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장.살행(殺行)-숨겨진 마음에 놀라다
그로부터 두 시진 후, 고덕은 한 장의 용모파기를 손에 쥐곤 의원을 벗어났다. 물론 왕팔이 고덕의 앞장을 섰다.
의원을 나서며 고덕은 마지막까지 청여의 염장을 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약값과 방 값은 내야 할 거다. 참, 식대는 우리 것까지 내라. 구해줬으면 그만한 답례는 해야지 않겠나.”
그 말을 남긴 고덕이 떠나자 의원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섰다.
“돈, 돈은 있겠지요?”
오늘 아침 방을 나서는 고덕의 손에 자신의 전낭이 들려 있는 걸 보았던 청여는 이 앓는 소리만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청여에게 의원은 돈을 내라며 독촉을 해대고 있었다.
의원에서 나선 고덕과 왕팔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청여와 관련하여 허비한 시간을 보충하려면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동하던 왕팔의 신형이 한 산자락에서 갑자기 멈춰 섰다.
“왜?”
함께 멈춰 선 고덕의 물음에 왕팔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말이 사라진 마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고덕이 물었다.
“마차를 버린 건가?”
“예. 이후부턴 말을 이용했습니다.”
“갑자기 왜지? 길이 험해진 것도 아닌 것을.”
고덕의 물음에 주변을 뒤지던 왕팔이 해답을 찾아냈다.
“이곳에서 다른 이들과 합류했습니다. 아마도 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마차를 버린 듯합니다. 한데…….”
“한데 뭐?”
고덕의 다그침에 왕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이곳에서 합류한 이들의 말이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뭐가?”
“말굽이 작습니다.”
“말굽이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
“그게, 한두 마리만 작은 게 아니라 이곳에서 합류한 말들의 말굽은 모두 작습니다. 이런 경우는…….”
뒷말을 끄는 왕팔에게 고덕이 재촉했다.
“뭔데 말을 끌어?”
“그게… 이 흔적을 남긴 말들이 어린 말들이 아니라면 종이 다르다는 뜻이 됩니다.”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어린 말들에 말굽을 할 이유가 없잖아. 하면 종이 다르다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
고덕의 물음에 그를 돌아본 왕팔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런 말굽을 가진 종은 한 가지뿐입니다.”
“뭔데 그리 뜸을 들이는 거야.”
“흔히 몽고마라 부르는 달단의 말입니다.”
“달단의 말?”
“예, 대협.”
“뜬금없이 달단의 말이라니. 여긴 중원 한복판이야. 이곳에 달단의 말이 나타날 일이 없잖아?”
“그렇기에 심상치 않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금 고덕이 서 있는 곳은 섬서성에 위치한 산양 부근이었다. 이곳에서 달단이 사는 몽고 땅까지는 수천 리가 남아 있었다.
“그럼 네 생각은 달단의 무리가 호 판관을 납치해갔다는 거야?”
“달단의 무인들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합니다. 그 덕에 명조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강호인들이었던 명교가 명조를 세운 주원장을 도운 일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훗날 사교 집단으로 몰려 팽을 당했지만, 그들의 활동에 원조의 고위 관리들 상당수가 명운을 달리했다. 그것이 원조의 몰락을 부채질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명교의 무인들이 활약할 수 있었던 바탕엔 원조가 보유하고 있던 달단의 무인들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들에게선 초극에 이른 무인조차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 뭐지?”
“아마도 중원의 누군가가 달단을 끌어들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은 이 일에 달단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로군.”
“예. 한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절대로 민간인들이 아니지요.”
“제기랄. 복잡해지는군.”
“한데, 정천맹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노린 걸까요?”
이미 청여에게서 정천맹이 호철랑까지 노렸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아니 그녀를 노린 것이 고덕이 연정을 품고 있다는 오해에서 출발했다는 말엔 실소를 자아내긴 했지만, 여하간 자신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기에 고덕으로서는 미안함이 깊었다.
“글쎄, 또 다른 놈들도 정천맹 멍청이들처럼 헛다리를 짚었는지도 모르지.”
“하면 놈들도 최종적으로는 대협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확실한 건 없다. 다만 현재로서는 그저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뿐이니까.”
고덕의 말에 왕팔은 반론을 재기할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도처에 적이 산재하는 고덕의 상황상 그 가능성도 충분히 열려 있었던 까닭이다.
“뭐해, 안 쫓고?”
고덕의 재촉에 이내 왕팔의 추적이 재개되었다.
* * *
그렇게 이어진 추적은 섬서를 넘어 감숙에 이르고 있었다. 이동한 거리만 따져도 사천 리가 넘는 엄청난 대추적이었다.
한데, 추적이 이어질수록 고덕의 표정은 굳어져 갔다. 왕팔의 추측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점점 몽고의 땅으로 가까워져 갔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감은 결국 가욕관에서 절정에 달했다.
“놈들이 이곳을 통해 장성을 넘어갔습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관병은 모두 어딜 간 거지? 원래 이곳의 경비가 이렇게 허술했나?”
“그럴 리가요. 가욕관은 옥문관과 함께 장성의 서쪽 출구로 중요 주둔지 중의 하나인 걸요.”
“하지만 관병들이 보이질 않지 않냐?”
고덕의 말대로다. 이건 완전히 텅텅 비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휑했다. 더구나 관병의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주변을 지나가는 상인에게 물어서야 얼마 전에 경비 병력이 모두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관병이 가욕관을 비웠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달단 놈들이 들락거린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요.”
“냄새고 뭐고, 달단 놈들은 여자를 험히 다루기로 유명하다. 호 판관이 여자인 걸 알면…….”
“대협을 노리고 납치한 거라면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최단 시간 안에 찾아내야겠다. 다시 쫓을 수는 있겠지?”
“그야 당연합니다만… 통행 허가는 안 받습니까?”
“관병도 없는데 무슨 통행 허가.”
“하지만 허가 없이 가욕관을 벗어나면 대명률에 의해서…….”
“거,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앞장이나 서.”
“대협…….”
“쓰읍-”
고리눈을 뜨는 고덕의 서슬에 어쩔 수 없이 왕팔은 열려 있는 가욕관의 성문을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성문을 벗어나자 감숙의 북쪽으로 들어서며 보아오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황량한 벌판이 늘어서 있었다.
“확실히 찾을 수 있는 거겠지?”
“그건 걱정 마십시오.”
“그럼 가지.”
고덕의 재촉에 이내 왕팔의 신형이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를 달려 댄 고덕과 왕팔의 시야는 드넓은 벌판을 빼곡히 채우며 늘어선 군막의 바다로 가득 찼다.
“이, 이게…….”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왕팔을 끌어당겨 몸을 숙인 고덕은 낮은 음성을 토했다.
“달단군이다. 그것도 칸의 군대야.”
달단의 군대는 두 가지다. 부족이 움직이는 부족군, 그리고 아직도 유지되는 칸 체제에서의 중앙군인 칸의 군대다.
명조에 비하자면 향방군과 오대도독부와 비슷하달까. 여하간 지금 고덕의 시야를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칸의 깃발을 앞세운 달단의 대규모 정규군이었다.
“흔적은?”
“저기 오른쪽 막사들이 운집한 곳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왕팔의 손을 따라 움직인 시선엔 여타의 군막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막사가 보였다.
“중원식인데요?”
왕팔도 그것을 느꼈던지 대번에 형식을 짚어냈다.
“그렇군. 하면 놈들이 저곳에 있다는 말이로군.”
“한데, 수가 너무 많습니다.”
왕팔의 말대로 중원식 천막의 수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있었다.
“뒤지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고덕의 말에 왕팔의 낯빛이 하얗게 변했다.
“설마… 저걸 모두 뒤진다는 말은 아니죠?”
“아니면, 다른 방법이라도 있나?”
“그, 그야…….”
“없으면 입 다물고 조용히 있어.”
고덕의 핀잔에 왕팔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왕팔을 언덕에 둔 채 고덕은 재빠르게 천막군에 접근했다. 어찌나 빠르고 순식간에 이루어졌는지 언덕에서 사라진 고덕의 신형이 마치 천막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천막들이 늘어선 지역에 다다른 고덕은 숨어 다니는 대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은 천연덕스러운 고덕의 행동에 그가 침입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걷던 고덕의 신형이 한 천막 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고덕이 그 천막을 선택한 이유는 반항하는 여인의 음성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막 안으로 스며든 고덕의 시선에 드러난 것은 웬 사내가 이곳저곳이 찢겨 넝마 조각처럼 되어버린 옷가지를 잡고 버티고 있는 여인을 몰아세우는 장면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
두 번 살필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덕의 손에서 발출된 강기가 놀라 토끼 눈이 된 사내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털썩-
목울대가 정확히 베어진 사내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절명해 쓰러졌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탓일까. 비명을 지르려는 여인의 입을 황급히 다가선 고덕의 손이 막았다.
“쉿! 여기서 비명을 질렀다간 당신이나 나나 곤란하게 된다고.”
고덕의 말에 차츰 놀람을 가라앉힌 여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천천히 손을 거두자 겁에 질린 여자가 물었다.
“누, 누구세요?”
“누구를 찾아온 사람.”
“누구요?”
“여자야. 당신 같은. 그리고 조금 예쁘고…….”
그렇게 말하고 보니 눈앞의 여인도 꽤나 선이 고운 얼굴을 가졌다.
“그렇게 말해서는…….”
여인의 대꾸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여자들이 한둘은 아니겠지. 한데 끌려온 여인들이 많나?”
고덕의 물음에 여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있는 천막에만 열 명이 넘어요. 다른 사람들의 말로는 그런 천막이 두세 개 더 있다고 들었어요.”
“왜 여자들을 잡아다 가둔 거지?”
“인질이라고 하더군요.”
“인질?”
“예. 잡혀 온 여자들은 모두가 고관대작 집안의 여식이거나 부인이었어요.”
“한데, 그런 인질을 어찌 이렇게…….”
거의 벌거벗겨진 것처럼 찢겨진 여인의 옷을 가리키자, 여인은 침상에 놓여 있던 이불로 몸을 가렸다.
“제 오라버니가 제의를 거절했다더군요. 인질의 가치가 없어졌다고…….”
누군지 몰라도 동생을 인질로 한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기개가 있고, 절개를 지켰다고 해야겠지만 그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된 여인의 입장에서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셈이 되니 참혹할 따름이었다.
여인의 신세도 기구했지만, 고덕에게 중요한 것은 호철랑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에게도 문제가 생긴다면…….
갑자기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에 고덕 자신도 놀랐다. 그녀의 마음을 거부한 것이 자신임에도, 그녀에게 사고가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불길처럼 들끓는다는 것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이곳에 있어. 다른 곳을 뒤져 보고 돌아올 테니까.”
“정말인가요?”
불안에 떠는 여인의 눈은 절망과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짓말은 안 해. 기다려.”
자신의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이는 여인을 두고 고덕은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 천막들을 휘저으며 걸리는 것들은 모조리 목을 그어 황천으로 보내버렸다. 호철랑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고덕의 손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죽음의 손길이 천막 속을 헤집고 있었다.
그런 사신의 방문을 모르는 이들이 한 천막에 모여 있었다.
“목표는 무사히 챙겨 왔소.”
“설마 손을 댄 건 아니겠지요?”
문사복 차림인 사내의 물음에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괴인은 고개를 저었다.
“회는 동하더이다마는 일이 우선인지라…….”
“좋소. 그, 아니 그녀는 동북어위도총사를 움직일 유일한 패요. 지금의 상황에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패이니, 절대로 손을 대선 안 될 것이오.”
“유념하겠소. 한데 다른 것들은……?”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묻는 괴인에게 문사복 차림의 사내가 답했다.
“간혹 가치가 없어지는 이들이 있소. 그들을 넘겨줄 테니 그걸로 만족하시오.”
“흐흐흐… 일단은 그러지요.”
사내의 음탕한 웃음소리에 거부감이라도 드는 듯 문사복의 사내는 곧바로 천막을 벗어났다.
그가 사라지자 끈적거리던 괴인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북해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놈에 대한 감시는?”
괴인의 물음에 허공에서 답이 울려 왔다.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놈이 배신하려는 낌새만 느껴져도 베어버리도록.”
“옛, 대주.”
음성의 복명에 괴인의 물음이 이어졌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동안 천주께선 별 명이 없었던가?”
“천주께선 여전히 주천의 반응을 염두에 두시는 듯합니다.”
“이미 기호지세이거늘……. 대공자는 아직 출관하시지 않았다던가?”
“아직은…….”
허공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물러가라.”
“예. 하면 소…….”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긴 괴인의 시선이 돌려지는 순간, 파란 불빛이 날아들다 가까스로 목 언저리에서 멈춰 섰다.
“이런, 죽일 뻔했네.”
“누, 누구냐?”
놀라는 괴인의 물음에도 불구하고 고덕은 품에서 꺼낸 용모파기와 그를 비교하며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너, 나하고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지 않나?”
“네놈이,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말을 하다 만 괴인의 입이 다물렸다. 허공을 가로질러 흐르는 피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괴이한 장면은 누구도 감지할 수 없다는 은신법으로 숨어 있던 수하의 피가 만들어내는 것이 분명했다.
“자, 우리 아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고. 우선은 최근에 납치해온 남장 여자부터 시작할까…….”
비틀린 웃음으로 다가서는 고덕을 괴인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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