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장. 혈루(血淚)-눈물이 마르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가장 당황한 것은 호송 책임자였던 남궁필이었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신을 흔들어 깨우려 애쓰기까지 했다.
“사인은 뭔가?”
맹주전으로 돌아온 독괴의 물음에 검안을 담당했던 정천맹의 의원이 답했다.
“자결입니다. 혀를 깨물었습니다, 맹주님.”
“혀를 깨물면 피가 많이 났을 터. 마차 밖에서 모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피가 흘러 마차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바닥에 옷가지를 깔아두었더군요. 더구나 사용하는 향이 독한 것이라 피 냄새를 맡기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여행하는 여인들은 평소보다 독한 향을 소지한다. 긴 시간 제대로 닦지 못하는 탓에 생기는 냄새를 향으로 막기 위해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그 독한 향이 뛰어난 내가 고수의 후각마저 막아낸 것이다.
“이거야 원. 사망 시기는 추정할 수 있던가?”
“죽은 지 하루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의원의 답에 제갈천이 끼어들었다.
“내내 갈등하다 정천맹이 지척으로 다가오니 목숨을 끊은 듯하군요.”
“그녀가 자신이 왜 이곳으로 오는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그건 아마 출발할 때까진 몰랐을 것입니다.”
“하면?”
“호송하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알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련한 이들을 호송대로 딸려 보냈다니. 검마의 손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후 검존이 다시 물러났다더니, 남궁세가도 망조가 들은 모양이로군.”
독귀의 신랄한 평가에 배석해 있던 남궁필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런 그를 슬쩍 일별한 독귀가 제갈천에게 시선을 주었다.
“계획이 틀어졌으니 이제 어찌했으면 좋겠나?”
“삼국지에 보면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속이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래?”
“예.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이번에 저희도 그 방법을 써볼까 합니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속인다. 흠, 가능은 할까?”
“다른 것은 신경 쓸 수 없도록 자극적으로 나가야겠지요.”
“자극적이라면?”
“죽일 것처럼 위협을 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독귀의 입가에 실소가 지어졌다.
“이거야 원. 시체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야 한단 말인가?”
“더 나은 방법이 없으니 달리 수가 없습니다. 맹주님.”
“허허, 하면 그 볼썽사나운 연극은 누가 하고?”
독귀의 물음에 제갈천의 시선이 멀거니 서 있는 남궁필에게 향했다.
“결자해지라 했으니, 남궁 대주가 맡아줄 것이라 믿습니다.”
제갈천의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떴지만 그뿐이다. 자신들의 죄가 있으니 거부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 결자해지. 좋은 말이지. 어떻게 하겠나?”
독귀의 물음에 남궁필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명하신다면 따… 르겠습니다.”
“정천맹에 속한 단체도 아니고, 남궁세가의 창궁검대에 내가 어찌 명을 내릴까? 난 그저 자네들의 결단을 바랄 뿐이네.”
한발 뒤로 물러나 버리는 독귀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남궁필의 고개가 숙여졌다.
“해보겠습니다.”
“해보는 걸로는 안 될 겁니다, 남궁 대주.”
제갈천의 말에 주먹을 꽉 움켜쥔 남궁필이 다시 답했다.
“하겠습니다. 아니, 해내겠습니다.”
남궁필의 다짐은 일견 필사적으로까지 보였다. 그에겐 어이없이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아오는 일이 될 것이었다.
계획이 서자 일은 급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먼저 아랑의 시신에 정천맹의 의원 둘이 꼬박 이틀을 달라붙어 방부 처리를 했다. 그 뒤로 밀영대의 인피면구 전문가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화장을 시켰다.
그 모든 절차가 끝난 아랑의 시신은 외부에서 보기에 절대로 죽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독귀가 놀란 표정을 지었을까?
완벽한 준비를 갖췄다고 생각하자 정의검대와 창궁검대가 아랑의 시신을 실은 마차를 호위하며 절강으로 향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누가 울고 누가 웃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정천맹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길 독귀나 제갈천은 바라고 또 바랐다.
* * *
대외 명칭은 절강고가 방문단, 내부 명칭은 절강고가 조사단인 이들은 정의검대 일백과 창궁검대 일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의 책임상 지휘자는 정천맹 소속인 정의검대주가 맡았고, 창궁검대주인 남궁필은 그를 보조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일행의 맨 선두에서 말을 몰던 정의검대주 홍종은 마차를 둘러싸고 뒤를 따르는 창궁검대를 슬쩍 일별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정천맹을 떠나기 전 비밀리에 찾아온 군사가 내린 밀명을 떠올린 까닭이었다.
그런 그에게 수석 조장인 명현이 다가왔다.
“대주님, 명하신 대로 우리 무사들을 창궁검대와 완벽하게 분리하였습니다.”
“수고했네.”
“한데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뭔가?”
“어차피 같은 임무를 맡아서 가는 거라면 가는 동안 얼굴이라도 익히게 섞어두시지, 왜 분리를 하신 것인지?”
“그건 차차 알게 될 테니 지금은 그냥 접어두게.”
평소에도 불필요한 일은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던 대주다. 그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명현은 홍종의 말에 두말없이 물러났다.
그렇게 발길을 재촉한 일행은 여정대로 안휘로 접어들었지만, 남궁세가 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상황을 전서로 알린 데다 후속 절차에 대해 승낙을 얻은 상태였기에 굳이 들를 이유도 없었거니와, 과오만 남은 상태에서 귀가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일행은 곧장 안휘를 관통해 절강을 향해 동남진했다.
그렇게 길을 재촉한 까닭에 그들이 안휘와 절강의 경계를 넘어선 것은 낙양에 위치한 정천맹을 나선 지 보름 만의 일이었다.
* * *
절강고가는 지난 한 달 동안 같은 일과의 반복이었다. 세가에 끊어질 듯이 당겨진 긴장도 여전했고, 절강고가가 자리한 구룡산 전체에 대한 외부인의 출입 통제도 그대로였다.
그동안 고덕과 고이현의 변화는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세가 내에 흘러 다니는 소문에 의하면 보름 전에 검마가 혼인을 원한다고 가주에게 결정을 알렸지만, 고이현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탓에 세가 내에선 한동안 고이현을 원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이현이 결정을 내렸다는 말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조카들의 일에서 이제 손을 떼실 건가요?”
고이현의 물음에 고덕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끼어들어 엉망이 되어버린 조카들의 일상이었지만, 결코 나쁜 뜻으로 나선 건 아니었다.
더구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모두 거친 파도와 비견되는 일들뿐이니 상관하지 않고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글쎄.”
“제가 볼 땐 손을 떼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왜지?”
“일단 공자께서 개입해서 좋아진 경우가 드물잖아요. 안휘협가가 잘못됐고, 남궁세가로 시집간 조카 손녀마저 홀대받고. 이건 손대기 이전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잖아요.”
고이현의 말을 듣고 보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좋아지라고 끼어든 거지 나빠지라고 나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저도 모르게 잘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래도 복주상단으로 간 큰조카나 한도회의 막내 조카는 그런대로 괜찮다고.”
“그들은 그냥 두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요?”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왠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결국 고덕은 슬그머니 화제를 돌려 버렸다.
“저기 저 꽃 이름이 뭐지?”
고덕의 손짓을 따라간 고이현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왜요? 예쁜가요?”
“그냥, 마음에 들어서.”
“연산홍이에요. 꽃말은 첫사랑이죠.”
고이현의 말에 고덕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자신에게 첫사랑은 홍염수라 서영이었다. 그녀에겐 배신당하기도 했고, 종국엔 자신의 손으로 베어버렸다.
그래서 고덕에게 첫사랑은 꽤나 쓰고 슬픈 사랑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첫사랑의 상처가 큰가 봐요?”
“그냥.”
“흠,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이에요.”
“왜?”
“전 아직 첫사랑을 해보지 못했으니까요.”
“설마……?”
대부분의 첫사랑은 어릴 적에 시작한다. 친한 오빠, 아니면 자신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 정도.
“정말이에요. 모용 오라버니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지만, 결국은 며칠 못 가서 시들해졌거든요. 그러고 보면 공자님은 참 신기해요?”
“뭐가 신기하다는 거지?”
“제가 싫증을 잘 내거든요.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요. 그런데 공자님은 뭐랄까……? 마치 양파 같아요.”
“양파라. 좋은 소리야, 아니면 나쁜 소리?”
“글쎄요. 정의하기가 좀 애매하네요. 이건가 싶으며 또 다른 면이 튀어나오고, 이게 본모습인가 하면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제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을 선물하지만, 달리 보면 속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란 뜻도 되니까요.”
“결국 나쁜 쪽이로군.”
“에~ 그건 아니죠.”
“아니, 그게 맞아. 솔직히 내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으니까.”
고덕의 말이 의외였던지 고이현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요?”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가장 잘 알거든.”
“그럼 나쁜 짓을 많이 했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흠. 하긴 소문대로라면.”
뒷말을 잇진 않았지만, 그 안에 든 수많은 이야기들이 고덕의 뇌리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일들을 생각하며 어두워진 고덕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고이현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공자님에게 또 끌려왔군요. 아까 하던 말은 끝을 내야겠어요. 하여튼 조카들의 일에선 손을 떼세요.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이 있을 거예요. 공자님이 돕는다고 손을 대면 그 방식이 틀어지니까 결과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거라구요.”
“내가 손을 대서 틀어지는 거란 말인가?”
“좋게 바꾸어놓았지만 그건 조카들 본인이 만든 게 아니니까요. 그걸 유지할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맞닥트리면 역시 깨지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죠.”
“흠. 그럼 역시.”
“예, 손을 떼세요. 뭐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든가 안 도와 주면 죽게 생겼다면 모를까, 그 외에는 바라만 보는 것이 가장 좋은 도움이 아닐까 싶네요.”
어린 나이에 구김살 없는 것만이 장점인 줄 알았더니 꽤나 심도 있는 충고도 한다. 그 모습이 싫지 않았던지 고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어요?”
“내가 언제.”
“봐봐, 지금도 그렇게 웃잖아요.”
“내 웃음이 음흉해?”
“정말 몰랐어요? 공자님 음흉한 거?”
“처음 듣는 말이다.”
정말이다. 악독한 놈이란 소리는 많이 들어봤어도 음흉하다는 소리는 처음이었다.
“세상에. 밥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밀어주는 척하면서 손을 만지고, 걸을 때 안쪽으로 걷게 하는 척하면서 팔짱도 끼고, 무언가 피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은근슬쩍 안아도 보고. 공자님, 생각보다 음흉하다고요.”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모두가 고의는 아니었다.
“고의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음흉한 거죠. 생각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움직인다는 소리잖아요.”
“흠.”
다시금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이현의 비난(?)에 고덕이 궁지에 몰렸을 무렵 내원 무사 한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고이현의 물음에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인 무사가 말했다.
“대협을 가주께서 청하십니다.”
“날?”
“예, 대협.”
제법 의젓하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무사의 다리는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하기야 천하오존의 수좌를 눈앞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게 이상한 것일 터다.
더구나 고덕이 뿌려 온 것은 협명이 아닌 지독한 흉명. 그 탓에 고덕을 대하는 절강고가의 무사들은 절로 오금이 저리고 눈이 밑으로 깔아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유를 아나?”
“송구합니다, 대협.”
“알면서도 알려 줄 수 없어서 송구하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정말 모릅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대협.”
잔뜩 당황하는 무사의 모습에 고덕이 피식거렸다.
“그만한 일에 무슨 맹세씩이나. 알았다. 곧 찾아간다고 알려 드리게.”
“가, 감사합니다, 대협.”
마치 죽다 살아난 모양으로 뛰어가는 무사에게서 시선을 돌린 고덕을 고이현이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그렇게 놀려야 해요?”
“놀리긴 누가 놀렸다고.”
말이 뒤로 갈수록 힘을 잃었다. 그런 고덕에게 고이현이 핀잔을 주었다.
“강하면 그만한 책임도 뒤따르는 게 아닌가요? 약자를 위하고 존중할 줄 알았으면 좋겠어요.”
처음이었다. 연화와 다른 면을 본 것이.
“왜 웃어요?”
“그냥. 후후.”
“하긴 내가 좀 예쁘긴 해요. 그죠?”
언제 화를 냈었나 싶게 뽀로롱 달려와서 팔을 부둥켜안는 고이현의 모습이 싱그러워 보였다.
함께 가겠다는 고이현을 떼어놓은 고덕이 가주전으로 들자 고유장이 몇몇 인사들과 함께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대협.”
“찾으셨다고요.”
“예. 다름이 아니라 정천맹에서 사절이 방문한답니다.”
“정천맹에서 사람이 오는데 왜 제게……?”
몰라서 묻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신은 신경 쓰지 말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당황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그게.”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고유장을 대신해 이찬이 나섰다.
“그들이 통보를 보내온 것은 절강에 접어들면서였습니다. 그 이전에 보내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를 노린 것 같은데, 저희는 그것이 대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탓에 청했습니다.”
이찬의 말을 모두 들은 고덕이 물었다.
“한데 누구……?”
“이익!”
발작하기 직전의 이찬을 붙잡은 것은 양승이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해 답을 한 것은 소가주인 고일천이었다.
“세가의 총관인 이찬입니다. 벌써 세 번째 물어보십니다만.”
“그런가? 생각이 통 나지 않으니, 요사이 내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군.”
고덕의 말에 이찬은 머리에서 김이 나기 직전까지 끓어올랐지만 결국 폭발하지는 못했다. 그로서도 상대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그들의 목표가 대협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는 이찬의 말에 고덕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건 없어. 도전해오면 박살을 내주면 되고, 탐색이라면 욕을 한바가지 해주면 그만이니까.”
속 편한 고덕의 말에 이찬이 고개를 저었다.
“대협과 저희 절강고가가 함께 묶이게 된 까닭에 그런 대응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들이 노리는 건 나라면서 절강고가가 왜 묶인단 소리지?”
“대협은 엄연히 세가의 손님이십니다. 저희가 대협을 내놓지 않는 이상 끌려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은 나 때문에 엄한 경우를 당한다는 말이로군.”
고덕의 말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인 셈이다.
“이거야 원.”
고덕으로서는 기가 막힌 일이다. 자신과 엮여 좋은 꼴을 본 백도의 문파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시렵니까?”
고유장의 물음에 고덕은 달리 답할 말이 없었다.
“제가 떠난다면 괜찮겠습니까?”
“이미 이곳에 있는 것을 알고 오는 것이라면 대협이 떠난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없는데 물리력을 행사하진 않을 것이 아닙니까?”
“글쎄요.”
당금 백도의 분위기로 미루어 파악하자면 고유장의 말대로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떠나도, 남아도 바뀔 것이 없다면 내 대답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강경책입니까?”
“그리 살아왔고, 그다지 잘못 살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고덕의 답에 고유장과 다른 이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그리 놀랍거나 소란스러워지진 않았다.
하긴 천하의 검마가 정천맹의 사절에 놀라 끌려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면 저희도 준비를 갖추지요.”
“대응은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본가를 조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을 때부터 이미 오해는 쌓인 것입니다.”
생각 이상으로 빠른 고유장의 결단에 고덕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런 고덕이 보는 앞에서 고유장의 명령이 쏟아져 나왔다.
“구룡산에 흩어진 무사들을 불러들여라. 그리고 이 시간부로 비상을 선포한다. 세가 내 모든 무사들은 무장을 갖추고 숙소에서 대기하라.”
“명을 받습니다, 가주님.”
이찬과 양승의 복명이 유난히 커다랗게 들리는 고덕이었다.
* * *
절강고가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흩어졌던 무사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모두 싸움을 목전에 둔 사람들처럼 무기를 손질하고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절강고가에 정천맹의 사절단이 당도한 것은 해가 저물어져 가는 늦은 오후였다.
정천맹의 사절은 절강고가의 문지방조차 넘지 않았다. 절강고가의 정문에서 대략 이십여 장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사절단은 절강고가의 가주와 검마에 대한 면담을 청했다.
결례도 이만저만한 결례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그 요청에 응했다. 상황이 거절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난 대정천맹의 정의검대주인 홍종이라 하오. 맹주님의 명으로 전할 말이 있어 찾아왔소이다.”
“그래, 전할 말이 무엇이오?”
고유장의 물음에 홍종이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오?”
“난 고가의 가주인 고유장이라 하오이다. 하니 말씀하시오.”
고유장의 소개에 홍종은 가볍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명성이 자자한 섬전혼을 이리 뵙게 되어 유감이외다. 하나, 맹주의 명이 지엄하니 고 가주께선 이해해주시기 바라오이다.”
“이미 결례는 수도 없이 일어난 일. 그리합시다.”
고유장의 답에 고개를 주억거린 홍종이 말을 이었다.
“절강고가는 그 뜻을 확실히 밝혀라. 그대들은 백도인가? 아니면 마도인가?”
홍종의 물음에 고유장은 일말의 기다림도 없이 답했다.
“절강고가는 단 한시라도 백도가 아닌 적이 없소이다.”
“하면 마도의 인사를 숨겨 둔 저의가 무엇인가?”
“손님을 내칠 수는 없는 일. 예를 따른 것뿐이외다.”
“그 말에 거짓은 없는 것이오?”
더 따지고 들 것이라 생각했던 고유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만.”
“하면 내 맹주께 그리 전하리다.”
그 말을 끝으로 홍종의 시선은 고유장을 떠나 고덕에게 향했다.
“검마 대협이시오?”
원래대로라면 ‘그대가 검마요?’라고 물어야 했지만, 홍종은 살고 싶었다.
“맞다.”
“대협과 대화를 나눌 사람은 따로 있소.”
그 말을 남기고 비켜서자 마차 한 대가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을 벌이는지 몰라 지그시 바라만 보던 고덕의 눈이 갑자기 크게 뜨여졌다.
마차 문이 열리면서 두 무인에게 검으로 위협을 당한 아랑이 내려섰기 때문이다.
“네, 네놈들이!”
뛰쳐나가려는 고덕을 아랑의 목에 검을 겨눈 남궁필의 고함이 잡았다.
“다가오면 이년의 목을 벨 것이다.”
“네, 네놈들은……!”
무사들의 앞섶에 수놓아진 창궁 두 글자가 선명하다. 바로 남궁세가의 무사들인 것이다.
“맞다. 우리는 남궁세가의 창궁검대다.”
그 말의 후폭풍은 거세기 그지없었다.
창궁검대는 가주의 호위대.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은 지금 벌어지는 일이 남궁세가 가주의 뜻이라는 의미가 되고, 더 나아가 남궁세가의 의지라는 해석도 가능했다.
“죽일 놈들.”
분노에 떠는 고덕을 바라보며 남궁필이 고함을 질렀다.
“맹세해라. 남궁세가와 백도의 일에 앞으로는 절대로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일종의 면죄부를 받을 생각이다. 적어도 천하오존씩이나 하는 이가 말을 바꿀 리 없다는 걸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결론만 말한다면 그들의 생각은 맞았다.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들의 요구대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평생, 죽을 때까지.
문제는 이 분을 풀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 탓에 주저하는 고덕의 눈으로 아랑의 목을 반 치쯤 파고드는 남궁필의 검날이 보였다.
움찔하던 고덕의 눈에 이채가 들어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고덕의 시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랑의 전신을 훑었다.
그렇게 아랑을 살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덕의 눈가로 번져 나가는 경련이 심해졌다.
반 치쯤 파고든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것을 봐도, 또 전신 구석구석을 아무리 살펴도 아랑에게서 기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저 정도의 기감이라면 답은 하나뿐이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가슴의 꿰뚫는 듯한 통증으로 시작된 분노가 무섭게 들끓어 올랐다. 그리고 그 분노가 고스란히 담긴 흉성이 고덕의 입을 통해 뿜어졌다.
“죽인다!”
쾅-
단박에 거리를 줄인 고덕의 신형이 아랑의 시신을 위협하던 남궁필과 다른 무사 하나를 순식간에 내쳤다.
지지대가 사라져 힘없이 쓰러지는 아랑의 시신을 받아든 고덕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가, 아가, 눈을 떠야지.”
보랏빛 입술 위로 덧칠해진 붉은색이 숙조부 덕에 시집간다면서 재잘거리던 입술을 닮았다. 보석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뜨이지 않는 눈꺼풀 아래로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밝게 웃던 입가마저 굳어 싸늘했다.
싸늘한 조카 손녀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하염없는 부름이 얹혀졌다.
“아가.”
대답 없는 조카 손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고덕의 신형에서 무시무시한 경기가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가워서 소름이 돋을 정도의 한기 가득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죽여주마. 뼈를 부수고, 살을 발라 모조리 개 먹이로 던져 줄 것이다. 하늘에 맹세코, 남궁의 씨를 말려 주마!”
그 말을 끝으로 고덕의 신형이 빛살이 되었다.
컥- 크악, 아악.
무언가 희끗희끗한 잔상만이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잔상이 지나간 곳에선 어김없이 피가 치솟으며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신이 뒹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못했던 이찬이 정신을 차리고 나섰다.
“말려야 합니다, 가주님.”
이찬의 말에 고유장의 고개가 저어졌다.
“가주님.”
“어찌 말린단 말인가? 자네라면 참을 수 있겠는가?”
고유장의 물음에 이찬의 입이 다물렸다.
답은 이미 나와 있는 일.
결국 그들은 고덕이 이리저리 도주하는 이백의 무사들을 모조리 척살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다.