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장.불연대(佛緣隊)-분수를 모르다
그날 저녁 자신의 숙소로 찾아온 마뇌를 제갈상민은 정중하게 맞았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시오?”
마뇌의 물음에 제갈상민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방도 마음에 들고, 시비들의 교육도 상당히 잘되어 있더군요.”
“나름 신경을 쓴다고 한 것일 게요.”
“환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오. 중원을 양분한 관계이니 원래 이리 좋아야 하는 사이가 아니겠소.”
“맞습니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갈상민의 답에 마뇌가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말이구려. 그나저나 교주님을 설득하려다 보니 미진한 점이 있어서 말이외다.”
나라 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 이 정도 단체의 교섭이면 이것도 외교다. 당연히 말 속에 숨겨진 뜻이 많고, 도처에 함정이 서렸다.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제갈상민이었으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미진한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교주께선 우리가 한배를 탄다면 다툼의 근원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다툼의 근원이라……. 모호하신 말씀이군요.”
정천맹과 마교 사이에 산재한 다툼의 근원은 천하를 뒤덮고도 남을 정도다. 서로 죽고 죽이며 지내온 시간이 천년에 가까우니, 쌓여 있는 원한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던 탓이다.
“그리 모호한 일도 아니라오. 먼 과거의 일이야 어쩔 수 없다 하나, 최근에 가져간 본교의 앞마당은 내놓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앞마당이라… 혹시 청해를……?”
“맞소. 청해는 본교의 앞마당. 잠시 환란이 있어 신경을 쓰지 못했더니 그곳에 존재했던 본교의 이권들이 지금은 정천맹의 손에 있더이다.”
정확히는 곤륜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 곤륜은 적지 않은 피를 흘렸다. 마교의 이권을 지키는 이들도 당연히 마교의 고수들. 순순히 내줄 이들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그것은 곤륜의…….”
사정을 설명하려는 제갈상민의 입을 마뇌의 말이 가로막았다.
“설마 곤륜의 입장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라 믿소이다.”
아쉬운 것은 마교가 아니라 정천맹이다. 더구나 조건을 건다는 것은 정천맹의 제안에 마음이 있다는 뜻. 괜한 고집으로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릴 생각은 없었다.
결국 제갈상민은 자신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흐음… 해당 부분은 제 선에서 답을 드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로군요.”
“하면 어찌하시겠소?”
“제가 다녀온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전서구를 좀 쓸 수 있겠습니까?”
“전서구야 있소만, 정천맹으로 날아갈 전서구는 가지고 있지 않소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전서구는 있다. 정천맹에 잠입한 밀정들은 적지 않으니까. 그걸 아는 제갈상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이젠 폐쇄해도 될 만한 이에게 갈 전서구를 날려 보내시지요. 무사 귀환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럴 만한 전서구가 있는지 모르겠소만… 만에 하나 있다 한들 답신은 어찌 받을 생각이시오?”
“정천맹에도 이쪽으로 날아올 전서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에 마뇌의 표정은 살짝 굳었다.
“허허, 꽤 빠르구려.”
“그것이 업(業)인 이들이 있으니까요. 그들로서는 맡은 임무가 있으니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었겠지요.”
양측의 정보기관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말에 마뇌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지요. 이쪽도 무사 귀환을 약속하리다.”
“하면 전서로 보낼 서신을 준비하지요.”
“준비되면 호위 무사를 불러 서신을 전해주시구려. 하면 그가 무사히 보내드릴 것이오.”
“보셔도 무방합니다만…….”
“남의 글이나 훔쳐볼 정도로 자존심 없이 살진 않았소이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하여간 답신이 오면 말씀하시구려.”
“하면 그동안은……?”
“편히 지내시구려. 몇몇 금지를 제외하면 교내를 돌아다니는 데도 문제는 없을 게요. 안전 문제야 호위 무사들이 알아서 챙길 테니 걱정은 않으셔도 될 것이고 말이오.”
생각 이상의 말이다. 그간 외부인이라면 누구도 돌아본 적이 없는 마교의 내부를 둘러볼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꿍꿍이가 있겠지만, 얻는 것이 적지 않으니 감수할 수 있었다. 그 까닭에 제갈상민의 입가엔 꽤나 깊은 미소가 깃들었다.
“그리 편의를 돌봐주신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별말씀을…….”
돌아가는 마뇌를 바라보는 제갈상민의 표정엔 기대감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 * *
몇 시진 후, 마교의 심처에서 날아오른 전서응이 빠른 속도로 동남쪽을 향했다.
꼬리가 푸른 것을 보면 조선의 해동청이다. 사납고 빠른 까닭에 꽤나 비싼 놈이다. 오죽하면 하루에 천 리를 난다 해서 달리 천리응이란 별명이 붙어 있을까.
그 해동청의 아래로 산야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밤에 날아오른 해동청이 고단한 날개를 접은 것은 하루를 꼬박 날고서도 반나절을 더 날갯짓을 한 연후였다.
고루거각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나무에 앉아 반나절을 쉰 해동청은 날이 저물고 어둠이 내리자 나무를 떠났다.
진각은 열려진 창으로 날아드는 해동청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정례 연락일은 아직도 멀었다. 그런데 전서응이 날아들었다면 그건 한 가지뿐이다.
서둘러 전서응의 발목에 채워진 작은 전서통을 찾던 진각은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평소와 다르게 전서응의 양쪽 발에 전서통이 매달려 있었던 까닭이다.
우선은 평소대로 오른쪽 발에 달린 전서통에서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들었다.
“이, 이게 무슨……!”
서신을 읽는 진각, 아니 암영 삼십이호는 도무지 상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왼쪽 전서통에 든 서신을 정천맹의 군사에게 전하고 귀환하라는 명이 내려진 탓이었다.
그 말은 자신이 마교의 간자임을 드러내라는 뜻인데, 그러면서도 무사히 귀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서신 말미의 글귀는 좀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진각은 결국 왼쪽 전서통에서 꺼내든 작은 서신을 들고 방을 나섰다. 그로서는 상부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움직인 진각이 군사전으로 다가서자 은신해 있던 호위들에게서 경고가 날아들었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돌아가라. 이곳은 군사전이다.
호위의 전음에 진각은 숨을 고르곤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답을 했다.
“천마신교에서 온 전서요. 군사께 전하라는 명…….”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진각의 목에 겨눠진 검과 도의 개수는 정확히 여덟 자루였다. 날이 시퍼렇게 선 검과 도에 목을 내맡긴 진각을 바라보며 호위대의 수장인 염우가 천천히 다가섰다.
“천마신교라……. 마교의 개인가?”
“개라……. 뭐 그렇다고 해두지. 내게 내려진 명은 이 서신을 정천맹의 군사에게 전하라는 것이었고, 난 훈련된 개새끼처럼 뒈질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행하고 있으니까.”
태연한 진각의 모습에 이채를 머금은 염우는 그가 내민 서신을 빼앗듯 받아들었다.
“밀봉이라…….”
“왜, 독이라도 숨겨 놓았을까 봐?”
태연하다 못해 은근히 비꼬기까지 하는 진각을 바라보는 염우의 귀로 군사전에 배속되어 있는 밀영의 음성이 전음으로 전해졌다.
-이름, 진각. 내총관부 재화각 소속 서리로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는 이입니다. 정천맹에 몸담은 지는 십칠 년. 추천인은 종남파의 속가 제자인 가릉검호로 그와는 어릴 적에 동문수학한 동향 친구라 되어 있습니다.
밀영의 보고에 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누가 추천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상대가 정천맹에 몸을 담고 있던 기간에 놀랐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십칠 년이라니…….”
염우의 중얼거림에 진각이 피식 웃었다.
“근처에 밀영이라도 있었던 모양이군.”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뭐, 나도 그런 거 상관할 생각은 없어. 다만 그 서신, 그렇게 오래 들고 있어도 무방한 건지 몰라. 적어도 나 정도 되는 정보원을 폐기 처분하면서 전하는 것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일 텐데 말이야.”
진각의 말에 염우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서신으로 향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틀린 말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빌어먹을…….”
작은 욕지거리를 남긴 염우가 돌아서자 진각의 목에 무기를 들이댄 군사전 호위들이 다급히 물었다.
“대주, 이자는……?”
“잠시 잡고 있어. 군사의 명을 받아올 때까지.”
“아, 알겠습니다, 대주.”
수하들의 답을 들으며 군사전 안으로 들어선 염우는 탁자에 앉아 있는 제갈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소란을 피워 송구합니다.”
“아닐세. 자네들 덕에 내가 편안한 것을. 그래, 무슨 일인가?”
“그것이, 재화각의 진각이란 서리가 이것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리는 작은 서신을 바라보며 제갈천이 물었다.
“크기로 보아하니 전서인 듯한데……?”
“예, 군사. 그는 이것이 마교, 그자의 주장대로라면 천마신교에서 군사께 보낸 것이라 합니다.”
염우는 자신의 말에 제갈천이 크게 놀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제갈천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서신을 낚아채 가 종이가 뚫어질 것 같은 시선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흐음… 그자는 어찌했나?”
“누구… 진각이란 자 말씀이십니까?”
“맞네. 그자.”
“수하들에게 잠시 잡아두라 명해놓았습니다만…….”
불안한 듯 답하는 염우에게 제갈천이 명을 내렸다.
“정중히 대해주게. 날이 밝는 대로 놓아 보내야 할 테니까.”
“구, 군사!”
“놀랄 것 없네. 그를 무사히 놓아 보내야 저들에게 침투해 있는 우리 측 사람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기 때문일세.”
“그, 그럼 지금 마교와 소통을……?”
“쉿! 때론 알아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쯤은 자네도 잘 알겠지.”
“하, 하오나 이런 일은…….”
“맹주께서도 아시는 일이니 함구하게. 참! 나가면서 맹주전에 기별을 넣어주게. 내 바로 찾아뵙겠다고 말이야.”
맹주가 알고 있다는 제갈천의 말에 염우는 넋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염우가 방을 나서자 제갈천도 몇 가지 서류를 챙겨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 그의 급한 걸음은 예고대로 맹주전을 향하고 있었다.
* * *
잠자리에 막 들었다 불려 나온 독괴는 자신의 눈앞에 들이밀어진 서신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맹주님.”
“이게 가능하다니…….”
“저들에겐 아마 버거운 상전이었을 겁니다.”
“상전?”
“예. 새로 교주가 된 혈마마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가 바로 검마일 테니까요.”
“하면 배신이로군.”
“살아나가는 처세일 수도 있습니다, 맹주님.”
“처세라…….”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상과 달리 현실은 언제나 냉혹한 편이었으니까.
“일단 저들의 의중은 알았으니, 이번엔 우리 쪽의 문제가 남았습니다.”
“곤륜 말이로군.”
“그러합니다. 과거 마교의 것이었던 청해의 이권을 차지한 곤륜은 그것을 발판 삼아 최근에 욱일승천의 기세로 커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이권을 돌려주라면…….”
“나 같아도 길길이 날뛰겠군.”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문제를 풀 방법은 있는 겐가?”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언제나 답은 하나입니다.”
“설마 이번에도 곤륜을 버리란 말인가?”
놀라는 독괴를 바라보며 제갈천이 답했다.
“그렇다고 우리 손으로 곤륜에게서 청해의 이권을 빼앗아 마교에게 돌려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허허, 이런 낭패가…….”
기가 막혀 하는 독괴에게 제갈천의 설득이 이어졌다.
“우리가 눈을 감으면 마교가 알아서 찾아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현실적입니다. 또한 현재의 맹으로서는 그 문제에 있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 수단이기도 합니다.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맹주님.”
“만에 하나 돌려주지 않는다면?”
“마교는 검마의 일에 편승해 맹을 압박해올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자신들의 이권을 찾아가겠지요. 곤륜을 쳐서 말입니다. 문제는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더라도 여전히 맹은 곤륜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곤륜을 도와 마교를 상대하려면 맹도 주력을 빼내야 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맹의 주력이란 불연대뿐입니다, 맹주님.”
검마에게 휘둘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정천맹의 현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였다. 불행한 것은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것이다.
“불연대라……. 맹의 결정이 선다 해도 소림이 내놓지 않으려 하겠지?”
“그들의 존재 목적은 강호의 정의도, 곤륜의 지원도 아니니까요.”
제갈천의 말대로다. 자신들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불연대를 만든 소림의 의중은 복수에 있었다. 불자들이 무슨 복수냐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당금의 소림을 앞에 두고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면 답은 결국 그 방법뿐이란 건가?”
“맹주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제갈천을 한참 동안 바라만 보던 독괴가 포기의 음성을 토했다.
“자네의 뜻대로 하게.”
“하옵고… 마교에 나가 있는 밀영을 하나 불러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들이 이 서신을 보낸 것과 같은 이유때문인가?”
서두에 진각의 일에 대해 제갈천에게 들었던 까닭에 대번에 짚어내는 독괴였다.
“예, 맹주님. 가장 빠른 전달 수단은 그 방법밖에는 없는지라…….”
“하긴 이번 일이 시간에 쫓기는 일이긴 하지. 알겠네. 책임은 노부가 모두 질 터이니, 그도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명을 따릅니다, 맹주님.”
짧은 복명을 남기고 황급히 나가는 제갈천의 뒤에 남겨진 독괴의 눈엔 깊은 허무감이 들어 있었다.
* * *
우습지만 정천맹에서 날아오른 전서응도 해동청이었다. 그들로서도 가장 빠르고 안전한 통신수단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마교에서 날아간 해동청은 아니다. 그 녀석은 진각의 전각에 마련된 새장에 얌전히 들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정천맹의 서신을 받아든 마뇌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가져온 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누구? 자전마 일척? 그 살인마 자식 말이야?”
마뇌의 보고를 받은 혈마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예. 정말로 생각도 못해본 자입니다, 교주님.”
“애초부터인 거야, 아니면 포섭이야?”
“포섭입니다. 오 년간 정보를 빼내주면 신분을 세탁해주고 정천맹의 그늘 아래서 제법 큰 상단을 내어주겠다 했답니다.”
“미친놈들…….”
혈마의 입에서 욕설이 자동으로 튀어나갈 만도 했다. 마도인인 자신들조차 고개를 젓는 살인마 일척을 포섭한 정천맹의 이중적인 자세 때문이었다.
“백도 놈들이 원래 더 음흉하지 않습니까. 하니 그 일은 그쯤에서 잊으십시오.”
“그래야겠지. 빌어먹을 자식, 배…….”
배신이란 말을 꺼내려던 혈마의 입이 닫혔다. 자신이 그 말을 꺼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참담한 마음을 알기에 마뇌가 걱정스런 음성으로 혈마를 불렀다.
“교주님, 모두가 교와 교도들을 위한 일입니다.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후~ 그래야겠지. 자- 우선은 당면한 일에 집중하세. 그래, 저들이 동의를 해왔단 것이지?”
“예. 방법은 우리의 예상대로입니다.”
“하면 우리 스스로 곤륜에게서 이권을 찾아와라?”
“그렇습니다. 대신 정천맹은 그 사태에 눈을 감겠답니다. 물론 원색적인 비난은 하겠지만, 그것뿐이라는군요.”
마뇌의 말에 혈마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놈들의 지원만 없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한데 그놈들이 약속을 지킬까?”
“우리가 움직이면 저들은 광혈의 주인을 칠 생각인 모양입니다.”
“역량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로군.”
“맞습니다. 정천맹 내부에서조차 곤륜을 돕자는 말이 나올 수 없도록 시기를 맞출 생각인 모양입니다.”
“어차피 내친걸음, 그도 나쁘지 않겠지. 그래, 실행은 언제로 하자던가?”
“내달 초이레를 제시해왔습니다.”
“내달 초이레면……?”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마뇌의 답에 혈마가 안색을 굳혔다.
“배덕의 시간이 너무 가깝군.”
“교주님…….”
“아닐세. 그냥 해본 말이야. 그나저나 그 시간이면 전력의 이동엔 지장이 없겠나?”
“곤륜이면 만마대만 동원해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만마대면 마교 서열 오 위의 무력 단체다. 무사들의 수는 오천. 대다수가 이류라 불리는 일반 무사들로 구성되었다고는 하나 수뇌부엔 절정에 이르는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 까닭에 만마대는 언제나 마교의 전위부대였다.
“마령대도 내보내게.”
“마령대까지 나설 필요가…….”
“남의 것을 빼앗아 오자는 게 아니라 내 것을 되찾아오자는 행사일세. 어쩔 수 없이 피를 봐야 하긴 하겠지만, 그 피가 내 피일 필요는 없겠지.”
마령대는 만마대의 바로 위 서열인 전투 집단이다. 하지만 단 한 계단 차이라고 우습게 보면 큰 오산이다. 그들의 수가 비록 일천으로 만마대의 오분지 일에 불과하다곤 하나 그 일천이 모두 일류 이상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졌다.
더구나 일백은 상승의 일류로, 최종적으로 십여 명은 절정의 고수들이다. 그들을 이끄는 수뇌들은 초절정에서 초극에 이르는 고수들이니 결코 만만한 무력이 아니었다.
세간의 평가는 그들이 나서면 절정기의 남궁세가조차 하룻밤 새에 핏속에 잠긴다는 것이고 보면, 그들의 힘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교주님의 명을 따릅니다.”
마뇌의 복명을 바라보는 혈마의 눈엔 전투를 지시한 이의 긴장감보다는 무언가를 잃은 듯한 공허함만이 가득해 보였다.
* * *
비밀리에 마교와 정천맹 양측의 합의가 이루어진 지 보름, 천산산맥에선 일단의 마교 고수들이 은밀히 곤륜을 향해 움직였다.
비슷한 시각, 정천맹을 벗어나는 일단의 사람들이 목격되었다. 그들의 선두엔 검을 둘러맨 여의검존의 모습이 뚜렷했다.
양측의 정보 요원들은 해당 상황을 특급 정보로 분류해 긴급히 자신들의 수뇌부에 통보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정보들은 조용히 묻혔다.
그 까닭에 곤륜은 자신들의 앞마당에 불쑥 마교의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마교의 공격을 눈치채지 못했다.
또한 풍문조차 돌지 않은 조용한 이동 때문에 불연대의 급습을 당사자인 단리세가나 하포에 머물던 고덕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거친 격랑이 강호를 들이쳤다.
북에선 무너졌다던 마교가 발호하여 곤륜을 피로 씻었다.
남에선 이미 사십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던 여의검존이 불연대를 이끌고 단리세가를 박살냈다.
여전히 지난 상처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했던 단리세가는 여의검존이 앞장서고, 백 인의 절정 고수로 이루어진 불연대가 뒤를 받치는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살아서 도망친 이들을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피해는 극심했다.
거기에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루거각들은 화마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부서졌고, 드높았던 의기와 명예는 마도와 부화뇌동했다는 배신자의 이름으로 남았다.
* * *
언제나 말하는 것이지만 강호의 소문은 질주하는 말이나 창공을 나는 새보다도 빠르다. 단리세가의 일이 하포에 있던 고덕의 귀에 들어간 것은 사건이 있던 날로부터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무슨 소리야? 단리세가가 멸문을 당하다니?”
“지금 세간엔 불연대라는 정천맹의 전투 집단이 단리세가를 급습해 멸문을 시켰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왕팔의 말에 고덕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소문뿐인 거야, 아니면…….”
“제가 오는 길에 하오문에 들러 직접 확인한 겁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내뱉는 고덕에게 후량이 물어왔다.
“어찌……. 준비할까요?”
시골에 처박혀 농사만 짓는다는 것에 좀이 쑤셨던지 곁에 있던 후량이 먼저 나섰다.
“일없다. 가도 나 혼자 간다.”
고덕의 말에 실망한 표정의 후량이 물러나자 이번엔 협련이 나섰다.
“이번엔 그리 가볍게 생각하실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무슨 말이야?”
“이번 일, 아무래도 대협을 불러내려는 수작 같아서 그렇습니다.”
“날 끌어내려는 수작?”
“예. 단리세가와 대협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천맹입니다. 그런 곳이 단리세가에 손을 댔습니다. 그것도 가벼운 징치가 아니라 멸문으로 말입니다. 제 판단엔 대협에 대한 도발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 대한 도발이라…….”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놈들이 대협을 불러낼 때는 그에 합당한 준비가 갖춰져 있다고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정을 팠을 거라 그 이야기인가?”
“그럴 것입니다. 상대는 대협이니까요. 당연히 함정도 제대로 된 것을 준비해놓았을 것입니다.”
“제 놈들이 그래봤자…….”
비틀린 미소를 그리는 고덕에게 협련이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다.
“이번엔 다른 때처럼 가볍게 생각하시면 안 될 듯합니다.”
“왜? 무슨 낌새라도 있었나?”
“놈들이 조용했던 시간이 있었으니까요. 조용하다 갑자기 움직였다면 그동안 착실히 준비를 갖췄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준비를 했다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진 않아.”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그들은 상대인 대협의 능력을 잘 압니다. 그런 이들이 움직였을 때는 나름의 자신이 섰다는 반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고덕의 물음에 협련이 답했다.
“혼자 움직이지 마십시오.”
“하면 같이 가자?”
“예. 필요하다면 다른 곳에도 도움을 청하는 것도 좋겠지요.”
마교와는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고덕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내 일에 다른 곳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어. 그리고 네들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일별한 고덕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다 데려갈 생각은 없어. 후량만 데려가지.”
“후량만으로는 불안합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대협.”
협련의 무위는 화경이다. 십대고수와 동등한 무력이니 동행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고덕은 고개를 저었다.
“놈들의 손이 이곳이라고 안 미칠까.”
“서, 설마…….”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던지 협련의 표정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형님과 형수의 안위를 네게 맡기지. 황제를 지키던 실력을 제대로 뽑아내야 할 거다.”
고덕의 말에 협련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너와 팔이가 돕고.”
고덕의 말에 협련의 곁에 서 있던 묵린과 왕팔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길 내외는 고덕에게도 중요한 이들이지만, 자신들에게도 소중한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발할 인원이 정해지자 움직임은 빨랐다. 또다시 강호의 일로 집을 떠나는 고덕의 모습에 고길의 걱정이 한 바가지였지만, 고덕의 발길을 잡지는 못했다.
그렇게 고덕이 하포를 떠나던 날, 비둘기 한 마리가 하포 시내에서 날아올랐다.
전서구에서 서신을 풀어본 청년이 여의검존에게 보고했다.
“목표가 어제 오후에 하포를 출발했답니다.”
“걸려들었군. 대주도 준비를 해두게.”
여의검존의 말에 불연대의 대주로 선발된 맹호권 이략이 고개를 조아렸다.
“대원들을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지원 나와 있는 맹의 사람들에게도 소식을 알려 주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봉공.”
봉공. 정천맹이 자신들의 일에 발 벗고 나서준 여의검존에게 감사의 의미로 내어준 명예직이었다.
그렇게 소식을 접한 불연대와 정천맹 사람들로 인해 단리세가가 위치하던 숙주 전체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모습은 며칠 후, 고덕이 지근거리로 접근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반 시진 만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모든 이들이 죽은 듯한 적만만이 감도는 숙주로 후량을 대동한 고덕이 들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