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장. 전운(戰雲)-두고 보지 못하다
결국 날이 완전히 저물고, 달이 뜨자 고덕은 기다림을 포기했다. 지금까지 오지 않는다면 놈들은 황무지 중간에서 자리를 잡고 밤을 나고 있든지,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본진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양쪽 모두 고덕에겐 반갑지 않은 일이었지만, 상황이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나서서 찾아가는 거.
하지만 이때도 문제는 남아 있다. 그들의 상황이 정확히 어떤 것이냐 하는 부분이다.
정말로 황무지의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면 뒤를 되짚어 나가야 할 것이고, 본진으로 이미 들어갔다면 그 안으로 숨어들어 왕팔과 호철랑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고덕이 움직여야 할 방향이 완전히 반대란 이야기다.
한참을 고심하던 고덕의 시선이 뒤쪽을 돌아본다. 한밤중엔 불을 피우기 나름이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드넓은 황무지라도 그 불빛을 발견하기가 쉬워진다.
결국 찾기 쉬운 쪽으로 결론을 내린 고덕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은영을 들쳐 업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저물기 전까지만 해도 어슴푸레하게 보이던 놈들의 본진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두워진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민간인도 아니고 군영이다. 한두 개의 모닥불이 아니라 수백, 수천 개의 모닥불이 피워졌을 곳이 저렇게 깜깜할 수는 없었다.
연신 고개를 젓던 고덕은 결국 갑자기 보이지 않는 본진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에 본 거리대로라면 반 각 안에 도달할 터였지만, 일각을 달려 대도 본진은커녕 본진이 머물렀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린 고덕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로부터 반 시진을 더 달려서야 고덕은 본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란 눈으로 주변 정경을 확인하자 저 멀리 자신과 왕팔이 몸을 숨겼던 언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진짜 본진이라는 것을 확신한 그는 뇌리를 스치는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신기루…….
“빌어먹을.”
그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린 고덕은 짧은 푸념 끝에 또 다른 언덕을 찾아 그늘로 들어섰다.
들어서기 무섭게 고덕은 그동안 업고 있던 은영을 내려 몇 군데의 혈도를 쳤다. 이제까지는 억지로 깨울 필요가 없었지만, 놈들의 본진으로 숨어 들어가려면 은영을 등에 업고서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은영이 눈을 뜨자 고덕이 빠르게 설명했다.
“잠시 저 안에 들어갔다 나올 생각이야. 꼼짝 말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어.”
말과 함께 고덕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바라다본 은영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왜, 왜 아직도 이곳에……?”
“문제가 생겨서 다시 올 수밖에 없었어. 하니, 내가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그 말을 남기고 벌써 움직이는 고덕에게 은영이 다급히 물었다.
“다, 다시 올 거죠?”
은영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러니 기다려.”
“아, 알았어요.”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은영을 일별한 고덕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라고는 하나 도처에 모닥불이 밝혀진 까닭에 군영은 대낮처럼 밝았다. 그 탓에 고덕은 그늘을 통해 숨어드는 대신 이전처럼 드러내놓고 걸었다.
이미 써먹었던 방법을 다시 쓰는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우습게도 달단의 병사들은 전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놈들의 본진을 뒤적거리던 고덕은 중원 복식의 문사복을 차려입은 사내를 발견했다. 더구나 달단 병사들이 그에게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보아 꽤나 고위급인 듯하자 곧바로 그의 뒤를 밟았다.
소피를 보러 나왔던 길인지 군영 외곽에서 일을 해결한 놈은 천천히 걸어 자신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돌며 천막 안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고덕은 순식간에 천막 앞에 서 있던 경비병의 목을 돌려 꺾어 안은 채 천막 안으로 돌입했다.
털썩-
목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진 채 숨이 끊어진 경비병을 내던진 고덕의 신형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이에게 폭사되었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명혼을 뽑아 목에 댄 고덕이 물었다.
“소리를 지르는 순간 네놈의 목을 뽑아버릴 테니까 잘 생각해서 행동해.”
위협을 가한 고덕이 천천히 손을 뗐지만, 상대는 다행히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누, 누구요?”
“알면 다치는 사람.”
“그 무슨…….”
“다른 건 알 것 없고, 오늘 도망쳤다가 다시 잡혀 온 사람 있지?”
고덕의 물음에 사내가 이채 어린 시선을 던졌다.
“당신이로군. 그녀를 빼갔던 자가?”
“함께 잡힌 이가 있었을 텐데?”
“있긴 했지만 능력이 되어 보이지 않더군.”
비로소 고덕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들어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여하간 그들의 소재가 확인된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알려 줄 거라 생각하나?”
“안 알려 주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신과 똑같은 화법으로 되받아치는 고덕을 노려보던 문사복의 사내, 유현은 설핏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알려 주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나?”
“네가 알려 줬다고 누가 떠벌리고 다니기라도 한다던가?”
“사람의 입만큼 믿을 수 없는 건 없지.”
유현의 느물한 답에 고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군.”
“자객들이 좋아하는 목표 중 하나라서 말이야.”
“운이 좋았던 모양이군.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걸 보면.”
“운이 아니라 그만한 실력자를 주변에 두었던 까닭이지.”
상대의 말에 고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뭐, 이놈?”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막 기둥 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어, 어찌!”
놀라는 유현의 눈엔 그동안 숱한 위험에서 자신을 지켜 오던 호위가 혈도를 제압당해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미동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 죽이진 않았어. 협조하면 선물로 주지.”
고덕의 말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유현이 물었다.
“보아하니 관인은 아니고 강호인 같은데, 그녀를 구하려는 이유가 뭐지? 혹시 동북어위도총사에게서 의뢰를 받은 것인가?”
“그 양반하고는 그럴 만큼 친하지 않아.”
고덕의 말에 눈을 반짝인 유현이 물었다.
“하면 소흥왕인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 소리지?”
“의뢰가 아니라 부탁을 받긴 했지만, 그런 부탁이 아니어도 찾으러 와야 했다는 말이야.”
“그녀를 아나?”
유현의 물음에 고덕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자- 잡설은 집어치우고, 그들의 위치?”
“지금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나?”
“응, 몰라. 관심도 없고. 난 그저 내 지인만 찾아가면 돼.”
“나라가 바뀔 수도 있는 일이야. 그걸 모른 척할 거란 말인가?”
놀람이 깔린 유현의 음성에 고덕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가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진 않아. 더구나 외세를 끌어들인 너희와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상황도 아니고.”
고덕의 지적에 유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왕부들끼리 찢어져 지내다간 중원은 오호십국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란 걸 왜 몰라?”
“오호십국이고 백국이고, 그 시대엔 그 시대만의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렇게밖에 살지 못했다면 고생을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그걸 바로잡을 수 있는 이들이 외면한 결과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지금의 그대처럼.”
유현의 말에 고덕이 피식 웃어 보였다.
“상당히 말을 잘하는군. 까딱하면 넘어가기 쉽겠어.”
“사탕발림이 아니야.”
“사탕발림인지 진실인지 난 그런 거엔 관심이 없어. 그저 내가 찾는 이들과 평소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니까. 나라를 세우든 말아먹든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정녕……!”
“그만 떠들어. 소란스러운 건 정말 질색이니까.”
제법 잘 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고덕의 신위가 변했다. 단지 인상 하나 쓴 것뿐인데, 천막 안은 마치 폭발 직전의 긴장감으로 들어찼다.
그러고 보니 적운을 제압한 것도 눈앞의 사람일 공산이 높았다. 그러면 역전의 장수들도 고개를 돌릴 정도로 적운을 참혹하게 다룬 이와도 동일인이라는 말이 된다. 그걸 인식한 유현의 목으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불어.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조금 고통스러울 거야.”
비로소 확실해졌다. 적운을 다룬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이라는 걸.
“적운을 고문한 것이 그대로군.”
“적운……? 아! 그 고독 다루는 놈.”
“고독? 그래… 그랬었군. 이제야 그가 인질을 통한 협박을 받아들인 이들을 통제했던 방법을 알 거 같군.”
“그랬나? 하긴 고독을 이용하면 상대에게 변심하지 못하도록 금제를 가할 수 있다는 말도 들었던 것 같긴 하네. 자- 사담은 그만. 이제 결정하지. 여전히 말할 생각은 없나?”
“그녀를 풀어주면 우린 진다.”
“그건 너희 책임이지.”
“그래, 결국은 내 책임인 거지. 어떨 거 같나?”
유현의 물음에 고덕은 답 대신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문에 버텨 본다는 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 원한다면 할 수 없지.”
명혼을 검집에 넣으며 손을 푸는 고덕의 모습에 유현은 눈을 감았다. 제발, 고문이 깊어지기 전에 죽을 수 있기를 빌면서…….
* * *
천막 주인의 것으로 보이는 비단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고덕이 말했다.
“대체로 사람의 혈맥은 팔만 사천 개라고 해. 그보다 몇 곱절은 많은 핏줄들에 공급되는 피는 모두 그곳을 통해 지나가지. 그 말은 혈맥만 막아놓으면 피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지금 너처럼.”
고덕의 시선이 닿은 곳엔 생으로 배가 갈린 채 장기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거나 바닥으로 흘러내려 있는 유현의 모습이 보였다.
“피가 흘러나오지 않으니 죽지 않지. 간혹 충격을 받고 죽는 이들도 있지만 백회혈을 열어놓으면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자- 이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할까? 그들은 어디에 있나?”
“으으으윽…….”
답은 않고 신음만 흘리는 유현의 모습에 혀를 찬 고덕은 버젓이 드러난 갈비뼈 하나를 천천히 생으로 잡아 뽑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커다랗게 비명을 지르는 유현이었지만, 그 소리는 천막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덕이 천막 전체를 기막으로 둘러싸 소리를 차단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높아져 가는 유현의 비명은 천막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살점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갈비뼈와 정강이뼈를 쌓아둔 고덕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철혈의 무인들도 버티지 못한 고문을 유약한 문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강단이 있어. 그럼 너는 어떨까?”
고덕의 시선이 혈도가 제압당한 채 바닥에 쓰러져 그 모든 걸 지켜보던 호위 무사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접한 호위 무사의 눈은 격렬하게 떨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지 고덕의 손이 호위 무사에게 향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른 음성의 비명이 천막 안을 울려 댔다.
그렇게 이각이 흐르고…….
천막 안을 둘러보는 고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문인은 간과 비장이 뜯겨 나가면서도 버틴 고문을, 철저하게 단련된 호위 무사는 갈비뼈가 뜯겨 나가는 순간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고덕은 손을 닦은 비단 수건을 던져 놓은 채 천천히 천막을 벗어났다.
그 천막 안엔 시신 한 구와 아혈이 제압당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호위 무사가 생으로 배가 갈라진 채 남겨졌다.
유현의 천막을 나온 고덕은 호위 무사에게서 들은 위치로 재빨리 움직였다. 호위 무사가 실토한 내용으로 보면 해당 천막을 지키는 것은 자신이 죽였던 적운이라는 괴인의 동료들이라고 했다.
그 말은 달단의 병사들이 아니라 무공을 익힌 중원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쉽지 않은 행사가 될 공산이 높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상대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방법뿐이다. 이른바 속도전. 빠르게 움직이는 고덕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깃들었다.
유현의 호위 무사가 거론했던 검은색 수기가 달린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입구에 선 놈은 둘. 하지만 그 주변으로 어리는 기세의 감각은 다섯이다.
빠른 걸음에서 섬보로 바꾸었다.
푸황-
거친 바람과 함께 고덕의 신형이 천막 앞에서 튀어올랐다.
퍼벅- 우둑, 스걱- 촤악.
각기 다른 음향 끝에 천막 앞을 지키던 다섯이 시신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미처 그들에게서 피가 흘러나오기도 전에 천막 안으로 뛰어든 고덕을 향해 각종 암기들이 쏟아졌다.
피하고 막고 할 시간도 아까웠던 고덕의 전신으로 막강한 호신강기가 휩싸였다. 암기들은 그렇게 두껍게 고덕을 감싼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그 상황에 당황한 이들의 모습이 고덕의 시야에 잡혔다. 목표는 일곱. 고덕의 손이 그들을 가리키는 순간, 다섯의 몸에서 혈인이 그 악마 같은 모습을 이끌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둘은 잠시 움찔한 것이 다였다. 적어도 초극에 이른 강자라는 의미. 곧바로 고덕의 손을 쫓아 현월이 날았다.
퍼걱-
창졸간에 둘을 절단낸 현월이 사라지자, 고덕의 발길이 멈추었다.
장애물들은 모두 제거했는데 결정적으로 구출할 대상이 천막 안에 없었다.
“제길.”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한 고덕이 천천히 천막을 벗어나자, 어느 틈에 둘러쌌는지 서른가량의 무인들이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고 서 있었다.
“함정이었나?”
고덕의 물음에 천막을 둘러싼 이들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의도된 함정은 아니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
그자의 뒤로 정신을 잃은 왕팔과 재갈이 물린 호철랑의 모습이 보였다. 문제는 그 둘을 잡고 있는 것이 무인들이 아니라 달단의 장수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뒤로는 새카맣게 몰려든 달단의 병사들이 가득했으니까…….
무인들의 경지는 최소 초극. 난데없이 이렇게 많은 초극의 무인들이 튀어나올 곳은 한 곳뿐이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상황에 맞지 않게 고덕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어렸다.
“웃어? 미친 모양이군.”
상대의 빈정거림에 고덕이 답했다.
“맞아, 미치게 좋군. 삼천의 개들을 쳐 죽일 기회가 왔으니 말이야.”
고덕의 입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거론되자 무인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누구지, 너는?”
“너희가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
순간, 자신들의 천주가 척살령을 내린 인물의 이름이 떠올랐다.
“거, 검마!”
놀라는 상대에게 고덕은 답 대신 현월을 쏘아 보냈다.
서걱-
상대를 그대로 세로로 쪼갠 현월이 그 뒤에 늘어선 이들을 덮쳤다.
퍼걱-
부지불식간에 강기를 씌운 검으로 막아섰던 무인 둘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현월도 그 둘을 잡아먹는 것으로 소멸되었다. 역시 초극의 고수를 상대로는 전력을 기울이지 않은 현월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고덕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으로 현월을 뿌렸다. 한둘만 잡고 사라진다고 해도 충분할 만큼 그의 내력은 충만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주변을 휘젓는 현월의 사이로 노란 달무리가 일었다.
쾅-
항상 현월을 적의 코앞에 투입하기 위해 사용되던 공간권이 이번엔 제대로 펼쳐졌다.
달무리가 걷혀진 곳에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고덕의 주먹이 삼천의 무인 둘을 치고 빠졌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짓터져 절명한 둘의 시신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섬보로 신형을 옮긴 고덕의 명혼이 섬혼의 결을 타고 적의 목을 베어냈다.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목이 날아간 셋의 신형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섬보로 이동한 고덕의 신형은 어느새 왕팔과 호철랑을 붙잡고 있던 달단 장수들 앞에 도달했다.
“마, 막아!”
놀란 외침 속에 주변의 달단 병사들이 창을 내질렀다. 순간, 고덕의 손이 펼쳐져 양측을 향했다.
퍼버버버벅-
수도 없는 파육음 속에 악마의 핏빛 칼날이 병사들을 뚫고 튀어올랐다. 내력이라곤 익혀 본 적도 없는 일반 병사들에게 혈인은 죽음의 선고와 같았다.
몰려 있던 수백의 군병이 동시에 죽어 나자빠지자 고덕은 곧바로 왕팔과 호철랑을 잡고 있던 달단 장수를 향해 손을 그었다.
이미 검의 존재 유무와는 상관없는 경지에 들어선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목표가 된 달단 장수의 목 언저리가 주변의 공간과 함께 어긋났다.
공간도를 이용해 달단 장수의 목을 단숨에 베어버린 고덕은 힘없이 쓰러지는 그에게서 왕팔과 호철랑, 두 사람을 받아들어 그대로 내뺐다.
“쫓아라!”
우렁찬 음성에 병사들과 살아남은 무인들이 함성을 지르며 따라왔다. 잔인한 미소를 지은 고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월을 날렸다.
순간 이십여 개의 현월이 무리를 지어 뒤를 쫓는 이들을 덮쳤다. 먼저 목표였던 무인들이 두 동강이 나 떨어졌고, 병사들 속으로 길게 피를 이끌며 파고든 현월은 강력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사방으로 잘려 나간 사지와 조각난 육편이 비산했다.
어림잡아도 수백은 넘는 달단 병사들이 단박에 죽어나가자, 뒤를 쫓던 병사들의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놀라기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들도 마찬가지. 차마 계속 쫓으라는 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추적을 거부한 고덕은 근처 언덕에서 기다리던 은영까지 챙겨 곧바로 가욕관을 향해 달렸다.
* * *
가욕관에 도착한 고덕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발길을 다시 옮겼다. 병사들을 비롯한 아무런 방어 기재가 없는 가욕관에서 머물기엔 위험하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이동한 고덕이 발길을 멈춘 것은 섬서성의 성도인 난주였다.
소흥 왕부에 몸을 담고 있는 호철랑에겐 적지나 다름없는 지역이었지만, 섬서성의 경비 병력이 그녀의 용모파기를 들고 본격적으로 찾으려 들지 않는 이상은 그다지 상관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판단대로 별 어려움 없이 성내로 들어선 고덕과 일행은 곧바로 의원을 찾아 움직였다. 고덕과 은영은 물론이고 호철랑도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도주 과정에서 수십 발의 화살에 격중되었던 왕팔의 상세는 생각 외로 심각했기 때문이다.
“어렵겠소.”
왕팔을 한참 동안 살핀 의원의 말에 고덕의 표정이 굳었다.
“하면, 죽는단 말이오?”
“이미 맥이 서맥으로 변한 지 오래인 듯하오. 그 탓에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해 혈관 곳곳에 죽은피가 고였소. 대라신선이라면 모를까,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오.”
난주에 들어서자마자 용하다는 의원을 일부러 수소문해 찾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못 고친다면 난주에선 치료가 가능한 의원을 찾기 어렵다는 말과 같았다.
“만에 하나 죽은피를 제거하고 피만 돌면 치료는 가능한 거요?”
“그렇게만 된다면 가능성은 있겠소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오.”
“그건 해봐야 아는 일.”
의원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정신이 없는 왕팔을 호철랑과 은영의 도움으로 일으켜 앉혔다. 연후 그의 명문혈에 장심을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한 번 해본 일이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한다면 말이 안 되지.’
속으로 중얼거리는 고덕의 말대로다. 이미 청여를 상대로 해본 운기요상이다. 물론 청여는 그렇게 시도하다 죽어도 그만인 자였고 왕팔은 그렇지 않았지만, 방법은 달리 없었다.
결국 눈을 감은 고덕의 장심을 통해 진기가 왕팔의 몸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흘러든 진기가 왕팔의 전신을 장악하자 미미한 반탄기가 왕팔을 붙잡고 있던 호철랑과 은영을 밀어냈다.
“어어!”
당황한 두 여인들의 걱정과 달리 고덕의 진기에 장악당한 왕팔의 몸은 앉은 자세 그대로였다. 이후엔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 고덕의 치료가 계속되고 있었다.
혈맥을 씻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왕팔의 심장에서부터 강하게 밀어낸 내력이 핏줄들을 타고 맑은 피를 몰고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썩은 피를 몸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어느 한곳에 뭉쳐 있다면 차라리 그쪽에 상처를 내어 뽑아버리거나 폐로 몰아 피를 토하게 만들겠지만, 왕팔의 경우엔 혈관 도처에 널린 상태라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맑은 피와 썩은 피를 번갈아 돌리던 고덕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호신강기는 팔만 사천 모공, 이른바 각 혈맥들에서 기를 뿜어 기막을 형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혈맥들은 그렇게 피부와 접한 곳에 위치하기 나름이다. 그 말은 혈맥들을 통할 경우 썩은 피를 밖으로 빼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만들자면 왕팔의 내력이 썩은 피와 함께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아 있는 왕팔의 내력은 그럴 만한 양이 되지 못했다. 결국 왕팔의 내력으로 하지 못한다면 그 안에 스며든 고덕의 내력이 대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되면 내력의 소모율은 극도로 커진다. 호신강기를 유지하기 위해 뿜어내는 내력은 내 몸에 펼쳐도 오랜 시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양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타인의 몸에 펼칠 때야……. 하지만 왕팔의 죽음을 방치하지 않는 이상 고덕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심을 굳힌 고덕의 전신에서 미미한 진동이 일었다. 그가 가진 막대한 내공이 요동을 치며 움직이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런 연후 괴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왕팔이 검붉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악취라니…….
“오오… 이런 기경(奇景)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의원은 지금 보이는 상황을 대번에 짐작해냈다. 썩은 피가 혈맥에서 빠져나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그런 의원의 놀람 속에 고덕의 치료는 계속되었다.
나중엔 왕팔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맑은 색을 띄자 점차 양이 줄더니, 이내 더 이상의 피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부터 왕팔의 땀구멍이 열리며, 이전의 악취는 애들 장난일 정도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땀이 쏟아져 나왔다.
오죽하면 두 여인은 물론이고, 기경에 눈을 떼지 못하던 의원마저도 황급히 방을 벗어나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두 시진이 지나서야 방을 나선 고덕의 얼굴은 병을 앓고 난 사람처럼 핼쑥해져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호철랑보다 은영의 말이 빨랐다. 더구나 그녀는 언제 준비했는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고덕의 땀을 닦아주기까지 했다.
웃긴 건 그런 은영의 손길을 고덕이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철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고덕이 물었다.
“괜찮은 거요?”
이곳으로 달리는 동안, 제대로 안부를 묻지도 못했다. 그럴 기운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에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
답하는 호철랑의 음색이 낮고 슬펐다. 처음에 그녀를 구하러 들어갔을 때 들었던 음색과는 차이가 많았다. 그 차이를 만든 근원을 찾던 고덕은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은영의 손길에서 답을 얻었다.
그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고덕이 슬며시 은영의 손을 잡았다.
“이젠 괜찮아. 내가 하지.”
“아! 예…….”
부드러운 미소인 탓에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는 것으론 보이지 않았던지 은영은 얼굴을 붉히며 선선히 물러났다.
그렇게 은영이 물러나자 고덕이 호철랑에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소?”
“예, 다행히…….”
조금 전보다는 음색에 기운이 많이 들어갔다. 그에 고덕의 미소가 짙어졌다.
“일단 팔이가 정신을 차려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소.”
“당연히 그래야지요.”
자신을 구하려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호철랑에겐 왕팔도 은인이었던 것이다.
“원한다면 먼저 움직일 수 있도록 사람을 불러오겠소만…….”
“아, 아니에요.”
고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튀어나온 답에 자신도 놀랐는지 호철랑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어버린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나중에 함께 갑시다.”
“예…….”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답하는 호철랑과 그런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고덕을 번갈아 보는 은영의 눈엔 알 수 없는 슬픔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왕팔의 치료는 생각 외로 빨리 성과를 내고 있었다. 이틀 만에 정신을 차린 것과 다르게 다음 날 곧바로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던 것이다. 그에 대해선 의원도 기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다만 후일을 위해 몸을 보해야 한다는 의원의 권유에 사흘을 더 머물며 치료를 받은 왕팔은 오히려 이전에 비해 더 팔팔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협.”
자신을 치료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다. 치료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자신의 몸속을 노도처럼 흐르는 진기가 누가 나누어준 것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 몸에 각인은 해두었다만, 법문을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될 게다. 저녁에 찾아오너라.”
그 말은 내공심법을 전해주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고덕의 내공을 이룩한 심법이니, 천하 최강을 다투는 내공심법이다.
“가, 감사합니다, 대협!”
답하는 왕팔의 음성에 감격과 놀람이 가득한 이유였다.
그날 밤 고덕이 왕팔에게 전한 심법은 천마심공이었다.
마교에서마저 실전된 이 심법은 고덕의 사문인 마총에 내려오는 진산절학이었다.
그것을 전한 연유는 치료 과정에서 거치적거리는 왕팔의 내력을 소멸시키고 자신의 내력을 심을 수밖에 없었던 고덕의 선택이었다. 고덕의 내력이 심어진 이상 그것을 다스리려면 최소한 고덕이 시작했던 것과 같은 심법인 천마심공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자신의 지금 내공을 만들어준 멸겁신혈을 전해야 하겠지만, 그건 고덕조차 제대로 된 법문을 알지 못했다. 그저 공명에 의해 시작된 내공 스스로의 진화일 뿐…….
그런저런 연유로 천마심공을 얻게 된 왕팔은 그와 함께 몇 가지 무공의 법문을 추가로 받았다.
말로는 천마심공을 익힌 자가 어디 가서 맞아 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고 했지만, 이번 일로 걱정이 들었던 고덕의 마음이라는 것을 왕팔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훗날 하오문을 개방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시킨 마풍(魔風) 왕팔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