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장.말살(抹殺)-용서치 않다
관병조차 보이지 않는 성문을 지나 숙주현 안으로 들어선 후량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이건 마치 널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는 거 같네요.”
“그런 모양이다.”
“어떻게, 입구부터 조지면서 가볼까요?”
후량의 기대 어린 물음에 고덕이 핀잔을 주었다.
“일반인들도 많을 텐데 그들은 어찌하고?”
“그야…….”
말을 얼버무리는 후량에게 고덕이 말했다.
“관병이 없다고 그들이 일반인들까지 피신시켰을 리는 없는 일. 괜히 일을 크게 벌이지 마라.”
“예.”
풀 죽은 음성의 후량을 일별한 고덕은 평소처럼 성큼성큼 걸어 성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선 단리세가부터 가보자.”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지금처럼 위험이 도사린 상태에서 앞장을 선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 의미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고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런 둘을 지켜보는 눈들이 그들의 발걸음과 함께 이동하기 시작했다.
쥐 죽은 듯한 적막 안에서 정보는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호수 위의 백조가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기 위해 물속에서 정신없이 발을 저어야 하는 것처럼, 고덕과 후량이 이동하는 통로 주변을 제외한 후면 지역은 수많은 이들이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적막 속에 단리세가에 도착한 고덕의 입은 굳게 다물렸다.
“맙소사. 완전히 박살을 내놨네요.”
후량의 말대로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태워졌다. 오죽하면 단리세가를 둘러싸고 있던 담장마저 완벽하게 허물어져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폐허를 천천히 둘러보던 고덕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기세가 크군. 놈들이 시작할 모양이다.”
고덕의 말에 후량이 숨을 크게 내쉬곤 눈에 힘을 주었다.
직후, 마치 개미가 떼를 지어 움직이는 듯한 소음과 함께 수백의 무사들이 주변을 완전히 둘러쌌다.
절제된 발걸음과 일정한 보폭, 거기에 이동하며 거의 소음을 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려 뽑은 정예가 분명했다.
쿵-!
갑작스런 소음에 시선을 돌리니 정천맹의 깃발을 든 장년의 사내가 보였다.
“오랜만이오!”
오랜만? 일전에 자신을 보았다는 말인데, 우습게도 고덕은 기억이 없었다.
“날 아나?”
단순한 궁금증에서 물은 것이었는데, 상대에겐 단순하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크하하하! 역시 검마. 나 백도향 따위는 기억할 가치도 없다는 말이로군.”
백도향. 만도문의 부문주로 경지는 초절정의 극의다. 과거 안휘협가에서 거행된 아랑의 혼례 때 소란을 떨었던 이 중의 한 명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담담한 고덕의 말에 백도향은 한 서린 음성을 토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네놈이 문주를 죽인 것처럼 오늘 내 네놈을 발기발기 찢어죽일 테니까.”
이래서 강호는 머리가 아프다. 은원의 고리가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탓에 고덕의 음성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가능하다면…….”
“네놈이 언제까지 그리 태평한지 볼 것이다. 개문하라!”
백도향의 고성과 함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무사들이 일순간 뒤로 빠지며 일정한 형태를 그려 냈다.
무언가 진을 구성한다고 판단한 후량이 방해할 요량으로 뛰쳐나가려는 것을 고덕이 불러 세웠다.
“멈춰!”
“대협?”
이유를 몰라 돌아보는 후량에게 고덕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좌와 우가 빠지고 앞과 뒤의 폭이 좁다. 거기다 가을에 갑작스런 눈발이라면… 이건, 천룡환허진이다.”
천하 삼대기진엔 들지 못했지만 나름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진법들이 있다. 천룡환허진은 그런 진들 속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청성의 것이다.
이 진은 원래는 같은 이름의 보법에서 유래된 것으로 도가인 청성에 걸맞지 않게 음공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 탓에 이 보법이나 진법이 시전되면 주변으론 차가운 바람이 일거나 지금처럼 눈발이 날리기도 했다.
사실 고덕은 진법에 대해 그리 밝지 못했다. 원래부터 그의 사문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힘에 대한 탐닉뿐이다. 그 까닭에 자연의 힘을 끌어다 부족한 힘을 채우는 진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단 하나 있는 진법 파훼법이 무지막지한 도법 한 초식일까.
그런 고덕이 이 진법을 단숨에 알아본 것은 과거에 견식 할 기회가 있었던 덕이다.
고덕의 제지로 후량이 머뭇거린 그 짧은 시간에 두 사람이 서 있는 지역은 어느새 허허벌판의 형상으로 바뀌었고, 가늘던 눈발도 굵어졌다.
“제대로 걸린 모양인데요.”
후량의 걱정 어린 음성에 고덕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려든 놈들 중에 청성의 말코들이 섞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별로 나아진 게 없네.”
“예?”
“예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후량으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남긴 고덕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명혼을 들어올렸다.
부아아악-
엄청난 소음을 이끌고 내려쳐진 명혼은 결코 한 자루의 검이 내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풍압을 동반했다
그 무지막지한 풍압은 진의 내부만이 아니라 진의 외곽을 거세게 뒤흔들었다. 진을 구성하는 정천맹의 무사들이 거센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자 진도 함께 출렁거렸다.
그 작은 틈만으로도 고덕에겐 충분했다.
번쩍-
대낮에 달이 떠올랐다. 그것도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든 상현달이…….
쾅-
흔들린 중심으로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던 정천맹의 무사들을 짚단 베듯 베어버리고 하늘로 떠오른 현월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폭발의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현월을 구성하는 강기들이 조각조각 나며 그대로 정천맹의 무사들을 덮친 까닭에 수십 명의 무사들이 순식간에 너덜너덜한 시체로 변했다.
그 피바다 속으로 노란 달무리가 어리더니 고덕을 토해냈다. 시전자까지 이동시키던 북황의 공간권이 고덕의 손에서 부활한 것이다.
정천맹 무사들 속에 뛰어든 고덕의 손에서 명혼이 빛을 토했다.
쒜에에엑.
모골이 송연한 소성을 이끌고 튀어나간 것은 오로지 강기로 이루어진 현월이다.
파랗게 빛나는 달이 튀어오르며 피가 솟구쳤다. 그리고…
쾅-
달이 부서지면서 그 아래가 피바다로 변했다.
상황이 그러니 고덕의 검이 향하는 곳의 무사들은 몸을 피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다 보니 사람들이 엉켜 떼로 몰리는 경우가 생겼다.
순간, 고덕의 손이 그곳을 가리켰다.
푸확-
혈인이 그 핏빛 꼬리를 이끌고 일제히 솟구쳐 오르며 주인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목 언저리나 가슴 언저리가 폭발하듯 터져 오른 무사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핏빛 칼날도 무너지듯 쏟아지며 다시 피로 돌아갔다.
사방에 피가 낭자해지고 혈향이 진동했다. 그 안에서 고덕과 명혼의 움직임은 간결했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에 주변을 둘러싼 정천맹의 무사들은 몸살을 앓아야만 했다.
이건 잡으려고 달려들었던 일이 피하는 데만 급급하게 되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수뇌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들은 고덕의 눈에 뜨이는 족족 허리 어림이 어긋나며 죽어나갔다.
수뇌들의 죽음이 거듭되자 무사들을 효과적으로 움직일 지휘 계통이 무너졌고, 그것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일사불란했던 지휘마저 무너지자 정천맹의 무사들은 고덕이 모는 대로 밀리고 당기는 대로 딸려 왔다. 그 안에서 피의 양은 늘어가고, 시체의 산은 끝없이 높아져 갔다.
그 혼란 속으로 일단의 고수들이 날아들었다.
“개진!”
우렁찬 음성과 함께 주변이 자줏빛으로 가득 들어찼다.
“자전마도(紫電魔刀)!”
엉겁결에 소외된 채 고덕의 무위를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후량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절전되었다고 알려진 무공이 모습을 드러낸 까닭이다.
추차자자장.
명혼과 여덟 자루의 도가 충돌하며 서로를 밀어냈다. 그렇게 떨어진 고덕과 도복을 차려입은 여덟 도객들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자전도객이라……. 사라진 힘을 공동이 되찾은 모양이군.”
자전도객. 자전마도를 익힌 도객을 이르는 말이다. 도문인 공동에 마(魔) 자가 들어갈 정도로 거칠고 사나운 도법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다.
자전마도를 두고 혹자는 상고 무림 시대에 마도의 절대 고수 하나가 도문인 공동에 귀의하며 남겼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하지만, 정확한 연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흉명과 영명을 동시에 떨쳤던 자전마도는 이백 년 전부터 절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이이제마라, 악마의 도법으로 마두를 척결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원시천존의 안배라. 지금이라도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목을 늘이면 고통 없이 보내주겠다.”
수염이 허연 노도사의 말에 고덕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악마의 도법이라……. 자전마도가 악마의 도법이면 이건 무엇이려나?”
쫘자자작-
천천히 들어올리는 고덕의 손에서 명혼이 자줏빛 번개를 튕겨 냈다. 그 모습을 본 노도인의 눈은 경악으로 들어찼다.
“그, 그것은……!”
“자전마도를 공동에 남긴 이는 진체의 반을 숨겼다. 사문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였지. 원한다면 제대로 된 자전마도를 돌려주마.”
빠지지직-
명혼의 궤적을 따라 자줏빛 번개가 흘렀다. 마치 허공에 자주색 불꽃을 피워 올리는 듯한 멋진 광경이 연출되었지만, 결과는 참혹함 그 자체였다.
“크아아악!”
다가오는 번개들의 향연에 맞서 서둘러 도를 들어올린 공동의 자전도객들이었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휘감아드는 자줏빛 번개 속에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는 숯덩이들이 되어버렸다.
가치에 비해 너무나 어이없게 무너진 자전도객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주변은 어느새 텅 비어버렸다. 고덕이 자전도객들에게 집중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쌌던 정천맹의 무사들은 모조리 퇴각해버렸던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후량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다 물러간 걸까요?”
“글쎄…….”
감각은 여전히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기세를 느낀다. 그 말은 자신들을 노리는 정천맹의 안배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뜻일 터였다. 그 감각이 고덕의 발길을 불러들였다.
“어! 어디로 가십니까?”
갑자기 움직이는 자신의 뒤를 따르며 묻는 후량에게 고덕이 답했다.
“놈들이 부르니 가볼밖에.”
“혹시 유인이면 어찌합니까?”
“당연히 유인이겠지.”
“그, 그런데 가신단 말입니까?”
“호랑이 굴로 가야 호랑이를 잡을 테니까.”
“대, 대협…….”
후량이 걱정스런 음성으로 불렀지만 고덕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포기의 표정이 된 후량도 그 뒤를 따랐다.
단리세가의 폐허가 있던 곳은 넓은 공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덕과 후량이 들어서는 곳은 좁다란 길목이었다. 이런 곳은 절대 고수에게 유리한 지형. 왜 자신들에게 불리한 지역으로 불러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츠핏-
짧은 섬광. 다행히 고덕은 어려움 없이 피했지만, 반대편 건물 벽엔 무언가가 깊숙이 박혔다.
“염왕전…….”
염왕전은 당가가 상대의 목숨을 끊겠다는 일종의 처형 예고장이다. 그런 흉물의 이름이 고덕의 입에서 거론되자 후량이 바짝 긴장했다.
“저, 정말 염왕전입니까?”
“그래. 당가 애들이 준비한 놀이터인 모양이니 각별히 주의해.”
자신이야 만독불침에 어지간한 암기로는 상처 하나 입힐 수 없겠지만 이제 초극인 후량은 다르다. 이번 함정은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후량을 노린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고덕의 불편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량은 고덕의 뒤로 바짝 붙었다. 암기 공격에서라도 고덕의 도움을 받기 위한 행보였다.
자신의 뒤로 바짝 붙은 후량의 행동에 피식 웃어 보인 고덕은 다시 발길을 옮겼다.
츠팟, 추라라락-
적어도 대여섯 개의 암기가 폭사되어 왔지만 일부는 흘리고 일부는 잡아챘다. 손바닥을 펴 자신이 잡아챈 것을 확인 한 고덕이 무거운 음성을 토해냈다.
“비황석이다. 지금부턴 강행 돌파할 것이니 바짝 붙어 떨어지지 마라. 그리고 모공을 닫고 숨도 쉬지 말고.”
비황석은 당문이 하독을 하리라는 것을 상대에게 알리는 경고장이다.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행동이지만, 이런 과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인해 암습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당가가 백도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고덕의 경고에 후량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곤 멈췄다. 그것을 확인한 고덕의 발이 땅을 굴렀다.
혼자였다면 이깟 길목 숨 두어 번 쉴 정도면 지나갈 보법이나 경신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혹이 딸린 고덕의 속도는 후량에게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그 허점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고덕과 후량이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변 전체가 암기로 도배가 되었다. 그 속을 현란한 움직임과 손동작으로 돌파해가는 고덕의 귀로 이질적인 음향이 들려왔다.
추라라라락-
소음을 따라 시선을 위로 두니 골목길을 두고 마주 선 건물 지붕 위로 그물이 씌워졌다. 육각형을 그리는 그물코와 그곳에서 언뜻언뜻 비춰지는 녹색은 극독이 발라져 있음을 의미했다. 더구나 그물 중간 중간에 날카롭게 빛나는 갈고리들이 달려 있는 것을 보니, 사천당가의 육혼망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지붕 위로 도망간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 어이없었다.
스팟-
생각이 딴 곳으로 샌 탓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던지 암기 하나가 옷을 찢고 지나갔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사색이 되어 뒤를 따르는 후량을 생각해 반격은 접어두고 발길을 계속 놀려야만 했다.
그렇게 달리길 반 각. 골목은 여전히 끝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골목이 길어도, 또 후량의 경공이 딸려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상황을 인식하자마자 고덕의 발길이 멈추었다. 고덕을 따라 멈춰 선 후량은 다급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로서는 잘 가다가 왜 멈추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이다.”
-예? 진이라니요?
“반 각을 달렸다. 이렇게 긴 골목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때서야 상황을 이해한 후량의 눈이 커졌다.
-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후량의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고덕의 손에 들린 명혼이 한쪽 건물을 향해 현월을 토해내고 있었다.
부아아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비단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가 일었다.
하지만 현월을 집어삼킨 건물은 여전히 멀쩡했다.
놀라 휘둥그레지는 후량의 눈에 피식거리는 고덕의 입매가 들어왔다.
-소용이 없는데 왜 웃으시는지…….
의문이 가득한 후량의 전음에 고덕의 턱이 건물 아래를 가리켰다.
-피? 저거 피죠?
“건물이 피를 흘린다.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명혼에서 튀어나간 현월이 또다시 건물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건물 아래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은 배가되었다.
그 모습에 확신을 얻었던지 고덕이 명혼을 역수로 잡더니 그대로 허공을 그어버렸다.
스걱-
날카로운 절단음과 함께 공간이 비틀렸다. 그와 함께 집도 허리가 잘려 비스듬히 일그러졌다. 그곳을 향해 이번엔 현월이 달려들었다.
부악-
이번에도 비단 찢는 소리다. 하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건물이 무너지듯 사라지고, 그곳엔 십여 명이 넘는 당가의 무인들이 피바다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당가 놈들만의 작품은 아닌 모양이로군.”
당가에 이렇듯 특이한 진법이 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다시 말해 진은 다른 놈들이 설치했다는 말이 된다.
피바다에 누운 당가 무인들의 시신을 밟으며 고덕과 후량이 진을 벗어나자, 골목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이게 어찌……?”
빽빽하던 건물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허허벌판이 드러나자 놀라는 후량에게 고덕이 경고했다.
“입을 열지 마. 주변엔 아직도 독들이 질펀할 테니까.”
그 한마디에 후량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 큰 눈을 데룩데룩 굴렸다.
“재미있군. 골목이 사라지더니 이번엔 허허벌판이라…….”
그 말에 후량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하면 이것도 진이란 겁니까?
“당연하잖아. 숙주현 내에 이런 벌판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 말이야.”
그러고 보니 벌판은 지평선이 맞닿을 만큼 드넓었다.
-그나저나 저… 한계에 다가옵니다.
“뭐, 벌써?”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인 고덕의 물음에 후량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제가 귀식 호흡엔 젬병이라서…….
“모자란 놈. 이제부턴 정말 정신없을 거야.”
-예…….
풀이 죽은 후량의 전음이 주는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지막지한 기세가 고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산전수전 다 거쳤다고 자부하던 후량으로서도 이 정도로 엄청난 기세는 맹세코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후황-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공기가 밀려나가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의 끝을 잡은 고덕의 신형에서 여덟 개의 현월이 튀어나갔다.
부아아악-
또다시 비단 찢어지는 소음이다. 하지만 이번엔 이전과 다르다. 결과를 기다리지 않은 채 고덕의 신형에서 다시금 현월들이 무작위로 튀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코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현월의 서늘한 서기에 후량은 잔뜩 긴장한 채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더기로 현월을 쏟아부은 결과는 파괴적이었다.
사방에서 피가 흐르고, 도처에서 진이 무너져 파탄을 드러냈다. 그렇게 드러난 파탄 속으로 어김없이 현월이 날아들었다.
쾅- 콰광. 콰과과과콰광-
처음엔 한 곳, 그다음엔 두 곳, 이윽고 도처에서 드러나는 파탄마다 현월이 파고들어 폭발했다. 사방팔방에서 벽력탄이 터지듯 거센 폭발이 이어졌다.
폭발의 여력에 휩쓸린 당가의 무사들과 문인복을 차려입은 제갈가의 문사들이 폭발에 휘말렸다. 잘려지고 짓이겨진 그들의 일부분들이 도처에 흩날렸다. 그 사이로 붉은 피가 비가 되어 뿌려졌다.
그 중심에 선 고덕의 신형에서 느닷없이 엄청난 열기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불타올랐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고덕의 신형이 화염에 휩싸여 버렸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공격에 당한 줄 알고 놀라서 호들갑을 떠는 후량에게 고덕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삼매진화일 뿐이다. 퍼져 있는 독을 태우려는 것이니, 호들갑 좀 그만 떨어라.
고덕의 전음에 후량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으로 삼매진화를 일으켜 서찰을 태우는 사람은 많이 보았다. 아니,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그 정도라면 초극에 이른 자신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완전히 뒤덮을 만큼의 삼매진화라니……. 이건 극양의 열양공을 익힌 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후량의 놀람 속에 고덕을 휘감았던 화염이 차츰 수그러들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 대협…….
“이제 숨을 쉬어도 될 것이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평범한 거리로 변해 있었다. 물론 바닥을 흥건히 흐르는 피와 도처에 널린 육편 조각과 시신들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괘,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이유라도 있더냐?”
“아, 아닙니다.”
곤혹스러워하는 후량만큼 당혹해하는 이들이 또 있었다.
숙현루란 주루의 최상층인 오 층에서 멀리 보이는 고덕의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
“더 이상의 피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머릿수로도 안 되고, 전설에서 끄집어낸 무공도 무소용, 더구나 제갈가와 당가의 합작품까지 무용지물이니 방법은 이제 봉공뿐인가 합니다.”
독괴의 말에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는 것은 여의검존이었다.
“최선을 다해보리다. 그나저나 부탁했던 것은 어찌 되었는지……?”
“일반 무사 오천은 대기 중입니다만… 그들은 어디에 쓰실 요량이신지?”
“힘을 빼야 하지 않겠소.”
“힘이라시면…….”
“오천을 상대하자면 아무리 검마라도 지치겠지요.”
여의검존의 말에 독괴와 제갈천의 눈에 경악이 가득 찼다.
“그, 그러면 그들을 희생하실 생각이시란 말입니까?”
“값진 희생이 될 것입니다.”
“하, 하나…….”
자그마치 오천이다. 숫자만으로도 벅찬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단지 검마의 힘을 빼놓고자 한다는 말에 기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니지 않겠소이까?”
“하, 하나, 이 일을 두고 일어날 일이 두렵습니다.”
“우리가 제거한 마두의 무서움이 크게 부각되지 않겠소.”
“그렇긴 하지만… 저들의 사문에는 뭐라 할지도…….”
“대문파의 무사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소이다.”
사실이었다. 대문파에선 초기에 고덕을 둘러쌌던 일류와 절정의 고수들을 내놓는 것으로 입을 씻었으니까. 그들로서는 입으로 제마척사를 외쳐도 잘못되었을 경우 검마의 검이 자신들을 노릴까 전전긍긍하는 표정이 역력했었다.
그러고 보면 협의회로 대표되는 백도 사십 중문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오천의 일반 무사들은 모두 그들이 보내온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렇긴 합니다만…….”
“백도 사십 중문이야 예전부터 말만 많았지 영향력은 그다지 없는 이들. 이번 일로 감히 맹주에게 따져 물을 곳이 있겠소이까?”
오천을 때려죽일 만큼 강력한 마두를 잡은 맹주다. 다수의 일반 무사들을 잃어 전력이 깎여 나간 사십 중문이 그런 맹주에게 반발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거야…….”
충분히 짐작하는 일이니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독괴에게 여의검존이 말했다.
“그저 내게 맡겨 두시구려. 잘못되면 노부가 책임을 지고, 잘되면 영광은 맹주에게 돌아갈 테니 말이외다.”
“험험… 저, 정히 그러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못해 물러나는 독괴에게 여의검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맡겨 두시구려.”
그 말만 남겨 둔 채 천천히 객잔의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여의검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독괴의 눈엔 옅은 자괴감과 깊은 열망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