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장.애증(愛憎)-죽음의 향연
고덕과 후량이 숙주를 떠난 것은 협련의 서신을 받은 지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숙주를 떠난 고덕과 후량이 소흥 왕부에 도착했을 때도 협련과 고길 내외는 아직 당도하지 않고 있었다.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고덕을 소흥왕은 예상외로 반갑게 맞았다. 그가 떠날 때 보여 주었던 분노에 비추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환대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잘 지냈네. 자네는 어땠나?”
“편안하지만은 못했습니다.”
“쯔쯔, 편안하길 빌었건만…….”
소흥왕의 부드러운 응대에 고덕이 불편한 표정으로 물었다.
“환대해주시니 감사하긴 합니다만…….”
“왜? 떠날 때 보였던 냉랭함이 아니어서 서운한가?”
“설마 그럴 리가요.”
당황하는 고덕에게 소흥왕은 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를 그리 보내놓고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네. 꿈자리도 좋지 못했고.”
“그 무슨…….”
“문정 그 아이가 화를 내지 뭔가? 이 못난 오라비에게 말이야.”
씁쓸하게 웃는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가슴이 콱 막혀 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모습은… 좋아 보였습니까?”
고덕의 물음에 소흥왕은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내게 화를 낸 것을 빼면 나쁘지 않았네. 옷도 깔끔했고, 모습도 단정했으니……. 솔직히 꿈에선 그 아이가 죽었다는 느낌도 받지 못했지.”
“다행… 이로군요.”
“그렇다고 해야겠지. 험한 모습으로 나오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과거의 추억을 좇는 듯이 보이는 소흥왕에게 고덕은 미안한 음성으로 물었다.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남의 집처럼 묻는군. 오늘 밤 꿈에 나타나 괜한 소리라도 들을지 모르겠네.”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일행이 있습니다.”
“어떤?”
“제 형님 내외분과 수하… 아니, 가족들입니다.”
“언젠가 그 아이가 말하던 하포의 그분들인 모양이로군.”
“예…….”
고덕의 답에 소흥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계시고 싶은 만큼 계셔도 좋다고 말씀드리게. 아니, 오시면 내 직접 뵙지.”
왕이 쓰는 존어다. 결코 쉽게 들을 수 없는 표현이 자신의 가족에게 돌려졌다는 것에 고덕은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 말게. 당연한 일이니…….”
소흥왕의 말에 고덕은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고길 내외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도 이틀이 더 지난 때였다. 자신들이 왕부로 들어선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하던 고길 내외는 소흥왕이 직접 마중을 나온 것엔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어, 어찌 전하께서 친히…….”
“어서들 오십시오.”
“어이구, 미천한 저희에게 어찌 존어를…….”
“누이의 시어른이시니 당연한 일이지요. 모쪼록 계시는 동안 자택처럼 편히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이고, 성은이 망극합니다. 전하.”
굽혀진 허리를 펴지 못하는 고길 내외를 소흥왕은 친히 방까지 안내했다. 방을 안내하고 돌아가는 소흥왕의 뒤에서 고길 내외는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여 보이고 있었다.
“그만 허리 펴시우.”
고덕의 말에 고길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가셨냐?”
“예.”
고덕의 답이 있고서야 슬쩍 주변을 살펴본 고길이 허리를 폈다.
“아고고고, 허리야. 그나저나 참말로 연화가 공주였던 모양이구나.”
말로만 들었을 땐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 싶었던 것이, 막상 연화의 오빠라는 소흥왕을 만나고 나니 새삼 놀라웠던 것이다.
“그럼 내가 거짓을 말했겠소.”
“그러게 말이다. 늙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멋쩍은 웃음을 짓는 고길의 말에 고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미안하오.”
“뭐가?”
“나 때문에 위험에 처한 거 말이오.”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간만에 나들이를 하니 좋기만 하더라.”
고길의 말에 고덕은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어마, 서방님, 이거 동서 얼굴 아니에요?”
방에 놓여 있던 그림을 살피던 형수의 말에 고덕의 시선에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맞습니다, 형수님.”
“아이고, 다시 봐도 예쁘지요. 근데 왜 이곳에……?”
“이 방이 그녀가 쓰던 방입니다.”
고덕의 답에 형수의 입이 다물렸다. 고덕에게 이 방은 고통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방을 옮겨 달라면 안 되겠냐?”
“나 때문이오?”
“그야 뭐… 나도 마음에 걸려서…….”
형의 말에 고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 때문이면 그냥 쓰시오. 그래도 이 방이 제일 내 집 같은 곳이니…….”
왕부에서 지낼 때 고덕이 쓰던 방은 내원에 딸린 귀빈실이었다. 하지만 그곳보다는 이곳이 왠지 마음이 더 편안했다.
처음엔 이곳 근처에만 와도 가슴이 생으로 찢어지는 것 같더니, 시간이란 놈은 참으로 요상한 힘을 가진 듯싶었다. 아니면 사람의 마음이 그만큼 간사하던지…….
고덕의 표정을 살피던 고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다면 예서 지내자꾸나…….”
“그럼 쉬시오.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래. 그렇지 않아도 한숨 자야겠다.”
정말로 피곤했던 모양인지 두 내외는 드러눕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십여 일이 넘는 마차 여행을 했으니 피곤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일일 터였다.
“고맙다.”
고덕의 말에 협련과 묵린, 그리고 왕팔은 뿌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이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은 고덕이 말했다.
“앞으로도 부탁하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협련의 말에 다른 둘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에 고덕의 입가에 깃든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형 내외가 잠든 방문을 조용히 닫고 나선 고덕을 무장 한 명이 찾았다.
“날 찾아왔다고 했소?”
“예, 대인.”
“대인은 무슨…….”
관부인에게서 대인의 호칭을 듣자니 새삼 남세스러웠던 탓이다. 그런 고덕에게 무장이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대인을 청하십니다.”
소흥왕이 찾는다는 말에 고덕은 두말없이 따라나섰다.
“갑시다.”
앞장서는 무장을 따라 이동한 고덕은 눈에 익은 대전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대전에 들어서자 안면이 익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왔다.
그런 이들에게 고덕은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자- 이리로 오게.”
소흥왕의 부름에 곁으로 다가서자, 그가 조용한 음성을 토했다.
“문제가 생겨서 자네의 도움을 받고자 오라 했네.”
“문제라면……?”
일부러 관부의 일에 휘말릴 생각은 없지만 어려운 일을 나 몰라라 할 생각도 아니었다. 그 탓에 고덕이 관심을 보이자, 소흥왕의 눈짓을 받은 이첨이 서신을 하나 건네주었다.
“방금 전에 중군도독에게서 온 서신입니다.”
갑작스런 존대였다. 그에 고덕이 고개를 들자 겸연쩍은 표정의 이첨이 말했다.
“부마도위이시니…….”
군주는 생을 달리했어도 그 자리는 남았다는 뜻이다. 그녀의 존재가 여전히 인정받는 듯한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 까닭에 고덕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시선을 다시 서신으로 돌린 고덕이 그것을 읽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말은 납치를 당했다는 뜻입니까?”
“납치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는 없지만, 호 판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해 보이네.”
소흥왕의 말에 이첨이 부연 설명을 이었다.
“자그마치 서른에 달하는 관병을 도륙하고 호 판관을 빼내간 이들입니다. 좋은 의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은 호 판관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탓에 고덕의 고개가 바로 저어졌다.
“그는 살아 있을 겁니다.”
“어떻게 장담하십니까?”
“죽일 거라면 이렇게 요란스럽게 일을 벌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리했을 테니까 말이오.”
“하면……?”
“구해와야겠지요.”
고덕의 말에 소흥왕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가능하겠나?”
“시도해보겠습니다. 그동안…….”
고덕이 할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소흥왕이 선수를 쳤다.
“내 왕부의 모든 힘을 다해 두 분을 잘 지키고 있겠네.”
그 말에 고덕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 *
왕부를 나선 고덕의 곁엔 일의 특성상 왕팔이 함께였다. 그들은 곧장 호철랑의 일행이 습격을 받았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아직도 군데군데 혈흔이 남아 있는 곳에 도착한 왕팔은 곧바로 땅에 코를 박고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길 반 시진.
“방향은 이곳에서 서북쪽입니다. 마차를 통째로 빼앗은 모양입니다. 놈들의 이동 방향으로 마차의 이동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추적은 더 쉽겠군.”
“출발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예. 주변에 이곳과 다른 혈흔이 존재합니다. 더구나 그 일대의 흔적으로 보아선 일부가 도주를 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이들도 이곳에서 싸움을 벌였던 모양이지. 다른 일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시간이 비슷합니다. 아니, 동일 시간대에 벌이진 일이 확실합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의 눈 끝이 씰룩거렸다.
“확실한 게냐?”
“분명합니다, 대협.”
왕팔의 답에 잠시 생각을 고른 고덕이 말했다.
“도주한 이들의 뒤를 쫓는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팔은 한쪽을 향해 달렸다. 그의 직감은 그 방향으로 향한 이가 살아서 도주했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달리던 왕팔은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곡선의 끝은 작은 산 어귀에 뚫린 동굴을 향해 있었다.
“흔적이 저곳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도주한 자가 들어간 건가?”
“예. 바래긴 했습니다만 점점이 흘린 피가 적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부상이 깊을 듯합니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그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들어가는 고덕의 뒤로 왕팔이 따라붙었다.
동굴은 생각보다 깊지 않았다. 안으로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아서 마주친 동굴의 끝엔 역한 피고름 냄새와 함께 사경을 헤매는 이가 쓰러져 있었다.
“명이 질긴 놈이로군.”
고덕의 말에 왕팔이 물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일전에 만난 적이 있다. 남궁세가의 방계라던가…….”
남궁세가와 고덕의 관계는 최악이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남궁세가가 고덕의 등에 칼을 꽂은 이후로 둘 사이의 관계는 급속히 나빠지다 결국은 고덕의 손에 남궁세가가 멸절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럼… 버리고 갈까요?”
“숨이 붙어 있는 자를 버리고 갈 수는 없겠지. 업어라.”
멀쩡히 살아 있는 이들의 목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잘라버리는 고덕의 말치고는 어폐가 있었지만, 왕팔은 군말 없이 등을 내밀었다.
이내 왕팔의 등에 옆구리에서 피고름을 잔뜩 흘리고 있는 사내를 실은 고덕은 앞장서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나마 나를 만날 걸 다행으로 아시오.”
홀로 구시렁거린 왕팔은 앞서 가는 고덕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동굴에서 구해온 이를 살피는 탓에 호철랑에 대한 추적은 잠시 뒤로 밀려났다. 그 상황에서 의원에게 인계된 사내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고 있었다.
“오늘 정도면 괜찮아질 거라더니, 이건 더 위중해진 게 아니오?”
왕팔의 말마따나 사내의 상태는 처음 의원에 도착했을 때보다 심각해 보였다.
“그것이…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소. 외상도 크지 않았고, 다분히 방치한 탓에 염증이 심해진 것이 문제라 생각했는데…….”
곤혹스러워하는 의원의 모습에 고덕이 물었다.
“혹시 독이 퍼진 건 아니오?”
“처음에 그럴지 몰라서 상처에 은침을 대어보았으나 독은 아니었소.”
독도 아닌데 약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상처가 심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덕이 사내를 억지로 일으켜 앉히고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멸겁신혈의 법문을 따라 내력이 돌기 시작한 이후로 살상의 목적이 아닌 다음엔 다른 이의 몸에 내기를 집어넣는 일을 해보지 않았다. 그만큼 내력의 수발에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고 보면 반드시 죽게 생긴 일. 기왕지사 죽을 거라면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자는 생각에 시도하는 것이었다.
명문혈에 손바닥을 붙인 고덕이 내기를 일으켜 천천히 사내의 몸속으로 이동시켰다.
“커헉-”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고덕의 내기가 들어서자마자 사내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에 잠시 주춤거렸던 고덕은 내친김이라는 생각에 그대로 내력을 밀어 넣었다.
“쿨럭-”
밭은기침과 함께 사내의 입에서 다량의 피가 토해졌다. 한데, 색이 검고 냄새가 지독했다.
“써, 썩은 피라니…….”
놀라는 의원의 음성을 들으며 고덕의 내기가 사내의 내부를 돌기 시작했다.
막히고 때론 끊어져 엉망이 된 사내의 내부를 고덕의 내기는 서서히 치료해나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내공심법을 익힌 경우 타인에 의한 강제적인 운기요상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고덕의 내력은 파괴의 힘. 슬쩍 튕겨만 나가도 상대의 혈맥을 발기발기 찢어낼 막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그런 내력을 조심조심 돌리고 있는 고덕의 온몸에선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상처에선 다량의 출혈이 발생했다. 한데 쏟아지는 피가 검고, 다량의 고름이 함께 흘렀다.
그러길 한참.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고름은 자취를 감추고 검은 피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가 종래엔 멈춰졌다. 운기요상에 의해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 덕인지 파리했던 사내의 혈색이 차츰 제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두 번의 소주천과 한 번의 대주천을 끝낸 고덕이 사내의 명문혈에서 장심을 떼어냈다.
“후~ 두 번 할 일은 못 되는군.”
고덕의 엄살 속에 의원이 서둘러 사내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했다.
“노, 놀랍군요. 기가 안정되고 맥이 고르게 뜁니다.”
“어떻게 괜찮다는 말이오?”
왕팔의 물음에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라면 하루 이틀 안에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게요.”
“그 말은 지난번에도 들었소만…….”
왕팔의 푸념에 의원은 낯빛을 붉히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야……. 여하간 상처를 갉아먹는 원인은 해결을 본 듯하니, 몸을 보하는 약재를 처방해 탕약을 지어드리리다.”
그 말만 남긴 의원은 휑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얼굴이 뜨거워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의원이 나가자 고덕은 사내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고름에 관심을 가졌다.
“더럽습니다. 제가 치우지요.”
“아니, 잠깐만…….”
“왜 그러시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왕팔의 눈에 피고름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을 잡아드는 고덕이 보였다.
“이놈이 범인이로군.”
“그, 그게 뭡니까?”
사람의 몸에서 살아 있는 벌레가 나왔다는 것에 놀란 표정인 왕팔에게 고덕이 답했다.
“고독이다.”
“고독… 그 독벌레 말입니까?”
“그래. 나도 말로만 들었지, 보기는 처음이다.”
“그, 그럼 그놈,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하지. 지금도 내 살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으니까.”
자신의 답에 후다닥 뒤로 물러나는 왕팔의 모습에 고덕은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놈에게 기막(汽膜)을 씌워놨어. 죽었다 깨어나도 내 손은 고사하고 기막조차 뚫지 못할 테니까.”
고덕의 말에 왕팔은 고독을 볼 때보다 더 신기한 시선을 보냈다. 그로서는 몸과 떨어진 다른 물체에 기막을 씌울 수 있다는 것은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왕팔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덕은 한참 동안 살펴보던 고독을 삼매진화로 태워 죽였다. 혹시나 고독이 품은 독성이 주변에 해를 끼칠까 걱정한 조처였다.
“그렇게 죽으면 시전자에게 커다란 충격이 있다던데, 정말 그럴까요?”
“글쎄, 그런 이야기들이 많더라만 그런 벌레를 이곳저곳에 흘리고 다니진 않을 것 같구나.”
고덕의 말을 듣고 보니 또 그도 그럴듯했다.
“역시 정보란 직접 확인해야 명확한 거로군요.”
왕팔의 말에 고덕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내는 의원의 말보다 회복이 빨랐다. 고덕에게서 운기요상을 받은 지 세 시진 만에 정신을 차리고, 반나절 만에 스스로 일어나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구함을 받으리라곤 생각해보지 못했소.”
그대란 표현을 쓰는 사내의 말에 왕팔은 펄쩍 뛰었지만, 고덕은 그저 피식 웃었을 뿐이다.
“네 이름이……?”
“청여요. 사람들이 안휘섬검이라 부르던…….”
“남궁혈사라 불리는 현장에 있지 않았나?”
자신이 벌인 일을 태연히 묻는 고덕의 말에 청여는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있었소.”
“한데도 용케 살아남았군.”
“불행하게도… 도주에 성공할 수 있었으니까…….”
“잘 도망 다니는 모양이군.”
빈정거림이 분명한 고덕의 말에 청여는 화 대신 풀썩 웃어 보였다.
“그렇군. 나는 정말 잘 도망 다니는 모양이오.”
“흉수는 기억하나?”
“어떤 흉수 말이오?”
청여의 말뜻을 알아들은 고덕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남궁혈사의 흉수 말고, 이번에 너에게 손을 썼던 흉수.”
“보았소.”
“용모파기 그릴 수 있나?”
“왜? 원한이라도 갚아줄 요량이오?”
비틀린 웃음을 지은 청여의 물음에 고덕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렇게 한가한 시간이 없다.”
“한데 왜?”
“놈이 고독을 다루니까. 그런 놈은 단번에 죽이기보다는 정보를 캐내야 할 게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한마디로 얼굴을 기억해두었다가 단칼에 베어버리는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자신과 동료들은 살기 위해 악착같이 도주를 했건만, 누구는 실수로 잡아 죽이지 않기 위해 얼굴을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로군.”
청여의 한탄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지. 그래서 이 세상이 더럽게 재수 없는 거야.”
고덕의 말에 청여는 헛웃음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