의 대처도 설명이 되지요.”
“한데, 약속을 어긴 경공왕을 삼천이 그냥 두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소.”
“그것에 삼천의 속내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말이오?”
“삼천에서 힘이 처지는 쪽이 경공 왕부에서 일을 도모했어요. 하지만 경공왕이 겁을 먹고 약속을 저버렸지요. 아마도 배신을 당한 쪽은 화를 냈을 거예요. 고 대협이 말한 대로 경공왕을 죽이려고 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행동을 삼천에서 위 서열에 있는 곳이 반대하고 나섰다면요?”
호철랑의 말을 듣자니 그럴싸하다.
“가능성은 있는 말들이오?”
고덕의 물음에 호철랑의 시선이 은영에게 향했다.
“확인해보면 확실히 알게 되겠죠.”
그 말에 고덕과 왕팔의 시선도 은영에게 쏠렸다.
갑자기 사람들의 시선을 받게 된 은영은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저, 전 그런 사정은 전혀 모르는 걸요.”
“알아. 동생이 답하라는 건 아니니까.”
“그럼요?”
“아무래도 동생네 집에 가봐야겠어.”
“예~ 에?”
놀라는 은영의 시선엔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과 왕팔의 모습이 보였다.
* * *
일행의 결정을 은영은 거부할 수 없었다. 진중한 표정의 고덕이 ‘부탁한다.’라고 한 까닭이다.
그런 연유로 일행의 행선지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소흥 왕부를 향해 남하하던 그들의 행로가 청해가 있는 북쪽으로 변경된 것이다.
바람처럼 달리는 고덕과 미친 듯이 쫓아오는 왕팔의 노력(?) 덕에 고덕 일행이 청해의 성도인 서녕에 도착한 것은 오 일 만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날 밤, 고덕은 은영과 함께 시내에 위치한 도지휘사사로 스며들었다.
톡톡.
잠을 자던 서필은 이상한 감촉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잠자다 당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서필은 마치 평소처럼 담담하게 일어나 앉으며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뭐 이렇게 태평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나?”
“내 방에 이렇게 조용히 들어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인데, 내가 호들갑을 떤다고 살겠는가?”
“흠…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포기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런 것이나 평하자고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로 왔나? 이번에도 동생 이야기라면 내 답은 그때와 같네. 난 그대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 다만 그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내 이 목을 걸고 맹세하지. 반드시 복수할 걸세.”
서필의 말에 그림자의 음성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뭐, 대범은 하네. 지금 상황에서 저런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걸 보면. 어둡다. 불이나 좀 켜라.”
“뭐?”
여태 자신의 방에 무사히 침입했던 이들은 단 두 번. 하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요구를 전하다가 자신의 거절에 화를 내며 떠났을 뿐이다. 그 누구도 불을 켜라 말한 적이 없었다.
당연한 것이 불을 켜면 방 안의 사람 수가 그림자로 밖에 드러난다. 필연적으로 경호 병력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게 되고, 방으로 들이닥치는 것이다.
무사히 탈출할 능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런 거추장스러운 일을 도모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서필은 의아하기만 했다.
여하간 상대가 원하는데 못할 이유는 없다. 더구나 자신에겐 이익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이내 불을 밝히자 방 안이 환해졌다.
“여, 영아!”
놀란 서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낙담했던 동생이 살아 돌아왔으니, 그 놀람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
자신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오라비의 마음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서운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그 탓에 은영의 음색엔 아직도 슬픔이 낮게 깔렸다.
“네가, 네가 정녕 돌아왔구나. 고맙다, 고마워…….”
눈물마저 글썽거리는 서필의 모습에 은영도 눈을 적셨다. 서운한 건 서운한 거고, 하나뿐인 피붙이를 다시 만나니 서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해우에 방해꾼들이 들이닥쳤다.
우당탕탕탕-
“장군!”
문을 부술 듯이 밀치며 호위병들의 방 안으로 난입했던 것이다.
그런 호위병들의 난입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서필이 가만히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안부터 해결해나갔다.
“네가 이렇게 돌아온 것은 한없이 기쁜 일이다만,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눈물을 짓던 것도 잠시. 곧바로 사무적으로 돌변하는 오라비를 바라보는 은영의 눈엔 또다시 서운함이 깊게 자리 잡았다.
“이분의 도움이었어요. 오라버니가 그들의 조건을 거절하면서 위기에 처해 있던 절 구해주셨죠.”
은영의 답에 서필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이 여동생에겐 얼마나 잔인한 결과를 가져왔을지는 충분히 짐작하고 남기 때문이다.
“다행이구나…….”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서필은 애써 그 말을 밀어 넣었다.
“네, 다행이지요.”
하지만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은영의 음성은 조금 더 차가워졌다. 그런 여동생을 일별한 서필이 호위병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내 손님들이다. 괜찮으니 물러가라.”
서필의 명에도 불구하고 호위병들은 미적거렸다. 혹시나 협박을 받아 하는 말인지 몰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까닭이다.
“아무 일 없으니 물러가라.”
서필의 재촉이 있고서야 호위병들은 마지못해 물러났다.
“미안하오. 저들의 임무이니 이해해주시오.”
이젠 상대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던지 고덕을 향해 사과를 전하는 서필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소.”
“이해해줘서 고맙소.”
고덕에게 포권을 취해 보인 서필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오. 앉거라.”
자신의 권유에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서필이 물었다.
“그들의 정체는 알 수 있겠더냐?”
고생하지 않았느냐, 아프진 않으냐, 험한 일은 당하지 않았더냐,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던 은영의 눈엔 조금 더 깊어진 슬픔이 자리를 잡았다.
“척회 왕부의 사람들과 달단의 병사들이 집결해 있었어요.”
“척회 왕부… 그럴 줄 알았다. 한데 달단의 병사들이라니, 그건 무슨 소리냐?”
서필의 물음에 고덕이 끼어들었다.
“그 문제로 상의를 좀 했으면 하오만.”
“상의요?”
“내 동료들이 있소. 그 문제에 대해 상당히 깊은 정보와 설명을 가진 이들이오.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소만.”
고덕의 말에 서필의 시선이 여동생에게 향했다. 오라비의 시선을 받은 은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만한 분들이에요. 만나 보신다고 해도 손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이 어디에 있소?”
“시내의 화란이란 객잔에 머물고 있소이다. 가서 왕팔이란 자를 찾으면 될 게요.”
고덕의 말에 서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사람을 보내 그들을 이리로 데려오겠소.”
그 말에 고덕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시 후, 시내의 객잔으로 사람을 보낸 서필이 고덕과 은영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사람이 늘어나면 좁은 자신의 침방보다는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응접실로 자리를 옮겨 기다리길 얼마. 도지휘사사에 속한 한 장수의 안내로 왕팔과 어느새 남장으로 돌아가 있는 호철랑이 들어섰다.
“청해성 도지휘사사에 몸담고 있는 지휘동지 서필이라 하오이다.”
장황한 소개에 이채를 머금은 왕팔이 먼저 답했다.
“왕팔입니다.”
누구를 닮았는지 그의 짧은 소개에 이어 서필에 못지않은 호철랑의 정식 소개가 이어졌다.
“중군도독부 부도독 겸 소흥 왕부의 군사인 호철랑이라 하오이다.”
호철랑의 대응에 고덕과 왕팔은 고소를 지었지만, 서필은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부릅떠졌다.
“주, 중군 부도독을 뵙습니다.”
일단은 상급자다. 서로 모시는 주인이 다르다고는 하나 대명제국으로 보면 분명한 상급자이니, 서필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었다.
“과례는 되었습니다. 난 그저 진솔한 대화를 원할 뿐입니다.”
호철랑의 말에 어느 정도 놀람이 가라앉은 서필이 새로 들어온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도 앉았다.
“흠… 진솔한 대화라……. 어떤 부분에서입니까?”
경계심이 가득한 서필의 물음에 호철랑이 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소흥 왕부를 위해 일하라는 따위의 말은 아니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에요.”
“그 말씀은…….”
“당면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뿐입니다.”
“당면한 문제라 말씀하신다면……?”
“가깝게는 동생분을 납치한 세력에 대한 이야기이고, 멀게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호철랑의 말에 서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외세의 침략이라면… 혹시 영아가 말했던 달단의 병사들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은영 소저가 말할 만한 달단의 병사들이라면 그들뿐이겠지요. 맞습니다.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아도 그렇고 부도독께서도 말씀하시는 달단의 병사들이라니, 저는 금시초문입니다만…….”
“휘하의 향방군을 모조리 동원해놓고 계신 분의 말씀으로는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군요. 여전히 의심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이 헛수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호철랑의 핀잔에 서필의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흐음…….”
한동안 고심의 표정이던 서필이 모종의 결심을 굳혔던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지요. 네, 맞습니다. 저희도 달단의 대규모 병력이 이동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해 그에 대응 중입니다. 하지만 척회 왕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금시초문입니다.”
“사실대로 말씀해주시니 말하기가 편하군요. 일단 달단은 제쳐 두고 척회 왕부의 일부터 마무리 짓지요. 사실 납치를 당한 것은 은영 소저만이 아닙니다. 경공 왕부는 물론이고, 영상 왕부와 소흥 왕부, 거기에 황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납치를 당했습니다.”
“서, 설마!”
일단 부정부터 하고 보는 오라비의 모습에 은영이 끼어들었다.
“사실이에요, 오라버니. 그 안에 있을 때 만난 여인들은 모두 각 파벌에 속한 고관대작들의 여식들이었어요. 특히 무관들과 관계있는 여인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저, 정말이냐?”
“예. 모두 사실이에요.”
은영의 답에 서필의 안색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사안이 너무 크다는 사실을 인지한 까닭이었다.
“하면 그들의 계획이 도대체 뭐랍니까?”
“다른 파벌의 중요 무장들을 협박하거나 회유해서 얻을 게 과연 뭐겠습니까?”
“그럼… 군권의 장악?”
“서필 장군처럼 거부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장악은 어려울 테고, 혼란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그렇게 일어난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 겨우 잠시간의 혼란에 만족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입니다.”
서필의 의견에 호철랑이 미소를 지었다.
“척회 왕부만 따로 떨어트려 생각하면 틀린 말씀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 뒤에 수십만의 달단 대병을 끼워 넣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그 말씀은 달단의 병력과 척회 왕부가 결탁하여 나라를 도모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달단의 대병을 지원병으로 끌어들인다고 해도 제국 자체를 도모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혼란으로 인해 초기 대응이 부실한 상태에서 달단의 병력을 이용해 경공 왕부를 날려 버리고 영상 왕부나 소흥 왕부를 도모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요.”
“서, 설마…….”
“설마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있는 일입니다. 외적의 침입임에도 다른 곳들이 척회 왕부가 납치한 이들과 연계된 자들로 인해 혼란을 맞으면 제대로 된 초기 대응은 물 건너갑니다. 그렇게 되면 최소한 경공 왕부는 홀로 삼십만에 달하는 달단의 대병을 맞아야 합니다.”
“흐음…….”
절로 침음을 흘리는 서필을 바라보며 호철랑이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지요. 영상 왕부나 소흥 왕부도 무사하지 못합니다. 양쪽 모두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척회 왕부에게 일격을 당할 테니까요.”
“하면 부도독께선 어찌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공동 대응만이 살길입니다.”
“공동 대응이라…….”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귀담아듣지요.”
호철랑의 말에 서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다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서필이 답했다.
“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조언을 드린다면 다른 무장들보다는 경공 왕야와 직접 상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납치를 당했다는 여인들과 연관된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누가 그렇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 일로 상의를 한다면 일을 시작해보기도 전에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호철랑의 경고에 서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왕야께 서신을 보내 보지요. 한데, 왕야께서 직접 만나길 원하신다면……?”
“가지요. 일의 중함이 큽니다. 사사로운 안위를 따질 때가 아니지요.”
“알겠습니다. 왕야께도 그리 적어 올리겠습니다.”
서필의 말에 동의한 호철랑과 일행은 청해성 도지휘사사의 관청 안에 마련된 객사로 안내되었다. 경공왕의 답신이 오기 전까진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게 생긴 것이다.
* * *
경공왕의 답신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오 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아무리 전서구를 이용한 긴급 연락망을 통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양측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대단히 신속하게 일이 진행되었음을 뜻했다.
호철랑을 만나볼 의향이 있다는 경공왕의 답신에 따라 고덕과 일행이 출발 준비를 갖추자, 은영이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놀란 서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서필이 준비해준 일단의 기마대에게 호위를 받으며 떠나는 고덕 일행엔 은영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경공 왕부가 위치한 사천성의 대읍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청해의 서녕을 출발한 지 십여 일이 지나 도착한 대읍은 완전히 전시체제에 가까웠다. 성문에서부터 대로변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한 군병들이 자주 눈에 뜨였고, 성문에서 벌어진 검문과 성내에서 행해지는 기찰도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로 미루어 최근에 무언가 사단이 벌어졌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성문 수비병의 안내로 왕부로 들어선 고덕 일행은 이내 왕부 장수들의 감시 겸 호위 아래 왕부의 객사로 안내되었다.
“잠시 기다리시면 연락이 있을 겁니다.”
왕부의 고위 무장으로 보이는 이의 말에 고덕과 일행은 꼼짝없이 왕부 객사에 발이 묶여 버렸다. 그렇게 객사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왕부의 총관을 맡고 있는 하송이라 합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송구합니다.”
정중한 사과에 호철랑이 고개를 저었다.
“긴 여행의 피로도 풀 겸 나쁘지 않은 휴식이었으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혹여 중군부도독이 어떤 분이신지……?”
하 총관의 물음에 호철랑이 미소로 답했다.
“접니다.”
“이, 이런 결례가……. 죄송합니다. 전혀 무장으로 보이지 않으신지라…….”
“맞습니다. 무관이 아닌 문관이랍니다.”
문관이 부도독을 맡았다는 것은 지략가란 뜻이다. 하긴 서필이 보낸 서신엔 소흥 왕부의 군사를 겸임하는 자라고 쓰여 있긴 했다. 그 점을 간과한 실수였다.
“송구합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그리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중히 사죄해오는 하 총관에게 호철랑이 물었다.
“그나저나 왕야께서는 언제…….”
“그것이… 현재 왕부에 작은 사단이 벌어져서 바로는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라면……? 저희가 알면 안 되는 일입니까?”
“그렇진 않습니다. 지난밤에 일단의 자객이 들어 몇몇 장수가 상한 터라…….”
“자객이요?”
놀라는 호철랑의 물음에 하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보다는 덜했지만 꽤나 삼엄한 경비망이 펼쳐져 있었음에도 사람이 상할 때까지 발견할 수 없었답니다.”
조용히 일을 진행하던 척회 왕부가 자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의 행보가 빨라진다는 뜻도 되었다. 결국 그만큼 이쪽이 대처할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의미였기에 호철랑이 다급해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 즉시 왕야를 만나 뵐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하나, 지금은…….”
“시간이 흘러 실기하면 경공 왕부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호철랑의 과격한 말에 놀란 표정의 하 총관이 입을 열었다.
“무언가 대책은 있으신 겁니까?”
“없으면서 적지나 다름없는 곳에 와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습니다.”
호철랑의 말에 잠시 갈등하던 하 총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기다리는 시간이 적을수록 경공 왕부가 살아남을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그 말에 하 총관의 답이 바뀌었다.
“좋습니다. 절 따르시지요.”
앞서 가는 하 총관의 뒤를 일행이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