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장.분란(紛亂)-관부에 이는 바람
이미 모든 기감을 최대치로 열어놓고 있었음에도 지척에 다가와서야 무언가 접근했다는 느낌만 받았다. 더구나 그 순간 최대한의 속도로 물러났음에도 완벽히 피하지 못했다.
그렇게 예리하게 잘려 나간 앞섶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의검존이 물었다.
“역시 심검인가?”
“완전 맹탕은 아니로군.”
고덕의 답에 이략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불연대 고수들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섰다.
심검. 강호 고수들조차 이야기책에서나 읽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만 먹어도 상대를 벨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현실에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심검이 강호 고수들의 정점이라는 검마와 여의검존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었다.
“정말이로군. 그런데 그걸 사용한다면 그대가…….”
“쉿! 비밀을 말하면 빨리 죽는다는 거 알고 있나?”
장난스레 말하는 고덕이었지만 그의 눈에 천천히 떠오르는 광기는 장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탓에 여의검존은 마른침만 삼킬 뿐, 쉽게 입을 열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뭡니까? 저자에게 무언가가 있는 겁니까?”
속도 모르는 이략의 물음이 들려왔지만, 여의검존으로서는 그 말에 답하기보다는 이곳을 어찌 빠져나가야 할지 궁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대가 정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그 경지라면 이곳은 사지였다. 그것도 완벽한 사지. 함정은 자신들이 아니라 검마가 파놓고 있었던 것이다.
“봉공!”
답답한 듯 부르는 이략에게 여의검존이 말했다.
“무엇하는가? 이곳에 궁금증이나 풀자고 나왔던가? 자네와 불연대의 임무를 상기하게.”
느닷없이 임무를 거론하는 여의검존의 모습에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말대로 자신들에게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임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이략의 손이 다시금 고덕을 향하자 잠시 소강상태로 대기 중이던 불연대의 고수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스걱-
날아오르던 불연대의 고수들 중 일부가 둘로 몸뚱이가 잘려 나가며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역시 고덕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을 똑똑히 목격한 여의검존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불연대의 고수들은 분노했다. 한편이면서도 확연하게 다른 두 반응의 끝도 분명하게 갈렸다.
이략을 포함한 불연대의 고수들이 분노에 차 모조리 달려들었다면 여의검존은 곧바로 신형을 뒤로 뽑아 올렸다.
고덕으로서는 가장 걱정이던 방해물이 뒤로 물러나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악착같이 끌어모아 붙잡아두었던 내력을 모조리 풀어냈다.
순간 고덕을 중심으로 현월이 무작위로 튀어나왔다.
쒜에에엑-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이끌며 튀어나간 현월들이 날아드는 불연대 고수들과 교차했다.
그간 무적의 힘을 과시하던 현월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더러는 여지없이 몸이 갈라지며 죽어나갔지만 일부는 피해내거나 튕겨 내는 이들마저 있었다. 이전과 달리 고덕이 현월을 만들어낸 내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하지만 부족함을 수로 메우려는 심산인지 고덕의 주변으로 또다시 무수한 현월들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세 차례나 현월의 파도가 불연대를 덮쳤지만, 여전히 검을 들고 고덕을 노리는 이들은 십여 명이나 남아 있었다.
적이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짧은 기간에 이 정도의 고수를 키워낼 수 있는 소림의 저력에 고덕은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검을 들이민 이들을 살려 보낼 정도로 마음이 좋진 못했다.
내력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상대는 겨우 열이다.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순간, 명혼이 움직이고 열 곳의 공간이 어긋났다.
그와 동시에 허리 어림이 깨끗이 잘려 나간 열 구의 시신이 바닥에 쓰러진 구십구의 시신에 보태졌다.
적을 사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자신을 여의검존이라 밝혔던 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고덕의 귀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역시 허장성세에 공갈 협박이었군.”
그 목소리를 쫓아 천천히 돌아선 고덕은 반쯤 주저앉은 건물 지붕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여의검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완벽히 속아 넘겼다고 믿었건만,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천하의 검마가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지붕에서 내려와 천천히 다가서는 여의검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은 고덕의 내력은 겨우 제대로 된 현월 하나를 날려 보낼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눈치가 빠른 모양이야.”
“그게 진짜 심검이라면 내가 피할 수 없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말일세.”
틀린 말은 아니다. 진짜 심검이라면 같은 경지가 아닌 이상 절대로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더구나 내가 아는 심검은 상대의 마음을 베는 검. 옷자락이나 잘라내는 기예가 아니라서 말일세.”
완벽하게 읽힌 것이다. 놈은 분명 심검에 대해 심도 있게 파고들었던 전적이 있던 것이 분명했다.
“마치 겪어본 것처럼 말하는군.”
“잘 아는군.”
여의검존의 답에 이번엔 고덕의 표정이 굳어져 갔다. 그 말이 주는 의미를 충분히 알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고덕의 부정에 여의검존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도주를 생각했겠나?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위험성을 알고 있었던 게야. 물론 그 탓에 잠시 동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 셈이었지만…….”
상대의 답에 무엇을 느꼈던지 고덕의 이가 악물렸다.
“네놈, 삼천의 놈이로구나.”
“자네 눈치도 꽤나 빠른 편이로군.”
처음엔 눈을 돌리고 도주할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미안하지만 후량을 두고서라도 빠져나갈 마음도 먹었다. 하지만 상대가 삼천의 주구라면 도주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가 무섭게 끓어오르며 사지 백해를 달렸다. 비워진 단전이 마치 분노로만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라진 내력을 분노가 대신할 수는 없다.
거세게 일어나는 분노는 태산이었지만, 그 뒤를 받쳐 줄 내력은 마른 우물에 고인 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고덕의 현실을 알아차린 것인지 여의검존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지친 상대를 향한 일검이었지만, 여의검존은 최선을 다했다. 잔뜩 끌어올린 내력을 가득 퍼부어 최강의 초식을 뿌려 냈다.
그렇게 휘둘러진 여의검존의 검을 따라 마른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강기의 비가 고덕을 향해 쏟아졌다.
“세우검(細雨劍)!”
고덕의 놀란 음성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강기의 비가 그를 덮쳤다. 순간 고덕의 주위로 노란 달무리가 어렸다.
퍼버버버버벅, 퍼벅-
비처럼 쏟아진 강기들이 목표를 잃고 바닥을 두드리며 깊게 파고들었다.
두 눈을 버젓이 뜨고도 상대를 놓친 여의검존의 기감이 재빨리 주변을 훑었다. 지금 벌어지는 현상이 바로 북황의 공간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검존으로부터 오 장 정도 떨어진 곳의 공간이 고덕을 토해냈다.
“쿨럭-”
모습을 드러낸 고덕은 밭은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바닥까지 내려간 내력을 무리하게 움직여 공간권을 구현해낸 부작용이었다.
“그 꼴이라니……. 잠시지만 자연경이라 믿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지는군.”
제대로 봤던 것이라고 반박해주고 싶었지만, 이 꼴로 그런 말은 비웃음만 살 것이기에 고덕은 지그시 이를 악물고 말았다.
하긴 제대로 들어선 것도 아니고, 한 발은 현경의 마지막에 걸쳐 두고 한 발만 간신히 들어선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굳이 자연경이라 주장하기에도 우스웠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네가 어떻게 세우검을 알고 있지?”
고덕의 사문인 마총에서 잃어버린 두 가지 절기 중 하나다. 마총의 최고 절기들인 마예삼본(魔藝三本) 중 서열 삼 위라 적혀 있던 진산절기 중의 절기.
“싸움에서 거둔 승리로 상대의 무공을 취한 것이 마교만이라 생각했던 건가?”
“그 말은……?”
“사조 중 한 분이 마교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 뒤에 얻은 무공이었다. 지독히도 파괴적이고 마성이 짙어 그것을 닦아내는 데 애를 먹었지.”
하긴 방금 겪어본 세우검은 사문에 적혀 있던 것과 상당 부분 차이가 있었다. 진정한 세우검은 시커멓게 몰려든 먹구름 속에 비와 함께 강기가 쏟아진다고 했다. 그 탓에 상대는 강기와 비를 구분하지 못한 채 넝마가 되어 죽음을 맞이한다던가…….
그러고 보면 마총의 기록엔 천둥에 대한 말은 없었다.
“천둥은 어찌 된 거지?”
“마성을 지우는 과정에서 먹구름이 사라진 대신 얻은 것이었지. 꽤나 멋있지 않나. 이것 덕분에 난 여의검존의 무명을 얻었지.”
여의. 여의주를 빗댄 무명을 얻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천둥과 비처럼 쏟아지는 강기. 날씨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여의주에 비견된 이유였다.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알아차렸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이 고덕은 분했다. 더구나 여의검존은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리라…….
그것이 고덕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결국 고덕은 마지막으로 쥐어짜 틀어쥐고 있던 내력을 풀어냈다.
쒜에에엑-
돌발적으로 날아드는 현월을 여의검존은 어렵지 않게 비껴 냈다. 이미 삼천에 머물 때 살황과의 비무에서 수차례 상대해본 절기였다. 그 탓에 여의검존의 대응은 부드럽고 여유로워 보였다.
쾅-
튕겨 나가려던 현월은 시전자인 고덕의 의지에 의해 그대로 폭발했다.
여의검존은 현월이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덕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처음 알았지만, 현월이 가진 힘의 크기상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 탓에 폭발에 대한 여의검존의 대응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검막을 쳐 쏘아져 오는 강기의 파편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투두두두둑.
여의검존의 예상대로 현월이 폭발하며 쏘아져 온 강기의 파편들은 그가 펼친 검막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 결과에 만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검막을 걷는 순간, 고덕의 신형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상대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현월의 폭발로 일어난 경력에 가려 알지 못했던 여의검존은 당황해 급히 검을 들어 앞을 막았다.
푹-
살을 주고 뼈를 가른다.
강호 무인들이 처음 배우는 격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고덕 정도의 고수가 사용하기에는…….
그것이 여의검존에게 허점을 만들었다.
왼쪽 어깨를 내주는 대신 고덕은 일월검귀와의 공명에서 각성한 섬혼을 펼쳐 여의검존의 목을 깔끔하게 뚫어버렸다.
“끄르르륵.”
고덕의 애검인 명혼에 의해 목이 뚫린 탓에 거품 이는 소리만 나는 여의검존의 입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연신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저승사자한테나 해!”
스걱-
횡으로 명혼을 빼낸 까닭에 여의검존의 목이 잘려 나갔다.
그렇게 생명이 꺼진 여의검존의 신형이 기울어 무너지는 순간, 그의 몸을 빠져나온 내력이 고덕을 덮쳤다.
그렇게 다섯 번째 공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여의검존의 목이 잘려 나가는 것을 목격한 독괴와 제갈천은 호위 무사들과 함께 다급히 자리를 떴다. 그들로서는 괜히 어물쩍거리다 검마와 마주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탓에 공명하는 고덕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 * *
하남에서 피를 피로 씻는 무림의 혈사가 지속되던 시기, 관부도 갑작스런 혼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전군도독부가 남하를 하다니?”
황제의 당황성에 금의위 제독인 해서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현재 금의위에 수집된 정보로는 분명 전군도독부가 남하 중이랍니다. 그 이유와 목적은 현재 파악 중에 있습니다.”
해서령의 답에 황제의 시선이 시종일관 아무 말도 없는 대도독에게 향했다.
“대도독은 할 말이 없는가?”
가정제의 물음에 최근 들어 더 늙어 보이는 대도독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군령권을 가진 대도독의 답으로는 참으로 답답한 것이었지만, 그를 탓할 수만도 없었다. 이미 왕권이 강화된 이후 각지에 배치되어 있던 도독부들이 관할권에 위치한 왕부들에 빌붙은 연후로 급속한 군벌화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군령권을 가진 대도독부는 사실상 각 도독부들에 대한 지휘권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가정제는 대도독을 탓하기보단 병부상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부상서는 알고 있는 것이 있는가?”
가정제의 질문에 병부상서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금의위로부터 정보를 받은 즉시 정보 관련 부서들을 움직이곤 있으나 그에 대한 정보는 아직 파악된 것이 없습니다. 폐하.”
“이거야 참…….”
답답해하는 황제에게 배석해 있던 동창제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창엔 그에 대한 정보가 조금 들어와 있습니다요, 폐하.”
“정말인가?”
반색하며 묻는 가정제에게 동창제독이 서둘러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다만 군병의 이동에 대한 정보라기보다는 다량의 군량과 군수물자가 이동되고 있다는 정보이옵니다.”
군대의 이동엔 군수물자의 이동이 필수적이다. 그 탓에 군수물자가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병력이 이동 중이거나, 이동할 계획이 있다는 뜻이 된다.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가?”
“섬서와 감숙 각처에서 출발한 물자들이 호북 방향을 향합니다요.”
“호북이라면…….”
최근에 재건된 중군도독부의 관할권이다. 그리고 그곳은 황제의 친위 세력인 소흥 왕부의 세력권이었다.
“하면, 전군도독부의 목적이 소흥 왕부에 대한 침탈에 있는 것이란 말이더냐?”
“그것까지는…….”
한때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감찰 기관인 동창의 제독이 하는 답이다. 지방에 대한 관리 감독이 얼마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일이었다.
“서둘러 파악해 보고하라.”
“황명을 받사옵니다, 폐하.”
고개를 조아리는 동창제독에게서 시선을 돌린 가정제가 다시 병부상서에게 말을 건넸다.
“병부는 즉시 해당 사실을 중군도독부에 알리고, 소흥 왕부의 경계에도 만전을 기하라 이르라.”
“명을 받드옵니다, 폐하.”
병부상서의 복명에 가정제의 시선이 이번엔 대도독에게 향했다.
“동북어위도총사에게 현 상황을 설명하고, 전군도독부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도록 지시하라.”
“예, 폐하.”
황제는 지시하라고 했지만,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도독은 동북어위도총사에게 절절한 사정조의 서찰을 연일 써 보내야만 할 것이었다.
* * *
그렇게 분주히 움직인 황실 덕분에 소흥 왕부는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에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전군도독부의 병력이 주둔한 곳이 평리라고?”
평리는 호북과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섬서의 최남단 도시였다.
“예, 왕야.”
지휘사 이첨의 답에 소흥왕의 물음이 이어졌다.
“대략 동원된 병력은 어느 정도인 겐가? 달단과의 국경을 완전히 비워두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상합니다. 급히 파견된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평리에 주둔한 전군도독부의 병력은 이십만에 달합니다. 그것은 전군도독부 전 병력이 주둔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면 그들이 달단과의 국경을 비워두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것을 알 수 없어 일부 세작들을 달단과의 국경으로 급파하였으니, 그들의 보고가 오는 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면 그동안은 저들의 정확한 목적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송구합니다, 왕야.”
고개를 조아리는 이첨에게 더 이상의 잔소리를 할 수 없었던 소흥왕은 이내 시선을 묵묵히 앉아 있는 호철랑에게 돌렸다.
“호 판관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략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로?”
“예, 왕야. 우선 주둔지에 모여 있는 병력은 모두 전군도독부의 병력이 아니라 각 성의 향방군이 일부 섞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 머릿수만 채웠다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아무리 향방군이 상비군이라고는 하나 중앙군인 도독부 병력에 비해선 장비나 훈련 상태, 모두가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는 일. 그들의 머릿수로 우리의 혼란을 야기한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면 다른 한 가지 경우는 무엇인가?”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의 답이 이어졌다.
“달단과 척회 왕부가 결탁을 한 것입니다.”
“뭣이라, 달단과 결탁을!”
소흥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설 정도로 파격적인 말이었다. 제국의 왕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쫓아 보낸 이전 황조의 세력을…….
너무나 충격적인 의견이었기 때문인지 이첨이 조금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보다는 전군도독부 병력을 국경에서 빼내고 그 자리를 향방군으로 채울 수도 있지 않겠소?”
이첨의 말에 소흥왕이 관심을 보였지만, 호철랑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가?”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의 설명이 이어졌다.
“달단은 호전적인 이들입니다. 그 탓에 전군도독부와의 전투가 끊이질 않지요. 한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향방군을 밀어 넣으면 달단 부족들은 이상 상황을 바로 눈치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대규모 공격이 일어나겠지요. 지금은 부족 단위로 서로 나뉘어 아옹다옹한다지만, 명분만 서면 언제라도 뭉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니까요.”
틀린 말이 아니다. 과거에도 전군도독부가 약체로 평가되자마자 수십만의 병력을 집중시킨 달단군이 만리장성을 도모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정보를 일찍 접한 황실의 요청을 받은 왕부들이 대규모 병력을 충원한 덕에 장성을 의지해 달단의 공격을 분쇄해낼 수 있었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군.”
소흥왕의 말에 주변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되었다. 호철랑이 말한 척회 왕부와 달단의 결탁 가능성을 소흥왕이 인정한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오면 어찌 대처를 하올지……?”
이첨의 물음에 소흥왕의 시선이 다시금 호철랑을 향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흥 왕부의 지낭은 그였기 때문이다.
“일단은 우리도 중군도독부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중군도독이 병력을 몰아 이곳 죽산으로 향하고 있소이다.”
이첨의 말에 호철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곳이 아닙니다.”
“하면 어디로 병력을 집중해야 한단 말이오?”
그 물음에 호철랑은 탁자에 펼쳐진 지도의 한 지점을 짚었다.
“이곳입니다.”
“그곳은 령보가 아니오? 저들의 병력은 섬서의 남단에 몰려 있는데, 우리는 접경지도 아니고 멀리 떨어진 하남의 령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멀리 떨어졌다고는 하나 이곳도 섬서성과는 접경을 이루는 지역입니다.”
“그야 그렇소만, 거리가 너무 머니 하는 말이 아니겠소.”
“멀지만 또한 가깝습니다.”
“알아듣게 말을 해주시구려.”
못마땅한 표정인 이첨의 물음에 호철랑이 설명을 이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이 우리라면 전군도독부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는 대로 경계를 넘어 호북으로 들어설 것입니다.”
“그야 당연한 노릇이겠지.”
“한데, 그때 우리의 지휘를 받는 중군도독부의 병력이 죽산에 진을 치고 있다면…….”
“전투가 벌어지겠군.”
이첨의 말에 호철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전투가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중군도독부의 병력은 십만이지요. 더구나 최근에 재건된 탓에 병사들의 훈련 정도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수에서도 밀리는 데다 훈련 정도까지 뒤처진다면 남는 건 패배뿐이다.
그걸 인식한 이첨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흐음… 무슨 말인 줄은 알겠소. 하나, 그렇다고 피한다면 우린 호북을 잃게 될 것이오.”
“물론 피하기만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령보로 병력을 돌려놨는데… 그럼 추격을 하겠단 말이오?”
이첨의 물음에 호철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중군도독부는 전군도독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섬서성으로 진입합니다.”
“섬서성으로?”
“예. 이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령보에서 섬서로 들어서면 여산은 지척입니다.”
척회 왕부가 있는 곳은 섬서의 성도인 서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여산이다. 호철랑은 지금 중군도독부를 동원해 척회 왕부를 직접적으로 타격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을 내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한 대응이 되어 있지 않겠소?”
“그래서 일이 터지기 전까지 령보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무슨 뜻이오?”
이첨의 물음에 호철랑은 지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령보는 섬서와도 접경이지만 산서와도 접경을 이룹니다. 막말로 전군도독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삼문협을 통해 산서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척회 왕부의 식량 창고가 위치한 황하 부근이 중군도독부에게 노출됩니다.”
호철랑의 말에 이첨이 반박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중군도독부 병력이 령보에 진을 치면 상서성 향방군은 황하 남부에 몰려 삼문협의 출구를 막아설 게요.”
“바로 그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당연히 산서성 향방군은 애초부터 섬서에 위치한 척회 왕부를 지원할 수 없습니다.”
“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은 듯한 이첨의 탄성에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인 호철랑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는 소흥왕과 다른 관리들을 위해 설명을 이었다.
“척회 왕부는 넓은 영토에 비해 향방군의 수가 적습니다.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향방군은 섬서와 감숙, 그리고 산서뿐입니다. 이 중에서 섬서의 향방군은 이동할 수 없습니다.”
“그건 왜지?”
소흥왕의 물음에 호철랑은 지도에서 사천을 짚었다.
“이곳에 좌군도독부를 휘하에 둔 경공 왕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공 왕부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척회 왕부의 관할권을 지나야만 한다. 그 말은 경공 왕부의 최대 숙원이 척회 왕부의 병탄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최근에 안창의 반군을 섬멸하며 얻은 귀주와 강서가 세력권 안에 있었지만, 아직 두 지역은 안정이 되지 않았다. 오죽하면 두 성의 방어를 맡은 향방군과 치안을 맡은 안찰사의 병력마저 완전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유는 그들이 안창의 사후에 항복해온 자들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한 번 항복한 이들은 두 번 세 번도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공왕은 그들을 전적으로 신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체 가진 병력이 적은 경공 왕부는 결국 그들의 손에 두 성을 맡기고 감숙과 사천의 병력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소흥왕은 호철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흠… 대대로 앙숙인 두 왕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섬서의 향방군은 자리를 비울 수 없겠군.”
“맞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산서의 향방군마저 발이 묶인다면…….”
그때, 한 관리가 의문을 제기했다.
“중군도독부의 병력이 움직인다면 그들도 뒤를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은 황하를 멀리 돌아 길현 부근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땅으로 이동한다면야 그렇겠지만, 중군도독부의 뒤를 따라 하남으로 내려온다면 중군도독부는 오히려 산서성 향방군의 추격을 받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관리의 의견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 보인 호철랑이 답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남성 향방군을 뚫어야겠지요.”
그제야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긴 자신들의 관할권인 하남성 향방군을 끌어올려 전군도독부의 후위를 맡기면 산서성 향방군은 꼼짝달싹 못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호철랑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고, 한참 이동 중인 중군도독부를 향해 파발이 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