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장.격전(激戰)-피가 내를 이루다
정천맹의 행사를 어느 정도 분쇄했다고 생각해 느긋해졌던 고덕은 갑자기 일어서는 기세에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고덕의 중얼거림에 후량은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이내 경악으로 뒤바뀌었다.
앞을 새카맣게 메우며 몰려오는 이들을 바라보며 고덕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제길, 이게 무슨…….”
물러나자니 도망가는 것 같고, 자리를 지키자니 저 많은 이들과 드잡이질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 잠시의 머뭇거림이 결국은 발길을 묶었다.
두 사람에게 밀어닥친 무사들은 상대에 대한 탐색도 거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인지는 처음부터 알고 달려온 이들이다. 죽기로 각오한 이들이었기 때문인지 그들은 다짜고짜 칼부터 휘둘렀다.
고덕은 물론이고 후량마저 헛웃음이 들 정도의 공격이었다. 몰려온 이들은 잘 봐줘야 일류, 대부분은 이류라 불리기에도 벅찬 이들이었다. 그들의 눈엔 강호에 악명이 자자한 마두를 잡아 협의를 세우고, 명성을 높이자는 열의뿐이었다.
그 맹목적인 열의에 고덕은 분노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이 가진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는 비슷한 시기를 거쳤던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문파의 선봉이라 생각한다. 자신들이 문파의 명성에 누가 되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것을 위해선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가장 아래에 있고, 그래서 가장 순수할 수 있는 이들의 맹목적인 충성을 알기에 차마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런 고덕의 마음을 흔들었다.
“헙!”
갑작스런 신음에 고개를 돌린 고덕의 시선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무사들의 공격을 피해내는 후량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찌 된 거야?”
“그게… 실수인가 봅니다.”
“멍청한…….”
짜증을 내는 고덕의 시선으로 검 하나가 후량의 옆구리에 파고드는 것이 잡혔다.
“피해!”
고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검은 생각 외로 날쌔게 후량의 옆구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순간, 고덕의 눈에 불길이 이는 듯이 보였다.
쉐에에에엑-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현월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후량을 베고 숨어들던 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흐헉.”
짧은 비명과 함께 양분된 채 갈라지는 목표에게서 눈을 돌린 고덕이 경고했다.
“놈들 속에 고수들이 숨어 있다. 낮게 잡아도 초극이니 유… 조심해!”
후량에게 주의를 주다 말고 고덕은 비명 섞인 음성을 토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대의 검은 후량의 몸을 깨끗이 베고 지나갔다.
이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고덕은 분명히 보았다. 후량의 몸을 베고 지나가는 것은 검 자체가 아니라 파랗게 일어선 검강이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하나를 뜻했다. 숨어든 고수들은 적어도 후량과 비슷하거나 뛰어난 이들이라는 것.
그런 이들이 후량의 이목을 완벽히 속이고 접근해서 겨우 상처만 입히고 물러나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놈은 후량의 목을 충분히 베어낼 수 있었다.
“이놈들이!”
고덕의 입에서 이 갈리는 음성이 흘렀다. 놈들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고덕에게 짐을 지우려 하고 있었다. 상처 입은 후량이라는 짐을. 그것으로 고덕의 움직임에 제약을 걸어 힘겨운 싸움을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분노한 고덕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궤적의 끝에서 공간이 어긋났다. 후량을 베고 일반 무사들 속에 숨어들었던 고수의 허리도 어긋나는 공간 속에 있었다.
깨끗하게 허리 어림이 잘려 나가 뒹구는 이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이로써 상대의 의도는 충분하게 이해했다. 그 더러운 장단에 놀아날 마음은 없었지만, 이 상황이라면 피할 수도 없었다.
결심을 굳힌 고덕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고, 명혼이 중단에 섰다.
그리고…
쿵-
진각을 밟은 고덕의 오른발을 중심으로 강력한 기세가 밖으로 퍼져 나가며 달려들던 무사들의 신형을 흔들었다.
그렇게 흔들린 무사들 사이로 고덕의 애검 명혼이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서걱-
그 무서운 현월도, 삽시간에 공간을 가르는 공간권도, 주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술 혈인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검격이었다.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가는……. 그 간단한 검격에 주변에 있던 무사 셋의 목이 자신의 몸에서 깨끗이 잘려 나갔다.
성큼, 스걱.
한 발 앞으로 나선 고덕의 손을 따라 명혼이 하단에서 상단을 향해 사선을 그었다. 그 궤적 안에 갇힌 여섯의 몸이 갈려 나가며 피가 쏟아졌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마교에 입문했던 까마득한 예전, 수백, 수천, 아니 수만 번도 더 반복했던 기본 검법인 혈랑검법의 십이 초 사십팔 식이 풀려나왔다.
베고 찌르고 가르고 내리치는 그 단순한 동작이 이어질 때마다 주변엔 피가 치솟고 목을 잃은 시신이 늘어났다.
그렇게 방금 전까지도 숨을 쉬던 이들의 몸이 차갑게 식어갈수록 고덕의 무복은 붉은색이 짙어져 갔다.
직선으로 시작된 고덕의 움직임은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원 안엔 상처를 입은 후량이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일을 벌인 이들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주변 상황은 그들의 의중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백에 가까운 무사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고덕은 지치지 않았다. 기본 공으로만 움직이는 그는 마치 검무를 추듯 부드럽게 움직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움직임이 돌연 직선으로 변했다.
쎄에에엑-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현월이 무시무시한 소성을 이끌며 수십 명의 일반 무사들을 가르고, 후량의 뒤로 접근하던 이의 전면에서 폭발했다.
쾅-
강기의 파편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이는 완전히 육편 조각이 되어 흩뿌려졌다. 재수 없이 폭발 권역에 인접했던 십여 명의 일반 무사들도 험한 모습으로 숨이 끊어진 채 바닥을 뒹굴었다.
갑작스런 현월의 등장으로 일었던 소란이 가라앉기 무섭게 고덕은 다시금 기본공에 몰입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독괴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내력을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아. 저러다가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독괴의 걱정에 제갈천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력을 보존한다고 해도 저리 움직이다간 체력이 바닥날 겁니다.”
“글쎄… 아는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야.”
초극의 극의를 돌파해 화경에 오르면 사람의 경지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때부터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경지는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런 화경마저 돌파해 현경에 이르렀다고 소문난 검마였다.
“설마, 체력적인 부담은 없는 겁니까?”
제갈천의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독괴가 답했다.
“화경인 나도 저런 움직임이라면 사나흘도 유지할 수 있어. 그나저나 정말로 경이롭군. 완벽해. 정말 완벽한 움직임이야. 저 움직임을 깨려면 초극 이상의 고수가 투입되어야만 해.”
“그래서 고수들을 두신 거로군요. 맹주님의 선견지명에 찬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 안에 섞인 이들이 군사가 보낸 이들이 아니란 말인가?”
“제가요? 제가 어찌 맹주님 모르게 초극의 고수들을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놀라는 독괴의 시선엔 후량을 목표로 사방에서 조여드는 초극에 이르는 고수들의 움직임이 잡히고 있었다.
그런 움직임은 고덕의 감각에도 이미 걸려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덕은 그들이 일제히 후량을 향해 도약한 순간 비기를 폭발시켰다.
순간, 후량을 중시에 두고 동그랗게 노란 달무리가 어렸다. 그리고 이내 그곳에서 이십여 개에 달하는 현월이 튀어나왔다.
퍼버버버벅.
자잘한 파육음이 허공을 가득 메우길 잠시, 이내 피와 함께 두 동강이 난 시신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 속에서 현월들이 폭발해 쏟아졌다.
콰과과과광. 쾅광-
격렬한 폭음에 이어 마치 콩 볶는 듯한 소음이 일어났다.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현월의 파편들이 지상의 무사들을 관통해 땅바닥을 두드린 까닭이다.
그로 인해 일어났던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드러난 광경은 경악 그 차체였다. 후량을 중심으로 근 삼 장의 공간이 완벽히 피와 시신의 바다로 이루어져 버렸다.
그 한쪽 끝에 선 고덕의 검이 질린 표정의 무사들을 향해 곤두섰다.
서걱-
중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오며 그어진 일격에 선두에 선 채 놀라 멈춰 있던 무사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데구르르.
무사의 머리가 피로 흥건한 바닥을 구르다 멈춘 순간, 커다란 함성과 함께 무사들이 다시금 밀려들었다.
그들 속으로 고덕의 명혼이 싸늘한 한광을 뿌리며 파고들었다.
철저한 고덕의 보살핌 속에서도 후량의 상처는 점점 많아졌다. 미처 막지 못해서, 또는 상대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해서 허용한 공격이 잦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후량을 노리는 이들의 능력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이것들이 정말로 해보자는 거지.”
하자고 들면 못할 것도 없다. 숨겨진 무공이 아니라 이미 드러냈던 것에도 몸서리쳐지도록 무서운 무공이 있었다. 다만 그 진체를 드러낸 적이 없을 뿐.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가다간 후량을 잃을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자,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국중경의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으아악-”
비명 같은 외침의 끝에 핏빛 칼날들이 일제히 솟구쳐 올랐다. 수십, 수백… 백여 장 이내에 발을 들인 무사들의 몸을 뚫고 뛰쳐 오른 혈인들이 그 잔인하도록 붉은 칼날을 빛냈다.
푸화확-
솟아올랐던 혈인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순간, 주변을 가득 메웠던 무사들의 신형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렇게 이백 장 내의 무사들이 제거되자 멀쩡히 서 있는 이들은 광범위한 혈인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심한 내공을 가진 이들뿐이다.
그동안 후량을 노리던 자들… 당황하는 그들을 향해 현월이 꼬리를 끌며 달렸다.
푸확- 쾅!
때론 가르고, 때론 폭발로 날려 버리며 현월이 고수들을 쓸어버렸다.
푸캉-
그 피의 잔치 속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그곳으로 시선을 돌린 고덕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한가락 하는 놈이 섞여 있었던 모양이로군.”
고덕의 관심을 받게 된 자는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고덕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이백 장이 단숨에 정리된 탓에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
결국 도주를 포기한 그는 기형 장도를 굳게 쥐곤 고덕을 향해 쏘아져 왔다.
상대의 도발에 명혼을 들어 공격을 기다리던 고덕은 이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기예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며 상대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후량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급히 명혼이 허공을 그었고, 놈은 어긋나는 공간과 함께 허리 어림이 깨끗하게 잘려 나갔지만 기형 장도가 후량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막지 못했다.
“허억-”
급히 몸을 튼다고 틀었지만, 자신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간 기형 장도를 바라보던 후량의 의식은 까맣게 멀어져 갔다.
뒤로 넘어가는 후량을 받아든 고덕의 눈은 다시금 새카맣게 몰려드는 무사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 * *
피로 길을 연다는 말이 있다.
후량이 정신을 잃은 다음부터 고덕은 그 말을 실현해내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기로 한 이후 경공을 발휘해 허공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마다 자신마저 무시할 수 없는 공격에 번번이 실패했다.
결국 상대의 노림수대로 고덕은 후량을 들쳐 업고 피로 길을 열어야만 했다.
광범위한 혈인도 세 번이나 주변을 휩쓸었다. 수십 개의 현월이 길을 내고 폭발해 수많은 무사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했지만, 아직도 몰려드는 무사들의 수는 천 단위를 가볍게 넘기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고덕은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생각을 버렸다. 조심스럽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후량을 내려놓은 그는 명혼을 중단에 두고 숨을 갈무리했다.
“큰 거 두 방, 그걸로 정리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절대로 이들로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허공으로 치솟을 때마다 날아들던 공격을 가했던 상대도 남았고, 저 너머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감을 퍼트리고 있는 집단도 남았다. 그들마저 돌파하려면 고덕은 내력을 아끼고 또 아껴야만 했다.
얼마 전만 해도 무섭도록 늘어난 내력이 부담스러웠던 고덕으로서는 헛웃음이 지어질 지경이었다.
그 웃음기가 입가에서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 사이를 길게 물들이며 노란 달무리가 들어섰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 웅성거리는 무사들 속에 길게 자리 잡은 달무리 속에서 현월들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튀어나온 현월들은 무서운 속도로 짓쳐 나갔다. 그렇게 질주하는 현월들이 마치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원을 그렸다. 거의 오십여 개의 현월들이 나란히 서서 무사들 사이를 질주하는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사나왔다.
현월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외마디 비명이 울리며 피가 솟구쳤다.
손이 잘려 나가는 사람, 다리가 잘려 나가는 사람, 재수 없이 정통으로 받아 몸이 세로로 쪼개지는 이들, 몸을 날려 피하다가 앞뒤로 현월을 받아 세 동강, 네 동강이 나 바닥을 뒹구는 이들까지 천태만상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 처절한 지옥도 속에서 혈인들이 그 잔인한 핏빛 칼날들을 드러냈다.
간신히 현월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자신들의 피로 이루어진 칼날들이 심장을 뚫고 튀어오르는 모습에 경악한 표정으로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콰과과과광-
그와 동시에 한 바퀴의 원을 그려 낸 현월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후두두두둑.
방금 전까지도 사람을 구성했던 육편들과 사지들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그 참혹한 광경 아래 제대로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번엔 숨어들었던 이들마저 모조리 현월들의 강기 앞에 제물이 된 모양이었다.
피와 육편들을 고스란히 뒤집어쓴 채 오연히 버티고 선 고덕을 치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맹호권 이략이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여의검존이 막아섰다.
“어찌…….”
“조금 더 기다려 보세.”
“예? 우리 외에는 더 이상 저 악마를 막아설 이들이 없지 않습니까?”
“기다려 보시게. 내 손을 써놓은 것이 있으니.”
여의검존의 말에 손을 내리는 이략의 시선으로 마치 땅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이들의 괴이한 모습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던 고덕도 자신의 주변으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기감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에 땅을 뚫고 올라오는 듯한 괴인들이 보였다.
“가지가지 하는군.”
쿵-
말끝에 진각을 밟는 고덕의 행동에 땅속에서 올라오던 괴인들의 입에서 비명과 함께 피가 토해졌다.
커헉-
상체만 내놓고 비틀거리는 이들의 머리 위로 노란 달무리들이 어리더니 현월들을 토해냈다.
쑤아악-
공간권의 묘리에서 튀어나오자마자 현월들은 무서운 소성을 이끌며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렇게 괴인들의 머리부터 파고든 현월들은 괴인들의 하체가 묻혀 있는 땅속에서 폭발했다.
퉁-
묵직한 소음과 함께 괴인들의 신형 주변의 흙이 반 자 정도씩 솟아올랐다. 양쪽으로 벌어진 핏덩이와 불룩 솟아오른 흙은 괴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여의검존은 머리를 저어버렸다. 지둔술을 극성으로 익힌 살수들을 저런 방법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여의검존이 몸을 일으켰다.
“자네 말대로 이제 우리가 나설 때인 모양이로군.”
차륜전의 핵심은 상대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덕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빼기 위해 준비했던 안배가 어그러진 이상 곧바로 움직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의검존이 움직이자 기다리던 이략도 손을 들었다.
순간, 주변이 일어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일어선 이들의 수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으나, 그들이 흘리는 기도는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거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절정을 넘어선 이들이다. 간혹 가다간 초절정에 발을 디딘 이들도 더러 있으니, 그들 백여 명이 뿜어내는 기세는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움직이자 고덕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제기랄…….”
한 주먹이 열 주먹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강호에선 좀처럼 맞아떨어지지 않는 말이기는 하다. 초극 정도만 되어도 일류 일백 정도는 버겁긴 해도 상대가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하물며 현경을 벗어나 막 자연경에 발을 걸친 검마에게 절정 백여 명은 분명 상대가 불가능한 숫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덕이 낯빛을 굳히는 건, 그들 앞에 서 있는 노 검호 때문이었다.
“위명이 쟁쟁한 검마를 보는구려.”
제법 격식을 갖춘 여의검존의 인사에 고덕은 차가운 조소로 답했다.
“넌 어느 집 개지?”
“이 작자가!”
곁에 서 있던 이략이 발끈해서 나서는 것을 손을 들어 제지한 여의검존이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허허, 개라……. 그저 사람들이 여의검존이라 부르던 이라오.”
“여의검존? 여의검존이라……. 기억에 없군.”
고덕이 마총에 들어서야 위명을 날리기 시작해서 출도하기 전에 모습을 감춘 사람이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하지만 상대는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치졸한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름값을 못하는 위인이로군.”
여의검존의 평가에 고덕은 그저 어깨를 으쓱여 보였을 뿐이다.
“글쎄, 무인의 값은 검이 말해주는 거 아니었나?”
“틀린 말은 아니지. 하면 시작해보겠나?”
“애들을 떼거지로 데려와서 하는 말로는 우습군. 만약 내가 싫다면 그냥 갈 생각이었나?”
고덕의 핀잔에 여의검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렇군. 하면 시작하지.”
“네 마음대로 하세요.”
고덕의 빈정거림을 참을 수 없었던지 여의검존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이략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츠팡-
가볍게 걷어내는 고덕을 향해 주변에 대기하던 불연대의 고수들이 본격적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불교 무학의 중심인 소림은 외가기공과 권법의 종가이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금강불괴도 소림의 역근경에서 출발했고, 강호에 널리 퍼진 대다수의 권법은 소림오권이 바탕이었다.
그런 소림이 마음먹고 길러낸 이들이 검을 들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츠캉- 차라라랑. 츠팡.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연속적으로 밀려드는 검격을 걷어내던 고덕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달마삼검이로군.”
세간에는 흔히 소림의 무공들은 달마가 구년면벽 끝에 창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달마가 창시한 소림의 무공은 단 네 개뿐이다.
역근과 세수, 그리고 달마삼검과 달마십팔수. 하면 소림의 자랑인 칠십이 종 절예는 무엇일까?
그것들의 태반은 달마 이전에 중원에서 유래되던 무학을 집대성한 것에 불과했다. 그 덕에 소림의 무공이 중원 무공의 본류라는 감투를 주워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절반은? 그것들은 달마의 뒤를 이어 소림의 방장이 된 고승들이 깨달음 끝에 남긴 절학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창시된 어떤 무공도 달마가 남긴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가 남긴 무학들은 모조리 사장되었다.
역근과 세수는 무학의 틀을 벗고 경전으로 여겨질 만큼 심오한 말들로 가득했고, 달마삼검과 달마십팔수의 무리는 지고한 이상을 나열해놓아 도무지 무공 구결이라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이전에도 신승이라 불리던 달마가 구 년이란 긴 시간을 면벽 수행을 한 끝에 얻어낸 깨달음이 담긴 무학이니 그 안에 든 무리가 어찌 깊지 않을까. 당연히 그것을 이어받아 익혀야 하는 이들의 고충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달마삼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일백 명이나 하는 이들의 손에서…….
“알면 네놈의 목숨도 오늘 끊어진다는 것을 알겠구나.”
이략의 호통에 고덕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달마삼검일 때의 이야기겠지.”
“뭐?”
당황하는 이략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고덕의 시선이 뒤로 물러나 불연대와 자신의 싸움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여의검존에게 향했다.
“너 정도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들이 익힌 달마삼검이 반쪽짜리라는 걸.”
고덕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던 여의검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거야……. 하지만 반쪽이라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남겨진 반쪽이 살예였으니까.”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여의검존의 답에 고덕은 피식 웃어 보였다.
“제법 머리를 굴렸어. 알면서도 그냥 두었다는 건 그 반쪽짜리가 필요했다는 말이겠지?”
고덕의 물음에 여의검존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였을 뿐이다.
그런 둘의 대화에 혼란을 느낀 이략은 손을 들어 불연대의 무사들을 뒤로 물렸다. 불연대의 무사들도 석연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던지 이략의 지시에 두말없이 따랐다.
“이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략의 물음에 여의검존은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자의 말대로 자네들이 익힌 달마삼검은 반쪽짜리일세.”
“저, 정말입니까?”
“그래. 군사가 그러더군. 소림의 고승들과 제갈세가의 석학들이 수십 년간을 노력했어도 건진 건 반밖에 없었다고 말이야.”
그 말은 이번 일이 벌어지기 이전, 그것도 수십 년 전부터 소림과 제갈세가가 달마삼검을 풀기 위해 협력을 해왔다는 뜻이었다.
소림의 진산지보 중 수위에 드는 달마삼검이 외인인 제갈세가에 공개되었다는 것도 놀라울 따름이지만, 그런 특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에 이략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저희가 익힌 달마삼검은 충분히 위력적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야. 그러니 나나 그대들에게 달마삼검을 전수한 소림의 고승들, 그리고 그대들의 성취를 도운 제갈세가의 석학들도 입을 다물었던 것이니까.”
여의검존의 설명에 의문이 해소되었던지 이략을 비롯한 불연대 고수들의 표정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고덕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웃긴 녀석들, 그 말에 곧바로 넘어가긴……. 자- 그럼 내 이야기를 풀어내보지.”
슈걱-
무언가가 움직인다고 느낀 순간, 불연대 고수들 대여섯 명의 목이 동시에 날아갔다.
놀란 눈으로 고덕을 바라보는 이략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고덕의 손속이 분명한데, 그의 검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놈! 무슨 사술이냐?”
“대체로 지들이 감당할 수 없는 무공을 대하면 백도 놈들은 그걸 사술이라고 우기더군.”
“그, 그러면 그것이 무공이란 말이냐?”
이략의 물음에 고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님이로군.”
싸늘한 고덕의 평가에 발끈하려던 이략은 여의검존의 말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그건 무당삼검?”
“네놈은 그래도 들은풍월은 있는 모양이군.”
고덕의 퉁명에도 불구하고 여의검존은 바짝 달아오른 표정이었다.
“저, 정말인가?”
“같으면서도 달라.”
“같으면서도 다르다……. 만류귀종… 지금 그걸 말하는 것인가?”
“만류귀종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만류귀종. 세상에 밥 짓기에 통달한다고 싸움 잘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 만류귀종은 다 헛소리인 셈이지.”
“하면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인가?”
“궁금해? 궁금하면 직접 알아봐.”
그 말의 끝에 당황한 표정의 여의검존이 뒤로 칠 장이나 미끄러지듯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