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93장 (94/129)

제93장. 비수(匕首)-숨어들다

고덕의 단꿈은 깨어졌다.

아랑의 시신을 안치한 관을 마차에 싣고 떠나는 고덕을 고이현은 잡지 못했다.

점점 멀어지던 고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고이현은 눈을 떼지 못했다. 가슴 한편이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했던 까닭이다.

고덕의 단꿈은 깨어졌지만 고이현의 꿈은 이제 시작인 듯 보였다.

소문은 그 어떤 말보다 빠르다.

고덕이 사색이 되어 나온 왕팔과 후량을 만난 것은 절강과 복건의 경계 지역이었다.

“크흐흐흑.”

왕팔은 관을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했고, 후량은 풀죽은 표정이었다.

“형님은?”

고덕의 물음에 후량이 답했다.

“그게… 울지도 않으십니다, 대협.”

너무 답답하고 억울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슬픔조차 막아버린 것일 테니…….

“형수님은 어쩌고 계시나?”

“하염없이 우십니다. 쓰러지실까 걱정이 되어 노심초사 중입니다.”

고덕이 가르쳐 준 도인법으로 많이 건강해졌다고는 해도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더구나 내력을 쌓는 것도 아니고, 단지 건강을 위한 도인법이 주는 공능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한도회에선 연락이 있었던가?”

“저희가 나올 때까지는 없었습니다.”

아랑의 죽음을 가장 슬퍼할 사람들이 한도회에 있었다. 솔직히 고덕은 그들의 눈물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마차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대협은요?”

“난 안휘에 다녀올 것이다.”

안휘를 거론하는 고덕의 눈으로 불똥이 튀어나올 듯했다. 가는 이유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혼자 다녀오실 생각이십니까?”

“둘이 필요한 일도 아니다.”

고덕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함정도 생각해봐야만 했다.

“제가 호종하겠습니다.”

후량의 말에 고덕이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중간에 사단이 벌어지면 팔이 혼자서는 마차를 온전하게 집까지 이동시키지 못한다.”

“아! 알겠습니다. 하면 보중하십시오, 대협.”

고개를 끄덕인 고덕은 여전히 관에 엎드려 눈물을 멈출 줄 모르는 왕팔을 일별하곤 신형을 뽑아 올렸다.

바람이 불고, 고덕의 신형은 빛줄기가 되었다.

* * *

소문은 남궁세가에도 닿았다.

이미 일을 벌일 때부터 틀어졌을 때의 상황까지 대비해놓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남궁세가는 생각 외로 차분하게 움직였다.

곧장 세가의 무사들이 집결하고, 외방의 가솔들은 물론이고 분가해나간 제자들까지 끌어모은 남궁세가의 세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일반 무사의 수는 근 오천, 절정 이상의 고수도 오십을 넘길 정도로 많은 수가 모였다.

그들 사이로 남궁세가의 수뇌부들이 흩어졌다. 검존 정도의 초고수는 없어도 초절정에 이르는 고수들의 모습은 심심치 않게 목격되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도열해 있는 곳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다가오는 고덕의 모습을 확인한 남궁세가 무사들의 목울대로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긴장감은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긴장이 불러일으킨 흥분을 이기지 못한 무사들 중 일부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와 정문을 기점으로 늘어선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바라보았다.

천하의 거인이라는 검마를 대하고서도 기백이 죽지 않는 눈들이다.

다른 때 같았다면 기백이 서린 눈이라며 칭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감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뻔뻔한 것들.”

고덕의 말을 들었음인가. 수뇌들 중 한 명이 나서는 것을 고덕이 가리켰다.

푸확-

갑자기 솟아오른 피의 칼날이 주인의 몸을 뚫고 비상했다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가슴 어림이 너덜거리게 변한 시신 한 구가 자신의 피를 뒤집어쓰고 널브러진 모습은 전율 그 자체였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훑어본 고덕이 말했다.

“이제 시작하지.”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고덕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저, 저기. 위다. 위에 놈이 있다.”

한 무사의 고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능공허도. 허공을 마치 땅처럼 밟고 다니는 경이적인 모습에 탄성만 터트리던 이들을 독려하는 수뇌의 고함이 울렸다.

“궁수들은 활을 쏴라!”

무림 세가에 궁수가 있으면 얼마나 있을까? 삼십여 명의 궁수가 일제히 활을 당겼지만, 화살들은 허공에 떠 있는 고덕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다.

상대의 무능을 비웃듯 비틀린 웃음을 머금은 고덕의 손이 하늘을 향했다. 마치 하늘에 걸려 있는 상현달의 끝을 부여잡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늘 위에서 달이 쏘아져 내려오며 모든 것을 휩쓸었다.

수많은 이의 피를 빨고 지상을 달리던 날카로운 달이 화려한 불꽃과 함께 폭발했다.

쾅-

폭발의 여력에 휩쓸린 무사들이 처참하게 사방으로 튕겨 나가 뒹굴었다.

상현달이 베고 지나간 것은 일도 아니다. 폭발의 여력만으로 수십 명의 무인들이 육편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잘려 나간 사지를 잡고 피를 뿌렸다.

그 참경 속에서 고덕의 손은 다시금 하늘에 걸려 있는 상현달의 끝을 잡아갔다.

“마, 막아!”

누군가의 고함에 이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초절정 고수들이 튀어 올랐다. 아마 남궁세가가 가진 최강의 고수들이 모두 고덕을 향해 폭사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묘한 울림이 고덕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투두두둑, 푸드득, 퍽, 픽, 투퍽.

각양각색의 음색을 끝으로 날아오르던 이들의 신형이 허공에서 찢어지고 잘라졌다.

주인의 몸을 찢어발긴 피의 칼날, 혈인들은 주인의 목숨을 취하곤 이내 허물어져 핏물로 돌아갔다.

남궁세가 앞을 시신으로 산을 쌓고 피로 내를 이루었다.

고수들의 죽음은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고덕이 가리키는 곳곳에서 피가 터져 올랐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용기와 기백으로 버티는 것도 한도가 있는 것이다. 그 한도를 넘어서는 살육의 광기 앞에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무너져 내렸다.

일각에서 시작된 도주의 물결이 전체로 파급되는 데 걸린 시간은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대열이 흩어지고 무사들이 중구난방으로 도주하는 가운데에서도 피가 튀어오르고 사람이 죽어나갔다.

곳곳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올랐고, 그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수천의 사람이 단 한 사람을 피해 도주하는 광경은 장관이라기보단 참혹지경이었다.

도주하는 이들을 베고 찢고 짓이기며 들어가던 고덕의 시선이 일단의 무사들과 함께 오연히 버티고 선 남궁영호의 모습을 찾았다.

“오랜만이로구나.”

한때는 아랑의 시아버지였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을 죽인 원수일 뿐이었다. 그 탓에 입 밖으로 벗어나는 음성은 서릿발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오랜만이오.”

“따라갈 준비는 되었나?”

“그럴 생각도, 이유도 없소.”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를 남궁영호의 자신감에 고덕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그려졌다.

“마음대로…….”

말꼬리를 잡고 하늘에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파캉-!

생각지 못한 음향 뒤로 남궁영호의 앞을 가로막고 현월을 튕겨 낸 이의 모습이 보였다.

“누구지?”

“사람들이 일월검귀라 부르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마교의 호법이었다가 교를 배신하고 떠나 모습을 감췄던 전대 고수.

하지만 고덕에겐 사문을 배신한 변절자의 이름들 중 첫 줄에 올라 있던 이였다.

상대를 확인한 순간, 노란 달무리가 일월검귀 앞에 현월을 토해냈다.

추팡-

순간의 공격에도 반응하는 일월검귀의 속도는 상상을 불허했다.

방어에서 낼 수 있는 속도가 공격에서 발휘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일월검귀의 신형이 사라지는 순간, 고덕의 전면에서 강렬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차장-

단 두 번의 공수였지만 일월검귀의 쾌검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배신자들이 사문을 떠나며 실전된 능력 쾌검. 그 잃어버린 한쪽이 고덕의 심장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추팡-

의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가져다댄 검이 허공에 빛을 남기고 날아든 일월검귀의 쾌검을 차단했다.

일월검귀의 섬혼이 사문의 무공이라면 고덕 자신에게도 사문의 무공이 내려온다.

고덕의 움직임에 따라 일월검귀의 사면에서 달무리가 일어나고 동일한 수의 현월이 튀어나왔다.

차자장창-!

귀신이 곡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다. 폭발적인 기세를 안고 허공에서 튀어나간 현월 네 개가 일월검귀의 쾌검에 막혀 허공에서 사라졌다.

더구나 혈인도 먹히지 않는다. 상대의 내력이 고덕과 비슷하거나, 동류의 내공을 익힌 까닭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신의 고유 무공들뿐…….

고덕의 애검 명혼이 중단에서 상단으로 이동했다. 그 짧은 움직임에 일월검귀가 서 있던 공간이 어긋났다.

츠팟-

공간 자체를 베어버리는 고덕의 검을 가로막은 일월검귀의 쾌검이 중간에서 잘려 나갔다. 방어에 실패한 것이다.

그 모습에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문 고덕의 검이 다시금 허공을 따라 움직였고, 어김없이 일월검귀 주변이 어긋났다.

상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고덕의 공격에 직격당한 일월검귀의 신형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사람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노릇.

아니나 다를까, 고덕의 검이 허공을 가른 곳에서 삼 장이나 떨어진 지점에 멀쩡한 일월검귀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면 방금 전에 사라진 모습은… 이형환위.

너무나 빨라서 잔상이 실제처럼 남는다는 전설상의 경공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그 빠른 움직임에 감탄보다는 득의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고덕이다.

배신자들이 훔쳐 가지 못한 절기, 섬보(閃步). 섬혼과 한 몸인 섬보를 놓고 간 탓에 저들은 이형환위를 가져다 붙인 모양이다.

그 까닭에 자신에겐 이형환위를 능가한다는 단거리 경신공부가 남았다.

명혼이 상단에서 중단으로, 그리고 다시 하단으로 이동하는 순간 일월검귀의 신형이 흩어졌다.

그 순간, 고덕의 신형도 허공 속에 선을 그려 냈다.

퍽-

“컥.”

허공 속에서 들려온 소리와 함께 빠른 속도로 돌아가던 세상이 정지했다.

그리고 허공은 가슴에 피가 낭자한 일월검귀를 토해냈다.

“어, 어떻게……?”

“섬보. 설마 이형환위가 더 윗줄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고덕의 물음에 일월검귀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답은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했다.

심각한 내상은 내력의 균형을 깼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의 술법이 먹혀 들어감을 의미했다.

푸확-

갑자기 치솟은 핏빛 칼날이 일월검귀의 가슴을 뚫고 튀어 올랐다가 무너져 내렸다.

무엇이 억울했는지 일월검귀의 손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잡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었다.

털석-

그 손에서 힘이 빠지는 순간, 일월검귀의 몸에서 빠져나온 내기가 고덕을 덮쳤다.

그렇게 네 번째 공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불현듯 찾아온 공명의 끝은 피로 장식되었다.

짧은 공명으로 급격히 차오른 내력의 발출이 주위에 남아 있던 모든 것을 쓸어버렸다. 개중에는 도망갈 것이란 생각을 비웃듯이 끝까지 남아 있던 남궁영호까지 휩쓸렸다.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검존을 찾아 남궁세가를 뒤진 고덕은 심처에 위치한 그의 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검존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사죄’란 단 두 글자만을 남겨 놓았다. 그것이 도주한 생존자들의 목숨을 지켰다.

두말없이 몸을 돌린 고덕은 그렇게 남궁세가를 떠났다.

그것으로 남궁세가는 몰락했다. 다른 곳에서 생존자들이 또다시 일으켜 세울지는 몰라도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 * *

남궁세가의 몰락은 강호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다.

일을 벌인 이가 그간 정천맹이 복수를 노려왔던 검마라는 이유인 탓에 파장은 더욱 커졌다. 더구나 홀로 남궁세가를 휩쓸어버린 일이 예전에 이루어졌던 해남검문의 혈사와 맞물리며 갖가지 억측과 추측이 난무해진 까닭에 소문은 부풀려지거나 왜곡되어갔다.

하지만 그런 수많은 소문들 어디에도 남궁세가를 돕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었던 일월검귀의 일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일은 마치 누군가 완전히 숨기려는 의도가 느껴질 정도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문의 홍수 속에서 여전히 절강고가에 머물고 있던 모용휘는 자신을 찾아온 사내를 바라보았다.

“둘째 숙부께서 보내셨단 말인가?”

“예, 소가주님. 소인은 밀기대의 부대주인 어호라 합니다.”

모용휘의 둘째 숙부인 모용후연은 모용세가의 비밀단체인 밀기대를 맡고 있었다.

대부분의 무문과 세가들이 비밀 무력 집단을 보유하듯이 모용세가도 밀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가 밖으로 드러나서는 곤란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니만큼 그 개개인의 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만나서 반갑네, 어 부대주. 한데 어쩐 일로……?”

“대주께선 소가주님의 안위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안위. 자신의 신변 안전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차기 권력에 대한 세가 내의 자리싸움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이미 경쟁자인 모용정추의 세력이 그만한 일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자리를 잡았다는 걸 뜻했다.

“아버님이 그것을 묵인할 거라 보시는가?”

“대주께선 가주님의 뜻이 이미 소가주님을 떠난 것 같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모용휘의 신형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아무리 입맛에 맞지 않는 후계자라고는 하나 그래도 자식이다. 어찌 자식의 목숨을 거두려 드는 이들의 손을 들어준단 말인가? 모용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리가 그리 중한 자리였던가……?”

모용휘의 자조 어린 음성에 어호가 고개를 숙였다.

“대주께선 소가주께 한 가지만 명심하라 이르셨습니다. 지금 소가주 자리를 내놓아도 살아날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살아날 수 없다? 이 소가주란 자리를 버려도 말인가?”

“예. 대주께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호의 말에 모용휘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숙부가 그리 말할 정도라면 모용정추는 후일을 생각해 자신의 생존조차 방관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면 어쩌라 하시던가?”

“자리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자리를 지켜라……. 나보고 형제와 피를 보란 말인가?”

“그것까지는 소인이 알 수 없습니다. 소인에게 내려진 임무는 그저 소가주님의 안위를 지키라는 명이었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무는 어호를 바라보며 묘용휘는 그의 능력을 가늠해보았다.

자신의 안위를 지켜 낼 것이라 판단해 보냈다면 최소한 절정, 또는 그 이상이란 의미가 된다. 그 정도의 호위를 거느린다는 것은 대단한 호사였다. 솔직히 가주의 호위대도 그만큼의 능력자는 호위대주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왕 왔으니 잘 부탁하겠네.”

모용휘의 말에 어호는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가주님.”

“일단 남의 집에 얹혀 있는 형편이니 인사를 해야 할 걸세. 따라오게.”

“예, 소가주님.”

자신의 뒤를 따르는 어호와 함께 모용휘는 우선 고일천을 찾았다.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 왔다.”

“소개해줄 사람?”

“그래. 이리 오게, 어 부대주.”

모용휘의 호명에 어호가 앞으로 나섰다.

“숙부께서 내 안위를 걱정해 보내주신 세가의 고수일세.”

“어호라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어호의 인사에 엉거주춤 포권을 취한 고일천이 답했다.

“고가를 대표해 환영하는 바입니다. 고일천이라 합니다.”

고일천의 답례 뒤를 모용휘가 이었다.

“이곳 절강고가의 소가주일세. 내겐 둘도 없는 막역지우지. 앞으로 나를 대하듯 대하면 될 걸세.”

“예를 다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호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용휘에게 고일천이 물었다.

“한데 갑자기 호위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걱정 어린 고일천의 물음에 모용휘가 답했다.

“정추 녀석이 살살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하면,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본가에 계신 둘째 숙부께선 내가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느끼신 모양이야.”

”둘째 숙부라면 모용후연 대협?”

“맞아.”

모용후연은 초극의 극의로, 제하이십사강에 이름을 올린 가주를 제외하고는 모용세가에서 가장 강력한 고수다.

경지는 초절정의 극의. 자연히 모용세가가 외부에 힘을 보여야 할 때 선봉에 설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러다 보니 외부에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 탓에 세가 내에선 비밀 집단인 기밀대를 맡기에 어렵다는 의견도 많았지만, 모용후연을 신임했던 가주의 결단으로 그가 기밀대의 대주가 되었다.

“그분이 그리 걱정을 했다면 기우만으로 그칠 일이 아니란 말이잖아?”

“그런 거 같다.”

“정추 그 녀석, 도대체 제정신이긴 한 거야?”

놀라는 고일천의 모습에 모용휘는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의 비호까지 받는 모양이니, 그 아이로서는 거칠 것이 없는 셈이지.”

“아버님까지… 흐음…….”

“일단 어 부대주와 함께 지낼까 한다. 괜찮겠냐?”

미안한 표정인 모용휘의 물음에 고일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다. 이미 골칫덩이도 세가 밖으로 나갔고. 난 네가 더 걱정이다. 조만간 정천맹 차원에서 무언가 움직임이 있을 텐데, 이곳에 머물러도 좋을지 말이다.”

살아 나간 사람이 없다고 진실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고덕이 정천맹의 사절단을 몰살시킨 일도 그랬다. 이미 강호 전체에 소문이 난 상태라, 절강고가로서는 싫든 좋든 그에 대해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절강고가에서도 할 말은 있다. 그 일이 생긴 원인은 어디까지나 가족의 시신을 가져와 검마의 심기를 긁은 남궁세가의 책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절강고가의 앞마당에서, 더구나 검마의 방문을 숨기고 있던 상황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절강고가로서도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조만간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것이 좋은 결말을 가져올지, 아니면 피를 보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져올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난 이곳이 아니면 갈 곳이 없다.”

모용휘의 자조 어린 음성에 고일천이 답했다.

“팽 형님이나 이철에게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때?”

둘 다 좋은 벗이다. 하지만 속내를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기엔 마땅치가 않았다.

그것은 교분의 깊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이미 검마의 일에서 발을 빼버린 채 두문불출인 팽가에선 교분을 쌓은 팽호량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공산이 높았다.

그것은 당가도 마찬가지. 당이철이 아무리 가주의 차남이라 해도 정천맹주로 나간 독괴의 그늘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아마도 당가는 자신의 방문 자체를 거절할 공산이 높았다.

“어렵다는 거 알잖아?”

모용휘의 답에 고일천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조만간 정천맹이 움직일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왔다만, 좋은 꼴 보기는 어려울 듯싶어서 그런다.”

“하면 검마의 일을 절강고가에 물을 셈이란 말이냐?”

“아무래도 정천맹은 지난 일에 대해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것이 절강고가고?”

“뭐 우리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만, 상황이 어렵게 돌아간다. 자칫 피를 봐야 할지도 몰라. 그래서 네 안위가 걱정이다.”

절강고가의 문제에 모용휘가 휩쓸리는 걸 걱정하는 것이다. 자칫 혈사라도 벌어지면 그 와중에 횡액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더욱 걱정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용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추에겐 좋은 기회가 되겠군.”

“무슨 소리야?”

“굳이 손을 쓰지 않아도 잘하면 날 제거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모용휘의 말에 고일천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절강고가의 입장이 정말 그럴 수도 있는 상황으로 점점 몰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아버님껜 내가 말씀을 드리마.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다. 세가의 경계가 강화되긴 했지만, 열 포쾌가 도둑 하나를 못 잡는다는 옛말이 있으니까 말이다.”

“걱정하지 마라. 요샌 눈 뜨고 잠을 자고 있으니.”

모용휘의 농에 피식 웃어 보인 고일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여유가 있어 보기 좋다.”

“아직 철이 덜 든 탓이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하지만 그들의 뒤편에 시립해 있던 어호의 눈빛에 감도는 차가운 빛을 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모용휘와 어호를 그들의 숙소로 돌려보낸 고일천은 부친을 찾아 가주전에 들었다. 모용휘를 보호하기 위해 어호가 세가에 머물게 되었음을 알리고 허락을 얻기 위해서였다.

“네 말대로라면 휘 그 아이도 어려운 상황에 처했구나.”

“예. 해서 본가에 계속 머물렀으면 합니다만…….”

“그야 상관없는 일이다만, 세가의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는데 그 아이가 괜한 피해를 입을까 두렵구나.”

“그 부분은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감수하겠답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서 다른 곳으로 가기도 어렵겠지. 알겠다. 그리하거라.”

부친의 허락에 고일천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녀석… 그래도 제법 쓸 만한 아이였는데, 역시 모용세가와는 맞지 않았던 모양이로구나.”

“모용세가가 실수하는 겁니다.”

“글쎄… 그건 그들의 일이니 우리가 단정 지을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사람이 괜찮다고 세가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조금은 다른 이야기란 것을 고유장 자신도 한 세가를 책임지는 가주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깊은 속을 알아서일까? 아니면 그렇지 않아도 걱정거리가 많은 부친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일까? 고일천은 그대로 수긍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녀석……. 참! 일기대(一期隊)를 맡기로 했다고?”

“예. 총관께서 고가의 후기지수들을 모아 만든 일기대를 맡아달라고 하시기에…….”

“후기지수들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모자란 아이들이 많다.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게다.”

“소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나가 보거라.”

부친의 걱정을 뒤에 달고 가주전에서 물러나온 고일천은 말이 나온 김에 일기대가 모여 있는 일기각으로 향했다.

원래 일기각은 절강고가의 어린 후기지수들이 모여 친분을 도모하는 일종의 휴식처였다.

하지만 세가가 어려움에 처하자 그들을 한데 모아 일기대란 무력 집단을 만들고, 소가주인 고일천에게 맡긴 것이었다.

갑작스런 소가주의 등장에 일기각에 모여 있던 고가의 후기지수들이 잔뜩 긴장했다.

사적으로는 모두가 친척들이거나 고가에 충성을 맹세한 외부인들의 자제들로 적지 않은 친분을 쌓은 이들이었지만, 당금의 상황은 그런 사적인 친분으로 가늠하기엔 너무 어려운 시기였다.

자신을 보며 잔뜩 긴장해 있는 이들을 바라보던 고일천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인 줄 알겠다. 표정들 좀 펴라.”

고일천의 말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이 슬쩍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더불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조용했던 일기각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졌다.

“대주님을 뵙습니다.”

제법 어른 티가 나는 한 청년의 인사에 고일천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누가 보면 남인 줄 알겠다, 녀석아. 그냥 평소처럼 형님이라 불러.”

“그, 그래도…….”

“왜? 숙부님한테 주의라도 받았냐?”

고일천의 물음에 뒷머리를 긁적거린 고람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예. 아버님이 대주로 깍듯이 대하라고…….”

“됐어. 어른들 걱정은 걱정이고, 우린 우리 식대로 하면 되는 거다.”

“정말 괜찮을까요?”

“호칭이 무슨 상관이겠냐? 네 마음속에 내 명을 따르겠다는 결심만 있다면 호칭 따윈 아무런 상관도 없다.”

고일천의 말에 고람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형님의 명이라면 무조건 복종이죠.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고람의 답에 다른 이들을 돌아보며 고일천이 말했다.

“들었지. 람이와 같은 마음이라면 날 예전처럼 대하면 된다. 저기 구석에 박혀 있는 철이 녀석하고는 달리 말이다.”

고일천의 말에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구석에 서 있는 이철에게 향했다. 그는 총관인 이찬의 아들로 고일천과는 동갑내기 친우였다.

이철로서는 소가주란 직위에다 자신이 속한 일기대의 대주까지 맡은 고일천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일천이 자신을 지적하자 난감한 표정이 되었고, 그 모습에 모여 있던 후기지수들은 왁자하게 웃어젖혔다.

“자식이…….”

이철의 말에 고일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평소처럼. 그게 더 편하다고, 녀석아.”

“쳇, 멋있는 건 제 혼자 다 하는 녀석.”

이철의 말에 웃음소리는 조금 더 커졌고, 분위기는 확 풀어졌다. 그런 일기각의 문밖,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서 있던 이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잘하고 계시는군요, 소가주님. 그렇게 후기지수들을 품으십시오. 그들은 소가주님과 함께 고가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동량들이랍니다.’

고개를 주억거리는 이찬의 등 뒤로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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