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장. 여운(餘韻)-깊은 상처
목에 드리워진 차가운 칼날의 감촉보다 무서운 것은 상대의 눈동자였다. 피비린내 나는 야수의 본능에 무서운 광기가 번들거리는 사내의 눈동자는 그가 자신과 동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래서 적운은 두려웠다. 자신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누구냐?”
“날 모르는 걸 보면 나 때문에 노린 건 아닌 게 확실하군.”
“무슨 소리지?”
적운의 물음에 고덕은 답 대신 칼을 치웠다.
“뭐하자는 거지?”
“칼을 들고 있는 거, 생각보다 무겁거든.”
“장난을 칠 만큼 자신이 있는 건가?”
적운의 으르렁거림에 고덕이 피식거렸다.
“무슨 자신씩이나……. 그나저나 고독을 잘 다루는 모양이야?”
고덕의 물음에 적운이 흠칫거렸다.
“무, 무슨 말이지?”
“거짓말은 잘 못하는 모양이군.”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지 않은 적은 있어도 거짓을 말하고 살진 않았으니까. 생각이 그에 이르자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하긴 거짓말을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나저나 고독을 다루는 이들은 잘 보기 힘든데, 어디서 배운 거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한쪽에 놓인 의자에 편하게 기대앉는 고덕을 적운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놀러온 줄 알겠군.”
“놀러온 건 아니야. 알잖아?”
“아니, 모르겠군.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인지.”
“사람을 찾으러 왔어. 더불어 이곳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도 정리 좀 하고.”
“쓰레기라…….”
“사내자식들이 여자들이나 납치하는 걸 그럼 뭐라고 불러?”
“풋- 하긴, 그 말도 맞는군. 쓰레기라…….”
“자- 고독을 다룰 줄 아는 쓰레기 양반, 이야기 좀 털어놓지그래.”
고덕의 말에 적운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매달렸다.
“쓰레기라도 입은 무거운 편이라서 말이야. 미안하군.”
“무슨 미안씩이나.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이야기는 들을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고문도 하나?”
“그냥,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미라서…….”
히죽 웃으며 말하는 고덕을 바라보는 적운의 눈동자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런 자가 고문을 하고자 한다면 그 끔찍함의 농도가 얼마나 진할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제대로 죽기도 힘들겠군.”
적운의 말에 고덕이 물었다.
“반항은 생각하지 않는 건가?”
“반항? 그것도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할 때의 일이겠지.”
“왜? 난 상대가 어려울 것 같나?”
고덕의 물음에 적운의 입가에 달려 있던 비틀린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너 같은 이들은 확신이 없는 일엔 잘 나서지 않지.”
“나 같은 이라……. 아까는 날 모른다더니, 이번엔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넌 몰라. 하지만 너 같은 이들의 성격은 잘 알지.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적운의 말에 고덕이 설핏은 미소를 지었다.
“동류라 그거로군.”
“대충은.”
“하지만 미안하게도 헛다리를 짚었어.”
“무슨 말이지?”
“난 확신이 없는 일도 잘 벌여. 대체로 내 마음대로 하는 편이거든.”
“즉흥적이란 말인가?”
“대체로는.”
“하면…….”
지금의 행동도 우발적인 것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인 실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적운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적운을 바라보고 있던 고덕이 피식 웃으며 충고했다.
“아, 뭐 시도는 좋아. 하지만 대가는 결코 만만하지 않을 거야.”
그 말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미 기가 꺾여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건 뭐랄까……. 그래, 마치 토끼가 막다른 길에서 범을 만났을 때의 기분이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기랄.”
결국 대항을 포기한 적운이 맞은편 의자에 앉자 고덕이 미소를 지었다.
“털어놓을 생각은 여전히 없나?”
“나중엔 몰라도 지금은 아니야.”
“정히 그렇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고덕을 바라보는 적운의 눈동자는 격랑 속의 가랑잎처럼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천막을 나서는 고덕의 뒤로는 피범벅이 된 적운이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그렇게 적운의 막사를 벗어난 고덕은 천천히 붉은 수기가 걸린 천막을 향해 걸었다.
“서라.”
천막 앞을 가로막는 무사들의 제지에 고덕의 말했다.
“적 대주의 명으로 인질 하나를 데리러 왔소.”
“대주께서? 그런 일은 여 부대주가 맡아왔소만?”
“여 부대주는 다른 일로 바빠서 내가 온 거요.”
처음 보는 탓인지 경비 무사는 갈등의 표정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고덕은 두말없이 등을 돌렸다.
“가서 대주에게 말하겠소. 들여보내지 않더라고. 좋아하진 않겠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니…….”
고덕의 말에 경비 무사가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자, 잠시만…….”
“왜 그러는 거요?”
“잘 모르는 얼굴이라 그랬소. 들어가시오.”
경비 무사로서는 뱀처럼 차갑고 범처럼 사나운 대주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경비 무사가 비켜서자 고덕은 천천히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향해 십여 쌍의 눈길이 쏟아졌다. 관심보다는 불안함과 절망에 잠긴 눈빛들이었다.
그 안에서 고덕은 자신이 찾던 눈을 찾았다.
“대, 대협!”
놀라는 호철랑을 바라보며 고덕이 웃었다.
“오랜만이오.”
“그, 그렇군요. 한데 여긴 어떻게…….”
“왜 왔을 거 같소?”
고덕의 말에 호철랑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문이었던 까닭이다.
“미안해요.”
“됐으니 서둘러 나갑시다.”
“하, 하지만 밖엔 사람들이 많아요.”
“상관없소.”
상대가 어떤 능력을 가진 사람인지 기억해낸 호철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한데, 그 능력을 상기하자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무슨……?”
“이들을 함께 데려가요.”
호철랑의 말에 여인들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런 여인들을 둘러보던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요.”
“하지만 대협이라면…….”
“아무리 나라도 수만이 넘는 달단의 군대 한복판에서 이 많은 여인들을 빼내갈 재주는 없소.”
단호한 고덕의 음성에 호철랑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만은 없었다. 그녀도 주변에 가득한 달단의 군막들이 누구의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을 데리고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 결정되자 호철랑이 주변의 여인들에게 다짐했다.
“반드시 데리러 돌아오겠어요. 그러니 믿고 기다려 줘요.”
지켜질지 모를 그녀의 약속에 여인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여인들의 손을 잡고 좀처럼 움직일 줄 모르는 호철랑의 팔을 고덕이 잡아끌었다.
“갑시다.”
고덕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호철랑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상태로 천막 밖으로 나오다 보니 마치 억지로 끌려나오는 형상이 되어버렸고, 그것이 경비 무사의 의심을 희석시키는 예상치 못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천천히 호철랑을 끌고 움직이던 고덕의 신형이 어느 순간 땅속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물론 함께 있던 호철랑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권의 무리로 순식간에 이동해온 고덕과 호철랑은 여전히 언덕 위에 엎드려 있던 왕팔과 함께 신속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던 고덕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요?”
호철랑의 물음에 잔뜩 인상을 쓴 고덕이 답했다.
“잊고 온 것이 있소.”
“중요한 건가요?”
“그게…….”
머뭇거리는 고덕에게 호철랑이 말했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서둘러야 해요. 내가 없어진 것을 지금쯤은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렇다면 추적이 곧 시작될 거라구요.”
옳은 말이다. 호철랑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경비 무사가 상황을 알아볼 수도 있고, 아니면 적운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수도 있었다.
추적에 나설 상대는 지구력이 강하기로 소문난 달단의 기마대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이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라 경공을 이용해 최대한 멀리 도주해야만 할 때였다.
하지만…
“대협…….”
왕팔마저 불안한 음성으로 불러왔지만, 고덕은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약속 하나를 남겨 두고 천막을 벗어나는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의 간절한 눈빛이 왜 자꾸 연화의 애절한 눈길과 겹쳐 보이는지 몰랐다.
“제길, 팔이가 호 판관을 업어라. 그리고 네가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도주해라. 목적지는 가욕관이다. 그곳에서 만나자.”
“대협!”
놀라는 왕팔에게서 야멸치게 시선을 돌린 고덕이 호철랑에게 말했다.
“약속을 했소. 빼내서 뒤를 따를 것이니 팔이와 함께 가시오.”
“대협…….”
“미안하오.”
호철랑에게 그 말을 남긴 고덕이 왕팔을 재촉했다.
“뭐하나?”
결국 호철랑을 들쳐 업은 왕팔이 경공을 펼쳐 벌판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잠시 지켜보던 고덕의 신형은 이내 빛살이 되었다.
* * *
잠잠하던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사방에서 고함이 들리고 쇳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이 무장을 갖추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막 밖으로 수많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멀어졌다. 그럴 때마다 은영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천막을 젖히고 그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제발, 제발 빨리 와주세요…….”
그렇게 빌고 또 빌었지만, 솔직히 그가 돌아올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두렵기에, 미치도록 무섭기에 입 밖으로 내볼 뿐이다. 자신에게 살아날 길은 그것뿐이 없었기에…….
주변의 소음이 그간과 달리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커졌다. 나팔이 불리고, 땅이 진동했다.
군문에 종사하는 오라비를 둔 덕에 귀동냥을 한 것이 적지 않은 은영으로서는 지금의 소란과 진동이 대규모의 기마대가 움직이며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천막이 젖혀지고 무장한 일단의 사람들이 들어섰다.
“이, 이게……. 여 부대주가 당했다!”
처음에 들어왔던 자의 고함에 검을 찬 이들 서너 명이 천막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목을 베었다.”
죽어 엎어진 여 부대주의 상처를 살펴본 무사 하나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은영에게 다가왔다.
“어찌 된 일이냐?”
무사의 질문에 은영은 겁에 질려 도리질만 쳤다. 그것이 화를 불렀는지 무사는 은영의 머리채를 잡아채며 다그쳤다.
“어찌 된 건지 말을 해! 아니면 목을 꺾어버릴 테니까!”
“모, 몰라요…….”
쫙-
무사의 손찌검에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입술이 터졌는지 입안에 피가 고였다. 그런 은영의 머리채를 다시 잡아챈 무사가 물었다.
“마지막이다. 어찌 된 일이냐? 누가 그랬나?”
죽음의 공포가 그녀의 전신을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은영은 혹시나 자신도 모르게 말할까 봐 두렵기라도 한 듯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가 위태롭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은영의 태도에 울화가 치민 무사가 검을 빼어들었다.
“네년이 정녕 말을 안 한다면 목을 벨 것이다.”
“누구냐? 범인을 대란 말이다.”
다른 무사까지 달려들어 채근했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네년이 죽기를 소원한다면 죽여주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무사의 검이 위로 쳐들렸다 휘둘렸다. 자신의 목으로 떨어지는 무사의 검에 은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걱-
끔찍한 파육음에 움찔거렸지만 왠지 죽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에 천천히 눈을 뜬 은영의 시선에 그의 모습이 보였다. 미치도록 기다렸던 그의 모습이…….
“안 죽었으니 일어나.”
“와, 왔군요. 정말 왔어요.”
“온다고 했잖아.”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멋쩍어하는 고덕의 모습에 조금이나마 여유를 찾은 그녀의 시선엔 서너 조각으로 잘려 나간 무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시신을 보고도 놀라거나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이 아닌 모양이군.”
“오라버니를 돕고자 전선의관에서 의녀 일을 거들기도 해서요.”
전장의 부상병들은 시체만큼 참혹하다. 온통 잘리고 짓이겨진 상처를 갖기 때문이다.
“오라비가 무장인가?”
“예.”
답하는 여인의 음성에 잔잔한 슬픔이 깔렸다. 자신을 버렸다는 서운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다른 이야기는 나중에……. 서두르지.”
“아! 예.”
자신의 말에 바짝 다가서는 여인을 번쩍 안아든 고덕의 신형이 한 줄기 바람을 남기고 천막에서 사라졌다.
* * *
추격은 집요하고 빨랐다. 기병 한 명이 세 마리의 말을 번갈아 타며 어어 나가는 추격은 질릴 만큼 끈질겼다.
그런 달단 기병의 추격에서 왕팔은 사력을 다해 도주했다.
항상 자신이 추격을 하다 이번엔 반대로 추격을 당하는 입장에 서게 된 왕팔은 피 말리는 생소한 경험에 진저리를 쳤다.
혼자도 아니고 호철랑을 업고 뛰는 탓에 내력은 급속도로 소진되었다. 하지만 추격의 고삐가 바짝 당겨져 있는 탓에 제대로 쉬지 못한 왕팔은 소진된 내력의 회복에 애를 먹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포기는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경공의 속도가 줄고 나중엔 체력으로 뛰는 것에 불과해도 왕팔은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팔과 추격대의 거리는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헉헉헉, 얼마나 떨어졌습니까?”
왕팔의 물음에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호철랑이 답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어요.”
호철랑의 답과는 달리 추격대가 바짝 따라붙었다는 걸 왕팔은 잘 알고 있었다. 발바닥으로 저들이 달려 대는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달단의 기병은 놀랍도록 뛰어난 궁기병이기도 하다. 그 까닭에 왕팔은 저들의 화살 공격권 내에 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절박할 경우엔 특히나…….
쉭- 퍽!
화살 하나가 옆을 스치고 지나가 바닥에 박혔다.
그리고…
쉭, 쉬쉬쉭 퍼벅퍼버벅.
수십 발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기병의 화살 공격권 안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기겁을 한 왕팔은 사력을 다해 발을 움직였다.
이제 왕팔의 바람은 바뀌었다. 지금이라도 고덕이 나타나 저들을 쓸어버리는 것으로…….
하지만 여전히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왕팔의 발은 미친 듯이 움직여지고 있었다.
* * *
고덕의 경공은 바람과 같았다. 거기에 짧지만 공간권의 묘리를 섞은 이래로 웬만한 작은 동산은 피하거나 뛰어넘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진 속도의 증가는 가히 경이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늦게 출발한 고덕이 가욕관에 먼저 도착했다.
자신이 산을 향해 돌진하던 순간, 이미 정신을 잃은 은영을 가욕관의 비어진 성벽 위에 기대어놓은 그는 저 멀리 장성 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나도록 왕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문제가 생긴 모양이로군.”
왕팔의 경공이 아무리 자신에 비해 떨어진다고 해도 자신이 가르친 경공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펼쳤다면 적어도 반 시진 이전엔 도착했어야 했다.
결국 눈살을 찌푸린 고덕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영을 들쳐 업고 가욕관을 벗어나 아까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달려온 길은 왕팔이 달려올 길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중간에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자신이 공간권의 묘리로 건너뛴 산들에 있을 것이다.
결국 고덕은 그렇게 건너뛰었던 산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되짚어가야 했다.
그러길 한참, 고속으로 질주하던 고덕의 신형이 순식간에 멈춰 섰다.
“흠…….”
추적엔 젬병인 자신의 눈에도 선명한 핏자국이었다. 피가 스며든 흙을 비비자 옅은 혈향과 함께 축축함이 느껴졌다. 피가 아직 말라붙지 않았단 증거였다.
“늦어도 이각 이내에 지나갔다는 말인데…….”
바닥을 보았지만 어지러운 자국들만 난잡할 뿐 어디로 향했는지, 얼마나 지났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빌어먹을…….”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호철랑을 업고 있을 왕팔을 추격한 이들이야 뻔한 거. 결국 그들이 돌아갈 곳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본진에 도착하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을 테니 왔을 때와 동일한 길로 가겠지.”
일어선 고덕이 은영을 고쳐 업고 다시금 경공을 펼쳤다.
순간, 황무지의 먼지구름이 무섭게 일어섰다. 섬혼과 짝을 이루는 섬보가 경공의 모습으로 일어선 순간이다. 그 믿기지 않는 속도가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몸을 밀어내자 뒤로 밀린 공간의 힘이 사나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먼지구름을 뒤에 단 고덕의 신형이 직선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길 반 각. 저 멀리 일단의 기마대가 보였다. 이런 벌판에서 기마대라면 고덕이 찾고자 하는 것뿐일 것이다.
생각이 그에 이르자 고덕의 신형이 먹이를 노리고 내리꽂히는 독수리의 형상으로 기마대의 후위를 덮쳤다.
스걱, 푸황-
섬뜩한 절단음의 뒤로 무지막지한 먼지구름이 기마대를 덮쳤다.
히이이이잉~
“크헉-”
“으악!”
그 먼지구름 안에서 붉은 피가 솟고, 말 울음과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저, 적이다. 막아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몽고말이다. 비로소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고덕의 검에 속도가 붙었다. 말과 사람이 순식간에 도륙이 났다. 방패고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갑옷이고를 가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이 찾는 이가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상대는 이미 피를 뿌리며 거친 황무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섭도록 빠르고, 잔인한 손속 아래 일백에 가까운 달단의 기마대가 전멸당하는 건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들을 덮쳤던 먼지구름이 다 가라앉자 드러난 정경은 참혹지경 바로 그 자체였다.
사람과 말의 시신이 뒤엉켜 사방에 널린 곳에서 고덕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모조리 죽어 나자빠진 시신뿐, 어디에도 살아 있는 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말은 한 가지를 뜻했다. 이 안엔 왕팔과 호철랑이 없다는 것.
자신이 미처 구별하지 못하고 죽였을 가능성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시신들 속을 슬며시 뒤지는 시선을 스스로도 막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주변을 둘러보던 고덕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휴우~ 그러면 그렇지.”
그의 생각대로 시신들 속엔 왕팔이나 호철랑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가 해결되자 다른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디로 간 거지?”
뒤에서 발견했던 혈흔과 자신이 주파한 거리를 감안하면 그들이 더 앞쪽에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은 자신이 되짚어온 길과 다른 길로 그들이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피곤하게 됐군.”
황무지는 너무 넓었다. 그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모조리 길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니, 예측한 행로에서 벗어났다면 좀처럼 찾기가 난망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고심하던 고덕은 결국 그대로 몸을 뽑아올려 놈들의 본진으로 향했다. 길을 예측할 수 없다면 답은 하나, 놈들의 목적지 바로 앞에서 기다리는 방법뿐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고덕이었지만 뒤로 먼지구름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공 잡아먹는 귀신인 섬보가 아니라 섬마공을 펼친 까닭이다.
섬보에 비해 뒤처진다곤 하지만 섬마공도 가히 최고의 경공이다. 들어가는 내력과 속도를 봤을 때 오히려 섬보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할 정도다. 그러고 보면 괜히 마도 최고의 경공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섬마공으로 달리는 고덕의 등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던 은영은 눈을 뜨자마자 크게 다가오는 거대한 절벽의 모습에 다시금 정신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고덕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은영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반 시진 정도를 달리자 놈들의 본거지가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하지만 저 모습은 실제가 아니다. 이른바 신기루. 내려쬐는 뙤약볕으로 인해 황무지에 어리는 아지랑이가 훨씬 먼 곳에 있는 본거지를 마치 조금만 더 달리면 닿을 수 있을 듯이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고덕은 보이는 곳과의 거리를 대충 가늠하곤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본 후 곧바로 불룩 솟아오른 작은 동산의 그늘로 들어섰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마대는 절대로 자신을 찾아낼 수 없을 만한 위치였다.
그늘에 들어서자 등에 업고 있던 은영을 내려놓은 고덕은 지친 몸을 언덕에 기대었다. 그렇게 지난 며칠간의 고단을 털어내고 있었다.
* * *
시간이 흘러 해가 저물어가고, 어두워져 가는 황무지로 땅거미가 내려앉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왕팔과 호철랑을 잡았을 달단의 기마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상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 아니었기에 고덕의 마음은 점차 혼란스러워져 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신의 생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그다지 자주 겪어보지 못한 일이 고덕을 심란하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