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9장 (100/129)

제99장.외면(外面)-정을 놓지 못하다

척회 왕부에서 시작된 관부의 혼란은 점차 심화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호철랑의 계획에 따라 소흥 왕부가 대응하며 어느 정도 진정될 것 같았던 상황은 느닷없이 감숙성 향방군이 섬서로 내려오면서 급변했다.

“어찌 된 일인가? 척회 왕부가 섬서를 비우다니. 혹 경공 왕부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당황한 소흥왕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호철랑은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경공 왕부와 척회 왕부가 모종의 합의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척회 왕부와 달단이 결탁하는 것보다 배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이다. 전대 경공왕의 죽음도 척회 왕부와의 전투에서였다. 당금의 경공왕에게 척회 왕부는 아비를 죽인 철천지원수였던 셈이다.

“하면 척회 왕부의 행동을 어찌 이해하여야 한단 말인가?”

답답하다는 듯 묻는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의 시선이 이첨에게 향했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소?”

이첨의 물음에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단과의 국경으로 파견된 세작들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있었소. 하나, 별다른 이상 징후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소.”

“전군도독부의 병력은 어떻다든가요?”

“전군도독부의 병력들이 주둔하던 병영들은 텅텅 비어 있다고 했소. 아무래도 평리에 주둔 중인 병력은 모두가 전군도독부의 병력이라 보아야 될 듯싶소이다.”

“한데도 달단이 조용하단 말씀입니까?”

“그것이… 세작들의 보고는 그러했소.”

이첨의 답에 소흥왕마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을 막아왔던 전군도독부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췄는데 달단이 조용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달단과 결탁을…….”

조심스러운 소흥왕의 음성에 호철랑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불행히도 사실이 될 듯싶습니다, 왕야.”

“하, 하나 달단이 조용하다는 이유만으로는 그리 속단할 수 없네.”

여전히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부정부터 하고 보는 소흥왕에게 호철랑이 말했다.

“송구하오나 사실일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어째서, 무슨 근거로 그리 단정을 짓는 겐가?”

“제 판단에는 아무래도 달단의 대병력이 이곳 파단고림사한에 집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곳은…….”

“감숙과 접경인 달단의 땅이옵니다.”

“감숙과의 접경 지역에 달단의 병력이 집결 중이라면 감숙성 향방군이 남하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만에 하나 척회 왕부와 달단이 결탁을 했다면 가능합니다.”

“하면 척회 왕부가 감숙을 내어주기로 약조라도 했을 것이란 말인가?”

“감숙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북부 일부는 분명 양도할 의사를 비쳤을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아니, 천 번 만 번을 양보해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작은 땅을 위해 달단이 감숙을 집어삼킬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한단 말인가?”

강하게 부정하는 소흥왕에게 호철랑은 파격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다.

“달단에게 제시된 목표는 감숙의 북부만이 아닐 것입니다.”

“하면……?”

불안한 음성으로 물어오는 소흥왕에게 호철랑은 감숙 너머의 땅을 가리켰다.

“바로 이곳, 청해입니다.”

호철랑의 말대로 감숙의 북부와 청해를 차지한다면 달단은 서역과의 교역로를 완벽하게 틀어쥐게 된다. 당금의 서역 교역로에서 벌어들이는 재화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달단의 군사력을 키워주는 안정된 자금줄이 될 공산이 높았다.

“그, 그것이…….”

당황하는 소흥왕에게 호철랑은 또 다른 가설을 제시해 그의 입을 완벽히 틀어막았다.

“만에 하나 그 정보를 고의적으로 경공 왕부에 흘렸다면… 경공 왕부는 좌군도독부의 병력을 이곳 서녕에 집결시켜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그들은 척회 왕부를 도모할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호철랑의 말에 이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섬서성 향방군의 남하에도 불구하고 경공 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설명이 되긴 합니다. 왕야.”

“세작들을… 세작들을 풀게. 경공 왕부는 물론이고, 청해에도…….”

소흥왕의 의중을 짐작한 이첨이 고개를 숙였다.

“속히 정보를 취합해보겠습니다, 왕야.”

* * *

관부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서 소흥 왕부는 속된 말로 발에 땀나게 움직였다. 그렇게 움직인 덕에 사단이 벌어지기 전에 중요한 정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정보를 받아든 소흥왕은 망연자실했고, 자신의 추측이 대부분 맞아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호철랑은 기쁨의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경공 왕부에서 파악하고 있는 달단군의 군세는 삼십만가량입니다. 으레 그렇듯이 모두가 기병이고, 잘 무장되어 있습니다.”

“삼십만… 흐음…….”

이첨의 보고에 소흥왕은 절로 이는 침음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런 주군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첨이 다시 보고를 이었다.

“문제는 달단만이 아니라 자극을 받은 토번이 이상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토번은 서장에 자리한 일종의 속국이다. 대대로 중원 제국과 다투어오다 원조 때 병탄되어 복속한 이래 명조까지 조공을 하고 속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서장은 좌군도독부의 관할로 경공 왕부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었다.

“경공 왕부로서는 사면초가인 셈이로군.”

“그렇습니다, 왕야. 좌군도독부를 제외하면 동원할 수 있는 군세라 해봐야 청해와 사천성 향방군인데, 청해성 향방군은 달단 때문에 발이 묶인 탓에… 사천성 향방군은 대부분이 서장 쪽으로 배치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일이 터진다면……?”

소흥왕의 물음에 이첨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전투야 벌어져 봐야 명확히 결과를 알게 되는 것이긴 하오나, 수치상으로만 보면… 경공 왕부는 회생 불능의 타격을 입을 공산이 큽니다.”

그 말은 제국이 서쪽 영토 대부분을 잃는다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달단이라는 적이 한층 강화되는 결과를 맞을 테고, 종래에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의미였다.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황실에 지급으로 알리고 대책을 청하라.”

“예, 왕야.”

“그리고 호 판관.”

소흥왕의 부름에 호철랑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명하소서, 왕야.”

“상황이 이리 흘러가면 군을 움직이는 것이 지금처럼 멀리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일세.”

“하오면……?”

“내 경에게 중군도독부 부도독과 왕부 군사의 직을 내릴 터이니, 속히 령보로 달려가게. 가서 중군도독과 함께 사태를 진화하도록 성심을 다해주게.”

“명을 받사옵니다, 왕야.”

그길로 물러나온 호철랑은 일단의 호위병들과 함께 령보를 향해 움직였다.

* * *

관부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 강호의 백도도 그에 못지않은 혼란을 맞고 있었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무사들의 과반수를 보냈다 그들 모두를 잃은 설검문주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대책이 있긴 한 겁니까?”

설검문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만도문주 또한 허옇게 변한 낯빛으로 독괴에게 물었다.

“일단 그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오.”

“무인들이 힘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그럼 무엇으로 제압한단 말씀입니까?”

답답하다는 듯이 묻는 설검문주에게 독괴가 답했다.

“머리를 쓸 수밖에.”

“머리요?”

“그렇소, 머리. 나머지는 군사가 설명해주게.”

독괴의 말에 제갈천이 나섰다.

“맹주님의 말씀대로 그를 잡으려면 이젠 힘이 아닌 계책을 써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계책을 쓰자는 것이오?”

“그의 허점을 노리자는 것입니다.”

“허점?”

“예. 치명적인 허점…….”

의미심장한 제갈천의 음성에 만도문주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 허점이란 게 무엇이오?”

“최근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그에겐 가족이 있습니다.”

“설마 지금 그 가족을 노리자는 말이오?”

“그 설마가 맞습니다. 이전까지는 차마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에 젖혀 두었던 방법이긴 하나, 이젠 그 방법 외에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없게 되었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허허, 어찌하다 이런 지경까지…….”

그런 이들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제갈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노릴 수 있는 목표는 모두 다섯 곳입니다. 사가가 있는 하포, 둘째 딸과 셋째 아들이 의탁하고 있는 한도회, 큰딸이 시집간 복주상단, 그리고 놈이 사모하는 여인들로 의심되는 이들이 의탁하고 있는 소흥 왕부와 절강고가입니다.”

“그 모두를 공격하자는 말은 아니리라 믿소이다.”

열거된 곳들을 동시에 공격하자면 남은 정천맹의 전력으로는 언감생심 엄두도 낼 수 없었던 까닭에 하는 소리였다.

“물론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비교적 상대하기 수월한 두 곳을 선정했습니다.”

“그곳이 어디요?”

탄식을 터트린 것이 언제냐는 듯 사람들의 시선은 제갈천의 입에 모아졌다.

“하포와 소흥 왕부입니다.”

제갈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반대가 빗발쳤다.

“미쳤소? 소흥 왕부라니, 지금 백도를 아예 끝장내자는 말이오?”

당금의 소흥 왕부는 과거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곳이 아니었다. 십만의 중군도독부를 비롯해 여섯 개 성을 아우르는 권력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소흥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단숨에 오륙십만의 군세가 만들어져 백도를 일거에 절단낼 수도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노리는 것은 소흥 왕부가 아니라 소흥 왕부에서 벗어난 목표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가 목표로 삼은 것은 남장을 한 여인이고, 그녀는 지금 소수의 경호 병력과 함께 이동 중입니다.”

“그렇다면야…….”

대번에 사람들의 표정이 변한다. 가능성이 있다면 방법은 무궁무진한 것이 바로 강호인 까닭이다.

이내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두 개로 나뉜 인사들이 급히 정천맹을 벗어났다.

그렇게 사람들이 흩어지자 피곤한 표정의 독괴가 제갈천에게 물었다.

“왜 절강고가를 제외한 건가?”

“절강고가는 모용세가에서 별도의 계획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쪽에서 처리할 일에 굳이 맹이 힘을 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용세가가?”

“예, 맹주님.”

“모용세가가 절강고가를 왜? 그 둘이 딱히 원한을 맺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네만…….”

“원한 때문은 아닙니다.”

“하면?”

독괴의 의문에 제갈천이 조용한 음성으로 답했다.

“모용세가의 소가주가 절강고가에 의탁해 있답니다.”

“그것과 모용세가가 절강고가를 도모하려는 이유가 무슨 상관이라고?”

“상관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이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은 한 장의 서찰을 내밀었다.

“오늘 아침 모용세가에서 온 서찰입니다.”

제갈천이 내미는 서찰을 받아든 독괴는 천천히 그것을 읽어 내려갔다.

“세가 내 권력 다툼이로군.”

“맞습니다. 진산반은 차남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입니다.”

“하나, 이렇게 비밀리에 움직일 정도로 현 소가주를 지지하는 장로들이 많은데 뒤처리를 어찌하려고?”

“그것은 진산반이 해야 할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은근한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그건 모용세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 하면 맹은 그저 모른 척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예. 절강고가도 맹에 가입된 문파이니 이렇듯 협조를 구해온 것입니다. 때마침 잘되었기에 고가 가주의 딸을 우리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동의한다는 답신을 보낼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군. 그리하게.”

“알겠습니다, 맹주님.”

이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을 벌이면서도 독괴와 제갈천은 별다른 수치심을 느끼지 못했다.

그날, 여의검존이 절명하던 장면을 목격한 이후로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언제 어디서 검마가 나타나 살수를 펼칠까 두려운 까닭에서였다. 그 탓에 두 사람의 뇌리엔 어떻게 하든 검마를 죽여 없애야 한다는 명제만 남았던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주도하에 정천맹을 떠난 두 무리는 이내 각자의 목표를 향해 고속으로 움직였다.

후량의 부상을 살피느라 검마가 숙주에 묶여 있는 동안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급히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 * *

하포에 위치한 검마의 사가에 대한 공격과 인질의 압송을 책임진 이는 설검문의 문주 엽춘이었다. 그는 자신의 문파를 포함해 십여 개의 문파에서 파견한 절정 고수들 이십여 명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이번 일, 과연 잘하는 짓일까요?”

함께 이동하고 있던 총관 이한의 물음에 엽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이다. 행위를 보면 피해야 할 일이 분명하나, 우리가 살기 위해선 해야만 하는 일이니…….”

“혹여 창군이라도 기다리면…….”

이한의 물음에 슬쩍 함께 달리던 이들 중 한 명을 일별한 엽춘이 답했다.

“오량진인이 알아서 막아주길 바랄밖에는…….”

창군이 제하이십사강이라면 청성의 건곤신군 오량진인도 제하이십사강이다. 격은 맞춘 셈이니 만일의 경우 창군의 방해가 있다 해도 별다른 걱정은 없었다.

그렇게 고속으로 질주하던 이들이 하포에 도착한 것은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내려앉는 시점이었다.

“그곳이 어딘가?”

엽춘의 위협에 하포에 상주하던 하오문도는 너무나 쉽게 고길의 집을 알려 주었다. 그들로서는 검마의 존재로 인해 뻔히 바라보면서도 어쩌지 못하던 변절자 왕팔을 손 안 대고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고길의 집으로 다가서며 스무 명의 무사들이 일제히 퍼져 나가 집을 에워쌌다. 창군이나 다른 이들이 검마의 가족을 데리고 도주할 것에 대한 대비였던 것이다.

-어차피 내친걸음이오. 손속에 사정을 두어 훗날 이 일이 알려지는 우는 범하지 맙시다. 자- 들어갑시다.

설검문주 엽춘의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스무 명의 정천맹 무인들이 고길의 집에 난입해 들었다.

쾅-

하지만 그들은 난입해 들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협봉검을 꺼내든 협련이 따라 나왔다.

“감히 이곳에 침입한 죄, 죽음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까닭에 낌새를 채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창을 꼬나 쥔 창군과 놀란 왕팔이 고길 내외를 지키는 가운데 협련은 화경에 이른 내력을 아낌없이 방출해 침입자들을 내몰고 따라 나온 것이다.

이 상황이 도래하면 침입자는 결코 살려 보내지 않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쪽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 감추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 탓에 사방으로 빛을 뿌리는 협련의 검은 처음부터 강공 일색이었다. 상대를 향해 자신 있게 나섰던 오량진인은 단 두 수만에 목이 날아갔다.

그 이후엔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근 십여 명의 고수들이 죽임을 당하자,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이들은 일제히 도주를 택했다.

상대가 도주를 시도하자 협련은 휘파람을 불어 왕팔을 불러냈다. 협련의 휘파람이 울리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나온 왕팔을 앞장세운 협련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귀신같은 왕팔의 추격술에 고덕에게 사사한 경공이 섞이자, 화경의 협련조차 따라가기 힘든 속도가 나왔다. 그런 빠름 속에 사가를 침입했던 흉수들은 하나씩 노상에서 협련의 검을 받고 죽어나갔다.

그 와중에 총관인 이한과 함께 도주에 나선 엽춘은 뒷골이 섬뜩해지는 느낌을 받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헉!”

“왜 그러십… 흐헙!”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은 분명히 자신들을 도륙하던 정체불명의 검수였다.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엽춘과 이한은 경공에 모든 내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대와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이한이 뒤로 처졌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란 엽춘이 멈춰 서자 이한이 다급성을 토했다.

“계속 가십시오, 문주.”

“초, 총관!”

“반드시 돌아가셔서 문을 지키셔야 합니다. 가세요. 어서요.”

이한의 애끓는 음성에 엽춘은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엽춘의 귀로 이한의 비명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에 도주하는 그의 주먹이 굳게 쥐어졌다.

“내 이 원한은 반드시 갚아주마.”

이 갈리는 엽춘의 음성의 뒤로 낯선 음성이 딸려 왔다.

“글쎄, 그게 가능할까?”

너무 놀란 엽춘이 뒤를 돌아보았다. 한데 무언가가 이상하다. 사물이 좌에서 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차가운 감촉이 뺨을 통해 전해지는 것을 끝으로 엽춘의 시야는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마지막 도주자의 목을 베어낸 협련이 발을 멈추자 뒤를 따르던 왕팔도 멈추어 섰다.

“다 잡은 거 같군.”

“맞소. 이놈까지 열둘, 도주했다는 이들의 수와 동일하오.”

“하면 돌아가지.”

협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왕팔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생각이오?”

“추가적인 공격이 있기 전에 숨어야겠지.”

“어디로 말이오?”

“소흥 왕부로.”

“흠… 하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긴 하겠소만…….”

관부의 혼잡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돌아가고 있었다.

* * *

협련의 기민한 대응으로 다행히 습격을 격퇴하고 안전을 확보한 하포와 다르게 령보를 향해 이동 중이던 호철랑은 괴인들에 의해 납치를 당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구지?”

“글쎄요. 실력으로 보아선 절대로 관부인들은 아닙니다.”

“그야 당연히… 관부에서 초극의 무인들을 찍어내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혹여 들킬까 싶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이들의 시야에서 삼십여 명의 관군을 가볍게 도륙하고 마차에 타고 있던 호철랑을 납치한 자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제야 신형을 일으킨 이들은 호철랑을 납치하기 위해 파견된 정천맹의 무인들이었다.

“이거 곤란하게 되었는데요?”

섬열검가 출신인 청여의 말에 일행의 대표격인 제갈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군. 하나, 초극으로 보이는 이들이 십여 명이나 움직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네.”

“그렇긴 합니다만… 일단 추격이라도 해야 할까요?”

청여의 말에 이질적인 음성이 끼어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갑작스런 음성에 사람들의 시선이 공중으로 향하는 순간, 여덟 줄기의 빛살이 중인들을 덮쳤다.

“피, 피해!”

제갈무흔의 고함에 반응한 이들은 손가락에 꼽힐 정도뿐이었다. 결국 서른 명의 일행 중 살수를 피한 이들은 여섯에 불과했다.

“누구냐?”

제갈무흔의 물음에 상대는 강기를 무더기로 뿜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암기술이라면 천하제일이라는 당가에 못지않은 곳이 바로 제갈세가다. 그들에게 전수되어오는 소리비도는 당가의 만천화우와 함께 강호 이대 암기술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것을 극성으로 익히고 있던 제갈무흔의 품에서 스무 자루의 비도가 날아올랐다.

하지만 그 비도들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모조리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목표였던 괴인이 스무 자루에 달하는 비도를 순식간에 강기로 베어버린 탓이었다.

상대가 이미 자신들의 능력을 훌쩍 상회한다고 느낀 제갈무흔은 입술을 깨물고 외쳤다.

“도망가!”

그의 외침에 살아남은 이들이 일제히 신형을 뽑아 올렸다. 하지만 제갈무흔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들 중에 일부라도 살아나려면 괴인을 잠시라도 붙잡고 있을 사람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도주하는 동료들의 뒤를 가로막은 제갈무흔의 품에서 소리 없이 백여 자루의 비도가 날아올랐다. 소리비도의 최후 절초 은망이 세상에 첫 선을 보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은망은 품고 있는 절정의 이야기들과 다르게 너무나 힘없이 무너졌다. 내기를 실어 비도를 조종해야 하는 시전자가 이미 목이 없는 시신이 되어버린 까닭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제갈무흔의 목을 베어버린 괴인의 손에서 다섯 줄기의 빛살이 허공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방향들에서 여섯 개의 비명이 들려왔다.

하나, 괴인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한 곳에서 들려온 비명은 절명의 소리가 아닌 부상의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추적은 하지 않았다. 귀광에 적중된 이상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란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가겠군.”

자신의 무공을 믿는지 괴인은 이내 관심을 거두고 호철랑을 납치한 이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렇게 괴인이 떠난 자리엔 이십여 명이 넘는 정천맹 무인들의 시신이 참혹하게 버려졌다.

* * *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고덕은 숙주의 한 의원에서 후량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풀 죽은 후량의 말에 고덕이 설핏은 미소를 지었다.

“신경 쓰지 마라. 네가 나설 만큼 어려운 일이 없었던 것뿐이니까.”

원래대로라면 고덕에게 힘이 되어주기 위해 따라왔던 후량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오히려 짐만 되었을 뿐이다. 그것이 후량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의 후량답지 않은 모습에 고덕이 애써 위로를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후량의 기를 죽이는 역효과만 낼 뿐이었다.

그렇게 답답한 시간을 보내던 고덕과 후량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날 찾았다고?”

“예, 대인. 여기 전서가 와서요.”

“누구지?”

“그야 저도 모릅지요.”

“서찰을 보낸 사람 말고 너 말이다.”

고덕의 물음에 서신을 내밀고 있던 사내는 멋쩍게 웃었다.

“아~ 전 또. 저는 숙주 전서방에서 일하는 오구라 합니다요.”

“숙주 전서방?”

“예. 오늘 아침 저희 전서방으로 이게 전해져 와서…….”

오구라는 이가 내민 서신을 받아든 고덕은 내용은 읽지도 않고 물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어찌 알았지?”

“숙주에서 대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지요. 모르셨습니까?”

“일반인들이 날 어찌……?”

“세상에 하루에 수천을 죽이는 살인마… 아이쿠, 이놈이 미련해서 실언을…….”

그제야 오구란 사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숨어 있었다고는 해도 그날 벌어졌던 참상을 정리한 이들은 숙주의 백성들이었으니 그 일을 모를 수 없었다.

거기다 숙주를 떠난 것도 아니고 버젓이 의원에 들어앉았으니, 자신들에 대한 소문이 여과 없이 퍼져 나갔던 모양이다.

상황을 이해한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 돌아가게.”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대인.”

허리가 부러질까 걱정일 정도로 고개를 숙여 보이던 오구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버렸다.

그런 상대의 반응에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고덕이 서신을 펼쳐 들었다.

그 상태 그대로 굳어진 고덕을 일별한 후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일이 생긴 모양이다.”

“일이라니요?”

여상치 않은 고덕의 반응에 후량은 슬며시 그의 손에서 서신을 빼내 읽었다.

“이, 이런, 어서 가야지요.”

“아직은 시간이 있다.”

“하, 하지만…….”

“호들갑 떨지 마라. 다행히 다른 아이들에겐 협련이 서신을 보낸 결과 아무 일 없었다니 괜찮을 게다.”

“그러면 어서 소흥 왕부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포에서 떠난 날짜가 있으니 지금 출발하면 너무 이르다. 예서 이틀 정도 후에 출발해도 충분할 거다.”

고길 내외를 이동시키려니 협련은 마차를 이용할 것이라 했다. 하지만 자신들은 경공을 사용하게 될 터. 시간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알겠습니다. 하면 준비를 갖춰두겠습니다.”

왠지 의욕을 불태우는 후량에게 고덕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출발하면 최대치의 경공으로 달릴 것이다. 몸이나 만들어 놓도록.”

“아, 예…….”

낮은 음성 속에 든 분노를 못 느낄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기에 후량의 목은 잔뜩 움츠러들어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