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장. 배덕(背德)-등에 칼을 꽂다
검마의 난으로 표현되는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정천맹은 아직 복수를 위한 준비를 끝마치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절강고가로 보냈던 사절단은 박살이 났다.
특히 고아랑의 시신으로 검마를 자극했던 남궁세가는 완전히 절단이 났다. 검마의 직접적인 공격에 세가의 중심 고수들이 몰살을 당하고, 수백 년의 역사를 품은 고루거각들은 잿더미가 됐다.
그 상황에서 구사일생한 일부 생존자들이 정천맹이 위치한 하남의 낙양까지 도주해와 세가의 재건을 부르짖고 있었지만, 검마의 복수를 두려워해 대부분의 생존자들이 숨어 있는 상태에서 그건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천맹은 절강고가의 문제를 놓고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의 선후를 떠나 정천맹의 사절단이 절강고가의 앞마당에서 검마에 의해 몰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 절강고가를 징치하러 나서기엔 걸리는 것 또한 너무 많았다.
우선은 백도의 입장에서 망자의 시신으로 상대를 자극하려 했던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 탓에 정천맹의 수뇌부들은 그 사실을 일절 비밀에 부쳤고,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 역시 철저히 막고 있었다.
“무사들을 보내 절강고가의 죄를 물어야 합니다.”
징치를 요구하는 이들의 면면을 살피는 독괴는 무거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들은 고아랑의 시신에 관련된 사안을 전혀 모르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절강고가에 죄를 묻기에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우선 그들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검마의 비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듯 제갈천이 반대의 입장을 들고 나왔으나 강경론자들은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저들이 직접 손을 쓰지 않았다고 죄가 없다는 말입니까? 방관도 죄요, 묵인도 죄입니다. 하물며 검마의 비호라니요? 그 말은 절강고가가 단리세가와 마찬가지로 마도로 돌아섰다는 뜻이 아닙니까?”
강경론자들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백도 사십 중문의 태두로 불리는 항산파의 문주 감응기였다.
항산파는 과거 한때엔 구파일방에 이름을 올렸던 적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길고, 진산절기의 깊이 또한 꽤나 깊은 문파다.
하지만 세월의 부침 속에 많은 진산절기들이 소실되고, 소위 절대 고수라 부를 만한 극강의 무인들이 배출되지 않으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백도 사십 중문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백도 사십 중문에도 강자는 있기 마련이다. 사천당가와 황보세가가 바로 그러한 강자였다. 항산파는 그들과 경쟁을 했지만 세가 위축될 대로 위축된 까닭에 언제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최근 들어 사천당가와 황보세가가 백도 사십 중문의 위치보다는 백도 팔대세가의 위치를 더 중요시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사천당가와 황보세가가 백도 팔대세가의 연합체인 세가 연합에 공을 들이면서 백도 사십 중문의 협의체인 협의회엔 소홀히 하게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최근에 들어선 백도 사십 중문의 수좌 자리는 언제나 항산파의 것이었다. 더구나 현재의 문주가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린 연후엔 항산파의 주장엔 이전과 다른 자신감과 힘이 실려 있었다.
“단리세가를 그리 말씀하시는 것은……?”
당황한 표정의 제갈천에게 감응기가 따져 물었다.
“왜요? 단리세가가 팔대세가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까?”
“어디에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마도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검마가 어디에 있던 누구인지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압니다. 그런 이와 교분을 나누고 그런 이를 위해 정천맹의 결정을 따르지 않는 곳이 마도이지, 다른 곳이 마도겠습니까?”
감응기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인 독괴가 불쑥 끼어들었다.
“하면, 그 말을 하북팽가에도 해보시오.”
“예?”
“하북팽가도 정천맹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있으니 그들에게도 해보라 그 말이오.”
독괴의 말에 감응기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천하의 도왕이 웅크리고 있는 하북팽가를 향해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인사는 없다. 그것은 감응기도 다르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기존 권력의 공백을 파고들어 욱일승천의 기세로 일어서는 항산파의 문주라고는 해도 팽가의 저력이나 도왕의 능력에 도전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흠, 험험…….”
연신 헛기침만 해대는 감응기에게서 시선을 돌린 독괴가 말을 이었다.
“절강고가의 일은 솔직히 어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군사의 말대로 그들에게 징치를 내리고자 해도 명분이 부족하고, 후환이 두려운 까닭이오.”
“하면 이대로 보고만 있자는 말씀입니까?”
강경론자들 중 또 다른 한 축인 설검문의 문주가 나섰다. 항산파만큼은 아니었지만, 최근에 설검문도 백도 사십 중문 중에선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단은 그리하고자 하오이다. 하나.”
자신의 뒷말을 기다리며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런 이들과 일일이 시선을 마주쳐 준 독괴가 말을 이었다.
“준비가 갖춰지면 기다림은 끝이 날 것이외다.”
“맹주께선 그 준비가 언제쯤 끝이 날 것이라 보십니까?”
설검문주인 엽춘의 물음에 독괴가 미소를 그려 냈다.
“이달을 넘기진 않을 것이외다.”
그 말에 장내엔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탄성이 차올랐다.
사람들이 돌아간 뒤 제갈천이 독괴에게 물었다.
“정녕 절강고가를 징치하실 요량이십니까?”
“준비가 갖추어져 검마를 제거한 다음엔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할 것일세.”
“하나, 그곳엔 추문이 존재합니다.”
고아랑의 시신을 이용한 것을 말함이다. 밝혀지면 백도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큼 민감한 일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징치가 이루어져야겠지.”
살인멸구를 뜻하는 독괴의 말에 제갈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길이 그것뿐일까요?”
“기호지세일세. 다른 길이 없질 않은가?”
독괴의 말에 제갈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준비는 어찌 되어가나?”
“여의검존께선 곧 마무리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로 검마를 잡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시던가?”
“불연대에 자신의 검이 더해지면 잡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냐고 오히려 되묻더이다.”
“하긴 백여 명의 기재로 이루어진 절정 고수에 여의검존이 더해진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하여 준비가 되는 대로 단리세가를 치시겠다 하시더군요.”
“단리세가라……. 검마를 불러내는 것인가?”
“아무리 검마의 사가가 드러났다고는 하나 민간인을 해칠 순 없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옳은 말이야. 더구나 요사이 관부의 눈치도 심상치 않고……. 단리세가를 두드리면 나오긴 하겠지. 나쁜 방법은 아니로군.”
“예. 그래서 맹 차원에서도 해당되는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함정인가?”
“검마에겐 죽음의 함정이 될 것입니다.”
제갈천의 장담에 고개를 끄덕이던 독괴가 물었다.
“그나저나 마교의 재건에 대한 조사는 어찌 되었나?”
“워낙 많은 수의 정보원들이 검마 주위에 배치되는 터라 늦어졌습니다만, 아무래도 소문은 사실인 듯싶습니다.”
“하면, 마교가 재건이 되었단 말인가?”
“신강 인근으로 조사를 나간 밀영들 중에 돌아온 이들이 없습니다.”
“마교가 건재할 때와 동일한 상황이로군.”
“예. 마교가 무너진 몇 달 전만 해도 밀영들에게 신강은 완전히 벌거벗겨진 채 내던져져 있었던 곳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완전한 사지로 돌변해버렸습니다. 그것을 감안한다면 마교가 다시 일어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하면 그들이 검마를 비호할 가능성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는가?”
독괴의 물음에 제갈천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감히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재건이 지금처럼 빠를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검마가 백도의 시선을 붙잡아둔 덕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면 여전히 한패일 수 있다는 소리인가?”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입니다.”
제갈천의 답에 독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누가 뭐라 해도 마교는 상대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십대고수니 제하이십사강이니 하지만, 마교 안에 감추어진 고수들이 풀려나올 때면 매번 그 분류가 일대 혼동을 일으킬 만큼 강력한 이들을 잔뜩 감추어둔 곳이 바로 마교였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과 검마가 여전히 한패라면…….”
“검마를 향한 우리의 복수는 백마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불리하겠지?”
“검마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큽니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의 태반이 검마의 손에 날아갔다. 거기에 백도의 한 축을 담당하는 팔대세가도 반신불수의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백마전쟁이 벌어진다면 백도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랄 것이다.
“어찌했으면 좋겠나?”
“사람들에게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그렇게 되면 검마에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일세.”
“그렇긴 하오나 이대로 진행한다면 자칫 감당할 수 없는 후폭풍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독괴가 물었다.
“마도 천하라도 걱정하는 겐가?”
“그건 어려울 것입니다. 마교가 중원에 마도 천하를 이룩하기 이전에 세외의 거센 도전을 받을 테니까요.”
세외엔 강자가 수두룩하다. 특히 포달랍궁과 북해빙궁은 중원 무림과 쌓은 원한이 적지 않았다.
“세외라… 틀린 말은 아니지……. 하나, 그렇다고 정보를 공개할 순 없네. 마교의 재건이 발표되는 순간 백도는 검마와 마교 양측의 압박에 숨도 쉬기 어려울 테니까.”
“하오면 일단 마교와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교와 대화를?”
“예. 마땅치는 않으나 지금은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긴 하겠지만…….”
망설이는 독괴에게 제갈천이 바짝 다가섰다.
“준비는 곧 갖춰집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결심을 굳힐 시간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맹주님.”
제갈천의 독촉에 한참 만에 망설임을 접은 독괴가 물었다.
“흐음… 보낼 사람은 있겠나?”
“군사전에서 사람을 보내보겠습니다.”
“믿을 만은 한 사람인가?”
“세가에서부터 제가 데리고 있던 아이입니다.”
“제갈세가의 사람인 모양이군.”
“그보다는 제 사람이라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의미심장한 제갈천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보인 독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실패할 경우 이야기가 흘러나갈 걱정은 없겠군. 좋네, 보내보게.”
독괴의 허락이 떨어지자 제갈천은 곧바로 움직였다.
제갈천이 군사전으로 돌아간 지 한 시진이 흐르고, 한 사람이 정천맹을 떠나 신강을 향해 길을 나섰다.
* * *
신강은 거친 땅이다. 남부엔 죽음의 대지인 탑리목 분지가 있고, 북쪽으로도 험난한 산과 거친 불모지가 대부분이다.
그 거친 땅의 서쪽 끝엔 마치 하늘에 맞닿은 병풍처럼 서 있는 천산산맥이 위치한다.
천산산맥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였다. 서역과 중원을 연결하는 비단길이 바로 이곳, 천산산맥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 탓에 이곳은 외지이면서도 막대한 부의 추적이 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로 인해 과거부터 강력한 군벌에서부터 토호, 무림 문파까지 수많은 세력이 진출을 노려왔으나 단 한 번도 장악에 성공한 전례가 없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천년 이래로 천산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는 한 무림 단체 때문이었다.
천마신교. 흔히 중원인들이 마교라 부르는 무림 단체가 천산산맥에 자리를 잡은 이래로 천산산맥과 신강은 그들의 권역으로 인정되어왔다.
그 강력한 마교는 최근 깊은 상처를 입고 다시금 일어서고 있었다.
“누가 왔다고?”
천마전의 중앙, 태사의에 앉아 있던 혈마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정천맹의 사절이라 합니다.”
“정천맹의 사절이란 놈이 이곳에 왔다고?”
“예, 교주님. 어찌하올지……?”
수문전에서 달려온 수하의 답에 혈마의 시선이 배석해 있던 군사에게 향했다.
“마뇌는 어찌 생각하지?”
“놈들은 아마도 광혈의 주인을 노리는 모양입니다.”
광혈의 주인. 천마신교를 떠받드는 두 개의 기둥 중 힘의 주인을 뜻한다. 당대의 전인은 검마. 마교로서는 그를 지칭하는 데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의 영광을 단숨에 때려 부순 적으로 칭할 수도, 그렇다고 이미 그가 버린 부교주의 직함으로 부르기에도 마땅치가 않았다. 하물며 자신들의 재건에 방파제가 되어준 은인으로서 부를 수도 없는 상황이니, 아쉬운 대로 그의 출신을 거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호칭이 바로 광혈의 주인이었다.
“광혈의 주인이라……. 부교주, 아니 검마 대협을 노린다? 제깟 것들이 감히! 허, 개가 웃을 노릇이로군.”
어이없어하는 혈마에게 마뇌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면, 마뇌는 놈들이 대협을 잡을 수 있다고 보는가?”
“놈들로는 어렵지요. 하나 제 삼의 세력이라면 가능하리라 봅니다.”
“제 삼의 세력이라……. 전 교주님을 시해한 놈들 말이로군.”
“예. 그들이라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니까요.”
“아무리 놈들이라고 해도 대협의 능력은 천외천이야. 알지 않나?”
혈마의 부정에 마뇌가 설명을 이었다.
“현경의 중간을 밟고 계셨던 전 교주님을 소리 소문 없이 제압해 가두었던 능력자들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건재한 상태에서 말입니다.”
“건재는 아니지. 참마대와 마검대가 부재중이었으니까.”
천마신교가 배출한 가장 강력한 고수는 누가 뭐라 해도 시조인 천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보면 검마와 비견될 만큼 강력한 이가 배출된 적이 없었다.
그런 검마가 키웠던 이들이 참마대와 마검대였다. 흔히 그 둘을 투입하면 소림이나 무당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말이 돌았었을 만큼 그들의 전투력은 가히 최절정이었다.
“그렇긴 하오나 그들은 논외의 대상입니다.”
“전 교주께서 해오신 일 중 가장 큰 실책이 광혈의 주인을 내보내며 그 둘을 제거한 일이야. 통탄할 노릇이지.”
“하기에 논외란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자신 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혈마를 바라보며 마뇌가 말을 이었다.
“수만의 고수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상황에서 전 교주님을 조용히 침몰시킬 정도의 능력자들인 이상, 놈들이 마음만 먹고 함정을 판다면 광혈의 주인을 도모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뭐,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자네 말이니 그렇다고 해두지.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제 삼의 세력이 가진 능력이지 정천맹, 저 백도 떨거지들이 가진 능력이 아니란 말일세.”
“그들 속에 이미 제 삼의 세력이 녹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천맹과 광혈의 주인과의 싸움에 갑자기 끼어들을 수도 있겠지요.”
“마치 그래줬으면 하는 말처럼 들리는군.”
혈마의 물음에 마뇌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교주님.”
“자, 자네!”
당황과 놀람으로 얼룩진 혈마의 눈을 직시하며 마뇌가 말했다.
“놀라실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본교가 반석 위에 놓이기 위해선 그분은 사라져야만 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마, 마뇌! 어찌 그런…….”
“그리 의리만 따지실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본교가 재건되었다고는 하나 그 세력은 예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광혈의 주인에게 죽어나간 이들이 많다 하나 살아남은 전력은 분명 팔 할에 육박합니다. 한데도 교주님의 기치 아래 모인 세력은 오 할뿐입니다. 그 이유는 교주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뇌의 말에 혈마의 안색이 굳어졌다.
여전히 떠도는 삼 할의 전력. 그들은 일반 무사들이 아니라 수뇌들로 이루어진 절세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혈마가 내건 기치 아래로 모이지 않는 이유는 우습게도 두려움 때문이었다.
검마가 언제 돌아와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 검마란 잔혹한 이름이 주는 공포에 감염된 이들이었다.
검마를 죽이기 위해 직접 움직였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에 감히 검마가 살아 있고, 그 검마의 후원으로 재건을 선포한 혈마의 기치 아래로 모여들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없이는 진정한 천마신교의 재건도 불가능 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요사이 혈마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문젯거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하자는 겐가?”
“놓아야 합니다.”
“놓다니, 뭘?”
“검마란 동아줄 말입니다.”
마뇌의 말에 혈마의 안색은 숫제 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로서는 감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혈마에게 마뇌는 강력하게 권했다.
“놓아야 합니다. 놓아야만 본교의 재건이 완성됩니다. 재건이 완성되지 못한다면 본교의 미래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나 대협이 계시는 한…….”
“맞습니다. 광혈의 주인께서 돌아오신다면 나머지 삼 할쯤 돌아오지 않아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돌아오시겠습니까?”
“그건…….”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제자나 다름없던 참마대와 마검대를 베어버리면서까지 천마신교를 벗어난 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에게 교의 재건을 맡기며 돌아올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밝히기도 했었다.
“그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교주님.”
마뇌의 말에 혈마의 눈은 격랑 속의 조각배처럼 쉼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혈마에게 마뇌가 말했다.
“놓으십시오. 그분에 대한 믿음도, 그분에 대한 의리도, 그리고 미련마저도…….”
“미련이라…….”
“예, 미련입니다. 언젠간, 언젠간 돌아올지 모른다는 실현 불가능한 미련…….”
“후~ 정녕 그 길뿐인가?”
“예. 본교가 살기 위해선 그 길뿐입니다, 교주님.”
마뇌의 거듭된 청원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혈마의 입이 열린 것은 그로부터 한 시진이나 흐른 뒤였다.
“그를, 정천맹의 사절이란 이를 들이라.”
혈마의 명에 한 시진 전부터 엎드려 있던 수문전의 수하는 뒷걸음질로 천마전을 벗어났다.
그로부터 한 식경 후, 수문전 무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천마전으로 든 이는 생각 외로 젊은 청년이었다.
“제갈상민이 삼가 천마신교의 교주를 뵙습니다.”
정중한 포권에 태사의에 앉아 있던 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가의 사람인가?”
“지금은 정천맹의 사람입니다, 교주님.”
“지금은 정천맹의 사람이라……. 후후, 그래, 정천맹의 사절이니 그리 말할 수도 있겠지. 내게 전할 말이 무엇인가?”
“여기, 맹주님의 친서입니다.”
제갈상민으로부터 서찰을 건네받은 마뇌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혈마에게 올렸다.
마뇌가 올린 서찰을 펼쳐 본 혈마의 이마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공동의 적이라……?”
“무림의 정기를 흐리는 자이니, 백도와 마도를 가리지 않고 정리해야 할 사람이 아닌가 하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가 어디 출신인지는 알고 있는 것인가?”
“과거는 흘러가는 강물이라 합니다. 흘러간 강물은 되돌아올 수 없지요. 정천맹은 그가 현재 홀로 지내는 것으로 압니다.”
마교와의 관계는 교묘하게 비켜 나가는 언사였다.
“말솜씨가 꽤나 좋군.”
“그리 보아주시니 감사할 다름입니다.”
힐난이 될 수 있는 말도 감사의 답례를 하여 칭찬으로 못을 박아버렸다. 뛰어난 말솜씨를 보이는 제갈가의 청년을 잠시 바라보던 혈마가 물었다.
“그대는 우리가 그를 버릴 것이라고 보는가?”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인데 버리고 말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저나 정천맹은 그저 귀교에서 온갖 패악으로 강호의 정기를 흐리고 있는 그의 악행을 중지시키는 일에 도움을 주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거절한다면?”
“강호의 정기는 마도의 외면 속에서 정천맹이 홀로 바로 세웠다고 역사는 기록하겠지요.”
“후후, 역사라……. 그 역사 속에 정천맹이 남아 있지 못할 수도 있음을 알기는 하는가?”
“그것이 역사의 순리라면 정천맹은 피해갈 마음이 없답니다.”
슬쩍 내비쳐지는 것은 자신감이다. 혈마는 그 자신감의 근거가 신경이 쓰였다.
“정천맹이 홀로 그를 잡을 자신이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정천맹은 백도의 구심점. 정천맹의 힘이 백도의 모든 것은 아니니까요.”
“그 말은 다른 곳에서 손을 빌리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
“정천맹과 백도는 본디 한집이니, 빌린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교주님.”
제갈상민의 말에 그동안 듣고만 있던 마뇌가 끼어들었다.
“하면 이번 일에 나서는 것이 백도 전체란 말이오?”
“개개의 사정이 있는데 어찌 전체가 나설 수 있겠습니까? 몇몇 곳은 빠지는 경우도 있습지요.”
“만에 하나 우리가 끼어들지 않겠다면 어찌할 생각이시오?”
“힘을 보태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검마를 품에 안겠다는 것인지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린 그 일에 힘을 실어줄 생각 따윈 없소. 더구나 그분을 버리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
마뇌의 답에 눈을 반짝인 제갈상민이 답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더구나 백마전쟁이란 대흉사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니…….”
“맞는 말이외다. 마백전쟁이라……. 흉사지요.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은…….”
“옳은 말씀입니다. 맹주께서도 백마전쟁을 원하시지는 않습니다만… 혹 결정을 내리시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제갈상민의 말에 마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필요한 것이 어디 한두 가지겠소. 더구나 교주님의 의중은 여전히 의리에 있으니 내 교주님을 설득해보리다.”
버젓이 교주인 혈마가 자리한 곳에서 하는 말이다. 그 의미를 짐작한 제갈상민이 슬쩍 혈마를 일별하곤 고개를 숙였다.
“하오면 제가 답을 받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습니까?”
“뭐, 그리합시다. 긴 시간을 소요하진 않을 테니까.”
마뇌의 답에 제갈상민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려졌다.
“고마운 말씀입니다. 하면…….”
천마전에서 제갈상민이 물러나자 마뇌의 시선이 태사의에 앉아 있는 혈마에게 향했다.
“정천맹이 모종의 준비를 마친 모양입니다.”
“그 준비에 제 삼의 세력이 힘을 보탠 것 같은가?”
“말로는 백도라 하나 그 속이야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한데도 놓아버리란 말인가?”
“지금은 그리하셔야 합니다.”
“하면 제 삼의 세력에 대해선 어찌 대처하려고?”
“놈들이 백도에 손을 댔다면 그들은 조만간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전 교주님을 제압하고 본교를 농단한 놈들일세. 그들이 그리 쉽게 드러나겠는가?”
혈마의 걱정에 마뇌가 고개를 저었다.
“본교와 백도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다르다?”
“예, 교주님. 우리는 교주님의 명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상명하복의 체계가 확고히 잡혀 있습니다만, 백도의 경우는 복잡하니까요.”
“복잡하다? 하긴 정천맹의 결정이 나도 반기를 드는 문파들은 언제나 있어왔으니까.”
“맞습니다. 백도는 수십, 수백 개의 문파로 이루어진 탓에 제각각 잇속에 따라 결정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조율하다 보면 제 삼의 세력은 정천맹의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게 됩니다.”
“직접 손을 써야 하게 되는 탓인가?”
“그렇습니다. 정천맹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론 한계를 보이기 때문에 결국은 직접 손을 써야겠지요. 물론 비밀리에 손을 쓸 테니 처음 한두 개야 의문의 사고로 묻힐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감출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흠… 나름 타당성이 있는 말이로군. 그렇게 드러나면 백도의 공격을 받게 될 테고… 우린 어부지리를 노릴 수도 있겠어.”
“최악의 경우 연수(緣手)를 한다 해도 백도의 힘이 쇄진된 다음이니, 우리에겐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뇌의 말에 혈마의 얼굴에 긍정의 빛이 떠올랐다.
“좋아. 이미 마음먹은 일이니 결정대로 밀어붙이지. 문제는 저들에게서 얻어낼 것들인데…….”
“일전에 광혈의 혈사로 잃어버린 세력권이 꽤나 넓습니다. 지금은 재건에 박차를 가하느라 그냥 두었습니다만, 이젠 찾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청해의 상권을 말하는군.”
“그러합니다, 교주님.”
“지금은 곤륜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고?”
“예. 재빠르게 차지하고 나선 곳이 곤륜이었지요.”
청해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곤륜은 백도로선 마교에 대한 최전방 교두보인 셈이었다.
그 탓에 적지 않은 지원이 곤륜에 집중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선 버림을 받기도 했다. 그만큼 부침이 심했던 곤륜은 구파에 속하면서도 크게 세를 이루진 못했다.
그랬던 곤륜이 최근에 들어 부흥기에 접어들었는데, 그건 마교가 무너지며 무주공산이 된 청해의 상권을 모조리 장악한 덕분이었다.
마뇌는 지금 그 상권을 되찾아오자는 것이었다.
“마찰이 있겠군.”
“마찰 없이 넘겨준다면 더 좋을 것이고, 마찰이 일어난다면 최소한 정천맹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정도의 약속은 받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만 된다면야… 한번 맡아보겠는가?”
혈마의 권유에 마뇌가 고개를 조아렸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교주님.”
“잘해보게.”
그 한마디로 혈마는 검마의 등에 칼을 꽂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